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중가요사

[우리시대의 명반·명곡]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1. 8. 7. 12:48

'들국화' 출신 드러머, 다채로운 사운드로 '사랑' 노래



[우리시대의 명반·명곡] 주찬권 2집(1990년) '나 이제 너에게'

예술성을 지향하는 뮤지션들의 음악은 어려운 마니아용으로 치부되어 폭넓은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 치명적 한계가 있다. 모든 창작자에게 내용과 형식 즉 작품성과 대중성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둘은 영원히 맞닿을 수 없는 기차의 레일 같다. 작품성을 추구하면 대중성이 떨어지고 대중성을 추구하면 작품성이 떨어지는 악순환 말이다.

묵직한 드럼 비트와 선 굵은 남성적 이미지가 매력적인 <들국화>출신 주찬권은 한국 드러머 계보에서 각별한 존재다. 최고의 연주력은 기본이고 창작, 노래, 프로듀싱, 편곡능력까지 보유한 멀티 플레이어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느 밴드에서나 드러머는 가장 뒤 쪽에 위치할 뿐 아니라 음악적으로 리듬을 담당하는 보조적인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요즘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노래하는 가수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쳐지는 왜곡된 대중음악계의 환경에서 밴드의 드러머가 대중적으로 조명을 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넘치는 음악성을 담보했지만 주찬권이 <들국화>의 리드보컬 전인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중적 조명을 받지 못한 이유는 그 지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솔로 1집의 음악적 성과에 힘입어 2년 뒤인 1990년 기대감 속에 발표된 주찬권 2집은 음반 발매초기에 도매상에서 품절사태가 빚어졌던 히트 앨범이다. 1집보다 더욱 진보된 음악성과 환상적인 사운드는 무려 14명에 달하는 당대 정상급 세션들과 조동익의 편곡작업이 더해지며 가능했다. 세션 맨들의 면모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기타만 해도 주찬권과 더불어 최구희, 손진태, 신윤철, 조준형, 김의석등 무려 6명이 참여했고 피아노와 신디사이저도 당대 최고라 할 수 잇는 록밴드 '11월'의 김효국, 한송연, 김현철등 3명, 그리고 베이스 강상영, 드럼과 퍼커션에 주찬권과 배수연, 코러스도 들국화 멤버 최성원, 장필순, 김현철, 김용덕등 4명이 참여했다.

주찬권은 노래마다 자신의 목소리를 힘주어 주장하는 보컬리스트는 아니다. 다양한 리듬 패턴과 사운드의 하모니를 중시하는 연주의 구성을 추구하는 뮤지션 스타일이다. 은유적인 가사작법이 빛나는 2집은 주찬권이 왜 우리시대의 중요한 아티스트로 정당한 대접을 받아야 되는지를 입증하는 명반이다. 앨범의 화두는 대중음악의 해묵은 주제인 '사랑'이다. 하지만 주찬권은 이 진부한 주제의 한계를 다채로운 사운드를 통해 극복했다. 첫 트랙 '새 한 마리'의 탄탄한 멜로디와 풍성한 사운드는 애절한 주찬권의 보컬과 합체되며 아련한 추억으로 인도하는 애절한 감성이 범상치 않은 명곡이다. 리듬감 있는 키보드와 기타 연주가 인상적인 브리티쉬 록 '나 이제' 또한 감칠맛이 나는 여성 코러스와의 앙상블이 근사하고 '별이 빛나고' 또한 탁월한 리듬감을 뽐낸다.

이 앨범 최고의 명곡인 '너에게'는 연주, 보컬, 멜로디, 가사 어느 것 하나 빠트릴 게 없는 매력덩어리다. 서정적 피아노로 시작하는 인트로는 죠지 윈스턴의 그것에 비견할만하고 심플한 편곡은 윌리엄 에커맨의 뉴 에이지 향내까지 느끼게 한다. 이 앨범의 하이라이트는 세계적인 프로그레시브 연주자 '기타로'의 연주곡 '실크로드'를 연상시키는 프로그레시브 록의 정수를 들려준 '길'과 연결곡인 연주곡 '고향을 찾아서'다. 청자에게 휴식을 안겨주듯 다정하게 이야기를 걸어오는 주찬권은 한층 무르익은 가창력으로 이 모든 음악에 맛깔을 더해낸다. 주찬권식 사랑노래인 '그대 생각'과 '우리 서로'는 누군가가 그리운 날 들으면 제격이다. '내 맘에 불을'은 은근히 댄스본능을 자극시키는 경쾌한 리듬비트가 인상적이다.

주찬권은 록을 위해 태어난 뮤지션이다. 또래들이 한창 동요를 부를 나이인 5살 무렵부터 형에게서 기타를 배웠고 초등학교 4학년 때 드럼 스틱을 잡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눈을 팔지 않고 묵묵하게 음악인생을 걸어온 그는 1974년 '뉴스 보이스', 1978년 '믿은 소망 사랑', 1983년 '신중현과 세 나그네', 1985년 '들국화'에 이르는 동안 언제나 록과 함께했다. 척박한 현실에도 꺼지지 않는 그의 장인 정신에 박수를 보낸다.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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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명반·명곡] 시대 상황과 맞물려 대중에 '카타르시스'선사



펑키 리듬이 탁월했던 '한동안 뜸했었지'와 흥겨운 디스코 풍의 '장미'를 발표해 밴드로는 이례적으로 빅 히트를 터트린 <사랑과 평화>는 2집 이후 내우외환으로 한동안 공백기를 맞았다.

1988년에 발표한 3집은 록밴드를 '그룹사운드'로 불렀던 마지막 시대를 장식하며 시대의 명곡 '울고 싶어라'를 탄생시켰다. 이 노래는 1집 녹음 후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밴드를 떠나 경기도 용인에서 농사를 짓고 지내던 이남이가 재합류해 발표했던 노래다.

총 10곡이 수록된 3집의 타이틀곡은 '울고 싶어라'가 아니라 최이철 곡 '노래는 숲에 흐르고'다. 최이철의 가성 창법과 멤버들의 코러스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곡은 귀에 감겨오는 멜로디가 탁월하지만 '작은 손 모두 위', '젖은 눈길은'과 같은 다른 수록곡들에서 느껴지듯 대부분 재기 발랄했던 과거의 리듬 터치와 실험적 음악성보다는 삶을 관조하는 느릿한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다. 호루라기 소리가 파워풀하고 경쾌한 '불의 나라'와 한국적 장단을 떠올리는 연주곡 '한문과 한글' 정도가 참신한 실험성을 담보한 곡이다.

이 앨범의 뜨거운 감자는 단 한 곡을 부른 이남이의 애절한 소울풍의 노래 '울고 싶어라'다.

'일밤' 출연뒤 빅히트

직접 창작한 이 노래가 대중적 파급력을 획득한 것은 우연한 기회로 찾아왔다. 음반 발표 후 밤무대에서 이남이의 노래를 들은 MBC PD가 감흥을 받아 당시 지상파 TV의 인기 음악프로그램 '일요일 밤의 대행진'에 출연을 주선했던 것이다. 벙거지를 눌러 쓴 이남이의 별난 외모와 독특한 무대는 화제를 몰고 왔다. 방송 출연 뒤 '울고 싶어라'가 수록된 3집은 발매 2개월 만에 7만장이 넘게 팔려나가는 대박 행진을 벌였다.

1988년은 서울올림픽과 국회 청문회로 온 나라가 들끓었던 해다. 청문회장에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을 앉혀 놓고 날카로운 질문을 했던 고 노무현 대통령이 깜짝 스타로 등장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벙거지를 쓴 초라한 행색의 이남이가 처절하게 부른 '울고 싶어라'는 마치 청문회에 불려 나와 초선 국회의원에게 수모를 당하던 거물 인사들의 처지를 풍자하는 상황과 절묘하게 대입되었다.

'5공 청문회' 풍자

사실 이 노래는 <사랑과 평화>가 멤버들 사이의 불화와 이런 저런 문제로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했을 때의 참담한 심정을 담은 노래다. 처연하고 슬픈 이 노래는 5공 청문회라는 시국 상황과 맞아 떨어져 오히려 코믹한 노래로 화학 작용하며 당대 대중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 당시 전국의 길거리는 온통 이남이의 '울고 싶어라'로 점령 당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고교 선후배 키 차이를 팀 이름으로

[우리시대의 명반·명곡] 남성듀오 '10cm' 'The First EP' 下 (2010년)

총 5곡 수록… 'Good Night' 백미

'10cm'의 첫 EP는 2010년 Mnet 아시안 뮤직 어워드 올해의 발견상, 2011년 제8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팝 노래 부문을 수상했다.

이 음반은 소위 가내수공업공법으로 제작한 열악한 음반이다. 그래서 심플하고 거친 사운드는 평단으로부터 표현 가능한 음악의 범위가 협소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솔직히 EP는 녹음의 질은 물론이고 부클릿의 내용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어쩌랴! 요즘 같은 디지털 세상에서 이 정도로 탁월한 서정성과 독특한 개성이 담긴 노래는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으니.

