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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서 피는 연꽃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귀족적이고 우아한 풍모를 자랑하는 목련은, 대중가요보다는 가곡의 소재로 먼저 쓰였다. 일찍이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로 시작하는 ‘사월의 노래’(박목월 작사, 김순애 작곡)가 있었다. 1970년대에 엄정행의 목소리로 널리 사랑받은, “오 내 사랑 목련화야”로 시작하는 ‘목련화’(조영식 작사, 김동진 작곡)도 대표적인 노래다.
하지만 이 두 곡 모두 목련의 형상화로서는 그저 그렇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의 독설가처럼 말해보자면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같은 구절은 너무 멋을 부렸다 싶다. 게다가 뒷부분에는 ‘클로바 피는 언덕’(토끼풀이 아닌 ‘클로바’!)까지 나오니 설상가상이다. ‘목련화’의 가사는 직설적이면서 동어 반복적이며, 선율 또한 김동진의 대표작 ‘수선화’ ‘내 마음’ ‘가고파’ 등에 비하면 긴장감이 현격하게 떨어진다. 게다가 두 곡 모두 지는 목련을 염두에 두지 않으니 아무래도 맹숭맹숭하다.
이에 비하면 대중가요 속의 목련이 오히려 훨씬 잘 형상화돼 있다. 가장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애창하는 목련 노래는 바로 이 곡이다.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 봄비 내린 거리마다 슬픈 그대 뒷모습/ 하얀 눈이 내리던 어느 날/ 우리 따스한 기억들 언제까지 내 사랑이어라 내 사랑이어라/ 거리엔 다정한 연인들 혼자서 걷는 외로운 나/ 아름다운 사랑 얘기를 잊을 수 있을까/ 그대 떠난 봄처럼 다시 목련은 피어나고/ 아픈 가슴 빈자리엔 하얀 목련이 진다”(양희은의 ‘하얀 목련’, 1983, 양희은 작사, 김희갑 작곡)
양희은이 암 수술을 받은 서른 직후에 쓴 가사에, 양희은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싶었던 스탠더드팝 전문 작곡가 김희갑이 곡을 지어 크게 히트했다. 양희은답지 않게 애처롭고 비극적인 이 노래는, 늘 씩씩할 것 같았던 청년 양희은이 나이를 먹어간 흔적이다. 건강도 망가지고 돈도 한 푼 없어 선배들이 수술비를 추렴할 정도였던 상태에서 화려하지만 허무하게 지나가버린 자신의 젊음을 이렇게라도 그려내며 울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픈 가슴 빈자리엔 하얀 목련이 진다’의 구절이 유난히 깊게 남는다.
1990년대에 김광석(사진)이 다시 불러 사랑받은 ‘그녀가 처음 울던 날’도 티 없이 맑고 깨끗한 ‘그녀’를 목련꽃에 비유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활짝 핀 목련꽃 같애/ 그녀만 바라보면 언제나 봄날이었지/ 그녀가 처음 울던 날 난 너무 깜짝 놀랐네/ 그녀의 고운 얼굴 가득히 눈물로 얼룩이 졌네/ 아무리 괴로워도 웃던 그녀가 처음으로 눈물 흘리던 날/ 온 세상 한꺼번에 무너지는 듯 내 가슴 답답했는데…”(이정선의 ‘그녀가 처음 울던 날’, 1984, 이정선 작사·작곡)
목련꽃을 볼 때에 지는 것을 상상하기 힘든 것처럼, 그녀의 활짝 웃는 모습은 우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게 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눈물은 곧바로 이별로 이어진다. 그 이후가 없다. 정말 헤어짐까지 목련을 닮았다. 목련에 대한 가장 깊은 느낌의 노래로는 단연 김광석의 ‘회귀’를 꼽을 만하다. 대중적이지는 않은 곡이지만, 김지하의 시를 가사로 쓰고 시의 무게감을 감당할 정도로 뛰어난 곡이 결합되어, 김광석 ‘광팬’들은 꽤 많이 기억한다.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흙으로 가네/ 검은 등걸 속 애틋한 그리움 움트던/ 겨울날 그리움만 남기고 저 꽃들은 가네/ 젊은 날 빛을 뿜던 친구들 모두/ 짧은 눈부심만 뒤에 남기고 긴 기다림만 여기 남기고/ 젊은 날/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흙으로 가네/ 봄날은 가네 그 빛만 하늘로 오르고 빛을 뿜던 저 꽃들은 가네”(김광석의 ‘회귀’, 1994, 김지하 작시, 황난주 작곡)
“와, 뭘 지으려면 이 정도는 지어야지!” 하는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오는 가사였다.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꽃잎들이 한 잎씩 바람에 찢겨 흙으로 간다는 첫 부분부터 목련의 대조적인 두 이미지를 탁월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원작시의 구절은, ‘가네’가 아니고 ‘가데’이며, 젊은 날의 친구들이 이제 ‘아메리카로 혹은 유럽으로’ ‘감옥으로 혹은 저승으로’ 하나 둘씩 가버렸다고 되어 있어 짧은 눈부심의 젊은 날을 보내버린 회한의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이에 비해 노래는 훨씬 젊은 질감으로 애처롭고 비장한데, 특히 김광석의 옹골차고 맑은 목소리가 이런 느낌을 더해준다. 가창력 좋은 김광석도 허덕거릴 정도로 호흡이 길고 어려운 작품이나, 피아노에 얹힌 절제감 있는 노래가 묘한 중독성을 발휘하여 자꾸 듣게 만든다. 오늘처럼 목련이 외롭게 하늘로 오르는 봄날에는 더욱 그렇다.
