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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가의 없이살기 코드의 흥행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4. 7. 7. 10:09

없이 살기가 즐겁습니까? [김헌식의 문화비빔밥]

[김헌식의 문화비빔밥] 생존을 유희로, 감동으로



지난 7일 MBC <무한도전> '배고픈 특집'편의 도전 미션은 하루 동안 돈 없이 서울에 살기였다. 무한도전 멤버들은 아마존 원주민들로 분장하고 식량을 얻기 위해 서울을 누볐다. 돈이 없으니 도시에서 음식을 제대로 해결할 리가 없다. 심지어 그들은 비둘기를 덫을 놓아 잡기도 했다. 물론 SBS <정글의 법칙>과 같았다면 그 비둘기를 끓이거나 구워 먹었을지 모르겠다. 

SBS에서 새롭게 선을 보인 <도시의 법칙>은 <정글의 법칙>의 스핀 오프 포맷을 보이고 있다. <정글의 법칙>이 주로 야생의 세계를 공간적 무대로 하고 있다면, <도시의 법칙>은 문명의 세계라는 도시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기대 심리도 다르다. 정글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편견에 부합한다. 야생의 세계는 편안하지 않은 공간, 생존을 위한 고군분투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도시는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 그리고 고군분투보다는 무엇인가 익숙한 경험을 확장시켜줄 것 같다. 더구나 뉴욕과 같이 전 세계인이 동경하는 도시에서 머무르는 시간은 야수와 벌레, 더위 그리고 배고픔이 지배하는 정글보다 더욱 뜻 깊을 듯하다. 물론 제작진의 의도는 그러한 기대심리를 전복시키는데 있다. 선망의 대상인 도시일수록 생존의 어려움을 부각시키려는 전복의 콘셉트 말이다. 

그것을 실현시켜주는 설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없이 살기이다. 개인들의 자율의지도 일정하게 억제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화폐수단을 제안하고 주거공간이나 사용도구도 엄격하게 통제시킨다. <도시의 법칙>은 아직까지 <정글의 법칙>처럼 생존게임의 단계로 나가지 않고 있다. 

여기에서 생존은 음식을 매개로 극적인 모습을 보이기 일쑤이다. KBS <1박 2일>은 비록 야생의 세계는 아니지만 지역에 멤버들을 가두고 그 안에서 없이 살도록 했다. 게임이나 미션 수행의 결과를 통해 마음대로 음식을 먹는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의 대결과 비교는 생존게임의 축소판이었다. 지난 5월 30일부터 시작한 MBC <7인의 식객>에서도 이어진다. 역시 두 그룹으로 나누어 이긴 팀은 편하게 좋은 음식을 먹지만 그렇지 않은 팀은 엄청난 고생의 대가를 치르면서 음식을 구해야한다. 

그런데 도시나 야생의 세계나 적어도 '먹(을)거리'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들 스스로 생산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시는 그렇다 해도 야생은 그럴 리가 없어 보인다. 엄밀하게 말하면 야생의 세계에서는 수렵이나 채취를 한다. 수렵이나 채취는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인간이 약탈하는 것이다. 약탈의 야만을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 정당화할 뿐이다. 방송 미디어에 등장하는 야생의 세계에 시청자가 몰입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돈을 내지 않고 자연에서 공짜로 마구 소유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아침저녁으로 방송에 등장하는 물고기나 약초, 열매를 채취하는 장면들이 범람하는 이유는 이 공짜 심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돈으로 교환해야 하는 자본주의 상품 구조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특히, 도시인들의 경우에는 이런 점이 더욱 선망의 심리로 작동한다. 


도시인들은 스스로 자신이 먹는 음식을 기르지도 생산하지도 않는다. 야생의 세계는 스스로 기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약탈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 뿐이다. 방송에서 다뤄지는 도시 속 생존기를 봐도 마찬가지다. 돈을 적게 주거나 활동영역이나 수단을 제한하기 때문에 배고픔 등이 가중되는 것일뿐 그들이 스스로 먹을 것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없이 살기' 콘셉트는 생존의 방식을 시험하여 어려운 상황 속에 빠진 참여자들의 고군분투를 지켜보게 만든다. 어려움에 빠진 이들이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관찰자에게 묘한 쾌감을 준다. 아니 이렇게 부정적으로만 볼 게 아니지 않나. 우리가 도시에서 얼마나 편하게 살고 있는가를 보여줄 수도 있고, 선망의 대상인 도시가 거꾸로 생존의 치열한 경연장임을 되짚게 할 수도 있을 듯싶다. 

