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조선 최초의 공연기획자가 활동하던 곳은?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1. 2. 9. 18:11

<김헌식 칼럼>조선 최초의 공연기획자가 활동하던 곳은?

2010.05.19 11:11

 




[김헌식 문화평론가]엇갈린 만남, 미처 그 가치를 알지 못하게 뒤늦게 접촉을 시도하지만 시간은 어긋난 듯... 디지털 시대의 변화된 남성과 여성의 만남을 그린 영화 '접속'(1997)에서 배경이 되었던 극장은 '피카디리'였다. 극장 '피카디리'가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62년만이다. 그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아예 이름을 잃게 되었다. 존재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름을 잃게 되면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피카디리도 마찬가지. 

'피카디리'는 '롯데시네마 종로점'으로 그 이름이 바뀌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멀티플렉스라는 영화소비시스템의 확장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비슷한 시기, 한편에서는 메가박스 코엑스점 개관 10주년 행사들이 열렸다. 메가박스 코엑스점은 단관극장개봉체제를 벗어나 멀티플렉스 공간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사실상 따로 분리되었던 영화와 쇼핑을 동시적으로 하나의 공간에 융합해냈다.다. 그곳은 대중적 기호들이 일체화 되는 문화 공간이었다. 

멀티플렉스는 영화소비 변화의 분기점이었고, 이를 통해 기존시스템은 급격하게 공격받았다. 1990년대만 해도 단성사-피카디리-서울극장은 한국영화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멀티플렉스 시스템은 이러한 중심성을 해체했다. 이 때문에 한국영화를 위기에 빠뜨리는 것으로 판단된 스크린쿼터제도의 폐지에 반대하는 영화인들의 집회가 이곳에서 주로 열렸다. 또한 피카디리 극장 앞에는 스타들의 손도장이 찍혀 있다. 할리우드의 '명예의 거리'(Hollywood Walk of Fame)를 연상시킨다. 이는 그만큼 한국영화의 중심이 어디인지를 알게 해준다. 

동양인에게 매우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이름이다. 이름 때문에 한사람의 운명이 바뀐다고 여긴다. 그래서 이에 관한 철학관이나 작명소가 번창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름은 하나의 전통성과 공동체성을 유지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족보에서 중요하게 사용하는 돌림자나 항렬이다. 문중의 유지는 이름을 정해진 항렬에 따라 이어가는가에 따라 존립여부가 결정된다. 

'피카디리'라는 극장의 이름이 과연 잘 지어진 이름인지는 부차적인 문제일 것이다. 다만 그 이름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나 전통성은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름은 현대적 관점에서 브랜드 네이밍의 영역에 해당한다. 

문제를 부각시키는 이유는 이러한 오래된 극장의 이름에 관한 문제가 피카디리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피카디리 맞은 편에는 '단성사'가 있다. 2008년 단성사는 부도처리 되었고, 아산M그룹이 인수했다. 이름은 ´아산M 단성사´로 바뀌었다. 피카디리와는 달리 '단성사'라는 이름은 붙어있다. 1907년 종로에 세워진 국내 최고(最古)극장이다. 박승필이 운영하던 1918년에서 1932년은 초기 한국영화의 기틀을 마련한 곳이다. 하지만 당시의 흔적을 알 수 있는 단서는 거의 없다. 멀티플렉스의 위력 앞에 대대적인 개조를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극장의 수익 관점에서 볼 때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지만 결국 차별성 있는 콘텐츠가 상실되었던 점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성사와 함께 1910~1920년대 조선인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우미관과 조선극장은 터만 남아 있다. 어쨌든 이러한 극장터들은 종로가 한국영화의 메카였음을 알게 한다. 하지만 100년 전의 한국 영화의 기억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표지석만으로는 그 흔적을 드러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역시 근대적 전통 콘텐츠의 상실이 아닐 수 없다. 

피카디리의 사례를 보면서 그나마 멀티플렉스로 변신하여 생존을 모색하고 있는 단성사마저 언제든 이름을 잃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물론 그 이름 자체를 고수하는 것이 전적인 화두는 아닐 것이다. 종로는 우리나라 극장문화의 전통성을 확립하는데 좋은 잠재적 원형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연경당은 조선 최초의 공연기획자라는 평가를 받는 효명세자가 최초의 근대적 공연을 한 장소로 일컬어진다. 순조 28년(1828년), 효명세자가 기획한 진작례(進爵禮)가 창덕궁 연경당에서 공연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진작례(進爵禮)가 궁중문화의 연장선상에 있었지만 연경당은 극장문화의 시초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창덕궁도 결국 ´종로´에 있다. 

근대성과 전통성을 뛰어넘어 아우르는 극장문화 혹은 극장 콘텐츠의 역사와 잠재성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아쉽다. 그렇다. 각 개별 건물과 그에 대한 이름만이 아니라 지역에 대한 전체적인 콘텐츠 디자인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 또한 소중한 대중적 문화 향유권이자 유산자원이기 때문이다. 

뒤늦게 가치를 인식하고 '접속'을 시도해도 만나지 못하는 엇갈린 만남은 영화만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