젊은 누이 닮은 분홍꽃, 대학가선 ‘4월의 죽음’ 상징
이영미의 7080 노래방 <5> 소박하면서도 슬픈 진달래꽃
이영미 ymlee0216@hanmail.net | 제214호 | 20110417 입력
대중가요에서 진달래는 처녀 마음을 설레게 하는 봄꽃으로 그려져 왔다. 식민지 시대 이난영의 히트곡인 ‘진달래 시첩’(조명암 작사, 이봉룡 작곡)이 대표적이고, 아직도 우리 귀에 쟁쟁한 정훈희(사진)의 ‘꽃길’도 그러한 이미지다. “진달래 피고 새가 울면은 두고두고 그리운 사랑 / 잊지 못해서 찾아오는 길 그리워서 찾아오는 길 / 꽃잎에 입맞추며 사랑을 주고받았지 / 지금은 어디 갔나 그 시절 그리워지네 / 꽃이 피면은 돌아와 줘요 새가 우는 오솔길로 / 꽃잎에 입맞추며 사랑을 속삭여 줘요”(정훈희의 ‘꽃길’, 1971, 정주희 작사·작곡)
정훈희는 이봉조 작곡의 ‘안개’로 1967년 우리나라 대중가요사상 최초로 국제가요제에서 상을 거머쥐었다. 그때 정훈희는 스물이 안 된 청소년이었다. 타고난 가늘고 고운 목소리에 실린 세련된 이봉조 선율이 그의 주 영역이었지만, 이 노래는 다소 트로트스러운 선율의 촌스러움을 지니면서도 묘하게 히트했다. 아마 진달래가 지닌 독특한 촌스러운 아름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달래의 토속적 친근함은 ‘어린 시절’에서 절정을 이룬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에 / 눈사람처럼 커지고 싶던 그 마음 내 마음 / 아름다운 시절은 꽃잎처럼 흩어져 / 다시 올 수 없지만 잊을 수는 없어라 / 꿈이었다고 가버렸다고 / 안개 속이라 해도 워우워우워 / (하략)”(이용복의 ‘어린 시절’, 1973, 원곡 ‘Playground in My Mind’)
이 노래가 외국 작품의 번안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게 한 일등 공신은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로 시작한 후렴구다. 클린트 홈스가 부른 원곡에서는 이 부분의 가사가 ‘난 사탕을 종류대로 다 사먹을 거예요’, ‘난 신디랑 결혼해서 아기를 하나나 둘 낳을 거예요’ 같은 도시 어린이의 감성으로 채워져 있는 것에 비해 한국의 번안에서는 시골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농업국가다’라고 초등학교 사회책에서 가르치던 시절, 그러나 빠른 산업화로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수많은 이농민들이 도시에 올라와 있던 시절, 이 노래는 이 첫 구절에서 사람들의 귀를 휘어잡을 수 있었다.
이렇게 순진한 촌색시의 친근함을 풍기던 진달래 이미지는 70년대 후반 대학가에서 퍼진 이 노래로 빠르게 바뀌어 버린다.
“1.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 그날 쓰러져간 젊은 날의 꽃사태가 /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 2.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 지친 가슴 위에 하늘이 무거운데 / 연련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진달래’, 이영도 작시, 한태근 작곡)
이 노래는 강원룡 목사가 이끈 기독교단체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지어 보급한 노래다. 청마 유치환의 편지모음집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시조시인 이영도가 4·19혁명의 젊은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시조에, 음악교사였던 한태근이 곡을 붙였다. 이 노래가 대학가에 퍼지면서, 진달래 이미지는 역사에 바쳐진 젊은 죽음의 의미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하필 4·19는 진달래가 만개하는 시기였고, 내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 초에 진달래가 붉게 타오르는 이 무렵마다 학생들은 가슴을 끓이며 속으로 이 노래를 웅얼거렸다.
이 노래의 위력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이후의 노래들은 이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고 진달래 소재 노래는 어둡고 진지해졌다. 게다가 진달래가 북한의 국화라는 소문이 퍼졌고, 신학철의 그림 ‘모내기’의 국가보안법 수사 과정에서도 그림 속의 분홍 꽃이 진달래가 아니냐는 추궁을 끈질기게 받을 정도였다. 80년대 최고의 여자가수 이선희의 이 노래에서도 진달래는 역사와 희생이란 의미와 함께 북한을 의미하는 꽃으로 표상되고 있다.
