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 칼럼>´추노´ 죽음의 행렬은 왜 멈췄나
2010.03.04 09:40 | 수정 2010.03.04 17:01
[김헌식 문화평론가]드라마 < 추노 > 제17회에서 왕손이와 최장군은 부활했다. 한동안 인터넷에서 그들에 관해서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들만이 아니라 많은 인물들이 갑자기 죽음을 맞이면서 논란이 이어졌다. 그들의 부활 때문인지 추락 혹은 답보 상태였던 시청률은 상승했다. 송태하와 이대길의 철학적 세계관적 대담은 의미가 있었지만, 식상하고도 장황하던 차에 왕손과 최장군의 부활이 새로운 서사구조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 한성별곡-정 > 의 어두운 그림자가 떨쳐지는 인상이었다.
대부분 등장인물의 죽음으로 결말을 맺은 < 한성별곡-정 > 은 그 잔인함의 비극적 서구 구조에 혀를 내두르게 했다. 단지 잔인하기 때문이 아니라 대중적 기대감을 배제해버렸기 때문에 < 한성별곡-정 > 은 참신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서 버려졌다. < 한성별곡-정 > 과 같은 스타일은 시청률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지상파 방송사 시스템에서는 죽음을 맞을만 했다. 그렇다면 < 추노 > 는 그와 같은 스타일로 그릴수가 없다. 하지만 제작진의 스타일을 아예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의식은 대중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사실 < 추노 > 는 < 한성별곡-정 > 과 같이 8부작은 아니라고 해도 적은 분량으로 압축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점은 < 추노 > 의 스토리 전개가 매우 이완되어 있다는 인상에서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는 대중적 수용미학의 특성을 갖기 때문에 많은 정보량을 담지 않아야 하지만, 느리게 진행시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지나치게 느리게 진행되면 또 다른 역효과를 낳아서 시청자를 이탈하게 만든다. 즉 대중몰입도가 떨어지게 된다.
예컨대, 의식적 메시지를 부각시키려는 듯 서사 구조는 후반부로 갈수록 산만해졌다. 정치에 대한 입장도 마찬가지다. 노비들의 봉기와 테러는 황철웅과 영의정 이경식(김응수 분)에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어야 했다. 내적 완결의 작법이 아쉬웠다. 그 원인은 다양해 보이지만, 시청자의 기대감 불일치에서 비롯한다.
멜로를 생각해보자. 드라마 < 추노 > 가 초반부에 흥미를 자극했던 것은 촬영, 편집기법과 함께 멜로이었다. 이는 특히 여성 시청자를 잡아두기 위한 전략이었다. 지금 많이 부각되고 있는 정치담론의 선명성 투쟁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우선 누가 뭐라 해도 < 추노 > 의 주인공은 이대길과 언년이다. 이대길과 언년이의 사랑은 멜로의 기본 속성을 잘 가지고 있다. 시청자들의 궁금증은 이대길과 언년이의 만남과 사랑이다. < 추노 > 는 언년이와 대길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질질 끌며 내비쳤다. 결국 송태하와 언년이가 혼인을 하기에 이르는 장면은 전체 방영분중 절반이 남았음에도 이미 김을 다 빠지게 만들었다. 즉 대길과 언년이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시청자들을 이탈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드라마의 잘못은 언년이가 이대길의 생사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언년이가 이대길의 생존에 대해서 약간의 언질을 받은 적이 있다면 더 흥미롭게 될 것이었다. 이대길의 생존을 믿지만, 옆에 있지 않고 언제나 옆에 존재하는 이는 송태하이기 때문에 갈등과 번민이 일어날 것이다. 적어도 멜로의 기본 공식을 살려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극을 부각하려면 송태하가 매우 매력적인 인물이어야 한다. 하지만 < 추노 > 에서 송태하는 네티즌들에게 거의 언급이 되지 않는 답답하고 평면적인 인물에 불과하다.
이러한 인물에 열광하는 것 자체가 문제일 것이다. 시청자가 송태하를 사랑하게 해야 언년이의 행보가 설득력을 갖는데 송태하는 시청자들이 사랑하기에 결격 사유가 너무 많다. 그의 사랑, 꿈, 좌절, 고통, 재탄생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 더구나 혼자 살아가겠다며 올곧게 떨쳐나간 언년이는 내내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모습을 보인다. 즉 아름답고 예쁘게만 보이려 하는데, 이는 여성시청자들에게는 마이너스다.
한편 이대길은 사실상 언년이를 사랑한 죄로 인생 막장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년이에 대한 사랑, 그리고 슬픔이 가득 차 있다. 드라마는 이러한 약한 자에 대한 대중 연민과 동일시를 무시했다. 차라리 송태하가 악역이었어야 했다. 즉 악역이지만 이다해가 목숨을 빚졌거나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야 하는-그를 선택하지 않으면 이대길이 죽는 결정적인 실마리가 있어야 했다. 물론 이대길이 언년이를 오해하면서 갈등이 깊어져야 한다.
