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 칼럼>타블로-타진요 논란, 본질을 놓치다
2010.10.09 16:35 | 수정 2010.10.09 16:37
[김헌식 문화평론가]개인과 개인간, 집단과 집단간의 전략을 구사하는 경향이 고전적이라면, 현대사회일수록 사회적 전략을 구사하는 경향이 높아진다. 여기에서 사회적 전략이라는 것은 사회적 지지를 통해 자신의 세를 확장하고 그것을 통해 이득을 취하는 것이겠다. 그러한 사회적 전력은 개인이 전적으로 추구할 수도 있고, 대리인을 통해 목표를 이룰 수도 있다. 현대사회의 복잡성과 다층성 때문에 혼자 수행하기보다는 대체적으로 다른 관련 전문 에이전트를 대행시키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대중사회가 확대되고 매체의 수단에 대중이 접근하기 쉬워질수록 이러한 대중전략은 먹혀들어간다.
그런데 이 대중의 특징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한데 여러가지 가운데 약자성을 항상 염두해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반 대중은 자신이 약자라고 생각하지 강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약자는 강자에게 항상 당하는 피해자에 가깝다. 부당하게 강자에게 당하는 약자의 처지는 어느새 강자의 위치에 이르게 된다. 특히 부도덕한 사회적 특징이 만연된다는 인식이 강할수록 약자들이 발생하고 그들이 당하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부당하게 당하는 약자는 누구보다도 도덕적 윤리적으로 강자에 오르게 된다.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친서민정책 인식 및 욕구조사'결과, 전체 응답자의 85.9%가 스스로를 서민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사결과를 국회에서 공개적으로 공표한 한 국회의원은 이 서민이라는 단어가 '힘 없고 빽 없고 돈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소득이 낮아서'가 92.8%, '재산이 적어서' 89.6%, '직업지위가 낮아서' 58.6%,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해서' 40.9% 가 그 순위를 이었다. 나이가 젊고, 배우자가 없을수록 이러한 반응이 높았다. 이러한 심리는 바로 약자의 감수성과 맞물리는 것이다.
인터넷 댓글 문화를 움직이는 것은 약자의 감수성이다. 부당한 사회에 대한 비판과 일침이 독특한 현상을 이루어 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해외출신의 연예인에 대한 자세도 마찬가지다. 2PM의 박재범은 연습생 시절에 인터넷에 올렸던 글때문에 혹독한 일을 당했다. 하지만 곧 동정론이 일고 나아가 박재범이 강자에게 당했다는 대중심리 때문에 도덕적 윤리적 우월성을 갖게 되었다. 곧 박재범은 미국의 칩거를 끝내고, 국내에 화려하게 등장하면서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다.
최근의 타블로 사례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타블로의 학력에 대한 논란이 한참이다가 한 방송사의 다큐가 방영되면서 그 팽팽하던 균형이 무너지게 되었다. 타블로와 '타진요' 등의 대결구도가 만들어졌는데 인터넷에서는 타블로가 한 없이 당하는 약한 존재인 것처럼 이미지 프레임이 짜여지면서 대세는 타블로 쪽으로 기우는 모양새가 되었다. 실제적으로 거대한 세력의 싸움인 것으로 알려지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따져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말콤 글래드웰은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중앙의 권위나 지도자도 없는 아주 약해빠진 느슨한 관계망일 뿐이라고 혹평을 가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중요한 것은 타블로의 학력이 진짜인가, 가짜인가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타블로의 태도였다. 이는 해외파들에게 모두 해당되는 것이다. 얼마 전 지하철 난투극에서 할머니와 젊은 여성의 싸움은 결국 태도의 문제였다. 박재범이 자신의 글에 대해서 사과는 했지만, 그뒤에 박재범이 어떠한 마음 자세를 갖게 되는지는 부차적이 되었다. 한국사회의 기본적인 사회심리의 룰은 겸손과 배려이다. 그러나 타블로는 미국식 개인주의를 내세우며 한국 안에 있는 사람들의 자존심을 훼손시켰다. 기본적으로 미국 국적과 미국 학력을 바탕으로 큰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고 그것을 통해 안하무인하면서, 대중 이면의 심리를 간과했다.
이는 비단 타블로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연예인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재들에게 모두 해당하는 것이다. 대중 대부분에게는 약자의 피해의식이 있다. 그것이 상당 부분 주관적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심리적 현상은 물적 토대에서 비롯하는 측면이 있다. 타블로 학력의 존재감이 실제적으로 드러날수록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측을 두고, 단순히 인지부조화 때문에 끝까지 고수하고만 있다는 식의 유아적인 분석으로 외면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외국 종속적인 구조와 문화가 지배하는 이상, 그것의 위에서 군림하고 상처받는 약자의 감수성은 존재할 수 있고, 뜻하지 않게 엉뚱한 피해자가 계속 양산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블로도 자신의 고통을 사회적 전력의 차원에서 활용하기 보다는 자숙과 성찰의 계기로 삼고 더 좋은 활동의 밑바탕으로 삼는 겸손의 태도가 중요하다.
