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관광객들이 강남 선릉의 커피 집을 방문하기 위해 일부러 곧잘 들른다. 이른바 명소가 된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드라마 <넌 내게 반했어>에 그 커피집이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커피 집은 프랜차이즈 커피 집이었다. 한류 명소가 되었으니 기뻐하라 할까. 드라마와 영화에는 커피 집이 수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하나같이 비슷비슷하다. 이런 커피 집들은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이다. 특히 드라마의 경우에는 더욱 이런 노출 정도가 매우 심하다. 만약 주인공이 할일 없이 커피전문점에서 오간다면 우리는 금방 알아채고 만다. 바로 PPL 때문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커피 집 공간은 바로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쉽게 노출되었던 것이다. 드라마 <상어>는 이 혐의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주요 인물의 알바공간이면서 툭툭 주인공들의 명상이나 멍 때리기 공간으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드라마 <아랑사또전>에 놀부 보쌈이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는 목우촌이라는 간판이 걸렸던 것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사극이 협찬이 안 되는 상황을 타개하려는 고육지책이었다. 사극은 물론 근대극은 더 하다. 주인공은 프랜차이즈 커피 집에만 있나 | | | MBC 드라마 <넌 내게 반했어> ⓒMBC | |
외주제작사 시스템에서는 제작비를 충당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공간 협찬이 이루어지는 일이 다반사다. 이 때문에 주인공이나 주요 인물들의 알바는 프랜차이즈 커피 집에서 이뤄진다. 수 천 개의 알바들 중에 몇 개의 알바만이 등장하는 것은 치열한 알바생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몇 개의 협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설령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많더라도 그 공간이 반드시 대형 커피전문점은 아니다. 만약 미니시리즈의 16부작일 경우, 주인공이 특정 직업군에 속하면 5억원, 주변 인물이 속하면 3억 원 선이며 주인공이 특정 커피숍에서 일하면 5억원, 주인공 아버지나 어머니가 주인이면 3억 원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물론 그 돈들은 고객들의 주머니에서 나간다. 대형 커피전문점은 일단 공간이 넓고 좌석이 많다. 한 공간 안에 수많은 이들이 밀집해 있다. 이런 공간의 불문율은 바로 좌석 회전율이다. 사람이 많고 공간의 울림이 크니 소음도 이에 비례한다. 조명은 밝고 옆 사람과 간격은 좁다. 음악은 때때로 이어폰 착용을 부른다. 사람이 많고 소음이 크기 때문에 말소리는 올라간다. 이런 공간에서는 쉽게 사람이 피곤해진다. 회전율은 알아서 확보된다. 하지만 드라마들은 하나같이 이런 커피전문점의 모습은 담지 않는다. 그것도 매력적이고 낭만적으로 형상화 한다. 물론 알바생들의 피로와 애환은 부차적이다. 후발 주자로 나선 커피전문점은 더욱 이런 미디어 노출에 필사적이다. 물론 자본의 투여가 가능해야 대열에 합류 할 수 있다. 시청자가 가고 싶은 커피집은 어디에 물리적인 거리이든 미디어를 통한 인지적 거리든 프랜차이즈 커피점은 물량 공세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지만 문화적 특성과 다양성 그리고 지역 경제 활성화와 창조적 자영업자들을 고사시키는 행태들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 | | KBS 드라마 <상어> 화면갈무리 | |