즉 언년이가 정말 송태하를 사랑하는 순간 이 드라마는 우습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우습게 되는 점을 이 드라마는 대길과 언년이의 출생의 비밀로 출구전략 삼으려 했다. 물론 멜로는 송태하와 이대길의 세계관 충돌과 연합을 이끌어내기 위한 하위 장치일 뿐이었다.
다행하게도 주인공들이 대부분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 서사 양식은 보이지 않을 태세이다. 결국 이렇게 돌아선 것에 대해 획일적인 서사 구조라고 비난해서는 타당하지 않다. 이렇게 비극적 양식을 선택하는 이유는 삶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사람은 밝은 무대 위에서 자기 세상인 듯 엄청나게 떠들지만 곧 캄캄한 무대 아래로 내려가야 할 제한적인 존재이다. 대부분 루저로 끝날 수 있다.
석세스 스토리가 창궐하는 한국 사극에서 < 한성별곡-정 > 과 < 추노 > 의 비극적 양식은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중들이 겪는 현실은 너무나 비극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텔레비전 사극을 통해서 위안과 희망을 얻으려는 것이다. 대중은 한 여자를 죽도록 사랑한 대길이 행복해지고, 자신을 버리고 사회구조의 변화를 바라는 이들이 소기의 목적이라도 달성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시청자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추노 > 에서 벌어지는 정치적인 선명성 투쟁도 '기대불일치'의 상태에서 허우적거린다. 어느 리얼리즘 드라마가 추상적 엘리트 드라마가 되고 있다. 이대길을 사회 의식 차원에서 계몽하려는 송태하의 정치 계혁 의식은 관념적이고 좌절적이다. 이미 실패가 예견된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길의 소박한 희망이 현실적이고, 그것의 추이가 더 부각되었어야 했다.
황철웅과 이경식의 담론은 송태하의 세계관보다 더 하위에 있어야 했다. 처음부터 이대길을 절망적 세계관의 소유자로 만든 것이 대중 미학에 어긋났다. 무엇보다 노비와 선비(송태하 세력 포함) 사이에서 간극을 메우며 가장 혁신적이고 개혁적인 인물이 이대길이었어야 한다. 노비봉기군이나 선비들도 현실적이지 못하고 추상적인 노선과 수단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매우 현실적이어서 냉혹한 이경식과 황철웅과 맞붙을 수 있는 것은 이대길(천지호 포함)이었다. 하지만 이대길은 현실 도피적이고 자폐적이다. 만약 이러한 점들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 한성별곡-정 > 과 같이 < 추노 > 는 엘리트 의식에 찌들어 대중을 계몽하려는 속성을 지닌 컨텐츠가 될 뿐이다.
대부분 등장인물의 죽음으로 결말을 맺은 < 한성별곡-정 > 은 그 잔인함의 비극적 서구 구조에 혀를 내두르게 했다. 단지 잔인하기 때문이 아니라 대중적 기대감을 배제해버렸기 때문에 < 한성별곡-정 > 은 참신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서 버려졌다. < 한성별곡-정 > 과 같은 스타일은 시청률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지상파 방송사 시스템에서는 죽음을 맞을만 했다. 그렇다면 < 추노 > 는 그와 같은 스타일로 그릴수가 없다. 하지만 제작진의 스타일을 아예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의식은 대중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사실 < 추노 > 는 < 한성별곡-정 > 과 같이 8부작은 아니라고 해도 적은 분량으로 압축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점은 < 추노 > 의 스토리 전개가 매우 이완되어 있다는 인상에서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는 대중적 수용미학의 특성을 갖기 때문에 많은 정보량을 담지 않아야 하지만, 느리게 진행시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지나치게 느리게 진행되면 또 다른 역효과를 낳아서 시청자를 이탈하게 만든다. 즉 대중몰입도가 떨어지게 된다.
예컨대, 의식적 메시지를 부각시키려는 듯 서사 구조는 후반부로 갈수록 산만해졌다. 정치에 대한 입장도 마찬가지다. 노비들의 봉기와 테러는 황철웅과 영의정 이경식(김응수 분)에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어야 했다. 내적 완결의 작법이 아쉬웠다. 그 원인은 다양해 보이지만, 시청자의 기대감 불일치에서 비롯한다.
