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중가요사

이영미의 7080 노래방 1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1. 10. 16. 22:54

 

 

 

 

순수의 상징 긴 생머리, 기존 가치에 도전한 짧은 치마

이영미의 7080 노래방 <1> 청춘 - 세시봉 시대의 여자들

이영미 | 제210호 | 20110320 입력
가요는 시대입니다. 유행가 가사에는 민초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대중문화평론가 이영미씨가 1970~80년대 우리가 살아온 풍경을 대중가요 가사로 다시 그렸습니다. 하나의 주제로 요모조모 따져보는 ‘키워드 노래방’입니다.
1 1980년대 초반의 박인희 모습.2 1970년대 디스키자키 시절의 양희은. [중앙포토]
예상치 않게 후끈 달아오른 세시봉 프로그램을 보며 중년 세대들은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를 보며 “많이 늙었다”와 “옛날 모습 그대로네”를 반복하게 되는 것처럼, 이들은 TV속 환갑 넘은 가수들과 그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방청객들 얼굴을 보며, 40년 전의 모습과 겹쳐 보는 시뮬레이션을 하게 된다. 테마로 대중가요사를 살펴보는 연재를 시작하며, 3월에는 바로 이들 ‘청년’ ‘청춘’이라는 말에서부터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세시봉 시대 청년들의 외모는 어땠을까. ‘긴 머리에 짧은 치마 / 아름다운 그녀를 보면 /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 오 토요일 밤에’(김세환 ‘토요일 밤에’)의 가사처럼, 이 시대 여성들의 외모를 특징적으로 압축하는 말은 ‘긴 머리’와 ‘짧은 치마’다. 1967년 3월 디자이너 박윤정의 패션쇼에서 가수 윤복희가 처음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온 이후 미니스커트는 급속히 전파됐다. 서양에서도 미니스커트가 처음 나온 것이 65년이고, 66년에는 재클린 케네디가 무릎 위 10㎝의 미니스커트를 입어 화제가 되기도 했으니, 우리나라의 유행도 결코 뒤진 것이 아니다.

김세환의 ‘토요일 밤에’는 73년 발표됐다. 세시봉에서 트윈폴리오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 68년, 음악감상실과 라디오에 머물고 있었던 포크가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와 은희의 ‘꽃반지 끼고’ 등으로 TV 프로그램과 일간지 기사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 71년이니, ‘토요일 밤에’가 나온 것은 포크송이 한창 주가를 높이면서 트로트를 밀어내고 있던 시점이었다. 73년 음반을 들어보면, 기타 한 대로만 반주하며 부르는 김세환의 달착지근한 목소리에, 후렴구 “토요일 밤 토요일 밤에”의 후렴에서 윤형주의 하이 파트 목소리로 화음을 맞춘 아주 소박한 노래였다.

그런데 이미 70년부터 장발과 미니스커트에 대한 경범죄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70년 신문에는, 여자들의 미니스커트가 이미 무릎 위 20㎝에 이르고 있고, 무릎 위 17㎝의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경범죄로 처벌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러니 무심코 썼을 것이 분명한 이 ‘짧은 치마’란 구절도, 이 노래의 대대적 유행과 함께 철퇴를 맞을 운명이었다. 음반에서는 74년까지 이 가사 그대로였으나, 이즈음부터 TV에서는 “긴 머리에 분홍치마”로 부르고 있었다. ‘긴’ 머리와 ‘짧은’ 치마라는 절묘한 대조를 깨버린 이 졸렬한 개사에, 나는 어린 마음에 얼마나 분노했는지 모른다.

그에 비해 여자들의 ‘긴 머리’는 그다지 통제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어른들 눈에는 여자들의 긴 머리 역시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이 긴 머리는 분명, 파마도 하지 않은 채 풀어헤친 긴 생머리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풀어헤친 긴 생머리는 우리 문화에는 매우 이질적인 것이다. 연세 지긋하신 분들에게 이 헤어스타일은 죄인이나 귀신의 머리 모양으로 인식되었다. 우리 할머니도 “에미 애비가 죽었냐, 머리 꼴이 그게 뭐냐?”고 늘 나무라셨다. 50~60년대에도 오드리 헵번이나 메릴린 먼로처럼 컬을 넣은 단발 스타일이 새로운 유행이었다.

그런데 청년문화 붐이 일어나면서 어른들 눈에 거슬리는 두 헤어스타일이 유행했으니, 긴 생머리와 남자처럼 짧게 자른 쇼트커트다. 그것도 미니스커트, 핫팬츠, 청바지, 나팔바지 같은 옷들과 함께이니 더욱 목불인견이라 했을 것이다. 73년 치안국에서는 남자 머리가 여자 쇼트커트보다 길면 장발로 규정한다는 측정 불가능한 기준까지 발표했으니, 여자와 남자의 머리 길이가 뒤바뀌는 현상이 기성세대에게는 얼마나 못 견딜 노릇이었나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70년대 포크의 대표적인 두 여가수인 박인희, 양희은의 헤어스타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박인희는 가운데 가르마에 긴 생머리였고, 양희은은 남자처럼 짧은 쇼트커트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기성세대 마음에 들건 말건, 긴 생머리에 대한 이 시대 남자들의 로망은 노래에서도 계속 발견된다. “웃음 짓는 커다란 두 눈동자 / 긴 머리에 말 없는 웃음이 / 라일락 꽃 향기 흩날리던 날 / 교정에서 우리는 만났소”(윤형주 ‘우리들의 이야기’, 1972)에서도, 대학 교정에서 만난 그녀의 머리는 ‘긴 머리’이다. 몇 년 뒤에 나온 둘다섯의 ‘긴 머리 소녀’쯤에 이르면 이제 다소 식상하다.

짧은 치마가 기성의 윤리에 도전하는 도발성의 상징이라면, 긴 생머리는 거짓과 치장 없는 순수의 상징이다. 대량살상을 동반한 전쟁들의 주역인 기성세대에게 반기를 든 미국과 서구의 청년세대, 그리고 식민지와 6.25전쟁을 통과한 찌들고 비겁하고 무능한 기성세대에게 반기를 든 한국의 청년세대, 이들에게 솔직한 도발성과 거짓과 꾸밈 없는 순수성은 매우 중요한 가치였던 셈이다.

노래 곳곳에는 이런 가치들이 넘쳐흐른다. ‘밤하늘의 별’만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비가 좋아 빗속을 거닐었고 눈이 좋아 눈길을 걸었’으니, 이들이 사랑한 것은 이 세상의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 자연이었다. 이는 전후 복구를 하고 ‘잘살아 보세’를 외쳤던 기성세대의 가치와는 매우 다른 질의 것이었다.

그래서 “아하 나는 살겠네 태양만 비친다면”(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이라거나, 맑은 동해바다에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를 찾아 “삼등삼등 완행열차”를 타고 떠나는 마음(송창식 ‘고래사냥’), “나는 돌아가리라 쓸쓸한 바닷가로 / 그곳에 작은 집을 짓고 돌담 쌓으면 / 영원한 행복이 찾아오리라 / 내 가난한 마음속에 찾아오리라”(양희은 ‘가난한 마음’)는 구절들이, 당시의 많은 청년들을 매료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당시 모든 청년의 것은 아니었을 수 있다. “라일락 꽃 향기 흩날리던 날 교정에서” 만난 그들은 모두 대학생이었다. 이 청년문화의 중심은 대학생과 그들을 동경하던 인문계 고등학생들이었다. 그래서 청년문화와 포크송은 기성세대의 가요에 비해 크게 파격적일 수는 있었으나, 다른 한편 남진과 나훈아의 노래에 비해 덜 대중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쟁통에 용케 살아나 폐허 속에서 이만큼 컸다

이영미의 7080 노래방 <2> 맨발로 뛰는 뒷골목 청춘들, 그들의 1960년대

이영미ymlee0216@hanmail.net | 제211호 | 20110326 입력
어느 시대건 아기들은 태어나고 청년도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대중가요사를 살펴보면 어느 시대나 청년이 부상하는 것은 아니며, 언제나 같은 모습인 것도 아니다. 어느 시대건 어른들이 청년들을 못마땅해 했다는 것만 빼놓고는 시대에 따라 청년의 모습은 꽤나 다르게 나타났다. 1970년대에 청바지나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통기타를 들고 나선 청년들의 모습과 비교하면 불과 4~5년 전인 60년대 청년들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한국대중예술사 속에서 60년대 청년은 ‘청춘’이라 불렸다. 70년대 청년문화만은 못했지만 그 ‘청춘’ 바람도 상당히 강풍이었다. 70년 월간지 『세대』에 남재희가 ‘청춘문화론’이라는 제목으로 청년문화 열풍을 설명할 정도였으니 60년대에 청춘이라는 말이 얼마나 유행이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시작은 64년 영화 ‘맨발의 청춘’(사진)이었다.

신성일과 엄앵란 커플, ‘청춘영화’ 붐 등 수많은 문화현상을 만들어낸 이 영화는 지금 보아도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다. 물론 2배속으로 돌려보아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느린 속도와 성우 이창환의 느끼한 목소리가(그때는 그것이 가장 인기 있는 젊은 주인공 목소리였다) 다소 거슬리기는 한다. 하지만 주인공 신성일이 하얀 가죽점퍼에 발목까지 딱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마치 제임스 딘처럼 상대편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은 채 불안한 시선으로 방황하는 젊은 영혼을 연기하는 모습은 이 영화가 지닌 젊은 감각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이 영화는 한국대중가요사에서도 중요한 작품이다. 주제가 최희준의 ‘맨발의 청춘’ 때문이다. 이봉조가 작곡한 재즈 스타일의 주제가와 영화음악은 건축과 출신의 젊은 작곡가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물론 그 인기에 큰 몫을 담당한 것은 기막힌 가사였다.

“눈물도 한숨도 나 홀로 씹어 삼키며 / 밤거리에 뒷골목을 헤매고 다녀도 / 사랑만은 단 하나에 목숨을 걸었다 / 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마라 / 그대를 태양처럼 그리워하는 / 사나이 이 가슴을 알아줄 날 있으리라.”

방송 극작가 유호가 쓴 이 가사가 얼마나 많은 청춘들의 가슴을 울렸을까 싶다. ‘나 홀로 씹어 삼키며’에서부터 가슴을 뛰게 만들다가 ‘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마라’ 대목에서는 탄성이 터져나올 지경이다. 이후 유호와 이봉조는 호흡을 맞추어 현미의 ‘떠날 때는 말없이’, 남일해의 ‘맨발로 뛰어라’, 최희준의 ‘종점’ ‘오인의 건달’, 정훈희의 ‘좋아서 만났지요’까지 인기가요를 쏟아낸다. 해방 후부터 ‘럭키 서울’ ‘비 내리는 고모령’ ‘전우야 잘 자라’ ‘서울야곡’ 등의 노래를 작사했던 유호가 트로트 시대를 벗어나 ‘맨발의 청춘’을 거쳐 신중현 작곡의 ‘님은 먼 곳에’까지 히트작을 내놓는 그 저력이 놀랍기만 하다.

‘맨발의 청춘’에서 확인되듯 60년대의 청춘은 ‘맨발’로 ‘뒷골목 밤거리’를 헤매는 ‘거리의 자식’이다. 뒤를 이었던 남일해의 ‘맨발로 뛰어라’나 최희준의 ‘오인의 건달’, 혹은 김상국이 루이 암스트롱 같은 목소리로 부른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나 ‘불나비’ 같은 노래 역시 도시의 뒷골목 감수성이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전쟁의 어두컴컴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휴전한 지 불과 10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니, 전쟁통에 용케 살아남은 어린애가 폐허의 도시에서 ‘거리의 자식’으로 자라난 것이다. 재즈의 흑인적 감수성 역시 우리에게는 미군부대 밤무대를 연상하게 하니 이 역시 전쟁의 흔적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이 암울할 듯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전후의 피폐함을 극복하고 ‘잘살아 보세’의 구호로 전진하자는 경제개발의 희망 속으로 포섭될 수 있었다. “돈 없다 괄세 마오 무정한 아가씨 / 캄캄한 쥐구멍도 볕들 날 있소 / 모를 건 사람의 팔자라고 하는데 / 그렇게 쌀쌀할 건 없지 않겠소”(김상국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나,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 / 사람 없어 비워둔 의자는 없더라 / (중략) / 아아아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김용만 ‘회전의자’) 같은 노래가 보여주는 돈에 대한 강한 욕망은 60년대 청춘들의 꿈이 어디로 모아지고 있었는지 확인하게 해준다.

