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성의 '으리' 광고 |
[김헌식의 문화비빔밥] 의리문화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렀을 때
한낱 해프닝일 것 같았던 의리 광고, 그것에서 비롯한 의리 패러디는 별다른 대중문화 이슈가 없는 상황을 잘 파고들었다. 광고 속 김보성이라는 캐릭터가 남발하는 으~리의 B급 정서가 웃음을 유발하는데 이런 단순한 컨셉은 보통 픽픽 웃고 말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촌스러운 웃음코드가 기업 마케팅으로 번지면서 사회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대접받았다. 어쨌든 이 의리광고 때문에 해당 기업음료의 판매가 70%이상 늘어났다하니 다른 기업들에서는 따라할만했다. 더구나 사회적 이슈와 맞물리면서 기업의 이미지 자체도 좋아진 모양이다.
여기에서 사회적 이슈는 세월호 참사다. 단순히 유희적인 것도 있겠지만 의리광고 패러디가 생산되는 이유는 세월호 참사에 대응하는 네티즌들의 저항의식이 닿아있기 때문이란다. 일단 세월호 참사에서 선장과 선원, 승무원들은 배를 버렸다. 그들은 승객들에 대한 약속과 신뢰를 저버렸다. 해당 해운업체는 불법과 편법을 통해 승객과 시민들을 속여 왔고,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의 리더들까지 참사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즉 그들은 소비자와 국민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의리 광고는 네티즌들에게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소비자와 시민들에게 신뢰를 지키지 않는 행태들을 비판하는 패러디 물로 활용되고 있다.
1997년 IMF외환관리 체제 이후로 쥐 문화가 한국을 지배한 맥락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IMF외환관리체제이후 한국인들은 각자 스스로 이익을 찾아 조직을 버리는 일을 당연시했다. 조직은 오랫동안 소처럼 일한 사람들을 버렸고, 개개인들은 조직을 버리고 자신의 일신을 위해 혼자 이익을 취하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조직들도 그런 사람들을 선호했다. 지진이나 해일, 화산 폭발이 있는 경우 가장 먼저 탈출하는 것은 쥐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한편 90년대 후반 본격화된 디지털 환경을 상징하는 마우스는 언제든지 하이퍼텍스트 공간의 이동을 재빨리 가능하게도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사회는 우직한 소 문화에서 이런 쥐 문화로 이동했다. 소처럼 묵묵하게 한길을 성실하게 가는 인재는 사회적으로나 조직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게 간주되어버렸고 사회문화적 행태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그런 리더들은 조직을 오가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겼고 CEO라는 이름으로 대접받았다. 그런 이가 대통령이 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세월호 참사는 리더가 어떤 사람들이어야 하는지 명확하게 드러내주었다. 그것은 쥐가 아니라 소처럼 의리를 지키는 존재가 필요한 점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그 정점을 이루어졌고, 현 정권에서도 여전했다.
그런데 이 의리 문화는 얼마든지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 갈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요즘 새삼 부각된 '관피아'이다. 그런데 어디 '관피아'에만 해당될까? 의리는 조직폭력배들이 강조하는 대표적인 가치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마피아의 변용어인 관피아에 의리 심리가 닿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조직의 할거주의도 그렇거니와 특정 공공조직 출신이 유관 기관에 진출하면서 서로 공존 공생하는 행태는 의리 의식에 기반하고 있다. 해운사를 감독해야할 정부는 오히려 편들거나 봐주고 유관기관의 리더들은 편의를 제공받았다. 조직의 기수 문화와 연고주의도 이런 의리 문화의 폐해를 양산해왔고, 흔히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을 만들어 왔다. "우리가 남이가"라면서 하나의 공동체적 운명을 강조하는 것은 지역주의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지역출신들이 밀고 끌어주고 하면서 의리를 강조했고, 이러한 점들은 6.4지방 선거에서도 똑같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진영논리도 그렇지만 같은 정권 계열들의 의리도 빼놓을 수 없다. 결국 박근혜 정권도 대립했던 이명박 정권에 대해서 의리를 지켰다. 지난 정권에서 이뤄졌던 해양관련 규제완화 정책들에 대해서 언급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규제완화 정책이 없었다면 세월호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누구에 대해 의리를 지켜야 하는 지는 자명했다. 하지만 해경 해체는 책임 전가였고 이를 통해 박근혜 정권이 공포 정책 리더십을 구사한 상황은 시민과 국민에 대한 의리를 지킨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참사는 대규모 조직이 없어서가 아니라 당연히 좋은 것이라고 무감각하게 인식하는 문화적 심리 때문에 일어난다는 점을 박근혜 정부는 인식 못했다. 아니면 모른 척 하거나. 국가안전처의 신설은 쥐처럼 재빨리 다른 조직으로 튄 셈이 되었다. 그것은 다시 의리를 내세운 또 하나의 마피아 탄생이 될 것이다.
다시 김보성의 의리 광고로 돌아가 보자. 광고는 전통 음료가 소비자들에게 의리를 지키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꼭 전통 음료가 몸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지 알 수 없다. 예컨대, 설탕이 많이 들어간 음료라면 아무리 겉은 전통이어도 의리를 지킨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전통은 민족주의를 전제한다. 당연히 전통 나아가 민족주의 자체가 정말 시민의 몸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거꾸로 전통 음료가 아니라고 해서 몸에 의리를 지키지 않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것은 민족주의에 따른 하나의 집단주의를 통해 자기들끼리의 의리만을 지키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미 의리 광고는 제한된 함의가 명확했던 셈이다.
글/김헌식 문화콘텐츠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