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 칼럼>김연아 1등주의와 이규혁의 눈물
2010.02.24 10:08 | 수정 2010.02.24 10:13
[김헌식 문화평론가]스케이팅 신동 이규혁 선수는 경기가 끝난 뒤 가진 인터뷰에서 "압박감을 못 견뎠던 것 같다."라고 했다. 여기에서 압박감은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1등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비롯한 것이다. 20여년 동안 이규혁 선수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번 우승하는 등 스피드스케이팅의 한국 간판스타였다. 하지만 유독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해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본인이 밝혔듯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했기 때문에 실력 있는 선수가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했어도 시민들은 그에게 많은 성원과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이규혁 선수보다 모태범 선수를 더 잘 인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왜 이런 현실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동계스포츠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관심을 갖는 것은 동계올림픽 정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규혁 선수가 눈물을 흘린 맥락도 더욱 뚜렷하게 인식될 수 있다. 권위가 있는 경기에서 아무리 좋은 경기 결과를 많이 내어도 결과적으로 올림픽에서 한번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여기에서 올림픽이란 오랜 기간 세계적으로 중계 방송하는 것이다. 한국의 스포츠 문화는 엄밀하게 보면, 관람의 문화가 아니라 시청의 문화이기 때문에 전국민이 시청할 수 있는 경기에 나가야 확실하게 각인이 된다. 이 때문에 이번에 메달을 딴 모태범 선수가 이규혁 선수가 더 뚜렷하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에 관심이 없는 바에야 곧 모태범 선수도 잊혀질 것이다. 따라서 광고수입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대중적 기억은 연연할 대상은 되지 못한다.
한국에서는 1등만 기억한다고 하는데, 매우 큰 대회의 '국가 대항전'에서 1등을 했을 때만 기억한다.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정서에서 한국의 스포츠 관람문화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럴까. 1등만이 자신의 존재의 연장선인 한국이라는 국가를 세계에 알릴 수 있다는 집단적 감수성이 한국인들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포츠 종목을 평소에 즐기는 역량이 부족하다.
대상을 잘 모를 때 우리가 내릴 수 있는 평가 기준은 매우 협소해진다. 자신 스스로 평가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평가를 수용하게 된다. 상을 받거나 권위 있는 단체에서 좋은 평가를 내리면 그것을 선택하는 행태도 벌어진다. 영화에 조예가 깊은 이들은 반드시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거나 흥행 1위인 영화를 높게 평가하지만은 않는다. 자신만의 감식안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상이나 흥행 1위 여부에서 자유롭다. 문학이나 공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는 스포츠를 관람할 때도 마찬가지다. 진정으로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은 1등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생활체육이 일반화되어 있는 나라에서 잘 볼 수 있다. 한국의 엘리트 체육은 일상과 분리되어 1등주의만을 양산한 측면이 있다. 1등주의의 엘리트 체육과 국가주의의 결합은 스포츠와 시민들의 융합을 저해해온 측면이 있다. 더구나 많은 언론매체들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한 1등주의 스포츠 저널리즘을 통해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이러한 모순을 더욱 부추겨왔다.
최근에는 다른 양상이 되었다. 세계 대회 때만 이러한 전략이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연아라는 아이콘으로 이른 바 롱런 전략을 취하고 있다. 올해 동계올림픽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주로 한국 선수들이 금메달을 딸 가능성이 많은 종목들에 관심이 많다. 김연아 선수의 인기가 동계올림픽에 대한 관심도도 크게 증가했다. 이규혁은 "다시 태어난다면 이 힘든 스피드 스케이팅 안 하고 피겨스케이트 타겠다."라고 했다. 물론 피겨 스케티팅 선수들이 들으면 기분이 나쁠수도 있겠다. 피겨스케티팅은 쉬운 종목이라는 인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규혁 선수의 말에는 좋은 결과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인지도에서 밀리거나 외면을 받은 것에 대한 설움이 배어 있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김연아 선수를 둘러싼 상업적인 요소를 의식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결합한 1등주의가 김연아의 상품성을 높여주어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었다는 점 말이다. 이제 더욱 순수한 성격을 잃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이규혁 선수가 피겨스케이팅을 부러워했던 것은 그러한 점이 아니었을까. 한국적 현실에서 그러한 점을 비판만 할수는 없지만, 한국 스포츠의 일상 문화적 발전을 위해서는 장애 요인이다. 김연아 선수가 1등을 하는 것은 오히려 스포츠의 일상문화화를 위해 그렇게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엘리트주의 스포츠와 1등주의 스포츠 문화를 다시 양산하는 차원에서 붐만 일으키기 때문이고 일상과 스포츠는 유리되기 때문이다. '김연아 롱런 저널리즘'이 기승을 부리는한 이규혁 선수와 같이 눈물을 흘리는 이들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스포츠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 만화에서는 주인공들이 온갖 역경을 딛고 1등에 오르는 내용들이 많다. 하지만 영화 <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 이나 < 국가 대표 > 에서 주인공들은 1등을 하지 못한다. 과정 그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그 감동은 콘텐츠 자체에만 남겨졌다. 정작 이들 영화의 내용은 실제 경기에 대한 성원과 지지로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다. 점프 스키의 경우, 이번 동계올림픽에 대한 관심을 어느 정도는 불러일으켰지만, 추운 곳에서 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는 선수들이 많은 것이 아니다. 또한 1등을 하지 않은 선수들에게 막연하게 응원을 해주자라는 가치론적 접근만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앞으로 가능성이 많은 선수들을 감별해내고, 그들을 성원하고 밀어줄수 있는 시민과 저널리즘의 성숙한 눈이 필요하다. 국가와 민족이전에 무엇보다 스포츠 자체를 즐기는 스포츠 감수성과 몰입력이 우선이겠다.