“진달래꽃 유채꽃 한 아름을 / 가슴에 품어보면 언젠가 꿈을 꾸네 / 고개 든 저 산들과 따스한 들판으로 / 한없이 달려가 보는 그리운 그 꿈을 / 너무나 오랫동안 잊은 채 해왔었던 / 세월의 강물들이 너무나 안타까워 / 이제는 바다 되어 다시금 만나리라 / 하나로 파도치리라 벅찬 이 기쁨으로 / 자 이제 새날이 시작되리니 / 환한 꽃 피리니 / 창 열고 새 세상을 / 숨 쉬어 버리라 / (하략)”(이선희의 ‘그리운 나라’, 1990, 송시현 작사·작곡)
그러나 북한의 국화는 진달래가 아니다. 남한에서 산목련이라 부르는 ‘목란’임이 후에 알려졌다. 진달래란 말만으로도 마음속 검열을 했던 코미디 같은 시절의 생각을 할 때마다, 흐드러지게 예쁜 꽃 진달래한테 참 미안하다. 진달래꽃이 뭔 죄라고.
엄마처럼 고향처럼...지친 우리 어깨를 토닥이는 따뜻함
이영미의 7080 노래방 <6> 질박한 찔레꽃
이영미ymlee0216@hanmail.net | 제215호 | 20110423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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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어수선한 봄이어서 꽃이 예년보다 늦기는 하지만 그래도 봄은 이제 중턱을 올라가고 있다. 다음 주면 5월이고 꽃들은 지금보다 더 만발할 것이다. 5월 꽃의 여왕은 단연 장미다. 너무도 화려한 이 꽃은, 꽃과 식물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현대의 도시인들에게도 그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키며, 모든 대중가요의 꽃들을 평정해 버렸다. 식민지 시대 대중가요만 해도 장미는 그리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게다가 지나치게 화려하며 가시마저 가지고 있는 장미를 다소 불건강한 아름다움으로 묘사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서양적 도시의 미감이 대중들에게 크게 호소력을 발휘하면서 장미는 대적할 수 없이 아름다운 꽃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70년대 도시 서민들이 가장 부러워했던 집은 ‘장미꽃 넝쿨 우거진’ 비둘기집 같은 집이었다. 80년대 후반부터는 생일 축하나 사랑 고백에 빠질 수 없는 소품이 됐다. 백 송이 장미를 바치는 청혼이 현실이 되고 나니, 이보다 더 판타스틱해야 하는 대중가요에서는 ‘백만 송이 장미’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런 장미에 밀려, 예전부터 우리를 위로해주었던 소박한 꽃들은 현대 도시인들의 눈길을 받지 못했다. 장미의 조상쯤 되는 찔레꽃도 그런 경우다. 찔레와 장미는 같은 종류의 식물이다. 강인한 야생성을 지닌 찔레 뿌리에 장미를 접붙여 키우는 경우가 많다. 공주 대접을 받는 장미에 비해 찔레는 야산에 귀찮은 가시덩굴을 만드는 천덕꾸러기다. 하지만 세심하게 살펴보면 소박하고 작은 홑꽃잎일지언정 꽃의 형태와 이파리 모양, 게다가 향기까지 장미의 원조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아무리 천덕꾸러기 찔레 덩굴일지언정 장미의 계절 5월에는 덩굴마다 조롱조롱 하얀 꽃을 피우고 그 기막힌 향기를 뿜어낸다. 시골에서 찔레 덩굴에 다리 긁히며 뛰어놀았던 사람들은 화려한 봄날 그 향기를 잊지 못하고, 고향의 추억에 찔레꽃을 곁들인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동무야”(백난아의 ‘찔레꽃’, 1942, 김영일 작사, 김교성 작곡)
찔레꽃은 일반적으로 하얀 꽃이 많지만 꽃분홍의 다소 큰 꽃을 피우는 종류도 있다. 백난아의 ‘찔레꽃’에서 하필 ‘붉게 피는’ 찔레꽃을 선택한 것은 다분히 가사의 편안한 발음을 위한 배려라고 보이지만, 아주 현실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제 말 태평레코드사의 마지막 히트곡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오히려 해방 이후 더 큰 인기를 얻었다. 아마 ‘남쪽 나라 내 고향’이란 의미가 서울로 올라와 살던 수많은 삼남 지방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일제 말의 맥락과는 전혀 다른 해석이었다.
이 노래는 60년대 이후 여러 번 개작됐다. 일단 분단으로 인해 ‘동무’란 말이 꺼려진 탓에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러고 나니 이 노래는 고향의 친구가 아닌, 고향의 애인을 그리는 노래로 바뀌어 버렸다.
하지만 2, 3절 개작의 범위는 그것보다 훨씬 광범위했다. 작사자가 월북을 한 것도 아닌데 이런 개작이 이루어진 경우는 흔치 않다. 왜일까? 그 이유는 바로 3절 때문이다. 지금은 거의 부르지 않는 3절 가사는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로 시작한다. 즉 이 노래는 북간도 등 만주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남쪽 한반도의 고향을 그리는 노래였던 것이다. 바로 중국 침략이 이루어진 일제 말기에 만주·중국을 소재로 한 수많은 ‘시의적절한’ 노래 중의 하나인 셈이다. 해방 후 분단으로 북간도는 갈 수 없는 땅이 되었으니 3절 가사를 뭔가 자꾸 다른 걸로 바꾸고 싶어졌겠지.
그런가 하면 70년대 청소년기를 보냈던 세대에게 노래 속 찔레꽃은 이연실(사진)의 목소리로 기억된다.
