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 칼럼>한국사회, 마초남이 부활하는가?
2010.07.08 09:43
[김헌식 문화평론가]영화 < 하녀 > (2010)에서 주인집 남자(이정재)는 드라마 < 제빵왕 김탁구 > 의 주인집 남자(전광렬)와 같이 모두 자신의 아이에 대한 책임 의식이 강하다. 실제로 자신의 많은 아이를 거느리고 있기도 하다. 다만 영화 < 하녀 > 의 주인집 남자는 하녀(전도연)에게서 자신의 아이를 얻지 못했지만, < 제빵왕 김탁구 > 에서 주인집 남자는 하녀격인 여성(전미선)에게서 자신의 DNA가 이어진 사내아이를 얻는다.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이가 많은 것은 가장의 능력을 의미했다. 능력이 없는 남성은 결혼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식을 많이 갖지도 못했고 갖는다고 해도 유지할 수가 없어서 잃은 일이 빈번했다. 이럴때 가장의 지위와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된다.
대가족을 거느릴만한 능력을 지닌 남자는 당연이 그 권위와 지배권을 인정받을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그 능력에 기대어야 하는 여성들의 발언권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남성 가장에게는 책임과 의무감이 따랐다. 적어도 자신의 아내와 자녀는 스스로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가정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도 자식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는 남성은 남성답지 못한 것이었다. 물론 생물학적으로는 자신이 낳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책임지려한다는 주장도 있다.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남성일수록 자녀에 대한 책임을 질 수가 없는 상황에서는 여성도 생계에 적극 나서야 하기 때문에 남성들은 더욱 자식이나 아내에 대한 책임의식이 낮아질 수 있다. 최근에 반짝 주목을 받았던 토이남이나 초식남은 바로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토이남이나 초식남은 여성에 대한 배려라든지 품격높은 매너와 감각을 지녔지만, 결혼에 대한 관심이 없다. 단적으로 결혼을 통해 가족을 책임지기 싫은 것이다. 이러한 점은 사회경제적인 원인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고도의 경제성장 시기에는 사회적인 지위와 부가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성취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저성장의 시대에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이나 한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아예 남성들의 삶의 목적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인 성공이나 지위의 성취가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기피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전에는 결혼을 통해 가부장적인 지위라도 보장이 되었지만, 남녀 성평등에 대한 인식의 확산으로 그러한 것도 제대로 누릴 수가 없다. 아이에 대한 책임을 지려하기 보다는 현재 지금의 자신에 더 충실하려 한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배려에만 치우치는 사람은 결국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영화 < 하녀 > 나 드라마 < 제빵왕 김탁구 > 에서 주인집 남성의 권위와 지위는 확고하다. 그것은 경제력의 힘이다. 드라마 < 제빵왕 김탁구 > 의 아버지는 자칫 미혼모의 아이로 천덕꾸러기가 될 탁구를 자신의 아이라면 당당하게 밝히고 장래를 책임지려 한다. 영화 < 하녀 > 의 주인집 남자도 어느 누구도 자신의 아이를 허락없이 건드릴 수 없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경제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핏줄에 대한 책임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초식남이나 토이남과는 다르다. 특히 김탁구의 아버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피에 대한 끈끈한 유대만이 아니다.
농경사회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이 평생 겪은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한다. 아들은 그것을 당연히 받아들였다. 앞으로 살아가는데 요긴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산업화 시대를 겪으면서 농경시대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거부의 대상이 되었다. 농경시대의 삶의 경험과 직업적 노하우들은 산업시대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화 시대의 아버지들이 겪은 경험과 쌓은 노하우들은 아들에게 반드시 이어질수도 없었다. 아버지의 삶과 아들의 삶이 많아 달려졌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직업과 아들의 직업이 같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산업화 시대의 삶의 경험은 정보화 시대에는 더욱 더 적응할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서 소통의 부재를 낳았다. 아버지는 더이상 아들의 꿈과 희망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최소한의 교육과 양육을 위해 돈을 많이 벌어오는 것이 아버지들에게 부여된 특명이다.
