문화

큰 공간만이 대안일까?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1. 2. 9. 17:37

<김헌식 칼럼>큰 공간만이 대안일까?

 입력 2010.03.08 13:58 | 수정 2010.03.08 16:51

 




[김헌식 문화평론가]정말 작은 식당이었다. 식탁은 세 개. 그것도 식탁 하나에 두 명씩만 앉을 수 있었다. 식당은 점심시간만 되면 미어터졌다. 사람들은 줄을 길게 서서라도 그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다. 곧 유혹은 찾아왔다. 넓은 공간에 대한 유혹. 주변의 권유와 함께 드디어 벼르던 주인 아줌마가 식당을 확장 이전했다. 항상 줄서서 기다리던 사람들까지 모두 앉을 수 있게 한다면 정말 식당은 손님들로 그득할 것이었다. 그런데 식당은 썰렁했다. 줄서는 모습은 사라졌다. 

어떻게 된 일일까. 공간이 넓어지면서 오히려 사람은 적어보이고, 사람이 적어보이니 음식 맛도 없어 보였다. 북적이는 모습과 줄서는 모습이 사라지면서 손님은 더 늘지 않았다. 넓은 공간을 선호하는 분위기를 따르다가 낭패를 당한 식당 아줌마. 어디 그 아줌마에게만 해당될까. 잃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면서 우린 큰 것에 대한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좁은 구멍가게에서는 항상 시선이 부담스러웠고, 대형마트는 시선에 관계없이 행동의 반경이 자유롭다. 물건을 수십 번 들어다 놓았다 해도 시선에서 도망갈 구석은 많다. 구멍가게에서는 자신이 사려는 물건을 정해야 한다. 주인 아저씨가 시계를 들고 기다리는 듯하기 때문이다. 대형마트는 사려는 물건 목록을 정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머물러도 된다. 매장 직원의 말에 코웃음을 쳐도 설령 뭐라 할 사람은 없다. 밝은 조명에 경쾌한 음악, 화려한 디자인과 북적이는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은 삶의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꼭 대형마트에 가면 후회가 밀려든다. 생각하지 않았던 물품을 사게 되고, 더구나 싸게 파는 듯 싶지만 묶음으로 판매한다. 많은 물건을 알차게 산 것 같지만, 집에서 풀어보면 막상 허허롭다. 구멍가게에서는 필요한 물건만 사게 산다. 과소비란 있을 수 없다. 판매직원들은 우리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들은 매번 바뀐다. 매번 말 한마디라도 건네는 구멍가게 주인은 알아볼 뿐만 아니라 너무 많이 알아서 부담스럽다. 대형마트의 군중 속 침묵이 즐겁기도 하지만 더 고독하기도 하다. 

구멍가게는 하자가 있는 물건을 언제라도 바꾸어주는 대신 얼굴을 맞대는 사이인지라 속일 수 없다. 하지만 대형마트에서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니 결국 물건을 무료로 사용하고 반품하고 욕심을 방조한다. 돈 많은 대기업은 속여먹어도 된다는 악을 합리화 하는 이상한 심리가 발동하게 만든다. 구멍가게에서는 돈이나 카드가 없어도 외상이 가능하겠지만 대형마트에서는 절대 출입할 수 없다. 구멍가게가 많은 동네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없을 지라도 대형마트가 많은 지역에서는 충분히 그러지 않을까. 물건은 남아도는데 죽어나가는 사회가 이런 대형 공간의 사회이겠다. 

수직에 대한 선망, 무한정 하늘의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솟아오르는 고층빌딩의 다툼은 뉴타운 개발과 타워 팰리스 신드롬을 통해 극대화 되었다. 설악산의 단풍도 나무한 잎 한 잎이 모였고, 설원의 멋진 눈도 하나하나의 결정체가 모인 것. 실핏줄 같은 작은 동네 골목길은 도시의 생명이다. 이런 길은 사라지고 모든 것은 엘리베이터를 통하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는 수동적인 수직의 길로 통합되었다. 

동맥만이 있는 육체라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작은 실핏줄이 모이고 모여 생명체의 순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수직 건물의 문화는 비결정의 동네와 마을의 문화 대신 네모진 공간의 문화로 획일화되었다. 도시의 생명성은 사라지고 있다. 선망의 멋진 공간으로 들어간 작은 공간들은 화려해졌지만, 실속이 없음에도 이미 사라진 작은 공간을 살려놓지는 못한다. 