얼핏 욕설을 연상시키는 묘한 뉘앙스의 팀 이름 '10cm'는 보컬 권정열과 기타 윤철종 두 사람의 키 차이라고 한다. 경북 구미에 소재한 고등학교의 선후배로 만난 두 사람은 음악을 함께하기 위해 군대도 같이 간 십년지기다.

군 제대 후 무작정 상경해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은 온갖 오디션과 행사와 공연장을 찾아다녔다. 시골에서 올라왔다지만 뉴욕 맨해튼 스타일을 지향하는 이들의 깔끔한 캐릭터와 로맨틱한 음악들은 곧 여성 팬들을 중심으로 강력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남성듀오 '시인과 촌장'의 데뷔앨범이 그랬듯 이들의 첫 EP에도 여러 가지 음악 어법이 혼재되어 있다. 음악적 탐색기였던 '시인과 촌장'처럼 이들도 자신들만의 음악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로에 있다는 증명이다.

첫 EP에는 총 5곡이 수록되어 있다. 눈 나리는 밤 무일푼 신세인지라 골방에 쳐 박혀 혼자듣기에 제격인 포크 질감의 서정성이 돋보이는 '눈이 오네'를 시작으로 기타와 젬배 두 악기만으로도 놀라운 리듬을 구현하는 '새벽 4시', 터프하고 독특한 개성이 매력적인 'Healing'으로 이어진다.

극한의 서정적 감흥으로 청자의 귀를 잡아끌어 한동안 아무 것도 못하게 정지시키는 'Good Night'은 이 앨범의 백미다. 정규앨범에서 완성된 버전을 다시 들려준 로우 파이 질감의 보너스트랙 '죽겠네'까지 빼놓을 곡이 없다.

정규앨범을 들어보니 우선 윤기가 도는 사운드에다 재기발랄한 노래의 역동성과 솔직한 일상의 감정을 전달하는 내밀한 가사의 매력 또한 여전해 반갑다. 석고를 제작해 만든 독특한 이미지의 재킷 디자인 구성은 물론이고 EP에서 지적받았던 결점들이 깔끔하게 정돈된 느낌이다.

문제는 EP에서 경험한 심플한 사운드의 여백을 통해 빛을 발한 맛깔난 보컬과 어쿠스틱 기타의 서정적 매력이 사라진 점이다. 과연 웰메이드 음악은 사운드가 세련되고 풍부해야만 되는 것일까?

그 지점에서 10cm의 EP와 정규 앨범 중 어느 음반의 손을 들어줄 지 고민스러웠다. 전체적인 앨범의 구성이나 녹음의 질감 그리고 대중적 성과는 1집이 우월하지만 처음이라는 신선함, 날 것 그대로의 자연스런 개성이 발휘한 긴 여운의 음악적 감흥은 EP가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10cm의 첫 정규앨범 '1.0'은 발매와 동시에 초도 1만장이 팔려나가는 기염을 토했다. 정규 앨범이전의 히트곡들을 앨범에 넣지 않은 이유에 대해 "시도해보고 싶은 음악이 더 많기 때문"이라는 대답은 지금 이들은 창작의 물꼬가 트여있음을 말해준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미워하고, 무언가를 갈망하는 일상의 세속적 감정들은 모두에게 공통적인 정서다. 정규앨범은 관능적인 내용을 유머러스하게 뽑아내는 개성이 넘쳐난다.

주변의 일상적인 소재들을 야릇하게 부각시키는 이들의 은근히 노골적인 노래는 자칫 느끼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귀엽고 유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변함없이 진지한 음악적 태도 때문일 것이다.

'10cm'는 여성의 스타킹을 노래한 첫 트랙 '킹스타'부터 지인들의 눈물을 쏙 뺐다는 타이틀곡 '그게 아니고', 대중적으로 큰 인기몰이를 한 자신들의 아지트를 소재로 한 '사랑은 은하수 다방에서', '어디까지 야할 수 있나'를 시험해 보았다는 'Beautiful'까지 한국대중음악사상 처음으로 노래를 얼마나 야하게 부를 수 있는 가를 시험하는 중이다.

좋은 노래를 생산하고 그 노래를 사랑하는 대중까지 넘쳐나니 이들의 향후 음악행보는 한동안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것 같다.



포크송 전 국민으로 확대시킨 일등 공신

[우리시대의 명반ㆍ명곡] 남성듀오 어니언스 '편지'(1973년)

청소년층에 '펜팔 열풍' 일으키며 빅히트

디지털 세상이 되면서 사라지고 있는 것들은 무수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편지다. 과거 아날로그 시절, 사람과 사람간의 소통을 상징했던 편지는 이제 이메일과 핸드폰 문자에 밀려 우리의 실생활에서 사실상 사라졌다.

컴퓨터 좌판으로 글을 쓰는 요즘, 깨알처럼 또박또박 편지지를 가득 써내려갔던 편지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니 문뜩 그리운 이들에게 편지를 써 우표에 침을 발라 보내고 싶은 충동이 방망이질 친다.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말로 하는 것 보다 편지로 보내는 것이 진실 된 느낌을 더 강력하게 전달하는 경향이 있다. 당대의 드라마와 영화를 보면 방안 가득히 버려진 편지지가 나뒹구는 장면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짝사랑하는 이웃집 여학생이나 오빠, 누나에게 근사한 연애편지를 보내고 싶어 밤 세워 편지를 써보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 글씨체가 예쁘고 문장이 수려한 친구들은 꽤나 인기가 있었다.

연애편지 전문가 친구에게 부탁해 어렵게 연애편지를 완성해도 전달할 용기가 없어 그냥 책가방 속에 결국 묵혔던 그 시절의 순수함이 무척이나 그립다.

지금은 듣고 싶은 노래나 사연을 방송국의 홈페이지에 올리거나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보낸다. 과거엔 몇 개 되지 않았던 방송 음악프로그램에 자신의 사연과 신청곡이 채택되기 위해선 눈물 나도록 공을 들여야 했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담은 장문의 편지는 기본이고 다른 이들과 차별되는 독특하고 예쁜 엽서를 만들기 위해 손수 그림을 그리고 근사한 시까지 써 보냈다.

어쩌다 보낸 엽서가 채택되어 신청곡과 사연이 방송에 소개되는 날이면 학교에 소문이 자자하게 났을 정도였다. 이에 각 방송국은 애청자들이 보낸 예쁜 엽서 편지들을 모아 전시회까지 경쟁적으로 열었다.

지금은 희귀해진 편지지만 70-80년대에는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학생층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국내외 펜팔 전성시대였던 당시 대중가요나 팝송 노래책 그리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 뒤쪽을 보면 펜팔을 원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주소가 끝도 없이 담겨있었다.

애인 원함, 친구 원함, 오빠 원함, 진실한 펜 벗 원함 등 원하는 상대 또한 다양했었다. 시대적 트렌드에 민감한 대중가요의 장르적 특성상 편지가 그 시절 노래의 중요 소재로 사용된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임창제, 이수영으로 구성된 남성듀오 어니언스의 빅 히트곡 '편지'는 청소년층에 펜팔 문화 열풍을 가속화 시킨 한 명곡이다. 건장하고 노래 잘 부르는 임창제와 잘생긴 이수영의 절묘한 조합은 '포크 전성시대의 종결자'라 불릴 만 했다.

트윈폴리오, 한대수, 김민기등 1세대 포크가수들이 학생층을 기반으로 한 엘리트층에 한정된 지지계층을 형성했다면 어니언스는 지지계층을 파괴하며 포크송의 수용대상을 전 국민으로 확대시킨 일등 공신이다. 어니언스의 뿌리는 보컬그룹 <히치 하이커>다.

1971년 진석황과 함께 남성듀오 히치 하이커를 결성해 활동했던 이수영은 임창제의 음악성이 마음에 들어 여성 멤버 윤혜영과 함께 혼성 트리오로 체질개선을 했다.

<어니언스> 즉 '양파들'이란 팀명은 주간한국 연예기자출신인 정홍택의 근사한 작명이다. 1972년 TBC 신인가요제에 출전한 트리오 어니언스는 대상을 수상하며 단숨에 주목받는 신인보컬그룹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팀 운영상의 문제로 곧 남성 듀오로 재편되었다.

1973년 발매된 '편지'를 비롯해 '작은새', '저별과 달을'등이 수록된 어니언스의 첫 독집은 포크음반 사상 최고의 신화를 남겼다. 특히 '편지'는 그해 동경가요제 본선에 진출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리듬감 넘치는 전자음악을 포크에 접목해 포크송의 수용 층을 확대시킨 이 앨범의 편곡자 안건마의 이름 또한 기억할 가치가 충분하다.

