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 짓하니까 청춘이다.
-잉여 짓, 잉여문화
김헌식(박사, 평론가, 카이스트 미래세대 행복위원회 위원)
2005년 스티브 잡스는 스탠포드 대의 졸업식 연설에서 자신의 잉여 짓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는 미혼모의 아들이었고, 가난한 그의 어머니는 양부모에게 입양을 시켰다. 하지만 어머니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애초에 잡스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여유 있는 중산층 집안에 입양시키기를 바랐지만, 중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양부모는 사정도 여의치 않아 잡스를 대학을 보낼지도 의심스러웠다. 그의 양부모는 잡스를 대학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평생 저축한 돈을 한 학기 등록금에 쏟아 부었다. 이를 본 스티브 잡스는 대학을 그만두었다. 그런데 잡스는 한편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신이 원하는 과목들을 마음대로 청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때 학점이나 취직에 도움이 되지 않은 과목들을 자유롭게 들었다. 한마디로 잉여 짓이었다. 특히 타이포그라피(서체학)에 대한 청강은 결정적이었다. 20대의 잡스에게 이런 잉여 짓이 없었다면 아름다운 서체를 다양하게 가진 최초의 맥 컴퓨터는 존재할 수 없었고, 오늘날의 아이폰도 없었을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좀 더 과격하게 잉여인간을 말했다. 인류 역사는 가장 창의적인 0.1%와 그들을 알아보는 0.9%가 만들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99%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잉여인간이라고 했다. 이는 의식적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잉여인간의 생래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99%에게 가장 창조적인 사람들은 잉여 짓이나 하는 존재들로 보인다.
본래 잉여인간이라는 말은 이반 투르게네프의〈잉여인간의 일기 The Diary of a Superfluous Man〉(1850)때문에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전에 알렉산드르 푸슈킨의〈예브게니 오네긴 Yevgeny Onegin〉(1833), 이반 곤차로프의〈오블로모프 Oblomov〉(1859)에는 공통적으로 잉여인간의 캐릭터들이 나온다. 주로 이런 작품의 주인공들이 벌이는 잉여짓은 부정적이다. 인생을 헛되이 보내는 부유층 젊은이들에 대한 비판이 강했다. 여기에서 잉여인간은 ‘불필요한 인간’을 말한다.
사회구조적인 원인, 외적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잉여적인 짓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을 것이다. 손창섭의 <잉여인간>(1958)은 한국 전쟁이후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반영하고 있다. 이 소설의 매력은 잉여인간 자체가 아니었다. 잉여인간이 아니게 된 소수의 사람들에 대한 주목이 탁월했다. 그들은 잉여 짓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까지 책임을 져야 하므로 그에 따른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 소설에서 잉여 짓과 잉여인간의 문제는 개개인의 탓이 아니라 사회구조와 환경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사실 잉여는 혼란스럽다.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절대적인 기준으로 말할 수는 없다. 피드백 루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일단 잉여(剩餘)는 사전적으로 ´남는, 넘치는´ 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잉여생산물은 풍족한 생산량이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 덤은 손님의 마음을 빼앗는다. 그러나 잉여가 많으면 생산설비 일부는 쓸모가 없어진다. 잉여생산물은 소비자에게는 여유를 제공하지만, 생산자에게는 고통을 준다. 노동도 마찬가지다. 잉여인력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에게는 고통을 준다. 남아도는 많은 사람에 비해 일자리가 적기 때문이다. 일자리가 없을수록 노동자는 불리하고, 일자리를 통제하는 고용주는 유리해진다.
산업시대에서 잉여인간은 바로 이런 생산과 쓰임에서 부적격자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즉 쓸모가 없는 인간이다. 생산에 쓸모가 없는 인간, 실업자다. 한동안 사라졌던 잉여라는 말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는 것은 이런 사회적 맥락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적 맥락 안에 본질적인 문화적 잠재성을 배태하고 있는 것이라 긍정적이기도 하다.
잉여인간은 지식인들의 자조감에서 나온 단어이기도하다.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War and Peace〉(1865~69)의 피에르 베주호프,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백치 The Idiot〉(1868~69)의 미슈킨 공작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농민이나 노동자들은 노동을 통해 생산물을 만들어내지만 지식인들은 현실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없어 보인다. 생산에 참여해보고 싶어도 산업사회의 생산시스템에서 그들은 별로 할일이 없는 한량으로 보인다. 생산 공간에서 필요하지 않은 인력이 자괴감이 작용한다.