멜로를 생각해보자. 드라마 < 추노 > 가 초반부에 흥미를 자극했던 것은 촬영, 편집기법과 함께 멜로이었다. 이는 특히 여성 시청자를 잡아두기 위한 전략이었다. 지금 많이 부각되고 있는 정치담론의 선명성 투쟁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우선 누가 뭐라 해도 < 추노 > 의 주인공은 이대길과 언년이다. 이대길과 언년이의 사랑은 멜로의 기본 속성을 잘 가지고 있다. 시청자들의 궁금증은 이대길과 언년이의 만남과 사랑이다. < 추노 > 는 언년이와 대길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질질 끌며 내비쳤다. 결국 송태하와 언년이가 혼인을 하기에 이르는 장면은 전체 방영분중 절반이 남았음에도 이미 김을 다 빠지게 만들었다. 즉 대길과 언년이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시청자들을 이탈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드라마의 잘못은 언년이가 이대길의 생사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언년이가 이대길의 생존에 대해서 약간의 언질을 받은 적이 있다면 더 흥미롭게 될 것이었다. 이대길의 생존을 믿지만, 옆에 있지 않고 언제나 옆에 존재하는 이는 송태하이기 때문에 갈등과 번민이 일어날 것이다. 적어도 멜로의 기본 공식을 살려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극을 부각하려면 송태하가 매우 매력적인 인물이어야 한다. 하지만 < 추노 > 에서 송태하는 네티즌들에게 거의 언급이 되지 않는 답답하고 평면적인 인물에 불과하다.
이러한 인물에 열광하는 것 자체가 문제일 것이다. 시청자가 송태하를 사랑하게 해야 언년이의 행보가 설득력을 갖는데 송태하는 시청자들이 사랑하기에 결격 사유가 너무 많다. 그의 사랑, 꿈, 좌절, 고통, 재탄생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 더구나 혼자 살아가겠다며 올곧게 떨쳐나간 언년이는 내내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모습을 보인다. 즉 아름답고 예쁘게만 보이려 하는데, 이는 여성시청자들에게는 마이너스다.
한편 이대길은 사실상 언년이를 사랑한 죄로 인생 막장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년이에 대한 사랑, 그리고 슬픔이 가득 차 있다. 드라마는 이러한 약한 자에 대한 대중 연민과 동일시를 무시했다. 차라리 송태하가 악역이었어야 했다. 즉 악역이지만 이다해가 목숨을 빚졌거나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야 하는-그를 선택하지 않으면 이대길이 죽는 결정적인 실마리가 있어야 했다. 물론 이대길이 언년이를 오해하면서 갈등이 깊어져야 한다.
즉 언년이가 정말 송태하를 사랑하는 순간 이 드라마는 우습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우습게 되는 점을 이 드라마는 대길과 언년이의 출생의 비밀로 출구전략 삼으려 했다. 물론 멜로는 송태하와 이대길의 세계관 충돌과 연합을 이끌어내기 위한 하위 장치일 뿐이었다.
다행하게도 주인공들이 대부분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 서사 양식은 보이지 않을 태세이다. 결국 이렇게 돌아선 것에 대해 획일적인 서사 구조라고 비난해서는 타당하지 않다. 이렇게 비극적 양식을 선택하는 이유는 삶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사람은 밝은 무대 위에서 자기 세상인 듯 엄청나게 떠들지만 곧 캄캄한 무대 아래로 내려가야 할 제한적인 존재이다. 대부분 루저로 끝날 수 있다.
석세스 스토리가 창궐하는 한국 사극에서 < 한성별곡-정 > 과 < 추노 > 의 비극적 양식은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중들이 겪는 현실은 너무나 비극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텔레비전 사극을 통해서 위안과 희망을 얻으려는 것이다. 대중은 한 여자를 죽도록 사랑한 대길이 행복해지고, 자신을 버리고 사회구조의 변화를 바라는 이들이 소기의 목적이라도 달성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시청자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추노 > 에서 벌어지는 정치적인 선명성 투쟁도 '기대불일치'의 상태에서 허우적거린다. 어느 리얼리즘 드라마가 추상적 엘리트 드라마가 되고 있다. 이대길을 사회 의식 차원에서 계몽하려는 송태하의 정치 계혁 의식은 관념적이고 좌절적이다. 이미 실패가 예견된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길의 소박한 희망이 현실적이고, 그것의 추이가 더 부각되었어야 했다.
황철웅과 이경식의 담론은 송태하의 세계관보다 더 하위에 있어야 했다. 처음부터 이대길을 절망적 세계관의 소유자로 만든 것이 대중 미학에 어긋났다. 무엇보다 노비와 선비(송태하 세력 포함) 사이에서 간극을 메우며 가장 혁신적이고 개혁적인 인물이 이대길이었어야 한다. 노비봉기군이나 선비들도 현실적이지 못하고 추상적인 노선과 수단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매우 현실적이어서 냉혹한 이경식과 황철웅과 맞붙을 수 있는 것은 이대길(천지호 포함)이었다. 하지만 이대길은 현실 도피적이고 자폐적이다. 만약 이러한 점들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 한성별곡-정 > 과 같이 < 추노 > 는 엘리트 의식에 찌들어 대중을 계몽하려는 속성을 지닌 컨텐츠가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