<편지>는 발표당시에는 헤어진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애틋한 메신저 역할을 해냈고 지금은 아날로그 시절의 편지에 대한 추억을 되살려주는 명곡으로 각인되었다.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포크+클래식+국악’ 접목 꿈꾸는 포크계 거장 김의철

[서울신문]“국내 대중음악에서 감동이 사라진 지 오래됐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정서를, 다시 음악에 담아야죠.” 포크의 거목 김의철(53)의 말이다. 누구나 할 수 있을 법하다. 혹은 순수를 내건 또 하나의 상업주의적 발언일 수 있음에도, 그의 말이기에 무게감이 더한다. 왜? 그가 걸어온 길을 보면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다.1970년 YWCA 청소년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였던 청개구리 음악회. 음악에 소질이 있던 대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노래하는 자리였다. 10개월 정도, 어찌보면 짧은 순간이었으나 통기타로 상징되는 청년 문화를 싹틔웠고, 김민기 양희은 서유석 등 한국 포크 1세대의 출발점이 됐다.

국내 대중음악계에 청개구리가 다시 울음을 터뜨린 것은 2003년 여름부터. 상업주의와 타협하지 않는 언더그라운드 포크 뮤지션들이 모였다. 나날이 가벼워지는 가요계 풍토에서 깊이 있는 음악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이 중심에 바로 김의철이 있었다. 아티스트보다는 엔터테이너가, 음악에 대한 진정성보다는 상혼이 범람하는 현실에서 ‘청개구리’라는 이름 자체가 던지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김의철은, 이정선 한영애 이광조 이주호 등을 배출했던 1970년대 또 하나의 청년 문화 산실 해바라기를 이끌었다. 고등학교 때 만든 노래들을 담은 데뷔 앨범 ‘김의철 노래모음’(1974)은 검열 때문에 판매금지됐지만 명반으로 기록됐다.‘저 하늘에 구름따라’(원제 불행아)는 이후 양희은 양병집 고(故) 김광석 등이 다시 부르며 시대를 뛰어넘은 명곡이 됐다. 그가 73년 만들었던 ‘군중의 함성’도 80년대 민중이 모였던 곳이면 언제나 불렸던 노래. 그런 그가 1980년 음악을 공부하러 훌쩍 외국으로 떠난 뒤 16년 만에 귀국하고서는 3년 전부터 청개구리 공연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지난달 28일 경기도 파주에서 옆집 아저씨같이 푸근한 인상의 그를 만났다.EBS스페이스가 마련한 기획공연 ‘우리가 그들을 거장이라고 부르는 이유’에 초대돼 이틀간 무대에 오른 직후였다.30일 열릴 이정선과의 공연을 준비하고 있던 김의철은 “최근 인후염에 걸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는데 공연을 무사히 치러내고 있어 다행”이라고 운을 뗐다.

국내 대중음악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역사로 따지면 외국 문물이 한꺼번에 밀려와 혼란스럽던 1910년대 상황과 비슷하다고 했다.

“지금은 엔터테이너가 넘쳐나 재미있는 것만 찾아다니고 있죠. 돈이 되는 음악만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음악은 감동과 삶이 묻어나야 합니다. 사람들이 음악으로 영혼을 살찌우거나 위로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워요.”

포크와 클래식을, 나아가 국악을 접목시키고 한국인의 한(恨)과 그리움을 담은 월드 뮤직을 꿈꾸고 있는 그는 청개구리 공연을 통해 이성원 김두수 이용복 오세은 등 묻혀버린 포크 가수들을 다시 세상으로 끌어내고 있다.“음악을 위해 고물상을 하고, 약초도 캐는 뮤지션들도 있어요. 고난과 고통은 자양분이에요. 편해지면 예술로서의 음악은 끝나버립니다. 청개구리 무대는 구도자의 길을 걷는 뮤지션들의 안식처로, 음악을 문화 유산으로 남기는 공간으로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눈빛은 강렬했다. 좋은 음악은 꽃 향기처럼 저 멀리까지 은은하게 퍼져 가고, 듣는 이가 저항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강조했다. 언젠가 고등학교를 찾았는데 호응이 좋았단다. 수많은 세월을 살아남았던 노래가 젊은이의 마음과 가슴에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는 그의 미소를 보며 청개구리가 더욱 크게 울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가, 가뭄에 마르지 않는 샘이 깊은 물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글 사진 파주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맑고 깨끗한 화음의 여대생 포크 듀엣



[우리시대의 명반·명곡] 현경과 영애 1집 <아름다운 사람> (1974년)

답답한 70년대 정화시킨 세레나데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부터 걸 그룹들은 귀엽고 청순한 외모에 달콤한 화음을 구사하는 노래뿐 아니라 섹시한 춤과 의상으로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왔다.

그런 점에서 서울대 미대 여대생 2명으로 구성된 <현경과 영애>는 이질적인 걸 그룹이다. 본격적으로 방송활동도 하지 않았고 섹시한 춤과 외모로 승부하지도 않은 단 한 장의 음반을 발표했을 뿐인 이들이 왜 한국 포크역사에서 전설적으로 회자되는 것일까?

1974년에 발표된 <현경과 영애>의 유일한 독집은 상업화 되지 않은 맑고 순수한 1970년 포크의 원형질을 담고 있는 결정체다. 이미 상업포크가 대중음악계를 지배했던 당시, 아마추어적 풋풋함과 뛰어난 세션이 결합된 놀라운 음악적 성과는 그 유례가 흔치 않다.

1971년 서울대 신입생 환영회 때 미대 신입생 장기자랑 대표를 자원하면서 이들의 짧은 역사는 태동했다. 성격은 판이했지만 두 사람이 빚어낸 맑고 깨끗한 화음은 7년 간 단짝으로 붙어 다니게 만들만큼 아름다웠다.

당시 스타 포크가수들이 TV, 라디오, 생음악 살롱, 각종 공연무대를 종횡무진 점령했을 때, 현경과 영애는 음악 동료들의 공연과 라디오 방송에 찬조 출연 그리고 대학 축제무대로 활동반경을 스스로 제한했다.

명품 포크음반으로 평가받는 이들의 독집은 데뷔작이면서 대학 시절의 음악 활동을 정리하는 일종의 은퇴기념음반이다. 이 음반은 70년대의 포크 걸작들을 무수하게 생산해낸 오리엔트 나현구 대표의 기획 작품이다.

처음 '현경과 영애'는 평소처럼 아름다운 화음으로 포크질감이 물씬 배어나는 노래를 부르고 싶었지만 '단순한 화음이 맑고 긴 생명력을 지닌다'는 나사장의 제안으로 음반은 음악적으로 변화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화음 구사 창법을 버리고 때로는 번갈아 노래하고, 때로는 같이 호흡하는 방식으로 노래했다.

녹음 때도 포크의 질감을 살리는 클래식 기타 세션을 원했던 두 사람의 생각과는 달리 강근식이 주도한 록밴드 '동방의 빛'이 세션을 맡았다. 이 지점에서 현경과 영애의 음반에 대한 음악적 평가는 청자에 따라 엇갈리게 된다.

편곡과 연주를 맡은 '동방의 빛'의 세션으로 음반이 나왔던 당시, 포크 애호가들은 '현경과 영애의 노래를 망쳤다'는 혹독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최근에는 "자칫 평이하게 드릴지도 모를 곡들은 다채로운 편곡과 구성으로 아기자기하게 변모했다."는 찬사로 엇갈린다.

분명한 것은 당대에 무그 음악으로 새 지평을 열었던 '동방의 빛' 세션은 음악성과 상업성을 포괄하는 나름 의미 있는 시도였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타이틀인 김민기 곡 '아름다운 사람'은 1절은 이현경이, 2절은 박영애가, 3절은 둘이 함께 부르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노래를 만든 김민기조차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최고의 노래'라고 감탄했다.

이 노래는 아름다운 가사와 더불어 느린 템포에 쉬운 코드로 진행되어 누구나 쉽게 통기타를 퉁기며 화음을 넣어 부를 수 있는 명곡이다. '세노야'의 작곡가로 유명한 서울음대생 김광희 곡 '나 돌아가리라' 역시 양희은이 노래한 '가난한 마음'으로도 널리 알려진 한국 포크의 명곡이다.

원곡을 넘어 현경과 영애만의 질감으로 재탄생되어 대중적 파급력을 보였던 '그리워라'는 스페인 보컬그룹 Mocedades의 'Adios Amor'가 원곡이고 페기 리의 캐롤 'O Ring Those Christmas Bells'이 원곡인 "종소리"는 폴카 리듬의 흥겨운 곡이다.

다채로운 화음과 코러스가 더해지면서 점점 템포가 빨라지는 밝고 경쾌한 '참 예쁘네요' 역시 피터 폴 앤 메리의 'Oh, Rock My Soul'을 번안한 곡으로 당대 청소년층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곡이다. 이현경의 자작곡 '님의 마음'과 '바다에서', 그리고 이장희가 작곡한 '눈송이'도 맑고 깨끗한 느낌의 좋은 노래들이다.

너무도 순수하고 티 없이 맑았던 여대생 포크듀엣 <현경과 영애>의 노래들은 70년대의 답답한 사회분위기를 정화시켰던 세레나데였다. 단순한 노래였지만 암울했던 당시 젊은이들의 영혼을 달래준 현경과 영애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감동이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기성세대 전유물 트로트 현대화 앞장

[우리시대의 명반ㆍ명곡] 주현미 '신사동 그 사람'(1988년)

젊은층까지 공감 '3대 가요상' 싹쓸이

1980년대 중반, 전국의 거리와 택시, 버스 같은 대중교통수단의 내부는 흥겨운 트로트 메들리 '쌍쌍파티'가 장악했었다.

