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중가요사

이영미의 7080 노래방 4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1. 10. 16. 23:08

어두운 비, 세찬 바람 맞으며 청년들은 순수를 노래했다

이영미의 7080 노래방 <17> 포크송이 바라본 1970년대

이영미 ymlee0216@hanmail.net | 제226호 | 20110710 입력
비바람, 폭풍우라는 말이 결코 좋은 느낌을 주는 말이 아닌 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인간 세상에서 ‘비’란 고통과 고난, 억압 등을 상징하는 말로 오랫동안 자리 잡아 왔다. 식민지 시대의 슬프고 청승맞은 대중가요에서 ‘궂은비’가 등장하는 것은 결코 희한한 일은 아닌 것이다.

청년문화 시대의 젊은이들이 따뜻한 실내에서 유리창 밖으로 비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젊은 혈기에 가끔 비를 맞아도 갈아입을 옷 한 벌쯤은 있었던 시대가 됐을지라도, 역시 비란 춥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특히 거기에 ‘바람’이 결합되어 ‘비바람’이나 ‘폭풍우’가 된다면 더더욱 힘들고 고통스럽다.
흥미로운 것은 대중가요 가사에서 비와 비바람을 고통의 의미로 쓴다는 점이 아니라 1970년대 포크송이 그 고통의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1. 꽃잎 끝에 달려 있는 작은 이슬방울들 / 빗줄기 이들을 찾아와서 음 어디로 데려갈까 / (후렴)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 무엇이 이 숲 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2.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는 /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면 음 어디로 가야 할까/ (후렴)”(양희은의 ‘아름다운 것들’, 1972, 방의경 작사, 외국 곡)

70년대 초에 사랑 노래도 아닌 이런 노래가 대중가요로 인기를 모았다. 분석을 하며 따져보아야만 의미를 알 수 있는 가사인데 이런 노래를 그토록 많은 사람이 즐겼으니, 생각해보면 참 희한한 세상이었다. 이 노래에서는 ‘빗줄기’와 ‘바람’이 몰아치는 험한 세상 속에 ‘작은 이슬방울’과 ‘가엾은 작은 새’가 위태롭게 놓여 있다. 그것들은 꽃잎 끝에 위태롭게 달려 있고, 엄마도 없고 다리도 없어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들. 그러나 맑고 어린 순수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순수하고 맑으나 연약한 존재들을 비바람 부는 세상은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들은 위태롭고, 비바람 부는 세상은 폭압적이다.

사실 기성세대들은 이런 존재들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식민지와 전쟁, 이농과 산업화 드라이브 등 어른들은 약한 것들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 약육강식의 세상을 살아왔다. 아침이슬의 순수함을 세상이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배고픈 줄 모르고 살아온 철딱서니 없는 젊은 것들의 낭만’으로 취급했다. 그래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궂은비’가 내리면 그 고통을 ‘내 운명이려니’ 하고 꾹꾹 눌러 참고 혼자 흐느껴 울 뿐이었다. 그게 바로 트로트의 정서였다.

하지만 포크는 달랐다.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그 속에서 ‘여기 가엾은 작은 새가 있어요’ 하고 외치거나, ‘작은 이슬방울을 위태롭게 하는 비바람은 억압적이에요’, ‘나는 비바람을 맞더라도 작은 새처럼 순수하게 살 거예요’ 하고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태도였던 것이다. 위의 ‘아름다운 것들’의 가사를 지은, 당시 이화여대 학생이었던 방의경은 여성으로서는 매우 드문 비판적 포크 싱어송라이터였다. 그는 자작곡 ‘불나무’(1972)에서 ‘산꼭대기 세워진 불나무에 밤바람이 찾아와 덮어버리고 결국 그 순수한 열정인 불꽃송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고 노래한다. 시종일관 비바람에 위협받는 순수한 존재들에 대해 노래하는 것이다.

한국 비판적 포크의 최고봉인 김민기(사진)의 노래에서도 이런 상징은 자주 등장한다.
“1. 어두운 비 내려오면 / 처마 밑에 하나이 울고 서 있네 /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2. 세찬 바람 불어오면 / 벌판에 하나이 달려가네 / 그 더운 가슴에 바람 맞으면 /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현경과영애의 ‘아름다운 사람’, 1974, 김민기 작사·작곡)

발표 당시에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으나, 이후 권진원, 나윤선 등 많은 가수가 리메이크한 노래다. 가사에서 ‘하나가’라고 쓰지 않고 ‘하나이’라고 쓴 것이 흥미롭다. 국어시간에 배운 고어(古語)적인 표현을 써서 노래 전체에 ‘먹물 기’를 듬뿍 드리운다. 인간이란 존재가 언제 가장 아름다울까. 그에 대한 이 노래의 답변은 ‘어두운 비’와 ‘세찬 바람’ 속에서 맑은 눈물과 더운 가슴을 잃지 않을 때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비겁하게 무릎 꿇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나마 자신의 자존을 잃지 않고 순수함을 지켜나갈 때에 인간은 아름답다. 아니, 바로 인간만이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란 아름다운 존재인 것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보면 세상에 고개 빳빳이 들고 순수를 고집했던 태도는, 어찌 보면 어른들 말마따나 철딱서니가 없어서였을 수도 있다. 자기 한 몸 먹고살기도 힘든 세상에서 이 ‘웬 오지랖’이고 ‘잘난 척’이란 말인가.

“비 오는 저녁 홀로 일어나 창밖을 보니 / 구름 사이로 푸른빛을 보이는 저 하나밖에 없는 등불을 / 외로운 나의 벗을 삼으니 축복받게 하소서 / 희망의 빛을 항상 볼 수 있도록 내게 행운을 내리소서 / 넓고 어두운 세상에서 길고 어두운 여행길 너와 나누리 / 하나의 꽃을 만나기 위해 긴긴 밤들을 / 보람되도록 우리 두 사람은 저 험한 세상 등불이 되리”(사월과오월의 ‘등불’, 1974, 백순진 작사·작곡)

사이먼앤가펑클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연상하게 하는 이 노래는, ‘옛 사랑’ ‘화’ 같은 사랑 노래를 불렀던 사월과오월의 노래다. 비를 즐기는 말랑한 사랑 노래를 부르는 마음과, ‘비 오는 저녁 홀로 일어나’ ‘저 험한 세상 등불이 되리’라고 노래하는 마음이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았던 시절이, 바로 이 시대였다. 포크는 이런 태도로 노래를 시작했으니, 청년문화의 열기가 다 식어버린 80년대 후반에조차 “바람 부는 언덕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라고 노래한 ‘사랑으로’(1989, 이주호 작사·작곡, 해바라기 노래) 같은 노래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쯤 이야기를 하고 나니 저 뒤에서 마구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20, 30대들의 “너나 잘하세요” 하는 비웃음 소리 말이다. 이들 순수의 노래를 부르던 세대들이 중년이 되었건만 여전히 세상은 ‘어두운 비’ 내리고 ‘세찬 바람’ 부는 곳이니, 젊은이들에게 비웃음 당해도 할 말이 없다.

뭇여성 가슴 적신 김현식의 탁성... 80년대 빛낸 ‘비처럼 음악처럼’

이영미의 7080 노래방 <18> 잊을 수 없는 비 노래 베스트6

이영미 | 제227호 | 20110718 입력
비도 참 징하게 온다. 이럴 땐 별 수 없다.수많은 명곡 비노래 가사들을 한번씩은 떠올려 줘야 할 것 같다. 제목처럼 그냥 노래방 모드로 가자.
“1.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 / 쇼윈도 그라스에 눈물이 흘렀다 / 이슬처럼 꺼진 꿈속에는 잊지 못할 그대 눈동자 / 샛별같이 십자성같이 가슴에 어린다
2.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 때에 / 찢어버린 편지에는 한숨이 흘렀다 / 마로니에 잎이 나부끼는 네거리에 버린 담배는 / 내 맘같이 그대 맘같이 꺼지지 않더라
3. 네온도 꺼져가는 명동의 밤거리에 / 어느 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 / 레인코트깃을 올리며 오늘밤도 울어야 하나 / 바가본드 맘이 아픈 서울 엘레지” (현인의 ‘서울야곡’, 1950, 유호 작사, 현동주 작곡)
기억에 남는 노래들은 자주 리메이크 된다. 1950년 현인(본명 현동주)의 작곡으로 발표된 이 노래 역시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77년 전영이 포크의 목소리로 불러 다시 히트했다. 1950년 노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가사와 탱고 악곡이 인상적이다.
네온사인, 쇼윈도 그라스가 번쩍이는 서울의 화려한 밤 풍경, 레인코트 깃을 올린 남자, 네거리에 버려진 꺼지지 않은 담배, 흩어진 꽃다발로 이어지는 도시적인 사물들이,이별의 착잡함을 도시적 세련미와 함께 드러내고 있다.

“이슬비 나리는 길을 걸으면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면 / 나 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 마음을 달래며 /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 한없이 흐르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나리려나 / 마음마저 울려주네 / (하략)” (박인수의‘봄비’, 1970, 신중현 작사·작곡)
리메이크로는 이 노래만큼 다양한 버전을 가진 작품이 없을 것이다.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강한 샤우팅의 소리를 냈던 박인수의 블루지한 목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유행했던 김추자 버전과 한국적 목소리의 95년 장사익 버전, 박인수가 20년 만에 부른 신촌블루스 버전까지 화려하기 이를 데없다. 그만큼 이 노래는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작품이다.

“창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 그대의 귀여운 얼굴이 날 보고 있네요 / 창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 그대의 핼쓱한 얼굴이 날 보고 있네요 / 아직도 창밖에는 바람 불고요 / 비 오네요” (송창식의 ‘창밖에는 비 오고요’, 1971, 송창식 작사·작곡)
이 노래는 한 번도 리메이크되지 않았다. 노래가 별로여서가 아니라, 송창식 말고는 부를 사람이 없어서일 게다. ‘미파미파’,‘레미레미’, ‘도레도레’만 계속되다가 마지막 ‘비 오고~~요’에서 음을 훑어내리는 희한한 선율을 송창식이 아니고 감히 누가 소화하겠는가. 그의 첫 창작곡으로 싱거운 미소 밑바닥에 깔린 깊은 우수를 드러내 주는노래다.

“조용히 비가 내리네 추억을 말해 주듯이 / 이렇게 비가 내리면 그 사람 생각이 나네 / 옷깃을 세워주면서 우산을 받쳐준 사람 / 오늘도 잊지 못하고 빗속을 혼자서 가네 / 어디에선가 나를 부르며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아 / 돌아보면은 아무도 없고 쓸쓸하게 내리는 빗물 빗물 / 조용히 비가 내리며 추억을 달래주듯이 / 이렇게 비가 내리면 그사람 생각이 나네” (채은옥의 ‘빗물’, 1976,김중순 작사·작곡)
히트한 비 노래는 유독 남자 노래가 많다.남자들이 비 노래를 잘 불러서가 아니라, 여자들이 비 노래를 좋아해서일 것이다. ‘빗물’은 매우 드물게 여자 목소리로 히트한 비노래다. 포크에 기반을 두면서도 끈적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가 이 노래에 딱 맞다. 조관우의 95년 리메이크 버전도 이 애절함을 쉽게 뛰어넘지 못한다.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이처럼 비가 왔어요 /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이렇게 비가 왔어요 / 난 오늘도 이 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요 오 / 아름다운 음악 같은 우리의 사랑의 이야기들은 /흐르는 비처럼 너무 아픈 비 때문이죠 / (중략) / 오 그렇게 아픈 비가 왔어요 오 오 오”(김현식<사진>의 ‘비처럼 음악처럼’, 1986, 박성식 작사·작곡)
8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 단 한 곡의 비 노래를 꼽으라면 대개 이 노래를 꼽는다. 이때는 김현식의 건강이 나빠져 목소리가 점점 탁해졌는데 오히려 그게 더 매력으로 다가왔다. 임재범이 김현식 추모앨범에서 부른 버전이 오히려 가볍게 느껴질 정도다. 이 시대는 유재하, 이문세 등 피아노 연주가 주도하는 선율·화성이 화려한 노래가 유행을 선도했는데, 이 노래 역시 그렇다.
이 화려한 음악에 실린 단순한 한 구절 ‘아픈 비가 왔어요’에 수많은 여자들 가슴이 바로 무너졌다.

“온종일 거리는 잿빛에 잠겨 잠은 더하고/ 시간은 얼만큼 지났는지 지금 비가 와 / 사람들 제각기 생각에 잠겨 대답이 없고 / 아누군가 나를 부르듯 지금 비가 와 / 저렇게 철없이 내리는 비는 나를 자꾸 쓸어가 / 쏟아져 내리는 저 빗속을 걸으면 감추고 싶은 기억들이 다시 밀려와 / (비가 와) 나의 젖은 가슴엔 / (비가 와) 그날처럼 내려와 / (비가와) 나의 젖은 가슴엔 / (비가 와) 그날처럼 내려와” (김현철의 ‘비가 와’, 1989, 김현철 작사·작곡)
김현철 노래에는 유독 비와 눈, 진눈깨비가 많이 내린다. 1집의 이 노래는 그 시작이다. 스물을 갓 넘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재즈 구사력을 보여준 김현철은 결코 흐느끼지 않으면서도 ‘쿨하게 센치한’ 느낌을 만들어내며, 과도한 감정적 고양을 촌스럽게 여겼던 대도시 젊은이들을사로잡았다.

