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헌식(중원대학교 특임교수, 문화정보콘텐츠학 박사, 평론가)
1971년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아침 이슬’은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많이 불렸다. 1987년 6.10 항쟁에선 전 세대가 같이 부른 곡이었다. 하지만 김민기 본인이 밝혔듯 이 노래를 만들 때는 시위 현장의 민중가요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1973년 정부가 건전가요로 선정하기까지 했다. 서정적이고 실존적인 자아의 고민과 갈등 속에서 나름의 결의를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물론 독재정권 시대의 사회적 아픔이 간접적으로 배어 있었다. 이를 간파했는지 1975년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는데 ‘붉게 물들고’나 ‘묘지’라는 단어를 문제 삼았다. 창작자보다 더 의미 부여를 한 셈이었다.
1981년 창작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아침 이슬과는 달리 직접적인 동기가 작동했다. 1980년 5.18 민주 항쟁의 희생자인 윤상원·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백기완의 시에 바탕을 두고 황석영이 작사, 김종률이 작곡했다.
당연하게도 공식적으로 발매될 수 없었고 금지곡으로 묶였다. 불법 테이프로 유통되다가 1991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음반에 수록되면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침이슬보다는 가사에 등장하는 단어나 표현이 직접적이고 주제 의식도 분명하다. ‘동지’ ‘깃발’ ‘맹세’ ‘새날’ 등은 물론 ‘산 자여 나를 따르라’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다만, 슬프고 가라앉는 느낌의 분위기는 아침이슬과 비슷한 점이 있었다. 시대적 비극과 엄숙함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아침이슬이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듯이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 폭넓게 확산이 되었다. 그만큼 세대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징성과 실체적인 의미 때문에 가치를 더욱 확고하게 정립했다.
1990년에는 민중가요가 폭발하는 시기였다. 노래패들의 대중적 활동이 증가했던 점이 그 상징이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은 물론 ‘꽃다지’ ‘조국과 청춘’ ‘노래 공장’ ‘노래 마을’을 꼽을 수 있다.
이런 노래패들의 노래는 좀 더 단어나 표현은 물론 메시지와 주제 의식이 분명했다. 또한 이 노래를 공유할 수 있는 대상을 명확하게 지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절차적 민주주의 달성은 이런 민중가요를 공유하는 공간이나 대상의 범위가 좁혀질 수밖에 없었다. 더는 확장이 없었고 거리 시위 현장에 한정되는 유통 소비 구조에 머물고 만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를 거치면서 간간이 거리 현장에서 ‘윤민석 류’의 노래들이 창작되고 소구 되기는 했다. 특히, 젊은 세대의 적극적인 참여와 공유는 확인할 수 없었고 오히려 멀어진 간격은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16년 이화여대의 단과 대학 신설 반대 현장에서 의외의 노래가 불리게 되었다. 일단 전문 노래패가 창작하거나 사회의식이 충만한 아티스트의 노래가 아니었다.
그렇게 비판을 많이 받았던 아이돌 당대의 아이돌, 그것도 대형기획사 소속의 걸그룹의 노래였다. 바로 2007년 발매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Into the new world)였다.
이 노래에서 핵심 주제 의식은 다음과 같은 가사에 담겨있다.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다시 만난 나의 세계/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눈앞에선 우리의 거친 길은/알 수 없는 미래와 벽/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변치 않을 사랑으로 지켜줘.”
이 노래의 특징은 직접적인 단어나 표현보다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삶의 고민과 갈등, 방황 속에서 희망이나 의지를 잃지 않고 나아가려는 결기를 담고 있는 점이다.
더구나 개인과 개인의 사랑을 언급하고 있기에 동반자적 연가를 연상할 수 있다. 워맨스나 상호 구원 서사의 대중문화 코드를 읽어낼 수 있지만, 시위 현장에서 불리기에도 무리가 없다.
오히려 거친 현장 분위기를 유화시키고 공감의 폭을 넓히면서 연대의 결을 더 촘촘하게 만들어준다. 말 그대로 물리력을 과시하는 물화의 시위가 아니라 문화 예술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공감시키는 문화 시위의 분위기를 한층 끌어 올린다.
사회 역사적 배경과 의식을 넘어 국민 개개인의 일상 삶이 중요하다는 점을 더 부각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2024년 탄핵 시위 현장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다양한 K팝 음악에 응원봉 문화가 강화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에스파의 위플래쉬의 “어디서나 거침없어 I'm the coldest 오직 나만이 이 판을 바꿀 changer”라는 가사를 통해 주체적인 태도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면이 강조된다.
남성 밴드 데이식스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에서는 위플래쉬에서 좀 더 나아간다. 가사 가운데에 이런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 걱정도 하지는 마, 나에게 다 맡겨 봐. 지금, 이 순간이 다시 넘겨볼 수 있는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자신이 혼자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이끌면서 같이 목적을 이루겠다고 말한다. 물론 가사만을 가지고 노래를 접할 수 없지만 일단 이런 기초적인 세계관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빠순이’라는 오명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마침내 K팝이 국가의 중차대한 시국에서 중요한 이바지를 한 점은 약자의 민주주의 정신과 동학을 생각하게 한다.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맥락’이다. 아침이슬이 왜 공감을 얻었는지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율적 공감과 소통, 연대가 제일 우선 원칙이다. 누가 만들었는지 어느 세대가 즐기는 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아가 어떤 노래나 장르를 강요할 수는 없다. 절대시하면 곤란하다.
과거 민주주의 공론장에서 불렀던,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Into the new world)는 2007년에 발매되었기 때문에 Z세대들에게는 낯설 수 있다.
지드래곤의 ’삐딱하게‘도 노래의 좋음과 달리 같은 맥락 안에 있다. 이렇게 언급된 노래들을 애써 외울 필요는 없다. 케이 팝 어느 노래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부르고 공유하면 된다.
K팝의 위기는 이를 간과한 대형기획사에서 비롯했다. 이런 우를 범하지 않는 민주 공론장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K팝에 쏠릴 필요는 없다. 중장년 누구든 부르는 노래가 시위 현장에 맞는다면 이를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