옛 노래를 메들리로 리메이크해 국내를 장악했던 주현미의 노래는 공식수교 전 몰래 스며들어간 백두산과 조선족 마을에서도 쉴 틈 없이 흘러나왔다. 단순히 가수 개인에게 인지도를 안겨준 히트곡을 넘어 그 노래들은 고국을 그리워하는 이역만리 동포들의 향수를 달래준 의미심장한 가락이기도 했다.

그녀의 빅 히트곡 '비 내리는 영동교'와 '신사동 그 사람' 또한 신흥 유흥가로 떠올랐던 강남을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떠올렸고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던 80년대의 우울한 사회분위기에 지친 서민의 어깨를 다독여준 치유의 가락으로 승화되었다.

그녀는 4살 때인 1964년 전국을 강타했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듣고 단번에 불러 동네 어른들의 귀염을 한 몸에 받았던 노래신동이었다. 그녀의 큰 어머니가 50년대의 명곡 '댄서의 순정'을 부른 오리지널 가수 박신자란 사실도 흥미롭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 정식으로 노래공부를 했던 그녀는 1975년 홍보용으로 300장 제작한 데뷔음반을 발표했지만 학생신분이었기에 본격적인 활동은 80년대로 미뤄두었다.

주현미는 기성세대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트로트를 젊은 세대들까지 공감하는 장르로 영역을 확장시켰고 장르의 품격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한 가수다. 고음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풍부한 성량, 적재적소에서 꺾고 휘어지는 구성진 창법에 당대 대중은 트로트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지난 2009년 젊은 세대의 장르음악이 대세를 이루는 EBS 'SPACE 공감'에 초대받은 트로트가수는 그가 유일하다. 이는 그녀가 트로트 장르에 국한된 가수가 아닌, 보컬리스트로서도 가치가 크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1988년에 발표한 '신사동 그 사람'은 80년대를 대표하는 트로트 명곡이다. 당시 그녀가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부르면 10대 팬들이 함성을 터트리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현상이 일어났다. 트로트가 기성세대들의 전유물이었음을 상기하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체질개선이었다.

새로운 시도는 언제나 비난이 동반하는 법. '전통적으로 트로트 음악은 서민의 애환을 담아낸 느리고 슬픈 멜로디인데 '신사동 그 사람'은 다소 빠르고 경쾌한 리듬감으로 인해 장르의 품격을 잃고 가벼워졌다'는 일부 비난이 있었다.

당시 방송계는 한국사회의 급속한 성장에 발맞춰 느린 노래보다는 신나는 노래를 선호하는 흐름이 생성되고 있었다. 트로트도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같은 앨범에 정통 스타일의 애절한 곡 '비에 젖은 터미널'이 있었지만 대중의 선택은 마지막으로 끼워 넣은 '신사동 그 사람'이었던 것은 그 같은 시대적 변화를 증명한다. 당시 한참 뜨고 있던 '영동 붐'을 적적하게 반영한 시대상도 한 몫 단단히 했다.

폴카 리듬의 흥겹고 세련된 새로운 트로트 양식을 도입한 '신사동 그 사람'은 1988년 최고 인기가요로 선정되었고 당대의 '3대 가요상'으로 불리던 MBC 가수왕을 비롯해 KBS 가요대상 그리고 한국일보 골든 디스크 대상까지 싹쓸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 해에 3대 가요제를 휩쓴 가수는 트로트가수는 물론이고 전례가 없는 기록으로 지금껏 남아 있다.

트로트는 '뽕짝', '왜색가요'라고 폄하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유치한 가사와 시도 때도 없이 구사하는 '꺾기' 창법 때문에 경시하는 풍조는 여전하다. 하지만 대중음악의 시작과 함께 서민의 정서를 담아온 트로트가 한국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장르임을 부정할 대중은 아무도 없다.

힘차고 높은 음역대의 간드러지는 보컬을 구사하는 주현미는 트로트의 전통성을 지키면서도 촌스럽게 여기는 대중적 인식과 장르적 한계를 현대적이고 세련된 스타일로 변화시킨 '트로트의 현대화'에 지대한 공로를 세운 특별한 가수다.

그녀가 이미자의 대를 잇는 트로트 여왕으로 인식되는 것은 가수로서의 위대한 업적이전에 따뜻한 인간미와 겸손함을 겸비한 훌륭한 인품에 있다.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심수봉 '순자의 가을', '영부인 이름 나온다'는 이유로 방송 금지



[우리시대의 명반·명곡]

노래는 마술 같다. 때론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을 오래 전 추억으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옷을 사러 갔을 때 정말 나에게 딱 어울린다 싶은 진짜 내 옷 같이 느껴지는 옷이 있듯이 노래도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최근 각종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을 통해 과거의 명곡들이 수도 없이 리메이크 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노래엔 '임자'가 따로 있는 경우가 참 많다. 이 노래는 이 가수가 주인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오리지널 가수가 따로 있는 노래들 말이다.

얼마 전 중견가수들이 서바이벌 경연을 벌이는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에서 한국 록의 명곡인 '아름다운 강산'의 가수가 이선희로 표기되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랬다. 그 노래의 오리지널 가수는 록밴드 <신중현과 더 맨>의 리드보컬 박광수이고 이선희 이전에도 이미 수 십 명의 가수가 취입을 했었다. 실제로 노래를 작사, 작곡한 신중현은 활동금지에서 벗어난 1980년에 결성한 밴드 <뮤직파워>를 통해 노래를 직접 불러 히트까지 시켰었다. 이선희는 무수한 리메이크 가수 중 한 명이지만 빅히트를 시키며 폭넓은 대중에게 노래의 우수성을 알린 공로 때문에 일반 대중은 당연히 그녀의 노래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대중가요 명곡들 중 히트를 터뜨린 가수보다 먼저 노래를 부른 오리지널 가수가 있는 경우는 무수하다.

전인권이 부른 '사노라면'은 한동안 구전가요로 알려졌지만 쟈니리가 노래한 '내일은 해가 뜬다'가 원곡이다. 정미조의 대표곡 '개여울'과 조용필의 대표곡 '돌아와요 부산항에', 김연숙의 '그날', 이수만의 '파도'도 원곡이 따로 있다. 오랜 무명 생활을 거친 김국환에게 음악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마련해준 '꽃순이를 아시나요'의 오리지널 가수도 조용필이다.

왜 이 같은 일이 수도 없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는 독특한 금지 문화의 아픔을 간직한 한국 대중음악계의 시스템이 낳은 결과일 수도 있고 가수 혹은 작사, 작곡자의 문제로 빚어진 개인적 결과일 수도 있다.

'그때그여인' 따가운 눈총

1978년 제 2회 대학가요제 본선 출전 이후 단숨에 '대학 가요제의 이단아'로 떠오른 심수봉의 창작곡 '그때 그 사람'은 7080세대 최고의 명곡으로 각인되어 있다. 당시 매일 같이 TV, 라디오의 가요 프로그램은 심수봉 일색일 만큼 열풍이 몰아쳤던 그 때, 그녀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10.26 시해 사건의 현장에 연루된 '그 때 그 여인'으로 한동안 세인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비련의 주인공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사건 후 시야에서 사라진 심수봉에 대한 궁금증은 오히려 관심을 증폭시켰었다.

코미디언 출신 가수 방미가 부른 '올 가을에 사랑할거야'는 가을 시즌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불후의 시즌 명곡이다. 방미의 6집 타이틀곡으로 발표되어 빅히트를 터뜨렸던 이 노래 역시 오리지널 가수가 따로 있다. 심수봉의 '순자의 가을'이다.

활동금지 기간을 딛고 일어난 심수봉은 1980년 6월 3집을 발표하며 재기를 꿈꿨다. 그 해 11월 심수봉은 박호태 감독의 영화 '아낌없이 바쳤는데'의 주제가를 직접 부른 것은 물론이고 직접 출연까지 해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심수봉의 컴백만으로도 영화는 개봉 이후 관객 5만을 돌파하는 흥행몰이에 성공했고 홍콩으로 수출까지 성사되었다.

1979년에 만든 드라마 주제곡이자 영화OST인 '순자의 가을'은 그녀의 활동을 또 다시 제약하는 사고를 일으켰다. 처음 노래가 발표되었을 땐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5공 정권이 출범하자 노래 제목에 당시 '영부인의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로 방송 금지를 당했다. 막 인기를 얻기 시작했던 노래가 아까워 제목을 변경해 다시 취입하려 했지만 결과는 가혹했다.

