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는 진달래 들엔 개나리/ 산새도 슬피 우는 노을 진 산골에/ 엄마구름 애기구름 정답게 가는데/ 아빠는 어디 갔나 어디서 살고 있나/ 아아아 아아아아 아아아아/ 우리는 외로운 형제 길 잃은 기러기”(이미자의 ‘기러기 아빠’, 1971, 김중희 작사, 박춘석 작곡)
지금의 30대만 하더라도 ‘기러기 아빠’란 말이 이 노래 때문에 생긴 말인지를 모른다. 이 노래는 ‘동백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과 함께 이미자의 3대 히트곡이자 금지곡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금지를 했어도 버스에서 구걸하는 ‘앵벌이’ 아이들의 노래로 쓰일 만큼 대중적 호소력이 강한 노래였다. 오죽 유명했으면 돈을 벌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있는 아버지를 지칭하는 말로 ‘기러기 아빠’라는 말이 살아남아 있을까. ‘돈 많이 벌어서 올게’라는 말 한마디 남겨놓고 떠난 아버지와 줄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바라보며 주린 배를 움켜쥐고 눈물 흘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버지가 가족을 떠난 이유는 여러 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 가수 하춘화의 ‘아빠는 마도로스’ ‘월남 가신 우리 아빠 안녕하소서’를 보아도 박양숙의 ‘어부의 노래’에서도, 이유야 어쨌든 아버지는 집에 없고 엄마와 자식들은 아버지를 기다린다는 상황이 반복된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전쟁으로, 돈 벌러, 시골구석이 답답해서, 혹은 주색잡기에 미쳐 집을 떠나 돌아다녔던 20세기 초·중반 아버지들 덕분에 오랫동안 한국의 자식들은 아버지에 대한 강한 애증을 지니고 살아왔다.
이에 비해 70년대 번역곡으로 불린 아버지 노래들은 참으로 달랐다. “엄마 아빠 좋아, 아빠 엄마 좋아”라는 후렴구가 유명한 ‘아빠는 엄마만 좋아해’ “해가 뜨나 해가 지나 오직 한마음/ 자식 하나 잘되기를 오직 한마음… 아버지 말씀은 없어도 높으신 그 뜻을 내 잊으리”로 번역된 ‘아버지(Papa)’ 같은 아버지는 한국적 현실감으로는 와닿지 않는 아버지였다. 아빠가 엄마만 좋아한다고? 오 마이 갓! 그건 서양 영화 속의 세계였을 뿐이다. 아빠가 가족 안에서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은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였다.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사가지고 오셨어요 음음/ 그릴 것이 너무 많은데 / 하얀 종이가 너무 작아서/ 아빠 얼굴 그리고 나니/ 잠이 들고 말았어요 음음 (하략)”(배따라기<사진>의 ‘아빠와 크레파스’, 1986, 이혜민 작사·작곡)
애초의 가사는 ‘다정하신 모습으로’가 아니라 ‘술 취하신 모습으로’였으나 사전심의에 걸려 가사가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방송 ‘스펀지’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그럼 그렇지! ‘다정하신’보다는 ‘술이 취한’이 훨씬 한국적 리얼리티가 있다. 식민지와 전쟁, 이농 등으로 가족이 이합집산했던 어수선했던 시절이 지나고 나니 이제 한국의 아버지는 직장과 집을 오가는 존재가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절 다정한 아빠의 모습은 늘 ‘선물’과 함께 등장한다는 점이다. 김창완의 ‘아빠의 선물’에서도 아빠의 귀가를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속에는 선물의 기대감이 있다. 이는 대중가요 속의 엄마가 ‘음식’과 관련해 등장하는 것과 대조된다. 엄마는 밥하는 사람, 아빠는 돈 벌어 선물 사오는 사람, 이것이 우리 사회의 부모상임을 대중가요는 고스란히 보여준다.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의 감정은 늘 아버지가 약해지거나 돌아가시고 나서야 나타난다.
“저 산꼭대기 아버지 무덤/ 거친 베옷 입고 누우신 그 바람 모서리/ 나 오늘 다시 찾아가네/ 바람 거센 갯벌 위로 우뚝 솟은 그 꼭대기/ 인적 없는 민둥산에 외로워라 무덤 하나/ 지금은 차가운 바람만 스쳐갈 뿐/ 아 향불 내음도 없을/ 갯벌 향해 뻗으신 손발 시리지 않게/ 잔 부으러 나는 가네”(정태춘의 ‘사망부가’, 1980, 정태춘 작사·작곡)
2, 3절에서 주인공은 ‘길도 없는 언덕배기에 상포자락 휘날리며 요랑(요령) 소리 따라가며 숨 가쁘던 그 언덕길’ ‘펄럭이는 만장 너머 따라오던 조객들’처럼 장례 때의 풍경을 떠올리며 찬 땅 속에 묻힌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은 참으로 애틋하다. 그러나 이 노래뿐 아니라 다른 노래에서도 놀랍게도 생전의 아버지와의 정서적 교감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은 침묵하는 늙은 아버지, 돌아가신 아버지 같은 한정된 코드 속에서만 나타난다. 정수라의 ‘아버지의 의자’, 넥스트의 ‘아버지와 나’ 등을 보라.
그나마 90년대 중반 이후 가족 내 약자로 전락한 아버지에 대해 자녀들은 묘한 연대 감을 보여준다. 한스밴드의 ‘오락실’(1998, 최준영 작사·작곡)에서는 가족에게 실직 사실을 속인 채 평일 대낮 오락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불쌍한 아빠의 모습이 그려진다. ‘장난이 아닌 걸 또 최고 기록을 깼어’라고 아이가 깜짝 놀랄 정도로 대머리 아빠는 전자오락실 ‘죽돌이’였고, 이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아이에게 용돈 쥐여주는 모습을 보인다. 비굴하고 불쌍하다고? 그렇다. 하지만 이때부터 아이와 아버지의 정서적 교감은 구체화된다. 여태껏 대중가요 속에서는 생활의 구체성으로부터 완벽하게 제거돼 있던 아버지가 드디어 살아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걸 보면 강한 척하는 아버지가 꼭 좋은 아버지는 아니다. 우리의 자식들은 아버지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간직하게 될까.
트로트와 블루스의 만남...한영애표 ‘봄날은 간다’는 몽환적
이영미의 7080 노래방 <11> 오는 듯 가버린 봄날의 추억
|
“1.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2.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 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백설희의 ‘봄날은 간다’, 1954,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이 노래를 들으면 첫 구절에서부터 정신이 아득해진다. 봄바람에 휘날리는 열아홉 처녀의 연분홍 치마 때문일까. 그 처녀는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며 연신 옷고름을 씹는다. 열아홉 나이만큼이나 풋풋했던 그 사랑은 과연 이루어졌을까. 2절을 보면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신작로 길의 뜬구름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속절없이 떠나갔으리라. 그저 새의 노랫소리만 얄궂다.이미지가 매우 빼어난 가사여서 손로원이라는 작사자에 대한 궁금증이 솟아오르지만, 그에 대해서는 의외로 알려진 것이 매우 적다. 원로 대중음악인들에게 물어봐도 본명·나이·출신 지역·학력 등 어느 것에 대해서도 시원스러운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데카당한’ 사람이었다는 말씀들만 하신다.
그의 작품은 크게 두 부류다. ‘봄날은 간다’뿐 아니라, 손인호의 ‘비 내리는 호남선’(‘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불러야 옳으냐’), 박재홍의 ‘물방아 도는 내력’(‘벼슬도 싫다지만 명예도 싫어’),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처럼 느낌 풍부한 서정적인 노래들이 있다. 이런 노래에서 그의 가사는 구절구절 절창이다. 그런 한편, ‘페르샤 왕자’ ‘인도의 향불’ ‘샌프란시스코’ ‘홍콩 아가씨’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처럼, 샌프란시스코에 비너스 동상을 얽어놓고 페르샤 왕자에 마법사 공주를 결합시켜 지금의 감각으로는 너무도 황당하여 웃음이 나오는 이국적인 노래들도 대부분 그의 작품이다. 어쨌든 그는 1950년대에 매우 활발하게 활동한 다작의 작사가였다.
이 노래는 시간이 흘러도 인기가 식지 않는다. 아마 과거와 추억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노래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이 노래를 이후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했다. 이미자나 조미미·문주란 같은 웬만한 트로트 가수는 물론이거니와, 이은하·최헌·투에이스 등 70년대 인기가수들도 모두 이 노래를 리메이크했다.
조용필은 매우 창의적으로 왕성하게 신곡을 짓고 부른 가수이지만 흘러간 옛 노래도 많이 불러 취입했다. 그가 부른 ‘봄날은 간다’(1984)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보석이다. 이미 우리는 ‘일편단심 민들레야’나 ‘허공’ 같은 곡에서 그의 트로트적인 기교를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노래의 마지막 구절 ‘봄날은 간다’ 부분에서 소리를 너덧 번씩 굴려내는 그 기교는 정말 일품이다.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인상적인 리메이크는 한영애의 ‘봄날은 간다’(1999)다. 한국에서 가장 블루지한 목소리를 내는 한영애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가수가, 이렇게 청승스러운 옛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자체가 매우 신선했다. 한영애의 리메이크를 듣고서야 비로소 이 노래가 블루스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은 노래임을 새삼 깨닫는다. 이 노래가 50년대에 인기를 모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익숙한 트로트적 선율과 잘 뽑아낸 향토적 이미지, 여기에 당시로서는 신선한 양풍 음악인 블루스를 리듬과 반주 편곡에서 결합시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잘 있거라 나는 간다’로 시작하는 안정애의 ‘대전 부르스’ 역시 트로트 선율에 블루스 리듬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성공한 노래다. 한영애의 ‘봄날은 간다’는 독특한 퍼커션으로 예스러운 이미지를 다소 걷어내고 한영애스러운 몽환적 분위기를 만들어내었다.