연인 갈라 놓던 바다가 연인을 이어주는 공간으로 …

이영미의 7080 노래방 <19> 항구에서 해변으로, 바다의 변신

| 제228호 | 20110723 입력
바야흐로 피서철이다. 동해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주차장처럼 변하고 해수욕장이 목욕탕처럼 북적이는 계절이 된 것이다.

지금은 대중가요 속에서 바다란 오로지 여름날 피서지 혹은 한적한 휴양지로만 인식되지만, 식민지 시대부터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전혀 달랐다. 남진(사진)의 초기 히트곡으로 유명한 다음의 노래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 해 저문 부두에서 떠가는 연락선을 /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 갈매기도 내 마음처럼 목메어 운다”(남진의 ‘가슴 아프게’, 1968,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이외에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등 60년대에 바다를 항구의 이별로 연결 짓는 노래는 의외로 많다. 물론 이런 노래의 태반은 트로트 계열의 노래다. 30년대 트로트가 본격화된 시기부터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남인수의 ‘울며 헤진 부산항’ 등을 거쳐 50년대 박경원의 ‘이별의 인천항’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항구 노래가 인기를 모아왔다. 60년대 말의 이런 노래는 올드 페션의 뒷심을 보여주는 노래였던 셈이다.

식민지 시대의 대중가요에서 바다가 늘 항구로만 등장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개항이 되기 이전까지 우리나라 서민의 노래에서 바다란, ‘이어도사나’ 같은 어촌 민요를 빼놓고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소재였다.

그러나 강대국이 바닷길을 통해 들어온 이후 바다는 새로운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최남선의 신체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가 웅변적으로 보여주듯, 육지를 중심으로 했던 조선인의 머릿속 지형도는 저 험한 바다 건너편의 문명의 세계를 상상하는 방식으로 급격히 달라졌다. 지금 듣기에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한적한 지방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별 노래인 것처럼 들리지만, 식민지 시대 목포는 일본과 전남 곡창지대를 잇는 매우 중요한 항구이고 화려한 신도시였다. 즉 이 시대 항구는 외국으로 나가는 관문이었고, 항구의 이별 장면은 요즘으로 치면 인천국제공항에서의 이별 장면만큼이나 멋진 장면이었을 수 있다. 이런 항구 노래가 70년대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80년대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관행은 정말 끈질긴 것이었다.

물론 변화도 없지 않다. 해방이 돼 일본과의 뱃길 왕래가 줄어들고 비행기를 통해 외국 나가는 것이 시작된 60년대가 되면, 항구는 이렇게 멋진 이미지로 등장하지 못한다. 오히려 바다는 육지와 섬을 가로막은 절망적 장애물로 등장한다. 남진의 ‘가슴 아프게’의 ‘해 저문 부두’와 ‘연락선’이 그리 화려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바로 그 이유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 열아홉 살 섬색시가 순정을 바쳐 / 사랑한 그 사람은 총각 선생님 /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1966, 이경재 작사, 박춘석 작곡)

남진도 조미미도 마치 바다가 모든 것의 문제인 것처럼 ‘저 바다만 없었다면’ ‘바다가 육지라면’이라 노래했지만, 교통수단이 다 있는 시대에 능력만 있다면 그까짓 바다가 무슨 장애가 되겠는가. 문제는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 사이에 뛰어넘지 못하는 다른 벽이 있는 것이다. 저학력의 가난한 섬 처녀와 서울 출신 대졸자의 뛰어넘지 못하는 계층의 벽이 있으니, 바다만 보고 울고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서울에서는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산업화가 한창이던 60년대에 벽을 뛰어넘을 자신이 없었던 소외된 사람들의 절망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보여주는 노래들인 셈이다.

그러나 70년대 초 청년문화 바람이 불면서 바다는 전혀 다른 대상으로 대중가요에 나타났다. 윤형주의 ‘라라라’(“조개껍질 묶어…”)가 그러했듯, 이들 세대에게 바다는 해수욕장과 피서지로 각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요 /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 줘요 / 연인들의 해변으로 가요 /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해도 / 나는 나는 행복에 묻힐 거예요 / 불타는 그 입술 처음으로 느꼈네 / 사랑의 발자욱 끝없이 남기며 / (하략)”(키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 1970, 외국 곡)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로커 재일교포 이철의 작품을 키보이스가 취입해 크게 히트했다. 일본 노래이기 때문에 창작자를 제대로 밝히지 못한 채 수십 년이 지나버린 노래다. 이 노래뿐 아니라 키보이스의 ‘바닷가의 추억’, 사월과오월의 ‘바다의 여인’ 등 대중가요 속의 바다는 ‘항구’에서 ‘해변’으로 바뀌어 갔다.

“서울을 떠나는 기차를 타고 들판을 넘어 산속 계곡 따라 / 시간이 있으면 절에도 들러 보고 동굴 속에서 소리도 쳐 보네 / 잔뜩 짊어 메고서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서 / 동네 어귀에도 내려 볼까 그렇지만 바닷간 어떨까 / (하략)”(여행스케치의 ‘여행스케치’, 1989, 박선주 작사·작곡)

휴가지로서의 바다는 산보다는 훨씬 더 소비적이기는 하다. 산이 땀 흘리고 난 인고와 성취의 느낌을 주는 공간이라면, 바다는 오로지 소비하고 욕망을 노골화하는 피서지다. 80년대식 젊은이의 소박한 여행의 분위기를 풍겼던 여행스케치가 바닷가보다 산을 먼저 배치한 것은 그 때문이리라. 하지만 여름에 바닷가의 그 유혹에서 어찌 벗어날 수 있으랴.

해변에 수영복 차림으로 나설 일을 생각하며 몇 달 전부터 돈을 모으고 몸매를 가꾸는 것이 젊은이들의 당연한 일처럼 되어 버린 지 오래지만,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한국인의 노래 속의 바다는 이토록 복잡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모닥불 피워 놓고 마주 앉은 청춘들, 70년대는 해변 전성시대

이영미의 7080 노래방 <20> 포크와 록 속의 바다

이영미 ymlee0216@hanmail.net | 제229호 | 20110731 입력
얼마전만 해도 바다란 우리들에게 쉽게 실감되는 공간이 아니었다. 1960년대만 해도 항구도시에 사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평생 바다란 것을 구경도 못한 사람이 태반이었다. 한가로이 휴가를 다닐 여유가 없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교통이 편치 않았다. 서울 사람들이 가족 단위로 움직이면 으레 인천 송도해수욕장 정도를 생각했던 것도 바로 교통 때문이었다.

해수욕장이 생긴 것은 일제시대부터였고, “어서 가자 가자 바다로 가자 / 젊은 피가 출렁대는 명사십리 바닷가”로 시작하는 김정구의 ‘바다의 교향시’ 같은 노래도 유행했으며, 30년대 소설인 박계주의 ‘순애보’에서도 해수욕장에서 남녀가 만나는 이야기가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이때 해수욕장을 찾는 피서는, 아예 한 달 정도를 작정하고 쉴 수 있는 사람들이나 누리는 호사였다. 서울에서 멀고 먼 함경도의 해수욕장을 찾는 일은, 요즘으로 치면 하와이 바닷가를 가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40년대 개장한 대천 해수욕장은 50년대 중반부터 부쩍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되지만 그래 봤자 서울에서 대천까지 가는 기차(그나마 천안에서 열차를 갈아타는 번거로운 절차를 밟는)가 주말에만 하루 딱 한 번 운행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소요시간은 무려 6시간에 육박했다.

그러다 보니 바다는 늘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고 기껏해야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61년생인 나 역시 바다는 초등학교 6학년 즈음 인천 작약도에 가본 것이 처음이었다. 그전까지는 그저 광나루나 뚝섬유원지 백사장에서 넓디 넓은 한강을 바라보며 ‘바다가 저것과 비슷하려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60년대 대중가요에서 바다가 항구니 돛단배니 연락선이니 하는 트로트 스타일로 반복되거나 아니면 할리우드 영화 속 풍경처럼 그려지고 말았던 것은, 바로 바다에 대한 실제 체험을 하기 힘들어서였다.

바다를 머릿속에 떠올리게 하는 60년대 대표적인 노래 중 하나가 ‘진주조개잡이(Pearly shells의 번역 곡)’였다. “새파란 수평선 흰 구름 흐르는 / 오늘도 즐거워라 조개잡이 가는 처녀들”로 시작하는 이 노래 속의 바다는 그 ‘진주조개’란 말이 풍기는 것만큼이나 현실 속 체험과는 거리가 먼, 상상 속의 것일 뿐이었다. 할리우드 영화 속에 보이는 하와이 풍경, 남태평양 군도의 피부 까무잡잡한 여자들과 야자나무 같은 것들이 60년대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바다의 이미지였을 수 있다.

“사랑이란 즐겁게 왔다가 슬프게 가는 것 / 훌라춤에 흥겹던 기쁨도 모래알에 새겨진 사연도 / 파도에 부서지는 이 순간 아아 가버린 그 사람 그 사랑 / 하와이안 기타에 목 놓아 나 여기 웁니다”(패티 김의 ‘하와이 연정’, 1968, 주동진 작사, 길옥윤 작곡)한국 대중가요에 뜬금없이 웬 훌라춤과 하와이안 기타인가 싶지만, 이런 노래가 유행할 만큼 이 시절은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상상하던 때였다(미국에서 활동하던 패티 김이 부르니 그 얼마나 멋진 노래인가). 서울사람들에게는 서귀포 바닷가는 물론 부산 해운대조차, 하와이의 바닷가보다 머릿속에 구체적 이미지로 떠오르지 않았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60년대는 바다에 대한 남성적 낭만 역시, 일제시대의 ‘대지의 항구’나 ‘울며 헤어진 부산항’ 같은 구체성을 상실한 후였다. 그저 외항선, 마도로스 같은 말들이 남자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을 뿐이다.
“메리켕 밤 항구에 창문을 열어놓으면 / 쓰라린 이별마다 쓰디쓴 담배연기 / 길게 뿜는 메리켕 저 부두에서 / 떠나가는 아메리카 상선에 매달려서 / 느껴 울던 그 사람을 바다 위에 버려야지 / 메리켕 메리켕 메리켕 로맨스 로맨스 로맨스”(남일해<사진>의 ‘메리켕 부두’, 1965, 손로원 작사, 백영호 작곡)

어두운 재즈의 멋스러움 덕분에 70년대까지만 해도 젊은 남자들의 술자리 노래로 종종 불렸던 이 노래 역시, 실제 경험이 아니라 영화 속 이미지의 재현이라 보는 것이 옳다. ‘메리켕’이란 ‘아메리칸’의 일본식 축약어인데, 이 말의 뜻이 다 잊혀진 70년대의 술자리에서는 ‘메리퀸’으로 바뀌어 버렸고, 나도 ‘아메리카 상선에 매달려서 흐느껴 울던’ 바걸의 이름쯤으로 이해하고 그 노래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에 비하면 70년대 포크와 록 속의 바다는 훨씬 더 실제 경험 안으로 들어와 있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오 /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 눈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바퀴가 대답하려나”(김민기의 ‘친구’, 1971, 김민기 작사·작곡)

“고동을 불어 본다 하얀 조가비 / 먼 바닷물 소리가 다시 그리워 / 노을진 수평선에 돛단배 하나 / 루루루 하얀 조가비 꽃빛 물든다”(박인희의 ‘하얀 조가비’, 1974, 강동길 작사, 박인희 작곡)

비 내리는 바다의 수평선은 정말 하늘과 물의 경계를 알 수 없게 한다. 고등학교 시절 보이스카우트 캠핑을 하다 바다에서 익사한 후배를 생각하며 지은 김민기의 ‘친구’에는 실제로 비 내리는 바다를 바라보는 실감이 담겨 있다. 박인희의 ‘하얀 조가비’도, “내 귀는 작은 소라껍데기” 같은 시의 영향을 받은 혐의는 없지 않지만, 손에 쥐어진 조개 껍데기라는 소재 덕분에 영화 속 상상에서는 벗어난 실감을 지닌다.