그럼 이 시대 젊은 여자들은 어떤 꿈을 꾸고 있었을까?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히스테리가 이만저만”(최희준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이라고 노래할 정도로 남자에게 신경질을 낼 줄도 알지만, 그들의 관심은 “서울의 아가씨는 명랑한 아가씨 남산의 꽃이 피면 라라라라 라라라” 혹은 “여덟 시 통근길에 대머리 총각”(김상희 ‘대머리 총각’)에만 쏠려 있고, “아무리 남성금지구역이라도 (중략) 믿음직한 바지씨는 어디 계실까”(이시스터즈 ‘남성금지구역’)라고 노래했으니, 그들의 인생 고민은 연애와 결혼에만 묶여 있었던 듯하다. 남자들처럼 거리의 자식이라는 진지한 자의식도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70년대 청년문화가 60년대를 계승하며 발전시키기는 참으로 힘들었을 듯하다. 70년대의 청년은 60년대의 청춘들과 달리 자신의 삶에서 전쟁의 그림자를 지워버린 새로운 세대였다. 이들의 세계는 어둠이 아닌 밝은 대낮이었다. 이들은 라일락 피는 대학 교정이나 대낮의 길가에 앉아서, 혹은 바닷가에서 조개껍질 묶으며, 혹은 모닥불 피워놓고 자신들의 꿈을 키웠으니, ‘밤거리 뒷골목’ ‘거리의 자식들’과 그 꿈이 같았을 리가 없다. 청바지에 쇼트커트를 한 여자가수가 남자도 감당하기 힘든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라는 선지자적 어투로 결단의 선언을 노래했던 시대가 바로 70년대 초였다. 60년대 청춘 바람이 분 지 불과 4, 5년 만에 이를 뒤엎는 청년문화가 태풍처럼 몰려온 것은 그만큼 이들이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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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의 동백은 수줍은 섬처녀, 오정선의 동백은 요절한 님

이영미의 7080 노래방 <3>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꽃, 동백꽃

이영미 ymlee0216@hanmail.net | 제212호 | 20110403 입력
봄은 남쪽 꽃소식으로부터 온다. 지난주 남해안의 섬 지역에 동백꽃이 피었다니 아마 이번 주는 동백꽃이 성큼 북상했을 게다. 이 좋은 계절 꽃 이야기를 처절한 동백꽃으로 시작하려니 좀 가슴이 아프다. 일찍이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이야기한 레이첼 카슨의 책 제목 『침묵의 봄』이란 말이 가슴에 와닿는 봄이다. 우리 대중가요사에서 동백꽃은 해방 후에야 비로소 등장하니 비교적 늦게 등장한 꽃이다. 아무래도 대중가요의 본고장인 서울에서는 동백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만들어진 ‘고향초’에서 동백꽃은 그 모습을 드
봄은 남쪽 꽃소식으로부터 온다. 지난주 남해안의 섬 지역에 동백꽃이 피었다니 아마 이번 주는 동백꽃이 성큼 북상했을 게다. 이 좋은 계절 꽃 이야기를 처절한 동백꽃으로 시작하려니 좀 가슴이 아프다. 일찍이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이야기한 레이첼 카슨의 책 제목 『침묵의 봄』이란 말이 가슴에 와닿는 봄이다.

우리 대중가요사에서 동백꽃은 해방 후에야 비로소 등장하니 비교적 늦게 등장한 꽃이다. 아무래도 대중가요의 본고장인 서울에서는 동백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만들어진 ‘고향초’에서 동백꽃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남쪽 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는데/ 뽕을 따는 아가씨는 서울로 가네/ 정든 고향 정든 사람 잊었단 말인가’(장세정의 ‘고향초’, 김다인 작사, 박시춘 작곡).

식민지시대 환상의 히트 콤비였던 조명암과 박시춘의 작품으로, 조명암이 월북 이전에 남긴 몇 곡의 명곡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박시춘 작곡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트로트에서 벗어난 작품이기도 하거니와 분단이 되고 나서는 ‘북쪽 서울, 남쪽 고향’이라는 구도가 선명하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어, 이후 매우 많은 가수가 다시 부를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특히 1970년대 홍민이 부드러운 저음으로 부른 ‘고향초’는 뽕을 따던 아가씨들이 모두 서울로 가버리는 이농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던 때여서 가장 리얼리티 넘치는 감동으로 다가온 리메이크가 되었다.

동백꽃은 서울과는 거리가 먼 남쪽 바닷가의 시골 분위기를 대표하는 꽃이다. 63년 동아방송 라디오 드라마(추식 작)로 출발해 64년 엄앵란과 신성일 주연의 영화가 된 ‘동백아가씨’의 주제가 역시 그런 이미지였다. 남쪽 섬마을 처녀와 서울 대학생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이 영화는, 이미자(사진)가 솜털 보송보송한 20대의 목소리로 부른 주제가 ‘동백아가씨’를 남겼고, 이 노래는 가요계의 판도를 바꾸어 놓을 정도로 크게 히트했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이미자의 ‘동백아가씨’,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동백아가씨’는 ‘장미아가씨’ 이미지와 얼마나 다른가! 동백은 꽃잎이 크게 벌어지지 않고 수줍은 듯 벌어지다 만다. 그게 만개한 것이다. ‘동백아가씨’의 이미지도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속울음만 삼키는 섬처녀다. 청승맞은 트로트는 여기에 아주 적합한 음악이었고, 이미자는 꺾거나 굴리는 기교도 없이 담백한 목소리로 열창했다. 도시화 피로증을 겪던 60년대 대중은 이 노래에 환호했다.

동백은 필 때도 인상적이지만 떨어질 때 더 기가 막히다. 꽃잎이 채 벌어지지도 않은 듯한 싱싱한 꽃이 통째로 툭 하고 떨어져 버린다. 피기도 전에 지는 꽃, 그게 동백이다. 그래서 동백꽃은 요절, 아까운 죽음을 연상시킨다.

‘어두운 벼랑 위에 찬이슬 맞으며/ 동백꽃처럼 타다가 떨어진 꽃이 될까/ 가신 님 무덤가에 쓸쓸히 나 홀로 피어서/ 외로움 달래주는 한 송이 꽃이 될까/ 석양이 피어나는 하늘에 우리 님 그리며/ 외로움 달래주는 한 송이 꽃이 될까/ 내가 꽃이 되고 산새가 날아오면/ 우리 님 사랑도 넋 살아 꽃이 될까/ 외로운 산속에 홀로 누운 님을 두고/ 돌아서 오는 길엔 찬비만 내리네’(오정선의 ‘님을 위한 노래’(1978), 김미선 작사, 백순진 작곡).

요절이 분명해 보이는 이 죽음은 동백꽃 이미지로 연결된다. 안타까운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주인공은 마치 그의 죽음이 그랬던 것처럼 ‘타다가 떨어진’ 동백꽃이 되고 싶다. 김소월의 시 ‘금잔디’를 연상하게 하는 ‘가신 님 무덤가’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주인공이 느끼는 결핍감은 김소월의 그것처럼 극단적이고 절망적이다.

그러니 아마 제주 출신의 화가 강요배가 4·3의 기막힌 죽음을 ‘동백꽃 지다’라는 그림으로 그렸을 것이다. 4·3의 전 과정이 담긴 50편의 연작 그림에서 ‘동백꽃 지다’는 49번째 그림이다. 이 연작에는 총과 죽창, 시신, 이글거리는 눈이 가득 찬 그림이 태반이지만 유독 마지막 토벌과 대학살 장면인 이 그림에서만은 시신도, 총도 등장하지 않는다. 멀리 군데군데 피로 물든 개울을 배경으로, 가지에서 싱싱한 동백꽃이 툭 떨어지는 그 순간만이 클로즈업돼 배치돼 있다.
요절만큼 가슴 아플 수는 없겠지만, 송창식의 아쉬운 이별 노래는 동백꽃 소재의 노래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아마 고창 선운사 동백꽃 관광으로 보자면 일등공신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하략)’(송창식의 ‘선운사’(1986), 송창식 작사·작곡).

송창식의 노래치고는 편곡이 단순하고 촌스러운 편이다. 기타 딱 한 대로 반주하고, 여성 코러스가 다소 촌스러운 높은 목소리로 ‘있나요’ ‘말이에요’ 하고 덧붙인다. 나는 이 촌스럽고 단순한 편곡이 다분히 의도적이라 보인다. 도시적인 장미가 아닌 동백이니까. 쿨하게 헤어지지 못하고, 그렇다고 화도 내지 못하고, 그저 동백꽃 눈물 타령을 하며 촌스럽게 매달리는 이별이니까.

후드득 떨어진 동백꽃의 잔상은 오래 남는다. 시인 최영미가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영영 한참이더군’이라고 노래했듯이, 겨울 지나 봄까지 처절하게 떨어진 생명들도 아마 ‘영영 한참’ 잊혀지지 않을 게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한국대중가요사』『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광화문 연가』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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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진 기자의 ‘藝人’ 탐구 ②] 송창식

[신동아]

가수 송창식(63)은 기인(奇人)이다, 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분위기도, 노래도, 옷차림도 그렇다. 도사(道士)와 비스름하다. 그런 송창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할 얘기가 없단다. 그래도 졸랐다. 겨우 허락을 받아냈는데 오라는 시간이 밤 12시였다. 머리가 아팠다. 겨우 사정을 해서 시간을 밤 9시로 당겼다.

인터뷰는 새벽 3시가 넘어서 끝났다. 정확히 말하면 2시경 인터뷰가 끝났고 나머지 한 시간가량 그가 노래를 불렀다. 엄청 비싸다는 스피커 때문은 아니다. 온몸에 전율을 느낀 이유가. 머리칼이 쭉~ 섰다. “노래 잘한다”는 말도 안 나왔다.

인터뷰를 시작하자 그가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해보면 알겠지만, 내가 인터뷰 내용이 별로 일반적이지 않아요. 일반적인 인터뷰를 해달라 그러면 아주 졸작이 나온다고요. 보통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이 나한테는 현실감이 없어요. 무슨 생활 얘기를 하자고 하면 잘 못해줘요. 왜냐면 가짜 얘기를 해줘야 되니까.”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알아요”라고 대충 답하고 그냥 시작했다.

그는 얼마 전 MBC 예능프로 ‘놀러와’에 나와 ‘웃겼다’. 이게 처음 출연한 예능프로라고 했다. 음악프로말고 방송에 나간 것은 처음이라고. 아내를 위해 수상가옥을 10년째 짓고 있다거나, 3년간 노숙생활을 했다는 얘기를 해서 시쳇말로 ‘뒤집어졌다’.

▼ 예능프로에 출연하신 이후 화제가 됐어요.

“그렇더라고. 나도 깜짝 놀랐어요. 그냥 계속 웃기만 했는데, 내가 농담을 못 하는 건 아닌데 내가 하는 농담의 종류가 조금 일반적이지 않다고요. 그래서 방송에 별로 적합하지 않아요, 내가.”

▼ 밤 12시에 인터뷰를 하자고 해서 좀 당황스러웠어요.

“나는 뭐 완전히 쌩쌩할 때지. 그런데 요 며칠 내가 잠을 잘 못 잤어요. 원래 4시에 자서 (오후) 2시쯤에 일어나야 되는데, 지금 막 졸려 죽겠고 그래요.”

▼ 낮밤을 바꿔서 사시는데, 그렇게 살기 힘든 일도 있잖아요,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은 없어요. 그런 일을 안 만드니까. (생활패턴 바꾸는 일은) 난 무조건 안 해요. 나는 그런 일을 안 만들거든.”

▼ 오전에 누굴 만나야 된다거나, 어딜 꼭 가야 된다거나 하는 일이요.

“나는 그런 일이 안 생긴다니까. 약속을 안 하니까.”

알려진 얘기지만 그는 낮밤을 바꿔서 산다. 새벽 2시를 14시라고 한다. 어지간해서는 생활 패턴을 바꾸지 않는다. 언젠가 친구인 가수 윤형주씨의 딸이 결혼할 때 한번 낮 시간에 돌아다닌 적이 있는데, 아주 드문 경우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안 갔다. 그는 또 약속을 중시한다. 가수로 한참 잘나가던 시절에도 친구와 선약이 있으면 방송에 안 나갔다. 그것 때문에 ‘괴짜’라고 소문이 났는데, 신경 쓰지 않았다.

“약속은 내게 있어 똑같은 거니까, 이 약속이나 저 약속이나. 근데 보통사람들은 가수니까, 이제 방송이 더 중요하니까, 전화해서 (친구와의 약속을) 취소할 수도 있지 않으냐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다 똑같지.”

▼ 새벽 4시에 자서 오후 2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언제부터 하셨어요?

“옛날 통행금지 있을 때부터 한 거니까. 통행금지라는 게 (새벽)4시에 해제됐으니까, (밤)12시부터 4시까지가 가장 조용한 시간이니까, 그때는 깨어 있어야 됐다고요. 작업을 하려면.”

김연아처럼 돈다

▼ 오후 2시 이후에도 전화를 꺼놓으셨던데. 저녁이 되어서야 켜시고.

