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 칼럼>´추노´ 결국 최장군과 왕손이 ´열려진 끝´인가
2010.03.26 09:17
[김헌식 문화평론가]1991년 MBC 드라마 < 여명의 눈동자 > 에서 일제에 학도병으로 끌려간 최대치(최재성)와 종군위안부 여옥(채시라)은 사랑에 빠진다. 여옥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치의 아이를 갖게 되고 온갖 어려움을 뚫고 전장에서 대치의 아이를 낳는다. 그 아이는 엄혹한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건강하고 자라난다.
하지만 그 아이는 해방된 공간에서 같은 민족끼리 벌어진 골육상쟁에서 죽고 만다. 어쩌면 그것은 외압이 아니라 내부 갈등과 분열 속에서 희망이 사라지는 것을 함축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서로 사랑했지만 지고지순한 여옥은 결국 자신의 첫사랑 대치를 따르다가 비극적 운명을 맞게 된다. 새로운 연인 관계로 진전 되었던 윤여옥과 장하림(박상원)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세월은 변했다. 2010년 드라마 < 추노 > 에서 이대길(장혁)과 언년이(이다해)는 불가항력적인 상황 속에서 서로 사랑을 잃고 만다. 운명의 엇갈림 끝에 이대길과 언년이는 만나지만 이미 언년이는 송태하(오지호)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언년이는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전의 사랑 대길을 가슴에 묻는다. 언년이를 찾아 10여년을 헤매던 대길이의 사랑은 한국보다는 동남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대길은 자신이 사랑하는 언년이와 자신이 쫓던 노비 송태하의 사랑을 위해서 스스로 죽어간다.
옛사랑이 죽고, 새로운 사랑이 그 희생을 딛고 새 희망을 품는 것이다. 물론 언년이의 희망은 어느새 송태하의 희망이자 꿈이었고, 그 꿈과 희망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원손에 의지한 꿈과 희망이었고, 역사가 말해주듯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초복이 등이 말하는 해-희망이'한 번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뜬금 없겠다.
언년이와 송태하에게도 아이가 없었다. 이대길과 언년이 사이에는 아예 처음부터 불임이었다. '불임의 시대'이다. 그것은 희망과 꿈이 없거나 매우 관념적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핵심 주인공에게서 그것을 명확하게 바랄 수가 없었다. 드라마 < 추노 > 가 그간 헤맨 것은 바로 그 희망과 꿈을 찾아가는 길이다.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꿈과 희망은 최장군과 왕손이에게 주어졌다. 비록 역사적 결과를 생각할 때 언년이와 송태하가 그 꿈을 행복하게 이루었는지를 생각할 때 부정적이지만, 최장군과 왕손은 대길의 뜻대로 되었다.
소설 < 장길산 > 에서 노비 군(軍)들은 운주사에서 노동으로 미륵불이 강림하는 세상을 꿈꾸었다. 결국 그들의 꿈과 희망은 종교적으로 회귀했다. 그러나 드라마 < 추노 > 에서는 그러한 집단적 주술적 염원은 사라졌다. 대중은 베버의 말대로 주술이 아니라 합리화의 길에 들어섰다. 사실상 주인공으로 등극했던 노비들은 정치 계략에 희생되었고, 소설 < 장길산 > 등에서 말하는 민중봉기의 동력은 결국 < 추노 > 에서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아니 업복이(공형진)를 볼 때 '스나이퍼'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노비 스나이퍼는 획기적인 캐릭터다. 하지만, 영화 < 본 시리즈 > 의 주인공 본처럼 히어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각개격파 형식으로 타개하는 가운데 스스로 희생되었다. 집단적 염원과 꿈이 사라진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는 방증인지 모른다. 우리 각자가 테러리스트가 되거나 저항자가 되어야 한다.