“1.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 배고픈 날 가만히 따 먹었다오 / 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 2.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 하얀 발목 바쁘게 내게 오시네 / 밤마다 보는 꿈을 하얀 엄마 꿈 /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이연실의 ‘찔레꽃’, 1972, 이연실 작사, 박태준 작곡)
‘가을 밤 깊은 밤 벌레 우는 밤’으로 시작하는 이태선 작사의 ‘가을 밤’의 곡을 그대로 쓰고 식민지시대 이원수의 동시 ‘찔레꽃’을 원용해 만든 새로운 가사를 붙였다. 이원수의 시에서, 일 나간 식구를 기다리며(이원수의 시에서는 광산에 일 나간 언니를 기다린다) 배고파서 혼자 몰래 찔레꽃 따 먹는 아이의 이야기를 가져오기는 했으나 오히려 원작시에 비해 형상화가 더 뛰어나다. 이태선 가사(‘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의 영향이었을 듯한데, 원작시의 ‘언니’를 ‘엄마’로 바꾸어 1절부터 눈물샘을 건드린다.
하지만 정작 절창은 2절이다. 일이 끝난 캄캄해진 밤에, 굶고 잠든 아이에게 밥 한 술이라도 먹이려 ‘하얀 발목 바쁘게’ 뛰어오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꿈속에서나 보는 배고픈 아이의 절묘한 대조는 탁월하다. 이후 이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은 이은미는 물론 신영옥까지 모두 울먹이고, 급기야 영화 ‘하모니’에까지 등장해 관객의 눈물을 쏙 빼놓았다.
이러니 우리에게 찔레꽃은 소박한 시골 꽃이어서 더더욱 슬픈 꽃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장사익이 임동창의 ‘오버액션 제멋대로 피아노’에 맞춰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장사익의 ‘찔레꽃’, 1995)라고 노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혹시 5월 중순 넘어 산길을 걷다가 해가 잘 든 곳에 노란 꽃술을 품은 흰 꽃이 기다란 덩굴에 다닥다닥 붙은 것을 보거든 걸음을 멈추시라. 그리고 큰 숨을 들이켜 향기를 맡아보시라. 화려한 장미에 밀려 핀 그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것은 한국의 산길에서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서양적 도시의 미감이 대중들에게 크게 호소력을 발휘하면서 장미는 대적할 수 없이 아름다운 꽃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70년대 도시 서민들이 가장 부러워했던 집은 ‘장미꽃 넝쿨 우거진’ 비둘기집 같은 집이었다. 80년대 후반부터는 생일 축하나 사랑 고백에 빠질 수 없는 소품이 됐다. 백 송이 장미를 바치는 청혼이 현실이 되고 나니, 이보다 더 판타스틱해야 하는 대중가요에서는 ‘백만 송이 장미’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런 장미에 밀려, 예전부터 우리를 위로해주었던 소박한 꽃들은 현대 도시인들의 눈길을 받지 못했다. 장미의 조상쯤 되는 찔레꽃도 그런 경우다. 찔레와 장미는 같은 종류의 식물이다. 강인한 야생성을 지닌 찔레 뿌리에 장미를 접붙여 키우는 경우가 많다. 공주 대접을 받는 장미에 비해 찔레는 야산에 귀찮은 가시덩굴을 만드는 천덕꾸러기다. 하지만 세심하게 살펴보면 소박하고 작은 홑꽃잎일지언정 꽃의 형태와 이파리 모양, 게다가 향기까지 장미의 원조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아무리 천덕꾸러기 찔레 덩굴일지언정 장미의 계절 5월에는 덩굴마다 조롱조롱 하얀 꽃을 피우고 그 기막힌 향기를 뿜어낸다. 시골에서 찔레 덩굴에 다리 긁히며 뛰어놀았던 사람들은 화려한 봄날 그 향기를 잊지 못하고, 고향의 추억에 찔레꽃을 곁들인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동무야”(백난아의 ‘찔레꽃’, 1942, 김영일 작사, 김교성 작곡)
찔레꽃은 일반적으로 하얀 꽃이 많지만 꽃분홍의 다소 큰 꽃을 피우는 종류도 있다. 백난아의 ‘찔레꽃’에서 하필 ‘붉게 피는’ 찔레꽃을 선택한 것은 다분히 가사의 편안한 발음을 위한 배려라고 보이지만, 아주 현실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제 말 태평레코드사의 마지막 히트곡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오히려 해방 이후 더 큰 인기를 얻었다. 아마 ‘남쪽 나라 내 고향’이란 의미가 서울로 올라와 살던 수많은 삼남 지방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일제 말의 맥락과는 전혀 다른 해석이었다.
이 노래는 60년대 이후 여러 번 개작됐다. 일단 분단으로 인해 ‘동무’란 말이 꺼려진 탓에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러고 나니 이 노래는 고향의 친구가 아닌, 고향의 애인을 그리는 노래로 바뀌어 버렸다.