방미에 의해 빅히트

결국 이 노래는 제목을 '올 가을엔 사랑 할꺼야'로 변경하고 가사 일부를 수정해 1983년 후배 가수 방미에 의해 빅히트가 터지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984년 그녀의 방송 출연 금지 조치는 해지되었고 심수봉도 그 때의 아쉬움을 달래려 '올 가을에 사랑할거야'란 제목으로 다시 취입하는 웃지 못 할 사연을 남겼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아메리카노' 등 히트시킨 '제2의 장기하'

[우리시대의 명반·명곡] '10cm' 'The First EP' 上 2010년

여성 취향 사운드에 탁원한 서정성 담아

최근 인디뮤지션들의 약진이 눈부시다. 인디음악계의 공력이 만만치 않은 것은 10여년의 세월동안 꾸준하게 쌓아온 음악공력으로 어느 정도 확인되었지만 장기하의 열풍 때까지만 해도 이 열기가 과연 일회성이 아닌 지속가능한 흐름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었다.

그래서 평단에서는 한국대중음악의 건강한 토양을 위해선 '제2의 장기하'가 연속해서 등장해야 한다는 진단이 제기되었고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했었다.

이제 그 같은 우려는 무색할 정도로 인디뮤지션들은 공중파를 넘나들며 각종 예능 프로 배경 음악을 점령하고 있다. 대중적 인지도와 파급력을 담보한 뮤지션들의 개체 수 또한 증가일로다.

어마어마한 대중적 파장에도 불구하고 향후 음악성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이 늘 뒷덜미를 잡았던 '장기하와 얼굴들'은 최근 한층 밴드의 앨범다워진 2집을 통해 대중적 주목이 우연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고 남성듀오 '10cm', 모던 록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 여성듀엣 '옥상달빛'등은 이름만 들어도 익숙할 정도로 인지도를 획득하며 주류와 인디의 경계마저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노래방은 물론이고 거리에서도 이들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젊은이들을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제2의 장기하'로 회자되고 있는 남성 2인조 밴드 '10cm'는 한국대중음악의 중심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들은 2009년 홍대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래 현재 여성 팬들에게 가장 어필되고 있는 인기절정의 남성 듀오라 해도 무방하다.

'우리들의 음악은 여성들만 들으라'고 농담을 걸 정도로 이들의 음악은 일단 감각적이고 섹시함이 배어있는 스마트한 뉴욕 맨하탄 스타일로 젊은 여성들의 낭만적 감성을 유혹하기에 충분한 여성취향의 사운드다.

정규앨범을 내기 전부터 누나들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오늘밤은 어둠이 무서워요'와 커피의 진한 맛을 찬양하는 '아메리카노'를 히트시키며 기대감을 부풀렸던 기대주였던 <10cm>의 빠른 성장 원동력은 무엇일까?

귀에 감겨오는 맛깔난 가창력과 탄탄한 기타 연주 그리고 감각적인 가사, 팔색조의 질감으로 펼쳐내는 다채로운 음악 스펙트럼에 있다. 사실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지 일 년 만에 존재가치를 알린 첫 EP는 탁월한 감성을 선보였지만 거친 녹음과 단조로운 사운드, 이질적인 연주와 편곡의 불안정에 대한 평단의 지적이 있었다.

하지만 가내 수공업 공법으로 제작한 첫 EP 앨범은 적어도 2000년대 디지털 세상에서는 경험하기 힘들었던 가슴을 움직이는 탁월한 서정성을 담아냈었다. 거기에다 질감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곡들은 정서적으로 일관성이 모호하다는 비난이 있긴 했지만 빛나는 가능성만으로도 인디음반으로는 이례적으로 3000장이 넘게 팔려 최근 재발매까지 되었다.

음악적으로 완전하지 않은 EP만으로도 큰 감흥을 안겼기에 이들의 정규 1집에 대한 기대감은 당연했다. 사실 재치 있는 가사와 달콤한 목소리를 뽐낸 이들의 히트곡 '오늘밤은 외로워요'와 '아메리카노'는 2010년 발매된 첫 EP와 2011년 정규 1집 어디에도 없다. 컴필레이션 앨범 와 디지털싱글로 발표된 노래들이기 때문이다.

2곡의 짭짤한 온라인 음원 수익은 정규음반 낼 기회를 이들에게 제공했다. 헌데 1집은 여러 음악적 문제점을 극복한 세련되고 깔끔한 내용임에도 명반으로 인증하기를 머뭇거리게 한다. 풍성한 사운드에다 젊은 세대들이 공감할 감각적인 언어조탁은 분명 인상적이었지만 EP에서 들려준 청자의 마음을 움직였던 탁월한 서정적 멜로디의 노래는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최근 '10cm'의 정규 1집 수록곡 '그게 아니고'는 여성가족부로부터 '술'에 대한 표현 때문에 청소년유해매체로 지정되어 19금딱지를 달았다.

이에 1996년 이후 사라진 심의와 검열의 망령이 부활하며 '표현의 자유'를 새롭게 담론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만큼 '10cm'의 노래는 한국 대중음악의 성 표현수위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에 대해 실험하는 것 같은 은근하고 야한 노래들이다.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가슴속 묻어둔 사랑의 열병 깨우며

[우리시대의 명반·명곡] 남궁옥분 '재회'(1985년)

격동의 80년대 대중의 심금 울려

예나 지금이나 변변한 히트곡 하나 없이 사라진 가수들은 무수하다. '히트곡 하나를 가지면 평생을 먹고 산다'는 대중음악계의 속설처럼 대중가수에게 히트곡의 존재 유무는 거론자체가 새삼스러울 정도로 중요하다.

대중을 상대로 하기에 대중의 반응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대중가수들의 영원한 갈등은 생성된다. 그러니까 인기는 순간이지만 작품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최근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들을 통해 이미지 변신이 이뤄졌지만 통기타 가수는 오랫동안 경제적 궁핍을 상징했다. 무명의 고단한 시절을 딛고 인기를 획득한 통기타 가수들 중에는 음악적 열정을 포기하고 연예인처럼 행동하는 가수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한 소모적 음악생활에 고뇌하며 뮤지션으로 다시 돌아가는 가수도 있다.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던 시기에 아이돌의 지위를 포기하고 자신의 창작음악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아티스트로 변신한 이상은의 경우는 후자일 것이다.

80년대에 절정기를 구가했던 남궁옥분의 대중적 이미지는 밝고 경쾌한 히트곡들을 많이 부른 인기가수로 각인되어 있다. 여고시절 순수노래모임 <참새를 태운 잠수함>의 동인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1981년 '사랑사랑 누가 말했나', 1982년 '꿈을 먹는 젊은이', 1983년 '나의사랑 그대 곁으로', 1984년 '설악산'등으로 히트퍼레이드를 벌이며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풍요속의 빈곤이랄까.

1983년 이후 남궁옥분은 앵무새처럼 되풀이 했던 소모적 음악생활에 대해 짙은 회의감이 들었다. 순수하게 시작했던 통기타 음악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TV에 출연하고 음악프로그램이 아닌 각종 오락프로그램을 전전하며 방송국에서 원하는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했던 생활에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 1985년 지구레코드 전속 1집으로 발표된 그녀의 8번째 앨범은 터닝 포인트다.

당시 음악적으로 방황했던 남궁옥분에게 김학래의 매니저였던 안정대가 '하덕규를 찾아가보라'고 권유했다. 하덕규와 남궁옥분은 명동 라이브클럽 <쉘부르>에서 함께 노래했던 음악친구 사이다.

당시 가요계 풍토는 인기가수라 해도 작곡가를 스스로 선택하는 권리는 없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 경복궁 앞 화실에서 작업하던 하덕규를 찾아갔다.

세상에 나오기를 꺼렸던 그를 설득해 함께 작업을 하다 작품집 개념으로 볼륨을 확대했다. 당시 지구레코드 측에서는 무명 작곡가 하덕규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남궁옥분의 인지도를 생각해 제작을 결정했다. 이 앨범에는 건전가요 같았던 밝고 경쾌한 노래들이 실종되고 그 자리에는 사색적이고 독특한 감각의 노래들로 메워졌다.

총 9곡이 수록된 이 앨범은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가 창작한 8곡과 <참새를 태운 잠수함>의 총무 구자형의 창작곡으로 구성되었다. 하덕규 외에도 '재회'등 몇 곡은 이호준과 김명곤이 편곡에 참여했고 최이철, 함춘호, 이호준, 배수연등 당대 최고의 세션들의 참여는 이 앨범의 음악 완성도에 한 몫 단단히 했다.

타이틀 곡 '재회'는 떠나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담담하지만 짙은 여운으로 그려낸 명곡이다. 이 노래가 격동의 80년대 대중의 심금을 울린 이유는 가슴속에 묻어둔 사랑의 열병을 관조하는 재회의 느낌을 기막히게 해석한 남궁옥분의 탁월한 가창력과 이호준의 탁월한 편곡에 기인한다.

'재회'는 당시 각종 인기가요차트 1위를 장악하며 통기타 가수 앨범으로는 이례적으로 10만장이 넘게 팔려나가 지구레코드 임정수 사장이 보너스까지 지불했을 정도.

대중적인 곡은 '재회'가 유일하다. '불새', '파랑새', '헤어진 그 슬픔을'등 다른 곡들은 록, 레게, 포크, 발라드등 다양한 음악장르의 향내가 진동한다. 특히 리메이크곡 '꽃을 주고간 사람'은 남궁옥분의 독특한 고음역대의 보컬이 압권이다.