“내가 2시쯤 일어나면 혼자 5시간 동안 뭘 해요. 아무도 내 얼굴을 못 본다고. 그 시간에는.”

▼ 뭐 하시는데요.

“운동하고 연습하고 그런 게 다 합해서 5시간쯤 걸려요.”

▼ 댁에서요?

“예, 우리 집에서, 일어난 자리에서 하는 거니까. 팬티 바람으로.”

▼ 무슨 운동을 일어난 자리에서 팬티 바람으로 합니까.

“일단 일어나서 1시간 정도를 화장실에서 소비를 한다고요. 왜냐하면 나는 읽을 기회가 그때밖에 없으니까. 뭘 하나 갖고 들어간다고, 읽을거리를. 그래 갖고 일단 좌변기에 앉아서 읽어요. 그게 대충 1시간이에요.”

▼ 주로 뭘 읽으세요?

“아무거나, 누가 자기 책 썼다고 줬다거나, 시집이나, 뭐든지. 아니면 기계매뉴얼이라든지.”

▼ 기계매뉴얼이요?

“그럼요. 좌우간 뭐든지 읽을거리를 갖고 들어가요. 건축에 대한 공부를 한다든지, 뭐 이런, 읽을거리는 항상 많지요. 중요한 건, 크게 소리 내서 읽을 때도 있다고요, 연습 삼아. 그게 종류가 뭐든 관계없이. 그걸 하지 않으면 혀가 잘 안 돌아가는 날이 있거든요.”

기계매뉴얼을 들고 변기에 앉아 큰소리로 읽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 그 다음에는요.

“운동하는 데 2시간이 걸려요. 난 한자리에서 빙빙빙 도는 운동을 2시간씩 해요. 매일.”

▼ 돌아요? 2시간을?

“예, 계속 빨리 도는 건 아니고, 천천히 돌다 빨리 돌다 하는 거지만, 8㎞ 정도 돌아요. 그럼 2시간 걸려요.”

▼ 빙빙빙 도는 게 운동이 됩니까?

“그게 운동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한번 돌아보면 알아요. 왜냐하면 현재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상상할 수 있는 운동 중에 그것보다 나은 운동은 지구상에 없어요. 운동 되는 것 중에, 왜 그러냐 하면,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간단하게 설명하면 일단 척추하고 경추하고 32개가 따로따로 풀릴 수 있고, 도니까. 비틀려 도니까. 또 원심력에 의해서 피가 바깥으로….”

▼ 그렇겠네요. 팔을 벌리고 도니까.

“빨리 돌 때 팔을 벌릴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손가락 끝을 가리키면서) 나중에는 이게 이~만해진다고, 피가 몰려서.”

▼ 그 정도가 되려면 무지하게 빠른 속도로 도셔야 될 텐데.

“그렇죠, 한 10분쯤 빨리 돌면 그렇게 되지. 보통 네 발짝에 한 바퀴를 도는데 그러면 1분에 보통 160발짝 정도 뛴다고요. 그런데 빨리 돌 때는 1분에 한 250발짝, 뭐 이렇게 빨리 가요. 김연아처럼 도니까, 빨리 돌 때는. 한 발에 한 바퀴씩은 돈다고요. 헐떡거리니까 유산소운동도 되고.”(웃음)

▼ 땀도 많이 나겠네요.

“삐질삐질 나지요. 왕창 나는 만큼은 안 해요. 그거는 안 좋은 운동이니까.”

▼ 어디서 배우셨어요? 생전 처음 보는 운동인데.

“처음 보겠지만 옛날에는 많이 했어요. 이게 전통운동이라고 사실은. 무술이 곧 밥이던 옛날에.”

▼ 무술이 곧 밥? 그건 또 무슨 얘긴가요.

“예, 그럴 때가 있었다고요, 무공이 곧 밥일 때가. 힘만 가지고 살아가야 되는 때, 그 당시 가장 기본적으로 하는 게 바로 도는 거였어요.”

▼ 그때는 언제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그 시대는 2000년쯤 전에? 무예의 기본이 도는 거란 말이지. 그리고 왜 그 운동이 좋으냐 하면, 조깅 같은 거는 비 오면 못 하잖아요. 그리고 (조깅은) 한번 나가면 결국은 다시 돌아와야 되잖아요, 아무리 피곤해도. 그런데 이거는 하다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피곤하면 1시간 하고 끝내요. 그럼 되는 거지. 나는 많이 돌 때는 뭐 6시간 이렇게 도니까. ‘오늘 좀 돌아야지’ 하고 마음먹으면.”(웃음)

▼ 빙빙 도는 운동을 본격적으로 하신 건 언제부터죠?

“이제 5000일 넘었으니까, 내가 1만일 잡고 하는 거거든요. 1만일이면 30년이잖아요.”

▼ 30년이요?

“예, 1994년부터 돌았으니까.”

▼ 처음 돈 날 기억하세요?

“1994년 3월4일부터 돌았어요. 기왕에 시작한 거 1만일은 해야겠다 그거지.”

▼ 그럼 그때부터 하루도 안 빼놓고 지금까지.

“그럼요, 하루도 안 빼놓고 하는 거지요. 아니면 1만일이 안 되는 거니까. 이걸 우선으로 해요. 최우선으로다. 외국도 그래서 안 가는 거야. 외국 나가서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니까.”

▼ 1994년 이후로 한 번도 안 나가셨어요?

“한 번도 안 나갔어요.”

▼ 빙빙 도는 운동 때문에?

“예.”

이런 대화는 직접 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분위기를 알 수 없다. 약간은 당황스럽고 기가 찼다. 송창식씨에게 미안하지만 기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아~ 이래서 평범한 인터뷰가 안 된다고 했구나’하고 이해가 됐다. 그래도 멋있었다. 쟁이의 냄새가 나서.

“운동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특히 중국은 그래서 안 가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그 나라에 뭐 내 뜻과 관계없이 못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을까봐, 그런 나라는 안 가고, 미국도 왜 안 가냐면 가는 날은 하루를 이익 보는데 오는 날 하루가 그냥 없어진다고요.”

▼ 아~ 시차 때문에.

“미국 가서 유럽으로 해서 돌아오기 전에는 못 하는 거야.”

▼ 그렇겠네요. 비행기 안에서 돌 수도 없고.

“그렇지, 비행기 안에서 돌 수도 없고.”

가로 4m, 세로 4m

▼ 가수 조영남씨가 방송에서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공연을 하게 되면 선생님께서 가로 4m, 세로 4m 공간을 요구한다던데.

“지방 공연을 말하는 거예요. 내가 저녁 7시까지는 못 움직이니까. 지방공연 때는 여기서 못 가요. 왜냐면 여기서 저녁 7시에 나가서 비행기 타고 가면 이미 공연은 늦으니까, 그 전날 내려가야 된다고요. 전날 내려가면 숙소가 필요한 거지. 운동을 할 수 있는 숙소.”

▼ 그게 준비 안 된 곳엔 안 가세요?

“안 가요.”

▼ 혹시 그게 준비가 안 돼서 공연을 못 한 적도 있나요?

“많지요. 옛날에 ‘열린음악회’를 약속했는데 그것 때문에 돌아왔지. 저녁 6시에 와야 된다는 거예요. 근데 그 시간은 내가 약속을 못 하거든요. 아무리 빨라도 5시에 나와야 되니까. 그래서 ‘6시는 약속을 못 한다. 그러니까 숙소를 해줘라. 서울 여의도에다.’ 그러니까 프로듀서가 ‘알았다’ 하고 갔어요. 약속을 했지. 그런데 여의도 호텔방에 딱 갔더니 (손으로 사각형을 그리며) 이만한 거예요. 그래서 도로 갔어요. 사람들은 내가 펑크를 낸 것처럼 얘기하는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그게 없으면 난 공연을 못 한다고.”

▼ 근데 왜 굳이 4m, 4m입니까?

“아~ 돌다보면 팔이 부딪히거든, 이게 공전과 자전을 한다고, 가운데서만 도는 게 아니고 이렇게 이렇게 돈다고요.”

그가 도는 시범을 보였다. 팔을 펼치고 자유롭게 도는 모습을, 마치 새가 날 듯이.

▼ 그동안 해외에서 공연 제안을 많이 받으셨을 텐데.

“무지하게 많이 받았지. 그래도 한 번도 안 갔어요. 세상에 더 중요한 건 없어요. 당장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는 게 중요한 거지. 이게 말하자면 1만일이라는 작품을 하는 건데, 작품이 안 끝났잖아요. 이건 그리고 하루 삐끗하면 1만일은 없어지는 거라고요.”

▼ 중국은 그렇다치고 일본은 갈 수 있지 않나요? 당장 전쟁이 날 것도 아닌데.

“아~, 그건 왜냐하면, 일본은 그만한 방이 있으라는 보장이 거의 없고, 또 바닥이 거의 다다미인데 내가 돌면 그 다다미는 다 뜯어져요. 바닥은 완전히 해져버린다고.”

▼ 아니, 뭘 신고 도시는데 바닥이 뜯어져요?

“보통 쿵푸화 신고 돌죠.”

▼ 쿵푸화요?

“예, 바닥이 가죽인 거, 잘 미끄러지는 거. 밖에서 돌 때도 있어요. 밖에서 돌 때는 트레이닝복 입고 돌아도 돼요. 대신 천천히 돌지. 내가 보통 집에서 도는 운동은 팬티 바람으로밖에 못 돌아요.”

▼ 그건 또 왜 그러세요?

“왜냐하면, 빨리 돌 때 옷이 걸리면 찢어져요. 옷이 걸리면 넘어지거나 찢어진다고. 퍽 하고 뜯어진 적이 있다고. 이게 빨리 도니까.”

▼ 지금은 달인이시겠네요.

“그렇지는 않아요. 아직도 100평짜리 실내에선 못 돌아봤어요. 100평짜리 실내에서 한번 돌아야 될 일이 있어요, 내가 느낌상. 그거를 최소한 한 달은 해야 될 거 같아요. 꽹과리 치면서 상모 돌리는 사람들이 공중에서 도는 거 있잖아요. 그걸 할 장소가 없는 거야, 내가.”

▼ 댁에서는 못 하시겠네요.

“못 하지요, 그거는. 뭘 걷어찰지 어떻게 알겠어요? 솟구치면서 도는 걸 해야 되는데, 일단 천장이 (낮아서).”

인터뷰 장소는 경기 구리시에 있는 송창식씨의 개인 스튜디오다. 지하실인데 천장이 꽤 높았다. 하지만 송창식씨는 그 천장을 가리키며 “이것보단 높아야 된다”고 했다. 기자 눈에는 꽤 높아 보였는데.

100평에서 솟구치고파

▼ 여기보단 높아야 되나요?

“(천장을 쳐다보며) 원래 사람이 이만큼 높이 못 뛴다고요. 원래 못 뛰는데 이러고 운동하다보면 무슨 일이 날지 모른다고요. 이게 기가 막 솟구치는 거니까. 그러니까 조심스러워서 못 하는 거지요.”

▼ 일어나서 한 시간은 화장실, 두 시간은 운동, 나머지 2시간은 뭐하세요.

“연습하지요. 음악, 기타. 기타를 매일 안 치면 (실력이) 줄어요. 스트로크를 나 정도 하는 사람은 하루만 안 치면 다음날 줄어요. 이게 벌써 몸이 안 풀려 있으니까. 지금 나이는 더 나쁜 게 집에서 이렇게 기타를 2시간씩 치고 공연 가잖아요? 거기서 앉은 자리에서 또 풀어야 돼요, 몸을. 아니면 무대에 올라가서 잘 안 쳐져요.”

송창식은 지금도 매일 기타의 기본박자를 연습한다. 연습실에 노트북이 하나 있는데, 이 노트북에 정확한 박자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깔아놓고 거기에 맞춰서 기타 치는 연습을 한다고 했다.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고 기본박자를, 50년 이상 기타를 친 거장이,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60년 기타 친 사람도 박자를 못 맞춰요. 이거 틀어놓고 맞춰보라 그러면 한 번도 안 맞는다고. 한 번도 그렇게 (연습을) 안 했으니까. 정확한 소리를 내는 연습을 하는 건 사실 음악하고는 관계없는 거예요. 말하자면 운동이에요. 소리 내는 운동이라고요. 운동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사실 작아지는 운동일수록 좋은 운동인 거예요. 우리가 막 움직여 가지고 트레이닝을 하잖아요? 크게 보면 그게 다 주기적인 진동을 말하는 거예요. 그게 작아질수록 좋은 운동이라고. 물론 그것도 참선이나 좌선만은 못 하지만.”

▼ 참선이나 좌선도 하세요?

