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 칼럼>´된장녀´ 욕먹다가 ´코피스족´으로 신분상승?
2010.12.08 10:35
[김헌식 문화평론가]앨빈 토플러는 그의 출세작 < 제3의 물결 > 에서 21세기는 재택근무가 활성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원인은 정보통신의 발달 때문이라는 것.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정보통신이 발달하면 애써 직장에 나오지 않고도 업무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그가 처음 주장한 것도 아니었다. 요즘 최근에는 스마트 폰을 이용한 업무 수행과 재택근무개념이 합성된 '스마트 워크(Smart Work)'를 생각하면, 토플러 시대의 재택근무야 한물 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앨빈 토플러는 정보통신의 발달로 사람들의 노동 강도는 약화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조직에 속해 있는 바에야 그 절약된 시간에 다른 일을 시켰다. 전체적으로 재택근무를 한다 해도 그에 상응하는 노동을 수행해야 했다. 스마트 워크든, 재택근무든 비대면성을 통한 노동강도가 강해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조직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라면, 재택근무, 스마트 워크는 매우 자유스럽고 행복한 근무와 노동 조건을 제공할 것인가.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조건은 작업장이라는 공간을 말하는 것이고, 복리후생이나 안정적인 수입, 승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스마트 워크를 장려한다는 것은 창조를 위한 것이겠다. 즉 창조는 예술가들만 하는 것은 아니다. 회사원이라고 결국 하는 것은 대부분은 생산, 창조를 위한 것이다. 창조적 관점에서 디지털 융합시대에 과연 스마트 워크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요즘 중앙부처나 지자체를 막론하고 문화정책 사업의 하나로 창작 스튜디오 설치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혼자 절간에서 틀어박혀 고시 공부해서 합격한다는 고리타분한 인식에 버금가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창작자는 혼자 틀어박혀 작품을 만든다는 인식일 것이다. 창작은 많은 경우 정보와 지식의 소통 속에서 탄생한다. 고시도 집단적 협업내지는 팀별 프로젝트처럼 학습을 해야하는 시대이다.
이러한 소통의 공간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고 혼자만의 공간에는 있지 않다. 더구나 아주 유명한 작가라서 훌륭한 공간이 있지 않은 바에야 사적인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창작자의 기본을 다지는 것은 바로 사람들 사이일 것이다. 사람들 사이는 바로 공간의 탄생을 말한다.
이는 비단 창작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회사원이나 전문직 종사자들도 이러한 소통의 공간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재택근무나 스마트 워크는 근본적으로 한계를 갖고 있을 수 있다. 왜 그런가?
이에 대한 해답에 해당하는 징후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코피스(coffice)족이다. 코피스는 커피와 오피스의 합성어이다. 커피 전문점이 학습과 업무 처리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 10년간의 변화된 양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1999년 스타벅스가 한국에 상륙해 '감성'을 팔았을 때는 커피전문점은 단순히 허영심이 많거나 호사가들이나 이용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급기야 '된장녀 논란'을 일으켰다. 이 때는 문화적 가치를 들면서 옹호하는 그룹이 생겨나기도 했다.
커피전문점은 ´엥겔지수´의 관점에서 ´문화적 지수´로 평가 기준이 이동했다. 즉, 단지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문화적 공간으로 커피 전문점이 기존의 다방의 코드를 대체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문화적 공간'에서 '창조적 콘텐츠'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셈이다. 학생들은 미래의 창조를 위해서 창작자와 회사원, 전문직 종사자들은 현재의 창조물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정보통신의 발달로 집에서도 충분히 업무를 수행할 수 있어서 재택근무가 가능한데 왜 코피스족이 되는 것인가? 사람에게는 개인적 공간도 필요하지만 사회적 공간도 필요하다. 혼자만 존재하는 나날은 고독과 우울을 낳는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다는 심리 자체가 오히려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거칠게는 ´군중 습성´(무리짓기)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다만, 그 간섭을 최소화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같이 있으되 혼자 있는 것이고, 혼자 있으되 같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커피전문점에서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 대화는 솔로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수다를 많이 떨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화는 다른 공간에서도 할 수 있지만, 커피전문점에서는 대화에서 발생하는 노이즈를 의식하는 도서관이나 사무실과 다르게 신경을 덜 써도 된다. 사무실보다 더 부드러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업무 수행이 더 높을 수도 있다.