더 어린 후배 예술인들은 이 노래에 다른 방식으로 존경을 표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명대사를 남긴 영화 ‘봄날은 간다’의 주제가인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는 백설희의 노래와 전혀 다른 곡이면서도, 묘하게 몽환적인 그 분위기는 매우 닮았다. 인생의 봄날을 맞은 남자와, 그 봄날이 속절없이 지나가버린다는 걸 알아버린 여자의 어긋난 사랑을 이 노래는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 꽃잎은 지네 바람에”라고 노래한다. 그런가 하면, 휘성의 ‘제발’은 부제가 ‘봄날은 간다’이며, 캔은 ‘내 생애 봄날은’에서 ‘저 하늘이 외면하는 그 순간 내 생애 봄날은 간다’라고 노래했다.
그러고 보면 이 노래에서 가장 잘 지은 부분은 바로 제목이다. 여름과 겨울이 지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간다’라고 아쉽게 탄식하게 되지 않는다. 그런 아쉬움은 오로지 봄뿐이다. 공기에 향긋한 냄새가 묻어나고 야들야들한 연녹색 이파리들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계절, 봄바람에 날리는 흙먼지에 눈 몇 번 쓰라리고 눈물 몇 방울 흘렸을 뿐인데, 벌써 이 좋은 봄이 끝나버리다니! ‘봄날은 간다’란 제목은, 이 모든 아쉬움을 단 한마디로 압축해준다.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올해의 봄날은, 또 이렇게 속절없이 간다.
전쟁 재앙 경고한 밥 딜런 ‘세찬 비가 ...’ 한국선 원뜻 알 수 없게 둔갑
이영미의 7080 노래방 <12> 금지된 반전반핵반공해
|
환경 문제와 노래를 함께 생각하다 보면 70년대의 흥미로운 작품 하나에 눈길이 머문다. 밥 딜런의 ‘세찬 비가 쏟아지네(A Hard Rain’s Gonna Fall)’(1962)를 번안하여 부른 이연실의 ‘소낙비’다.
“어디에 있었니 내 아들아 어디에 있었니 내 딸들아 / 나는 안개 낀 산 속에서 방황했었다오 시골의 황토길을 걸어다녔다오 / 어두운 숲 가운데 떠다녔었다오 시퍼런 바다 위를 떠다녔었다오 /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끝없이 비가 내리네”(이연실의 ‘소낙비’, 1973, 양병집 개사)
2009년 코펜하겐 기후회의에서 유엔은 비공식 축가로 밥 딜런의 ‘세찬 비가 쏟아지네’를 선정했다. 이연실의 ‘소낙비’ 가사를 생각하면 이 선정은 다소 알쏭달쏭할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자연 속을 헤매고 다니는 가사가 워낙 자연친화적이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할 법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이 작품이야말로 한국어로 바뀌는 과정에서 원곡의 가사가 흔적도 없이 훼손된 대표적인 예이기 때문이다.
이연실의 맑고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실린 이 예쁜 노래를 어릴 적 좋아했던 나는, 나이를 먹은 후 밥 딜런의 원곡 가사를 찾아보고는 기겁을 했다. ‘어디에 있었니’ ‘무엇을 보았니’로 시작하여,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듣고 보았다는 문답형 구조는 동일하다. 안개, 숲속, 바다, 늑대 같은 몇몇 단어도 일치한다.
그러나 내용은 전혀 딴판이다. 원곡에서 보고 들었다고 이야기하는 것들은 ‘7개의 슬픈 숲속’ ‘12개의 죽음의 바다’ ‘늑대에 둘러싸인 갓난아기’ ‘피 흘리는 검은 나뭇가지’ ‘잘린 혀를 가진 만 명의 사람들’ ‘어린이의 손에 들린 총과 칼’ ‘불타는 손을 가진 백 명의 북잡이의 북소리’ ‘날카롭게 울부짖는 광대의 소리’ 등이다. 마치 묵시록에 나오는 인류 최후의 날을 보는 것처럼 끔찍하다.
밥 딜런의 이 노래가 나온 62년은 쿠바의 핵미사일 위험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다. 미국이 쿠바를 공격하면 쿠바뿐 아니라 얼마나 엄청난 비극이 벌어졌을까. 그렇게 보면 이 노래의 가사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후렴에서 반복되는 ‘세찬 비가 쏟아지네’의 ‘세찬 비’는 폭탄일 수도 있고 핵 폭발이 일어난 이후 쏟아지는 방사능 비일 수도 있다.
62년의 이 노래는 ‘반핵’이라기보다는 ‘반전’의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코펜하겐 회의에서 이 노래를 선정한 것은 이 작품에 들어 있는 핵에 대한 경고 메시지에 새롭게 주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73년 우리나라에서는 반핵은 물론 반전 역시 가수들이 입에 올릴 수 없는 내용이었다.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까지 우리나라 가요심의에서 ‘반전’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내용으로 명기되어 있었다.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은 원곡과 번역곡 모두 ‘반전’이라는 이유에서 금지되었다. 정말 기막히지 않은가, 한국에서는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 나쁜 짓이라니!
이 시기 우리나라는 베트남전을 치르고 있었고, 북한에 대해 ‘초전박살’ 같은 구호를 외쳤던 때이니 ‘반전’은 이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양병집은 ‘세찬 비가 쏟아지네’의 가사를 제대로 번역하지 못하고 원곡과는 지나치게 다른 번안곡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74년의 양병집 버전에는 ‘무덤들 사이에서 잠을 잤었다오’ ‘장난감 총과 칼을 가진 애를 보았소’ 정도가 더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역시 원곡의 주제를 조금이나마 전달하기에는 크게 미흡했다.
대중가요계에서 반공해, 반핵 주제를 다룬 노래는 오랫동안 나오지 못했다. 검열 때문이었다고? 글쎄, 이렇게 이야기하기에는 다소 민망하다. 오랫동안 체제 순응의 태도를 지녀온 우리 대중가요계는 이런 내용의 노래는 만들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민중가요’라 지칭되는 진보적인 노래운동 쪽에서는, 환경운동이 처음 시작되던 80년대 초·중반부터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새들이 울지 않는 그날 봄은 침묵했고 / 강이 죽어간 그 가을 열매를 거둘 수 없었네 / 땅과 강과 바람을 버린 그날에 / 땅과 강과 바람은 인간은 거두지 않았네”(안혜경의 ‘침묵의 봄’, 1984, 안혜경 작사·작곡)
레이철 카슨의 1962년의 명저 제목을 딴 이 노래는, 침묵의 봄에 인간 역시 그 침묵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단순하고 예쁜 선율로 부드럽게 그러나 섬뜩하게 경고한다. 이 곡은 92년 안혜경의 합법적인 독집 음반이 나오면서 비로소 공식적 음반으로 발표되었다.
안혜경과 함께 환경 문제에 대한 노래를 열심히 지은 것은 ‘전진가’의 창작자 박치음이다. 금속공학 박사인 그는 공해문제연구소 등에 간여하며 ‘여러분 공해는’ 등의 노래를 지었다. 솔 분위기의 이 노래는 매 소절 ‘여러분 공해는’ 하는 가사로 시작하여 공해를 ‘생태계를 도막내는 절단기’ ‘죽음으로 질주하는 완행열차’ ‘요람에서 무덤까지 병든 건강’ ‘식탁 위 침묵의 살인자’ ‘태아의 목에 걸린 올가미’ ‘소비의 사생아 복종의 쌍생아’ ‘기업의 무지개 색 그림자’ 등으로 정의 내린다. 이후 그는 반핵 주장을 ‘반전’과 ‘반미’로 몰고 나가는 ‘반전반핵가’까지 짓기에 이르니, 이 시대의 반공해 주장의 노래로서는 가장 과격한 창작자였던 셈이다.
민중가요권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든 80년대 대중가요계는 여전히 침묵했다. 환경 문제에 대해 대중가요계가 뭔가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세상이 바뀐 90년대 이후였다. 세상 바뀐 후의 이야기는, 나도 일주일은 쉬어야 얘기할 수 있겠다.
영어 랩으로 ‘환경의 역습’ 경고 공일오비, 시대의 금기를 깨다
이영미의 7080 노래방 <13> 지구를 걱정하는 가수들
대중가요계에서 환경 문제에 대해 관심을 표하기 시작한 것은 91년 공일오비의 ‘4210301’이란 노래부터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015B(사진)’ 혹은 ‘空一烏飛’라고도 쓰는 알쏭달쏭한 이름을 가진 이 팀은, 강남에 서울대 출신이라는 그들의 출신만큼이나 고급하고도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들 노래의 대부분은 사랑 노래였으나 2집의 이 곡 하나가 좀 튀었다.
우리말로 된 노래 부분은 슬픈 사랑에 대한 노래임이 분명하지만, 영어로 말하는 내레이션이 다소 독특했다. 집에서 키우던 개가, 하늘에서 떨어진 오염된 빗물을 마시고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제목이 ‘4210301’이라니.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진 팬들이 일곱자리 숫자라는 데에 착안하여 전화 다이얼을 돌려본 결과, 그 번호는 환경부 전화번호임이 밝혀졌다. 이 노래 때문에 환경부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 되어 아예 전화번호를 바꾸었다고 한다. 지금이라면 이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을 터인데, 당시는 대중가요 창작자도 팬들도 비교적 순진했던 시절이었다.
내레이션과 제목까지 연결시켜 보면 뭔가 환경 문제에 대한 언급을 하고자 한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구태여 영어로 말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 이때까지만 해도 대중가요가 사회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다소 불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제목까지 알쏭달쏭하게 만들어 ‘알아들으려면 알아듣고, 모르면 말고!’ 식이 아니었을까. 이후에도 대중가요 창작자들이 뭔가 다소 부담스러운 내용을 노래에 실으려고 할 때에, 영어로 말해버리는 경향은 꽤 오랫동안 지속된다.
공일오비는 다음 해에는 좀 더 과감히 우리말로 이런 내용을 노래하기에 이른다.
