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심리경영 이론과 사고법 100

허쉬만이 1970년 126쪽에 달하는 필생의 역작 ‘이탈, 항의, 충성(원제: Exit, Voice and Loyalty)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3. 4. 1.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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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 있을 때 ‘이탈’할 것인가, ‘항의’할 것인가

By Roger Lowenstein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알버트 오토 허쉬만이라는 경제학자는 학교의 질적인 격차가 점차 벌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허쉬만은 공립학교의 질이 떨어지면 부유층은 자녀들을 사립학교로 전학시킬 것이라고 내다봤다. 허쉬먼은 이 같은 선택에 ‘이탈(exit)이라는 용어를 붙였다. 한편 남아있는 자녀들의 부모는 학교 이사회에 참석해서 문제 제기를 하거나 학교 측에 서한을 보내는 등 ‘항의(voice)’를 통해 교육의 질을 높이려고 시도할 것이다.

Ellen Weinstein
대체로 시장에서는 ‘이탈’이 대세인 반면, 정치에서는 ‘항의’가 주류를 이룬다.

그런데 이렇게 항의하는 쪽은 두 가지 불리한 점을 안고 있다. 첫째, 이윤 창출에 무관심한 공립학교는 항의를 받아도 미온적으로 대응할 것이다. 둘째, 부유한 학부형이 학교를 떠난 뒤라 공립학교에는 발언권이 강한 세력이 이미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허쉬만 이론이라는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면 ‘이탈’과 ‘항의’라는 패러다임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현재 다니는 직장에서 불만이 쌓였다고 생각해보자. 상사에게 문제제기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퇴사할 것인가? 똑같은 문제에서 여러분이 부하직원이 아니라 상사의 입장일 수도 있다. 그럴 경우 부하직원(또는 고객)을 붙잡기 위해서 어느 수준까지 달랠 것인가? 여기에서 허쉬만 이론의 세 번째 요소가 등장한다. 바로 ‘충성(loyalty)’이다. 충성심 유무에 따라서 위 질문의 답은 달라질 것이다.

대체로 시장에서는 ‘이탈’이 대세다. 주가가 하락하면 주식을 팔아치우는 식이다. 반면 정치에서는 ‘항의’가 주류를 이룬다. 라디오 토론만 들어봐도 알 수 있다.

허쉬만은 강력한 조직은 (어떤 영역에서든) 이탈과 항의 모두를 장려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기업과 학교에는 붙잡아야 할 고객이나 직원이 있다. 하지만 일정한 한도를 넘어서면 ‘불평분자’가 떠나도록 놔두는 게 최선책이다.

허쉬만은 지난해 향년 9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제레미 애들먼이 집필한 방대하고 유려한 ‘허쉬만’ 평전이 내달 출간될 예정이다. ‘세상을 꿰뚫어본 철학자: 알버트 오토 허쉬만의 오디세이(프린스턴 대학교 출판사, 한글 제목은 가제)’는 히틀러 치하 혼란한 독일을 탈출해 미국에서 저명한 학자로 인정 받게 된 허쉬만의 놀라운 일대기를 그렸다. 애들먼은 ‘흥미롭게도 허쉬만은 (베를린, 트리에스테, 파리 중) 자신의 출구(exit)가 어디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썼다.

허쉬만에게는 출구가 필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허쉬만이 1970년 126쪽에 달하는 필생의 역작 ‘이탈, 항의, 충성(원제: Exit, Voice and Loyalty, 국내에서는 번역본 미출간 상태로 한글 제목은 가제)’을 세상에 선보였을 때 당시 사회분위기와 이 책의 주제는 놀라우리 만큼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조직들은 황폐한 상태였다. 정부와 대학 캠퍼스는 베트남전으로 인해 동요하고 있었다. 대기업은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했다. 반전 시위를 할 것인가, 캐나다로 도망갈 것인가? 허쉬먼은 어떤 전략이 더 효과적인지 질문을 던졌다. 경영난에 빠진 GM은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가? 조용히 GM에서 마음을 접고 도요타로 갈아 탄 소비자일까, 적극적으로 소비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랠프 네이더일까?

전쟁이 한창인 베를린에서 1915년 태어난 허쉬만은 아방가르드의 진앙지인 바이마르 지방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아방가르드는 문화적인 면에서는 근대적이고 정치적인 면에서는 급진적인 시대 흐름을 가리킨다. 허쉬만이 18살 생일을 맞기 바로 전 날 라이히슈타크(독일 의회의사당)는 잿더미가 된다. 유대계이나 독일인과 동화돼 살면 불이익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허쉬만 가족의 믿음도 함께 타서 없어졌다. 사춘기에 접어든 허쉬만은 홀로 파리로 갔다. 나중에 허쉬만이 집필한 역작의 토대가 되는 불굴의 의지와 생명력은 이 시기에 형성됐다. 흥미진진한 평전 속 구절을 통해 엿보면, 허쉬만은 ‘혁명의 로맨스와 반항이라는 창공 사이에 방치된 황폐한 공간에서 살았다.’

