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김헌식(중원대학교, 정보콘텐츠학박사, 평론가)
한국 사회의 무속 의존 현상에 대해서 접근하려면 전통 사회의 무속과 현대 사회의 무속이 다른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전통 사회의 무속은 막스 베버의 언급처럼 주술 사회의 특성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질병 치료를 위해 무속에 의존하는 경향이다. 과학적인 인식이나 의료지식이 적었기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기도 했다. 현대에서 질병 치료를 위한 무속 의존은 상대적으로 마지막 심리적 위안의 수단일 수는 있지만, 전적인 방법은 아니게 되었다. 현대의 무속에 대한 의존은 세속적 성공에 대한 욕망에 더 크다. 세속적 성공은 부와 명예에 관련한 개인의 미래를 알아보려는 의도가 있다. 상당 부분은 심리적인 치유에 초점이 할애되는데 이러한 점은 기존의 종교나 의학이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많은 의학 방송에서는 의료과학적인 치료법 보다는 민간요법들이 많이 다뤄지는데, 그 한계와 위험성에도 계속 제작되는 이유는 시청자들의 반응이 좋아서다. 반응이 좋은 이유는 시청자들에게 존재하는 신묘한 비법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과학적 의료 문화가 자연발생적으로 구축되지 않았고 서양에서 이식되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방식에 대한 믿음이 이어져 내려왔다. 더구나 민간요법들은 누구나 시도해 볼 수 있다. 자신이 처지를 해보면 미래에 좋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통제의 실현과 성취감을 가져다주리라는 믿음이 있다. 무속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대목이 있다. 교회나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무속에 경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존 종교에서는 미래에 대해서 다루지 않는다. 먼 내세를 이야기하거나 현재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 초점을 맞추는가 하면, 개개인의 특성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런데 무속은 미래에 매우 관심이 많고 그것을 중심에 둔다. 그것이 무속이 진화시켜 온 경쟁력이자 생명력의 원천이다. 다른 종교는 그러지 않는데, 심지어 오로지 나라의 국운이나 대통령까지 예측한다. 특히, 무속에 속하는 사주명리학, 관상, 손금 등은 개개인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정신의학이나 상담심리도 개개인에 초점을 맞추지만, 개인의 미래를 논하거나 예측하지 않는다. 개인의 미래는 세속적인 욕망이다. 이는 성공과 명예, 돈 등이다. 더구나 약을 먹거나 지침을 받는다고 해서 세속적인 욕망이 달성될지 알 수가 없다. 외국인들은 정신적 증상과 고민이 있으면 정신과 상담을 추천하지만, 한국인들이 잘 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다른 점이 무속에 있다. 무속에서는 단지 개인의 미래를 예측하는데 머물지 않는데 개인에게 선택권을 준다. 민간요법과 같이 개인의 통제력을 강조하는데, 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조건절이다. 원래의 미래가 이렇지만, 그래도 만약 무엇을 어떻게 한다면 그 미래의 운명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며 조언이나 충고하게 된다. 운명을 바꾸지는 않아도 조심하거나 유의하고 때를 기다리라는 유형도 나쁘지 않게 심리적 작용한다. 아무리 부정적이라도 긍정적으로, 아니면 최소화할 수 있는 일정한 희망의 메시지를 주기 때문에 개인은 그 말에 신경을 쓰게 된다. 무엇을 조심하는 것, 나아가 부적을 붙이고 굿을 하면 좋다거나 묘를 옮기면 좋다는 방식도 여기에 해당한다. 즉 사람의 행위, 개인의 선택이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여 참여와 실천을 강조한다. 물론 거꾸로 미래가 달라지지 않는 것은 그 개인의 참여와 실천이 잘못된 선택 때문으로 일을 그르쳤다고 강조한다. 모든 것이 절대자에 좌우되거나 예정되어 있다는 교리체계와 다른 면모를 보인다. 후회의 미래를 만들지 않으려면 개인이 움직여야 한다.
또한, 헤아릴 점은 한국에서 무속이 강한 것이 개인주의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강한 가족주의 때문에 무속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가족 구성원들의 세속적 성공을 위해서 무속에 더 의존하는 경향은 바로 제한적 이타주의의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마다하지 않는 경향도 이런 가족 중심의 문화 심리 때문에 가능하다. 즉, 가족 구성원을 위해서 삿된 일도 마다하지 않는 가족 중심의 사고가 무속을 강화할 수 있다.
더군다나 한국 사회의 압축 성장도 살펴야 한다. 한국은 해방 이후 급격한 경제성장을 해왔고, 이 가운데 계층이나 계급적 변화가 급격하게 이뤄져 왔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기에 개인의 신분 변동은 이전 사회와 달리 클 수 있었다. 시장 자본주의 때문에 누구나 세속적 욕망을 꿈꾸게 되었고, 이를 실제로 실현한 사례도 많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대의 민주주의에 따라 형식적으로는 대통령을 포함한 선출직 정치 리더가 누구나 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 거꾸로 만약 북한과 같은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면, 한국에서 무속이 번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국과 같이 세상 모든 이치가 물질의 동학이라 믿는 유물론 국가에서 통하지 않을 것이다. 계층과 계급이 굳어진 유럽에서 무속이 힘을 받을 리 없다. 이에 비해 아직 한국 사회가 열린 역동적 사회이기에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기대를 아직은 버릴 수 없게 된 면이 있다.
아울러 한국 사회의 성장과 신분 상승 현상도 작용한다. 한국은 압축 성장에 따라 양극화가 심해졌고, 이에 따라서 운명이 극단적으로 갈리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미래는 더욱 불확실해졌고 이를 제어하고 통제하고 싶은 욕망이 더욱 커졌다. 대박과 쪽박의 양극화가 심해졌고 심지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조차 위태롭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초고령화 사회가 될 만큼 평균 수명은 늘어났는데, 노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더욱 그러하다. 불안한 미래는 더욱 자신이 관여할 수 있는 대처 방안을 갈구하게 한다. 무엇인가 해야 하는데 이를 무속이 파고든다.
덧붙여 한국 사회의 매크로 한 배경도 있다. 한국 사회 전체가 추격 모델에서 선도모델로 바뀌어야 하는데 전체적으로 길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특히, 서양의 모델을 따라만 가다가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열어가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 때문에 이제 모델로 삼을 사례는 많지 않다. 우리 스스로 주도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더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더욱 의존할 대상이 필요해졌다. 다른 국외의 것도 이제 따를 사례가 없으니 우리 안의 어떤 방법에 주목하는 셈이 되었다. 그것 가운데 하나가 무속인 것이다.
개인이 미래에 관심을 두는 것은 그래도 미래에 대해 기대감이 있는 것이므로 나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속에 대한 태도일 것이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참고적인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볼 것인가, 절대적인 의사 선택의 기준으로 삼을 것인지도 개인이 선택하는 것이다. 그에 상응하는 책임도 개인이 지는 것인데 그것을 넘어설 때 부작용이 개인만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으니 항상 비판적인 지적이 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