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 칼럼>우리를 미치게 하는 ´미친 존재감´ 열풍
2010.11.02 07:59 | 수정 2010.11.02 08:03
[김헌식 문화평론가]연일 '미친 존재감'이라는 단어가 인터넷에 회자되고 있다. 지난 27일 첫방송된 MBC 드라마 < 즐거운 나의 집 > 에서 배우 김갑수는 등장 5분 만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이를 두고 김갑수의 '미친 존재감'이라고 일컬어졌다.
비록 드라마 속에서 짧은 동안 등장했음에도 그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이 강력하다는 점 때문이다. 어쨌든 최근 5-6편의 드라마에서 김갑수는 죽음 전문 조연이었다. 여기에서 감(感)이라는 말이 붙었기 때문에 이는 이성적 합리적이라기보다는 비합리적 감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미친 존재감'으로 강력하게 꼽히는 배우 가운데 하나는 송새벽이다. 송새벽은 올해만 영화 6편에 출연하고, 영화제 3관왕이었다. 물론 그는 거의 전부를 조연으로 출연했다. 조연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감은 막강하기까지 하다.
이는 여러 드라마에서 등장한 성동일에게도 적용되고 있다. 하지만 송새벽은 조연이었다. 이러한 논의라면 결국 미친 존재감은 명품조연을 일컫는 선에서 끝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연들은 그동안 많았고, 비단 이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미친 존재감'은 아주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자신의 인상을 각인시키는 이들이 주는 느낌을 가리킨다. 다른 이들과 달리 사람들에게 인상적이려면 개성적이어야 한다. 일종의 비교우위라고 할 수 있다. 그 비교우위의 조건이 치명적인 '개성'이다.
정말 '미친 존재감'의 정수는 '티벳 궁녀' 최나경이었다. 드라마 < 동이 > 에서 그녀가 화면에 노출된 것은 5초 미만이었다. 궁녀 단역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그녀는 시청자들에게 확실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그뒤 드라마에서 자진하차는 했지만 최나경은 화장품 CF에 시트콤에 캐스팅되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확실한 입지의 구축과 인기의 유지로 이어질 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몇 초 나오지 않은 단역의 연기자를 화제 만발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이들이 누구냐 하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네티즌들이다. 이는 변화된 지형도를 의미하는 지도 모른다.
2000년대 초반 '얼짱', '생얼' 스타들이 인터넷에 오르내렸다. 이들은 바로 네티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스타들이다. 이런 자발적 스타발굴 현상은 매체의 권력이나 힘을 벗어난 사건이기도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네티즌 즉 누리꾼들은 스스로 스타를 다시금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미친 존재감'이다.
예쁘고 멋있게 보이려고 발버둥치는 미디어 세상에서 자신의 얼굴을 그것과는 반대되게 들이대는 것은 하나의 매력으로 등장했고, 심지어는 저항적 코드로도 읽힌다. 최나영의 경우, 그 인상은 세상 시류에 무감각한 모습이기도 했다. 이런 것은 스놉(snob)효과의 일종이기도 하며, 이는 대중의 쿨함을 선호하는 행태와 연결되기도 한다.
물론 최나경의 경우, 연기의 질을 보고 그를 화제의 인물로 만들어준 것은 아니라는 점이 있다. 티벳 여우를 닮았다거나 티벳 궁녀를 닮았다는 것은 결국 지식이나 행동거지가 아니라 얼굴 이미지였다. 물론 티벳을 비하하는 의미도 들어있다. 어쨌든 결국에는 인상, 이미지에 불과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미친 존재감'에 담긴 심리는 단순히 개성만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이들을 배려하는 것이기도 하다. 너무나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기 때문에 더욱 존재적 가치를 발휘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왠지 무시할 수 없는 외면할 수 없는, 한편으로는 가리고도 싶지만 언제든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통제불능의 존재감이다.
'미치겠네'는 본래 자기통제성을 잃어버릴 때 나오는 말이다. 원래는 다른 이들을 넘어서서 존재감을 남기지 말아야 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것은 용인 가능한, 혹은 자신들의 욕망을 대리 투영한 한에서 가능하다. 그것이 곧 각인으로 이어지고 그들의 각인에 대한 기억과 추모가 바로 '미친 존재감'이다.
존재감을 지키면서 의미부여를 하는 현상은 언더독 효과와 맞닿아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언더독이기 때문이다. 김갑수는 주연은 아니지만, 주연보다도 더 많은 작품에 등장한다. 배우에 관한 하나의 가치를 조연 속에서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비록 주연이 아니라도 비중 있게 짧은 연기를 선보이는 것이 작품성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들은 짧게 사라져가지만 작품은 풍성하게 남아 있게 된다.