“1. 상쾌한 아침엔 샴푸로 머리 감고 거울 앞에선 무스로 단장을 하고 / 하얀 연기를 뿜는 자가용 타고 친숙해진 소음 속에 나서지 / 깔끔한 식당에선 언제나 일회용 컵 일회용 젓가락만 쓰려 하고 / 문화인이란 음식을 남겨야 한다 생각하지 / (후렴) 우리가 내던진 많은 무관심과 이기심 속에 / 이제는 더 이상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없잖아 /
2. 공장폐수 얘기에 의례히 화를 내고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리고 / 더러워진 외출복은 합성세제로 세탁하지 / (후렴)” (공일오비의 ‘적(敵) 녹색인생’, 1992, 정석원 작사·작곡.)
이 노래는 당시로서는 매우 신선한 아카펠라 곡이었다. 언플러그드니 아카펠라니 하는 새로운 말들이 들어오고 있던 때에, 이런 형식을 환경 문제의 내용과 연결시킨 발상이 참신했다. 92년은 이렇게 세상이 확실히 변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한 해였다. 냉전이 무너져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산업사회 담론이 넘쳐나고, 세상을 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였다. 국내에서는 이제 막 군인 출신 대통령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고, 이와 함께 뜨거운 민주화운동 열기도 식어가는 중이었다. 신문 인쇄를 콩기름으로 한다는 것을 내세운 모 신문사가 ‘내일은 늦으리’라는 제목의 문화행사를 열어 공일오비와 서태지와아이들, 넥스트, 푸른하늘 등 당대 내로라하는 신세대 대중음악인들을 불러 공연과 음반을 제작한 일은, 이제 환경 문제는 내놓고 마음대로 이야기해도 괜찮은 문제일 뿐 아니라, 정치나 이념 패러다임을 넘어선 새로운 시대의 이슈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준 계기가 되었다. 좀 더 참신한 음악을 듣기 원했던 진지한 대중음악 팬들은 이 음반에 실린 노래들을 주목했다.
공일오비의 노래들이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부러 가볍고 경쾌한 방식으로 들려주고 있는 것에 비해, 신해철이 이끄는 넥스트는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이에 접근했다.
“서기 1999년 9월 10일 전기의 공급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아마도 마지막 기록이 될 것 같다. 혹 생존자가 이 기록을 발견한다면 우리의 무책임이 낳은 이 비참한 결과를 후세에 전하기 바란다. (중략) 북반구 전체 인구는 5% 이하로 감소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기 중의 오존층은 거의 다 파괴되었다. 폭도들은 정신착란 상태에서 떼를 지어 먹을 것을 약탈하고 다닌다. 그나마 그들도 곧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지금 시각은 오후 2시지만 하늘은 밤처럼 어둡다. 산성비와 일사량의 감소로 식물들은 전멸의 길을 걷고 있다. 몇 년째, 태어난 신생아들은 거의 모두가 기형아였다. 그나마 출산율조차 거의 제로를 향하고 있다. 대기의 온도는 계속 상승 중이다. 남극대륙은 물로 변하고 해안의 도시들은 물에 잠겨 자취를 감추었다. 내 머리카락은 모두 빠지고 피부암은 전신을 덮고 있다. 나도 최후의 순간을 준비해야겠다. (하략)” (넥스트의 ‘1999’, 1992, 신해철 작사·작곡)
매우 어둡고 진지하지만 SF영화 같은 발상 덕분에 오히려 80년대 민중가요가 보여주었던 현실성을 묘하게 휘발시켜버려 오히려 가볍게 느껴진다. 이때부터 90년대의 언더그라운드 대중음악인들은 환경 문제를 인류문명의 문제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것이야말로 다소 예민한 국내 정치경제적 문제로부터 약간 거리를 떼는 방식이었을 수 있다.
이로부터 20년 후인 지금, ‘인류문명의 문제’였던 환경 문제는 점점 나의 생존 문제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대중음악인은 여기에 어떤 노래를 내놓을까 자못 궁금하다.
해변,모닥불,텐트 ... ‘휴가 노래’가 바꾼 70년대 여름 풍경
이영미의 7080 노래방 <14> 피서에서 바캉스, MT 시대로
|
이렇다 보니 ‘바캉스’란 말은 젊은이들의 서양식 피서 여행이라는 어감을 지니게 되었다. 계곡에 발 담그고 천렵(川獵)한 물고기로 매운탕 끓여먹는 전통적 여름 피서와는 다른, 수영복과 선글라스에 알록달록한 비닐튜브를 갖추고 바닷가 백사장에 길게 누워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V A C A T I O N, In the summer sun’으로 시작하는 코니 프랜시스(Connie Francis)의 신나는 노래가 원곡과 번역 곡으로 인기를 모았던 시대가 바로 70년대 초였다. 이때부터 여름은 이런 이미지로 고착되었다. 대중가요 속의 여름은 오랫동안 바다와 피서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흥에 겨워 여름이 오면 가슴을 활짝 열어요 / 넝쿨장미 그늘 속에도 젊음이 넘쳐 흐르네 / 산도 좋고 물도 좋아라 떠나는 여행길에서 /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사랑이 오고 가네요 / 여름은 사랑의 계절 여름은 사랑의 계절 / 갈숲 사이 바람이 불어 한낮의 더위를 씻고 / 밤이 오면 모닥불 가에 우리의 꿈이 익어요”(이정선의 ‘여름’, 1979, 이정선 작사·작곡)
78년 동양방송의 제1회 해변가요제에서 징검다리가 불러 처음 알려진 이 노래는, 79년 창작자인 이정선의 음반에 ‘봄’, ‘가을’, ‘겨울’과 함께 실렸다. 사계절을 담은 이 연작 노래 중 ‘봄’과 ‘여름’이 인기를 모았다. ‘봄’은 ‘봄 봄 봄 봄 봄이 왔어요’ 하는 후렴구가 귀에 쏙 들어오고, ‘여름’은 ‘여름은 사랑의 계절’ 하는 중창으로 채워진 후렴구가 인상적이다. 이 노래는 이정선 음반에 실려 있기는 하지만, 선율 부분을 부르는 여자 목소리는 한영애의 것이다. 이 시절 한영애는 이광조·이주호 등과 함께 이정선이 이끄는 4인조 포크그룹 해바라기의 멤버였다. 80년대 이후 블루지한 한영애 목소리만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지만, 이 시절 포크는 이렇게 수많은 서양 대중음악 양식을 배우고 익히는 자유로운 놀이터 같은 영역이었다.
이 노래에서도 역력히 드러나듯, 이 시절 젊은이들의 여름은 산과 물을 찾아 무리 지어 어디론가 떠나야 하고, 밤이면 모닥불을 피워 놓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묶여 있었다.
“조개 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 불가에 마주 앉아 밤새 속삭이네 / 저 멀리 달 그림자 시원한 파도소리 / 여름밤은 깊어만 가고 잠은 오지 않네”(윤형주<사진>의 ‘라라라’, 1971, 윤형주 작사·작곡)
이런 풍경은 오랫동안 젊은이들의 여름의 로망 같은 것으로 고정되었다. 물론 실제로는 요즘처럼 가볍지도 편하지도 않은 텐트와 코펠·버너, 그리고 쌀과 김치 등속을 모조리 짊어지고 가야 했고, 텐트가 쳐지지 않거나 버너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쫄쫄 굶기 일쑤였으며, 거기에서 조달해야 하는 모닥불 장작은 의외로 비싸고 불도 잘 붙지 않아 이런 짓을 정말 해야 하나 회의스러운 적이 많았지만, 어쨌든 여름은 이렇게 보내는 것이 제대로 보내는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고, 대중가요는 이런 생각을 부추기는 데에 크게 일조했다.
이런 바캉스에 비해 김민기가 지은 ‘천릿길’은 확실히 다른 여름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역시 김민기였다.
“동산에 아침햇살 구름 뚫고 솟아나 / 새하얀 접시꽃잎 위에 눈부시게 빛나고 / 발아래 구름바다 천 길을 뻗었나 / 산 아래 마을들아 밤새 잘들 잤느냐 / (중략) / 쏟아지는 불햇살 몰아치는 흙먼지 / 이마에 맺힌 땀방울 눈가에 쓰려도 / 우물가에 새색시 물동이 이고 오네 / 호랑나비 날으고 아이들은 쫄랑거린다 / (중략) / 가자 천릿길 굽이굽이 쳐가자 / 흙먼지 모두 마시면서 내 땅에 내가 간다”(양희은의 ‘천릿길’, 1978, 김민기 작사·작곡)
이 노래는 수영복과 캠프파이어가 어우러진 바캉스가 아니었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산과 시냇물, 시골집에서 풍겨 나오는 밥 냄새와 아이들 노는 모습, 길가에 흔하게 핀 접시꽃과 염소까지 구경하며, 흙먼지 마시며 걷는 전형적인 도보여행의 풍경이다. 하도 씩씩해서 요즘의 한가한 도보여행 느낌과는 좀 다른, 70년대의 국토순례대행진 분위기라고나 할까. 흙먼지 마시고 소나기에 옷을 적시면 좀 어떠랴. 내 땅에서 느끼는 정겨움을 만끽할 수 있는데 말이다.
80년대 이후, 바닷가와 캠프파이어 로망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학생들의 분위기는 꽤나 달라졌다. 향락적 피서가 아닌 ‘멤버십 트레이닝(MT)’을 표방한 여름 여행이 성행하게 된 것이다. 80년대 중반까지 MT는 운동권 동아리들의 용어로 치부되었으나, 80년대 말이 되어서는 그저 범상한 용어가 되었다.