하지만 2, 3절 개작의 범위는 그것보다 훨씬 광범위했다. 작사자가 월북을 한 것도 아닌데 이런 개작이 이루어진 경우는 흔치 않다. 왜일까? 그 이유는 바로 3절 때문이다. 지금은 거의 부르지 않는 3절 가사는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로 시작한다. 즉 이 노래는 북간도 등 만주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남쪽 한반도의 고향을 그리는 노래였던 것이다. 바로 중국 침략이 이루어진 일제 말기에 만주·중국을 소재로 한 수많은 ‘시의적절한’ 노래 중의 하나인 셈이다. 해방 후 분단으로 북간도는 갈 수 없는 땅이 되었으니 3절 가사를 뭔가 자꾸 다른 걸로 바꾸고 싶어졌겠지.
그런가 하면 70년대 청소년기를 보냈던 세대에게 노래 속 찔레꽃은 이연실(사진)의 목소리로 기억된다.
“1.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 배고픈 날 가만히 따 먹었다오 / 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 2.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 하얀 발목 바쁘게 내게 오시네 / 밤마다 보는 꿈을 하얀 엄마 꿈 /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이연실의 ‘찔레꽃’, 1972, 이연실 작사, 박태준 작곡)
‘가을 밤 깊은 밤 벌레 우는 밤’으로 시작하는 이태선 작사의 ‘가을 밤’의 곡을 그대로 쓰고 식민지시대 이원수의 동시 ‘찔레꽃’을 원용해 만든 새로운 가사를 붙였다. 이원수의 시에서, 일 나간 식구를 기다리며(이원수의 시에서는 광산에 일 나간 언니를 기다린다) 배고파서 혼자 몰래 찔레꽃 따 먹는 아이의 이야기를 가져오기는 했으나 오히려 원작시에 비해 형상화가 더 뛰어나다. 이태선 가사(‘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의 영향이었을 듯한데, 원작시의 ‘언니’를 ‘엄마’로 바꾸어 1절부터 눈물샘을 건드린다.
하지만 정작 절창은 2절이다. 일이 끝난 캄캄해진 밤에, 굶고 잠든 아이에게 밥 한 술이라도 먹이려 ‘하얀 발목 바쁘게’ 뛰어오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꿈속에서나 보는 배고픈 아이의 절묘한 대조는 탁월하다. 이후 이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은 이은미는 물론 신영옥까지 모두 울먹이고, 급기야 영화 ‘하모니’에까지 등장해 관객의 눈물을 쏙 빼놓았다.
이러니 우리에게 찔레꽃은 소박한 시골 꽃이어서 더더욱 슬픈 꽃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장사익이 임동창의 ‘오버액션 제멋대로 피아노’에 맞춰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장사익의 ‘찔레꽃’, 1995)라고 노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혹시 5월 중순 넘어 산길을 걷다가 해가 잘 든 곳에 노란 꽃술을 품은 흰 꽃이 기다란 덩굴에 다닥다닥 붙은 것을 보거든 걸음을 멈추시라. 그리고 큰 숨을 들이켜 향기를 맡아보시라. 화려한 장미에 밀려 핀 그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것은 한국의 산길에서만 느낄 수 있다.
‘천사같은 세계’ 긴 생명력, 21세기 들어 어린이 현실 직시
이영미의 7080 노래방 <7> 가요 속의 동심
이영미 ymlee0216@hanmail.net | 제216호 | 2011043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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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변화에도 오랫동안 우리 대중가요 속 어린이 이미지는 매우 고정적이었다. ‘어린 시절’은 물론 서수남·하청일의 ‘과수원길’이나 산이슬의 ‘이사 가던 날’ 같은 노래들은 현재의 어린이가 아닌 몇십 년 전 추억 속의 어린 자기 자신을 주로 그려냈다. 한편 이연실의 ‘새색시 시집 가네’ 등은 어린이의 세계를 때 묻지 않은 순수의 세계로 형상화했다.
“수양버들 춤추는 길에 꽃가마 타고 가네 / 아홉 살 새색시가 시집을 간다네 / 가네 가네 갑순이 갑순이 울면서 가네 / 소꿉동무 새색시가 사랑일 줄이야”(이연실의 ‘새색시 시집 가네’, 1971, 김신일 작사·작곡)
아홉 살짜리의 소꿉동무 사랑에 무슨 계산이 있었겠는가. 그것은 타락한 이 세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을 의미한다. 시간적 배경을 가마 타고 시집가던 시절로 설정하고 있는 것도 지금의 도시생활과 다른,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의 공간을 그리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과거로서의 어린 시절이든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의 표징으로서의 동심이든, 어쨌든 이런 노래들 속의 어린이는 당대 현실 속의 어린이는 아니었다. 당시 우리나라 노래 창작자로 당대 어린이와 직면하고 있는 노래를 지은 경우는 ‘백구’ ‘종이연’(원제 ‘혼혈아’)을 지은 김민기와, ‘산할아버지’ 같은 기발한 상상력으로 아이들을 단박에 휘어잡은 산울림의 김창완뿐이었다.
그에 비해 이 시대 외국 노래의 번역곡들은 달랐다. 순수한 동심을 노래한다 하더라도 ‘검은 고양이 네로’가 보여준 “그러나 너무 너무 장난만 친다 하면 / 고등어통조림을 주지 않겠어요” 같은 생활적 표현이 준 생생함은 번역곡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81년의 ‘아빠의 말씀’(원곡 ‘Life itself will let you know’)에까지 이어진다.
아이: (노래) 아빠 언제 어른이 되나요 / 나는 정말 꿈이 커요 / 빨리 어른이 돼야지.
