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소설·드라마·영화로 각광받는 신윤복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12. 20. 17:18

남장 여자? 천재 화가를 향한 대담한 상상


소설·드라마·영화로 각광받는 신윤복
중앙SUNDAY

18세기 조선의 천재 화가 혜원(蕙園) 신윤복을 향한 대중문화의 구애가 뜨겁다. ‘남장 여자’였다는 둥(『바람의 화원』), 일본의 전설적 화가 도슈사이 샤라쿠가 실제론 혜원이라는 둥(『색, 샤라쿠』) 팩션 소설의 상상력이 다채롭기 그지없다. 이에 힘입어 드라마·영화도 한창 제작 중이다. 시대를 풍미하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풍속화의 거장이 21세기 한국 사회에 되살아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문근영 분)은 남장 여인으로 설정된다(사진 위). 김홍도(박신양 분, 사진 아래)와는 도화서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어 불세출의 그림 대결을 벌이게 된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문근영 분)은 남장 여인으로 설정된다(사진 위). 김홍도(박신양 분, 사진 아래)와는 도화서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어 불세출의 그림 대결을 벌이게 된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 신윤복(1758?~1813 이후)을 남장 여자로 등장시킨 소설 『바람의 화원』(이정명 지음, 밀리언하우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더니 드라마로 제작되는가 하면 신윤복을 성적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 ‘미인도’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신윤복이 주인공인 팩션도 계속 창작 중이다. 가위 ‘신윤복 신드롬’이라 부를 만하다.

지금은 팩션 장르가 신윤복을 주목하고 있지만, 그간 혜원(蕙園) 신윤복에 대한 독자적인 학술서는 물론 교양 대중서도 그리 흔하지 않았다. 한문학자 강명관의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오다』 정도가 그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렸다. 동시대 또 한 명의 걸출한 풍속화가인 단원 김홍도(1745~?)를 다룬 책은 많은 반면 신윤복은 이 책 저 책에 조금씩 널려 있었다.

예컨대 미술사학자 오주석은 『단원 김홍도』같은 연구서를 내면서도 혜원 신윤복에 대해서는『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나 『한국의 미(美) 특강』에 부분적으로 언급했다. 굳이 대비해 보자면 김홍도는 비교적 점잖은 풍속을 다뤄 권장의 대상이지만 신윤복은 미인·기녀를 주로 그려 내놓고 화제 삼기에는 부담스러웠을지 모른다.

영상매체와 어우러지는 화풍
그렇다면 오늘날 신윤복 신드롬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일단 미의 관점에서 신윤복은 미디어의 선각자다. 그림은 현실을 비추는 오늘의 미디어와 같다. 미디어는 무엇보다 아름다운 존재를 비춘다. 이에 풍속화가 김홍도보다 ‘미인도’의 신윤복이 각광받는지 모른다.

신윤복 신드롬에는 또한 대중의 마음이 담겨 있다. 대중적 정서는 주류의 질서를 넘어 새롭게 뭔가를 하려는 이들에게 지지를 보낸다. 김홍도가 중인 계급인 화원의 신분을 넘어서는 창조적인 화가로 평가받지만, 지금 보면 신윤복이 더 혁신적이다. 김홍도는 성리학적 유교에 기초한 문인화 질서를 가로질러 풍속화로 ‘사람살이’에 주목해 관념적인 세계가 아니라 일상 삶을 화폭에 담아냈다.

임진왜란 이후 경제력 발달과 함께 나타난 그림을 향한 대중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신윤복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특정한 인물군, 즉 여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신윤복의 그림에 기녀나 미인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다. 그는 여성을 통해 사람의 아름다움에 주목했다. 또 기녀를 통해 양반 중심의 성리학적 유교질서를 풍자하고, 추상적 관념론을 우선시하는 화풍에 반기를 들었다. 주류 화풍에서 신윤복의 그림세계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당연했다.

또 다른 신윤복의 현대적 코드는 ‘색’이다. 색(色)은 현실이자 구체적인 인간의 욕망이다. 문인화같이 관념적인 그림에서 색채는 중요하지 않다. 사물이 실제 모습과 달라도 ‘기개’ ‘절조’ 같은 관념원칙이 중요하다. 반면 일상생활을 다룬 그림에서 색채는 더 생생해야 한다. 신윤복 그림에서 아름다운 색채감이 특징인 이유다. 주류의 기록에서 신윤복의 평가는 절하되었지만, 아름다운 사람을 둘러싼 신윤복의 사실주의적인 색채감은 오늘의 영상 이미지와 맞는 면이 크다. 그렇지 않은 김홍도는 오히려 대중적 영상미에서는 인기가 떨어진다.