이 시기 동아리나 학과 단위의 MT는 화려한 관광지가 아닌 산 밑의 한적한 민박집으로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조금만 걸어가면 금세 논밭과 시골마을이 펼쳐지는 곳 말이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젊은이들은 소박한 민박집 마당에 나와 앉아 별을 바라보았다. 그런 밤에는 개구리와 풀벌레가 정신 없이 울고 멀리서 개가 간간이 짖었다. 89년 소박한 포크 그룹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가 그토록 많은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아마 다름 아닌 배경 음향으로 넣은 개구리와 풀벌레, 개 짖는 소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레인코트검은우산...춥고 서럽던 ‘궂은비’가 낭만의 상징으로
이영미의 7080 노래방 <15> 비를 즐기는 젊은 도시적 감성의 출현
|
하지만 이렇게 비를 즐기는 태도는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전근대시대의 민요에서 비는 풍년의 상징이었다. 익산의 민요 ‘비 타령’에서는 가뭄 끝에 내리는 비를 ‘옥중 춘향이 임 만난 듯’ ‘비를 맞아도 나는 좋고 밥 아니 먹어도 배가 불러’라고 노래한다. 이 기막힌 환희는 농사꾼들의 노래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의 노래인 식민지시대의 트로트에 도달하면 비의 의미는 고통과 슬픔으로 고정화된다. 백년설의 ‘번지 없는 주막’의 ‘궂은비 내리는 이 밤도 애닯구려’라는 표현에서처럼, 이 시기 트로트 속의 비는 늘 ‘궂은비’다. 이는 트로트의 시대가 계속되는 1950년대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 /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 넘어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고나’(현인의 ‘비 내리는 고모령’, 1949, 호동아 작사·박시춘 작곡) 이 노래는 현인의 초기 히트곡으로, 49년의 음원을 들어보면 현인이 처음부터 그 희한한 창법으로 노래한 게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성악 공부를 한 적이 있는 현인의 클래시컬한 창법이 매우 신선하여 흥미롭게 듣게 되는 노래다. 이 노래에서도 비는 고향을 떠나올 때 어머니와의 고통스러운 이별을 느끼게 해주는 ‘궂은비’다. 50년대 초의 ‘울고 넘는 박달재’에서도 마찬가지다.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 산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굽이마다 /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박재홍의 ‘울고 넘는 박달재’, 1950, 반야월 작사·김교성 작곡)
반야월의 섬세한 묘사가 빛나는 가사다. 남자를 보내는 여자의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어 어깨에 달라붙어 있고 그 위로 다시 모진 비가 떨어지고 있는 장면이다. 이 시대까지만 해도 비는 춥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우산이 흔치 않았고 갈아입을 옷도 변변치 않았던 시절, 게다가 집 바깥을 헤매는 사람들에게 비는 고통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60년대 중반 들어서면서 전혀 다른 태도로 비와 만나는 작품이 등장한다.
‘가슴속에 스며드는 고독이 몸부림 칠 때 / 갈 길 없는 나그네의 꿈은 사라져 비에 젖어 우네 / 너무나 사랑했기에 너무나 사랑했기에 / 마음의 상처 잊을 길 없어 빗소리도 흐느끼네’(패티 김<사진>의 ‘초우’, 1966, 박춘석 작사·작곡)
패티 김의 본격적인 한국 활동 시작을 알린 이 노래는 정진우 감독의 영화 ‘초우’(1966)의 주제가였다. 박춘석의 유려한 선율, 요즘 말로 ‘럭셔리’한 패티 김의 목소리와 피아노 반주가 어우러져 당시로서는 고상이 뚝뚝 떨어지는 노래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영화 ‘초우’ 속 비의 의미다.
영화는 프랑스대사 집의 가정부인 문희와 자동차 정비공 신성일이 각기 대사 딸과 부잣집 아들로 행세하며 서로를 속이는 연애를 한다는 이야기. 여기에서 문희는 늘 비 오는 날을 기다린다. 주인집에서 얻은 프랑스제 레인코트를 입고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쉘부르의 우산’에서와 같은, 동글동글한 우산들이 오가는 도시 풍경이 화려한 미장센으로 펼쳐진다.
예쁜 우산을 쓰고 레인코트를 입고 뽐내며 다닐 수 있게 된 60년대 대도시에서는 비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파란색의 싸구려 비닐우산이나마 그리 힘들지 않게 구하는 시대, 돈만 있으면 레인코트에 검정 우산, 예쁜 장화까지 구색을 갖춰 거리에 나설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니 비는, 쏟아지는 햇볕과 함께 멋진 도시 풍경을 만들어 주는 또 다른 요소가 된다.
이 노래보다 2년이나 일찍 발표되었으나 70년 신중현의 시대가 열리면서 대중적으로 히트한 ‘빗속의 여인’ 역시 바로 이런 변화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 지금은 어데 있나 / 노란 레인코트에 검은 눈동자 잊지 못하네 / 다정하게 미소 지며 검은 우산을 받쳐주네 / 나리는 빗방울 바라보며 말없이 말없이 걸었네 /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 그 여인을 잊지 못하네’(애드포의 ‘빗속의 여인’, 1964, 신중현 작사·작곡)
애드포는 62년 신중현이 결성한 록그룹이다. 한국 록그룹으로서는 거의 원조 격에 해당하는 밴드이기도 하다. 64년 첫 음반을 내는데 68년 이후 히트한 ‘커피 한 잔’ ‘빗속의 여인’ 등이 실려 있다. 2003년 영화 ‘살인의 추억’에 삽입되어도(가사 중 ‘노란 레인코트’를 ‘빨간 레인코트’로 바꾸었다) 촌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던 노래였는데 말이다.
레인코트 입은 여자가 남자와 검은 우산 속에서 속삭이며 함께 빗길을 걸어가는 이미지는 이제 비가 단순한 고통의 의미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음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과 헤어진 후에도 비는, 사랑을 추억하게 하는 분위기 있는 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60년대 중반의 이들 노래는, 70년대부터 쏟아져 나오는 온갖 비 노래를 예비하는 서곡 정도에 불과했다. 비를 소재로 한 대중가요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점점 커지는 유리창,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창 밖과 창 안’
이영미의 7080 노래방 <16> 유리창과 비
|
“님이 오시나보다 밤비 내리는 소리 / 님 발자욱 소리 밤비 내리는 소리 / 님이 가시나보다 밤비 그치는 소리 / 님 발자욱 소리 밤비 그치는 소리 / 내려라 밤비야 내 님 오시게 내려라 / 주룩주룩 끝없이 내려라” (이장희의 ‘비의 나그네’, 1972, 이장희작사·작곡)
윤형주·이장희(사진) 등도 세시봉 콘서트에 나와, 어느 해 홍수가 난 때에 방송에서 이 노래를 틀었다가 혼쭐이 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물난리가 났는데 “내려라 밤비야” “끝없이 내려라”라니!
그런데 이 노래만이 아니다. 1970년대 포크 시대에 들어오면 비는 수시로 등장한다. ‘렛 잇 레인(Let it rain)’ ‘레인(rain)’ 같은 외국곡에다, 송창식의 ‘비와 나’ ‘창밖에는 비 오고요’, 이장희 ‘애인’ ‘그건 너’, 양희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김세환의 ‘비’에 이르기까지 비가 없으면 거의 노래가 안 될 지경이다.
흥미로운 것은 비에 대한 태도다. ‘애인’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처럼 이별의 슬픈 장면에서 쏟아지는 비는 60년대 대중가요에서도 익숙한 풍경이다. 하지만 “비가 오면 빗속을 거닐었고 눈이 좋아 눈길을 걸었소”(‘우리의 이야기들’), “우리 처음 만난 날 비가 몹시 내렸지 쏟아지는 빗속을 둘이 마냥 걸었네”(‘비’)처럼, 그저 비 맞기를 즐기는 감수성은 정말 여태껏 나타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었다. 아마 이들은 분명 ‘그건 너’의 주인공처럼 “비가 오는 종로거리를 우산도 안 받고 걸었”을 것이다. 왜 이 나이 때는 꼭 이런 짓을 해보고 싶어지는 걸까. 나이가 들고 보니, 정말 이 짓은 끓는 피를 주체할 수 없는 젊은 나이 때나 해볼 수 있는 짓이란 생각이 든다.
비를 애인과 등치시킬 정도로 비를 사랑하는 노래도 꽤 있다. 위에서 소개한 ‘비의 나그네’에서는 비 오는 소리를 애인이 오는 소리라고 한다. 송창식이 자작곡 가수(싱어송라이터)로 본격적인 출발을 하는 노래인 ‘창밖에는 비 오고요’에서도 “창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그대의 귀여운 얼굴이 날 보고 있네요”라고 노래한다(지난해 토크쇼에서, 이 노래가 윤여정 생일에 송창식이 “여정이 귀여운 얼굴이 날 보고 있네요”라고 불러 바쳤다는 이야기가 공개되기도 했다). 왜 하필이면 ‘그녀’는 비와 함께 나타나는 것일까. 그녀도 비를 좋아하는 걸까. 아니, 아마 비가 오는 밤에 잠이 오지 않는 주인공이, 골똘히 그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을 듯하다. 아마 그는 창밖에 그녀가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비를 사랑하는 감수성이야말로 청년문화 시대의 새로운 것이었다. 지난주에 이야기했듯, 바깥에서 비를 맞으며 헤매거나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던 50년대까지만 해도 대중가요 속의 비는, 늘 춥고 고통스러운 ‘궂은 비’였다. 그에 비해 비를 사랑하는 청년문화 시대의 감수성은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의 특성이다. 게다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빗소리를 듣고 있다니, 그 역시 낮에 몸을 움직여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의 특성이다. 낮에 일을 하지 않으니 밤에 자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청년문화가 시작된 시대는 바로 이러한 대도시 속 젊은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대였다. 낮에 열심히 육체노동 하며 험하게 살아왔던 부모 세대들과 달리, 이들은 실내에서 창문을 통해 비를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을 살게 된 것이다. 게다가 훤한 대낮이 어른들의 질서가 관철되는 현실의 공간이라면, 밤은 오로지 자신을 대면하면서 상상과 사유를 펼쳐볼 수 있는 공간이다. 거기에 차분하게 비가 내리고 유리창에 빗방울 부딪는 소리까지 들리니 이 얼마나 좋은가.
유리를 통해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지식청년들의 이야기는 이미 50년대 말 최인훈의 『그레이구락부 전말기』에서 등장했거니와, 70년대에는 그것이 대중가요에 숱하게 등장할 정도로 대중화되었다. 아마 그 절정은 80년대 말의 이 노래가 아닐까.