이 때문일까. 드라마 < 추노 > 는 정통 사극과 달리 명분이나 대의에 관한 관념적인 구호는 버렸다. 노비의 집단행위와 명분도 허무하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전지적 시점에서 상호 가치관이 교차할 뿐이다. 이 때문에 정서적 반응을 이끌어 내주기를 기다리는 시청층이 이탈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드라마의 내용은 몰입감을 떨어뜨린다. 하지만 감성적 반응만을 이끌어내려 한다면 예술가적 지향점을 욕망하는 이에게 자신의 존재를 포기하라는 것과 같아지겠다.
드라마 < 추노 > 의 등장인물들은 최근 사극의 변화된 아니 굳어진 캐릭터를 더욱 현실감 있게 구성해냈다. 모두가 우리 시대 호흡하는 실존적인 인물들과도 같았다. 즉 현대를 살아가는 각개 개인들의 욕망이 투여된 아바타들이었다. 욕망의 교차성 속에서 이 드라마는 절대 악인도 절대 선인도 만들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과 의식에 따른 결과물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드라마 < 추노 > 가 그리는 세계는 절대적 구획의 격자 방을 넘어 상호 피드백 속에서 각자의 꿈과 희망을 찾아 고군분투하여야 하는 개인들의 경연장이었고, 그 무대는 예견되었듯이 여운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
정치와 사랑, 그리고 일상의 삶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 추노 > 는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메시지는 여러 갈래로 분산되어 모호했다. 안개길을 헤매며 결론을 찾아나섰던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제한된 선택지 속에서 어떻게 끝맺을까 말이다. 이대길의 죽음을 통해 결말을 애절하게 만들었다. 희망을 위해 예술적으로 고민이 많았지만 대중적 욕망과는 거리가 있었다. 애초부터 걸림돌은 송태하에게 있었다. 그가 살아남은 것은 살아남지 않은 것이었다. 조선시대를 택한 것 자체의 한계이다.
잘못된 정치적 시스템의 선택을 통한 변화의 바람은 현실적으로 무력감만을 더 해줄 뿐이다. 그것이 조선시대 혁명과 변화를 담아 내려는 사극물의 딜레마다. 어쨌든 왕조의 유지에 의존했던 송태하와 언년이의 꿈은 희망적이지 않았지만, 차라리 최장군과 왕손이, 금강산으로 이동하는 노비들의 삶은 더 인간다웠을 것이고,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들이 살아냈기 때문이겠다. 이것이 희망이겠다.
하지만 그 아이는 해방된 공간에서 같은 민족끼리 벌어진 골육상쟁에서 죽고 만다. 어쩌면 그것은 외압이 아니라 내부 갈등과 분열 속에서 희망이 사라지는 것을 함축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서로 사랑했지만 지고지순한 여옥은 결국 자신의 첫사랑 대치를 따르다가 비극적 운명을 맞게 된다. 새로운 연인 관계로 진전 되었던 윤여옥과 장하림(박상원)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세월은 변했다. 2010년 드라마 < 추노 > 에서 이대길(장혁)과 언년이(이다해)는 불가항력적인 상황 속에서 서로 사랑을 잃고 만다. 운명의 엇갈림 끝에 이대길과 언년이는 만나지만 이미 언년이는 송태하(오지호)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언년이는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전의 사랑 대길을 가슴에 묻는다. 언년이를 찾아 10여년을 헤매던 대길이의 사랑은 한국보다는 동남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대길은 자신이 사랑하는 언년이와 자신이 쫓던 노비 송태하의 사랑을 위해서 스스로 죽어간다.
옛사랑이 죽고, 새로운 사랑이 그 희생을 딛고 새 희망을 품는 것이다. 물론 언년이의 희망은 어느새 송태하의 희망이자 꿈이었고, 그 꿈과 희망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원손에 의지한 꿈과 희망이었고, 역사가 말해주듯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초복이 등이 말하는 해-희망이'한 번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뜬금 없겠다.