아빠: (토크) 그래, 아가. 아주 큰 꿈을 가져라. 안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암! 되고 말고. 너는 지금 막 시작하는 거니까. (하략) (정여진·최불암의 ‘아빠의 말씀’, 1981, 지명길 작사·Kipner 작곡)
배우 최불암의 목소리가 사람의 귀를 잡아 끌었거니와 클라이맥스가 “내가 쓰러지면 그냥 놔두세요 / 나도 내 힘으로 일어서야죠”라고 짜랑짜랑 부르는 아이의 당찬 발언이 인상적이었던 노래다. 물론 이 노래 속의 어린이 역시 어른들의 바람이 한껏 들어간 이미지이기는 하지만 당시 한국 대중가요의 어린이상과는 차이가 많았다.
85년 혜은이(사진)의 ‘파란 나라’는 동심의 세계를 그린 한국의 창작곡으로는 정말 오랜만에 대박을 터뜨린 노래였다.
“파란 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 파란 나라를 보았니 천사들이 사는 나라 / (중략) / 난 찌루찌루의 파랑새를 알아요 / 난 안델센도 알고요 / 저 무지개 너머 파란 나라 있나요 / 저 파란 하늘 끝에 거기 있나요 (하략)”(혜은이의 ‘파란 나라’, 1985, 지명길 작사, 김명곤 작곡)
‘빙글빙글’ 등으로 80년대 중반 최고의 인기 작곡가로 부상했던 뛰어난 건반주자 김명곤의 경쾌한 음악, 여기에 ‘꿈과 사랑’ 같은 상투어가 여전히 많기는 하지만 메테를링크의 ‘파랑새’를 언급한 다소 지적 분위기를 풍긴 가사가, 어른과 아이가 함께 부를 수 있는 대중가요에 목말라하던 방송 쇼프로그램을 만족시킨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동심은 ‘천사’의 나라, ‘동화책’과 ‘텔레비전’ 속에 있으나 ‘아무도 가보지 못한’ 이상과 상상 속의 나라로 그려지고 있다. 1920년대 방정환부터 출발한 ‘동심천사주의’는 정말 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어린이는 천사가 아니다. 다가오는 어린이날 어떤 선물을 요구해야 자신에게 유리할까를 열심히 계산하며 돈 없는 부모들과 오랜 신경전을 펼치는 영악한 것들 아닌가. 이런 현실적인 아이들의 모습이 대중가요에 나타난 것은 세기가 바뀔 즈음이었다.
“(상략) 안돼 아직 준비도 안됐는데 벌써 성적표가 가면 어떡해 이제 내 인생은 어떡해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어서 어떻게든 막아야 해 빨리 엄마가 보기 전에 달려가서 내가 먼저 받아야 해 뛰어야 해 뛰어야 해 이번 돌아오는 주말에 새로 나온 자전거 한 대 사준다고 약속했는데 그때까진 어떻게든 버텨야 해 주말까진 어떻게든 버텨야 해 주말만 넘기면 나 자전거만 생기면 나 아무리 혼나도 좋아 (하략)”(량현량하의 ‘성적표’, 2000, 박진영 작사, 방시혁 작곡)
판에 박힌 훈계나 꿈과 사랑 어쩌고 하는 말들이 아이들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음을 솔직히 인정한 이 노래는, 초등학생 가수를 내세워 이미 댄스뮤직의 핵심적 팬으로 부상한 초등학생 또래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비록 상업적 기획일지라도 현실성이 주는 충격은 늘 짜릿하다.
이제 4월이 가고 5월이 왔다. 늘어서 있는 날짜들을 보니 한숨이 나온다. 가계부 빨간 글씨 없이 성공적으로 한 달을 영위하시길!
'불효자는 웁니다’ 진방남, 녹음 직전 모친 부고에 통곡하며 노래
이영미의 7080 노래방 <8> 가요 속의 어머니와 자식들
이영미 ymlee0216@hanmail.net | 제217호 | 2011050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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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버지의 은혜도 잊지 말라는 전능한 가부장적 정권의 지시에도, 대중의 감수성은 오랫동안 어머니 주변만을 맴돌았다. 그것은 (지금의 아버지들은 펄쩍 뛸지 모르지만) 오랫동안 어머니가 아버지에 비해 약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강자인 아버지가 이래라 저래라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라면, 어머니는 자식의 모든 것을 받아주고 뒷바라지해주며 스스로를 낮추는 존재였으니 자식이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 더 애틋한 정을 느낀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노래에서도 이런 현상은 뚜렷이 나타난다. 심지어 오랫동안 어머니에 대한 대중가요는 애틋하다 못해 회한과 통곡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 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요 다시 못 올 / 어머니여 /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 1940, 김영일 작사, 이재호 작곡)가수 진방남이 녹음 스튜디오에서 실제로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통곡하듯 노래를 불렀고 그것이 그의 최초 히트곡이 되었다는 드라마 같은 일화를 담고 있는 이 곡은, 어머니를 다룬 트로트 곡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그 핵심적 감정은 ‘죄책감’이고, 이런 감정은 80년대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에까지 이어진다.