“빗방울 떨어지는 그 거리에 서서 / 그대 숨소리 살아있는 듯 느껴지면 / 깨끗한 붓 하나를 숨기듯 지니고 나와 / 거리에 투명하게 색칠을 하지 / 음악이 흐르는 그 카페엔 초코렛색 물감으로 / 빗방울 그려진 그 가로등불 아래 보라색 물감으로 / 세상사람 모두 다 도화지 속에 그려진 풍경처럼 행복하면 좋겠네 / 욕심 많은 사람들 얼굴 찌푸린 사람들 마치 그림처럼 행복하면 좋겠어”(강인원·권인하·김현식·신형원의 ‘비 오는 날의 수채화’, 1989, 강인원 작사·작곡)
이 노래가 유행하던 80년대 후반은 대형 유리창으로 바깥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커피전문점들이 생기던 때였다. 대형 유리창 바깥으로 늘 보이던 매연 뒤집어쓴 뿌연 도시가, 비 덕분에 오랜만에 선명한 색깔을 빛내고 있다. 유리 안쪽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만이 즐길 수 있는 호사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이들은 먼지투성이 속에서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대도시의 번잡한 일상이 정말 싫어진 시대로 들어섰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부모 세대들이 그토록 바랐던 현대화된 도시가 이들에게는 답답한 족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오죽하면 김현철은 ‘비가 오면 서울도 괜찮은 도시’라는 제목의 노래를 지었겠는가. 이쯤 되면 대낮에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걸을 때에 해방감이 느껴질 것이다. 옷 버릴까 두려워하는 어른들은 미친 짓이라 했겠지만 말이다.
한상진 기자의 藝人 탐구 ⑥] 가수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는 하늘이 내린 선물”
최백호(61)는 가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그를 라디오 DJ로 더 알아준다. 그가 진행하는 ‘최백호의 낭만시대(낭만시대)’ 때문이다. 지난해 가을부터 아마추어 색소폰 연주가들을 위한 콘테스트 ‘색소폰, 인생을 연주하다’를 시작했는데, 이게 대박을 쳤다. 강호의 고수들이 모여들었다. 색소폰은 최백호의 대표곡 ‘낭만에 대하여’와도 잘 어울린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최백호는 1977년 어머니를 생각하며 부른 노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데뷔했다. ‘가을엔~ 떠나지 마세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라는 노랫말은 30년이 넘은 지금도 가을 타는 남자들의 가슴을 때린다.
최백호는 아주 ‘낭만’적인 차림으로 인터뷰 장소에 나타났다. 베이지색 진에 갈색 구두, 진녹색의 재킷, 하얗게 센 머리칼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낙엽이 떠오른다. 짙은 경상도 사투리엔 바다냄새가 스며 있었다.
▼ 선생님은 가을에 뵀어야 하는데….
“좀 그런 느낌이 나지요? 성격은 안 그런데, 하하.”
▼ 요즘 ‘낭만시대’가 화젭니다. 색소폰 때문에.
“예. 요즘 색소폰이 상당합니다.”
▼ 하고 많은 악기 중에 왜 색소폰입니까.
“(색소폰 부는 흉내를 내며) 폼이 멋있으니까. 대단한 분이 많습니다. 이번 주엔 여성분이 1등을 했는데, 50대 중반 되신, ‘베사메 무쵸’를 아주 기가 막히게….”
▼ 하여튼 생각지도 않게 라디오에서 히트를 하셨어요.
“방송국에서도 한 1년 생각하고 맡긴 것 같은데…, 실험적인 케이스로. 그런데 저는 길게 갈 줄 알았습니다. 벌써 3년이 됐지요. FM 103.5Mhz에서 지금 최장수예요. 다른 사람들은 다 짤렸는데(웃음).”
▼ 선생님은 어떻게 가수가 되셨어요.
“원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화가가 되려고 그랬고, 어머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 가세가 기울어서?
“어머님이 시골 국민학교 선생님이셨어요. 그 수입으론 누나와 제가 대학에 못 가죠. ‘다음해에 대학 가라’ 그랬는데, 제가 스무 살 때, 재수하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고 한동안은 그냥 멍한 상태로 아침을 맞았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몰라서. 그러다 군대에 갔지요.”
참고로, 최백호의 부친은 29세의 나이로 부산에서 국회의원(2대 민의원)에 당선됐던 최원봉이다. 최백호가 태어나던 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하며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은 길을 갔다. 6·25 전쟁 당시 북진하던 연합군(터키군) 트럭과 최원봉이 탄 지프가 충돌하는 사고였는데, 그의 죽음을 두고 ‘정치적인 암살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유가족들은 진상조사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먹고살려고
▼ 그럼 노래는 언제부터….
“군대도 결핵으로 의병제대했지요. 1년 만에. 나오니까 뭐, 아무 기술도 없지요. 친구들하고 기타 치고 노래 부르는 건 좋아했지만, 직업이 될 정도라고는 생각 못 했지요. 친구의 매형이 부산 서면에서 통기타 업소를 차렸는데, 이름이 ‘나들이’인가? 거기서 가수들 노래하는 거 보니까 ‘야, 저 정도면 나도 되겠다’ 싶더라고요.(웃음) 생활도 어려운데 그냥 ‘해보자’ 그랬죠.”
▼ 그림은 포기하시고?
“사실 중학교까지는 열심히 그렸는데, 고등학교 때는 공부를 안 했지요. 고등학교도 가야고등학교라고, 어머니가 어거지로 넣어줬는데, 그땐 이름도 가야가 아니고 항도고등학교, 3차 학교였어요. 탁 들어가니까 정말, 굉장히 독특해요.”
▼ 뭐가요?
“복싱하는 놈이 없나, 깡패들 다, 부산에서 유명한 애들 다 모여 있고.”
▼ 다니긴 다니셨어요?
“중간에 다니다 말다, 졸업하기 6개월 전에 다시 들어가서 졸업장은 받았어요. 졸업식엔 안 갔는데, 어머니가 교문 앞에서 졸업장 들고 만세를 부르셨다고(웃음).”
▼ 대학시험은….
“공부는 안 했어도 그림에 대한 어떤 그런 건 있었는데, 미대를 가겠다는. 근데 저희 때부터 예비고사가 시작된 거예요, 학력고사. 운 나쁘게, 예비고사 치러 가보니까, 뭐 시험지 받아보니까, 아는 건 하나도 없고, 그래서 점심시간에 나와 버렸어요.”
▼ 예비고사 보다 말고?
“하나마나다 생각해서. 그러곤 먹고 살기도 힘들어서 관뒀어요. 당장 잘 곳도 없었으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최백호는 길에 나앉았다. 그는 당시를 ‘완전제로’라고 표현했다. 밥만 먹여준다면, 뭐든 다 했다. 부산 서면에 있던 동보극장에 들어가 극장 간판 그리는 일도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 간판 그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노래 시작한 뒤로는 운이 좋았어요, 지금도 운이 좋지만. 부산에서 한 1년 반 정도 하다가 바로 서울로 올라왔고요. 같이 노래하던 친구하고 남영동에서 하숙을 했어요. 여기저기서 노래 부르면서.”
8만장 팔린 데뷔곡
▼ 어디서 노래를 하셨어요?
“명동 음악카페, 그 당시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불렀던 하수영씨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하수영씨한테 노래하는 법, 악보 보는 법 같은 걸 배웠어요.”
▼ ‘젖은 손~이 애처로워’ 그 노래?
“예, 맞아요. 그 노래가 히트한 다음에 전화가 왔어요. ‘시간 나면 올라와라, 서울에’. 그래서 올라왔지요. 하수영씨가 서라벌레코드사도 소개해주고, 거기 유명했거든요.”
▼ 바로 가수가 된 거네요.
“그 레코드사에서 피아니스트였던 최종혁씨를 만났는데, 그분이 제 노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작곡하셨어요. 윤시내의 ‘열애’, 김종찬의 ‘사랑이 저만치 가네’ 같은 곡을 쓴 분이에요. 그분도 그때는 무명이셨고, 그렇게 시작했어요.”
▼ 주변에 좋은 분이 많았네요.
“그래도 ‘아, 이게 천직이구나’ 이런 생각을 못했어요, 그때는.”
▼ 왜 그랬을까요.
“그땐 노래가 막 좋아서 한 게 아니니까, 먹고살려고 한 거니까. 좀 알려지고도 노래에 그렇게 매달리지 않았어요.”
▼ 데뷔곡(‘내 마음 갈 곳을 잃어’)부터 대박을 쳤는데….
“그 당시 한 8만장이 팔렸다 그래요. 엄청난 거죠. 근데 돈은 못 벌었어요.”
▼ 아니, 왜요.
“레코드사 사장님이 돈을 안 주니까. 첫 앨범 히트하고 두 번째 앨범을 낼 때도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제가 하숙비를 못 낼 정도였어요.”
▼ 히트곡이 나온 뒤에도요?
“하숙비는 사장님이 주시는데, 다른 걸 못하게 했어요. 특히 돈 버는 일은. 지방 쇼도 못 하게 했고, 그런 걸 하면 앨범이 안 팔린다고. 섭외도 많이 들어왔는데 일절 못하게 하는 거예요. 거기다 전속계약도 5년이나 했으니.”
▼ 계약금은 받았을 텐데….
“5년 계약하면서 50만원 받았어요. 꽤 괜찮은 돈이었죠. 하숙비가 해결되는…. 하숙비가 한 달에 3만~5만원 정도였어요.”
▼ 50만원이면 큰돈이네요. 1년치 하숙비.
“아~ 근데 50만원 주면서 40만원은 다시 가져갔어요. 앨범 홍보한다면서.”
▼ 그래서 하숙비를 못 내셨구나.
“그러니까 주변에서 유혹이 계속 들어오지요. 다른 레코드사에서.”
▼ 전속계약 깨고 우리랑 일하자?