“배운 건 아니고, 어릴 때 노숙을 하면서 터득했지, 방법을. 한 3년간 노숙하면서. 겨울에 노숙을 하려면, 지금은 뭐 지하철 같은 데 가서, 따뜻한 곳 찾아서 잘 수 있지만, 그때는 지하도 같은 데 들어가면 쫓아냈어요, 경비들이. 그러니까 밖에서 자려면 조그만 데라도 찾아 들어가서 자야 돼요.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몸을 최대한으로 줄인 상태에서 숨을 가늘게 쉬어야 돼요. 최대한으로, 숨을 크게 쉬면 찬 공기가 들어오니까. 조금씩 내보내고 조금씩 집어넣는다고. 내가 그러면서 명상을 배웠지. 참선을 그렇게 터득했어요. 거의 숨을 쉬지 않는 수준으로.”

▼ 거지생활 하면서.

“그거 때문에 건강이 유지된 거죠.”

▼ 왜 노숙을 하신 거예요? 서울예고도 다니셨는데.

“레슨비를 못 내서 2학년 때 낙제를 했잖아요. 그길로 그만뒀어요. 그리고 노숙생활 하고 다녔지. 그리고 아버지는 6·25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집을 나간 집에서 내가 컸어요. 할아버지, 삼촌 집을 왔다갔다 했어요. 그래도 공부는 톱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내가 검·판사 되는 줄 알았으니까. 예고도 톱으로 들어갔으니까. 예고에 간다고 하니까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완전히 반대했지. 서울음대 가면 확실하다고 그랬다고.”

▼ 예고에는 왜, 어떻게 들어갔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작곡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말하자면 소질이 있었다고요, 내가. 꿈이 지휘자였고. 그러다 예고라는 게 있다는 얘기를 듣고 들어갔지. 그리고 내가 군경유자녀였으니까. 원하는 곳에 들어가기 좋았지. (군경유자녀는) 학교 커트라인에 맞으면 들어가는 거예요. 유자녀는 특권이 뭐냐면, 고등학교 3군데를 지원할 수 있었어요.”

▼ 어디 어디 지원하셨어요. 3군데를.

“1지망 서울예고, 2지망 경기, 3지망 서울 이렇게. 예고는 실기에서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공부는 자신 있었으니까. (예고 떨어져도) 경기, 서울은 간다 그러고 한 거예요.”

▼ 전공은 뭘 하셨어요?

“성악을 했지. 내가 인천에서 중학교 때 경기도 콩쿠르 나가서 1등 없는 2등을 한 적이 있거든요. 한번도 제대로 배운 적은 없어도.”

▼ 배운 적이 없는데 어떻게 불러요.

“그냥 악보 보고 부른 거지. 1등은 줄 수가 없었지. 나보다 잘하는 놈은 없었으니까. 난 내가 노래를 무지하게 잘하는 줄 알았지 뭐야. 근데 예고를 딱 갔는데, 내 노래는 노래도 아닌 거야. 왜냐? 그때 처음으로 레슨이라는 걸 선생님이 해주는데, 대가들이 레슨을 해주는데 쫓아갈 수가 없는 거예요.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니까. 그러다 낙제하고 그만뒀죠. 근데 학교에선 나를 퇴학 안 시키고 조기졸업으로 처리해버렸어요. 그래서 내가 한 위 기수 동창회에 들어가 있다고요.”

▼ 낙제 덕분에 조기졸업을.

“그렇지.”(웃음)

송창식은 이후 떠돌이 생활을 한다. 학교 다니는 친구들 찾아다니며 밥 얻어먹고 살았다. 친척집을 전전했다. 동냥질을 했고 이것저것 많이 훔쳐 팔았다. 영리했던 송창식은 당장 먹을 것을 훔치기보단 팔아서 돈이 되는 것을 주로 훔쳤다. 철물점의 망치 같은 게 좋았다. 그렇게 도둑놈, 거지 생활을 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훔친 서울대 배지

“1967년 봄 어느 날 정신을 번쩍 차린 거예요. 내가, 이렇게 살아가지고 되겠냐고 말이지. 내가 당시에 해태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돌로 만든 해태 모형 있잖아요. 호텔 같은 데 가면 ‘어서 오십시오’ 써 있는 거. 그만두고 바로 무전여행을 떠났어요. 부산행 열차를 타고. 갖고 있던 전 재산 50원으로 엽서를 사서 친구들에게 무전여행 간다고 보내고는.”

송창식의 무전여행은 40여 일간 이어진다. 기차를 몰래 타고 가다가 걸리면 얻어터지고 내려서는 동냥질을 했다. 헛간을 빌려 눈을 붙였다. 일을 해주고 밥을 얻어먹었다. 부산까지 가는데 15일이 걸렸다. 부산에선 조리기술을 가진 웬 양아치를 만나 같이 다녔다. 그 양아치를 따라 밀양에 가서 중국집에서 얼마간 일했다. 면 뽑는 기술을 익혔다. 당시 송창식은 누군가에게서 훔친 서울대학교 배지를 가슴에 달고 다녔다. 무시 안 당하려고, 그걸 달고 구라를 쳤다. 사람들은 “서울대생이 무전여행을 하는구나”하며 기특해 했다. 무전여행을 하면서 송창식은 많은 생각을 했다. 그는 “그때 정리한 생각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했다.

▼ 어떤 결심인데요.

“최고의 인생을 사는 거지요. 위인으로. 그전까지는 정말 되는 대로 살았지. 사는 동네도 빈민굴이니까, 친구들이 다 양아치들이에요. 그냥 지나가는 여학생 잡아다가 강간하고 그런 놈들이었다고. 난 절대 그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거지.”

▼ 무전여행 끝내고는 서울로 오셨어요?

“밤에는 건축현장에서 야방(경비)을 보고 낮에는 홍익대 잔디밭에 가서 노래를 불렀어요. 기타 치면서. 친구가 그 학교를 다녔거든요. 그러다가 음악감상실 쎄시봉 주인을 만났어요. 그 사장은 홍익대 다니던 이상벽씨 따라서 놀러 왔다가 날 봤지. ‘홍대 대표로 우리 감상실에 와서 하루 출연하라’ 이러는 거야. 그래서 쎄시봉에 간 거예요. 대학생인 척하고는.”

‘쎄시봉’은 우리나라 음악감상실의 효시와도 같은 곳이다. 1960년대 통기타 가수라면 누구나 거치고 싶어했던 무대였다. 송창식, 조영남, 윤형주, 김도향, 서유석, 김세환 등이 이곳에서 배출됐다.

▼ 우연이었네요.

“거기서 윤형주, 이익균이랑 트리오쎄시봉을 만들었어요. 근데 내가 살아온 게 그러니까 얼마나 나쁜 버릇이 몸에 많았겠어요. 일단 안 씻고, 이도 많고. 입만 벌리면 구라 치고.”

▼ 주로 무슨 구라를 치셨어요.

“쓸데없는 구라예요. 나는 이래도 우리 집 가면 무지하게 부자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구라지. 하여간 쎄시봉 간 뒤로 난 노숙을 안 해도 됐지. 그리고 팝송을 배운 거예요. 거기에 매료됐지.”

쎄시봉, 조영남, 윤형주

▼ 당시 쎄시봉에서는 조영남씨가 가장 유명했나요?

“그 양반은 당시 대한민국 최고 가수였어요. 노래 잘하기로는 최고였다고요. 내가 영남이형 때문에 팝송에 흥미를 느꼈어요. 그리고 내가 구라 치다가 영남형한테 한 대 터졌어요, 난롯가에서.”

▼ 난롯가에서?

“난롯가에서 밤새 얘기하다가. 우리 집 부자라고 구라 치는데 그냥 손이 날아 온 거야. 그런데 코피가 찍~ 난 거지. 그러니까 본성이, 딱 양아치 본성이 나온 거지. 근데 양아치들 근성 제일 기초가 뭔 줄 알아요? 불리할 때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비는 거야. 딱 보니까 나는 객식구고 여기는 쎄시봉이고, 그래서 일단 ‘잘못했습니다’ 그랬지. 그러고 나서 조용히 나가서 예전에 나를 때렸던 놈들한테 전화를 했지 뭐예요, 3년 만에. ‘야, 여기 손볼 놈 하나 있다’고.”(웃음)

▼ 누가 왔어요?

“다음날 인천에서 두 놈이 올라왔는데, 쌍둥이라고, 나도 무서워하는 놈들이 올라왔어요. 걔들은 ‘이게’ 아니고 ‘이거’예요.”

앞의 ‘이게’는 주먹이고 뒤의 ‘이거’는 칼이다. 송창식씨는 칼로 찌르는 흉내를 내며 설명했다.

▼ 칼 쓰는?

“칼도 아니고 긴 대못을 망치로 두드려서 만든 칼, 친구들하고 시비 붙어도 그걸 쓰는 놈들이라니까.”

▼ 조영남씨 죽을 뻔했네요.

“영남형은 자기가 그런 위험에 처한 걸 몰랐지. 내가 인생을 쭉 살면서 보면 계속 (나한테) 딴죽을 거는 형이 있는데 그게 영남형이에요. 그런데 그게 나한테는 아주 최고의 약이 됐어요. 일단 그 일 이후로 구라 치는 버릇이 없어졌고.”

송창식은 조영남을 두고 “내 인생 내내 딴죽을 거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듣다보니 일종의 콤플렉스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연이 오래된 만큼 사건도 많았다. 들어보니, 솔직히 좀 유치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언젠가는 김도향씨가 나한테 ‘너는 건강을 어떻게 유지하냐’고 그래요. 그래서 단전호흡을 하는데 가르쳐주지는 못한다고 했지. 난 노숙하면서 배웠는데, 형한테 노숙하라고 할 수도 없고. 김도향씨가 하루는 단전호흡 하는 젊은 친구를 데려왔어요. 한번 봐달라고, 그래서 봤더니 방법이 좋아. 그래서 같이 했죠. 동생인 김세환한테도 연락을 했지, 같이 하자고. 근데 내가 선택을 잘못한 거요. 하루는 운동하자고 만나서는 도향이형이 세환이한테 귀신얘기를 했어요. 아니, 운동하자고 만나서 귀신얘기는 왜 하냐고, 글쎄. 안 그래요? 괜히 세환이네 집에 가서는 말이야, ‘야, 네 집에 귀신이 몇백 마리 있다. 이렇게.’ 그거 다 구라거든. 세환이는 당연히 기분이 나쁘지. 그래서 영남형한테 얘기를 했나봐. 내가 미국에 가서 영남형을 봤는데 영남형이 ‘니들 하는 운동 한번 해봐’ 그러더라고. 그래서 했더니 ‘구라 치지 마, 임마’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나도 ‘아니, 왜 가만있는 사람 불러다가 구라 치지 말라고 그러냐’ 그러면서 한번 붙었지. 뭐 그런 거예요.”

▼ 묘한 관계네요.

“좀 이상한 얘기지만, 난 사실 이상한, 오래전 일도 기억해낸다고요. 내가 영남형하고 어땠냐? 전생에는 어땠냐? 전생의 전생에는 어땠나?”

▼ 전생을 기억하세요.

“그럼요. 그때도 다 기억을 한다니까. 극도의 명상을 하니까. 물론 착각일지 모르지만, 그러면 ‘아~ 그 형이 전생에 내 가정교사를 한 적도 있지’ 이런 생각을 한다니까요. 그래도 도움이 된 가정교사. 하필이면 (조영남씨에게 맞았을 때, 칼 쓰는) 그놈들이 올 게 뭐야. 주먹쟁이들이 왔으면 그냥 패는 건데.”(웃음)

▼ 만약 패버렸으면.

“그랬으면 난 또 건달세계로 가는 거지. 양아치 세계로.”

운명의 1976년 12월31일

▼ 부인과는 고등학교 동창이죠.

“예, 우리 집사람이 쌍둥이에요. 동생. 쌍둥이가 둘 다 예고를 나왔죠. 언니는 무용과, 집사람은 미술과, 나는 성악과. 고등학교 때부터 친했어요. 탁구 치면서 친해졌지. 근데 나는 너무너무 가난해서 먹을 게 문제였었는데 무슨 여자야. 여자는.”

▼ 그럼 어떻게 결혼하신 거예요.

“가수가 된 다음에, 1975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연을 하는데 그 언니를 만났어요. 너무 반가워서 ‘니 동생은 뭐 하냐’ 그러니까 한국에 있다는 거예요. ‘한국에서 골동품 장사를 한다’는 거야. 그렇게 찾아갔어요. 이태원에. 근데 가보니 벌써 이건 내 상대가 아닌 거예요. 우리 같은 애 상대할 경력이 아니었어요. 완전 상류사회 경력이니까. 스튜어디스 출신인데, 그것도 미국 정보부 비행기 스튜어디스니까. 영국 왕실학교 가서 교육도 받고. 우리하고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거지.”

▼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내가 알던 사람 중에 박동선이라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옛날 미국에서 로비하다가 문제가 됐던. 내가 그때 집사람한테 박동선씨를 소개해줄 생각이었어요. 박동선씨가 그때 미국에서 아주 성공한 사업가였거든요. 근데, 집사람이 이미 나한테 마음이 있었는데 난 그걸 몰랐지 뭐예요.”