이 앨범은 남궁옥분에게는 성공적 재기와 음악적 갈등을 해소시켜준 동시에 하덕규를 함춘호와 함께 <시인과 촌장>으로 뭉쳐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 계기가 되었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작사가 반야월로 명성, 현존 최고령 가수

[우리시대의 명반ㆍ명곡] 진방남 '불효자는 웁니다'(1940년)

자전적 스토리 담은 노래 시공초월 인기

대중음악보다 그 시대를 극명하게 반영하는 예술장르는 없다. 기억저편으로 밀려난 세월 속에 묻혀 간 청춘의 미련과 흔적이 담긴 노래에 유독 대중이 울고 웃는 것은 장르적 특성 때문이다.

창가, 신민요, 유행가 그 이름이 무엇으로 변해 왔던지, 대중가요는 잊혀져가는 역사의 한 장면을 그려내며 이 땅에서 숨 쉬며 격렬하게 살아온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 전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에 대한 마음일 것이다. 그 중 어머니를 소재로 해 대중의 심금을 울린 노래는 무수하다. 그만큼 어머니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정서란 이야기다.

가수 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는 시대를 초월해 많은 대중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명곡이다. 가수 진방남(본명 박창오)은 작사가 반야월로 널리 알려진 현존하는 한국대중음악계 최고령(한국 나이 95세) 가수다.

1917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한 그는 23살이 되던 1940년 가수로 데뷔해 해방 후부터 현재까지 5000여곡을 쓴 작사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가수로도 '꽃마차' '불효자는 웁니다' '마상일기'등을 히트시켰고 작사가로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 '울고 넘는 박달재', '소양강 처녀', '산장의 여인'등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한 불멸의 명곡을 빚어낸 우리 시대 최고의 대중가요 시인이다.

진방남은 주로 격변기를 살았던 대중의 질곡어린 삶의 애환을 다룬 슬픈 심정과 이산, 향수 그리고 희망을 노래했다. 그의 창법은 '빈틈이 없는 옹골차다'는 평가를 받는다. 노래 가사에 담긴 정서를 완벽하게 해석해 표현하는 특급 가수였다는 증명이다.

멀리 일제강점기, 한국 전쟁을 비롯해 격변의 근현대사를 온 몸으로 겪어 온 그는 철물점 직원, 고물상 잡부, 양복점 점원을 전전하는 고단한 청년시절을 보냈다.

1939년 태평레코드사가 김천에서 개최한 전국신인남녀 가요콩쿠르대회는 터닝 포인트다. 전국에서 참가한 수백 명 경쟁자들을 제치고 청년 진방남은 1등에 입상하며 레코드사의 전속가수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작사가 박영호(필명 처녀림)가 문예부장으로 있었던 태평레코드사는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 백년설을 비롯해, 한국 최초의 직업가수 채규엽, 신카나리아, 최남용, 백난아 등 최고 수준의 가수 라인업에 신인 진방남의 가세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1940년에 발표된 진방남의 데뷔곡 '불효자는 웁니다'는 당대의 메이저 음반사인 오케레코드를 위협할 정도로 태평레코드의 위상을 올려준 빅히트곡이다. 진방남의 자전적인 스토리를 담은 이 노래에는 성공을 위해 먼 곳으로 떠난 아들을 위해 온 몸을 내던진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고전적인 한국여인상을 그려냈다.

또한 이 노래에는 병이 들어 아들이 귀국하기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 산소 앞에서 통곡을 하는 장면이 절절하게 담겨있다. 진정성 어린 가수와 애절한 멜로디는 이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불효자들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당시는 유성기시절이라 국내 제작이 불가능했다. 일본으로 노래를 취입하러 떠난 진방남은 현지에서 '모친별세'란 급전을 받았다. 몇 차례 취입을 시도했지만 목이 메어 노래가 나오질 않아 겨우겨우 녹음을 마쳤다고 한다.

회한과 통곡으로 가득한 이 노래의 원 가사 3절은 '청산의 진흙으로 변하신 어머니여'에서 어머니의 타계소식을 듣고 '이국의 우는 자식 내몰라라 가셨나요'로 고쳐졌다고 한다.

아마도 진방남은 노래를 취입하는 내내 비오는 날 우산에 가방 하나를 들고 떠나는 자신을 배웅하러 마산역까지 나왔던 아들을 향해 주름진 손을 흔드시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했을 것 같다.

이 노래가 시공간을 넘어 한국인의 감성을 자극하는 명곡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1975년 조총련계 교포 추석 성묘단 환영공연장에서 희극배우 김희갑이 불러 장내를 온통 눈물바다로 만들면서부터. 이미자, 나훈아, 주현미, 송대관, 송해등 무수한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된 '불효자는 웁니다'는 지금도 명절이면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들에게 고향과 어머님의 품을 떠올리게 하는 마력을 발휘하는 노래다.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최규성의 대중문화 산책] '신중현 록 전설' 끝나지 않았다



복각 LP음반 당당히 1위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의 전설은 계속되는가? 작년 말 은퇴를 선언한 그가 경기도 용인의 전원에서 칩거에 들어간 지도 벌써 반년이 넘었다.

공식 활동을 접고 자신의 인터넷 음악방송에만 전념하고 있는 그는 여전히 국내외가 인정하는 한국 대중음악의 화두임이 사방에서 감지되고 있다.

최근 포털사이트 인기검색어에 난데없이 옛 노래와 그때 그 시절의 스타들이 등장하고 있다. 네티즌들 사이에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KBS2-TV 예능프로그램 ‘해피선데이-불후의 명곡’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모시고 싶은 스타’ 1순위에 조용필, 나훈아와 더불어 신중현도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했다.

8월 9일부터 14일까지 23개국의 영화 71편을 상영하는 제3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도 그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음악전문 다큐멘터리 섹션인 ‘뮤직 인 사이트’에 작년 12월 은퇴 공연을 준비하던 당시 그의 이야기를 담은 <신중현의 라스트 콘서트>가 상영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또 있다. 최근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외시장 공략에 나선 전통주업체인 보해양조는 미국 수입상사와 연간 60만병의 수출계약을 체결하고 LA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판매에 들어가기 위해 신중현을 모델로 선택했다.

왜 아직도 신중현인가? 아마도 고집스럽게 미개척 분야를 개척하며 세상에 남겨놓은 그의 음악외길 인생의 업적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은퇴 후에도 그의 이름은 여전히 경쟁력 있는 브랜드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흥미로운 소식이 하나 더 있다. 아마도 ‘신중현 사단’이란 말은 누구나 한 번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1968년 펄시스터즈을 발굴해 스타 작곡가로 등극한 이후 신중현의 작업실엔 신인가수들의 발걸음이 문지방을 닳게 했었다. 대형가수 김추자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신중현이 최전성기를 구가하며 ‘사단’을 형성했던 그 시절 그가 관여한 음반에는 <신중현 사운드>라는 라벨이 붙여졌다.

일종의 대중가요 음반의 명품인증서였다. 바로 그 시절의 시리즈 음반인 ‘신중현 사운드 1-3집’이 300장 한정 본으로 막 발매되어 가요팬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더욱이 국내에서는 생산이 불가능한 LP발매인지라 구미를 당기게 한다. 사실 지난 해 신씨가 은퇴를 선언한 시점에도 발매 자체가 화제가 된 음반이 있었다.

전설적으로 회자되던, 1958년에 녹음한 신씨의 데뷔음반 ‘히키신 기타 멜로디’와 1964년 발매된 신씨가 결성한 국내 최초의 록 그룹 앨범 ‘에드훠’의 ‘비속의 여인’이다.

최근 디지털 음원으로 대중가요시장이 전환되면서 음반시대의 종말까지 예견되고 있다.

그런데 CD도 아니고 국내에서는 생산조차 불가능한 LP로 그의 초기 명반들 뿐 아니라 대중가요의 희귀음반들이 줄줄이 발매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2000년대 들어 불어 닥친 열풍이 있다. 복고다.

인터넷 커뮤니티가 활성화되면서 생성된 것은 ‘추억의 공감대’였다. 7080 음악이 되살아 난 것도 그 추억을 되살리는 불씨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전설적으로 회자되던 희귀음반 사재기가 광풍처럼 불어 닥쳤었다.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우리 대중가요를 사랑하는 마음에서가 아닌 일종의 투자개념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그 뜨거운 바람은 수많은 희귀 대중가요 음반들의 리바이벌에 기름을 부은 격으로 새로운 장르의 음악시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었다.

그 중 ‘록의 대부’ 신중현은 가장 많은 음반이 복각된 뮤지션으로 기록되었다. 이번의 <신중현 사운드> 전집을 비롯해 히키신, 에드훠, 신중현과 엽전들 1, 2집 그리고 신중현사단 가수인 김정미, 윤용균, 김추자의 신중현 작곡집 등이 빛을 봤다.