70년대 젊은이들의 바닷가 캠핑은 유행처럼 번졌다. 바닷가에 앉아 기타를 치면서 박인희의 ‘모닥불’(“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이나 바블껌의 ‘연가’(“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를 밤늦게까지 부르는 풍경은 여름의 대표적인 젊은이들의 피서 모습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기쁜 일이면 바다에 주고...욕망 거부하고 삶을 응시하다

이영미의 7080 노래방 <21> 바다에 투영된 세상과 인생

이영미ymlee0216@hanmail.net | 제230호 | 20110807 입력
대학 다닐 적 재미 삼아 했던 엉터리 심리테스트가 생각난다. ‘커피·벽·바다’라는 세 단어에서 각각 떠오르는 즉각적인 느낌이 각각 ‘섹스·죽음·삶’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보여준다고 전제하고, 친구들끼리 그걸 묻고 답하면서 깔깔거렸던 기억이다. 예컨대 ‘벽’이란 말에서 ‘답답하다’는 느낌을 갖는 사람과 ‘기대고 싶다’고 답하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다’는 삶, 인생이란 의미였다. 이렇게 바다는 종종 상징으로 다가온다. 일제가 중국 침략을 한 다음 해에 나온 대중가요인 남인수의 ‘감격시대’의 ‘희망봉이 멀지 않다 행운의 뱃길아’란 구절이 범상치 않게 해석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대중가요에서도 바다는 종종 상징으로 등장한다. 그중 빈번하게 쓰이는 의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생’의 상징으로서 바다다.
“배가 있었네 작은 배가 있었네 / 아주 작은 배가 있었네 / 라라라 (반복) / 작은 배로는 작은 배로는 / 떠날 수 없네 멀리 떠날 수 없네 /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조동진<사진>의 ‘작은 배’, 1974, 고은 작사, 조동진 작곡)

나는 여태껏 이토록 배짱 좋고 과감한 가사를 본 적이 없다. 이 노래의 가사는 딱 세 구절, ‘배가 있었네’ ‘작은 배로는’ ‘떠날 수 없네’뿐이다. 이것을 반복하면서 ‘작은’과 ‘멀리’를 덧붙이고, 그 다음 구절에서는 ‘아주 작은’ ‘아주 멀리’를 덧붙여 분위기를 점층시킨다. 아니나 다를까, 시인 고은의 가사다. 조동진은 이런 가사의 구조를 잘 해석하여 정확한 호흡으로 조곤조곤 선율로 풀어 갔고, 통통 튀는 듯한 리듬의 기타 한 대의 반주에 작은 종소리를 딸랑딸랑 넣는 미니멀한 음악으로 처리했다.

여기에서 ‘작은 배’는 자신이고 ‘바다’는 세상 혹은 인생이다. 이제 막 본격적인 성인의 길로 들어서려는 청년들에게 세상과 인생은 두려움 그 자체다. 이 험한 세상, 거친 인생길을 어떻게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자신은 작고 힘도 없으니, 작은 풍랑만 만나도 좌초해 버릴 것 같다. 그래서 멀리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다.

이런 두려움이 없는 20대가 어디 있으랴. 두려워도 그저 바다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다칠까 봐, 몸조심한다고, 멈칫거릴 수 없다. 깨질 때 깨지더라도 가는 게 옳다.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를 외쳤던 김민기와 양희은은, 이번에도 호흡을 맞춰 바다로 나아가겠단다.
“어두운 밤바다에 바람이 불면 / 저 멀리 한바다에 불빛 아물거린다 / 아무도 없어라 텅 빈 이 바닷가 / 물결은 사납게 출렁거리는데 / 바람아 쳐라 물결아 일어라 / 내 작은 조각배 띄워 볼란다 / (하략)”(양희은의 ‘바다’, 1972, 김민기 작사·작곡)

밤바다 위에서 멀리 깜빡이는 불빛이 등대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사나운 물결이 이는 바다에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공은 ‘내 작은 조각배’를 띄워 보겠노라 선언한다. 게다가 호기롭게 ‘바람아 쳐라 물결아 일어라’고 노래한다.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라면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김민기의 ‘아름다운 사람’에서도 등장하는, 더운 가슴에 거친 바람 맞으며 들판을 달려가는 한 사람의 모습이다.

이 시기에는 이렇게 두려움을 이기고 나아가겠다는 노래가 꽤 있었다. 그것도 여자 가수의 노래에 이런 의지적인 형상이 등장하는 시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파도여 슬퍼 말아라’로 시작하는 김추자의 ‘무인도’ 역시 드높은 파도밖에 없는 곳에서 혼자 고독하게 버티고 서 있는 무인도로 자신을 비유했다. 참으로 외롭고 고통스러울 터인데도 그것을 ‘찬란한 고독’이라 부르고 ‘드높아라 파도여’라고 소리친다. 정말 이 시대는, 엄청 센 여자들을 대중이 기꺼이 받아주던, 매우 드문 시대였다.
거친 세상과 인생을 조금 관조적인 태도로 받아들이는 모습도 드러난다.

“세노야 세노야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산과 바다에 우리가 가네 /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저 산에 주고 슬픈 일이면 님에게 주네 /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바다에 주고 슬픈 일이면 내가 받네”(양희은의 ‘세노야’, 1971, 고은 작사, 김광희 작곡)

슬픈 일, 기쁜 일, 고통과 즐거움이 있는 인생이라는 바다에 노를 저어가는 주인공은, 기쁜 일은 산과 바다에, 슬픈 일은 인간이 자신의 것으로 껴안으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노래한다. 이 정도면 거의 득도의 경지라 할 수 있다. ‘인생은 나그네길’로 시작하는 최희준의 ‘하숙생’보다 한 수 위다.
어찌 스무 살짜리들이 이런 노래를 작곡하고 부를 수 있었을까. 아마 포크가 가지고 있던 독특한 ‘관조’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부모세대들처럼 세상의 욕망에 몸을 맡겨 떠다니기를 거부하고, 한 발짝 떨어져 삶과 세상을 조용히 응시하고 사고하는 태도, 불교식으로 말하면 관(觀)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포크의 바람이 조금 잦아든 1980년대 꿋꿋하게 작가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정태춘 역시 이러한 태도로 바다를 노래한다.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 / 겨울비에 젖은 돛에 가득 찬바람을 안고서 /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곳이 어드메뇨 / 강남길로 해남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 물결 너머로 어둠 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정태춘의 ‘떠나가는 배’, 1984, 정태춘 작사·작곡)
겨울비에 돛은 젖어 있는데 배는 거친 바다 위를 헤매고 있다. 그것은 80년대 초 먹고살 길조차 막막했던 정태춘 자신의 모습이었을 수 있다. 이렇게 물 먹은 몸으로 찬바람을 견디며 가노라면, 언젠가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만나기는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건 지금 우리 자신에게도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보이는 건 모두 돌아 앉은 세상...고단한 청춘들, 바다에 빠지다

이영미의 7080 노래방 <22> 순수의 바다와 고래인어 

이영미 ymlee0216@hanmail.net | 제231호 | 20110814 입력
서울 촌닭’으로 자라 스무 살이 훨씬 넘어서야 비로소 가본 동해바다는 경이로웠다. 저 멀리 바닷물이 하얀 거품을 일으키다가 마치 횡대로 열을 지어 몰려오는 흰옷의 사람들처럼 해안가로 일제히 달려오는 그 경이로운 풍경은, 오랫동안 동해에 대한 나의 인상을 좌우했다.
바다는 이렇게 신비로운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이유는 단 하나, 일상적이지 않은 낯선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울에서 가까운 서해도 아니고, 고속도로가 뚫리기 전까지는 정말 멀고 먼 길을 가야만 만날 수 있는 동해바다는 신비한 이미지로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그러니 ‘바보들의 행진’의 ‘젊은 바보’가 고래를 잡겠다고 동해로 향했을 것이다.

“1.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 삼등 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2. 간밤에 꾸었던 꿈의 세계는 아침에 일어나면 잊혀지지만 / 그래도 생각나는 내 꿈 하나는 조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 /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3. 우리의 사랑이 깨진다 해도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는다 해도 / 모두들 가슴 속에 뚜렷이 있다 한 마리 예쁜 고래 하나가 /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송창식(사진)의 ‘고래사냥’, 1975, 최인호 작사, 송창식 작곡)

맑은 동해와 그 속에 산다는 고래, 이것들이 상징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고래는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동물이었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신화’ ‘꿈’에서나 만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동해에서 산다니,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영화 ‘바보들의 행진’의 어벙한 대학생 영철은 자전거를 타고 동해로 간다. 영철은 공부도 못하고 소심하고 말까지 더듬는다. 식민지와 전쟁을 거치며 자수성가하여 살아남은 강인한 아버지가 보기에 도대체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아들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순수한 머리와 가슴을 지녔다. 아주 전형적인 청년문화적인 구도다. 이 시대 대학생들에게 기성세대는, “어미 아비가 뼈빠지게 등록금 대줬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만날 데모질·연애질에, 술 퍼먹고 고고춤 추는 게 다냐?”고 늘 야단을 쳤지만, 이들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모두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 술 먹고 춤춘다고 이들이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세상 속에서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 ‘순수’를 찾으러 이들은 동해로 간다. 그것도 부유하고 화려하지 않은 방법으로 ‘삼등 삼등 완행열차’나 ‘자전거’를 타고 간다. 영화 속의 영철은 동해바다를 만나고 오래간만에 활짝 웃고 환희에 넘쳐 소리친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투신자살한다. 순수의 표징인 동해와 고래가 그저 상징일 뿐,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극적 처리였다.

1970년대 초의 포크에서 바다를 이렇게, 타락한 인간세상과는 무관한 신비롭고 순수한 공간으로 형상화한 작품은 꽤 여러 편이다. 대중가요로서는 매우 드물게 ‘인어’가 등장하는 노래가 두 편이나 히트한 것도 이 시기였다.

“1. 노을빛이 물드는 바닷가에서 / 금빛 머리 쓰다듬던 어떤 소녀가 / 울먹이는 가슴을 물에 던지며 / 그리운 그 사람을 기다리다가 / 인어가 되었다네 꿈이 변하여 / 인어가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허림의 ‘인어 이야기’, 1974, 박건호 작사, 김기웅 작곡)

지금의 감각으로는 다소 머쓱하다. ‘초딩’도 아니고 다 큰 청년들이 웬 인어 타령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 시대는 이런 소녀 취향이 호소력을 발휘하던 때였다. 영원한 사랑과 그 순수함과 진실함이 마치 증류수처럼 응결된 인어라는 존재를 그려내는 상상력이 통했었다.

선율의 일부가 존 바에즈의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River in the pines)’를 연상시키는데, 허림의 목소리조차 존 바에즈 판박이다. 1980년대 최고의 히트제조기로 통하던 작사가 박건호의 초기 작품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 시기 박건호는 ‘모닥불’과 ‘인어 이야기’를 작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작사가의 길로 들어섰고, 80년대에는 ‘아, 대한민국’ 같은 건전가요를 주문받을 정도로 유명 작사가가 되었다.

김민기보다 한 해 선배인데도 또래들보다 뒤늦게 대중가요 판에 들어온 이정선의 ‘섬 소년’도 이런 부류의 노래다. 그는 첫 시작부터 별것도 아닌 가사가 검열에 걸려 1집을 몇 번씩 다시 내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래도 이 노래의 히트 덕분에 대중가요 팬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살아남아 해바라기부터 신촌블루스까지 70~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묵직한 인물로 성장했다. ‘소년’과 ‘인어’의 조합이 가져온 신비로운 분위기가 세긴 셌던 모양이다.

“1. 외딴 파도 위 조그만 섬마을 소년은 언제나 바다를 보았네 / 바다 저 멀리 갈매기 날으면 소년은 꿈속의 공주를 불렀네 / 파도야 말해주렴 바다 속 꿈나라를 / 파도야 말해주렴 기다리는 소년 음

2. 어느 바람이 부는 날 저녁에 어여쁜 인어가 소년을 찾았네 / 마을사람이 온 섬을 뒤져도 소년은 벌써 보이지 않았네 / 파도야 말해주렴 바다 속 꿈나라를 / 파도야 말해주렴 그 소년은 어디에”(이정선의 ‘섬 소년’, 1975, 이정선 작사·작곡)

이 노래의 전주와 간주는, 기타와 현악기로 잔잔한 파도를 청각적으로 묘사한 탁월한 선율과 연주를 보여준다. 80년대 기타교본을 내어 ‘사천만의 기타 선생님’이 된 그의 음악적 역량이 성심성의껏 발휘된 구절이었다. 혹시라도 꿈속 같은 말랑한 분위기만 기억난다면 다시 옛 음반의 먼지를 털어내고 들어볼 일이다.

거칠고 시원한 최백호의 바다, 차분하고 조용한 정태춘의 바다

이영미의 7080 노래방 <23> 고향바다

이영미 ymlee0216@hanmail.net | 제232호 | 20110821 입력
제주도 민요 ‘이어도사나’에는 “우리 어멍(어머니) 날 낳을 적에 어느 바당(바다) 미역국 먹엉(먹었을까)”이라는 구절이 있다. 높고도 거칠게 부르는 이 한 구절이 목을 울컥하게 만든다. 잠녀(‘해녀’를 제주도에서는 잠녀라고 한다)들은 자신을 낳고 이 바다의 미역국 먹었을 엄마도 자신처럼 이렇게 평생 물질로 살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리고 이제 막 물질을 배우는 딸을 생각하며 이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가요에서 이렇게 갯냄새에 인생살이의 깊이를 버무린 구절을 찾기는 쉽지 않다. 대중가요는 서울내기들의 감수성에 조율된 노래이기 때문이다. 강릉 출신인 영화평론가 조선희는 자신의 책에서 중·고교 시절 친구들과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라며 노래를 불렀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지척에 동해를 끼고 사는 사람들에게 얼토당토않은 노래였으나, 서울 중심의 감수성은 이렇게 전국을 지배한다.

