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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는 왜 영어 발음 논쟁에 휘말렸을까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4. 1. 19. 12:48

김태희는 왜 영어 발음 논쟁에 휘말렸을까



[김헌식의 문화비빔밥] 국문학과의 폐지와 대통령의 영어 그리고 싸이의 회화

1991년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장하림역의 박상원은 영어를 구사하지만, 전형적인 콩글리시다. 발음이나 억양이 엉망이다. 하지만 그의 영어를 문제 삼는 담론은 없었다. 그러나 2004년 <러브 스토리 인 하버드>에 출연했던 김래원과 김태희는 영어 논쟁에 시달렸다. 특히 서울대 출신의 김태희에게는 더욱 심했다. 그 때 영어실력의 기준은 발음이었다. 

물론 그 발음의 기준은 미국식 발음이었다. 이는 하나의 상징이자 신호였다. 이후 한류열풍과 아울러 배우나 가수의 영어 노이로제는 강화되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불어 닥친 해외 교포 출신 엔터테이너들의 국내 러시 현상은 이런 맥락에서 일어났다. 

이제 영어에 대한 추종 문화는 고려 후기 몽골어에 비견될 만큼이다. 영어는 그 종속성이 자발적으로 일상화되었다. 그런 영화의 종속적 일상화는 시장상품화에서 시작했고, 그렇기 때문에 국가 정체 차원에서 중요한 함의를 줄 수도 있다. 이점은 박근혜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과 국문과 폐지논란, 한류 스타들의 영어 구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사회를 뒤덮는 ‘영어 노이로제’ … 대중문화 분야도 예외 아냐 

초기 한류 스타들이 해외 활동을 펼칠 때 가장 큰 장애 가운데 하나는 언어였다. 현지 팬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한류스타들과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것에 실망을 했다. 이러한 점은 아이돌 스타들일수록 강하게 나타났다.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아닐지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점은 친밀도를 높일 수 있지만, 한류스타들에게 이도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부른 노래들은 영어 가사가 도배질 한 것이라 말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노래에는 영어가 많아 어학 수준이 높을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정작 그들은 일상 커뮤니케이션을 못하고 있었다. 그 뒤에 각 관련 학과와 기획사에서는 영어 학습을 시키거나 현지인들을 아이돌 그룹 멤버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영어가 점철된 한국가요에 대한 비판을 염두 한 듯 싸이 측은 반대의 전략을 취했다. '강남 스타일‘은 한국 가사를 기본으로 하되 간단한 후렴구에만 영어를 사용했다. 즉 쓸데없이 영단어를 남발하지 않았다. 현지 공연에서도 영어로 바꿔 부르지 않았다. '젠틀맨'에서는 춤 자체를 한국말로 지었다. 

그렇다면 싸이는 영어를 못하는가. 물론 우리는 그가 영어를 통해 현지인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모습을 미디어를 통해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싸이는 한류 스타들이 가지고 있던 커뮤니케이션 상의 한계를 쉽게 넘나들었다. 물론 내용은 부차적이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젠틀맨‘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연설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그 논란의 핵심은 영어를 잘했다와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언론매체 가운데는 역대 영어를 잘한 대통령 순위를 매긴다. 물론 여기에서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발음이나 억양, 호흡, 띄어 읽기 내용을 말한다. 그 영어 안의 메시지에 대한 평가는 부차적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연설, 메시지보다 발음과 억양 등을 주목하는 ‘기현상’ 

최근 영국 여왕의 연설에 대해 좋은 톤과 억양 발음으로 연설을 잘했다느니 하는 언론 매체는 없었다. 그 연설에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가 중요했다. 예컨대 복지와 경제회복 입법계획에 대한 내용이 부각되었다. 비록 박근혜 대통령이 의회 연설은 한국어로 했어도 일상 사교 언어는 그들에 맞게 영어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전적으로 맞춰주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매우 대견하고 귀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붙인 박 마담이라는 호칭은 묘한 뉘앙스를 연상하게 했다. 차라리 영어 연설로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올리는데 신경 쓰는 시간에 차라리 콘텐츠 즉, 성추행의 주인공 윤창중 대변인 같은 사람의 인식 수준을 바꾸는데 집중했어야 했다. 영어 연설로 얻었다는 이미지는 윤창중 식 손짓하나로 한방에 날라 갔기 때문이다. 

2013년 5월9일 KBS <뉴스9> 화면캡처 정작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영어 구사력에 대한 관심이 가진 상징적이고, 실제적인 효과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세계적으로 자신의 국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는 자연스러운 모방 효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어보다 영어를 더 우선해야 한다는 지표가 되었다. 역대 대통령의 영어 구사 능력 수준을 순위 매기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무엇보다 영어 안의 내용이 아니라 겉 형식 즉 발음이나 억양, 호흡법 등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 

그런데 정작 박근혜 대통령의 한국어 연설은 낙제점 이라는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이는 대선과정에서 충분히 인식된 바다. 이러한 점은 한국의 대학과 대학원의 영어강의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대학과 대학원은 전공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회회수업처럼 되었다. 전공 내용이 아니라 미국식 영어발음이나 억양에 가까운가가 중요하다. 학생들도 발음과 억양에 자신 있는 학생들만 발언한다. 미국에서 학위를 했다는 이유로 교수 임용 시 여러 면에서 유리한 점수를 받는 것은 물론 발음이나 억양이 좋은 이들이 채용에서 우선순위를 배정받는다. 

대한민국이 어느 나라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영어는 하나의 권력이며, 왕따와 배제의 핵심 수단이 되었다. 남을 짓누르는 폭력이다. 물론 그 영어수준은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라는 알 수 없는 유령 때문에 막대한 경제 자원을 필요로 한다. 영어와 관련하여 없어져야할 단어는 콩글리시다. 미국의 창조경제를 움직이는 인도인들은 미국이나 영국식 영어가 아닌 인도식 영어를 사용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무시하지 않으며 그들을 데려가려고 오히려 잔뜩 줄을 서 있는 형국이다. 정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콘텐츠가 우월하다면 그의 발음에 신경 쓰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어로 연설을 잘한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이나 사안의 본질을 대변하지 않지만, 영어만은 유독 그런 경향이 강하다. 

영어, 우리 사회에서 권력과 왕따와 배제의 핵심수단이 된 이유 


대통령마저 한국어보다 영어 발음과 억양에 더 신경을 쓰는 마당에 최근 국문학과들이 없어지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물론 폐과 이유는 취직이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연쇄 효과는 곧 다른 대학들에게도 미칠 전망이다. 하지만 일선 기업의 취업담당자들은 신입 사원들의 한국어 글쓰기능력의 부족함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영어 어학점수와 발음은 나아졌는데, 한국어 구사력은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어 교육을 제대로 받으려는 이들은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야말로 한국어를 사랑하는 애국자들이다. 케이 팝을 좋아해 한국어를 학습하는 동남아시아 몽골 청년들이 한국 국민이고 대통령이다. 몽골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역전된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영어에 목을 매고 있다는데 다른 사람을 짓밟고 군림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이다. 

그것은 종종 문화 주권을 방기한 채 이루어진다. 영어 발음 없이도 강대국이 된 독일과 일본은 여전히 시사적이다. 국가 지도자가 제시해야 할 것은 우리 말과 글 스스로 자랑스럽게 하는 것이고 세계경제를 선도한다는 창조경제의 비전이어야 할 것이다. 과연 남의 말과 글로 얼마나 창조적일 수 있는지 의심스럽고, 그것은 국내의 대학과 대학원 연구 집단에게도 마찬가지로 요구되는 것이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media@media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