서울음반, 포니캐년 등 덩치 큰 매니저 음반사들도 이 놀라운 흐름에 동승했었지만 주도세력은 한두 명에 의해 운영되는 이름도 생소한 비트볼, 리듬온, 솟대, 레트로, 뮤직리서치 같은 소규모 인디레이블들이었다.

이들 덕에 오리지널 음반은 수십에서 수 백 만원을 호가하거나 실물은 구경조차 힘든 대중가요의 명반들이 줄을 이어 부활했다.

그러나 장기간의 불경기와 음반시장의 불황과 함께 그 열풍도 많이 식은 상태다. 중고 음반시장도 희귀 가요음반의 수량이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 고가 일변도인지라 시장유지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저렴한 재발매음반을 제작하려 해도 마스터 녹음테이프가 대부분 유실되었고 대체할 오리지널 음반조차 구하기 역시 불가능한 현실이다. 그야말로 기획부터 마케팅까지 거의 ‘맨땅에 헤딩’하는 형국이건만 들여야 하는 품에 비해 수익성이 턱없이 낮은 것도 한 몫 거들었다.

그 바람에 그 많던 복각LP 음반사들은 현재 다 사라진 상태다. 이번 <신중현 사운드> 복각 LP박스를 작업한 주인공은 30대의 음악마니아 손병문씨(37).

그는 국내 유일의 아날로그 가요 LP음반 제작사 리듬온의 대표다. 왜 손쉬운 CD가 아닌, 수용 층이 제한적이고 외국에서 제작해야 되는 이중고를 안겨주는 아날로그 LP를 굳이 제작하려는지 물었다. “따뜻한 아날로그 LP 소리의 맛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차가운 디지털 소리가 세상에 넘쳐나니 인간미 넘치는 아날로그의 추억과 감동을 사람들에게 선사하고 싶어 고집하고 있다.”

최근 개봉한 미국영화 ‘다이하드 4편’을 보면 그의 말에 더욱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해커들에 의해 컴퓨터를 장악당해 교통대란이 일어나고 은행 업무가 마비되는 최첨단 디지털세상을 다룬 영화이지만, 결국 인터넷이 마비될 경우 옛날 구닥다리 무전기만이 사용가능한 설정도 그렇고 주제가로 70년대 록그룹 C.C.R의 아날로그 음악을 사용한 것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공존, 즉 신조어인 ‘디지로그’ 쪽으로 메시지의 가닥을 잡은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국내 드라마에도 이런 현상은 공통적이다. 최근 인기절정의 MBC 월화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남장으로 등장하는 윤은혜가 전설적인 여성듀엣 ‘현경과 영애’의 LP를 가슴에 얹고 추억을 되새기는 장면이 나왔다. 이처럼 드라마, 영화 속에 아날로그 정서를 삽입하는 것은 삭막함을 없애고 인간미를 부각하려는 새로운 움직임이라 할 만하다.

신세대 가수의 대표주자격인 비도 최근 고가의 한정 본 LP를 발매해 외국 시장에 선보였다.

아날로그 LP음반 발매는 이제 아무나 발매할 수 없는 음반의 상징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디지털세상이 가속화될수록 아날로그는 대중문화 속 어딘가에서 더욱 강렬하게 살아 꿈틀 거릴 것이 분명하다. 결국은 인간의 마음이 소통하는 것보다 소중한 것은 없기에.

글ㆍ사진=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이문세 4집, 팝 발라드 빅스타가 된 이야기꾼

단숨에 최다 음반판매 신기록… 1987년 서라벌레코드

80년대 최고 인기작곡가 이영훈의 명곡으로 대중가요 수준 업그레이드

노래보다는 말 잘하는 DJ로 주목 받던 이문세의 4집(1987년)은 대중가요의 부흥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80년대 최고의 명반 중 하나였다. 기록적인 음반의 판매는 물론이고 대중의 절대 지지를 얻어내며 가요의 수준을 끌어올린 완벽한 성공작이었다.

격동기였던 80년대는 대중음악의 르네상스라 불릴 만 했다. 긴 동면에서 기지개를 켠 조용필이 1인 독주 체제를 구축하는 가운데 조동진을 필두로 록그룹 들국화, 김광석, 노래를 찾는 사람들, 김현식, 하덕규, 김두수, 유재하 등 언더그라운드 진영의 공존이 이루어진 시기였기 때문이다.

80년대 이전의 시기가 팝송시대였다면 80년대 이후는 단연 대중가요의 시대라 규정할 만하다. 그만큼 팝송을 능가하는 수준 높은 명반과 명곡들이 봇물 터지듯 등장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원할 것 같았던 라디오의 팝송 프로그램들도 대중가요의 거센 침공에 맥없이 하나 둘 권좌를 내어주어야 했다.

이문세를 언급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작곡가 이영훈이다. 2006년 대장암 판정을 받고 힘겨운 투병 중인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80년대 최고의 인기 작곡가다.

그는 이야기꾼에 불과했던 이문세를 빅 스타로 등극시킨 1등 공신이었고 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수준을 외국의 그것과 필적하게 끌어올린 ‘팝 발라드’ 장르의 개척자다. 그는 발라드와 포크의 모호한 경계를 현악기가 가미된 클래식 음악기법 도입으로 확실하게 구분시켰다.

‘팝 발라드’로 규정되는 장르의 탁월함은 변진섭, 신승훈, 조성모라는 발라드 황제 급 가수들로 이어지며 폭 넓은 대중의 사랑을 한껏 누리고 있다.

1985년 신촌블루스 엄인호의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은 대중음악의 판도를 뒤흔들었다. 대중가요에 팝과 클래식을 접목해 격조 깊은 사랑노래를 제시한 이영훈의 음악은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창법으로 노래한 이문세를 통해 상상을 초월하는 반응을 얻어냈다.

150만장이 팔린 3집의 '난 아직 모르잖아요' '소녀' '휘파람'을 시작으로 ‘발표는 곧 히트’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며 거침없는 히트 퍼레이드를 벌였다. 우리가 기억하는 거의 모든 이문세의 히트곡은 다 이영훈이 작곡한 노래로 봐도 무방하다. 당시 두 사람에 의해 발표된 노래들은 거의 다 대중매체의 인기차트 최상위를 점령했다.

87년 칙칙한 분위기의 4집 초반이 발매되자 제작사는 공전의 히트를 예감했다. 이에 뮤지션 정보를 보강하고 독특한 모자이크 분위기의 사진으로 재킷디자인을 수정한 재반을 거의 동시에 발매했다.

추가로 제작한 45회전 12인치 싱글LP도 최상의 음질을 뽐내는 이례적인 보너스음반이었다. 이 앨범은 제작사 '킹 프러덕션'에 독자적인 공장을 소유하게 했고 메이저급 음반사로 거듭나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무려 285만장을 기록한 4집의 판매고는 단숨에 그때까지의 사상 최다 음반판매 기록을 뒤엎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타이틀곡 ‘사랑이 지나가면’과 ‘그녀의 웃음소리뿐’은 대중가요의 수준을 업그레이드 시킨 명곡으로 평가 받을 만하다. 김동석 오케스트라의 현악연주가 인상적인 ‘밤이 머무는 곳에’와 고은희와 함께 노래한 ‘이별 이야기’, 팝과 록의 접목을 통해 흥겨운 비트를 선사한 ‘그대 나를 보면’, 리듬감이 느껴지는 ‘가을이 오면’, ‘깊은 밤을 날아서’, ‘슬픈 미소’, 그리고 이문세의 가성이 흥미로운 ‘굿바이’ 등 모든 수록곡들은 내용(음악)과 형식(흥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이 음반을 명반으로 승천시켰다. 또한 김광석, 함춘호 등 뛰어난 연주자들의 세션과 김명곤의 편곡은 앨범의 무게감을 더해주었다.

주류스타이면서도 TV보다는 라디오를 통한 신비 마케팅과 전담 작곡가시스템을 통한 음반과 공연이라는 활동반경은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차별적인 것이었다. 그 자신감은 새롭고 뛰어난 음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규성 대중문화 평론가 oopl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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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가 5년 앞서 음반 통해 노래 발표

정미조의 대표곡으로 알려진 '소월의 시'

김정희 '개여울'上(1967년)

"음반 발매 사실 몰랐다… 당시 4주간 라디오 인기가요 차트 정상"

과거 문학과 대중문화 사이에는 차별적 대중적 시각이 존재했다. 소위 품격이 다르다는 거였다. 오죽했으면 대중가요 가사로 사용된 시에 각종 가요 시상식에서 작사상을 주려 해도 수상을 거부하는 시인까지 생겨났겠는가.

요즘은 '시노래'라는 장르가 생겼을 만큼 시 노래의 개체 수가 엄청나게 늘었다. 또한 시인들도 자신의 시가 가사로 사용되어지길 원할 만큼 대중음악에 대한 편견은 사라졌고 인식은 높아졌다.

그렇다면 한국대중음악사를 통틀어 가사로 가장 많이 애용된 시인은 누구일까? 단연 김소월이다. 김소월을 생각하면 노랫가락이 먼저 떠오른다. 토속적인 색채와 한의 정서를 리드미컬한 7.5조 음률에 담아냈던 그의 시는 노래에 가까울 정도다. 실제로 노래를 즐겨 들으며 작업했다는 그의 시가 무수한 대중가요로 둔갑한 이유는 바로 탁월한 음률에 있다.