박동선씨는 한미 간 외교마찰을 불렀던, 1976년 발생한 일명 ‘코리아게이트’의 주인공이다.

▼ 두 분이 가까워진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1976년 12월31일 날, 미8군에서 파티를 했는데, 집사람이 나한테 파트너를 하나 소개해달라는 거예요. 파티 호스트가 정일권 국회의장이었는데. 난 마음속으로 박동선씨를 생각했죠. 박동선씨는 그때 호랑이가 날개를 단, 그런 사람이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옆에 앉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근데 내가 약속을 못 지켰어요. 그래서 대신 내가 갔지. 다음날 대구에서 공연이 있었는데도.”

▼ 파티에서 두 분이 드디어….

“밤 12시가 되니까, ‘땡땡땡’ 하고 종이 울리는데, 이게 파트너와 키스하라는 종이거든요. 근데 내가 그때 집사람한테 어떻게 키스를 해. 그래서 엉거주춤 있는데 집사람이 ‘나한테 키스해’ 그러더라고. 그때 알았지. ‘얘가 나를 남자로 생각하는구나’ 하고.”

▼ 그렇게 연애가 시작됐군요.

“다음날 대구에 내려가야 되는데, 진짜 가기가 싫은 거야. 이렇게 훌륭한 애가 날 좋아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남다르게 훌륭했거든요. 아무튼 어딜 가도 확 빼어난 여자였거든요. 나중에 내가 명상을 해보니까, 전생을 떠올려보니까, ‘아~ 이게 우리가 한두 번 부부가 아니었네’ 생각이 들더라고. 집사람도 그러더라고. 언젠가 내가 ‘마이 웨이’를 부르면서 걸어오는 걸 TV로 보는데, 그 옆에 자기가 서 있더래요. 신부 옷을 입고.”

▼ 그런데 대구는 가셨어요?

“갔지. 그런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여기 내려오라고 했지. 그 다음부터 불이 붙었지. 한 보름간 불이 붙었다가 바로 구혼하러 갔지, 집사람 집으로.”

▼ 보름 동안 부인을 집에 안 보내신 건 아닙니까?

“아니에요. 그러지는 못했고. 난 사실 결혼 안 하는 주의였거든요. 평생 혼자 살겠다는 주의였었다고. 근데 그때 잠깐 잊어버렸지.”

▼ 부부싸움은 안 하세요?

“많이 했죠. 난 부부싸움도 스포츠처럼 하거든요. 싸울 만한 일이 생기면 열심히 싸우는 거지. 대신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거나 하지는 않아요. 뭐 잘 이해가 안 되겠지만.”

야, 얘 퇴학시켜라

▼ 부인을 위해 수상가옥도 짓고 계시다고.

“영남형이 그랬지. 근데 영남형은 우리 집에 와보지도 않았어요.”

▼ 지금도 집을 짓고 계세요?

“아직 완성은 안 했으니까. 땅 700평을 사서 집을 지으려고 마음먹었는데, 집을 지어줄 사람이 없는 거야. 대한민국 최고의 건축가가 내 친군데, 난 그 친구의 집도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왜냐? 예쁘긴 하지만 한국 사람에게 안 맞는 거야. 그래서 내가 건축 공부를 했어요. 한 5년 동안. 내 집 지을려고.”

▼ 아~ 화장실에서 하루 한 시간씩.

“아니, 그때는 화장실에서만 한 건 아니지. 서적을 사다가 제대로 했지. 나 지금 건축사 해도 돼요. 시험 봐도 안 떨어질 걸? 설계를 해서 그 친구한테 도면으로 그려줘라 그랬지. (개울가에 있어서) 비 많이 오면 정말 끝내줘요.”

▼ 들어보니 아들을 학교에 안 보내셨다고.

“큰아들 송결이 얘긴데, 안 보낸 게 아니고,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지가 바빠서 학교 갈 시간이 없었지.”

▼ 고1 학생이 뭐하는 데 바빠서 학교를 못 가요?

“컴퓨터 하느라고 학교 갈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고. 성적은 톱이었는데, 다들 ‘하남에서 서울대 학생 하나 나오네’ 그랬다고. 기대를 왕창하고 있었는데. 컴퓨터 게임 만드는 거 하느라고. 그래서 생각해보니 나도 고등학교 2학년 중퇸데 뭐, 잘 사는 데 뭐, 그래서 ‘맘대로 해’ 그랬지. 집사람한테 ‘야, 얘 퇴학시켜라’ 그랬더니 집사람이 학교 가서 바로 퇴학시켰어요.”

▼ 부인도 동의를 하셨나요?

“나랑 비슷해요, 집사람도. 단지 나보다 생각이 좀 고급스럽고 우아 쪽으로 간다는 거지. 나랑 생각하는 게 똑같아요. 송결이 걔 유명했어요, 인터넷에서. 지금은 게임회사에 다녀요.”

▼ 송창식 하면 딱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또 옷인데요. 개량한복.

“이거 1984년쯤부터 입었어요. 왜 그랬냐면, 가수왕 되고 나서 1976년에 홍콩에서 열린 아마추어 가요제에 갔는데, 가면서 최고로 좋은 양복하고 한복을 한 벌씩 가지고 갔다고요. 근데 가보니까, 내가 제일 후줄근한 거야. 전면 거울이 있는 방에서 열린 리셉션이었는데,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말이야. 아주 기분 더럽더라고. 그래서 다음 날엔 한복을 입었는데, 그때 거기 모인 총 인원 중에 내가 제일 멋있는 거야. 빼어나게 멋있는 거야.”

▼ 기분 좋으셨겠네요.

“그렇죠. 숙소에 돌아왔는데 별생각이 다 들더라고. 이게 한복 때문이냐, 아님 내 몸에 문제가 있는 거냐. 그래서 복식에 대해서 연구를 시작했어요. 그 공부도 몇 년 했지.”

송창식은 뭔가에 한번 꽂히면 기본적으로 몇 년씩은 파고든다. 빙빙 도는 운동도 그렇고 건축공부도 그렇다. 복식공부도 마찬가지다. 좀 다른 얘기지만, 그는 자동차도 한 종류만 탄다. 벤츠. 그것도 중고로만, 1982년에 처음 샀는데, 성능에 매료되어 7번이나 중고 벤츠를 샀다. 타다가 폐차하고 또 샀다. 뭘 하든 끈기가 좋다. 옷 얘기를 더 들었다.

“내가, 결혼한 뒤에 집사람한테도 연구를 시켰는데, 어느 날인가는 집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거야. 실제로 만들었는데 입을 만하더라고. 그렇게 나에게 맞는 옷본이 만들어졌죠. 근데 옷 만드는 프로들은 그 옷본을 보고는 자기들은 ‘못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결국은 보광동에 있는 세탁소 아주머니를 찾아갔어요. 아주 똑똑한 아주머니야. 척 보더니 ‘되겠는데요’ 그러는 거야. 물건이 나왔는데 아주 마음에 들더라고요.”

부인이 만든 첫 작품은 호피무늬 비슷한 천으로 만든 개량한복이다. 송창식은 이 옷이 지금도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의 개인 스튜디오 벽면에는 이 옷을 입고 찍은 가로 2m가 넘어 보이는 독사진이 떡~ 하니 결려 있다.

▼ 그 보광동 아주머니가 무대의상을 얼마나 만드셨어요.

“100벌 좀 안 되게 만들었지. 난 그 아주머니가 만든 옷만 입었으니까. 근데, 그 아주머니가 돈을 많이 벌었어요. 내 옷 만들면서 쌓은 노하우로 기념품용 한복을 만들어 귀국하는 미 8군 군인들에게 팔았거든요.”

▼ 보광동 아주머니는 어떻게 알게 됐는데요?

“김도향씨가 ‘우리 동네에 아주 똑똑한 아주머니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어요. 1984년부터 아주머니가 만들었지. 7~8년 전까지 만들어줬으니까.”

대마초 사건으로 오해받아

▼ 1976년쯤 연예인 대마초 사건 때 오해를 많이 받으신 걸로 아는데요.

“난 대마초 피는 사람들 말리는 사람이었어요. 보건사회부 취조실에 끌려갔는데, 갑자기 ‘불어, 이 새끼야’ 그러더라고. 기분이 나빴지. ‘다른 사람 다 해도 난 안했다’고 했죠. 그런데 취조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이 대마초 피우는 건 봤어요?’ 그러더라고. 그래서 ‘네, 봤어요’ 그랬지. 그랬더니 그 사람이 그래요? ‘나 서울신문사 기자요’.”

▼ 딱 걸렸네요.

“졸지에 내가 대마초 피우는 연예인을 분 사람이 된 거야. 사실은 내가 갔더니 이미 길쭉한 종이가 일렬로 있는데, 거기에 다 명단이 있더라고. 김OO, 박OO 같은 대마초 골초들이 다 있더라고. 나중에는 ‘내가 가수 정훈희랑 동거한다’는 소문 때문에 날 잡아왔다는 거야. 정훈희 잡을라고. 그러더니 또 윤형주를 잡아야 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랬지. ‘형주는 장가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마누라가 애도 뱄는데 무슨 대마초냐’고. 그랬더니 윤형주 집 아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어느 어느 아파트에 산다고 했는데, 형주 집 서랍에서 대마초가 나왔지 뭐예요. 가지고 있던 것 중 절반은 이장희한테 주고 나머지를.”

자신의 앨범을 들어 보이는 가수 송창식. 손에 들고 있는 것은 ‘하얀 손수건’이 들어 있는 트윈폴리오 시절의 앨범.

▼ 오해받을 상황이었네요.

“더 나쁜 게 있어요. 이때부터 취조하는 사람들이 잡아온 애들한테 ‘송창식이 지금 활동하지, 그러니까 너도 불어’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런 게 모두 오해의 소지가 된 거야. 그러고 나니까 나중에는 별 놈들이 다 나한테 와서 ‘야, 붙자’ 그러는 거야. ‘내가 언제 너하고 대마초 했냐’면서. 근데 진짜 대마초 골초들, 나한테 붙자고 하면 안 되는 놈들이 그렇게 찾아와서 붙자고 그러더라고. 참, 미치겠데. 명단은 분명히 걔들한테서 나왔을 텐데. 그때부터 내가 홍콩 같은 곳으로 외유를 다니기 시작한 거예요.”

▼ 하여간 그때 다들 들어갔잖아요. 윤형주, 김세환, 이장희 같은 친한 분들이.

“장희는 안 들어갔어요.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고. 형주한테 받아놓고 ‘니가 나 언제 줬냐’고 우겼지. 걔가 똑똑한 놈이지.”

송창식은 대마초를 딱 한번 피워봤다고 했다. 1968년인가 내한한 피스코라는 미국 평화봉사단원들을 통해서 대마초를 알았단다. 피스코가 사실은 미국의 농산물 스파이 조직인 것을 나중에 알았다. 피스코 사람들은 대마초를 해피스모크라고 불렀다. 딥퍼플 같은 세계적인 그룹이 공연을 하면서 이 해피스모크를 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동했다. 그래서 노는 친구들을 불러다가 같이 피워봤다. 그는 대마초를 피운 환각상태를 이렇게 설명했다.

“일종의 마비증상이 오는데, 9겹의 피부가 한 겹씩 붕붕붕 뜨는 거예요. 내가 뭐라고 말을 하면 9번을 말하게 되는 거야. 메아리치듯이. 그리고 기타를 한번 쳤는데, 너무너무 좋은 거야. 9배로 좋은 거야. 한번 땡~ 치고 너무 좋아서 7번을 치는 거예요. 자기 뻑이지.”

▼ 그런데 정훈희씨와는 오해 살 만한 일이 있었나요?

“특별히 친했죠. 내가 너무 예뻐했지. 노래를 제일 잘하니까. 노래 잘하는 가수는 그 사람 하나였어. 패티김 같은 사람들도 다 정훈희만 못했어요. 다른 사람은 다 음정 박자가 틀렸고 정훈희만 맞았다고.”

▼ 사적으로도 친했나요?

“친하죠. 난 정훈희 끼고 살았는데. 1975년에 가수왕 받고 나서 전국 투어 다닐 때 내가 정훈희를 데리고 다녔지. ‘중다마’로, 내가 ‘아다마’고, 정훈희가 노래를 제일 잘하니까.”

방위 때 음악세계 정립

▼ 두 분 사이에 ‘썸씽’이 있었겠는데요.

“공개된 장소에서 끌어안고 했으니까 오해를 샀지. 진짜 남자로서 좋아했어요. 행위만 안 했을 뿐이지, 여자를 책임질 수 없었기 때문에. 정훈희한테 ‘우리 평생 결혼하지 말고 사랑하면서 살자’ 그랬는데, 내가 먼저 장가가면서 깨졌지.”