이런 문제에 반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은 있다. 바로 동네 카페 헌터들이다. 카페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인데, 사서 고생하는 이들은 쉽게 접할 수 있는 커피 전문점을 외면한다. 보통 프랜차이즈 커피 집을 외면하고, 항상 동네에 있는 커피집을 찾아다닌다. 다른 낯선 공간에서 사람들을 만날 경우에는 익숙한 프랜차이즈 점을 찾지 않고 일부로 동네 카페를 찾는다.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유지하려한다. 어디나 자신을 찾을 손님을 기다리는 찻집은 분투하며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찻집은 역이나 버스 정류장 그리고 주요 도로에서도 떨어져 있는 경향이 있다. 자리가 좋은 곳은 임대료가 비쌀 뿐만 아니라 다른 대형 커피 매장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더욱 뒤로 밀려 날수 밖에 없다. 뒤로 밀려나니 더욱 찾기가 힘들다. 동네 커피 점의 딜레마 요즘처럼 폭염이 지속되는 날에는 정말 힘든 일임에도 그들은 포기 하지 않는다. 동네 카페는 일단 공간이 작다. 특색 있는 실내 디자인과 컨셉을 갖고 있다. 좌석은 하루 종일 앉아도 피곤할 것 같지 않고, 조명은 적절하며 서빙하는 이들은 덜 기계적이다. 좌석은 더 놔도 될 거 같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더구나 알바생들이 아닐 경우가 많으며 바리스타 이상의 커피 실력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들만의 레시피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이윤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그런 카페를 발견하는 것은 보물을 발견하는 기분과 함께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을 준다. 하지만 이런 점은 오히려 동네 카페들을 딜레마에 빠뜨린다. 좌석 수가 얼마 없기 때문에 회전율이 높아야 하지만 고객들은 더 길게 머물기 마련이다. 따라서 머무는 시간이 긴 만큼 수익은 낮게 된다. 문화적 공간을 더 즐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수록 그 카페를 옥죄게 된다. 이런 카페에 닭장 속의 닭처럼 빽빽하게 들어찰 수는 없다. 사람을 더 좋게 편안하게 만들어 줄 수록 그 공간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 어쩌면 자본주의의 본질일 것이다. 그것은 지대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욕망의 분별없음이 결합한 탓이다. 그 지대는 미디어의 지대는 물론 기호의 지대도 걷어간다. 그 지대구조는 어느새 인간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오히려 수익과 존립이 가능하다. 갈수록 동네카페는 줄어들고, 갈 수 있는 공간은 커피전문점이 된다. 실력 있는 바리스타들은 없는 비정규직 알바들이 정해진 레시피 대로 내오는 커피만이 살아남는다. 또한 고객은 거꾸로 공간적인 온갖 불편함을 참고 버텨야 살아남는다. 모든 감각을 둔감하게 만들어야 한다. 어느새 그 공간이 드라마와 영화, 광고에 나왔던 공간이라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요즘 뜨는 곳이니 말이다. 매스미디어 속 주인공은 누구여야 하나 카페 헌터들은 카페 유목민이 되어야 한다. 설령 마음에 들어도 동네 카페들에 자리를 잡으면 즉 정주 하면 안 된다. 정주 하는 순간 그 정주 공간은 죽는다. 그들은 그래서 끊임없이 작은 카페들을 옮겨 다닌다. 이동 속에 생명성이 있다. 고착은 죽음과 부패다. 개인만이 아니라 작은 카페들을 통해 지역에 돈이 돌아야 동네가 서로 산다. 드라마와 영화에는 동네 카페들이 나와야 한다. 불우이웃 돕기 캠페인을 하려거든 차라리 동네카페들을 주인공으로 삼아야 한다. 동네카페들은 외친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상생과 윈윈을 외치는 미디어들이 담아내야 할 주인공들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다. 비단 카페만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스스로 자립하는 이들을 매스미디어는 과연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드라마와 영화에 등장하는 공간은 우리의 삶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자본의 힘을 반영한 것이다. 동네 빵집이 나온 적이 있던가. 영상을 통한 사회학적 연구가 설득력이 없는 이유가 된다. 동네의 창조적인 자영업자들의 분투를 '협찬'이라는 이유로 너무 쉽게 짓밟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결국 열악한 콘텐츠 제작구조의 모순과 맞물려 있음을 동네 커피 점들의 비명을 통해 알 수 있다. 불합리한 제작 구조가 있을수록 자영업자들은 더 어려워질 구실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