잉여인간이 잉여 짓, 잉여문화로 다시금 청춘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이유는 이런 고민과 맞물려 있기도 한다. 즉 외연적 사회적 구조와 개인들의 극복 방식이 만난 곳에 잉여 짓 현상이 있다. 문화적 의식은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자의식은 강해졌는데 생산에 참여하고 싶어도 참여하지 못하니 말이다. 꿈을 이루고 싶은 열망은 어느 세대보다 높지만, 그 성취여부에 대한 불확실성은 갈수록 커져만 간다. 예컨대 취직난으로 모두 고용시장에서 잉여인력이 되어가고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행동들이 잉여 짓이 될 가능성이 많은, 그 불안 속에서 생활한다. 치열한 입시경쟁을 뚫는 등 매우, 열심히 살아왔지만 그것들이 모두 잉여 짓에 불과할 확률이 높다는 공포 심리도 있다. 생산의 어느 곳에서라도 주체가 되고 싶지만 주체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잉여는 부정적이다. 따라서 생산물을 소비하면서 생산을 하지 않은 잉여인간에 대한 불안정한 심리가 생겨나기도 한다.
그런데 앞서 잉여는 혼란스럽다고 했다. 따라서 부정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잉여 짓을 하지 않고는 이 상황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이 잉여 짓 속에서 희망을 꿈꾸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잉여 짓을 그만둔다면 미래에 관한 삶의 희망도, 현실을 견뎌낼 수단이 사라진다. 무엇이라도 열심히 해야 하는 실존적 존재이다. 단 이런 의식적인 의지만이 해답일까.
예컨대, 잉여가 문화와 밀접하다는 점을 본다면 인류에게 잉여 짓은 필수적이다. 문화예술은 잉여 짓이 없으면 탄생할 수 없다. 그것은 비단 새로운 창조의 필수적인 요소다. 실제 사례를 들면서 설명해보자.
어느 자수성가한 집안에 교수의 딸을 며느리로 맞았다. 그 며느리는 글도 쓰고 텔레비전이나 이따금 출연했다. 시어머니는 그런 며느리에 대한 경외감이 있었다. 아이를 맡기면 마다하지 않고 보아준 이유였다. 하지만 그런 경외감은 아파트 단지의 같은 동, 아래 위층에 살면서 깨졌다.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보기에 매일 빈둥거리고 있었다.
며느리는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멍하게 보거나 인터넷 서핑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리저리 왔다갔다가 하는가 하면 바닥에 누워 뭉그적거리기도 빈번했다. 한마디로 빈둥거리기가 일쑤였다. 그런 일들이 있은 뒤로 시어머니의 태도는 싸늘해졌다. 아무 쓸모없는 짓만 하면서 아이나 맡기는 며느리가 괘씸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며느리의 글이나 방송 출연은 열정적이고 창조적이었다. 경외의 대상은 곧 잉여 인간이 되어버렸다.
시어머니가 만약 잉여와 문화예술 창작의 관계를 알았더라면 변심은 없었을지 모른다. 어디 문화예술만 그럴까. 인류문명이 모두 그렇게 진보했다. 잉여 짓은 창조를 위한 토양이자 공기다. 당장에는 의미와 가치가 없는 행위인 것 같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대안이 생산된다. 잉여는 행동의 차원에서만 생성될 수 없다. 행동은 시간과 공간을 만나야 생명력을 얻는다. 행위적 창조에는 잉여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비어야 채움이 있고 쓸모가 있다. 잉여 짓이 있어야 생산적이 된다. 생산만 생각하면 생산이 되지 않는다.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모두 잉여적이다. 기존의 관점으로는 쓸모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젊은 대학생 스티브 잡스의 청강 행위를 누가 생산적이라고 말했을까.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아니라 ‘잉여 짓 하니까 청춘’이다. 기존의 사회시스템에 부합하지 않는 ‘짓’이 잉여로 보이지만 그 잉여적인 것은 새로운 사회를 여는 단초가 되며, 바로 청년기는 잉여기이다. 청춘들의 행위는 잉여 짓이고, 그것은 통과의례이면서 의무적 그리고 권리적 과정이기도 하다. 언제나 인류의 역사에서 청년은 잉여 짓을 통해 새로운 대안을 만들고,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며 사회를 만들어 나갔기 때문이다. 지금은 잉여 짓이 정말 많이 필요한 패러다임 교체기이다. 특히 산업경제시대의 생산관점에서 볼 수 없는 문화경제시대의 잉여 짓이 엄청나게 필요하다. 당장에 청춘의 행위를 쓸모 있음 없음으로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잉여 짓도 치열하게 해야 한다. 잉여를 잉여적으로 할 때 잉여문화의 긍정성은 부정성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글 김헌식 codess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