“그래도 ‘계약기간, 3배 위약금 때문에 못 간다’ 그랬죠. 근데 하숙비가 한 3개월 밀리니까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레코드사에 최후통첩을 했지요. ‘이번 주까지 하숙비를 해결 안 해주시면 다른 데 갑니다’라고.”
▼ 최후통첩으로….
“그러니까 사장님이 ‘이번 주말까진 해주겠다’ 그래요. 그래서 기다렸는데 약속한 날에 사장이 지방에 가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 길로 돈 많이 주겠다는 사장님을 만났지요. 계약금으로 900만원인가를 받고.”
▼ 엄청 받았네요. 초특급 대우로.
“지금 생각하면 한 1억원 정도의 가치가…. 그땐 850만원 주고 반포에 집을 샀으니까.”
▼ 인생역전이네요. 그래서 집을 사셨어요?
“제가 그때 세상물정을 얼마나 몰랐느냐 하면, 돈을 은행에 어떻게 넣는지를 몰랐어요. 그래서 돈 900만원을 하숙집 이불 안에다 탁 넣어놓고 조금씩 꺼내 썼어요. 그러다 둘째누님이 서울에 올라와서 그 돈을 뺏어서 아파트를 사신 거죠, 전세를 끼고.”
▼ 하숙은 계속하면서?
“예. 여러 군데 옮겨 다니면서….”
▼ 옮긴 곳에선 돈을 제대로 받았어요?
“말도 마세요. OO레코드로 간다고 하니까, 주변 가수들이 그래요. ‘그 회사에 가거든 무조건 현금을 받으라’고. ‘어음은 절대 받지 말라’고. 난 어음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진짜 계약서를 쓰려고 서대문에 있는 으리으리한 사장님 집에 갔는데, 사장님이 ‘아~ 그거 말이야. 갑자기 현금이 없어서 어음을 받아야 되겠어’ 그러는 거예요. 들은 얘기도 있고 하니까 ‘현금 준다고 약속했지 않느냐’고 따졌죠. ‘현금 아니면 못한다’ 그러면서. 그랬더니 사장님이 ‘아, 지금 현금이 필요한 거야?’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예. 그렇습니다’ 그랬더니 ‘잠깐만 있어 봐’ 하면서 2층에 있는 자기 며느리를 부르는 거예요. ‘야~ 며늘아~’ 하면서. 그러곤 그 젊은 며느리한테 ‘최백호씨가 말이야, 현금이 필요하단다. 그러니 니가 와리깡 좀 해드려라’ 그러는 거예요(웃음).”
▼ 자기가 준 어음을 자기 며느리한테 깡을 해라?
“예. 이게 코미디 같은 얘기잖아요. 15% 까고 주라고.”
▼ 15% 까고 760만원 정도만 받아가라 그거네요.
“당연히 못한다고 했죠. 그러니까, 2층에 현금을 쌓아놓고 있는 거지요.”
▼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날은 그냥 나왔고 몇 번 승강이를 하다가 결국 현금을 받긴 했어요. 그땐 그 세계가 다 그랬어요.”
▼ 그 레코드사 이름이 뭡니까?
“그 당시 가수들은 다 알아요. 유명한 레코드사였어요.”
▼ 선생님은 예전보다 요즘이 더 목소리가 좋은 것 같아요.
“예. 훨씬 좋아졌습니다.”
▼ 더 탁하고 허스키해졌는데 듣기는 더 좋아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예전보다 지금 노래를 훨씬 잘합니다. 젊었을 때는 노래를 참 못했어요. 노래가 붕붕 떠다녔다고 할까요? 노래의 맛을 몰랐다고 할까요? 자신감도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땐 건강도 별로 안 좋았고.”
시가로 담배 끊기
▼ 노래에 자신이 생겼다?
“예. 제가 생각해도 요즘 노래를 훨씬 더 잘합니다.”
▼ ‘낭만에 대하여’만 봐도 1995년 첫 앨범보다 요즘 낸 앨범 버전이 더 좋습니다.
“(1995년 녹음한 노래는) 엉성합니다.”
▼ ‘궂은 비 내리던 날 / 그야말~로’ 이렇게 들어갈 때 호소력이 더 좋아졌어요.
“예. 정확합니다. 저는 알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이런 얘길 듣는 건 처음입니다. 방송국 PD 중에도 이런 얘길 한 사람이 없었어요. 사실 제가 1997년부터 음식조절을 시작했습니다. 육식을 끊었고요. 아마 그런 영향 같습니다.”
▼ 지금도 안 해요? 육식을?
“생선하고 채소만 먹습니다. 또 뿌리 채소는 안 먹습니다. 감자, 고구마, 인삼 같은.”
▼ 특별한 이유라도….
“우연히 알게 된 한의사가 제 체질에는 그런 것이 안 좋으니까 끊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확실히 좋아졌어요. 피곤한 것도 없어지고, 호흡도 좋아졌고요. 옛날엔 목이 많이 걸리고 칼칼해서, 내가 의도하는 노래가 안 만들어졌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할 수 있으니까. 보통 가수들은 나이가 들면 키가 내려가거든요. 고음이 안 되니까. 그런데 저는 반대로 올라왔어요.”
▼ 젊었을 때보다?
“많이 올라왔어요. 옛날에 ‘낭만에 대하여’란 노래를 기타로 치면 D마이너로 불렀는데, 지금은 하나 반을 올려서 F마이너로 부르거든요.”
▼ 음식 조절의 영향일까요?
“담배도 그때쯤 끊었고요.”
이쯤에서 최백호가 담배를 끊은 사연과 방법을 소개코자 한다. 그처럼 담배를 끊은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아주 그럴듯해 보였다. 간단히 말해, 담배(시가)로 담배를 끊는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인데, 담배를 못 끊어 고민 중인 사람들에게 감히 권해본다.
▼ 담배를 끊은 계기가 있어요?
“계기는 없고,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를 부르고 나서 김수현 선생님의 출판기념회에 초청을 받아 갔는데, 같은 테이블에 작가 최인호 선생님이 계신 거예요. 처음 뵀죠. ‘고래사냥’ 쓰신. 근데 보니까 최인호 선생님이 (한 뼘 정도를 내보이며) 이만~한 시가를 피우시는 거예요, 향이 너무너무 좋은. 그래서 ‘시가 참 좋네요’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큰 걸 하나 주시면서 ‘자네도 이제 나이가 됐으니까 시가 피워, 담배 피지 말고’ 그러시잖아요, 그게 꽤 비싼데. 그걸 받아 와서 피우는데 굉장히 향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시가를 피웠어요. 근데 시가를 피니까 담배가 맛이 없어지는 거예요. 파는 데도 많지 않아서 사기도 힘들고, 또 비싸고요. 어떤 건 하나에 몇 십만원도 하니까.”
▼ 시가가 더 독하지 않나요?
“시가는 안 마시거든요. 입으로 뿜어서 코로 향기를 맡는 거예요. 그거를 피기 시작하면 진짜 담배가 맛이 없어져요. 쓰게 느껴진다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2주 만인가? 그냥 시가만 피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다 떨어지면 며칠씩 안 피우게 되고. 어느 날 보니까 한 사흘을 안 피웠더라고요. 그렇게 끊었어요. 힘들이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이 ‘시가요법’으로 담배를 끊은 친구들이 꽤 있어요.”
▼ 좋은 방법이네요.
“시가는 또 함부로 못 피워요, 향이 강하니까. 냄새 때문에 눈치도 보이고. 담배 못 끊는 사람들은 한번 해볼 만해요.”
▼ ‘낭만에 대하여’ 얘기 좀 더 하죠. 일단 가사가 아주 좋은데, 뭘 생각하며 쓰신 거죠? (‘낭만에 대하여’는 1996년 KBS 가요대상 작사상을 받았다)
“제목은 노래를 다 만들고 난 뒤에 붙였어요. 노래를 다 만들고 나서 가사를 읽어보니 ‘아~ 이게 낭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노래 맨 마지막에 ‘낭만에 대하여’라고 붙였죠. 옛날 다방, 색소폰, 도라지 위스키 같은 기억들을….”
김자옥과의 첫 결혼
▼ 특별한 장소가 있는 건 아니고요?
“부산 동래에 한 다방이 있어요. 내가 굉장히 힘들었을 때 우연히 갔던, 비가 막~ 오던 날, 우산도 없이 쑥 들어간 다방인데, 손님도 없고. 다방 구석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마신 거죠, 음악다방도 아닌 그냥 다방에서. 그때 색소폰 음악이 하나 들려오는데, 너무 가슴에 와 닿는 거예요. 여자 종업원에게 LP재킷을 보여 달라고 해서 보니까, 에이스 캐논의 ‘Laura’라는 연주곡이었어요. ‘바바밤~’ 이렇게 시작하는, 그걸 한 20번 이상은 들었을 거예요. 그런 기억을 끄집어내서 만든 노래예요.”
▼ 첫사랑 여인은요.
“그건 정확지 않아요. 대상자가 한 댓명 되는데, 아마 그 친구들은 이 노래를 들으면서 다 자기 얘기라고 생각할 거예요.(웃음)”
▼ 첫 결혼에는 실패하셨죠. 아주 떠들썩한 결혼이었는데….
“예. 그 사람과는 한 3년 정도…, 짧았어요. 가수로서 어느 정도 올라가다가 막 떨어질 때였어요.”
▼ 어떻게 만나 결혼까지 하셨어요?
“그땐 막 아무 공연이나 가고, 술 마시고 다니고, 그런 때였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어떤 공연에서 만났고, 제게 참 잘 해줬어요. 하루는 전화가 왔는데, 하숙집으로. 홍은동에서 하숙할 땐데, 얘기를 참 많이 했고…, 너무 어렸죠.”
▼ 연애는 얼마나 하셨어요?
“한 5~6개월? 그쪽도 마찬가지고 저도 마찬가지지만, 결혼한 그 순간에 이미 ‘아, 이거 잘못했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 사랑해서 결혼까지 했을 텐데….
“성격 차이로 헤어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정말 그런 게 있어요.”