결국 사람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사람 사이에서 존재적 의미를 확인할 뿐만 아니라 창조를 할 수 있다. 작가들이 이러한 커피전문점을 찾는 것은 바로 세상과의 소통을 구가하기 위한 필사적인 돌파구이기도 하다. 더구나 많은 커피전문점이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목이 좋은 곳에 있는 것은 더 좋은 장점이 된다. 창작과 생산의 영감과 아이디어는 바로 개방과 소통의 공간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구획과 격리의 도시공간에서 커피전문점은 그러한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점들이야 예전에도 있었다면 다른 점도 지적되었다. 최근에는 무료인터넷을 통해 커피전문점이 디지털 공간화 되었다. 이 점 때문에 더욱 방문자가 늘어난 감이 있다. 코피스족들은 전기코드 탭을 찾아 보이지 않는 경쟁을 벌이기도 하고, 업체에서는 콘센트 등을 늘리는 작업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있다. 회전율과 홍보 효과 사이의 딜레마다. 한쪽에서는 회전율을 의식해 다시 폐쇄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손님의 외연을 확대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대세는 당분간 무료 인터넷설치의 확장이다.
무엇보다 커피전문점은 문화콘텐츠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커피전문점에는 최고의 실내디자인이 적용된다. 종업원이 입은 유니폼에서 컵과 그릇, 의자와 탁자는 물론 메뉴판에 이르기까지 디자인의 총채이다. 실내에 흐르는 음악은 치밀하게 선택된 것이고,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 조명도 엄선되었다. 커피도 그냥 카페인을 흡수하기 위한 매개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기호들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속에서 창조와 생산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쨌든 창작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창조적 콘텐츠나 생산물, 성과물도 마찬가지다. 고립무원의 공간에서 산출되는 것은 한계가 많다. 비대면성의 재택근무는 한계가 분명하다. 디지털과 공간, 문화컨텐츠가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를 코피스족 현상에서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제도안으로 정착시키는 창작공간이든, 일반 조직안의 공간이든 이러한 코피스족 현상을 눈여겨 볼 필요는 있겠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
사실 이는 그가 처음 주장한 것도 아니었다. 요즘 최근에는 스마트 폰을 이용한 업무 수행과 재택근무개념이 합성된 '스마트 워크(Smart Work)'를 생각하면, 토플러 시대의 재택근무야 한물 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앨빈 토플러는 정보통신의 발달로 사람들의 노동 강도는 약화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조직에 속해 있는 바에야 그 절약된 시간에 다른 일을 시켰다. 전체적으로 재택근무를 한다 해도 그에 상응하는 노동을 수행해야 했다. 스마트 워크든, 재택근무든 비대면성을 통한 노동강도가 강해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조직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라면, 재택근무, 스마트 워크는 매우 자유스럽고 행복한 근무와 노동 조건을 제공할 것인가.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조건은 작업장이라는 공간을 말하는 것이고, 복리후생이나 안정적인 수입, 승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스마트 워크를 장려한다는 것은 창조를 위한 것이겠다. 즉 창조는 예술가들만 하는 것은 아니다. 회사원이라고 결국 하는 것은 대부분은 생산, 창조를 위한 것이다. 창조적 관점에서 디지털 융합시대에 과연 스마트 워크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요즘 중앙부처나 지자체를 막론하고 문화정책 사업의 하나로 창작 스튜디오 설치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혼자 절간에서 틀어박혀 고시 공부해서 합격한다는 고리타분한 인식에 버금가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창작자는 혼자 틀어박혀 작품을 만든다는 인식일 것이다. 창작은 많은 경우 정보와 지식의 소통 속에서 탄생한다. 고시도 집단적 협업내지는 팀별 프로젝트처럼 학습을 해야하는 시대이다.
이러한 소통의 공간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고 혼자만의 공간에는 있지 않다. 더구나 아주 유명한 작가라서 훌륭한 공간이 있지 않은 바에야 사적인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창작자의 기본을 다지는 것은 바로 사람들 사이일 것이다. 사람들 사이는 바로 공간의 탄생을 말한다.
