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자명고는 과연 사람 이름인가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3. 17. 14:18

-자명(自鳴)의 현대적 의미를 생각해본다.

드라마 ‘자명고’는 그동안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핑크 폭풍에 짓눌려 있던 드라마 담론에 활기를 주고 있다. ‘꽃보다 남자’는 광고뿐만 아니라 패션, 예능, 패러디, 시청률, 매체 기사등 에 이르기 까지 갖가지 독식현상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젊은 취향의 드라마가 선전을 하면, 소비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관련 주체들이 자발적으로 ‘꽃남’ 담론에 복종하는 경향도 생긴다. ‘꽃남’의 장기독식이 이어지니 매체는 색다른 꺼리를 기다리기 마련이다. 월·화요일에 더 이상 구준표와 F4가 식상하다는 말도 들린다. 색다른 ‘꺼리’로 참신하면 더욱 좋겠다. 일단 드라마 ‘자명고’의 참신성은 자명고에 있다.

드라마의 모티브는 자명고는 과연 존재했는가에 있다. 적이 오면 스스로 울리는 자명고는 수없는 세월동안 세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왔다. 드라마 ‘자명고’는 자명고가 따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람의 이름이었다는 역사적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담당 작가는 자명고가 사람 이름이었다는 단편적인 사실을 인지하고 그것을 드라마의 모티브로 삼았다고 말했다.

한편, 임동주의 ‘우리나라 삼국지’에 따르면 낙랑에서는 정보기관의 특정 사람이 북을 울린 것으로 보고 있다. 낙랑에는 중리부가 있었는데, 국가 기밀을 다루는 정보 부서로 군사권까지 장악하고 있는 막강한 권력 기관이었고, 책임자가 ‘처밀도’였다. 낙랑공주가 북을 찢게 되는 과정은 이렇게 설명한다. 처밀도가 북을 담당했고, 고구려 군대가 침입하는 것을 알고 북을 울리려 했지만, 낙랑공주가 북을 찢게 된다는 것이다. 자명고는 경보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자명고라는 북이 나오지 않고, 자명(自鳴)이라는 단어만 나온다. 즉 ‘고각이 스스로 울린다고 기록되어 있다.’(先是樂浪有鼓角若有敵兵則自鳴) 여기에서 고각(鼓角)은 반드시 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적인 경보 장치를 말한다. 따라서 스스로 울리는 군사 경보 시스템 같은 것이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도 자명고를 언급하지 않고, 고각이 스스로 울렸다고 언급한다. 자명고는 체계화가 잘된 경계경보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 된다.

어쨌든 북이라는 경계경보 시스템을 파괴하도록 만든 것은 호동 왕자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시스템을 파괴한 것을 일컬어 호동이 전파 선제권을 행사한 최초의 전략가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전파 선제권의 획들은 전파 교란과 능동적인 통신 마비로 자동경보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것을 말한다.

드라마 ‘자명고’는 자명고를 북이 아니라 낙랑공주의 이복언니 자명(정려원)으로 설정했다. 왕자실(이미숙 분)이 낳은 라희(박민영)는 사랑의 경쟁자로 그려진다. 중리부나 처밀도가 등장하지 않고, 자명고는 자명 공주가 매를 이용해 북을 울린다. 처밀도를 자명 공주로 대체했다. 체계적인 군사적 시스템으로 접근하지는 않았다. 처밀도를 자명 공주로 대체시키고, 경보시스템을 자명 공주와 매로 단순화시킨 감이 없지 않다. 적군에 대한 체계적인 군사 정보 시스템의 구축을 배제시킨 것이 아쉽기는 하다. 다만, 그동안 자명고에 대한 획일적인 해석을 생각할 때 환타지 상상력에 더 의미를 두어야 하는지 모른다.

드라마 ‘자명고’는 주술적 운명에 대한 인간의 극복의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자명(自鳴)은 스스로 울어 운명에서 자신을 구원하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상징한다. 북만 쳐다보고 있는 인간이란 사물에 종속적으로 수동적인 존재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인간 개인의 실존적 운명을 생각해 볼수 있다. 심지어 부모도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는 자명의 처지는 나라의 운명과 닮았다. 한사군이 한나라에 종속적인 나라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생존과 독립을 모색한 주체적인 나라임을 의미한다. 자명은 곧 낙랑의 자주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북이 아니라 사람에 ´자명´을 등장시킨 것이 역사논란을 일으키고는 있지만, 참신한 설정임에는 분명하다. 나아가 낙랑국을 한낱 한나라의 속국으로 그리지 않고, 조선의 후예로 그린 것도 이채롭고, 고구려 위주의 드라마 구도에서 탈피했다는 것도 의미가 있다.

다만, 최근 사극들이 식상한 로맨스와 남성성에 갇힌 여성성의 지나친 강조로 외면 받는 대열에 드라마 ‘자명고’가 동참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드라마 ‘자명고’에는 미워도 다시 한 번 같이 화려한 중년배 우들의 불꽃 튀는 연기가 뒷받침된다. 서사 구조 외에 연기자와 캐릭터의 관점에서 보면, 이미숙의 팜므파탈이나 문성근의 카리스마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앞으로 정려원에게 큰 짐이 실려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김헌식(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