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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혼 드라마 봇물, 현실을 다룰 수 없는 이유?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6. 4. 1. 11:29

재혼이 이야기의 주된 소재로 설정된 드라마 '내딸 금사월'ㄱ(위)과 '한번 더 해피엔딩' ⓒMBC
근래에 재혼 드라마가 부쩍 많아졌다고 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재혼 소재의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재혼에 관한 캐릭터가 드라마에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노릇이라는 분석이 많다. 재혼이란 다시 혼인하는 것이니 이혼을 한 사람들이 많아야 가능하다. 결혼한 상태에서 결혼하는 것은 이중 결혼에 해당한다. 재혼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혼을 한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에 재혼이 늘어날 것이다. 물론 재혼한 사람이 늘어난다면 말이다. 이혼 가정이 한국에 많아 지고 있는 것은 많은 통계자료들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적어도 이런 통계자료에 따른다면, 재혼에 대한 관심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중요한 문제이지만, 사회적으로 이에 대한 코칭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방송의 역할이 중요해질 수 있다. 

드라마는 사람들의 관심 사항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드라마에 재혼 소재가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이해할만하다. 

재혼 소재의 드라마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돌싱과 미혼의 커플이 등장하는 경우다. 연인으로 연하남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를 적극 반영하는 추세다. 또한 남녀 둘 다 돌싱인 경우도 있다. 팽팽한 긴장감이 돌 때도 종종 있다. 잠재적인 돌싱과 재혼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남편이 바람 등 불륜을 일으키고 헤어진 뒤 복수하듯이 재혼에 성공하는 모습들 그리는 경우도 있다. 이때 백마탄 왕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심지어 가족 구성원 안에서 서로 재혼 때문에 갈등을 하거나 궁금증을 일으키는 애피소드를 만들기도 한다. 

재혼에 대한 소재는 결국 전통적인 가치관안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드라마 '세번 결혼하는 여자'도 있었는데, 스스로 자신과 결혼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런 유형의 결말은 흔하지 않은 것이었다. 

어쨌든, 재혼 소재 자체보다는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다뤄내고 있는가일 것이다. 일부에서는 현실을 제대로 이뤄내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노릇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이런 재혼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다. 자신들에게 해당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을 제대로 다루는지 별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럴수록 이런 드라마의 흐름은 현실과 멀어지고, 정작 재혼 커플들에게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이런 지적은 이해를 할 수 있는 점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현실을 제대로 다루는 것은 결국 다큐나 시사프로그램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가 커버할 수 없는 점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드라마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드라마는 문화 컨텐츠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문화 콘텐츠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의 결핍이나 한계를 넘어 이상적인 무엇인가를 담아내는 것이다. 

작가들은 그렇게 교육 받는다. 현실을 그대로만 보여주면 누가 드라마를 보느냐고 말이다. 현실 플러스, 더해지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재혼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소망이나 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심해지면 환타지가 되거나 몽상이라는 평가를 듣게 된다. 현실적인 소망을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대리적으로 충족 시켜주는 재혼 소재의 드라마이어야 한다. 

다만, 현실적인 소망의 드라마라면 어느 한 쪽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설득력도 떨어지는 법이다. 더구나 본질이 흥미와 재미를 중심에 두고 있다면 더욱 더 그렇다. 누군가의 상처와 고통을 고려한다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혼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엄존하고 있다. 그것이 본질이고 재미와 현실탈출의 바람은 그 이후다. 예컨대, 환타지 드라마 처럼 고색창연한 삶이 갑자기 펼쳐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이겠다. 

무엇보다 현실을 벗어난 소망스런 상황이 천편일률적이어서는 더욱 곤란한 것이다. 사람들의 삶이 다양한데 픽션의 작품들이 획일적이라면 장르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글/김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