우리 사회나, 역사도 그런 맥락에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기억하고 싶어 한다. '미친 존재감'이 되어 우리의 뇌리에 그리고 역사에 남았으면 싶다. 우리 자체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남들이 감히 하지 못할 일을 과감하게 해버리는 혹은 타인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를 꿋꿋하게 지키는 존재들이고 싶은 우리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리라.
비록 드라마 속에서 짧은 동안 등장했음에도 그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이 강력하다는 점 때문이다. 어쨌든 최근 5-6편의 드라마에서 김갑수는 죽음 전문 조연이었다. 여기에서 감(感)이라는 말이 붙었기 때문에 이는 이성적 합리적이라기보다는 비합리적 감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미친 존재감'으로 강력하게 꼽히는 배우 가운데 하나는 송새벽이다. 송새벽은 올해만 영화 6편에 출연하고, 영화제 3관왕이었다. 물론 그는 거의 전부를 조연으로 출연했다. 조연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감은 막강하기까지 하다.
이는 여러 드라마에서 등장한 성동일에게도 적용되고 있다. 하지만 송새벽은 조연이었다. 이러한 논의라면 결국 미친 존재감은 명품조연을 일컫는 선에서 끝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연들은 그동안 많았고, 비단 이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미친 존재감'은 아주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자신의 인상을 각인시키는 이들이 주는 느낌을 가리킨다. 다른 이들과 달리 사람들에게 인상적이려면 개성적이어야 한다. 일종의 비교우위라고 할 수 있다. 그 비교우위의 조건이 치명적인 '개성'이다.
정말 '미친 존재감'의 정수는 '티벳 궁녀' 최나경이었다. 드라마 < 동이 > 에서 그녀가 화면에 노출된 것은 5초 미만이었다. 궁녀 단역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그녀는 시청자들에게 확실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그뒤 드라마에서 자진하차는 했지만 최나경은 화장품 CF에 시트콤에 캐스팅되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확실한 입지의 구축과 인기의 유지로 이어질 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몇 초 나오지 않은 단역의 연기자를 화제 만발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이들이 누구냐 하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네티즌들이다. 이는 변화된 지형도를 의미하는 지도 모른다.
2000년대 초반 '얼짱', '생얼' 스타들이 인터넷에 오르내렸다. 이들은 바로 네티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스타들이다. 이런 자발적 스타발굴 현상은 매체의 권력이나 힘을 벗어난 사건이기도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네티즌 즉 누리꾼들은 스스로 스타를 다시금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미친 존재감'이다.
예쁘고 멋있게 보이려고 발버둥치는 미디어 세상에서 자신의 얼굴을 그것과는 반대되게 들이대는 것은 하나의 매력으로 등장했고, 심지어는 저항적 코드로도 읽힌다. 최나영의 경우, 그 인상은 세상 시류에 무감각한 모습이기도 했다. 이런 것은 스놉(snob)효과의 일종이기도 하며, 이는 대중의 쿨함을 선호하는 행태와 연결되기도 한다.
물론 최나경의 경우, 연기의 질을 보고 그를 화제의 인물로 만들어준 것은 아니라는 점이 있다. 티벳 여우를 닮았다거나 티벳 궁녀를 닮았다는 것은 결국 지식이나 행동거지가 아니라 얼굴 이미지였다. 물론 티벳을 비하하는 의미도 들어있다. 어쨌든 결국에는 인상, 이미지에 불과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미친 존재감'에 담긴 심리는 단순히 개성만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이들을 배려하는 것이기도 하다. 너무나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기 때문에 더욱 존재적 가치를 발휘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왠지 무시할 수 없는 외면할 수 없는, 한편으로는 가리고도 싶지만 언제든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통제불능의 존재감이다.
'미치겠네'는 본래 자기통제성을 잃어버릴 때 나오는 말이다. 원래는 다른 이들을 넘어서서 존재감을 남기지 말아야 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것은 용인 가능한, 혹은 자신들의 욕망을 대리 투영한 한에서 가능하다. 그것이 곧 각인으로 이어지고 그들의 각인에 대한 기억과 추모가 바로 '미친 존재감'이다.
존재감을 지키면서 의미부여를 하는 현상은 언더독 효과와 맞닿아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언더독이기 때문이다. 김갑수는 주연은 아니지만, 주연보다도 더 많은 작품에 등장한다. 배우에 관한 하나의 가치를 조연 속에서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비록 주연이 아니라도 비중 있게 짧은 연기를 선보이는 것이 작품성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들은 짧게 사라져가지만 작품은 풍성하게 남아 있게 된다.
우리 사회나, 역사도 그런 맥락에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기억하고 싶어 한다. '미친 존재감'이 되어 우리의 뇌리에 그리고 역사에 남았으면 싶다. 우리 자체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남들이 감히 하지 못할 일을 과감하게 해버리는 혹은 타인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를 꿋꿋하게 지키는 존재들이고 싶은 우리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