동네 책방이 어린이가 처음 세계의 문을 여는 문화의 공간이었다. 시골이나 달동네의 작은 책방이라도 언제나 그곳은 북 마스터(책방주인)가 책 길라잡이를 하는 공간이었다. 아이의 성장과 함께 독서의 궤적을 알고 있는 동네 북 마스터에 비해 대형 서점의 북 마스터는 베스트셀러와 광고의 공세에 더 쉽게 영향 받는다. 그들은 독자들이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모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책들이 다양한 선택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존재하는 대형서점에서 나에게 필요한 책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각종 포인트와 할인율로 싼 가격에 책이 배달되지만, 정작 그 책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아는 이가 없고 물어볼 사람도 없다. 이 때문에 때로는 누가 썼는지 모를 인터넷 서평에 장님 문고리 만지듯이 의존하게 한다. 그 와중에 검증된 작가와 베스트셀러에 대한 의존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승자독식의 문화에 기여하게 한다. 각종 이벤트와 문화공연을 통해 대형서점이 작은 책방의 인간적인 정과 대면의 문화 공간의 요소마저 가져가니 얄밉다. 

대형의 공간은 인간의 선택권을 넓혀주지만, 융합의 대형공간은 반대로 간다. 작은 극장의 소멸위에 탄생한 멀티플렉스는 공간 융합의 극치로 행동과 의식 작용을 최소화 한다. 그 공간에 대한 평가는 마치 ´귀차니즘의 천국´인 듯 ´편하다´는 말로 쉽게 표현된다. ´편함´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다른 능력을 제약 한다. 어떤 영화를 볼지 고민하지 않아도, 어떤 음식을 먹을지 움직이지 않아도 하나의 공간에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고민하고 의식이 없는 존재가 된다. 

선택할 수 있는 문화적 선택지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멀티플렉스는 이름과 달리 시간이 갈수록 결국 획일적인 공간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가 아니라 의식 없는 갈대로 만들고, 이미 만들어진 공간에서 즉물적으로 소비하게 만든다. 그러나 작은 극장의 공간이 속수무책인 바에야 멀티플렉스만을 욕할 수도 없으니 얄밉다. 

무엇보다 그러한 복합공간은 수많은 작은 공간들의 주인과 사장님들을 종업원으로 고용하고, 수직계열적인 조직의 하부 부속품으로 전락시켜버린다. 그 작은 공간의 수익은 오로지 소수의 사람들의 수익창출구조로 통하지만 정작 그들은 웬만한 수익에는 성이 차지 않는다. 그 적은 양이면 작은 공간의 주체들은 풍족하겠다. 작은 영화에게 한 상영관의 잃는 것은 치명적이지만, 대형 영화에게는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과 같다. '더 크게 되려면 작아져야 한다'는 역설은 다음과 같은 우화를 통해 드러난다. 

"큰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정말 알고 싶니?""알고 싶어요."허리가 잘록한 고무풍선 아니?""알지요. 그런데 고무풍선이 왜요?""한쪽을 작게 하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니?""그만큼 커지지요.""마찬가지야, 더 크게 되려면 자신이 무한히 작아져야 해." 들뢰즈의 리좀을 애써 말하지 않는다고해도 거대한 공간의 의미는 작은 공간에서 시작한다. 정말 큰 공간은 오히려 작은 공간에서 비롯한다. 노자의 역설하고도 관련이 있겠다. 욕망이 작을수록 우리는 정말 큰 공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큰 공간이 많아질수록 작은 공간의 소중한 가치는 더욱 크게 부각되기 마련이다. 작은 것을 더욱 작게 할수록 그것은 작은 것이 아닌 더 큰 의미를 지닌다. 

겨울이면 조상들은 감 하나를 남겨 두었다. 까치밥이다. 시인 김남주가 ´옛 마을을 지나며´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까치밥, 홍시는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조선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만약 수십 개의 홍시를 남겨두었다면 비례하여 의미는 반감될 것이다. 하나의 홍시는 수천 톤의 감이 하지 못하는 위대한 철학과 성찰을 담고 있다. 더구나 작은 감 하나가 구만리 장천의 봉황보다 사소한 까치를 의미 있는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공간의 문화가 이렇게 작은 생명도 존재가치를 주는 것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