하지만 바다를 고향으로 삼고 성장했던 사람들은 가끔 ‘서울 촌닭’들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노래로 형상화했다. ‘이어도사나’에 견주기에는 턱도 없지만, 그래도 인어나 고래가 사는 바다가 아니라 정말 갯냄새 나는 바다의 실감을 지닌 노래가 가끔은 발견되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어릴 적 내 친구/ 푸른 파도 마시며 넓은 바다의 아침을 맞는다/ 누가 뭐래도 나의 친구는 바다가 고향이란다/ 갈매기 나래 위에 시를 적어 띄우는 젊은 날/ 뛰는 가슴 안고 수평선까지 달려나가는/ 돛을 높이 올리자 거친 바다를 달려라/ 영~일만 친구야.”(최백호<사진>의 ‘영일만 친구’, 1979, 최백호 작사·작곡)

“1. 눈물에 옷자락이 젖어도 갈 길은 머나먼데/ 조용히 잡아주는 손 있어 서러움을 더해주나/ 저 사공이 나를 태우고 노 저어 떠나면/ 또 다른 나루에 내리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2. 서해 먼 바다 위론 노을이 비단결처럼 고운데/ 나 떠나가는 배의 물결은 멀리멀리 퍼져간다/ 꿈을 꾸는 저녁 바다에 갈매기 날아가고/ 섬마을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물결 따라 멀어져 간다.”(정태춘의 ‘서해에서’, 1977, 정태춘 작사·작곡)

두 노래 모두 바다의 생생한 경험을 가진 사람의 노래지만 느낌은 참 많이 다르다. 그 차이는 아마 그들의 고향 바다가 달랐기 때문이리라. 최백호는 부산 사람이니 동남해 바다를 보면서 자랐을 것이다. 투박하고 직설적인 말솜씨만큼 그의 노래에는 경상도 바닷가 사람들의 느낌이 스며 있다. 비록 노래 배경인 경북 영일만이 그의 고향에서는 다소 떨어진 곳이긴 하지만 일렉트릭기타 반주에 선율을 싣고 빠른 속도로 쭉쭉 뻗어나가는 이 노래는 동남해 바다의 거칠고 시원시원한 느낌을 고스란히 재현해 낸다.

그에 비해 정태춘의 고향은 평택이다. 나지막하고 잔잔한 서해 바다를 바라보며 살았다. 그가 어릴 적만 해도 황포돛배가 있었으니 노 젓는 사공도 일상 속에서 만나는 모습이었다. 이 노래는 군대 갔을 때에 인천에 근무하며 만든 노래라고 하는데, 평택이든 인천이든 제목처럼 ‘서해’임은 분명해 보인다. ‘영일만 친구’의 거친 바다와 비교하면 ‘서해에서’의 바다는 너무도 차분하고 조용하다. 노 젓는 사공조차 말 한마디 없다. 그 잔잔하고 조용한 바다를 비추는 노을은 비단결처럼 곱다. 서해에서만 볼 수 있는 기막힌 풍경이다. 이 시각성에 섬을 떠날 때 눈물로 옷자락을 적셨던 사람의 마지막 손길의 촉감, 물결 따라 멀어져 가는 섬마을 아이들의 아련한 웃음소리의 청각성까지 더해진다. 분위기는 잔잔하지만 시각·청각·촉각을 고루 건드리는 이 노래의 감각성은 매우 화려하고 섬세하다.

이렇게 바다를 끼고 살았던 사람들은 바다로 기쁨과 슬픔을 표현하는 데에 익숙하다. 또 바다를 통해 우주와 존재에 대해 생각하며, 바다를 통해 가족과 역사를 이해한다. 부산 동의대 학생들의 작품으로 1985년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바다에 누워’는 그런 느낌이 물씬 배어 있다.

“나 하나의 모습으로 태어나 바다에 누워 해 저문 노을을 바라다본다/ 설익은 햇살에 젖은 파도는 눈물인 듯 씻기어간다/ 일만의 눈부심이 가라앉고 밀물의 움직임 속에/ 뭇 별도 제각기 누워 잠잔다 마음은 물결처럼 흘러만 간다/ 저 바다에 누워 외로운 물새 될까 물살의 깊은 속을 항구는 알까/ 저 바다에 누워 외로운 물새 될까 딥디딥 딥디 디비디비딥.”(높은음자리의 ‘바다에 누워’, 1985, 박해수 작사, 김장수 작곡)

가사가 다소 어수선한 습작의 느낌이 있지만 “일만의 눈부심이 가라앉고 밀물의 움직임 속에 뭇 별도 제각기 누워 잠잔다” 같은 대목은 바닷바람이 낯설지 않고 모래사장에서 뒹굴며 살았던 사람들만 쓸 수 있는 구절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가수가 되어 고향바다를 떠나 서울사람이 되었다. 정태춘처럼 평택의 질감을 끈질기게 지녀온 경우도 없진 않지만, 이들 대부분은 서울사람 못지않게 서울의 감각을 세련되게 구현했다.

그렇게 살다 문득 자신이 누구인가 되돌아보게 될 때가 있었으리라. 이런 자각의 시간에 만들어진 노래는 감동스럽다. 함경도 출신 월남민 아버지가 어쩔 수 없이 뿌리박은 거제도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란 강산에는 90년대 내내 세련된 꽁지머리 휘날리며 노래를 했으나 마흔을 갓 넘긴 2002년 자신의 본명 ‘강영걸’을 음반 제목으로 삼아 함경도 사투리, 경상도 사투리가 뒤섞인 노래들을 발표했다.

“1.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노래 되고 시가 되고/ 약이 되고 안주 되고 내가 되고 니가 되고/ 그대 너무 아름다워요 그대 너무 부드러워요/ 그대 너무 맛있어요 감사합니데이
(랩) 내장은 창란젓, 알은 명란젓, 아가미로 만든 아가미젓, 눈알은 구워서 술안주 하고, 괴긴 국을 끓여먹고,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명태, 그 기름으로는 또 약용으로도 쓰인데제이요, 에잉/ (하략).”(강산에의 ‘명태’, 2002, 강산에 작사·작곡)
아버지의 고향 함경도의 생선 명태를 소재로 삼아 시종 함경도 억양과 사투리로 지껄이는 이 기막힌 노래는 아버지와 자신에게 바다가 그저 완상의 대상이나 관광지가 아니라 생선 냄새 나는 고향이고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바닷길이었음에 대한 깨달음의 표현이다.

여름이면 생각나는 ‘해변의 짧은 만남’ ...70년대 세대에겐 영원한 추억

이영미의 7080 노래방 <24> 파도와 함께 사라진 한여름의 사랑

이영미 | 제233호 | 20110828 입력
이제 여름은 다 갔다. 아직 날이 덥고 태풍의 위협도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벌써 8월 말이니 가을은 코앞에 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지금 바다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바다를 노래한 대중가요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놀랍게도 ‘철 지난 바닷가’ ‘파도에 쓸려간 허무한 사랑’에 대한 노래들이다.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 바닷가에서 추억을 맺은 사람/ 손잡고 해변을 단둘이 거닐며/ 파도 소리 들으며 사랑을 약속했던/ 그러나 부서진 파도처럼/ 쓸쓸한 추억만 남기고/ 바다의 여인아.”(사월과오월의 ‘바다의 여인’, 1972, 백순진 작사·작곡)
이 노래는 73년 버전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처음 발표된 72년 음반을 들어보면 ‘바다의 여인’은 물론 ‘욕심 없는 마음’에까지 이수만의 콧소리 섞인 가늘고 힘 있는 목소리가 아주 매력적으로 담겨있다.

쓸쓸한 사랑 노래가 매력 있는 법이니, 바다에 대한 노래 역시 이런 노래가 적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 사람들이 한여름에 들떠서 바다로 달려가고 싶어하면서도 그 여름 바다의 속성을 매우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사실 피서지 바다의 매력이란 일상의 일탈이 그 핵심이 아닐까. 산에서는 아무리 피서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옷을 입지만, 바다에서는 수영복만 걸친다. 멀쩡한 남자들도 예비군복만 걸치면 껄렁대는 걸 보면 의상의 힘이란 게 분명 있다. 심지어 남녀 할 것 없이 옷을 벗고 속살을 드러내게 되니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음에도 머리와 가슴이 평상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휴가지에서는 돈 씀씀이도 달라지고 연애에 대한 감각도 달라진다. 평소 자기 취향이 아닌 이성에게 마음이 끌리고, 평소에 못하던 일을 과감하게 저지른다. 일상의 억압적 질서에서 갑자기 해방된 축제의 공간이 바로 여름 바다다. 노래 가사처럼 손만 잡았겠는가. 74년에는 대한가족계획협회가 ‘바캉스베이비를 막자’라는 캠페인을 만리포와 대천해수욕장에서 벌일 정도였으니(이런 캠페인을 대한가족계획협회가 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여름 바다가 주는 일탈의 효과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축제의 본질은 ‘날이면 날마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축제는 일시적이고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1. 딩동댕 지난여름 바닷가서 만났던 여인/ 딩동댕 하고픈 이야기는 많았지만/ 딩동댕 너무나 짧았던 그대와의 밤/ 딩동댕 딩동댕 말이나 해볼 걸 또 만나자고/ 딩동댕 딩동댕 여름은 가버렸네 속절도 없이

2. 딩동댕 지난여름 우연히 잡았던 손목/ 딩동댕 하고픈 이야기는 많았지만/ 딩동댕 너무나 짧았던 그대와의 밤/ 딩동댕 딩동댕 말이나 해볼 걸 또 만나자고/ 딩동댕 딩동댕 여름은 가버렸네 속절도 없이.”(송창식의 ‘딩동댕 지난여름’, 1972, 임진수 작사, 송창식 작곡)
속절없이 여름은 가버렸다. 바닷가에서 손목 잡고 밤을 보냈던 그 여자와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렇게 여름 바다의 꿈처럼 아름답고 허무한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이미지가 바로 파도다. 뭔가 이루어질 것처럼 엄청난 기세로 들이닥치지만 해변에 닿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사그라져버린다. ‘닭살스럽게’ 하트에다 이름을 써넣은 백사장 모래조차 ‘원위치’시켜버릴 뿐-.
그래서인지 파도에 대한 노래는 매우 많고 히트곡도 적지 않다. 73년 정미조의 ‘파도’(이희목 작사·작곡)는 아름다운 선율과 짜임새 있는 음악과 정미조의 좋은 소리가 어우러져 크게 히트했다. 군대 갔다 온 후 솔로로 재출발한 이수만도 ‘파도’(1976, 지명길 작사·정민섭 작곡)로 인기가수의 길에 출발점을 찍었다.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하는 노래로 매년 여름마다 젊은이들 마음을 홀랑 뒤집어놓는 키보이스(사진)의 또 하나의 히트곡이 ‘바닷가의 추억’이다. 40년도 넘은 노래를 듣고 있노라니 노래 뒤에 너무나도 고지식하게 파도 소리를 깔아놓은 발상이 귀엽기까지 하다.
“바닷가에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 만난 그 사람/ 파도 위에 물거품처럼/ 왔다가 사라져간 못 잊을 그대여/ 저 하늘 끝까지 저 바다 끝까지/ 단 둘이 가자던 파란 꿈은 사라지고/ 바람이 불면 행여나 그 님인가/ 살며시 돌아서면 쓸쓸한 파도소리.”(키보이스의 ‘바닷가의 추억’, 1970, 김희갑 작사·작곡)

70년대 세대들은 여름 바다의 ‘물거품’ 같은 사랑조차 ‘아름다운 추억’으로 포장하길 마다하지 않았지만 90년대가 되면 달라진다. 본전 생각도 나고 억울해지기도 하는 유치한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지나간 여름 하 그 바닷가에서 만났던 그녀/ 허리까지 내려오는 까만 생머리/ 이것저것 잴 것 없이 난 그냥 푹 빠져 버렸어/ 아예 아예 난 사랑에 푹 빠져버렸어/ 지나간 그 여름 바닷가에서/ 꿈처럼 눈부신 그녈 만났지/ 믿을 수가 없어 아름다운 그녀/ 내겐 너무 행운이었어/ 별이 쏟아지던 하얀 모래 위에/ 우린 너무 행복했었지/ 가을 겨울 가고 널 볼 수가 없어/ 어디 있는 거야 제발 돌아와 줘/ 그녀 없는 여름 다시 찾아오면/ 나는 어떻게 해/ (중략)/ 친구들 날 달래준다고 그 바다로 다시 오게 됐어/ 청천벽력 날벼락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난 거야/ 내가 사준 선그라스 목걸이 그대로인데/ 단지 틀려진 건 내 친구와 함께라는 것/ (하략).”(DJ DOC의 ‘여름 이야기’, 1996, 이승호 작사·신동우 작곡)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앞서 들었던 노래의 달착지근한 분위기가 ‘확 깬다’. 음향도 그윽한 파도 소리 대신 오토바이 소리(!)다. 사실 여름 바다는 하도 시끄러워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일상으로 돌아와 보니 몸과 돈 모두 타격이 크다. 이게 현실이다. 그래, 90년대 세대들, 니들이 한 수 위다!

늦더위에 듣는 ‘구월의 노래’ ... 마음엔 벌써 낙엽 지는 듯

이영미의 7080 노래방 <25> 가을의 노래

이영미 ymlee0216@hanmail.net | 제234호 | 20110904 입력
이제 막 8월을 끝내고 9월에 들어섰는데 다음 주가 벌써 추석이란다. 음력이 일러서 그런가, 올해는 유난히 초가을 느낌이 일찍 찾아왔다. 9월은 이름의 어감부터 어둡다. 팔월이란 발음의 팔팔한 느낌과 달리 구월은 발음이 어두워 무언가 수그러들기 시작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패티 김이 부른 ‘구월의 노래’는 그래서 제목부터 끌린다.

