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사 영화의 한계를 넘어
“너희들은 어땠니. 나는 괜찮았는데”
“나는 만화가 더 나아”
“뭐라고?
“애니메이션 알라딘이 더 좋아”
“나는 재미있던데”
영화관에서 실사 영화 ‘알라딘’을 보고 나온 가족의 대화이다. 물어보는 사람은 아빠였고, 대답은 아이들이 했다. 알라딘이 흥행을 달린 이유를 알 수 있는 대화이기도 하다. 엄마는 침묵. 어차피 엄마는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대화에 나서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아이들을 위해서 온 관람이었다. 그래 그렇다 가족들끼리 영화를 보는 것은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당연히 해야하는, 그것은 하나의 유행이라기보다는 생활의 스타일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끼리 영화를 볼만해야 한다. 그러므로 영화 기생충처럼 난데없이 갑자기 19금 스러운 장면이 나오면 당황할 수 있다. 물론 아이들은 더 심한 것을 볼 수 있는 인터넷 환경인데 그 극중의 배우들은 부부의 성애를 연기하고 있기 때문에 부모들이 오히려 얼굴이 뜨거워진 일인데 말이다.
실사 영화 '미녀와 야수'는 잊어라. 만화 영화 ‘알라딘’은 실사 영화와 다른 점이 있기 때문에 유리하고 오히려 실사 영화는 불리한 점이 있다. 우선 실사 영화는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쳐내지 못한다. 또한 만화영화의 실사화는 이미 만화영화의 감동을 다시 실제적으로 생생하게 느끼기 위한 아우라의 파생심리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만화 영화의 캐릭터에 매력을 느낀 팬들이 실사 영화의 배우들에게 반드시 매력을 느낄 수 있을 지는 알 수가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영화 ‘알라딘’의 실사화에서 한껏 분위기를 살려준 것은 지니 역을 맡았던 윌 스미스였다. 그의 자유자재의 표정연기는 비단 보톡스를 맞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의 다재다능한 표정연기가 지니의 애니메이션성을 실제로 그 이상으로 구현해주었음을 알 수 있게 했다. 만약 실사 영화 알라딘에 매력을 느꼈다면 이런 점에 기인할 것이다. 또 하나 기인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새 진일보한 특수효과 기술일 것이다. 각종 현실을 뛰어넘은 특수 효과와 그래픽 기술은 만화영화가 가지고 있는 상상성을 뛰어넘게 하고 있다. 원작에 대해서 강한 매혹에 빠진 이들은 새로운 파생 콘텐츠나 재창작 작품에 더 매력을 느끼는 것이 보통이다. 차라리 원작을 보지 못한다면 새로운 리메이크작에 더 좋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앞으로 그 가족으로 돌아가보면 아빠는 알라딘에 대해서 관심이 없거나 별로 인식을 못하고 있다가 아이들을 위해서 보러 갔을 것이고 평소에 관심 없던 작품에 대해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영화관에 갇혀 있다 보면 관심이 없던 영화가 좋게 보이는 것은 다반사로 있는 일이다. 생각지도 못하였는데 의외로 볼만한 작품이 된다. 처음부터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기대를 잔뜩하고 온 이들은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지 알 수지 의문이다.
실사 영화가 대개 실패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두가지 방법으로 타개를 해야 한다. 영화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부모와 같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유치한 만화영화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만드는 것이다. 제작비를 줄이는 방식으로 손익 분기점을 조율하는 것이 필요하다.
할리우드는 실사 영화를 계속 제작할 수밖에 없다. 이유는 오리지널 콘텐츠에 대한 OTT기업에 사활이 걸린 화두이기 때문이다. 완전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있다. 이왕이면 사람들에게 익숙한 콘텐츠라면 생판 모르는 것보다는 유리할 것이다. 엄청난 대박을 터트리지는 않아도 최소한 소박 그리고 중박까지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할리우드는 디즈니를 비롯해서 판권을 가지고 있는 만화 영화를 실사 영화로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진정한 팬을 자임하는 이들을 멀어지게 할 수 있지만 외연은 확장되는 것이 물론이겠다. 그럼에도 불후의 명작으로 등극하지는 못할 것임에도 말이다. 기술은 더욱 발전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실사 영화에서 주연배우를 누가 해도 완전히 만족 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원작을 통해 그리는 상상의 인물을 어떻게 완변히 만족시킬까. 그래도 노력을 할 뿐.
글/김헌식(평론가,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