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속 ´꽃남´ 그리고 오바마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3. 21. 05:00

 

 

 

영화 ‘퀴즈쇼’(Quiz Show, 1994)는 시청률을 위해 조작극도 마다하지 않는 방송 제작 구조를 비판한다. 1950년대 후반, 미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트웬티 원’에 관한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더욱 설득력 있다. 만약, 상을 받을만한 영화라면 미디어의 대중적 영향력과 그 모순을 건드리면서 인간의 욕망이 빚어내는 결과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상을 받지는 않는다해도 영화 ‘퀴즈쇼’처럼 대중매체인 TV에 관한 의미있는 영화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는 퀴즈쇼를 아주 부정적으로 보지 않을뿐만 아니라 비판과 경계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꿈과 희망을 주는 매개체로 등장한다. 하루 아침에 돈과 명예의 성공을 갖게 되는 자말의 성공을 한낱 싸구려 TV쇼의 조작이라고 말하지는 않다. 그는 조작의 의혹을 제기하는 경찰에게 자신의 우연성에 담긴 진실성을 설파하면서 설득시킨다. 그 설득은 관객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우연성은 퀴즈쇼의 근본적인 결함을 말하는 것이지, 방송 제작 주체들의 위선성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자말이 거대한 상금이 걸린 TV 퀴즈쇼에 돈을 목적으로 출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인공 청년이 텔레비전에 출연하려는 이유는 자신의 사랑을 찾기 위해서다. 여기에 우연성이 진실성을 배가하는 설정이 개입된다.

 

그가 조작 의혹을 받으면서 놀라운 결과를 이루어낸 것은 공교롭게도 출제된 문제들에 그가 고통스럽게 겪어온 삶의 경험들이 담뿍 농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도의 어두운 현실이기도 했다. 퀴즈의 문제가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희망과 꿈이 반영된 것이다. 그냥 시사 상식 책이나 다이제스트판, 혹은 신문 지면의 피상적인 정보가 아닌 실제적 경험에서 나온 지식이야말로 퀴즈쇼에 대한 대중적 꿈일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는 미디어 자체의 모순이 아니라 인도인들이 불편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인도 사회의 부조리를 말하고자 한다. 사실감 있는 빈민가의 묘사는 초반부에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물론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인도의 정신과 영혼을 뒤로 하고 경제성장에 초점을 맞추었는지 ‘슬럼독(슬럼가의 개)’이라는 자칫 비하적인 단어로 인도인을 분노하게 했지만, 아카데미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인도의 경제 성장은 엄청난 빈부격차의 토대 위에 있고, 그것은 전지구적인 현상이다. 미국발 경제위기로 영화에서 자말이의 형이 중얼거린 것처럼 장밋빛은 아니다. 토머스 프리드만이 ‘세계는 평평하다.’에서 지적하듯 인도는 단지 인도로만 고립되어 있지 않다. 이미 퀴즈쇼라는 포맷은 인도와 서구-미국문화 산업의 연계증거다. 물론 이러한 세계화의 구조는 다루어지지 않고 인도는 고립되어 있다.

 

그럼에도 대중적 욕망을 부정하는 영화를 선호하는 지식인 위주의 영화와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영화는 주인공의 성공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지만, 마지막에 단지 이야기일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로써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판타지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사람들의 욕망을 아예 부정하지는 않는다. 인생역전을 바라는 대중적 욕망은 가난한 빈민가에서 텔레비전을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이를 나타낸다.

 

그것은 마치 개천에서 용난 격의 인물에 대한 미디어의 주목과 그것이 빚어내는 대중적 신드롬 현상과 같다. 고통으로 감내해온 세월이 그를 퀴즈왕으로 등극시킨다는 내용은 또 하나의 서민적 환타지다. 고통을 견디면 퀴즈쇼의 주인공처럼 언젠가는 인생 역전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모른다는 꿈이다.

 

드라마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남성의 시각이 강하다면, 드라마 ‘꽃보다 남자’는 여성의 시각이 강하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에는 남성 주인공을 통해 착하게 모진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진실과 성실성을 지킨다면, 금전적인 성공과 사랑을 이룬다는 욕망이 얽혀있다. ‘꽃보다 남자’에서 가난한 인도 청년과는 달리 이미 많은 것을 가진 구준표 등의 남자 주인공들이 주목하는 금잔디에는 여성 판타지가 개입되어 있다.

 

성실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소녀적 취향을 일관되게 보일 때 외모와 배경이 멋진 남성이 사랑할 것이라는 판타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꽃보다 남자’에는 서민을 항상 부르짖지만 서민의 현실과 고통은 관념적이다. 물론 두 콘텐츠가 딛고 있는 현실은 다를 수밖에 없어 비교의 대상이 될 수는 없겠다. 다만, 현실이 대중적 욕망과 거리가 멀 때 판타지는 더욱 각광을 받는 경향을 설명하기 위한 사례는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국내에서 흥행 상위를 달리고 있는 ‘벤자민 버튼은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시각효과상과 분장상 등을 수상한 것은 젊음에 대한 대중적 판타지와 그 한계성을 잘 표현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현실 도피적인 성향은 과거에 대한 향수와 환타지에 대한 몰입, 단기적인 쾌락 탐닉으로 나타난다.

 

진지하고 의미있는 내용이라고 해도 결과는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끝나기를 바란다. 현실이 더 엄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마바의 등장과 함께 아카데미의 선택은 적절한지 모른다. 그러나 오바마는 세계 서민들의 판타지일 수 있다. 현실과 판타지는 분리될 수 없으며, 양방향으로 작용한다.

 

최근 퀴즈쇼가 아닌 제이 레노의 투나잇쇼에 출연한 오바마. 그가 전지구적인 다문화로 대통령 흥행에 성공한 데에는 수많은 다인종의 고통과 눈물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대니 보일이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수상 흥행에 성공한 것은 빈부격차와 종교, 계층 갈등에서 오는 고통과 눈물을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바마가 세계 대통령이 되기에는 한계가 많듯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인도인-세계인을 대표하는 영화가 될 수 없는 한계가 많기 때문에 정작 인도인도 불만이 있는 것이겠다.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상징하는 것은 오바마의 국정운영의 현실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갈수록 왜 세계서민들이 갈수록 판타지에 몰입하는지 생각해보면, 그것은 세계 금융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대한 경고가 아닌지 여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