“구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 / 꽃잎이 지는 소리 꽃잎이 피는 소리 / 가로수에 나뭇잎은 무성해도 / 우리들의 마음엔 낙엽은 지고 / 쓸쓸한 거리를 지나노라면 어데선가 부르듯 당신 생각뿐”. (패티 김의 ‘구월의 노래’, 1969, 이유 작사, 길옥윤 작곡)
길옥윤의 화려한 선율은 소위 여성적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만큼 부드럽게 매혹적이다. 그러고 보면 길옥윤의 노래를 남성 가수가 부른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와 콤비플레이를 한 가수는 모두 여자 가수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길옥윤의 선율과, 짜랑짜랑하면서도 풍부한 감정을 정확한 음정으로 표현하는 패티 김의 가창이 기막히게 어울려 1960년대 후반 스탠더드팝의 새로운 판도를 열었다. ‘구월의 노래’는 그들 콤비가 막 상승하던 시기의 산물이다.

9월의 느낌이 가사 그대로다. 아직 낙엽이 떨어지기는 이른 시기이나, 마음에는 벌써 낙엽이 지고 있다. 여름의 절정이 이제 지나가버린 초가을은, 만물의 몰락을 이미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마치 계절이 멈춰 있는 것처럼 지루했는데 가을부터는 세월이 마구 흘러간다.
“나뭇잎 사이로 파란 가로등 / 그 불빛 아래로 너의 야윈 얼굴 / 지붕들 사이로 좁다란 하늘 그 하늘 아래로 사람들 물결 / 여름은 벌써 가버렸나 거리엔 어느새 서늘한 바람 / 계절은 이렇게 쉽게도 가는데 / 우린 또 얼마나 어렵게 사랑해야 하는지 / (하략)”. (조동진의 ‘나뭇잎 사이로’, 1980, 조동진 작사·작곡)

초가을 느낌이 이렇게 선명한 노래가 또 있을까 싶다. 초가을의 느낌은 저녁 무렵에 강해진다. 노출된 팔이 썰렁하게 느껴지면 사람들은 하늘을 한번 쳐다보게 된다. 그 시야에 가로수 이파리와 그 위의 차가운 질감의 가로등 빛, 그리고 도시의 좁은 하늘이 보인다.
‘여름은 벌써 가버렸나 거리엔 어느새 서늘한 바람’이란 너무도 평범하고 무심하게 내뱉는 듯한 한 구절이 이 노래를 살려주는 가장 멋진 부분이다. 단순하게 흘러오던 화성의 흐름도 이 대목에서는 하행의 복잡한 느낌을 만들어 여름을 보내는 복잡미묘한 심사를 만들어낸다. 지겨운 여름이 가는 것은 좋으나, 겨드랑이 사이로 뭔가 스윽 빠져나가는 느낌, 뭔가를 잃어버린 묘한 상실감이 감지된다.

뭔가 지나가고 뭔가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상실감은 가을의 느낌이다. 그래서 가을과 무관해 보이는 이 노래에서도 가을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 두근거리는 마음은 아파도 이젠 그대를 몰라요 /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 합니다 /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 그렇게 보고 싶던 그 얼굴을 그저 스쳐 지나며 / 그대의 허탈한 모습 속에 나 이젠 후회 없으니 /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 합니다 /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이문세<사진>의 ‘사랑이 지나가면’, 1987, 이영훈 작사·작곡)

‘사랑이 지나가면’이라는 이 기막힌 표현이라니! ‘떠나가면’ ‘가버리면’ 같은 말들과는 전혀 다른 어감의 ‘지나가면’이란 표현이 이 노래 전체를 압도한다. 이별은 아픔에 눈물이 흐르지만, 화자는 사랑이 이렇게 ‘지나가는’ 것이라 여긴다. 이별과 상실의 그 고통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지는 태도를 가져야 그것을 ‘지나가는’ 것이라 여길 수 있다. 이 노래는, 소중한 것이 지금 막 지나가고 있는 순간을 영화 속 느린 동작으로 보는 것처럼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구사한다.

사랑만 흘러가는 것이랴. 사실 모든 것은 흘러간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1988, 최명섭 작사, 최귀섭 작곡)의 가사처럼 ‘저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사랑도 영원할 순 없다.

영원할 것처럼 착각했던 모든 것이 사실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계절, 그 상실감에 가슴 한 귀퉁이가 서늘해지는 계절이 가을이다. 가을이 남자의 계절이라 말하는 것은, 남자들이야말로 결코 영원하지 않은 자신의 힘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살아온, 참으로 어리석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비로소 가을이 되면 그것이 언젠가 무너지고 소멸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의 허황한 내면을 들여다보고 누구엔가 기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계절이 가을이다.
남자만큼 어리석은 나도, 이 상실감을 누구에겐가 기대어 위로받고 싶다. 그러다, 청소년기 때 읽어 너무도 익숙한 릴케의 ‘가을날’을 나이 들어 다시 읽으니 이런 얕은 마음이 부끄러워진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판 위엔 바람을 놓아 주십시오. / 마지막 열매들이 영글도록 명하시어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따뜻한 날을 베푸시고 완성으로 이끄시어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을 넣어주십시오. /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는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혼자로 남아 깨어나,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뭇잎 떨어져 뒹굴면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불안스레 방황할 것입니다.’(릴케의 ‘가을날’)

자신을 되돌아보고 깨어나 방황하며 나에게 ‘마지막 단맛’을 채울 이 계절을, 그저 값싼 위로나 넋두리, 투정으로 탕진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신이 만드는 포도송이처럼 ‘완성으로 이끄시어’라는 기도는 감히 할 수 없지만 말이다.

눈 감아도 떠오르는 고향역...‘무작정 상경’ 세대의 영원한 안식처

이영미의 7080 노래방 <26> 흐릿해지는 고향의 기억

| 제235호 | 20110911 입력
올 추석에도 어김없이 고향 가는 길은 복잡하고 돌아오는 길은 하염없이 밀릴 것이다. 이미 가문에 대한 의식이 현격하게 희미해졌건만, 신주를 모시고 지내는 차례와 성묘를 위해 이 엄청난 교통지옥을 감수하는 상황은 해마다 반복된다.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모르긴 몰라도 20년 내로 현격하게 달라질 것이다. 어찌 보면 지금의 40~50대가 이런 방식으로 고향을 찾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명절 교통지옥은 7080세대와 함께 본격화되어 이들과 함께 사라질 운명일 수도 있다. 1950년대의 전쟁, 1960년대의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온 국민의 거주지를 복잡하게 흐트러뜨렸다. 19세기만 하더라도 그저 태어난 곳에서 평생 살다가 그 땅에 묻히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삶이었다.

그런데 전쟁 통에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낯선 땅에 정착했다. 산업화가 본격화되자 도시로 일거리를 찾아 몰려다녔고,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집은 아이들을 잘 키워보겠다며 서울로 유학 보냈다. 교과서에 ‘시골의 할머니댁’ 같은 표현이 너무도 관행적으로 사용되던 시절이 바로 이들 세대의 시대였다. 그러니 이들 세대는 명절 때마다 ‘시골의 할머니댁’과 ‘노부모와 친척들이 사는 시골’에 모일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기차에 매달려서라도 고향에는 무조건 가야 하는 것이었다.

“1.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 역 / 이쁜이 곱분이 모두 나와 반겨 주겠지 / 달려라 고향 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 역”(나훈아의 ‘고향 역’, 1971, 임종수 작사·작곡)

화자의 머릿속에는 상경할 때 어머니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던 작은 고향 역과 아직도 그곳에 사는 시골 친구들이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가 몸을 실은 기차는 아마 터질 듯한 만원의 완행열차일 것이다. 이 노래가 나올 즈음 서울내기 대학생 청년들은 트윈폴리오나 뚜아에무아를 좋아했지만, 중학교 교복 벗어 던진 채 ‘무작정 상경’해 영등포와 구로에서 기름밥으로 살아가는 이농민 노동자들은 나훈아와 남진의 이런 노래를 좋아했다. 몇 시간씩 줄을 서서 어렵사리 표를 구해 귀향 기차에 올라탄, 손톱 밑이 까만 이들의 거친 손에는 어린 동생들에게 안겨 줄 학용품 따위가 들려있을 것이다.

고향에서 기다리는 ‘이쁜이’가 없다 해도, 어쨌든 고향 가는 길은 즐거웠을 것이다. 농사 지어 먹고살 수 없으니 올라오기는 했으나, 서울은 돈 없고 학력 낮고 연줄 없는 사람이 편하게 잘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을 테고, 서울살이가 힘들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커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시골로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가난으로 진저리가 쳐져 상경했는데 아무 대안 없이 어떻게 귀향을 한단 말인가. 그저 마음속 그리움으로만 ‘머나먼 남쪽 하늘 아래 그리운 고향 / 사랑하는 부모 형제 이 몸을 기다려’(나훈아의 ‘그리운 고향’), ‘멋쟁이 높은 빌딩 으시대지만 / 유행 따라 사는 것도 제멋이지만 /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면 / 나는 좋아 나는 좋아 님과 함께면’(남진의 ‘님과 함께’),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았을 것이다
.
이들 트로트 가수의 고향 노래가 이렇게 절실하다면, 좀 여유 있는 서울내기 청소년들이 좋아한 고향 노래는 수적으로도 드물 뿐 아니라 느낌도 아주 ‘쿨하다’.
“하늘에 흐르는 구름이 내 맘이라면 / 두둥실 날아서 다녀나 오리라만은 내 고향 / 물 맑고 산 높은 곳 끝없이 넓은 들에 / 뛰놀던 어린 시절 돌아가고 싶어라 / 풀잎을 베개 삼아 밤 새워 별을 헤며 / 내 꿈을 키우던 곳 언제나 다시 갈까”(홍민의 ‘망향’, 1971, 이종환 작사, 외국 곡)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란 대중가요에서 늘 있어왔던 내용이니 그냥 그런 노래 하나를 지은 느낌이 강하다. 그나마 포크 가수들에게 고향 노래는 그리 많지 않다. 고향이 서울이니 새삼 고향타령 할 것도 없고, 서울살이가 그토록 고달픈 것도 아니었으니 고향이 별로 그립지도 않았을 터이다.

도시가 아닌 농어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 고향에 노부모가 생존해 계시는 사람은 이제 점점 줄고 있다. 이런 내용의 노래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1. 참 오랜만에 돌아온 내 고향 / 집 뜰엔 변함없이 많은 꽃들 / 기와지붕 위 더 자란 미루나무 / 그 가지 한구석엔 까치집 여전하네 / 참 오랜만이야 / 낯선 사람 보듯 짖어대는 누렁아 / 나도 이 집에 한 식구란다 / 아침마다 너에게 밥 주시는 어머니 아버지 / 그 두 분의 사랑하는 막내아들 / 나도 한 식구란다 / (후렴) 너무 오랜 동안 잊고 지낸 탓일까 / 너무 오랜 동안 바라던 탓일까 / 오늘 따라 다르네 / 여느 때와 다르네

2. 사랑방 부엌엔 쇠죽 쑤시는 할아버지 / 정정하신 할아버지 오래 사세요 / 고추잠자리 따라 뛰노는 내 조카들과 / 아직 뭘 잘 모르는 두 살짜리 내 아들의 / 어울림이 좋은 날이야 / 옹기종기 모여앉아 송편 빚는 며느리들 /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시간은 흘러가는데 / 적적하던 내 고향집 오늘은 북적대지만 / 우리 모두 떠나면 얼마나 외로우실까 / 또 우실지도 몰라 / (후렴)” (안치환<사진>의 ‘고향 집에서’, 1995, 안치환 작사·작곡)

언제까지나 청년일 것 같았던 안치환도 나이를 헤아려보니 벌써 40대 후반이다. 노래 속의 ‘두 살짜리’도 이제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앞으로 10~20년 후 이 아이가 중장년기에 접어들 때쯤, 이런 풍경도 그리 흔하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7080세대의 시골 노부모님들은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나실 테고, 노년이 된 7080세대와 장년의 자녀는 모두 도시 거주자가 될 터이다. 자녀가 아예 외국에 가 있어 명절 때조차 만나기 힘들 수도 있고, 결혼하지 않은 싱글이 많아지면서 명절 행사란 게 시들해질 수도 있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60년을 살아온 우리 엄마가 아버지 돌아가시자마자 올 추석부터 명절 간소화를 주장하시는 걸 보니, 변화는 벌써 시작되고 있다.

‘여친’과 이별 더 아쉬워한 청춘들, 가사에선 ‘애국심’ 사라져

이영미의 7080 노래방 <31> 90년대 입영 노래

| 제240호 | 20111016 입력
‘뽀얀 담배 연기’ 자욱한 술집에서 최백호의 ‘입영전야’를 고래고래 부르며 입영 전날을 보내던 풍경은 1980년대로 끝이 났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입영 노래도 세대교체가 일어난 것이다. 아마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군 입대와 관련된 대중가요를 한 편 꼽으라 하면 거의 예외 없이 이 노래를 꼽을 것이다.