▼ 1970~80년대 한마디로 정부에 찍힌 가수였는데.

“방송금지곡이 많았죠. 찍힌 진 오래됐고. 내가 군대도 갈 게 아닌데 갔다니까. 난 부모 없는 3대 독자로 군대 면제 케이슨데 특수자라고 해서 잡혀간 거지. 7개월 방위였지만. 그런데 방위 가서 음악이론을 정립했어요. 내가 음정 박자가 안 맞는다는 걸 그때 알았으니까. 내가 방위 때 의가사제대를 시키는 부서에서 일했어요. 그래서 내가 나부터 의가사제대를 시켰지.(웃음) 거기서 전부 버렸어요. 그 동안의 내 음악을.”

▼ 무슨 계기가 있었어요?

“어느 날 내가 AFKN을 보는데, 아마추어 노래자랑이 있었어요. 그걸 봤지. 근데 노래를 듣다가 보니까 내가 그놈들만도 못한 거야, 글쎄. 한심스럽더라고. 너무 쇼크 먹었지 뭐예요. 한 일주일 간은 ‘내가 병신인가, 어디가 모자란가’ 생각하며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다녔어요. 그러다가 생각한 게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게 뭔가’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국악과 뽕짝을 이론적으로 파기 시작한 거예요.”

▼ 그래서 처음 만든 노래가 뭐였어요?

“‘피리 부는 사나이’지. 히트를 했어요. 대중가요 같지도 않은데 히트를 했지. 처음 나온 형식의 노래였지. 그러고 나서 바로 ‘한번쯤’이 나왔지. 영화음악으로 ‘왜 불러’하고 ‘고래사냥’이 나오고.”

▼ 서로 아주 다른 노래들인데요.

“피리 부는 사나이, 왜 불러는 뽕짝이고, 고래사냥은 록이고, 달라요. ‘왜 불러’는 ‘아니 안~ 되지, 돌아서면 안 되지, 쿵짜짜쿵짜’ 이렇게 나가잖아. 내 뽕짝은 일단 뒤에 악센트가 붙는 게 달라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히트한 건 아니에요. 서양식이 아니고 우리식으로 해서 히트한 거지. 음정은 틀려도 알고 틀리니까 공감을 얻은 거예요. 한마디로 대중하고 똥창이 맞은 거지. 그전에는 노래를 잘했지만 대중하고 동떨어진 음악이었거든. ‘한번쯤’‘고래사냥’도 다 그랬어요.”

▼ 그럼 변화된 송창식을 완성시킨 노래는요?

“완성곡은 아직 발표 안 했고, 가장 비슷한 건 ‘가나다라’예요. 이것도 똥창이 맞으니까 사람들이 좋아한 거예요. 우리 정서에 맞는 거지.”

▼ 군대 가길 정말 잘하셨네요.

“그래서 세상에 나쁜 일은 하나도 없다니까요.”

▼ 돈은 좀 버셨어요?

“난 돈 버는 일은 거의 안 했어요. 업소에서 노래도 안 하고. 별로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집사람이 사업하고 그랬지. CF도 안 했어요. 내가 선전할 만한 상품도 없어. 뭘 선전해 내가, 돈이 너무너무 필요하면 한 번은 할 거다, 그런 생각을 했는데 돈이 너무너무 필요한 적은 없었어요. 그리고 일단 상품이 자랑스러워야지.”

▼ 어떤 상품이라면 ‘한번쯤’ 하시겠어요?

이 질문을 던지자 송창식은 느닷없이 세제 얘기를 꺼냈다. 빨래할 때 쓰는 세제. 한 발명가가 대단한 발명품을 만들었는데, 대기업 땜에 회사가 망가졌다고. 이름이 콜로이드라고. 전문적인 얘기여서 이해가 안 됐지만, 하여간 획기적인 친환경 상품이라는 것이다. 송창식은 그런 거라면 ‘한번쯤’은 할 수 있다고 했다. 인류와 국가를 위해. 껌이나 과자는 몸에 나쁘다면서.

▼ 가수말고 다른 일을 생각한 적은 없어요? 정치 같은.

“국회의원 제안도 2번 받았어요. 높은 사람이 찾아왔어요. 그런데 난 아직 내 음악이 바닥이 안 나서 못 한다고. 난 내 음악의 끝을 봐야 되겠다고 했지.”

▼ 장사도 안 해보셨고.

“나는 돈 벌 마음이 없다니까요. 얘기 했잖아. 난 돈 벌 생각이 없다고.”

▼ 신곡을 안 낸 지가 오래되셨는데.

“메모만 해놓고 안 쓴 게 한 1000곡 정도 되는데, 예전에 우리는 10만장이 나가면 대박이었다고. 그런데 요즘은 20만장이 나가면 밑지는 장사가 된다고 하더라고. 야~ 난 목표가 10만장인데. 그럼 내가 이 짓을 왜 하는 거냐? 그런 생각이 든다고. 그래서 이제는 판을 파는 장사는 안 하려고 해요. 나한테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내가 노래 부르고 사람들이 듣고, 같이 숨쉬는 거예요. 그거면 돼요.”

[한상진 기자의 ‘藝人’ 탐구 ③] 6살 최연소 데뷔, 기네스북 오른 공연기록, 예술철학 박사…하춘화

[신동아]

가수 하춘화(55)는 지난해 ‘아버지의 선물’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노래인생 50년을 담은 이 책은 아버지(하종오)에 대한 마음을 담아낸 일종의 에세이다. 책에서 하춘화는 “나는 아버지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아버지가 주신 선물이 바로 가수 하춘화”라고도 했다. 여섯살 어린아이를 가수의 길로 이끈 사람도, 평생을 가수 하춘화의 옆에서 지켜준 사람도 바로 아버지였다. 올해로 구순을 맞았지만, 아버지 하종오씨는 지금도 하춘화씨의 홈페이지를 관리하고, ‘만인의 연인’이 된 딸의 모든 것을 기록한다.

50년 동안 노래를 했고 연예계를 누볐지만, 하춘화는 연예인이라기보단 예술가 혹은 학자의 느낌을 준다. 지난 50년 세월도 그저 강처럼 유유히 흘러간 느낌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한 여가수였지만 하춘화에겐 그 흔한 스캔들 한 번 없었다.

2006년엔 대중가수로는 최초로 박사학위를 취득해 관심을 끌었다. 1970~80년대 우리나라의 대중가요 역사를 이론적으로 정립한 논문을 썼다. 하춘화는 기록도 여러 개를 가지고 있다. 일단 최연소 가수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8000회가 넘는 공연기록은 기네스북에 올랐다. 2500개가 넘는 곡을 취입했고 히트곡 70여 개. 1985년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평양에서 공연을 했다. 새해가 되면 가수생활 50년을 맞는 하춘화를 가을이 깊어가는 남산자락에서 만났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이 느껴졌다.

예술철학 박사

“동아일보와는 제가 참 인연이 깊어요. 첫 매니저가 동아방송 출신이었고, 데뷔했을 땐 동아일보 김상만 회장님이 저를 너무 예뻐하셔서 수양딸로 삼으시기도 했어요.”

▼ 그랬군요. 하 선생님을 좋아한 유명인사가 아주 많았죠.

“제 노래를 좋아할 수 있는 연배시니까. 그래서 부모님뻘 되시는 분들이 많이 귀여워하셨죠. 왜 그러냐면, 나이도 가요계에서 가장 어린 막내인데 그렇게 나와서, 그분들의 표현을 빌리면 ‘이렇게 애릿애릿해가지고 청승스럽게 노래를 잘한다’고 하셨어요.”

▼ 몇 년 전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셨어요. 1970~80년대 우리나라 대중음악을 분석하셨는데요.

“네, 전문가들과의 인터뷰, 설문을 통해서 선정한 80곡을 대상으로 분석했어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우리나라 대중가요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어요. 그래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70~80년대는 한마디로 격변기죠. 산업화와 서울드림이 있던 때잖아요. 고향을 등진 사람들, 애틋함, 이런 게 공존했던 때란 말이에요. 그런 게 당시 유행했던 가요에 다 녹아 있는 거죠. 국민의 정서가, 우리의 역사가, 그 당시 노래를 통해서 증명이 돼요. 그걸 분석한 논문이죠. 대중가요를 통해 우리 역사를 실증했다고 보면 돼요.”

▼ 80곡 중에 선생님 곡은 몇 곡이나 포함됐나요?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닌데, 한 5~6곡정도 돼요. 그래도 많죠?”(웃음)

▼ 논문 쓰면서 옛날 생각 많이 하셨겠네요.

“그렇죠. 그러니까 오히려 더 정확할 수가 있는 거예요. 왜냐면 난 현장에서 뛰었기 때문에, 제가 그냥 공부만 하는 사람이었으면 수박 겉핥기식이 될 수도 있었겠죠.”

▼ 예술철학 박사를 받으셨는데, 처음엔 법학대학원에 가려고 하셨다죠?

“그랬어요. 4번 도전했는데 다 떨어졌어요. (손가락을 펴 들며) 무려 4번이나. 지방공연 다니다가 막 올라와서 면접하고 시험 치고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떨어졌어요. 외국만 해도 로스쿨이 따로 있잖아요. 자기가 전공한 분야를 더 깊이 연구하려고 로스쿨을 가죠. 학부에서 법학을 공부했던 안 했던 관계없이, 그런데 제가 응시할 당시엔 꼭 학부나 석사에서 법학을 전공한 사람만 법대를 가는 걸로 그렇게 교수들이 인식하고 있었어요. 지금은 좀 많이 깨졌는데, 그래서 교수님들이 저에게 그랬다니까요? ‘학부에서도 전공을 안 하고 어떻게 여기 와서 하려고 그러느냐’고. 법대 가면 ‘Entertainment in Law’를 하려고 했는데, 저작권법이라든가. 엔터테이너들의 권익을 위해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안 받아주더라고, 교수님들이.”

▼ 그래서 방향을 바꾸신 거군요. 철학으로.

“포기할까 했는데, 생각해보니 너무 억울한 거예요. 내 앞에 이렇게 담이 하나 탁~ 막고 서 있는 것 같아서,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이걸 포기해야 하나’ 하는 오기도 생기고. 그러던 차에 우리 막내동생이 성균관대 철학과를 소개하면서 ‘예술철학으로 공부하면 어떻겠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고민 하다가 지원했죠. 대학에서도 저를 아주 흔쾌히 받아주셔서. 11년 만에 박사 받았어요. 그리고 우리 집에 딸이 넷인데, 나를 포함해서 3명이 박사예요.”

하춘화는 딸만 넷인 집안의 둘째로 태어났다. 무용을 전공한 언니는 체육학 박사학위를 받아 강단에 섰고 막내동생은 복지행정학과 노인복지학에서 박사학위를 2개나 받았다. 공부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했던 아버지 하종오씨의 억척 덕분이었다.

기왕 공부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하춘화는 당대 최고 인기가수로 활동하면서도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할 만큼 학구적인 삶을 살았다. 하춘화씨조차 “의지가 약했으면 벌써 포기했을 것, 이겨낸 게 기적”이라고 말할 정도다. ‘물새 한 마리’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 학교 다니기 힘들어지자 아예 가정교사를 데리고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공연이 끝나면 이동하는 차에서 공부하고 또 공연장에 나갔다.

가정교사 데리고 다녀

“원래 계획은 음반만 내다가 대학을 완전히 졸업한 이후에 정식으로 활동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본의 아니게 ‘물새 한 마리’가 히트를 한 거예요. 그러고 나니까, 학교로 기자들이 찾아오죠, 방송사에서 오죠. 아주 학교가 들썩들썩하고 다른 학생들까지 동요돼서 공부가 안 됐어요. 하루는 교장선생님이 아버지를 불러다가 ‘공부를 시킬지, 노래를 시킬지 둘 중 하나만 선택하시라’고 했을 정도예요. 근데 그때는 어느 것도 포기할 수가 없었거든요. 이미 히트가 났으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학교를 옮겼어요, 내가. 배구로 유명했던 일신여상으로.”

▼ 그나저나 철학 공부 어렵지 않았어요?

“어려운 게 아니고 머리에 쥐가 난다니까? 저는 처음 들어가서 ‘내가 죽는다’ 그러고 했어요, 공부를. 제가 그동안 무슨 철학을 했겠어요, 안 그래요?”

▼ 그러니까요.

“똑같은 말이라도 철학적으로 해석하면 어려워져요. 그리고 내가 책에도 썼는데, 박사학위를 받으려면 영어점수가 필요하거든요. 토익점수가 700점. 그것 땜에 또 엄청 고생했어요. 아주 생각하기도 싫다니까.”

▼ 토익공부는 어떻게 하셨어요?

“토익 학원에 다녔어요. 처음엔 멋모르고 그냥 시험을 봤는데 500점이 나왔어요. 처음에 가서 시험을 봤는데.”