▼ 짧은 시간 정말 불꽃같은 사랑을….
“예. 하여튼 굉장히…. 외로울 때니까. 그쪽도 마찬가지고.”
▼ 헤어질 땐 어땠어요?
“감정이 대립해서 막 싸우고 그런 게 아니고, ‘아, 이건 아니다’ 싶어서 그냥 편안하게 했어요. 그래서 어떤 나쁜 감정이 없어요, 지금도. 그 사람하고 같이 살았던 기간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요, 안 믿겠지만.”
▼ 3년이면 짧은 시간이 아닌데….
“실질적으로 한 1년 반 정도 살았지요. 그 외에는 제가 집에 거의 안 들어갔고, 지방공연을 가서 거기서 뭐 오래 있다든지 그랬고. 나쁜 감정 전혀 없고, 뭐 그렇다고 좋은 감정이야…. 지금도 방송국에서 간혹 마주치면 서로 안부 묻고 하지요.”
▼ 두 분이 갈라서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사건 사고라도.
“아니오. 그런 건 없었어요. 내가 워낙 밖으로 도니까, 그러다 어느 날 ‘조금 별거를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얘기가 나왔고….”
▼ 먼저 제안하셨어요?
“아니, 난 ‘별거하지 말고 그냥 (이혼)하자’, 그게 낫지 않겠느냐’ 그랬고. 그리고 아주 편안하게….”
▼ 바람 피우셨어요?
“아니에요. 그 얘기는 그 정도만 하시죠.(웃음)”
▼ 지금 부인도 음악을 하셨죠?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콘트라베이스 전공했죠. 제가 이태원에서 노래를 하고 있을 때, 아는 분 소개로 만났어요. 그 사람이 처음엔 자기 처제라고, 나이 차이가 10년이나 나서 처음엔 (결혼은) 생각도 안 했어요. 내가 결혼했던 경험도 있고 하니까. 그런데 점점 가까워졌죠.”
하루에 딱 10분 방송
▼ 결혼에 이른 계기가 있을 텐데….
“와이프하고 내가 만나는 걸 알고 처갓집에서 되레 막 일을 벌인 거예요.”
▼ 좋다고요?
“(손사래를 치며) 아니요. 야단이 난 거지요, 우리 둘을 못 만나게 하려고….”
▼ 반대가 심했군요.
“장인어른이 찾아오시고, 장모님도 험악하게…, 결국 결혼식에도 안 오셨어요.”
▼ 누가요?
“장인어른이, 장모님만 오시고. 내가 직업도 그렇고, 결혼도 한 번 했고, 그것도 아주 떠들썩하게…. 하여튼 결사반대하셨죠.”
▼ 어떻게 해결하셨어요.
“딸을 낳고 나니까, 그때 장인이 제주도에 계셨는데, 전화를 하셨어요. 굉장히 무뚝뚝한 전라도분이신데, ‘술 담가놨으니까, 애기 데리고 한 번 와라’ 이러곤 탁 끊어버리시는 거예요. 그 일 이후로 절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지금은 돌아가셨고….”
▼ 1990년대 초 미국에 이민을 가셨죠.
“1990년에 가서 92년에 나왔죠. 가서 방송국 일도 하고.”
▼ 미국엔 왜 가셨던 거예요?
“뭐, 여기서는 벌이가 없으니까, 생활이 어려우니까. 마침 박 사장이라고 아는 분이 LA에다 방송국을 차리는데 같이 가자고 해서. DJ 이○○씨하고 했던 방송, 이○○씨는 기술적인 부분을 맡고, 박 사장이 투자를 했죠. 그때 처가도 미국에 있었으니까, 그냥 보따리 싸 가지고 간 거죠.”
▼ 일은 잘되셨어요?
“생각처럼 안 됐어요. 이○○씨하고 박 사장하고 사이가 안 좋아서. 전 박 사장파니까 이○○씨가 날 굉장히 경계했죠. 못살게 굴었어요.”
▼ 거기선 무슨 일을 하셨어요?
“제가 월급도 아주 많이 받았는데, 하루에 딱 10분짜리 방송을 했어요. 편성은 이종환씨가 다 책임지니까.”
▼ 그래도 이름이 난 가순데….
“그러게요. 낮 11시50분에서 12시까지 딱 10분. 광고주였던 한인타운의 식당, 자동차 정비소, 슈퍼마켓 주인들을 불러 가지고 자기 PR을 하는 코너였어요. 우리 식당은 뭐가 맛있다, 이런 거. 시간은 10분인데, 노래 하나 걸고, 광고 나가면 실제론 5분밖에 안 되는 거예요. 난 괜찮은데 오히려 교민들이 항의전화를 했어요. ‘그 사람이 아무리 방송을 못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가수하던 사람인데 그러면 되느냐’고…(웃음).”
▼ 기분 나쁘셨겠네요.
“난 좋죠. 하루에 딱 5분만 일하니까. 그때 골프를 배웠어요(웃음).”
▼ 방송국은 어떻게 됐어요?
“금방 망했죠.(웃음) 사실 전 그때까지만 해도 가수라는 직업을 하찮게 생각했어요. ‘언제든지 빨리 그만둬야지’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누구의 아들인데’ 같은 그런 생각도 있고. 내가 가수를 한다는 게 사실 마음에 와 닿지가 않았어요. 먹고살기 위해서 시작은 했지만….”
▼ 천직이라는 생각이 없었다?
“예. 그러니까 열성적으로 하지를 않았지요. 그런데 미국에 가 있는 2년 동안 ‘야, 이게 내 천직이구나’ 하는 걸 느낀 거예요. 한 6개월간 노래를 안 하고 있으니까, 노래가 막 하고 싶은 거예요. 노래방엘 갔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2년 만에 나와버렸어요.”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
▼ 혼자 나오셨어요?
“1년 정도는 혼자 나와 있으면서 준비를 했죠. 미사리 같은 곳에서 일하고요. 그러다가 딱 나온 게 ‘낭만에 대하여’예요. 갑자기 왔죠, 하루아침에. 앨범 내놓고 1년 반 동안 PR을 전혀 안 했는데….”
▼ 최백호란 이름도 거의 사라져가고….
“예. 사라졌죠. 그런데 어느 날 제작사 여직원이 전화를 해서 ‘선생님, 이상해요’ 그러는 거예요. ‘왜?’ 물으니까 ‘갑자기 주문이 1500장 들어왔어요’ 그래요. 한 달에 20장 팔리던 게. 그래서 내가 농담으로 ‘야, 임마, 그게 뭐가 이상해, 이제 정상이지’ 그랬다고요. 그러곤 잊어버렸지요. 그런데 또 전화가 왔어요, 추석 전날. ‘선생님, 1만5000장 주문이 들어왔어요’ 하는 거예요. 그제야 ‘아~ 장난이 아니구나’ 했죠.”
▼ 이유를 물어보셨을 텐데….
“‘왜 그런데?’ 물어보니까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냥 회사가 야단났다고. 공장을 풀로 돌려야 한다고. 그런데 그날 저녁에 인터뷰하자는 전화가 왔어요.”
▼ 어디서요?
“어느 신문에서.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얘길 하더라고요. 무슨 TV드라마에 내 노래가 나온다고.”
▼ 아~‘목욕탕집 남자들’?
“예.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장용 선생님이 그 노래를 부른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35만장이 나갔어요.”
▼ 35만장이요?
“제작사 대표였던 유OO씨가 처음 앨범 낼 때 나하고 농담하면서 ‘이게 15만장 나가면 한양컨트리클럽 회원권을 사드릴게요’ 그랬는데, 35만장 나가니까 보너스로 딱 500만원 주더라고요(웃음). 그 사람하고는 그걸로 끝났죠.”
▼ 그래도 돈을 좀 버셨죠?
“그 앨범 때문에 제가 다시 살아났죠. 그 노래는 참 묘해요. 14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앨범이 팔려요. 그래서 생각하죠. 이건 진짜 나한테 하늘이 던져준 거다. 고생했으니까 ‘너 가져라’ 하고.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이 대목이 전 참 좋아요, 내가 썼지만. 이 노래 만들 때, 제가 거실 한쪽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만들다가, 설거지하는 와이프에게 이 노래를 불러줬거든요. 그랬더니 집사람이 그러대요. ‘첫사랑 소녀를 못 잊어서 이제는 노래까지 부르는구나’(웃음).”
▼ 이 노래 하나로 고생이 끝나셨네요.
“배철수씨는 ‘고목에 꽃피었다’고 표현하던데, 정말로 모든 게 다, 돈도 벌었고. 이 노래로 제가 지금도 굉장히 비싼 출연료를 받고 있고. 뭐랄까, 이 노래는 제게 큰 존재로 느껴져요.”
▼ ‘목욕탕집 남자들’ 쓰신 김수현 작가님은 이 노래를 어떻게 아셨대요?
“아~ 그것도 참, 선생님이 어느 날 차에 딱 탔는데,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그 대목이 라디오에서 나오더래요. 그래서 운전기사한테 ‘이게 무슨 노래냐?’ 물으니까 운전기사도 모르는 거지요. ‘야, 이거 알아봐라’ 그래서 카세트를 구해서 들으셨대요. 그러고 바로 드라마에 넣으셨고요. 사실 가수로서는 자존심이 상하죠. 내가 불러 히트한 게 아니고 다른 사람(장용)이 불러서 히트한 거니까(웃음).”
골프에 미쳤다
▼ 아까 미국에서 골프를 배우셨다고 했는데요.
최백호의 골프실력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래 기사 하나가 모든 걸 말해준다.