언년이와 송태하에게도 아이가 없었다. 이대길과 언년이 사이에는 아예 처음부터 불임이었다. '불임의 시대'이다. 그것은 희망과 꿈이 없거나 매우 관념적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핵심 주인공에게서 그것을 명확하게 바랄 수가 없었다. 드라마 < 추노 > 가 그간 헤맨 것은 바로 그 희망과 꿈을 찾아가는 길이다.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꿈과 희망은 최장군과 왕손이에게 주어졌다. 비록 역사적 결과를 생각할 때 언년이와 송태하가 그 꿈을 행복하게 이루었는지를 생각할 때 부정적이지만, 최장군과 왕손은 대길의 뜻대로 되었다.
소설 < 장길산 > 에서 노비 군(軍)들은 운주사에서 노동으로 미륵불이 강림하는 세상을 꿈꾸었다. 결국 그들의 꿈과 희망은 종교적으로 회귀했다. 그러나 드라마 < 추노 > 에서는 그러한 집단적 주술적 염원은 사라졌다. 대중은 베버의 말대로 주술이 아니라 합리화의 길에 들어섰다. 사실상 주인공으로 등극했던 노비들은 정치 계략에 희생되었고, 소설 < 장길산 > 등에서 말하는 민중봉기의 동력은 결국 < 추노 > 에서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아니 업복이(공형진)를 볼 때 '스나이퍼'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노비 스나이퍼는 획기적인 캐릭터다. 하지만, 영화 < 본 시리즈 > 의 주인공 본처럼 히어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각개격파 형식으로 타개하는 가운데 스스로 희생되었다. 집단적 염원과 꿈이 사라진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는 방증인지 모른다. 우리 각자가 테러리스트가 되거나 저항자가 되어야 한다.
이 때문일까. 드라마 < 추노 > 는 정통 사극과 달리 명분이나 대의에 관한 관념적인 구호는 버렸다. 노비의 집단행위와 명분도 허무하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전지적 시점에서 상호 가치관이 교차할 뿐이다. 이 때문에 정서적 반응을 이끌어 내주기를 기다리는 시청층이 이탈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드라마의 내용은 몰입감을 떨어뜨린다. 하지만 감성적 반응만을 이끌어내려 한다면 예술가적 지향점을 욕망하는 이에게 자신의 존재를 포기하라는 것과 같아지겠다.
드라마 < 추노 > 의 등장인물들은 최근 사극의 변화된 아니 굳어진 캐릭터를 더욱 현실감 있게 구성해냈다. 모두가 우리 시대 호흡하는 실존적인 인물들과도 같았다. 즉 현대를 살아가는 각개 개인들의 욕망이 투여된 아바타들이었다. 욕망의 교차성 속에서 이 드라마는 절대 악인도 절대 선인도 만들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과 의식에 따른 결과물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드라마 < 추노 > 가 그리는 세계는 절대적 구획의 격자 방을 넘어 상호 피드백 속에서 각자의 꿈과 희망을 찾아 고군분투하여야 하는 개인들의 경연장이었고, 그 무대는 예견되었듯이 여운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
정치와 사랑, 그리고 일상의 삶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 추노 > 는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메시지는 여러 갈래로 분산되어 모호했다. 안개길을 헤매며 결론을 찾아나섰던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제한된 선택지 속에서 어떻게 끝맺을까 말이다. 이대길의 죽음을 통해 결말을 애절하게 만들었다. 희망을 위해 예술적으로 고민이 많았지만 대중적 욕망과는 거리가 있었다. 애초부터 걸림돌은 송태하에게 있었다. 그가 살아남은 것은 살아남지 않은 것이었다. 조선시대를 택한 것 자체의 한계이다.
잘못된 정치적 시스템의 선택을 통한 변화의 바람은 현실적으로 무력감만을 더 해줄 뿐이다. 그것이 조선시대 혁명과 변화를 담아 내려는 사극물의 딜레마다. 어쨌든 왕조의 유지에 의존했던 송태하와 언년이의 꿈은 희망적이지 않았지만, 차라리 최장군과 왕손이, 금강산으로 이동하는 노비들의 삶은 더 인간다웠을 것이고,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들이 살아냈기 때문이겠다. 이것이 희망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