▼ 첫 시험 500점이면 괜찮은데요.

“그렇게들 얘기하더라고요. 저 보고 잘 나왔다고.(웃음) 그런데 그게 봐보니까, 요령이 필요하더라고. 실력이 아무리 있어도 요령이 없으면 점수를 낼 수가 없더라고요. 예를 들어, 리스닝(Listening) 1번 설명이 나온다고 하면, 이미 보기는 두 문제, 세 문제 앞서서 봐야지, ‘아~ 이거 내가 아는 건데 뭐더라?’ 뭐 이러고 있으면 그냥 10문제를 놓쳐버려요. 그러니까 잘 모르겠다 싶으면 그냥 딱 포기하고 과감하게 넘어가야지. 요령이죠. 그래서 이건 안 되겠다 해서 토익 전문학원에 가서 수련을 했지요.”

▼ 수련? 그래서 몇 번 만에 700점을 넘기셨어요?

“꽤 봤어요. 한 7~8번 본 것 같아요, 내 기억으로는. 왜냐하면 그게 한 달에 한 번 무슨 중학교인가를 빌려서 일요일에 하잖아요. 아~, 정말 그 시험 끝나면 밥도 먹기 싫고 아무 생각이 없어.(웃음) 그리고 제가 더 환장하는 건 뭔 줄 알아요? 토익시험 땐 에어컨도 꺼버리잖아요, 리스닝 시험 칠 때는. (갑자기 달리기 자세를 취하며) 완전무장을 하고 달리기 선수가 그 선에서 이렇게 있는 거거든요. 옆에다 주민등록증 딱 올려놓고. 그런데 하춘화가 이게 본명이거든요. 그러니까 감독관들이 처음엔 이렇게 주민등록증 대조할 때 나를 본다고요. 그럼 아는 얼굴이거든. ‘아~ 본인이시네’ 그런다고. 그러고는 내가 시험 보는데 뒤에 딱 서 있어요. 얼마나 신경이 쓰이겠어요. 그래서 막 놓치는 거예요.”

첫 토익시험에서 500점

▼ 감독관들 입장에선 희한한 광경일 테니까요.

“심지어는 어떤 감독관은 편지도 놓고 가요. 그러니 내가 무슨 시험을 보겠어요. 나랑 시험 본 학생들은 나한테 항의하라고 하더라고요, 본부에다. 감독관 땜에 도대체 시험을 볼 수 없다고. 어떤 감독관은 한창 시험 보는데 책상 밑으로 (얼굴을 숙이며) 이렇~게 얼굴을 들이밀면서 내가 진짜인가 보는 감독관도 있었어요. 미치는 거지. 신경이 조금만 빠시락해도 안 되는 시험인데, 별 웃기는 일이 다 있었다니까요.”

▼ 어학에 소질이 좀 있으신가봐요.

“원래 음악 하는 사람들이 귀가 좋거든요. 그래선가 전 오히려 리스닝이 쉽더라고요. 문법이 약하지.”

▼ 그런데 외국어 점수가 필요하시면 일본어 시험을 보시죠. 일본어는 원래 잘하시잖아요?

하춘화는 1985년 일본에 진출해 3년가량 일본에서 활동했다. 당시 한국에서 최고 가수였던 하춘화의 일본 진출은 그 자체로 화제였다. 일본에서도 하춘화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제가 일본어로 말은 해요. 그런데 일본어도 문법 같은 거 들어가면 어려워요. 뭐냐면, 동사가 변형이 돼요. 한문에 우리가 보통 쓰는 생(生)자 있잖아요? 이게 일본에서는 어디에 붙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다르게 작용해요. 그래서 막 헛갈려요. 그리고 영어는 이제 제2의 국어니까. 무조건 해야 하는 언어잖아요.”

대화 주제가 잠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절로 옮아갔다.

▼ 일본어 배울 때도 고생을 많이 하셨겠어요.

“제가 일본에서 3년 살면서 랭귀지 스쿨을 다녔거든요. 그 랭귀지 스쿨은 얼마나 하드(hard)하게 공부를 시키느냐면, 첫 시간 딱 시작하면 시험이에요. 시험을 그렇게 좋아하는 나라가 일본이에요. 그래서 집에 가서 오늘 것 복습하고 내일 시험 준비까지 안 하면 따라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만날 집에서 복습하다 2시 넘어 자고 6시에 일어나서 학원 가고…, ‘나는 왜 이렇게 힘들고 고달프게 살까’하고 고민했을 정도니까. 사실은 저는 일본에 안 갔어도 됐거든요. 한국에 이미 내 위치가 다 있으니까.”

▼ 그렇죠.

“저는 있잖아요. 어느 목표가 있어서 이걸 달성하잖아요? 그러면 그걸 달성한 것으로 만족해야 되는데 그게 아닌 거예요. 또 새로운 목표를 세워요. 그러니까 인생이 점점 고달픈 거죠, 지금 현재까지도. 일본에서 만난 톱가수들도 그랬어요, 저한테. ‘넌 한국에서도 톱인데 왜 여기까지 와서 하나부터 다시 시작하느냐’고. 내가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고 개척하고 싶다’고 하니까 일본 가수들이 ‘정말 훌륭하다, 우리도 너한테 배워야겠다’ 그런 말을 했죠. 외국어 얘기하다가 이상한 데로 빠졌는데, 전 지금도 일본 가면 회화 같은 건 전혀 거리낌없이 하지요. 영어도 그렇고요. 아버지, 어머니 모시고 세계일주도 가이드 없이 했어요.”

아버지 고향에 고등학교 설립

하춘화가 1976년 가수 생활을 하며 벌어들인 돈으로 아버지의 고향인 영암(낭주)에 고등학교를 세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당시 이 학교의 개교기념식에는 무려 2만명이 모였다. 고 이주일씨가 사회를 보고 하춘화는 기념공연을 했다.

▼ 1976년 사재를 털어 전남 영암에 고등학교를 설립하셨죠. 낭주고등학교라고.

“아버지 뜻에 따랐을 뿐이에요. ‘물새 한 마리’를 막 내놓고 나서니까, 1973년인가 그랬어요. 영암의 옛날 이름이 낭주거든요. 제가 유명해지니까 고향에서 아버지께 이런저런 소식을 보낸 모양이에요. 그런 중에 ‘낭주에 학교가 없어서 시골 학생들이 광주, 목포로 유학을 가야 한다’고, ‘그걸 좀 해결해주면 좋겠다’고 했다는 거예요. 저야 무슨 결정권이 없었죠. 아버지가 다니면서 추진하신 거예요. 학교 부지 얻고, 인가받고 영암 출신으로 성공한 분들 협찬 얻어서 학교를 설립했죠.”

▼ 개교식 사진이 당시 신문에도 실렸는데….

“학교운동장에 무대를 설치하고 개교식을 했어요. 사회를 본 코미디황제 이주일씨는 그때 무명이었죠. 저의 전속 사회자로 있었거든요. ‘하춘화팀’. 제 전속 밴드, 무용단 다 데리고 가서 제가 공연을 해줬어요. 집 몇 채 안 되는 지역에 2만명이 모였죠. 김대중 대통령이 오셨을 때 모인 기록을 제가 깼대요. 사람들이 앉을 데가 없어서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고 막 그랬는데 그 사진이 실렸죠. 시골 어른들이 ‘영암아리랑’ 들으며 막 울고 그러셨어요. 그 지역에선 ‘하춘화 고등학교’라고 불렀어요.”(웃음)

▼ 영암으로선 은인이시네요.

“그래서 제가 국회의원 출마하라는 유혹도 무지하게 받았다니까요. 그런데 저는 국회의원보다 ‘가수 하춘화’가 좋다고 생각했죠.”

▼ 한번 해보시죠, 왜.

“이미지 버려요. 제 이미지를 버린다고요. 가수 하춘화는 만인의 연인이지만 정치인이 되면 100명은 아군이고 100명은 적이 되잖아요. 적을 두고 싶지 않았거든요.”

▼ 만인의 연인으로 남겠다.

“예, 그게 전 좋습니다.”

▼ 이주일 선생님과는 베트남에서 처음 만나셨나요? 이리(현 익산)역 폭발사고 때 일은 이미 유명한 일화죠.

널리 알려진 얘기지만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하춘화를 구해준 사람은 이주일이었다. 지방 순회공연 중이던 하춘화는 이주일씨의 머리를 밟고 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이주일은 “하춘화가 내 머리를 밟은 순간부터 머리카락이 나지 않았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하춘화는 이주일을 ‘털보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분이 월남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참 친절했어요. 내가 한국에서 콘서트를 할 때, 서울에서는 당시 최고 MC였던 후라이보이 곽규석씨가 사회를 봐줬는데, 지방 공연 때는 곽규석씨가 못 가니까 대신 이주일씨가 맡았던 거죠. 그분이 처음 하춘화쇼 사회자로 오디션을 볼 때, 무릎이 깨질 정도로 열심히 하니까 우리가 오케이(OK)를 한 거죠. 그래서 그때 이주일씨께 보너스로 양복도 해주고요. 그게 인연이 돼서 줄곧 같이 다녔어요.”

▼ 이주일씨가 하춘화쇼 사회를 얼마나 보셨나요?

“7000회 이상이죠. 그분은 무대에 워낙 충실했어요. 개인적으로야 술, 담배를 좋아해서 저희 아버지께 꾸중을 들었지만, 아버지도 자식같이 아끼셨거든요. 술, 담배 때문에 결국 병을 얻은 거예요. 나중엔 후회 많이 하셨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하춘화는 유독 대통령들과 인연이 깊었다. 일단 역대 대통령 4명이 하춘화의 열렬한 팬이었다. 크고 작은 국가행사에도 여러 번 참석해 노래를 불렀다. 스스로 ‘하춘화의 가요외교’라고 할 정도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과 얽힌 일화가 많다.

▼ 박정희 대통령과는 아주 가까우신 걸로 압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제가 그분 대통령 시절에 유명해졌고, 또 그분이 대통령을 제일 오래 하셨고, 그러니까 뵐 기회도 더 많았고, 저를 유독 귀여워해주셨어요. ‘우리 보배’라고 불렀으니까. ‘대한민국 보배’라고. 이리역 폭발사고 때도 대통령 전용헬기 타고 이리에 와선 전북도지사한테 가장 먼저 물은 말이 ‘하춘화는 어떻게 됐어?’였대요. ‘하춘화 행방불명’이라는 신문기사를 읽으신 거죠. 그 뒤에 제가 큰 국가 행사에서 대통령을 다시 뵈었는데 그러시더라고요. ‘야, 네 노래 못 듣는 줄 알았다. 이리사고 때 죽은 줄 알았다’고 말이죠. 그리고 육영수 여사 돌아가시고 박 대통령이 박근혜 의원하고 같이 다녔어요, 퍼스트레이디로. 그런데 저도 아버지랑 같이 많이 다니잖아요. 그러니까 ‘야, 너도 아버지하고 다닌다며? 나도 우리 딸하고 같이 다닌다.’ 뭐 이런 말씀도 하시고, 그렇게 귀여워해주셨죠, 딸처럼. 그래서 지금도 그 얘기를 해요, 박근혜 의원이. ‘어머님 계실 때 어머님 하시는 사업에 많이 협조해줘서 감사했다’고.”

박 전 대통령의 애창곡은 하춘화의 히트곡 ‘강원도아리랑’이었다. 한번은 하춘화를 불러 “노래를 부를 때, 어느 대목에서 숨을 쉬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단다. 하춘화는 또박또박한 서체로 직접 가사를 적어주고 숨 쉴 곳도 알려드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무죄’와 ‘영암아리랑’을 즐겨 불렀다. 데뷔 40주년과 45주년 기념공연 때도 전 전 대통령은 가족, 재임 시절 참모들과 함께 공연을 보러 왔다. ‘베사메무초’를 좋아한 노태우 전 대통령과는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하춘화의 공연장을 찾아 ‘목포의 눈물’을 신청했다. 1999년 3월 김종필 국무총리는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 내외 초청 만찬을 준비하며 “다 필요없다. 하춘화만 있으면 된다”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 전 총리는 하춘화의 ‘날 버린 남자’를 즐겨 불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하춘화와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한번은 공연 초대장을 들고 대통령을 찾았는데 “나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데”라는 말을 듣고 민망했다고 한다.

“세월이 야속해~”

하춘화는 최근에는 예능프로에도 출연해 감춰뒀던 끼를 맘껏 발산하고 있다. 데뷔 50년을 맞은 원로가수의 포스보단 발랄한 새내기 예능인 같은 느낌마저 준다. 무엇보다 열심히 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시청자는 ‘하춘화의 재발견’이라며 환호하고 있다. 방송가에선 ‘하춘화의 방송 매너를 배워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그에게 ‘프로 연예인’이란 표현을 쓰는 사람도 생겨났다.