상상력 자극하는 미스터리한 삶
하지만 영상 이미지만으로 대중문화 콘텐트가 될 수는 없다. ‘이야깃거리’가 필요하다. 신윤복을 이야기 틀 거리로 끌어올린 것은 이정명의 팩션『바람의 화원』이다. 김홍도와 신윤복을 단절시키지 않고 스승과 제자 관계로, 여기에 ‘남장 여자’라는 제3의 섹슈얼리티를 접목시켜 극적 로맨스를 도드라지게 했다. 조선의 문예부흥을 일으킨 정조(1752~1800)를 등장시켜 음모와 추적이라는 스릴러 요소도 넣었다. 이는 예술과 정치·사회를 구분하는 이전의 시각들과 다른 점이다.

역사적 사실보다 픽션이 더 중요한 팩션에는 공식적 기록이 적은 인물이 적격이다. 도화서 화원이었지만 그림의 파격성과 역시 화원이었던 부친 때문에 공식적인 자리를 피한 일화가 이력의 전부인 신윤복은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이 때문에 신윤복을 일본 화가 도슈사이 샤라쿠로 그리는 팩션 작품까지 나왔다. 김재희의 『색, 샤라쿠』는 1794년 10개월 동안 일본 에도에서 불꽃처럼 140여 점의 그림을 남기고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전설의 화가 샤라쿠를 신윤복으로 설정했다.

이전에는 이영희 교수의 『또 한 사람의 샤라쿠』같은 책을 통해 김홍도가 샤라쿠로 추정되었지만, 이제 신윤복으로 바꾼 것이다. 샤라쿠의 강렬한 색감이 신윤복의 색감과 일치한다고 본 것이다. ‘색감’ 하면 인상파인데 샤라쿠의 우키요에(浮世繪)는 마네·모네·드가 등 전기 인상파는 물론 고흐 등 후기 인상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로써 신윤복은 단순히 한반도의 지역성이 아니라 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닌 화가가 된다. 민족의 코드는 어김없이 신윤복에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신윤복 신드롬에는 그간 한국 사회에서 유행했던 대중문화와 장르문학이 모두 모여 있다. 아쉬운 점은 있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연출 장태유)은 미스터리 추리극, 영화 ‘미인도’(감독 전윤수)는 남장 여성을 둘러싼 성애에 더 주목하고 있다. 그간에도 예술인을 다룬 국내 작품이 드물었고, 다뤄도 그들의 예술 세계를 깊게 형상화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번 신윤복 신드롬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그의 작품세계가 얼마나 잘 드러날지 지켜 볼 일이다.

김헌식 문화평론가 codesss@naver.com

´색(色)은 없고 색(色)만 남은´ 신윤복 신드롬 
<칼럼>드라마-영화 붐업 속 섹슈얼리티만 강조
[2008-10-23 11:43:00ㅣ조회:702]
신윤복을 다룬 소설, 영화, 드라마는 물론 간송미술관의 전시회도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신윤복 코드는 다중분할코드다. 이런 말을 쓰면 뭔가 복잡해 보이고, 나아가 있어 보이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다만, 다중분할 코드라고 한 것은 신윤복에는 여러가지 문화적 코드가 맞물려있거나 얽혀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간 우리는 신윤복의 의미와 그에 따른 문화예술적 가능성을 간과해왔고, 그것을 대중문화 콘텐츠가 뒤늦게 주목을 하고 있다.

신윤복에 대한 집중은 신윤복을 다룬 소설의 인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좀 더 문화적 코드의 다발성을 생각해야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 때문에 신윤복에 얽인 코드를 다중(多衆)으로 분할해서 접근해야 좀 더 용이할 수 있다. 그만큼 많은 기호들이 복합적으로 교차하면서 그 코드는 광대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 확장의 중심에 ‘팩션’ 장르가 있다.

지금은 팩션으로도 주목하고는 있지만, 혜원 신윤복에 대한 독자적인 학술서는 물론이고 교양 대중서도 그렇게 흔하지도 않았다. 강명관의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오다´ 정도가 혜원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렸다. 단원 김홍도에 대한 책은 많지만 혜원 신윤복은 하나의 독자성을 갖지 못하고 파편화된 형태로 산재해왔다. 예컨대, 오주석은 ´단원 김홍도´에 대해 따로 연구서를 냈지만, 혜원 신윤복은 ´우리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나 ´한국의 미(美) 특강´ 같은 책의 한 부분에 머물게 했다.