이는 비단 창작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회사원이나 전문직 종사자들도 이러한 소통의 공간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재택근무나 스마트 워크는 근본적으로 한계를 갖고 있을 수 있다. 왜 그런가?
이에 대한 해답에 해당하는 징후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코피스(coffice)족이다. 코피스는 커피와 오피스의 합성어이다. 커피 전문점이 학습과 업무 처리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 10년간의 변화된 양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1999년 스타벅스가 한국에 상륙해 '감성'을 팔았을 때는 커피전문점은 단순히 허영심이 많거나 호사가들이나 이용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급기야 '된장녀 논란'을 일으켰다. 이 때는 문화적 가치를 들면서 옹호하는 그룹이 생겨나기도 했다.
커피전문점은 ´엥겔지수´의 관점에서 ´문화적 지수´로 평가 기준이 이동했다. 즉, 단지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문화적 공간으로 커피 전문점이 기존의 다방의 코드를 대체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문화적 공간'에서 '창조적 콘텐츠'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셈이다. 학생들은 미래의 창조를 위해서 창작자와 회사원, 전문직 종사자들은 현재의 창조물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정보통신의 발달로 집에서도 충분히 업무를 수행할 수 있어서 재택근무가 가능한데 왜 코피스족이 되는 것인가? 사람에게는 개인적 공간도 필요하지만 사회적 공간도 필요하다. 혼자만 존재하는 나날은 고독과 우울을 낳는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다는 심리 자체가 오히려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거칠게는 ´군중 습성´(무리짓기)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다만, 그 간섭을 최소화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같이 있으되 혼자 있는 것이고, 혼자 있으되 같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커피전문점에서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 대화는 솔로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수다를 많이 떨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화는 다른 공간에서도 할 수 있지만, 커피전문점에서는 대화에서 발생하는 노이즈를 의식하는 도서관이나 사무실과 다르게 신경을 덜 써도 된다. 사무실보다 더 부드러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업무 수행이 더 높을 수도 있다.
결국 사람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사람 사이에서 존재적 의미를 확인할 뿐만 아니라 창조를 할 수 있다. 작가들이 이러한 커피전문점을 찾는 것은 바로 세상과의 소통을 구가하기 위한 필사적인 돌파구이기도 하다. 더구나 많은 커피전문점이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목이 좋은 곳에 있는 것은 더 좋은 장점이 된다. 창작과 생산의 영감과 아이디어는 바로 개방과 소통의 공간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구획과 격리의 도시공간에서 커피전문점은 그러한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점들이야 예전에도 있었다면 다른 점도 지적되었다. 최근에는 무료인터넷을 통해 커피전문점이 디지털 공간화 되었다. 이 점 때문에 더욱 방문자가 늘어난 감이 있다. 코피스족들은 전기코드 탭을 찾아 보이지 않는 경쟁을 벌이기도 하고, 업체에서는 콘센트 등을 늘리는 작업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있다. 회전율과 홍보 효과 사이의 딜레마다. 한쪽에서는 회전율을 의식해 다시 폐쇄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손님의 외연을 확대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대세는 당분간 무료 인터넷설치의 확장이다.
무엇보다 커피전문점은 문화콘텐츠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커피전문점에는 최고의 실내디자인이 적용된다. 종업원이 입은 유니폼에서 컵과 그릇, 의자와 탁자는 물론 메뉴판에 이르기까지 디자인의 총채이다. 실내에 흐르는 음악은 치밀하게 선택된 것이고,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 조명도 엄선되었다. 커피도 그냥 카페인을 흡수하기 위한 매개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기호들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속에서 창조와 생산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쨌든 창작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창조적 콘텐츠나 생산물, 성과물도 마찬가지다. 고립무원의 공간에서 산출되는 것은 한계가 많다. 비대면성의 재택근무는 한계가 분명하다. 디지털과 공간, 문화컨텐츠가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를 코피스족 현상에서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제도안으로 정착시키는 창작공간이든, 일반 조직안의 공간이든 이러한 코피스족 현상을 눈여겨 볼 필요는 있겠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