“전 그래요, 경력이 오래됐고, 대선배고, 그래서 권위를 내세워야 한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직업에 대한 제 가치관은 그게 아니에요. 오래됐고 나이가 많아도 일단 대중 앞에 나가서는 최선을 다하고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시대가 변했잖아요. 변화에 빨리 적응해야죠. ‘내가 최고다’ 그러고 있으면 안 되죠. 그리고 저는 과거 얘기하는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내가 왕년에 어쨌었는데’, 이런 거 제일 싫어해요. ‘세월이 야속해~’로 뜬 D통신사 광고도 그래요. 처음에는 그 콘티가 아니었어요.”

▼ 하춘화씨를 흉내 내는 개그맨 김영철씨를 오히려 흉내 낸 광고로 유명해졌죠.

“원래 계획대로 촬영이 끝나고 나서 감독이 ‘이제는 하 선생님이 하고 싶으신 대로 애드리브를 해주세요’ 그러더라고요. (개그맨) 김영철씨 버전으로 ‘세월이 야속해~’를 한번 해주실 수 있느냐고요. 그래서 뭐 하자고 그랬죠. 어떤 사람은 자기 흉내 내면 굉장히 기분 나빠하고 싫어한다고 그러던데. 저는 제 흉내를 내서 그 흉내 낸 사람이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면 기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냥 재밌게 애드리브를 한 거예요. 스태프들이 웃고 막 그랬죠. 근데 광고주들이 이게 더 좋다는 거예요. 원래 콘셉트로 찍은 것보다. 일이 끝나고 나서 김명민씨도 ‘선배님하고 찍게 돼서 참 다행이었다’고 그러고.”

▼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고민스럽진 않으셨어요?

“우선 사람들이 날 원로로 취급을 안 해요.(웃음) 제가 얘기했잖아요. 그게 저의 가치관이라고. 그러니까 항상 시대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게, 권위주의 내세우는 걸 제가 제일 싫어한다고. 그리고 전 요즘 흐름이 예능이다, 그러면 예능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가면 뭐가 또 주류가 될지 모르죠. 난 프로잖아요. 대중의 사랑을 먹고사는 대중가수, 직업 연예인.”

하춘화의 이런 성격은 그가 개그맨이자 MC인 김제동을 높이 평가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왜 김제동인가? 라고 물으니 “성실하잖아요”란 답이 나왔다. 데뷔할 때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그 사람의 자세가 좋다고. 하춘화 역시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

유산과 인공수정

▼ 50년 가수생활 하시면서 스캔들 한 번 없으셨어요?

“그것도 이유가 있어요. 일단 아버지, 어머니가 항상 옆에 있었죠. 결혼 적령기 땐 ‘야, 제발 엄마, 아빠 좀 떼어놓고 다녀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결혼 빨리 못 한다고. 정말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았어요. 솔직히 후회도 되고 그래요. 저도 과잉보호를 받은 셈인데, 안 좋은 점이 있죠. 그렇다고 탓할 수는 없어요.”

2010년 10월29일 하춘하는 사단법인 한국가요작가협회가 수여한 ‘대한민국 가수 왕중왕상’을 수상했다.

▼ 뭐가 제일 후회되세요.

“요즘 연예인들이 막 이 사람도 사귀고 저 사람도 사귀고 그런 거 보면 솔직히 깜짝깜짝 놀라요. 사귄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떳떳하게 여행 가고, 전 다방에서 차 한 잔도 제대로 못 했는데. 그런 게 솔직히 후회되죠.”

▼ 결혼이 좀 늦으셨죠.

하춘화씨는 39세에 결혼했다. 언니의 친구가 다니던 방송국의 직원을 소개받아 6개월 정도 연애한 뒤 결혼에 골인했다.

“전 결혼 못할 거라 생각했어요. 결혼 적령기도 지났고, 또 음악하고 결혼했나보다 그랬죠, 내 운명이. 그런데 결혼이라는 게 어느 날 갑자기 되더라고요. 생각지도 않게, 중매로.”

▼ 결혼을 전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셨던 건가요.

“나이 많아서 만났는데 결혼을 전제로 만나야죠. 당연하죠. 서로 재볼 것 다 재보고. 우리는 서로 ‘건강진단서도 가지고 와라’ 이럴 정도였어요. 저희 남편도 늦었고, 저희 남편이 방송국 출신인데 회사에서 노총각 천연기념물로 놔두려고 했을 정도였대요. 주변에서 장가보내려고 굉장히 애도 쓰고. 우린 결혼하면서 ‘혹시 애 숨겨놓은 거 없냐’ 이런 거 다 확인하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호적등초본 가져와라’ ‘건강진단서 가져와라’ 그랬어요. 난 그리고 뭐든 정확한 게 좋아요.”

▼ 첫사랑 여쭤봐도 될까요?

“첫사랑? 글쎄, 누굴까, 나는 첫사랑이 신성일씨예요, 영화배우. 부인 되는 엄앵란씨한테도 얘기하는데, 막 웃고 그러는데. 솔직히 연애할 기회가 없었어요. 제가 일방적으로 좋아했던 것밖에는. 저한테 프러포즈한 사람은 많이 있지만…, 사업하시던 분도 있고 연예인도 있고, 뭐 의사 등등, 많지요.”

▼ 몇 살 때부터 남자들의 프러포즈가 시작됐나요?

“열아홉 살? 방송국 PD도 있었고. 우리 매니저를 통해서 얘기를 전하고 그랬죠.”

▼ 그 사람들 중에 한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이 없었어요?

“없었어요. 심지어는 저희 아버지가 부산에서 사업하시면서 알게 된 친구 아들하고도 맞선이 잡혔는데 안 봤어요. 너무 바쁘고 그땐 또 그런 생각도 없었고.”

▼ 2세를 낳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신 걸로 압니다. 그런데 실패하셨다고.

“그럼요, 3년 전까지만 해도 엄청 노력했어요. 결혼해서 얼마 안 있다가 아기를 잃었거든요.”

▼ 유산됐나요?

“그게 4개월 정도 됐을 때죠.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고 나서도 한동안은 ‘자연스럽게 가질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안 생기니까. 시험관 아기 시술도 많이 했어요. 한 20번 이상 했죠.”

▼ 20번 이상?

“예. 그렇게 했는데도 안 되더라고요. 그게 확률이 25%밖에 안 되니까. 그래서 노력도 굉장히 많이 하고 육체적으로 힘도 많이 들고, 그런데 세월이 자꾸 흐르고 나이를 먹으니까 입양할까 이런 생각도 했는데 이제는 키울 자신이 없는 거예요. 제가 너무 바쁘니까, 제가 입양을 하면 그 아이에 대한 책임을 100% 져야 되잖아요. 뭐, 교육부터 건강까지 홀로 서게 다 해줘야 되고. 그런데 그게 자신이 없어요, 솔직히 말해서.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또 입양하신 분들도 ‘입양보다는 그런 마음이 있으면 차라리 고아원이나 이런 데를 많이 도와줘라’ 그러시더라고요. 실제로 입양하신 분들이. 그래서 저도 그 뜻을 따르기로 했죠. 지금은 완전히 포기한 상태예요.”

▼ 아쉬움이 많이 남으시겠어요.

“그래도 이 세상에 자기 갖고 싶은 거 다 갖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제게 아이를 안 주신 대신 그외에 다른 것을 다 저한테 줬는데, 제가 그것까지 욕심을 낸다면 욕심이 너무 많은 거죠.”

골 썩던지, 때려치우던지

그의 책을 읽었는데, 골프 얘기가 많았다. 물어보니 좋아하는 운동이며 열심히 했고, 또 잘한다는 것이다. 배운 지 5년 만에 싱글 수준이 됐고, 지금도 ‘공 한번 치자’는 사람이 줄을 잇는단다.

“정신 건강에 좋다고 아버지가 저한테 권유하셨어요. 이주일씨도 저에게 골프하라고 계속 그랬고. 그래서 시작하게 된 거예요.”

▼ 진짜 5년 만에 싱글이 되셨어요?

“예, 내가 그러잖아요? 저는 뭐든 하나를 시작하면 최선을 다해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빨라요. 그리고 제가 운동신경이 있대요. 요즘은 잘 안 하는데, 그래도 1년에 3~4번 나가면 80대 초중반은 쳐요. 연습 안 해도. 그리고 저는 처음부터 남자들하고 같이 쳤어요. 지금도 골프 치자는 초대가 많은데 그거 다 하다가는 일을 못할 정도예요.”

▼ 골프를 잘 치는 요령이 있나봐요.

“그냥 열심히 하는 수밖에는 없어요. 무슨 요령이 있는 건 아니고, 골프는 정직해요. 자기가 한 만큼 나와요. 골치 썩어가면서 그냥 하든지, 아니면 때려치우든지 해야 해요. 어차피 마인드 컨트롤이니까.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니까요. 그거 컨트롤 못하는 사람은 못 쳐요. 아무리 시간이 오래돼도 못 쳐요. 주변을 보면 다 그렇더라고요. 제가 골프 배울 때는 3년간은 거의 매일 공을 친 것 같아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연습을 했으니까.”

▼ 이주일 선생님보다 늦게 시작했는데 나중엔 이주일 선생님보다 잘 치셨나요?

“그렇죠. 내기 골프해서 돈도 많이 땄죠. 200만원 정도를 딴 적도 있어요. 그 분도 연습을 열심히 했지만, (저하고만 치면) 노상 지니까, 나가기만 하면 지니까,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 근데 솔직히 그 분이 운동신경이 좀 없어요. 그분이 잘하는 건 딱 한 가지, 축구예요. 우리가 지방 공연 갈 때도 공연 중간 중간에 축구를 했을 정도니까. ‘하춘화 공연팀’이라고 해서 내가 유니폼도 해줬어요.”

매니저가 된 여중생

워낙 인기가 많은 가수였던지라, 하춘화를 죽자사자 쫓아다니는 팬도 많았다. 스토커처럼 집 앞에 계속 서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공연 때마다 똑같은 자리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있었다.

“상사병이 나서 병원에 있으니 얼굴을 한 번만 보여달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산에 가서 도를 닦고 나왔는데 나한테 마(魔)가 끼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랑 결혼하면 그 마가 없어진다는 거야. 공연 때 입으라고 드레스를 보내주는 사람도 있었고, 그런 건 기분 좋은 기억이죠. 정말 부모, 형제보다 저를 더 생각해 주는 팬이 많았어요. 한마디로 ‘하춘화교’였다니까. 요즘 아이돌 가수들 인기는 저리가라였죠.”(웃음)

뜬금없는 얘기 같지만, 현재 하춘화의 매니저를 맡고 있는 이OO씨도 하춘화의 오래된 골수팬이다. 이야기가 드라마틱하다.

경기도의 한 시골마을에 살던, 하춘화의 열성팬이던 여중생 이씨는 어느 날 하춘화를 만나겠다며 용돈을 털어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하춘화의 아버지를 찾아가 “평생을 하춘화 언니 곁에서 언니를 도우며 살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다. 그러나 하춘화의 아버지는 그 여학생을 돌려보냈다. “열심히 공부한 후 성인이 되어 찾아오면 그때는 꼭 기회를 주겠다”고 말하며. 그러고 나서 10여 년 뒤, 거짓말처럼 그 여학생은 다시 하춘화씨를 찾아왔다. 약속을 지키라며. 그리고 현재까지 10여 년째 매니저로, 친구로 하춘화씨의 일을 보고 있다. 이씨와 관련된 얘기는 하춘화의 책에도 들어 있다. 하춘화씨와 인터뷰할 때도 이씨는 곁을 지켰다. 책에서 읽은 얘기의 주인공을 직접 만나니 조금 신기했다. 이씨는 “(하춘화 언니가) 왜 좋은지 모르겠어요. 그냥 좋은 거예요, 무조건. 올해로 13년 됐네요. 언니 일을 본 지가…”라고 말했다.

하춘화씨는 인터뷰를 마치며 자신의 남은 목표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 얘기했다. 오랫동안 계획했던 일에 대해. 그의 얘기 곳곳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반듯한 대중음악 전문학교를 하나 설립해서 제가 직접 운영하려고 해요. 대한민국 대중가요를 책임지고 나갈 수 있는 그런 인재를 양성하는 거죠. 몇 십 년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에요. 지금은 기회를 보고 있고요. 이게 어제, 오늘 생각해서 될 일은 아니거든요. 음~ 제일 먼저 인성교육을 시키는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우리 대중예술인을 공인(公人)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공인이 뭐냐. 많은 사람한테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적어도 자기의 어떤 사적인 행동에도 책임을 져야 해요.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학벌은 좋고 공부는 많이 했는데 인간성은 빵점인 거 있잖아요? 2년제는 좀 짧을 것 같고, 욕심 같아서는 대학원 과정도 만들고 싶어요.”



한상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reenfis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