그 이유를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다. 김홍도는 ‘풍속화’라는 타이틀 때문에 교과서적인 권장의 대상이지만, 신윤복은 그 의미성에 비해 섹슈얼리티에 갇혔다. 대중적 호응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섹슈얼리티는 음지에 침잠하고 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는 사실여부와 별개로 이제 대중문화 속에서는 뒤집히고 있다. 우선, 대중적 정서는 언제나 주류의 질서를 넘어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려는 이들에게 호응을 보낸다. 과거 김홍도가 주류 질서에 대한 저항의 코드로 읽혔지만, 지금은 그 단계를 넘어선 신윤복에 주목하고 있다. 김홍도는 성리학적 유교의 문인화 질서를 가로질러 풍속화를 통해 ‘사람살이’에 주목했다. 관념적인 세계가 아니라 일상의 삶을 화폭에 담아냈다. 임란이후 사회 경제력의 발달은 폭넓은 그림의 대중적 수요를 낳은 것과 맞물려 있었다.

그런데 신윤복은 그것에서 하나 더 들어가서 사람들의 특정한 인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신윤복의 그림에 기녀들이나 미인들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다. 신윤복은 여성을 통해 사람의 아름다움에도 천착해 들어가기 시작한다. 주류화풍에서 신윤복의 그림세계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경제력의 발달이 섹슈얼리티의 주목과 맞물려 가는 것에 맞추어 신윤복은 기녀들을 주인공으로 양반 중심의 성리학적 유교질서를 풍자하고, 추상적 관념론을 우선시하는 화풍에 반기를 들었다.

또 다른 코드는 ‘색’이다. 색(色)은 현실이자 구체적인 인간의 욕망이다. 관념적인 화풍에서 색채는 제한된다. 실제 현실과 유리되어 본 모습과 달라도 관념원칙이 중요하다. 하지만 일상 구체 화풍에서 색채는 더 생생하고 강렬해진다. 신윤복 그림이 대담한 표현력과 아름다운 색채감이 특징인 이유다. 그러나 기록의 역사는 지배자들의 몫이므로 신윤복의 평가는 절하되었다. 하지만 미적 인간을 둘러싼 신윤복의 사실주의적인 색채감이 오늘날의 영상 이미지주의와 맞닿아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단원 김홍도는 오히려 대중적 영상미학에서는 배제된다.

하지만 영상 이미지만으로 대중문화콘텐츠가 될 수는 없다. 스토리가 될 만한 틀 거리가 필요하다. 신윤복을 하나의 이야기 틀 거리로 끌어 올린 것은 이정명의 팩션 소설´바람의 화원´이다. 김홍도와 신윤복을 단절시키지 않고 스승과 제자로 그리고, 여기에 남장여자라고 하는 제3의 섹슈얼리티를 접목시켜 로맨스의 경계를 넘나든다. 조선의 문예부흥을 일으킨 정조라는 아이콘을 통해 음모와 추적이라는 스릴러의 요소도 가미했다. 이는 예술과 정치, 사회를 구분하는 이전의 시각들과 다른 점이다.

대부분 상상력으로 구성되는 팩션에 허구가 많은 인물이 적격이다. 도화서 화원이었지만, 그림의 파격성 때문에 쫓겨나는 일화만 간략한 신윤복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 때문에 신윤복을 토슈사이 샤라쿠로 그리는 팩션 작품까지 나왔다. 김재희의 ´색 샤라쿠´는 일본 에도에서 1794년 10개월 동안 140여점의 그림을 남기며 불꽃처럼 활동하다 어느 날 연기처럼 사라진 전설의 화가 샤라쿠를 신윤복으로 설정했다.

이전에는 이영희 교수의 ´또 한사람의 샤라쿠´같은 책을 통해 김홍도가 샤라쿠로 추정되었지만, 샤라쿠의 강렬한 색감을 우선해 신윤복으로 낙점시킨 것이다. 샤라쿠의 우키요에는 마네, 모네, 드가 등 전기인상파는 물론 고흐 등 후기인상파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여기에서 신윤복을 둘러싼 대중적 심리 코드를 하나 알 수 있게 한다. 즉 신윤복은 단순히 한반도의 지역성이 아니라 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니게 된다. 민족의 코드는 어김없이 신윤복에도 손길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신윤복 코드에는 그간 한국사회에 유행했던 대중문화와 장르문학이 포괄적으로 응축되어 있다. 다만,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미스터리 추리극, 영화 ‘미인도’는 남장 여성을 둘러싼 섹슈얼리티에 더 주목하고 있다. 그간 한국에서 예술인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들이 드물었다. 다루어도 그들의 작품세계에 예술적으로 천착하는 경우는 없었다. 모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번 신윤복-김홍도에 대한 주목도 결국은 그림에 대한 문외한들의 엉뚱한 잔치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바람의 화원´은 천재적 끼를 강조하는 통해 삶의 경험과 철학이 개연성있게 전개되지 못하는 가운데 신윤복의 ´그림´ 자체가 아니라 부가적인 내용이 더 화제가 되고 있으며, ´미인도´는 신윤복의 섹시한 몸에 더 관심이 경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