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택배 맡길 이웃도 없는 時代, '부탁'을 사고팝니다
['○○○를 부탁해' 열풍] 소설 '엄마를 부탁해' 힘입어 예능·광고·상품 등 활용 늘어 "정보 넘쳐나는 세상 속.. 의지할 곳 잃은 현대인들의 不安 보여주는 서글픈 현상"조선일보 변희원 기자 입력 2015.10.19. 03:04 수정 2015.10.19. 09:07요즘처럼 '부탁'이 흔한 시대가 있었을까. 걸핏하면 '부탁해' '부탁해' 하며 읍소하는 문구가 도처에 나부낀다.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2008)가 200만부 팔린 이래 '부탁해'란 제목의 콘텐츠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방송이 가장 먼저 이를 차용했다. 남자 연예인이 딸과 함께 출연하는 관찰 예능 '아빠를 부탁해'와 유명인들 냉장고 속 식재료로 셰프들이 요리 실력을 겨루는 '냉장고를 부탁해'는 제목 덕을 톡톡히 봤다. 24%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KBS 주말 드라마 제목도 '부탁해요 엄마'다. 국내 한 화장품 회사에서는 '내 피부를 부탁해'라는 이름의 팩을 출시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판매하는 다이어트 보조식품 광고 문구는 '내 살도 좀 부탁해'다.
대중들이 '부탁해'에 호감을 느끼는 건 역설적으로 부탁이 귀해진 탓이다. 부탁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을 해달라고 청하는 것'. 대가에 대한 약속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된 세상에서 공짜로 뭔가를 부탁하는 건 불가능해졌다. 예전 같으면 앞집이나 옆집에 부탁했을 일도 지금은 망설이게 된다. 택배를 대신 받아달라고 부탁할 이웃이 없다 보니 무인(無人) 택배 보관함까지 생겼다. 부모 형제간에도 마찬가지다. 40대 맞벌이 주부 김모씨는 "김치와 밑반찬을 보내주는 친정어머니께 이젠 돈을 부쳐 드린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가족 공동체, 이웃 공동체의 개념이 희박해진 시대에 모든 노동과 서비스가 돈으로 환산되고 있다는 뜻이다.
아이와 노인을 돌봐주는 서비스가 나온 지는 꽤 됐다. '아빠 혹은 엄마를 부탁한다'는 문장이 전혀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가족을 타인에게 부탁하는 일이 보편화됐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가수의 사인을 받거나 한정판 옷을 사고 싶지만, 직접 줄을 설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은 '줄 서기 알바생'을 고용해 10만~20만원을 지급한다. 밤늦게 퇴근해 빨래를 못 하는 직장인들을 위해 밤 12시에 세탁물을 걷어 빨래를 대신 해주는 세탁 수거 배달 서비스도 인기다. 이런 업체들은 으레 '부탁해'나 '해주세요'란 상호를 쓴다.
'부탁해'가 소비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홍수처럼 넘쳐나는 정보와 상품 때문이다. 결정 장애를 부추기는 무수한 정보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전문가를 찾게 한다. 어떤 화장품이 피부에 좋은지, 어떤 꽃을 집에 꽂아야 할지조차 몰라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큐레이션(전문가들이 콘텐츠나 상품을 선택해서 제공하는 것) 서비스도 생겼다. 잡지를 정기 구독하듯 돈을 내면 정기적으로 화장품이나 꽃을 골라서 집에 가져다준다. 대중문화평론가 김헌식은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목표치는 굉장히 높아졌지만 개인에겐 그걸 충족시킬 만한 역량이 없으니 전문가나 대리인을 찾아 부탁한다. 여기에서 수동적이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현대인의 성향이 드러난다"고 했다.
'부탁해'란 제목의 원조는 정재은 감독의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2001)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 여성들 이야기를 담은 수작이다. 길에서 주운 고양이를 서로에게 부탁해가며 함께 키운다. 비정한 사회를 경험해나가는 이들은 고양이를 맡기듯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맡기고 싶어 한다. 어쩌면 가장 부탁하고 싶은 건 아빠도, 엄마도 아닌 바로 나 자신 아닐까. 마음 둘 곳 없고, 의지할 데 없는 현대인들의 불안을 보여주는 우리 시대 서글픈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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