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논평

유행어 낙관에서 ▶▶▶▶ 허무로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1. 2. 13. 19:52

유행어로… 낙관에서 ▶▶▶▶ 허무로



[동아일보]

《‘되고’ ‘신상’ ‘달인’ ‘뿐이고’…. 올해도 드라마, 개그, CF에서 나온 유행어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 유행어들을 통해 2008년 세태를 되짚는다.》

“난, 생각대로 안됐을 뿐이고!”

“판교에 집 사면 대박난다고 해서 최대한 대출을 받아 쏟아 부었을 뿐이고, 입주가 코앞인데 집값은 계속 떨어지고 있고.”

“원자재펀드가 뜬다고 해서 추천하는 대로 러시아펀드에 가입했을 뿐이고, 러시아의 그루지야 침공 때 펀드가 반 토막 났는데 난 아직도 그루지야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최근 들어 ‘뿐이고’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KBS2 ‘개그콘서트’에서 방송기자 역의 개그맨 안상태가 황당한 상황에 처했을 때 하는 말이다. 안 기자는 은행 강도 사건현장을 중계하다가 갑자기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난”이라는 말을 탄식조로 내뱉는다. 그러고 나서 “돈 찾으러 왔을 뿐이고, 그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고”라는 말이 이어진다.

뜻하지 않게 위기에 놓인 처지를 한탄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런 위기를 스스로 타개할 수 없는 무력감과 이로 인한 허탈함까지 표현한 것. 올 상반기 광고를 통해 알려져 가을까지 크게 유행했던 ‘되고 송(song)’에 담긴 긍정적인 생각과는 정반대다. 

유행어는 세태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볼 때 ‘되고’에서 ‘뿐이고’로 유행어가 바뀐 것은 유행어의 단순한 교체를 넘어 사회 분위기의 변화와도 맞물린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주은우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상반기에는 정권도 바뀌고 해서 사람들이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하면서 사회 분위기가 밝았는데, 경제가 곤두박질치고 새 정권이 제대로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바람에 냉소적인 생각이 커졌다”면서 “이런 상황과 유행어가 맞아떨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되고’가 반영하던 상반기 사회상과 ‘뿐이고’가 만연한 최근의 사회 분위기는 아주 다르다. 어떤 곤경에 처하더라도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되고송’이 유행했을 때의 낙관적 분위기는 베이징 올림픽을 전후해 정점에 올랐고, ‘되고송’을 패러디한 노래가 쏟아졌다.

“시집 얘기 나오면 간다 하면 되고, 친척들 오면 친구 만나면 되고, 노처녀 친구 점점 줄어들면, 화려한 싱글하면 되고.”(노처녀 되고송)

“똑똑한 신입 늘어나면 근태로 승부하면 되고, 회사원인 게 힘들어질 때면 백수 친구 얼굴 보면 되고.”(샐러리맨 되고송)

최근에는 누구나 하나씩 갖고 있는 ‘뿐이고’ 사연이 일상 대화에 자주 등장한다. 9월에 회사를 그만두고 액세서리 수입 사업을 시작한 이영인(33) 씨는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환율이 오를 뿐이고, 자금줄로 갖고 있던 주식도 반토막이 났을 뿐”이라고 한탄했다. 고깃집을 하는 안모(39) 씨는 “쇠고기 파동을 겨우 피하고 나니 숯이 몸에 해롭다는 분석이 나왔고, 그게 잠잠해지니 반찬 재활용 문제가 불거져 이래저래 가게 분위기가 나빠지기만 할 뿐”이라고 말했다.

문화평론가 김헌식 씨는 ‘뿐이고’의 유행이 ‘위험사회’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무력감과 맞물리는 것으로 해석했다. 김 씨는 “현대인은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한 위험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사회에 살고 있다”면서 “난 열심히 살았는데 미국의 금융 시스템이 그렇게 망가질 줄 어떻게 알았겠느냐는 항변의 심리도 ‘뿐이고’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