하지만 드라마 < 제빵왕 김탁구 > 에서 아버지는 더이상 그러한 존재가 아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김탁구는 제빵에 대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고 이를 알아본 아버지는 탁구에게 남다른 애정을 보이게 된다. 아버지는 자신이 갖고 있는 제빵의 노하우를 아들에게 전수해주는 것은 단순히 가업을 잇는 것만이 아니라 단절되었던 소통을 열어가는 것과 같다.
세대간의 부정은 비단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 < 찬란한 유산 > 에서 이승기는 할머니가 설렁탕집을 고수하는 것을 반대하고 훼밀리레스토랑을 만들겠다고 한다.
드라마 < 제빵왕 김탁구 > 에 등장하는 아버지에 어떤 대중심리가 투영되어 있는지 정리해보자. 자신의 자식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는 남성들을 원하고 있다. 그것은 여성의 대중심리를 겨냥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용불안의 상황에서 여성들의 관심사는 자신과 자녀들은 안정적으로 책임져줄 수 있는 남편일 것이다. 적어도 결혼을 하려 한다면 말이다. 이는 페미니즘에서는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진화생물학자들이 보기는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남성의 책임은 소통과 사랑에 기반을 두는 것이지 소유와 지배 그리고 과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영화 < 하녀 > 에서는 그러한 남성을 놓쳐버린 것에 대한 대응으로 연이(전도연)가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기까지 한다. 그러한 행동에 대한 이견은 분분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이 단순히 지배 우월의 캐릭터인 마초남은 아닐 것이다.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원하기 때문이다. 짐승남의 한계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의 현재를 짚어 볼 때 아이를 잘 낳아 잘 기를 수 없는 사회야말로 불행하다.
드라마와 영화와 같이 부유한 대기업의 가정만이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심리라면 우리사회의 미래를 밝게 하지는 못한다. < 제빵왕 김탁구 > 나 < 하녀 > 의 이미지가 좋은 것만은 아닌 이유다. 무엇보다 가정과 자녀에 대한 책임을 남성 개인만의 경제적 능력에 모두 책임 전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에서 다룬 대중심리에 투영된 점은 하루 빨리 우리사회의 정책이 아이를 안심하고 잘 낳아 온전히 기를 수 있는데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이가 많은 것은 가장의 능력을 의미했다. 능력이 없는 남성은 결혼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식을 많이 갖지도 못했고 갖는다고 해도 유지할 수가 없어서 잃은 일이 빈번했다. 이럴때 가장의 지위와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된다.
대가족을 거느릴만한 능력을 지닌 남자는 당연이 그 권위와 지배권을 인정받을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그 능력에 기대어야 하는 여성들의 발언권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남성 가장에게는 책임과 의무감이 따랐다. 적어도 자신의 아내와 자녀는 스스로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가정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도 자식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는 남성은 남성답지 못한 것이었다. 물론 생물학적으로는 자신이 낳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책임지려한다는 주장도 있다.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남성일수록 자녀에 대한 책임을 질 수가 없는 상황에서는 여성도 생계에 적극 나서야 하기 때문에 남성들은 더욱 자식이나 아내에 대한 책임의식이 낮아질 수 있다. 최근에 반짝 주목을 받았던 토이남이나 초식남은 바로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토이남이나 초식남은 여성에 대한 배려라든지 품격높은 매너와 감각을 지녔지만, 결혼에 대한 관심이 없다. 단적으로 결혼을 통해 가족을 책임지기 싫은 것이다. 이러한 점은 사회경제적인 원인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고도의 경제성장 시기에는 사회적인 지위와 부가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성취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저성장의 시대에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이나 한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아예 남성들의 삶의 목적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인 성공이나 지위의 성취가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기피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전에는 결혼을 통해 가부장적인 지위라도 보장이 되었지만, 남녀 성평등에 대한 인식의 확산으로 그러한 것도 제대로 누릴 수가 없다. 아이에 대한 책임을 지려하기 보다는 현재 지금의 자신에 더 충실하려 한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배려에만 치우치는 사람은 결국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영화 < 하녀 > 나 드라마 < 제빵왕 김탁구 > 에서 주인집 남성의 권위와 지위는 확고하다. 그것은 경제력의 힘이다. 드라마 < 제빵왕 김탁구 > 의 아버지는 자칫 미혼모의 아이로 천덕꾸러기가 될 탁구를 자신의 아이라면 당당하게 밝히고 장래를 책임지려 한다. 영화 < 하녀 > 의 주인집 남자도 어느 누구도 자신의 아이를 허락없이 건드릴 수 없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경제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핏줄에 대한 책임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초식남이나 토이남과는 다르다. 특히 김탁구의 아버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피에 대한 끈끈한 유대만이 아니다.