어머니란 말이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고 가슴 한구석을 찌르르하게 만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노래가 늘 통곡과 죄책감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은 다소 과잉된 감정이다. 사실 이런 노래의 태반이 돌아가신 어머니, 만날 수 없는 어머니를 설정하고 있다는 것은 통곡과 죄책감이라는 극단적 감정을 만들기 위한 극적 설정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경향이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누가 만든 길이냐 나만이 가야 할 슬픈 길이냐 / 철없는 들국화야 너를 버리고 남몰래 숨어서 눈물 흘리며 아아 아아아 / 떠나는 이 엄마 원망을 마라”(이미자의 ‘들국화’, 1965, 월견초 작사, 이인권 작곡)
딸자식을 버린 어머니가 부르는 통곡의 노래로 지금 보자면 다소 희한한 노래일 수 있다. 가난하던 60년대엔 어쩔 수 없이 딸을 버리는 부모가 종종 있었다. 사실 이 노래는 그런 구체적 사실성보다는 어머니가 지닌 자식에 대한 죄책감과 회한의 감정을 건드렸다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어머니와 자식이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죄책감. 이것은 참으로 오랫동안 우리나라 대중에게 호소력을 발휘했다.
아마 우리 사회의 어머니(아버지가 아닌)와 자식이 과도하게 정서적으로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상은 험악하고 아버지(남편)는 그 험악한 세상 속에 휩쓸려버린 상황. 힘도 능력도 없는 어머니(아내)와 자식이 부둥켜안고 모진 생명을 유지해왔던 20세기 초·중반 한국의 역사가 이런 경향을 만들어냈으리라. 그러니 어머니와 자식은 서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자기 연민을 느끼고 아주 사소한 것들에서 서로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과잉의 죄책감은 과잉된 기대감과 동전의 양면이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 조금만 소홀해도 엄청나게 섭섭해 한다.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통곡의 과잉된 감정이 다소 절제되고 다소 정상적인 그리움과 사랑으로 내려앉은 것은 확실히 70년대 이후의 일인 듯싶다. 유주용의 ‘부모’가 소월의 시를 가사로 하여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니하고 (중략)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라는 차분한 추억을 노래한 시기가 68년이다. 이후 70~80년대에 이르러서 ‘어머님 팔벼개에 얼굴을 묻고 꿈을 받던 어린 내가 / 어언간 엄마 되어 꿈을 주는 팔벼개 되었네’로 시작하는 김상희의 ‘팔벼개’(1972)나, ‘어머님은 된장국 끓여 밥상 위에 올려놓고 / 고기 잡는 아버지를 밤새워 기다리신다’의 구절이 가슴을 울렸던 박양숙의 ‘어부의 노래’(1980) 같은 잔잔한 그리움의 감정이 보편화된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설정으로 절절한 그리움을 만들어내지 않고, 그저 내 곁에 있는 어머니를 차분히 바라보며 노래하는 노래가 나오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먼 길을 거쳐 왔던가.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 보니 / 한 귀퉁이에 고등어가 소금에 절여져 있네 / 어머니 코 고는 소리 조그맣게 들리네 / 어머니는 고등어를 구워 주려 하셨나 보다 / (중략) / 나는 참 바보다 엄마만 봐도 봐도 좋은걸”(김창완<사진>의 ‘어머니와 고등어’, 1983, 김창완 작사·작곡)
술 마시고 들어와 한밤중에 냉수 찾는 나이가 되어서도 엄마만 봐도 좋다고 노래하는 자신을 스스로 ‘바보’라고 말하는 것이나, 이렇게 경쾌한 음악으로 코 고는 어머니와 비린내 나는 고등어를 포착해 내는 일상적 시선은 참으로 새로운 것이었다.세상이 모두 ‘쿨해지고’ 있다지만, 여전히 다 큰 자식의 모든 일상에 끝까지 함께하고 싶어 하는 과잉된 기대감의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에게 무한히 의존하며 다른 한편 죄책감 느끼는 자식, 이 헌신과 죄책감이 뒤범벅된 어미 자식 관계는 좀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는 듯하다. 어버이날, 우리는 이런 감정을 어떻게 추스르고 있는가.
배울 만큼 배운 엄마, 자식과 남편을 쥐고 흔들기 시작하다
이영미의 7080 노래방 <9> 어머니의 변화와 모성 신화 부수기
이영미 ymlee0216@hanmail.net | 제218호 | 20110515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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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세대에게 반기를 들었던 1970년대 청년문화 시대에도 모성의 신화는 건드리지 못했다.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노래에서 가능하면 부모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었을 뿐이다. 괜히 어머니 이야기를 해서 신파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일하게 이 곡 하나가 어머니에 대한 다소 이채로운 발언을 담고 있는데, 그나마 번역 작품이었다.