“1.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던 날 /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 가슴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 풀 한 포기 친구 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 /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2. 친구들아 군대 가면 편지 꼭 해다오 / 그대들과 즐거웠던 날들을 잊지 않게 / 열차시간 다가올 때 두 손 잡던 뜨거움 / 기적 소리 멀어지면 작아지는 모습들 /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3. 짧게 잘린 내 머리가 처음에는 우습다가 /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굳어진다 마음까지 / 뒷동산에 올라서면 우리 마을 보일런지 / 나팔 소리 고요하게 밤하늘에 퍼지면 / 이등병의 편지 한 장 고이 접어 보내오”(전인권<사진>의 ‘이등병의 편지’, 1990, 김현성 작사·작곡)

가수를 김광석이 아니라 전인권으로 쓴 것이 다소 이상해 보이는가? 이 노래를 가장 먼저 취입한 사람은 전인권이며, 그 시기도 90년으로 매우 이르다. 이 노래는 김민기가 한겨레신문과 손잡고 주도한 ‘겨레의 노래’라는 사업에서 공모로 뽑힌 작품이었다. 상업적이어서 획일적인 대중가요와 또 다른 이유로 획일적인 투쟁적 데모 노래 양자와 모두 거리를 둔, 그야말로 겨레 모두가 부를 수 있는 좋은 노래를 모으고 찾아 공연과 음반 취입, 책자 발간 등을 하겠다는 큰 사업이었다. 김민기는 직접 옌볜 등지로 날아가 그곳에서 몇 편의 작품을 골라왔고, 월북으로 사라졌던 작곡가 김순남의 노래도 부활시켰다.

그리고 일반인이 지은 좋은 노래들을 공모해 꽤 여러 편을 선정했다. 이 노래도 그 과정에서 뽑혔고 90년 음반 ‘겨레의 노래’에 전인권의 목소리로 수록됐다. 노래를 지은 김현성은 파주에서 포크 그룹 ‘종이연’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윤도현도 그 멤버 중 하나였다. 윤도현의 히트곡으로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가을 우체국 앞에서’도 김현성의 작품이다. 이후 그는 진보적 노래운동과 발을 맞춘 언더그라운드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했다. ‘이등병의 편지’와 ‘가을 우체국 앞에서’ 두 곡을 보면 참 착한 심성을 깊은 곳에서 차분하게 드러내는 사람임을 느낄 수 있다.

확실히 ‘입영전야’와 비교해 보면 세상이 변했음을 실감한다. 일단 ‘나라 위해’ 같은 입에 발린 표현들이 없다. 대신 매우 당연하면서도 절절한 이야기들, 부모나 친구들과 떨어지는 섭섭함과 외로움이 강조돼 있다. 군대에서 경직돼갈 자신에 대한 두려움도 표현된다. 87년 6월 시민항쟁이 없었다면 합법 음반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표현들이다.

그러나 90년 이 훌륭한 노래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같은 해 더 막강한 노래 한 편이 군대 가는 젊은이들을 휘어잡았기 때문이다.
“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보여주긴 싫었어 / 손 흔드는 사람들 속에 그댈 남겨두긴 싫어 /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댄 나를 잊을까 / 기다리지 말라고 한 건 미안했기 때문이야 / 그곳의 생활들이 낯설고 힘들어 / 그대를 그리워하기 전에 잠들지도 모르지만 / 어느 날 그대 편질 받는다면 며칠 동안 나는 잠도 못 자겠지 / 이런 생각만으로 눈물 떨구네 내 손에 꼭 쥔 그대 사진 위로”(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 1990, 박주연 작사, 윤상 작곡)

‘사랑일 뿐야’를 불러 크게 히트한 꽃미남 발라드 가수 김민우의 후속 곡으로 데뷔 곡을 능가할 정도로 엄청나게 히트를 했다. 게다가 김민우는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입대하게 되었고, 마치 현빈의 해병대 입대 때처럼 김민우 팬들이 입영 날 모여들어 눈물을 흘렸다.

이 노래는 한 번만 딱 들어봐도 히트는 떼어놓은 당상이다 싶다. 발라드 작사의 귀재로 떠오른 박주연의 가사에 대중적이면서도 값싸 보이지 않는 윤상의 작곡이 어우러졌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입영열차 안의 짧은 한순간에 입영 전날 애인과의 안타까운 이별 장면부터 이제부터 펼쳐질 긴긴 그리움과 고통까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의 중요 장면들을 드라마틱하게 압축해낸 가사는 한창 달아오른 발라드 시대에 안타까운 스무 살 청춘들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노래에서는 ‘나라’니 ‘애국심’이니 하는 것이 깨끗하게 사라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부모와 친구조차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군 입대 이야기가 오로지 애인과의 긴 이별의 사건으로만 의미화돼 있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몇 년 후 발표된 이장우의 ‘훈련소 가는 길’로 이어진다.

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의 빅 히트로 ‘이등병의 편지’는 민중가요 수용자들에게만 기억되는 노래로 남았다. 대중적 인기로 보자면 완패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입영열차 안에서’의 인기는 지나갔고 ‘이등병의 편지’는 부활했다. 서태지와아이들이 몰고온 댄스뮤직 시대에 자칫 죽어버릴 것 같았던 포크를 소극장 공연으로 유지하며 이어간 김광석의 음반에 리메이크로 실린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노래를 기억하고 속으로 읊조리던 386세대들이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서 이 노래를 살려낸 것이 정점이었다.

휴전선 공동경비구역에서 남과 북의 젊은 군인들이 기묘한 우정을 나누는 이 기막힌 상황을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는 정서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내주었다. 송강호가 연기한 북한군 병사의 대사 “광석이는 왜 그렇게 빨리 죽었다냐?”는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명대사로 남았다. 남북의 젊은이들이 휴전선에서 이런 방식으로 만나야 하는 것에 대한 착잡함과 총부리를 겨누는 두 체제의 젊은이들이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깊은 공감을 나누고 있다는 반가움이 겹쳐지도록 한 절묘한 대사였다.

그러니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등병의 편지’가 20년이 넘도록 살아남을 줄 짐작이나 했던가.




퀴퀴한 헛간 냄새, 무너진 장독대...정태춘 ‘고향집 가세’는 다큐

이영미의 7080 노래방 <27> 두엄 냄새 나는 고향

이영미 | 제236호 | 20110918 입력
고향이라는 말에서 도시와 다른 농어촌의 개발되지 않은 이미지를 실감으로 가지고 있는 세대는 아마 7080세대가 마지막일 것이다. 이 세대에는 코뚜레 꿴 소로 농사를 짓고, 고무신 들고 흙길을 뛰어다닌 기억, 혹은 집에 전깃불이 처음 들어온 놀라운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는 시골 출신들이 적잖이 있다. 이 아래 세대로 내려오면 전기는 물론 TV까지 다 보급되고 한겨울에 비닐하우스로 시설재배를 하며 농사짓는 시대를 경험한 세대로 바뀌게 된다. 이들 세대의 고향 이야기를 가장 다채롭고 풍부하게 형상화한 대중가요 작가는 단연 정태춘(사진)이다
고향이라는 말에서 도시와 다른 농어촌의 개발되지 않은 이미지를 실감으로 가지고 있는 세대는 아마 7080세대가 마지막일 것이다. 이 세대에는 코뚜레 꿴 소로 농사를 짓고, 고무신 들고 흙길을 뛰어다닌 기억, 혹은 집에 전깃불이 처음 들어온 놀라운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는 시골 출신들이 적잖이 있다. 이 아래 세대로 내려오면 전기는 물론 TV까지 다 보급되고 한겨울에 비닐하우스로 시설재배를 하며 농사짓는 시대를 경험한 세대로 바뀌게 된다.

이들 세대의 고향 이야기를 가장 다채롭고 풍부하게 형상화한 대중가요 작가는 단연 정태춘(사진)이다. 1970년대 청년문화의 포크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도시 청소년들이 주도했다. 그들은 도시 풍경을 세련되게 담아내는 데 주력했다. 그에 비해 78년 데뷔한 정태춘은 스무 살이 넘도록 농촌에서만 살아온 독특한 이력으로 포크 자작곡 가수 중 가장 향토적 감수성을 지녔다. 경기도 평택 농촌 마을에서 나고 자란 그는 황포돛배 휘날리는 50~60년대 포구부터 70년대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던 농촌까지를 모두 체험한 매우 드문 포크 작가다.

88년 발표된 ‘고향집 가세’는 70년대 농촌 고향집의 모습을 가장 탁월하게 그린 작품이다. 전체를 한꺼번에 감상해야 의미 있는 작품이라 다소 길지만 전문을 소개한다.
“1. 내 고향집 뒤뜰의 해바라기 울타리에 기대어 자고 / 담 너머 논둑길 황소마차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 음, 무너진 장독대 틈 사이로, 음, 난장이 채송화 피우려 / 음, 푸석한 슬레트 지붕 위로 햇살이 비쳐오겠지 / 에헤에헤야, 아침이 올 게야 에헤에헤야, 내 고향 집 가세

2. 내 고향 집 담 그늘의 호랭이꽃 기세등등하게 피어나고 / 따가운 햇살에 개흙마당 먼지만 폴폴 나고 / 음, 툇마루 아래 개도 잠이 들고, 음 뚝딱거리는 괘종시계만 / 음, 천천히 천천히 돌아갈 게야, 텅 빈 집도 아득하게 / 에헤에헤야, 가물어도 좋아라 에헤에헤야, 내 고향 집 가세

3. 내 고향집 장독대의 큰 항아리 거기 술에 담던 들국화 / 흙담에 매달린 햇마늘 몇 접 어느 자식을 주랴고 / 음, 실한 놈들은 다 싸 보내고, 음, 무지렝이만 겨우 남아도 / 음, 쓰러지는 울타리 대롱대롱 매달린 저 수세미나 잘 익으면 / 에헤에헤야, 어머니 계신 곳 에헤에헤야, 내 고향 집 가세

4. 마루 끝 판장문 앞의 무궁화 지는 햇살에 더욱 소담하고 / 원추리 꽃밭의 실잠자리 저녁바람에 날개 하늘거리고 / 음, 텃밭의 꼬부라진 오이 가지, 음, 밭고랑 일어서는 어머니 / 지금 퀴퀴한 헛간에 호미 던지고 어머니는 손을 씻으실 게야 / 에헤에헤야, 수제비도 좋아라 에헤에헤야, 내 고향 집 가세

5. 내 고향집 마당에 쑥불 피우고 맷방석에 이웃들이 앉아 / 도시로 떠난 사람들 얘기하며 하늘의 별들을 볼 게야 / 음, 처자들 새하얀 손톱마다, 음, 새빨간 봉숭아물을 들이고 / 음, 새마을모자로 모기 쫓으며 꼬박꼬박 졸기도 할 게야 / 에헤에헤야, 그 별빛도 그리워 에헤에헤야, 내 고향 집 가세

6. 문둥이도 아직 있을는지 어릴 적 학교길 보리밭엔 / 큰길가 언덕 위 공동묘지엔 상여집도 그냥 있을는지 / 음, 미군부대 철조망 그 안으로, 음, 융단 같은 골프장 잔디와 / 이 너머 산비탈 잡초들도 지금 가면 다시 볼 게야 / 에헤에헤야, 내 아버지는 그 땅 아래 에헤에헤야, 내 고향 집 가세”(정태춘의 ‘고향집 가세’, 1988, 정태춘 작사·작곡)

고향 집을 탁월하게 그려낸, 두 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늦여름 농촌의 풍경이 오롯이 담겨 있다. 무너진 장독대 틈에 핀 채송화, 태엽 감는 시계의 뚝딱거리는 소리만 울리는 한낮의 빈집에서 잠든 개, 흙담에 걸린 못난 마늘, 밭 가운데에서 허리를 펴고 일어서는 어머니, 퀴퀴한 헛간 냄새까지 그 묘사가 어찌나 정교하고 적확한지 전율이 일 정도다. 그저 상상으로 그려낸 ‘초가집’ ‘돌담길’ 같은 관념적 시골 마을 풍경이 아니다. 푸석한 슬레이트 지붕과 새마을모자로 모기 쫓는 아저씨들, 멀리 보이는 미군부대의 잔디밭 등 70년대 평택 농촌마을의 풍경을 고스란히 그려냈다는 것이 이 작품의 큰 미덕이다. 노래는 소 방울 소리를 연상시키는 요령 소리를 밑에 깔고 기타와 국악기로 편곡되어 있다.

‘가물어도 좋아라’ ‘어머니 계신 곳’ ‘내 아버지는 그 땅 아래에’ 같은 구절에서 확인되듯 그곳이 그리운 고향인 것은, 크게 잘나고 풍요로운 곳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추억과 함께 어머니가 아직 살고 있고 아버지가 살다가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이 상실된다면 고향은 이미 고향이 아니다.
“2. 저 맑은 별빛 아래 한밤 깊도록 뛰놀던 골목길 / 그때 동무들 이제 모두 어른 되어 그곳을 떠나고 / 빈 동리 하늘엔 찬바람결의 북두칠성 나의 머리 위로 / 그날의 향수를 쏟아부어 눈물 젖네 눈물 젖네

3. 나의 옛 집은 나도 모르는 젊은 내외의 새 주인 만나고 / 바깥 사랑채엔 늙으신 어머니, 어린 조카들, 가난한 형수님 / 아버님 제상에 둘러앉은 객지의 형제들 한밤의 정적과 / 옛 집의 사랑이 새삼스레 몰려드네 몰려드네”(정태춘의 ‘실향가’, 1988, 정태춘 작사·작곡)
자신은 물론 형제들도 모두 도시로 뿔뿔이 흩어졌고, 이제 고향은 제삿날에나 찾는 곳이 되었다. 친구들도 모두 그곳을 떠났고, 자신이 살던 집마저 빚에 넘어가 어머니는 그 집 사랑채에 세 들어 사는 신세다.