‘이탈, 항의, 충성’이 집필된 목적을 넓게 확장하면, 조직이 충격을 잘 극복하는 회복력을 갖추게 하는 데 있다. 허쉬만에 따르면 경제학자들은 조직의 쇠퇴를 걱정하지 않는다. 경제 이론에서는 한 기업이 파산해도 또 다른 기업으로 대체된다고 냉정하게 판단한다. 허쉬만에게 세상의 변화는 경제이론보다 무섭게 다가왔다. 허쉬만은 서른 살이 되던 해 프랑코 치하 스페인에 맞서 싸웠다. 그는 프랑스군에 입대해 트리에스테의 반 무솔리니 지하조직을 위해 일했다. 그러던 중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을 등지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역사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은 그는 세상의 모든 교리와 신조를 믿지 않게 됐다. 허쉬만은 알베르 카뮈의 도덕주의와 애덤 스미스의 실용주의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허쉬만’ 광신도을 양산해내는 ‘이탈, 항의, 충성’은 허쉬만이 사랑했던 ‘작은 아이디어’에서 탄생했다. 허쉬만은 나이지리아 철도공사의 서비스가 형편없는데도 개혁을 요구하는 외침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운송 서비스에 불만이 쌓인 고객들은 민간 트럭업체에 화물을 맡겼고 항의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페덱스가 긴급 택배를 해결해주지 않았더라면 우체국에 항의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같은 사실을 깨달은 쿠바를 비롯한 전체주의 정권들은 이민(이탈)을 부분적으로 용인함으로써 잠재적 불안을 약화하는 방법을 선호해왔다.

허쉬만은 개인이 조직을 쉽게 떠날 수 있을 때 불만의 목소리는 잦아든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런데 문제제기가 효과적이려면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해야 한다. 비즈니스 파트너—심지어 결혼생활에서도—문제제기를 통해 거래는 성립된다. 아무리 완곡하더라도 떠날 수 있다는 무언의 압박이 존재할 경우, 어떤 요청(‘분리수거 좀 부탁해’)은 더욱 절박해진다.

허쉬만에 따르면 이탈과 항의는 ‘시소’처럼 공존하지만 그 효과는 극명하게 다르다. 웨이트리스에게 “햄버거가 너무 바싹 익었다”고 말할 때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명백하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무시할지 말지는 웨이트리스에게 달렸다. 그냥 이 레스토랑에서 발길을 끊어버리면 메시지는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레스토랑을 안 오는 이유가 햄버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탈’은 단호한 의사전달 방법이나 나중에 항의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그런데 항의라고 해서 만병통치도 아니다. 사회적 인간관계에서 기본 전술인 항의는 골치만 아프게 하고 설득력이 없을 수도 있다. 이별을 고하기가 쉬울 때 (가령 세탁세제처럼 다른 브랜드로 갈아타버리는 소비자들의 경우) 항의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들은 허쉬만이 정리한 세 번째 요소인 ‘충성’에 의존해야 한다. 허쉬만은 ‘충성은 이탈을 막는다(브랜드 충성도가 높은 고객은 해당 브랜드를 떠나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항공사 마일리지 제도를 봐도 알 수 있다.

출구전략이라는 표현까지 당당하게 존재하는 주식시장에서 ‘충성’은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이탈, 항의, 충성’이 출간되고 40년이 지난 현재, 금융시장과 미국 문화는 더욱 변덕스러워졌다. 지역과 종교, 기업에 대한 충성심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약해지고 있다. 선수들의 이적 문화가 생기면서 프로 스포츠의 매력은 반감됐다. 한때는 직원들의 애사심을 소중하게 여기던 기업들이 이제는 퇴사에 더 큰 가치를 두면서 퇴직금의 의미는 퇴색됐다.

허쉬만이 요즘의 상황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허쉬만의 평전을 쓴 애들러는 허쉬만은 ‘증시는 이탈을, 정치는 항의를 택한다는 주장에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경제학자로서 허쉬만은 동료 경제학자들이 ‘항의’의 위력을 무시한다는 사실을 가장 걱정했다. 허쉬만은 학부형들이 자녀를 전학 보내거나 ‘강력한 정치적 수단’을 통해 학교에 직접 의견을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한 밀턴 프리드먼을 비난했다.

그런데 ‘강력한 정치적 수단’을 통해 의견을 전달한다는 게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할까? 허쉬만은 경제학자가 아니라면 ‘의견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은 의견을 어찌 됐든 전달하는 것이라고 순진하게 말할지도 모른다’고 냉정하게 지적했다. 허쉬만은 이탈의 힘을 간과한 정치학자들도 꾸짖었다.

2013년은1970년이 아니다. 세계는 변화하고 있다. 시장의 힘은 세지고 사회적 단결력은 약해졌다. 균형이 필요한 시점인지도 모른다. 이탈 충동은 자제하고 소통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구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허쉬만이 40년 전 역작에서 주장한 대로 항의의 힘이 위축되지 않도록 기회를 줘야한다.

—본 기사를 기고한 로저 로웬스타인은 ‘탐욕의 도둑들(원제: The End of Wall Street)’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