“바람이 휘몰던 어느 날 밤 그 어느 날 밤에 / 떨어진 꽃잎처럼 나는 태어났다네 / 내 눈에 보이던 아름다운 세상 잊을 수가 없어 / 가엾은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 봄 여름 가을이 또 겨울이 수없이 지나도 / 뒹구는 낙엽처럼 나는 외로웠다네 / 모두들 정답게 어울릴 때도 내 친구는 없어 / 그림자 밟으며 남몰래 울었다네 (하략)”(이용복<사진>의 ‘1943년 3월 4일생’, 1971, 원곡 <4/3/1943>)
1971년 산레모가요제에서 불린 루치오 델라(Lucio Dalla)의 노래가 한국에 건너와 시각장애인인 가수 이용복의 목소리에 실리자 그 의미가 달라졌다. 가사 어디에도 주인공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설정이 없건만, 검은 안경을 쓰고 나온 가수의 입으로 부르는 이 노래는 장애인의 슬픔으로 받아들여졌다.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라는 눈물 젖은 항변은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장애인의 어머니라는 설정이 있었기에 그나마 이런 표현이 가능했을 터이지만, 그래도 감히 어머니에게 ‘왜 나를 낳았느냐’고 대들다니! 청년문화 시대의 파격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다. 이 노래는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라는 문제의 구절이 빠진 또 다른 버전이 있으니, 당시 이 구절이 많은 사람에게 불편한 자극을 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숭고한 모성에 본격적으로 도전하는 노래는 20세기의 끄트머리인 90년대에야 비로소 나타났다.
“아직까진 너에겐 모든 일에 엄마가 필요해 모든 것을 엄마에게 물어봐야 해 / 네가 어디 있든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엄마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을 하지 / 잘 자라 우리 아가 내가 널 지켜줄게 머리에서 발끝까지 넌 내겐 소중한 거야 엄마 / 나는 세상에 모든 것이 두려워요 엄마 /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어줘 / 모든 걸 엄마에게 물어봐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 혼자 할 수 있는 건 없잖아 우와아 어른이 될 수 없는 마마보이 (하략)”(김준선의 ‘마마보이’, 1993, 김준선 작사·작곡)
이런 노래가 나오는 것을 보면 냉전과 군부정권의 종말, 문민정부 시대의 시작 등 세상이 요동치던 90년대에 신세대 문화 출현은 70년대 청년문화만큼이나 엄청난 문화적 격변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노래는 여태껏 사랑과 헌신으로만 설명되어 왔던 어머니의 모습을 마마보이를 만드는 잘못된 사랑으로 그려낸다. 엄마의 목소리로 설정되어 있는 고상한 벨칸토 창법에 실린 ‘잘 자라 우리 아가 내가 널 지켜줄게 머리에서 발끝까지 넌 내겐 소중한 거야’의 구절이 전혀 아름답지 않게, 오히려 끔찍하고 우스꽝스럽게 들리도록 만든 발상은 정말 놀랍다.
사실 이 시대에는 어머니들이 달라져 있었다. 교육이나 사회활동의 경험이 거의 없어 남편과 자식의 말을 경청할 수밖에 없었던 예전의 순종적 어머니와 달리 이 시대의 어머니는 50년대 이후 교육의 혜택을 충분히 받으며 나름의 욕망을 지니고 살아왔던 ‘자유부인’ ‘맨발의 청춘’ 세대의 여자들이었던 것이다. 옛날 어머니들처럼 “내가 뭘 알겠느냐마는 네가 원하면 불 속에라도 뛰어들겠다”는 식이 아니라 살짝 ‘공주병’ 스타일로 “어머 얘, 난 그런 거 못해”라고 말하거나 ‘엄마 친구 아들은’ ‘내 친구 남편은’을 입에 달고 다니며 남편과 자식 속을 뒤집어 놓는 어머니, 그럼으로써 자식들을 마마보이로 만드는 어머니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슈퍼맨 슈퍼맨 슈퍼맨 / 어젯밤 우리 아빠 엄마 부부싸움에 잠을 잘 수가 없네 / 요리조리 따지시는 우리 엄마 아빠에게 뭐라고 쉴 새 없이 따다다다다다다 요! / 변명도 제대로 못한 우리 아빠 무슨 잘못하신 게 아닌가 걱정이네 / 무서운 우리 엄마 뭐가 불만이실까 엄마가 필요한 건 혹시 슈퍼맨 / (하략)”(DJ DOC의 ‘슈퍼맨의 비애’, 1994, 강은경
이제 어머니는 집안의 독재자가 되어 버렸다. ‘따다다다다’ 쏘아붙이는 엄마와 그 앞에서 ‘변명도 제대로 못하는’ 아빠의 대비는 ‘마마보이’의 설정만큼이나 현실감 있다. 이러한 욕심 많은 어머니 노래의 ‘종결자’는 패닉의 ‘마마’(1996)였다. “허영 너의 꿈 너의 욕심 모든 걸 내가 만족시켜 줘야만 하는 거니 (중략) 나를 갖고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은 거지 / 이런 젠장 잘 키웠단 소릴 듣기 위해 날 이렇게 키우는 거니”라고 쏘아붙인 이 노래는 충격적으로 솔직했던 탓에 지금까지도 방송금지곡이다.
숭고한 모성성에 대한 이런 도전은 오래가지 못했다. 90년대 말 외환위기의 힘든 상황에서 대중은 현실을 냉철하게 인정하고 반성하기를 그만두고, 다시 따뜻한 모성 관념을 복원해 거기에 기대고 싶어했다. 또 여지없이 ‘돌아가신’ 어머니와 음식(이번에는 자장면!)을 배치해 익숙한 감동코드를 건드린 god의 ‘어머님께’(1999)는 그 대표적인 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