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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망받는 사람은 아이가 몇명일까-육아 트랜드의 변화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4. 7. 7. 10:04


영화 '마더' 해외용 포스터.ⓒ(주)바른손드라마 '신의 선물'에서 방송 메인 작가 김수현(이보영)은 딸 한샛별(김유빈)의 납치 살해를 막기 위해 거의 광기에 가까운 언행을 보인다. 미래를 보았기 때문에 더욱 더 광기에 가까운 행동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막으려고 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으면서 말이다. 심지어 변호사 남편(김태우)은 정신병원에 그녀를 가둬버린다. 이보영의 눈에 서린 광기가 보였던 캐릭터가 흔히 연상될 수 있다. 

영화 '마더'에서 엄마(김혜자)가 보여준 눈에도 광기가 서려 있었다. 어떻게 그런 광기가 나올 수 있을까? 더구나 김혜자가 열연한 그 엄마는 아들을 지키기 모성이 위해 살인과 방화를 저질렀다. 그렇다면 모성이 강하기 때문일까? 모성이 강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광기를 뿜어낼까. 

앞의 두 엄마에게 아이는 하나 밖에 없었다. 오로지 한명 밖에 없는 자식, 대체불가능이며 다른 차선도 없었다. 중국 쓰촨성 지진이 일어났을 때, 많은 아이들이 죽었고, 그 아이들은 외동딸 외동아들이었다. 중국이 한 자녀 정책을 취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러한 점은 더욱 비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냈다. 핵가족화는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참사는 더욱 슬픔과 고통을 강하게 만든다. 한명이 더욱 더 중요해지는 상황 속에 있다는 사실은 이를 미루어 짐작하게 만든다. 

아이는 종족 번식이라는 생물학적인 가치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불멸을 남기려는 의지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언급했듯 예술가들이 작품을 남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영속성을 부여하려 한다. 하지만 아이가 하나뿐이라면 다른 대체적 불멸의 정체성과 영속성은 존재할 수 없다. 아이를 키우기 힘든 사회가 될수록 아이가 1명인 가정이 늘어난다는 지적이 통설처럼 받아들여진다. 

영화 ‘우는 남자’에서 최모경(김민희)는 딸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심한 고통에 시달린다. 그녀에게도 자녀는 오직 딸 한 명이었다. 한 명이라는 자녀의 숫자는 유아 납치와 살해를 소재로 다룬 영화에서 극적인 가치를 높이기 위해 빈번하게 등장한다. 최모경은 성공한 커리어우먼이다. 그녀는 커리어우먼의 지위와 아이를 연결시켰다. 성공을 위해서 아이를 한 명 밖에 가지지 않았다. 그 아이가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성공한 여성이라고 해도 그녀는 부자도 아니었으며 여전히 월급을 받는 샐러리우먼이다. 그녀에게 월급을 주는 기업의 대표는 따로 있었다. 드라마 '신의 선물'에서 김수현은 전문직업인이었고, 남편은 변호사라는 남부럽지 않은 직업을 갖고 있었는데 아이는 한 명이었다. 그 아이가 사라져 버린다.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 말고 일본의 작품을 보자.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료타는 대그룹에 다니는데 아이가 아들 한 명이다. 아들 케타이 한명 키우는 대신 그는 대기업에 투신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성공했어도 월급쟁이였다. 

한편, 유다이는 허름한 전파상을 운영하며 가난하게 사는 데 아이가 세 명이다. 전파사는 가정 살림집과 붙어 있다. 직장과 집이 붙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이는 아이들과 함께 잘 놀아준다. 료타는 직장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아이와 같이 있는 시간이 적다. 

이 영화를 보면 성공한 사람들은 아이가 적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아이가 많은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아이가 적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사람이 아이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기 힘든 사회라는 점에서 볼 때 이는 허구적으로 다가온다. 아이를 키우기 힘든데 가난한 이들이 어떻게 많은 아이를 키우겠는가 싶다.

아이를 많이 키우려면 아빠도 희생을 해야 한다. 전파상을 운영하는 유다이는 돈을 많이 벌지 못하기 때문에 아내가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 대신 많이 놀아준다. 반대로 료타의 아내가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아이들과 많이 어울리지 않아도 비난을 그다지 받지 않는다. 

그 집에서는 모든 가용자원은 그 외아들에게 모아진다. 그러나 료타는 슬프다. 그 한 명의 아들이 원하는 대로 성장하지 않는다. 류세이도 슬프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안되니 말이다. 전파상 집에서는 가용자원은 분산되고 한 명의 능력이나 행태에 그렇게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상대적으로 아이들은 덜 부담스럽다. 그러나 한명의 자녀가 납치되어도 부모에게 다른 대안(?)은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두 사람이 빠졌다. 진짜 부자와 진짜 가난한 자이다. 금력과 권력을 가진 이들은 많은 자녀를 두고 있다. 조선시대 왕이나 아랍에 한정되지 않는다. 한국 드라마의 재벌 집은 대가족이 모여 살고 혈연관계도 복잡하다. 

하지만 진짜 가난한 이들은 결혼도 하지 못한다. 많은 영화에서 조폭은 자녀가 없다. 여자는 있어도 아이가 없이 칼과 총에 맞아 사라진다. 그들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없는 집에서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 아이를 건사하지 못하니 비혼 자녀가 온전히 성장하지도 못한다. 물론 그들의 자녀는 납치 조차 되지않는다. 납치범에게 줄 돈도 부모도 없으니.

대기업에 다니고 의사가 직업이며 변호사라도 그들은 월급쟁이다. 그들은 아이들이 한명일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월급을 주는 진정한 주인들은 아이들이 많다. 아이가 적은 것이 성공한 징표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없으며 그것은 오히려 은폐된 진실을 담고 있는지 모른다.

인간의 본성상 행복한 삶을 구가하려는 욕망은 아이들이 많은 것이다. 진정한 행복을 억제 하며 우리는 문명 건설의 대가로 불안과 고독 속에서 매달 주어지는 월급에 잠시 취해 연명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게 인식하며 살지 않고 서는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일까. 




할리우드나 한국 스타들 가운데 아이를 많이 낳아 매스미디어에 노출시키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있다. 이는 그만큼 아이가 많은 이들이 부유함의 상징을 뜻하기 때문이다. 아이 한 명 낳아 키우기 힘든 사회일수록 아이가 많다는 것은 아무튼 쉽지는 않다는 뜻이다. 아이를 키우는데 필요한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하거나 아니면 그 희생을 금력이나 권력으로 해결하고 있을 것이니 말이다. 

글/김헌식 문화콘텐츠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