농경사회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이 평생 겪은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한다. 아들은 그것을 당연히 받아들였다. 앞으로 살아가는데 요긴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산업화 시대를 겪으면서 농경시대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거부의 대상이 되었다. 농경시대의 삶의 경험과 직업적 노하우들은 산업시대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화 시대의 아버지들이 겪은 경험과 쌓은 노하우들은 아들에게 반드시 이어질수도 없었다. 아버지의 삶과 아들의 삶이 많아 달려졌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직업과 아들의 직업이 같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산업화 시대의 삶의 경험은 정보화 시대에는 더욱 더 적응할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서 소통의 부재를 낳았다. 아버지는 더이상 아들의 꿈과 희망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최소한의 교육과 양육을 위해 돈을 많이 벌어오는 것이 아버지들에게 부여된 특명이다.
하지만 드라마 < 제빵왕 김탁구 > 에서 아버지는 더이상 그러한 존재가 아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김탁구는 제빵에 대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고 이를 알아본 아버지는 탁구에게 남다른 애정을 보이게 된다. 아버지는 자신이 갖고 있는 제빵의 노하우를 아들에게 전수해주는 것은 단순히 가업을 잇는 것만이 아니라 단절되었던 소통을 열어가는 것과 같다.
세대간의 부정은 비단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 < 찬란한 유산 > 에서 이승기는 할머니가 설렁탕집을 고수하는 것을 반대하고 훼밀리레스토랑을 만들겠다고 한다.
드라마 < 제빵왕 김탁구 > 에 등장하는 아버지에 어떤 대중심리가 투영되어 있는지 정리해보자. 자신의 자식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는 남성들을 원하고 있다. 그것은 여성의 대중심리를 겨냥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용불안의 상황에서 여성들의 관심사는 자신과 자녀들은 안정적으로 책임져줄 수 있는 남편일 것이다. 적어도 결혼을 하려 한다면 말이다. 이는 페미니즘에서는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진화생물학자들이 보기는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남성의 책임은 소통과 사랑에 기반을 두는 것이지 소유와 지배 그리고 과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영화 < 하녀 > 에서는 그러한 남성을 놓쳐버린 것에 대한 대응으로 연이(전도연)가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기까지 한다. 그러한 행동에 대한 이견은 분분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이 단순히 지배 우월의 캐릭터인 마초남은 아닐 것이다.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원하기 때문이다. 짐승남의 한계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의 현재를 짚어 볼 때 아이를 잘 낳아 잘 기를 수 없는 사회야말로 불행하다.
드라마와 영화와 같이 부유한 대기업의 가정만이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심리라면 우리사회의 미래를 밝게 하지는 못한다. < 제빵왕 김탁구 > 나 < 하녀 > 의 이미지가 좋은 것만은 아닌 이유다. 무엇보다 가정과 자녀에 대한 책임을 남성 개인만의 경제적 능력에 모두 책임 전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에서 다룬 대중심리에 투영된 점은 하루 빨리 우리사회의 정책이 아이를 안심하고 잘 낳아 온전히 기를 수 있는데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