이는 타블로의 팬들이 앞서서 만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며, 박재범의 팬들과 같이 그 우월적 도덕심리에 바탕을 둔 마케팅으로 갈때 대중문화와 음악의 발전은 답보 수준이나 퇴행으로 치달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사회전체적으로 일본과 같이 18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주로 국내파들이 만들 수 있도록 국내의 기반을 튼튼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대중의 특징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한데 여러가지 가운데 약자성을 항상 염두해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반 대중은 자신이 약자라고 생각하지 강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약자는 강자에게 항상 당하는 피해자에 가깝다. 부당하게 강자에게 당하는 약자의 처지는 어느새 강자의 위치에 이르게 된다. 특히 부도덕한 사회적 특징이 만연된다는 인식이 강할수록 약자들이 발생하고 그들이 당하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부당하게 당하는 약자는 누구보다도 도덕적 윤리적으로 강자에 오르게 된다.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친서민정책 인식 및 욕구조사'결과, 전체 응답자의 85.9%가 스스로를 서민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사결과를 국회에서 공개적으로 공표한 한 국회의원은 이 서민이라는 단어가 '힘 없고 빽 없고 돈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소득이 낮아서'가 92.8%, '재산이 적어서' 89.6%, '직업지위가 낮아서' 58.6%,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해서' 40.9% 가 그 순위를 이었다. 나이가 젊고, 배우자가 없을수록 이러한 반응이 높았다. 이러한 심리는 바로 약자의 감수성과 맞물리는 것이다.
인터넷 댓글 문화를 움직이는 것은 약자의 감수성이다. 부당한 사회에 대한 비판과 일침이 독특한 현상을 이루어 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해외출신의 연예인에 대한 자세도 마찬가지다. 2PM의 박재범은 연습생 시절에 인터넷에 올렸던 글때문에 혹독한 일을 당했다. 하지만 곧 동정론이 일고 나아가 박재범이 강자에게 당했다는 대중심리 때문에 도덕적 윤리적 우월성을 갖게 되었다. 곧 박재범은 미국의 칩거를 끝내고, 국내에 화려하게 등장하면서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다.
최근의 타블로 사례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타블로의 학력에 대한 논란이 한참이다가 한 방송사의 다큐가 방영되면서 그 팽팽하던 균형이 무너지게 되었다. 타블로와 '타진요' 등의 대결구도가 만들어졌는데 인터넷에서는 타블로가 한 없이 당하는 약한 존재인 것처럼 이미지 프레임이 짜여지면서 대세는 타블로 쪽으로 기우는 모양새가 되었다. 실제적으로 거대한 세력의 싸움인 것으로 알려지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따져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말콤 글래드웰은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중앙의 권위나 지도자도 없는 아주 약해빠진 느슨한 관계망일 뿐이라고 혹평을 가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중요한 것은 타블로의 학력이 진짜인가, 가짜인가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타블로의 태도였다. 이는 해외파들에게 모두 해당되는 것이다. 얼마 전 지하철 난투극에서 할머니와 젊은 여성의 싸움은 결국 태도의 문제였다. 박재범이 자신의 글에 대해서 사과는 했지만, 그뒤에 박재범이 어떠한 마음 자세를 갖게 되는지는 부차적이 되었다. 한국사회의 기본적인 사회심리의 룰은 겸손과 배려이다. 그러나 타블로는 미국식 개인주의를 내세우며 한국 안에 있는 사람들의 자존심을 훼손시켰다. 기본적으로 미국 국적과 미국 학력을 바탕으로 큰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고 그것을 통해 안하무인하면서, 대중 이면의 심리를 간과했다.
이는 비단 타블로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연예인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재들에게 모두 해당하는 것이다. 대중 대부분에게는 약자의 피해의식이 있다. 그것이 상당 부분 주관적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심리적 현상은 물적 토대에서 비롯하는 측면이 있다. 타블로 학력의 존재감이 실제적으로 드러날수록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측을 두고, 단순히 인지부조화 때문에 끝까지 고수하고만 있다는 식의 유아적인 분석으로 외면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외국 종속적인 구조와 문화가 지배하는 이상, 그것의 위에서 군림하고 상처받는 약자의 감수성은 존재할 수 있고, 뜻하지 않게 엉뚱한 피해자가 계속 양산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블로도 자신의 고통을 사회적 전력의 차원에서 활용하기 보다는 자숙과 성찰의 계기로 삼고 더 좋은 활동의 밑바탕으로 삼는 겸손의 태도가 중요하다.
이는 타블로의 팬들이 앞서서 만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며, 박재범의 팬들과 같이 그 우월적 도덕심리에 바탕을 둔 마케팅으로 갈때 대중문화와 음악의 발전은 답보 수준이나 퇴행으로 치달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사회전체적으로 일본과 같이 18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주로 국내파들이 만들 수 있도록 국내의 기반을 튼튼하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