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골드미스들은 왜 워커홀릭이 되나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1. 2. 9. 19:17

<김헌식 칼럼>골드미스들은 왜 워커홀릭이 되나

2010.11.11 12:26

 




[김헌식 문화평론가]최근 골드 미스들의 비애에 대한 과감한 기사들이 화제가 되고 있다. 물론 여성의 지위 개선을 위해 열심히 운동을 하거나 정치적 소신을 펼치는 분들에게는 반갑지 않은 내용들이다. 사회적 활동을 열정적으로 일구어가는 여성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가부장적 인식이 담겨 있기도 하겠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생물학적인 사회적 측면일 수밖에 없다. 그들을 대하는 남성들은 생물학적인 즉응적 반응을 보인 것이 우선인데 그것은 심리학적으로 자기 통제감을 통해 용이성을 염두에 둔 본능적 선택이다. 여기에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사회문화적인 요인이 바뀐 가치관과 괴리현상을 보인 탓이기도 하겠다. 

선진국에서 30대 골드미스들이 많았던 점을 생각했을 때 이 점은 경제력 발달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데 그 보편성에는 단순히 문화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경제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할 요소가 더 있어 보인다. 

더구나 남성들이 그런 성공한 여성들을 꺼리는 것은 결국 남성들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경제적 우위와 통제성의 심리적 관점에 남성우위의 사회심리학적 배경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사실 여풍과 골드미스의 성장은 단순히 인식의 전환때문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의 경제성장과 교육수준의 증가는 남녀성에 대한 관점과 평가를 전혀 다르게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상업과 자본의 논리는 이데올로기나 사상과는 관련이 없다. 하지만 대개 전근대사회에서는 이러한 상업과 자본의 경제논리가 아니라 일정한 사회통합과 질서를 위한 원칙들이 종교나 사상, 통치이데올로기로 합리화 되거나 미화되었다. 다행히 전근대 사회의 생산력은 그것을 결정적으로 붕괴시키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핵심은 경제적 이윤과 자본의 축적이다. 경제적 이윤과 자본의 축적에 나서는데 신분고하를 막론하거나 나이, 성 차이를 불문하게 된다. 경제적인 이윤과 성장에는 자격조건의 제한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차별이 있을 경우에는 오히려 앞장서서 없앤다. 

기존 전통사회와는 다르게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교육과 사회적 활동에서 인류역사 이래 어느 때보다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것에는 페미니즘 운동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 보다는 경제적 메커니즘에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트리클 다운(Trickle Down) 효과라고 할 때 고학력자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그런 현상이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편성을 지닌다. 사회주의에서도 남녀성의 평등성을 강조한 것은 생산력의 발전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고, 이러한 점은 현재 중국의 대부호 가운데 여성이 증가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전통적인 여성상은 이제 생각할 수 없는 롤 모델이 되었다. 누구나가 더 이상 어머니와 같이 살지는 않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갖지 않은 여성이 없다. 이는 정작 어머니가 인식시키는 경우도 많고, 여기에 아버지들이 능동적으로 나서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이러한 여성 인식과 교육, 가치관은 희소한 것이 아니라 너무 흔한 것이 되었다. 흔한 것은 오히려 희소적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증가는 현상 그 자체에 대한 심각성을 무감각하게 한다. 그것은 여성성에 대한 미체험의 영역에 트라우마가 작용하고 있는 것도 합리화시킨다. 여성이 사회활동을 하지 않거나, 단순히 결혼만을 염두에 두는 삶은 실패하는 인생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존재한다. 

육아나 교육에 전념하는 여성은 성공한 삶을 이루지 못한 여성이 된다는 생각도 일반적이다. 생물학적인 분별이나 그에 따른 사회적 롤 모델을 수용할만한 배우자들에 대한 고민은 부차적이 되었다. 이러한 맥락이 마치 진보적인 담론의 주체인 것처럼 옹성을 갖게 되다보니 중요한 것은 결국 남성 중심주의 사회의 반사거울이 되었다는 점이다. 괴물과 싸운 이는 괴물이 되는 것처럼. 인공지능과 싸우다가 인공지능의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네오처럼. 

외적 성공을 향한 집념은 결국 어떻게 행복한 삶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내적 충만을 간과하는 후회를 낳게 된다. 21세기 여성에 대한 기대신화는 자기 스스로 형성한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담론의 변화가 주입한 것에서 벗어나지 않고, 이는 일부 결국 자기 소외로 연결되고 있다. 여풍 현상 이면의 그늘을 여기에서 찾을 수도 있다. 고수익의 수입을 유지하는 이른바 골드미스들의 비애와 우울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사회적 성공과 자존의 성(城)을 구축하는 거침없는 여풍의 골인점은 마치 '산정묘지'와 같다. 

자존의 성은 결국 고슴도치의 가시와도 같이 그 자신을 고립시킨다. 하지만 그 가시가 스스로를 고립시키거나 배제시킨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야 고슴도치처럼 남과 관계없이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유지되지 않는 경우에 문제가 된다. 그것이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결혼시장에 자신을 노출시켰을 때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 만감이 교차하게 된다. 사회적 지위와 높은 수준의 연봉과 자산은 결국 자신을 지탱하고 '우월'하게 만들었지만 자신을 가두게 되는 '우물'이 되었다. 지금의 이런 성공한 골드 미스 세대를 두고 그 뒤의 세대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 엄마처럼 살기 싫다. 

아니 우리 이모처럼 살기 싫었다 같은. 진정한 진보는 개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에서 나오는 것인데도 서구식 성공주의적 여성 교육관과 세계관은 그 심각한 존립의 문제를 낳고 있으며, 그 마루타 대상자들과 같은 케이스에 대해서는 심각한 후유증도 염려되는 상황이다. 생산성을 증대하는 사회적 성공은 결국 소외와 배제의 허전함을 채우기 위한 워커홀릭을 양산하게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