지금까지는 배고픔을 극적인 감동과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행태들은 현실을 간과하게 만든다. 정말 우리들은 이런 콘셉트를 즐겨볼 정도로 편하고 안정되고 살고 있는 것일까. 이런 프로그램은 분명 빈곤한 사람들은 절대 보지 않을 것이다. '없이 살기' 콘셉트는 하루 한 끼 음식을 고민하는 사람들 관점에서는 별스럽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얼마 안 있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일상적으로 먹을 음식에 대해서 고민하는 이들에게 없이 살기는 사치에 가깝다. 도대체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기에 아마존이나 아프리카 밀림에서 배고픔을 인위적으로 체험하는 콘셉트를 부각해야 할까. 

더구나 그들은 진짜 배고픈 사람들도 아니며 그들이 배고플수록 그들이 배고픔을 리얼하게 드러낼 때마다 시청률은 올라가고, 미래 출연료의 상승까지 낳는 구조에 있고, 광고를 낸 기업들도 돈을 더 많이 번다. 

방송 속 야생의 공간은 풍족한 도시공간의 소중함을 거꾸로 강화한다. 도시 공간을 벗어나면 고생이라는 점을 부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도시가 상업적 화폐로 생존이 이루어지는 허위적인 공간이라는 점을 드러내주면 그만일까? 미디어는 야생이거나 문명이거나 극단적인 대비를 가로지르지만 우리가 먹고 사는 현실적인 의미와 가치에 대한 접근 보다는 극단적인 상황설정을 통해 가학적 고통에 따른 생존 본능의 발현을 통해 웃고 즐기게 만들 뿐이다.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절대로 그런 상황에 빠질 리가 없기 때문에 예능프로로 웃고 즐기며 감상하니까 말이다. 더구나 이런 콘셉트는 현실의 냉혹함을 부각하여 도시 생활에 대한 전투의지를 촉발시킨다. 

이런 '없이 살기' 생존 콘셉트 프로그램은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된 것은 스스로 자신이 먹을 것을 기르고 생산하고 목축을 했기 때문임을 철저히 간과하고 있다. 그것이 인간의 문화를 만들어낸 이유임도 말이다. Culture의 어원이 재배하다 경작하다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없이 살기' 생존 콘셉트는 먹을 것을 생산하지 않는 자의 마음가짐을 드러내주어야 하는 미디어의 역할을 도외시하기 일쑤다. 

석가모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 반드시 멀리 떨어진 마을에 가서 탁발을 해 밥을 얻어와 그것을 제자들과 나누어 먹었다. 석가모니가 꼭 멀리 마을에 들러 탁발을 한 이유는 밥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 밥을 생산한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특히 수행을 하는 사람, 지식인 그리고 정신노동을 하는 이들은 밥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 자칫 물질을 천시하고 그것을 기르고 생산하는 사람 위에 군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지식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종교에 비유하면, 깨달은 자들이고 정신으로 생활을 영위하여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밥이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만들기는커녕 밥은 사먹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화폐적으로 보면 많은 양을 그 정신과 지식 노동 때문에 가져간다. 그들은 밥을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밥을 너무 많이 먹어 걱정한다. 

석가모니의 고행은 누군가를 이기는 승리라거나 극적인 재미와 감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도리와 세상의 구제를 위한 것이었다. 밥은 개인들이 잘 나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밥은 사람들 사이에 있다. 석가모니와 제자들은 밥을 찾아가 밥은 얻고 밥을 생산하고 만드는 사람들을 해탈시키기 위한 화두를 고민했다. 방송 프로의 캐릭터들이 지역에 가거나 해외로 나가거나 아니 야생으로 가건 도시로 가건 그들의 배고픔은 그들 스스로의 개별적인 승리를 위한 것일 뿐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닌 그냥 야만이다. 자본주의 속 개인과 조직 경쟁주의를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