60년대부터 김소월의 시는 대중가요화되기 시작했고 여러 장의 프로젝트 기획음반으로 발매되었다. 그 결과, 70년대에는 '소월 시를 대중가요 가사로 사용하면 히트곡이 된다'는 속설이 나돌 정도로 각광받으며 무수한 히트곡이 양산되었다.

동요 '엄마야 누나야'부터 어버이 날이면 어김없이 부활하는 유주용의 '부모', 서유석의 '먼 후일', 이은하의 '초혼', 장은숙의 '못잊어', 정미조의 '개여울', 캠퍼스 밴드 라스트 포인트의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활주로의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희자매의 '실버들', 마야의 '진달래꽃'에 이르기까지 소월 시를 가사로 사용해 히트한 대중가요는 널려 있다.

지금은 중견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대형가수 정미조의 대표곡으로 널리 알려진 '개여울'은 1922년 개벽지에 발표된 소월 시다. 1972년 정미조가 노래로 발표했을 때 '소월의 시가 50년 만에 대중가요로 탄생했다'는 기사가 나올 만큼 소월 시는 그 자체로 막강한 파급력을 담보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작곡가 이희목이 창작한 낭만적인 멜로디와 성량이 풍성하고 시원했던 정미조의 가창력이 합체되면서 세월을 초월해 사랑받는 명곡이 되었다. 2008년 영화 모던보이의 히로인 김혜수가 OST로 불러 화제를 모았던 이 노래는 심수봉, 김수희, 신계행, 최유나, 적우, 말로, 김종국, 박진석등 트로트에서 팝, 재즈에 이르기까지 장르와 성을 초월해 지금껏 리메이크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그동안 '개여울'의 오리지널 가수가 정미조임에 이견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미조가 아닌 '김정희'로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정미조보다 무려 5년 앞선 1967년에 이미 정식음반을 통해 노래를 발표했던 가수이기 때문이다.

과거 군사정권에 의해 가동된 금지문화는 소위 '사회정화'라는 통제시스템 하에서 자행되며 한국대중문화계의 기록을 무자비하게 폐기하고 훼손시켰다. 그 결과, 현재 한국대중문화계 전체의 열악한 데이터베이스는 무수한 오류를 반복하며 한국대중문화의 정체성에 대혼란을 불러오고 있다.

1966년 당대의 인기가수 쟈니리가 부르고 길옥윤이 작곡했던 '내일은 해가 뜬다'란 노래가 있다. 발표된 그 해에 금지곡이 되어 대중과 유리된 이 노래는 이후 40여 년 동안 작자미상의 전래가요 '사노라면'으로 둔갑해 널리 불렸다.

'개여울'의 오리지널 가수 김정희 역시 활동한 기록은 고사하고 단 한 장의 사진조차 발견되지 않은 미지의 가수다. 그녀가 부른 최초의 '개여울' 버전이 수록된 킹레코드 음반은 1967년에 여러 가수들의 노래가 혼재한 컴필레이션 형식으로 발표되었다.

다행히 음반은 발견되어 대중가요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화제가 되었지만 가수 김정희를 기억하는 대중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당연히 그녀의 노래는 전혀 대중적 조명을 받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했는데 아니었다.

인터넷은 놀라운 일을 실현시키기도 한다. 최근 기적적으로 만난 가수 김정희의 증언은 놀랍고 흥미로웠다. 그녀에 의하면 자신이 부른 '개여울'이 "음반으로 발표된 사실을 몰랐다"고 놀라워했고 "노래를 처음 불렀을 당시 4주 동안 KBS 라디오 인기가요 차트 정상을 지켰던 히트곡"이었다고 한다.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그녀의 삶 대변하는 12곡의 블루스

강허달림 1집 '기다림, 설레임' 2008년 뮤직 런뮤직 下

절망·고통의 흔적 희망 메시지로 승화

싱글 발표후 '사운드' 아쉬움 직접 앨범 제작사 세워 달래

그녀의 창작방식은 독특하다. 흥얼흥얼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멜로디를 녹음하기 위해 항상 카세트 녹음기를 가지고 다닌다. 창작의 물꼬를 튼 것은 1995년쯤 ‘독백’을 처음으로 만들면서부터. 1집 발표 전까지 ‘지하철 자유인’등 4곡의 노래를 완성시켰지만 발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녀가 거친 모든 밴드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 그런 면에서 밴드 풀 문의 베이스 박순철은 그녀에게 ‘너만의 멜로디가 있다’며 가능성을 인정해 주고 독려했던 소중한 친구다. ‘춤이라도 춰볼까’ 리플은 그의 도움으로 완성한 곡이다.

2년간의 신촌블루스 활동 후 클럽을 맴도는 가수로 머물 것 같아 유학을 결심했다. 장충동의 한 찌개 집에서 하루 13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며 절치부심했다. 2005년 마침내 기회가 왔다. 카페 스튜디오70에서 그녀의 음악을 듣고 가능성을 발견한 기획사 ‘풀로 엮은 집’의 이윤호대표가 데뷔 음반을 제작했던 것.

프로듀싱 개념도 없이 스스로 모든 음악과정을 맡아 싱글EP ‘독백’을 발표했다. 비록 대중적 반향은 미미했지만 일부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이끌어냈다. 이에 여러 곳에서 정규앨범 제작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대부분 제작조건이 취약했다. 녹음진행 중에 뒤엎는 사태까지 발생한 것은 싱글 앨범 발표 후 가장 아쉬움을 느낀 ‘사운드’의 질은 결코 양보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과 사랑에 대한 고심으로 가득 찼던 3년간의 공백 후 중대 결심을 했다. 스스로 자신의 앨범을 제작하기 위해 인디레이블 '런뮤직'을 창립했던 것. 10년째 옥탑 방에서 살며 모아놓은 돈과 모자라는 돈 2천만 원을 대출했다. 지인이 운영하는 강남 양재동의 텔레만 스튜디오에서 녹음비용을 1/3가격으로 후원해주었고 KBS 관현악단 멤버 남영국이 프로듀싱을 맡아주었다.

또한 언더그라운드 블루스 기타의 달인 채수영과 신촌블루스의 엄인호가 세션으로 참여해 힘을 보탰다. 2007년 3월에 제작에 들어간 1집은 이듬해 2월에야 가까스로 녹음을 끝냈다. 제작비가 부족해 녹음실, 프로듀서 스케줄에 맞춰가야 했기 때문.

강허달림의 1집은 짙은 향내가 진동하는 토종 블루스 명반이다. 이 앨범에는 그녀의 삶을 대변하는 12곡이 담겨 있다. 11곡은 그녀의 창작곡이고 ‘꿈꾸는 그대는’은 인천 노래패시절에 감명을 받은 소나무(윤대형)의 곡이다. 29살 때 만난 한 남자와의 만남과 이별의 과정은 기다림과 극복의 미학이라는 음악적 감성을 제공했다.

사랑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끝내 자존심만은 잃지 않는 여성특유의 인내를 담고 있는 타이틀 곡 '기다림, 설레임', 탁월한 감성의 보컬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미안해요’ 같은 창작곡들은 그 결과물이다. 또한 경쾌한 리듬감이 탁월한 첫 트랙 '춤이라도 춰 볼까', 결코 좌절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용기와 희망이 담긴 '독백'과 ‘옛 일기장’, 하늘과 바다‘는 쉽게 접하기 힘든 그녀의 명곡들이다.

그녀의 노래에는 슬픈 정서와 비트 강한 경쾌한 리듬이 공존하며 상호작용을 한다. 그래서 청자를 때론 서정적 분위기의 노래에 푹 빠져들게 하고 때론 어깨를 들썩이는 흥겨움으로 인도한다. 절망과 고통의 흔적은 탁월한 리듬을 통해 극복되고 이내 희망의 메시지로 거듭나게 하는 힘은 강허달림 노래만의 차별성이다.

강허달림은 1집에 대해 “속을 너무 많이 썩어 음반이 나왔을 때 보기도 싫었다. 프로듀서 이름이 첫 브클릿 인쇄에 누락되어 폐기시키고 다시 인쇄를 했다. 재킷도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의 작업을 거쳤다.”고 털어놓는다. ‘드러나지 않으면서 혼자 서있는 자아’를 표현한 1집의 독특한 이미지 재킷은 급히 소개받은 아트 디자이너 정경숙의 작품이다.

1집은 네이버 오늘의 뮤직 ‘이주의 앨범’에 선정되고 제6회 한국대중음악상의 여러 부문의 후보에도 노미네이트되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입소문을 타면서 판매량이 계속 늘어 현재 3판 제작에 들어가 있다. “블루스는 운명적인 장르지만 특정 음악장르에 매몰되기보다 좋은 노래를 찾아가는 음악여정을 오래 하고 싶다.”고 말하는 강허달림은 우리시대가 주목해야 될 여성 싱어송라이터다.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