고향도 사람이 있고 추억이 깃들 공간이 남아 있을 때까지만 고향이다. 이렇게 이 세대의 고향은 점차 사라져간다. 정태춘의 고향 노래가 소중한 것은 상투적 고향 이미지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이 체험한 변화 한복판의 고향 농촌과 그 고향의 상실을 매우 성실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 따라 상경한 이농 1.5세, 그들에겐 주택가 골목이 고향

이영미의 7080 노래방 <28> 고향을 잃은 세대

| 제237호 | 20110925 입력
어느 틈엔가 대중가요에서 고향이 자취를 감췄다. 도시의 아이들에게는 시골의 고향이 없기 때문이다. 대도시 아파트에서 태어나 2년 정도에 한 번씩 이사 다니며 살아온 요즘 젊은이들에게 고향을 묻는 것은 참으로 뜬금없는 일 아닌가. 하긴 나도 청소년 시절에 ‘내 고향은 위생병원 산부인과야’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고 다녔다. 중랑교 다리 밑(서울의 위생병원은 중랑교 근처인 휘경동에 있다)에서 주워 왔다고 놀리시던 아버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 나이부터였다.

7080세대인 지금의 중년들은 시골의 옛 고향을 기억하고 노래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인 동시에 고향 없는 자들의 첫 세대이기도 하다. 이들이 태어나고 성장하던 1960~70년대에 산업화와 도시화는 급격히 이루어졌다. 급기야 90년대에 들어서서는 국민의 절반이 수도권에 거주하고 국민 대부분이 아파트 같은 공용주택에서 사는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90년대 이후의 대중가요에서 고향을 그리는 노래로 인기를 얻은 것은 월북시인 정지용 해금 붐을 타고 나온 ‘향수’와 팍팍한 낯선 도시에서의 외로움을 노래한 조용필의 ‘꿈’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나마 모두 90년대 초반의 노래였고 젊은 취향에서는 다소 벗어난 노래였다.
80년대 초의 ‘제2의 고향’은 고향이 사라지는 시대의 한 순간이 묘하게 포착된 노래다.

“사방을 몇 바퀴 아무리 돌아봐도 / 보이는 건 싸늘한 콘크리트 빌딩 숲 / 정둘 곳 찾아봐도 하나도 없지만 / 그래도 나에겐 제2의 고향 / 거리를 하루 종일 아무리 걸어 봐도 / 보이는 건 한없는 밀리는 자동차 / 가슴은 답답하고 머리는 띵하지만 / 그래도 나에겐 제2의 고향 / 밤이면 빌딩 위에 걸린 초생달 / 쓸쓸한 내 마음을 달래주누나 / 우우우 우우우 / 너의 모습처럼”(윤수일<사진>의 ‘제2의 고향’, 1981, 윤수일 작사·작곡)

서울이라 짐작되는 이곳은 ‘고향’이 아니라 ‘제2의 고향’이다. 콘크리트 벽과 자동차만 있는 곳인데도, 이 서울이 좋단다. 이로부터 10년 전쯤에는 ‘멋쟁이 높은 빌딩 으스대지만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면 나는 좋아’(남진의 ‘님과 함께’), ‘머나먼 남쪽 하늘 아래 그리운 고향 사랑하는 부모 형제 이 몸을 기다려’(나훈아의 ‘머나먼 고향’)라고 노래하여 ‘대박 인기’를 얻었다. 한쪽 다리를 떨며 신나게 노래를 했던 70년대 초 남진과 마이크 대를 옆으로 잡고 노래하던 80년대 초의 윤수일을 한꺼번에 머릿속에 떠올리며, 이 노래의 가사가 보여준 엄청난 차이를 비교하면 정말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70년대 초의 고향 노래들에 공감했던 사람들이 스스로 가난을 못 이겨 이농한 청년들이었다면, 80년대 ‘제2의 고향’에 환호했던 대중들은 60~70년대 이농 대열에 끼어있던 부모형제와 함께 어릴 적에 서울에 올라와 80년대에야 비로소 청년기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이농 1.5세쯤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고향은 그다지 그리운 곳이 아니다. 어릴 적 아련한 추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도시에서 학교 다니면서 적응을 끝냈다. 서울살이의 고생? 그건 막일하는 부모와 공장 다니던 큰형과 누나들이 한 것이고, 어린 것들은 허름한 산동네에서도 싸구려 핫도그 손에 쥐고 만화방 드나들면서 신나게 뛰어놀면서 자랐다.

그러니 재미없는 시골로 돌아가고 싶겠는가? 천만에! 이농한 어른들은 마음으로는 고향이 그리워도 먹고살 대책이 없으니 돌아갈 수 없었지만, 이농 1.5세 아이들은 돌아갈 마음이 아예 없었다. 서울이 고향이나 다름이 없는데, 어디로 ‘돌아간단’ 말인가.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밭을 지나 /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너의 아파트’가 있는 곳이 바로 서울이다.(나는 이 윤수일의 ‘아파트’에서 잠실 5단지 아파트가 선명히 떠오른다.) 초가지붕 위의 박꽃을 노래하지 않고 아파트를 노래하는 세상이 되었는데, 무슨 시골 고향이 그립겠는가.

하지만 서울내기들에게도 향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향(鄕)’도 없는데 ‘향수(鄕愁)’라니 참 웃기는 말 같지만, 과거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오늘은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 /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 어릴 적 함께 뛰놀던 골목길에서 만나자 하네 / 내일이면 아주 멀리 간다고 /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 길 /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에 / 다정한 옛 친구 나를 반겨 달려오는데 / (하략)”(동물원의 ‘혜화동’, 1989, 김창기 작사·작곡)

이들의 고향은 서울 종로구 혜화동, 중산층 단독주택이 밀집해 있던 곳이다. 이들은 이제 거기 살지 않는다. 아마 강남 반포나 대치동쯤에 살지 않았을까 싶다. 강북의 단독주택에서 살던 중산층들은 70년대 중·후반을 계기로 너도나도 강남의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혜화동에서 함께 놀던 초등학교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끔 안부나 묻는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멀리 떠나간’단다. 군대 가거나 유학을 떠나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들은 다시 자신들의 옛 고향 혜화동의 골목길에서 만나기로 했다.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오면서 이들은 향수에 잠겼을 것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에게는 서울 강북 주택가가 바로 고향이다. 나 역시 그렇다. 가회동 한옥들 앞에 물끄러미 서 있거나, 보문동의 골목길 등을 걸어가 보면 고향에 온 것 같은 아늑함을 느낀다. 이미 그 집을 떠난 지 3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꿈에 등장하는 집은 늘 어릴 적 살던 그 한옥이다. 2000년대 들어 서울 북촌 한옥 붐이 일기 시작하고, 강북 투어 프로그램이 생기고, 서울을 탐구하는 전시와 강연들이 기획되는 것은, 바로 강북에서 자란 서울내기들이 중년에 이르러 자신의 고향을 찾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쾌한 빨간 마후라, 육군 김일병  전쟁 악몽 벗어난 60년대 ‘군인 가요’

이영미의 7080 노래방 <29> 비장한 국군에서 명랑한 국군으로

이영미 ymlee0216@hanmail.net | 제238호 | 20111002 입력
어제가 국군의 날이었다. 어느 틈엔가 우리 사회에서 군인은 매우 예민하고도 희한한 존재가 됐다. 배우 현빈의 해병대 지원 소식이 모든 뉴스를 뒤덮고, 고위 공직자와 그 아들의 병역 문제가 늘 청문회 자리에서 문제가 되며, 정치인 문재인이 특전사 시절 찍은 사진이 화제가 되는 사회. 군복무 이야기만 나오면 남자들이 모두 평상심을 잃어버리고 희한하게 흥분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군인이 되는 일이 의무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자부심과 피해의식이 모두 적지 않은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남자아이의 꿈이 ‘군인’이고 골목마다 병정놀이 하는 아이들 소리로 시끄럽던 때가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군인도 아니면서 군대식 거수경례를 배우고, 교복 차림이라면 어른 앞에서 거수경례를 하는 것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채 50년도 안 된 일들이다.

아니, 지금부터 50년도 안 된 일이라고 계산을 하는 것은 다소 불합리하다. 전쟁이 끝난 지 불과 30년도 안 된 때이니, 군인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게 느껴진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대중가요 속 군인의 모습은 일제 말 친일가요에서 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해 해방 이후에는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노래로 이어진다. 현실 속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배경이니, 노래 속 군인의 모습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전우야 잘 자라’)에서처럼 비장했다.

“가랑잎이 휘날리던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꿈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아아 아아아아아 그 목소리 그리워.”(신세영의 ‘전선야곡’, 1952,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이런 진지하고 비장한 군인의 모습은 ‘삼팔선의 봄’ 등 1950년대 후반까지 어느 정도 유지됐으나 채 10년을 유지하지 못했다. 60년대에 들어서면 이렇게 경쾌한 분위기로 군인의 이미지가 바뀐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구름 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 아가씨야 내 마음 믿지 말아라 번개처럼 지나갈 청춘이란다.”(봉봉사중창단의 ‘빨간 마후라’, 1964, 한운사 작사, 황문평 작곡)

문화방송 라디오의 62년 드라마를 64년 신상옥 감독이 리메이크한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제가로 드라마, 영화, 주제가 모두 히트했다. 영화 내용은 6·25전쟁을 시대 배경으로 마지막에 주인공이 마치 가미카제처럼(작가 한운사가 그렇게 말했다) 비행기와 함께 몸을 던져 다리를 폭파하는 비장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공군 제트기 조종사들의 이야기이니 흙과 함께 뒹구는 육군 이야기와 달리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가 있고, 정부 지원 아래 많은 공중촬영 장면을 담은 컬러영화여서 더욱 세련됨을 뽐내는 작품이었다. 노래 역시 비장한 슬픔이 아닌, 경쾌하고 발랄한 분위기를 선택해 크게 히트했다.

하지만 이것은 전조에 불과했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넘어가자 이제 군인에게 점점 전쟁 이미지는 탈각되었다. 어차피 대중가요의 팬은 젊은이들인데, 군인 노래가 계속 비장하기만 한 것을 60년대 젊은이들이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군대에서 부르는 공식적 군가로는 다소 경직되게 군기 팍팍 들어간 노래가 교육되었겠지만, 일반 대중들의 호응으로 유지되는 대중가요까지 그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신병 훈련 육 개월에 작대기 두 개/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 신나는 김일병(헤이 부라보 김일병)/ 기상나팔에는 투덜대지만 (헤이 부라보 김일병)/ 식사시간에는 용감한 병사/ 신나는 휴가 때면은 서울의 거리는 내 차지/ 나는야 졸병이지만 그녀는 멋쟁이/ 백발백중 사수에다 인기도 좋아(헤이 부라보 핸섬 보이)/ 육군 김일병님 용감한 병사.”(봉봉사중창단의 ‘육군 김일병’, 1966, 정민섭 작사·작곡)

이 노래 속 군인에는 전쟁의 고통이나 아픔은 흔적조차 없다. 기상나팔, 식사시간, 사격훈련, 휴가 등이 그들 삶의 풍경이다. 명랑하고 발랄하기 이를 데 없다. 언제 죽을지 모르던 전쟁 때의 군인과 비교하면 거의 ‘당나라 군대’를 떠올리게 할 정도다.

그러나 60년대 노래 속의 군인은 여전히 멋지고 씩씩하다. 대중가요 속에서 ‘찌질하거나’ 우울한 군인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대통령과 고위 공직을 모두 군인 출신이 장악했던 시절, 누가 감히 군인을 그렇게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한국 록의 아버지’인 신중현의 노래에까지 군인은 멋진 존재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이제서 돌아왔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너무나 기다렸네/ 굳게 닫힌 그 입술 무거운 그 철모 웃으며 돌아왔네/ 어린 동생 반기며 그 품에 안겼네 모두 다 안겼네/ 말썽 많은 김총각 모두 말을 했지만/ 의젓하게 훈장 달고 돌아온 김상사/ 동네사람 모여서 얼굴을 보려고 모두 다 기웃기웃/ 우리 아들 왔다고 춤추는 어머니 온 동네 잔치하네/ 폼을 내는 김상사 돌아온 김상사 내 맘에 들었어요/ 믿음직한 김상사 돌아온 김상사 내 맘에 들었어요.”(김추자<사진>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1969, 신중현 작사·작곡)

말썽 많던 남자들도 군대를 갔다 오면 멋지고 의젓해진단다. 게다가 월남에서 영어도 배우고 미제 물건도 갖고 왔으니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미국의 로커들이 월남전 반대운동을 하고 있을 때 한국 록의 아버지는 월남전을 찬양하는 노래를 짓고 대중들의 호응으로 인기를 얻은 것을 생각하면, 미국과 한국의 록의 지닌 역사와 현실은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새삼 절실하게 느낀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와 『광화문 연가』 등 을 썼다.