“(최백호는) 백스윙을 짧게 하면서 임팩트 위주로 친다. 입문 6개월 만에 77타의 ‘싱글 스코어’를 냈다. 베스트 스코어는 3언더파 69타. 미국과 한국(88CC)에서 한 차례씩 기록해봤다. 평균 드라이버샷 거리가 240~250야드에 달하는 장타자다. 파5홀 페어웨이에서 세컨드샷을 할 때도 드라이버를 사용할 정도로 드라이버에 자신이 있다.”(한국경제, 2002년 9월 17일)
“미국에 살 때, 저희 집 바로 옆이 골프장이었어요. 딱 10분 방송하고 12시에 끝나니까, 할 일이 없잖아요? 집에 가기도 그렇고. 친한 선배 따라갔다 골프를 배웠죠. 가보니까 15달러예요, 한 번 치는데. 그때 환율이 한 850원 됐으니까 만원 남짓이면 5시간을 재미나게 노는 거지요.”
▼ 그러네요.
“그래서 배웠죠. 그리고 매일매일 치는 거지요. 방송 끝나면 가서 치고. 선배들한테 배운 거니까 순엉터리로. 그래도 실력이 늘 수밖에 없어요. 바보를 갖다놔도 늘 수밖에 없죠. 매일 치니까. 나중엔 미쳐 가지고 새벽에 나가요, 5시쯤에. 골프백을 쭉 세워놓으면 순서대로 내보내는데, 그게 8달러였나 그랬을 거예요. 9홀만 치는 거지요, 새벽부터. 방송국에 가서 10분간 방송하고 와서 또 18홀 치고.”
▼ 그럼 하루에 27홀?
“매일 27홀씩 거의 한 1년을 쳤어요.”
▼ 하루도 안 빼고?
“주말에는 더 치죠. 선배들하고 다니면서 주말에는 36홀도 치는 거예요. LA에서 한 시간쯤 올라가면 랭캐스터라는 시골마을이 있는데, 거긴 일요일에도 텅텅 비는 골프장이 많아요. 굉장히 싸요. 클럽하우스도 없고, 돈 넣는 통만 하나 있는 곳도 많고.”
▼ 무인 골프장?
“‘5달러 내고 들어가서 치시오’ 이렇게 되어 있죠. 20달러 정도를 내고 하루 종일 치는 데도 있어요. 그런 데선 하루에 4라운드 정도를 치기도 해요.”
▼ 72홀?
“새벽부터, 72홀 치죠. 그래도 싫증이 안 났어요.”
▼ 한국에선 그렇게 못했을 텐데….
“일단 비싸서. 자주 못 쳤지요, 경제적으로도 굉장히 어려웠으니까. 골프 끝나고 목욕하는 것도 적응이 안 됐어요. 가서 밥 먹는 것도. 돈이 많이 드니까. 그래서 ‘그만둘까’ 생각도 했고.”
▼ 요즘은 얼마나 자주 치세요?
“일주일에 한 번 칩니다. 멤버들이 있어요.”
▼ 누구예요?
“배철수씨하고, 구창모, 주병진, 권인하 이런 친구들이지요.”
▼ 지금은 얼마나 치세요?
“거의 80대 중반. 많이 줄었지요, 연습을 안 하니까. 드라이버 거리도 줄고, 230야드 정도.”
▼ 멤버들 중엔 누가 제일 잘 치세요?
“권인하가 제일 잘 치지요. 거의 세미프로 실력이에요. 매주 수요일에 치는데, 20년이 넘은 편한 사람들이고, 나이는 제가 제일 많지만. 그래서 우리는 골프를 치면 첫 티샷은 항상 저부터 합니다, 나이순으로(웃음).”
‘화가’ 최백호
▼ 그림도 그리시잖아요? 얼마 전엔 전시회도 하시고.
“예. 개인전 한 번 했고, 두 번째 준비 중입니다.”
▼ 주로 뭘 그리세요?
“전 나무밖에 그릴 줄 몰라요.”
▼ 나무?
“나무는, 사람의 모습이랄까요? 우리도 다 고향을 떠나와서 살고 있잖아요. 나무가 고향인 산을 떠나서 사는 것처럼, 그런 느낌. 또 나무를 좋아해요. 나무는 세월이 아무리 지나고 찾아가도 항상 변함없이 그 자리에, 사람들과 달리 옮겨 다니지 않고. 그런 모습이 좋아서 나무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앞으로도 당분간은 나무만 그릴 생각이에요. 동질감을 느낀다고 할까요? 나무에서.”
▼ 작품을 팔기도 하세요?
“팔았지요. 개인전 때 27점 중에 25점 팔았어요.”
▼ 엄청나네요. 얼마에 파셨어요?
“제일 싼 게 100만원짜리였고, 보통 300만~400만원. 1200만원짜리도 있었어요. 120호짜리가 석 점 있었는데, 그중 한 점이 팔렸어요(웃음).”
▼ 누가 샀어요?
“1200만원짜리는 모르는 분이 샀고요. 사실 강매도 많이 했고요(웃음). 부산국세청에 기증도 했고요, 현관에 걸려 있다는데…. 근데 120호짜리 중에서 사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그림은 안 팔렸어요.”
▼ 너무 비싸서 그런가요?
“저도 너무 비싸다고 했는데, 기획자가 그러대요. ‘싸게 내놓으면 안 팔린다’고. 그런데 정말내가 좋아했던 작품 말고는 금세 팔렸어요.”
▼ 돈 좀 버셨겠네요.
“여러 사람이 다 나눠 가졌어요. 제가 가져가지는 않았고. 인사동에 친한 분들이 좀 계신데. 작가들, 사진작가들, 화가들. 그분들이 다 힘들어요. 시인이라고 해봐야, 시집이 팔려야 되는데, 그게 얼마나 팔리겠어요. 그런 분들 모였을 때 썼어요.”
▼ 좋은 일 하셨네요. 그림은 주로 언제 그려요?
“새벽에 일어나서 그려요. 또 방송 마치고 새벽 1시쯤 들어와서 한 1시간 정도, 그 시간이 굉장히 좋아요. 음악이나 노래는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어떤 대상을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 하고. 그런데 그림은 완벽하게 자기 혼자의 시간이에요. 그게 참 좋아요. 제 딸아이하고도 그림 덕분에 사이가 좋아졌고요. 어릴 때부터 미국에 떨어져 살았던 딸하고 잘 안 맞았거든요. 굉장한 갭이 있었어요.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보고, 새벽에도 그리고, 밤에 일어나보면 아빠가 그림 그리고 있으니까, 딸아이가 ‘야~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매달릴 수 있을까’ 그랬대요, 존경심 비슷한. 그러면서 사이가 좋아졌어요.”
▼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왜 딸 하나만 두셨어요?
“기운이 없어서(웃음).”
선배들 돕고 싶다
안 그래 보이는데, 최백호는 가수들의 권익향상을 위한 활동을 많이 해왔다. 원로 가수 남진을 회장으로 추대해 ‘가수협회’를 만들었고, 지난해에는 밴드 ‘4월과 5월’ 출신의 가수 백순진씨와 함께 ‘싱어송라이터협회’라는 것도 만들었다. 이 협회에는 김도향, 서수남, 서유석, 송창식, 윤항기, 윤형주, 엄인호, 한대수 등 쟁쟁한 원로가수들이 참여하고 있다. 싱어송라이터협회는 지난해 가을 창립 첫 작품으로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부른 원로가수 한명숙을 위한 헌정공연을 기획했다.
▼ 가수들의 권익을 위한 사업도 많이 하시는데….
“사실 체질에는 잘 안 맞는데, 선배 가수들 중에 너무 힘들게 사는 분이 많거든요. 저도 방송하면서 알았어요. ‘홍콩아가씨’를 부른 금사향 선생님도 힘든 생활을 하십니다. 그래서 뭔가를 좀 해야 되겠다 생각한 거예요.”
▼ 몰라서 그렇지 그런 사례가 많겠죠.
“얼마 전에도 한 후배가 방송국에 찾아와서 앉아서 울어요. 길바닥에 나앉게 됐다면서. 지금 그런 판이에요. 구제역이니, 연평도 포격이니 하는 사건들 때문에 이런저런 행사가 취소되면서 가수들이 설 자리가 더 없어졌지요. 자살하는 가수들이 앞으로 더 나올지 몰라요. 한명숙 선배 공연 땐 대통령께서 비서 두 분을 보내 ‘돕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필요한 걸 말씀드렸는데, 아직 소식은 없네요(웃음). 그리고 사실 금사향 선생님 같은 분은 나라에서 도와야 해요. 6·25 전쟁 때 제주도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군인들 찾아다니며 노래했던 분이거든요, 나라를 위해서.”
▼ ‘죽기 전 마지막 소원’ 같은 거 혹시 생각해 보셨어요?
“특별한 건 없어요. 없는데, 자다가 죽기는 싫어요. 그거는 정말 비참한 거예요.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을 의식하면, 갈 때도 의식을 하고. 그러니까 내 식구들 쫙 다 세워두고, 한 놈 한 놈 얘기 다 해주고 가고 싶어요. 살면서 행복했던 일들 얘기 다 하고, 그렇게 죽는 게 소원이에요.”
▼ 하여튼 건강이 제일 중요하죠.
“난 오래 살 것 같아요. 내가 55살에 내시경 검사를 한번 받아봤는데, 마취 안 하고, 의사하고 모니터 같이 보면서 했는데, 제가 ‘저건 뭐예요? 저거 암 아니에요?’ 그러니까 의사가 굉장히 짜증을 내면서 ‘아니, 내가 암 나오면 이야기할 테니까 좀 조용히 하세요’ 그러더라고요.(웃음) 젊었을 땐 워낙 몸이 안 좋아서 ‘분명 내 장이나 위에는 암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근데 생각보다 깨끗하더라고요.”
▼ 살면서 이루고 싶은 소원도 있으세요?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 환경이면 좋겠고, 노래도. ‘낭만에 대하여’를 40대에 썼으니까, 50대, 60대에는 아직 좋은 노래를 못 만들었으니까, 나이가 들수록 더 좋은 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기대는 있어요. 한 90쯤 되어서 멋진 히트곡을 하나 내고 싶어요. 90쯤 살아보면 세상이 좀 보일 것 같아. 그럼 좀 건방진 노래를 부를 수도 있겠지요. 인생은 이런 거다, 까불지 마라 이것들아 그러면서(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