왜 이런 현실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동계스포츠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관심을 갖는 것은 동계올림픽 정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규혁 선수가 눈물을 흘린 맥락도 더욱 뚜렷하게 인식될 수 있다. 권위가 있는 경기에서 아무리 좋은 경기 결과를 많이 내어도 결과적으로 올림픽에서 한번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여기에서 올림픽이란 오랜 기간 세계적으로 중계 방송하는 것이다. 한국의 스포츠 문화는 엄밀하게 보면, 관람의 문화가 아니라 시청의 문화이기 때문에 전국민이 시청할 수 있는 경기에 나가야 확실하게 각인이 된다. 이 때문에 이번에 메달을 딴 모태범 선수가 이규혁 선수가 더 뚜렷하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에 관심이 없는 바에야 곧 모태범 선수도 잊혀질 것이다. 따라서 광고수입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대중적 기억은 연연할 대상은 되지 못한다.
한국에서는 1등만 기억한다고 하는데, 매우 큰 대회의 '국가 대항전'에서 1등을 했을 때만 기억한다.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정서에서 한국의 스포츠 관람문화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럴까. 1등만이 자신의 존재의 연장선인 한국이라는 국가를 세계에 알릴 수 있다는 집단적 감수성이 한국인들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포츠 종목을 평소에 즐기는 역량이 부족하다.
대상을 잘 모를 때 우리가 내릴 수 있는 평가 기준은 매우 협소해진다. 자신 스스로 평가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평가를 수용하게 된다. 상을 받거나 권위 있는 단체에서 좋은 평가를 내리면 그것을 선택하는 행태도 벌어진다. 영화에 조예가 깊은 이들은 반드시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거나 흥행 1위인 영화를 높게 평가하지만은 않는다. 자신만의 감식안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상이나 흥행 1위 여부에서 자유롭다. 문학이나 공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는 스포츠를 관람할 때도 마찬가지다. 진정으로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은 1등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생활체육이 일반화되어 있는 나라에서 잘 볼 수 있다. 한국의 엘리트 체육은 일상과 분리되어 1등주의만을 양산한 측면이 있다. 1등주의의 엘리트 체육과 국가주의의 결합은 스포츠와 시민들의 융합을 저해해온 측면이 있다. 더구나 많은 언론매체들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한 1등주의 스포츠 저널리즘을 통해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이러한 모순을 더욱 부추겨왔다.
최근에는 다른 양상이 되었다. 세계 대회 때만 이러한 전략이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연아라는 아이콘으로 이른 바 롱런 전략을 취하고 있다. 올해 동계올림픽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주로 한국 선수들이 금메달을 딸 가능성이 많은 종목들에 관심이 많다. 김연아 선수의 인기가 동계올림픽에 대한 관심도도 크게 증가했다. 이규혁은 "다시 태어난다면 이 힘든 스피드 스케이팅 안 하고 피겨스케이트 타겠다."라고 했다. 물론 피겨 스케티팅 선수들이 들으면 기분이 나쁠수도 있겠다. 피겨스케티팅은 쉬운 종목이라는 인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규혁 선수의 말에는 좋은 결과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인지도에서 밀리거나 외면을 받은 것에 대한 설움이 배어 있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김연아 선수를 둘러싼 상업적인 요소를 의식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결합한 1등주의가 김연아의 상품성을 높여주어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었다는 점 말이다. 이제 더욱 순수한 성격을 잃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이규혁 선수가 피겨스케이팅을 부러워했던 것은 그러한 점이 아니었을까. 한국적 현실에서 그러한 점을 비판만 할수는 없지만, 한국 스포츠의 일상 문화적 발전을 위해서는 장애 요인이다. 김연아 선수가 1등을 하는 것은 오히려 스포츠의 일상문화화를 위해 그렇게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엘리트주의 스포츠와 1등주의 스포츠 문화를 다시 양산하는 차원에서 붐만 일으키기 때문이고 일상과 스포츠는 유리되기 때문이다. '김연아 롱런 저널리즘'이 기승을 부리는한 이규혁 선수와 같이 눈물을 흘리는 이들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스포츠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 만화에서는 주인공들이 온갖 역경을 딛고 1등에 오르는 내용들이 많다. 하지만 영화 <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 이나 < 국가 대표 > 에서 주인공들은 1등을 하지 못한다. 과정 그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그 감동은 콘텐츠 자체에만 남겨졌다. 정작 이들 영화의 내용은 실제 경기에 대한 성원과 지지로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다. 점프 스키의 경우, 이번 동계올림픽에 대한 관심을 어느 정도는 불러일으켰지만, 추운 곳에서 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는 선수들이 많은 것이 아니다. 또한 1등을 하지 않은 선수들에게 막연하게 응원을 해주자라는 가치론적 접근만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앞으로 가능성이 많은 선수들을 감별해내고, 그들을 성원하고 밀어줄수 있는 시민과 저널리즘의 성숙한 눈이 필요하다. 국가와 민족이전에 무엇보다 스포츠 자체를 즐기는 스포츠 감수성과 몰입력이 우선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