부모 따라 상경한 이농 1.5세, 그들에겐 주택가 골목이 고향

이영미의 7080 노래방 <28> 고향을 잃은 세대

| 제237호 | 20110925 입력
어느 틈엔가 대중가요에서 고향이 자취를 감췄다. 도시의 아이들에게는 시골의 고향이 없기 때문이다. 대도시 아파트에서 태어나 2년 정도에 한 번씩 이사 다니며 살아온 요즘 젊은이들에게 고향을 묻는 것은 참으로 뜬금없는 일 아닌가. 하긴 나도 청소년 시절에 ‘내 고향은 위생병원 산부인과야’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고 다녔다. 중랑교 다리 밑(서울의 위생병원은 중랑교 근처인 휘경동에 있다)에서 주워 왔다고 놀리시던 아버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 나이부터였다.

7080세대인 지금의 중년들은 시골의 옛 고향을 기억하고 노래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인 동시에 고향 없는 자들의 첫 세대이기도 하다. 이들이 태어나고 성장하던 1960~70년대에 산업화와 도시화는 급격히 이루어졌다. 급기야 90년대에 들어서서는 국민의 절반이 수도권에 거주하고 국민 대부분이 아파트 같은 공용주택에서 사는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90년대 이후의 대중가요에서 고향을 그리는 노래로 인기를 얻은 것은 월북시인 정지용 해금 붐을 타고 나온 ‘향수’와 팍팍한 낯선 도시에서의 외로움을 노래한 조용필의 ‘꿈’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나마 모두 90년대 초반의 노래였고 젊은 취향에서는 다소 벗어난 노래였다.
80년대 초의 ‘제2의 고향’은 고향이 사라지는 시대의 한 순간이 묘하게 포착된 노래다.

“사방을 몇 바퀴 아무리 돌아봐도 / 보이는 건 싸늘한 콘크리트 빌딩 숲 / 정둘 곳 찾아봐도 하나도 없지만 / 그래도 나에겐 제2의 고향 / 거리를 하루 종일 아무리 걸어 봐도 / 보이는 건 한없는 밀리는 자동차 / 가슴은 답답하고 머리는 띵하지만 / 그래도 나에겐 제2의 고향 / 밤이면 빌딩 위에 걸린 초생달 / 쓸쓸한 내 마음을 달래주누나 / 우우우 우우우 / 너의 모습처럼”(윤수일<사진>의 ‘제2의 고향’, 1981, 윤수일 작사·작곡)

서울이라 짐작되는 이곳은 ‘고향’이 아니라 ‘제2의 고향’이다. 콘크리트 벽과 자동차만 있는 곳인데도, 이 서울이 좋단다. 이로부터 10년 전쯤에는 ‘멋쟁이 높은 빌딩 으스대지만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면 나는 좋아’(남진의 ‘님과 함께’), ‘머나먼 남쪽 하늘 아래 그리운 고향 사랑하는 부모 형제 이 몸을 기다려’(나훈아의 ‘머나먼 고향’)라고 노래하여 ‘대박 인기’를 얻었다. 한쪽 다리를 떨며 신나게 노래를 했던 70년대 초 남진과 마이크 대를 옆으로 잡고 노래하던 80년대 초의 윤수일을 한꺼번에 머릿속에 떠올리며, 이 노래의 가사가 보여준 엄청난 차이를 비교하면 정말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70년대 초의 고향 노래들에 공감했던 사람들이 스스로 가난을 못 이겨 이농한 청년들이었다면, 80년대 ‘제2의 고향’에 환호했던 대중들은 60~70년대 이농 대열에 끼어있던 부모형제와 함께 어릴 적에 서울에 올라와 80년대에야 비로소 청년기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이농 1.5세쯤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고향은 그다지 그리운 곳이 아니다. 어릴 적 아련한 추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도시에서 학교 다니면서 적응을 끝냈다. 서울살이의 고생? 그건 막일하는 부모와 공장 다니던 큰형과 누나들이 한 것이고, 어린 것들은 허름한 산동네에서도 싸구려 핫도그 손에 쥐고 만화방 드나들면서 신나게 뛰어놀면서 자랐다.

그러니 재미없는 시골로 돌아가고 싶겠는가? 천만에! 이농한 어른들은 마음으로는 고향이 그리워도 먹고살 대책이 없으니 돌아갈 수 없었지만, 이농 1.5세 아이들은 돌아갈 마음이 아예 없었다. 서울이 고향이나 다름이 없는데, 어디로 ‘돌아간단’ 말인가.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밭을 지나 /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너의 아파트’가 있는 곳이 바로 서울이다.(나는 이 윤수일의 ‘아파트’에서 잠실 5단지 아파트가 선명히 떠오른다.) 초가지붕 위의 박꽃을 노래하지 않고 아파트를 노래하는 세상이 되었는데, 무슨 시골 고향이 그립겠는가.

하지만 서울내기들에게도 향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향(鄕)’도 없는데 ‘향수(鄕愁)’라니 참 웃기는 말 같지만, 과거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오늘은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 /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 어릴 적 함께 뛰놀던 골목길에서 만나자 하네 / 내일이면 아주 멀리 간다고 /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 길 /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에 / 다정한 옛 친구 나를 반겨 달려오는데 / (하략)”(동물원의 ‘혜화동’, 1989, 김창기 작사·작곡)

이들의 고향은 서울 종로구 혜화동, 중산층 단독주택이 밀집해 있던 곳이다. 이들은 이제 거기 살지 않는다. 아마 강남 반포나 대치동쯤에 살지 않았을까 싶다. 강북의 단독주택에서 살던 중산층들은 70년대 중·후반을 계기로 너도나도 강남의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혜화동에서 함께 놀던 초등학교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끔 안부나 묻는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멀리 떠나간’단다. 군대 가거나 유학을 떠나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들은 다시 자신들의 옛 고향 혜화동의 골목길에서 만나기로 했다.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오면서 이들은 향수에 잠겼을 것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에게는 서울 강북 주택가가 바로 고향이다. 나 역시 그렇다. 가회동 한옥들 앞에 물끄러미 서 있거나, 보문동의 골목길 등을 걸어가 보면 고향에 온 것 같은 아늑함을 느낀다. 이미 그 집을 떠난 지 3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꿈에 등장하는 집은 늘 어릴 적 살던 그 한옥이다. 2000년대 들어 서울 북촌 한옥 붐이 일기 시작하고, 강북 투어 프로그램이 생기고, 서울을 탐구하는 전시와 강연들이 기획되는 것은, 바로 강북에서 자란 서울내기들이 중년에 이르러 자신의 고향을 찾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슬아슬 검열 통과한 ‘입영전야’...군인은 못 부른 ‘늙은 군인의 노래’

이영미의 7080 노래방 <30> 군인 가요의 변신

이영미 ymlee0216@hanmail.net | 제239호 | 20111009 입력
1970년대는 전쟁이 끝난 지 불과 20년 전후의 시기였지만 세상은 정말 많이 변했다. 40대 이상의 기성세대는 전쟁기의 고통이 엊그제 같았겠지만, 청소년들은 전쟁의 경험이 없는 전후세대들로 채워졌고 이들은 성장하면서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체득했다. 이제 군인은, 존경스럽지도 않고 자신과 동일시되지 않는 대상이 되어 버렸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철딱서니 없는 것들’이었던 셈이다.

당연히 군인을 다룬 대중가요는 더 이상 인기를 누릴 수 없었다. 60년대까지의 군인 소재 노래가, 아무리 정부의 부추김에 의해 만든 노래라 할지라도 꽤 여러 편이 히트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다면,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1. 나 하나 몸 간수도 못하던 내가 총 메고 싸움터에 나섰습니다 / 부모님 말씀도 안 듣던 내가 조국의 부름에 따랐습니다 / 훈련소서 더벅머리 잘라버릴 땐 서러움의 눈물을 흘렸지마는 예예예 / 지금은 산뜻한 군복을 입고 호미 대신 총을 멘 멋장이라오

2. 물지게도 제대로 못 지던 내가 거칠은 훈련도 받아넘기고 / 뛰었다 하면 구보 길 이십여 리에 감기 한 번 안 걸린 사나이 됐다오 / 달이 밝은 야영 때는 편지를 쓰죠 어머님 그동안 안녕하신지 예예예 / 당신 곁 떠나올 때 울던 바보가 지금은 나라의 기둥이지요

3. 고향을 떠나서 멀리와 보니 무엇보다 그리운 건 이쁜입니다 / 떠나올 때 날 붙들고 울던 이쁜이 행여나 긴 세월 기다려 줄까 / 나 없이는 못 산다고 하던 이쁜이 지금도 내 생각만 하고 있겠지 예예예 / 조국에 충성하고 돌아가는 날 누구보다 이쁜이가 반겨주겠지”(조영남<사진>의 ‘이일병과 이쁜이’, 1971, 조영남 작사, 김학송 작곡)

청년문화 시대의 첫 스타가 된 조영남은 정부의 다양한 요구를 수용한 노래를 많이 불렀는데 이 곡도 그런 작품이다. 조영남 특유의 작사 감각이 없진 않지만 지난 회에 소개한 ‘육군 김일병’이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와 그리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건전가요였다. 아무리 인기 있던 조영남이지만, 이미 달라진 새 세대들에게는 ‘군대 갔다 와야 철이 들지’ 식의 어른들 훈계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78년 허성희의 ‘전우가 남긴 한 마디’ 같은 노래는 오로지 50대 이상만 감동하는 시대착오적인 노래로 들렸다. 전쟁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총알이 빗발치던 전쟁터’ 타령이란 말인가.

새로운 세대의 젊은이들이 군대에 지니는 솔직한 심정은 3년 동안 가족과 친구와 헤어져 험한 고생길 떠나는 착잡함이었을 것이다. 하길종 감독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의 마지막 장면이 병태가 머리 깎고 군대 가는 장면인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군 입대란, 기성세대에 반기를 들었던 청년들이 그 풋풋하고 자유로웠던 청년기를 끝내고 타락한 기성세대의 세계로 접어들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런 청년들의 착잡함을 대변해줄 노래는, 검열당국의 눈치를 보느라 참 나오기 힘들었다.

“1. 아쉬운 밤 흐뭇한 밤 뽀얀 담배연기 / 둥근 너의 얼굴 보이고 넘치는 술잔엔 너의 웃음이 / 정든 우리 헤어져도 다시 만날 그날까지 / (후렴)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
2. 지난날들 돌아보면 숱한 우리 얘기 / 넓은 너의 가슴 열리고 마주 쥔 두 손엔 사나이 정이 / 내 나라 위해 떠나는 몸 뜨거운 피는 가슴에 / (후렴)”(최백호의 ‘입영 전야’, 1978, 최백호 작사·작곡)

아마 지금 40대부터 50대 중반까지 군필 남자라면 입영 열흘 전부터 이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며 술을 마셔댄 경험을 모두 갖고 있을 것이다. 나 같은 여자들도 그런 술자리 끼어 정말 지겹도록 이 노래를 불러댔다.

지금 살펴보면 70년대의 검열 수준을 통과한 참으로 아슬아슬한 노래다. 건전가요들이 지닌 계몽성이 상당히 제거되어 있지만, 그래도 ‘흐뭇한 밤’, ‘내 나라 위해 떠나는 몸’, ‘뜨거운 피’ 등의 가사를 남겨두어 기성세대와 검열당국을 만족시켰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앞부분에 ‘아쉬운 밤’, ‘뽀얀 담배연기’, ‘넘치는 술잔’을 배치하고, 후렴에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로 끝맺음으로써 군대의 경직성과 크게 어긋나는 술자리의 자유분방하면서도 착잡한 분위기가 노래 전체를 압도하게 만든다.

그런데 같은 해에 또 한 편의 주목할 만한 군인 소재 노래가 나왔다.
“1.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 년 /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 나 죽어 이 흙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 (후렴)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

2.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 / 너희들은 자랑스런 군인의 아들이다 / 좋은 옷 입고프냐 맛난 것 먹고프냐 / 아서라 말아라 군인 아들 너로다 / (후렴)

3. 내 평생 소원이 무엇이더냐 / 우리 손주 손목 잡고 금강산 구경일세 / 꽃 피어 만발하고 활짝 개인 그날을 / 기다리고 기다리다 이 내 청춘 다 갔네 / (후렴)”(양희은의 ‘늙은 군인의 노래’, 1978, 김민기 작사·작곡)

군 입대 후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영창 거쳐 전방으로 쫓겨난 김민기가 군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머리에 서리가 앉기 시작한 이 늙은 하사관은 전쟁 때 군대에 들어왔다가 그냥 직업군인으로 눌러앉았을 듯하다. 자랑스럽지만 가난한 하급 군인의 삶을 묵묵하게 한평생 살아왔을 이 주인공의 회한이 작품 전체의 느낌이다. 씩씩함과 애국심을 충분히 남겨두면서도 전반적으로 쓸쓸함과 회한의 감정을 드러낸 이 노래는, 국방부의 금지곡이 되어 정작 군인들은 부르지 못하는 노래가 되었다.

이 노래를 보니 확실히 군대가 젊은이를 철들게는 하는 듯하지만, 그게 꼭 어른들이 바라는 방향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세상은 재미있는 것일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