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노인은 없다. 여기에서 '노인'으로 번역되는 '올드맨'(old man)이 반드시 노인일 필요는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단순히 노인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과연 상을 받을 만한 작품인지, 혹은 결말이 이게 뭐냐는 반응이 나오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아카데미 수상 덕에 국내 관객이 늘어 좀 더 극장에 간판이 걸리게 되었다. 하지만 큰 기대를 가지고 보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익히 알고 있는 스릴러에 변화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낯선 것은 대개 익숙하지 않아 쉽게 와 닿지 않고, 영화는 거리감을 유지하다가 사라지게 마련이다. 기대감을 갖게 하는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올드맨의 회한을 부각하면서 감독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무미건조한 장치에 불과하다.
명분도 정의도 없으니 통속적인 재미도 반감된다. 흥미를 자극하는 것이 있다면 쉬거가 가스통을 개조해 만든 새로운 무기다. 패 죽이고 싶은 살인마를 어떻게 통쾌하게 잡을 것인가가 흥밋거리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는 배반감으로 돌아오고 만다.
무언가 심각한 주제의식을 전달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데 도통 와 닿지 않는다. 그 주제의식이 옳다면 그렇게 절절한 문제인가. 할리우드에 관습적으로 등장했던 것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아카데미 수상작이 대개 흥행을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미국적 정서다. 한국적 정서가 많이 묻어나는 영화가 아무리 국내에서 상을 많이 받아도 해외에서 일반관객에게 호응을 받기는 쉽지 않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많은 한국 관객이 보고 있는 광경이 오히려 흥미로운 일이다. 영화의 내용이 '이게 뭐냐'고 하는 게 당연하다. 미국인들에게는 절실하게 와 닿아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감이 먼 내용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총기가 난무하고 그에 따른 허무한 죽음이 아무 이유 없이 펼쳐지는 사회 속에서 겪게 되는 삶의 일상이 우리사회와 비교할 만한 대상은 아니다. 영화 속에서는 자신만만하던 이들도 어이없이 우연하게 아무런 이유 없이 살해당한다. 단지 총기에 관련한 내용이라면 다른 작품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국경 수비대원은 베트남 참전 병사 경력을 말하자 의심을 풀고 르웰린(조쉬 브롤린)을 통과시킨다. 베트남은 미국인의 정체성이 되었다. 하지만 베트남 참전 용사인 그는 이미 용접공이 되었다. 곧 용접공도 하지 않고 실업자가 되고 베트남전에서 배운 전투경험으로 불법 사냥을 나설 뿐이다.
다른 참전 용사 안톤(하비에르 바르뎀)은 전문 킬러가 되어 있었다. 용사들은 결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그들은 과거 역전의 용사, 올드맨이었다. 그들을 위한 나라는 없었다.
결국 둘은 사이코 킬러 쉬거에게 목숨을 잃는다. 자기 스스로도 지키지 못하며 그를 보호해야할 국가도 마찬가지다. 또 하나의 올드맨, 25살 때부터 지역보안관을 했던 벨(토미 리 존스)은 공공 봉사자라는 점에서 베트남 용사들과 같다. 벨은 역전의 용사들을 전혀 보호하지 못한다. 그는 공권력을 의미한다. 정작 공권력도 힘이 없고 예전을 그리워한다. 국가가 올드맨이다.
벨은 우연찮은 사건을 맡으면서 무력감에 시달린다. 범인은 아무 이유 없이 무참하게 살해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알고 있던 경험과 지식은 무용지물이 된다. 정보력은 보안관보다 킬러가 뛰어나다. 더구나 자신이 보호하려던 이는 킬러가 아니라 노상강도에게 당한다. 정작 주인공이 어이 없이 당하는 것이다. '어이없음이 삶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이.
결국 끝까지 살아남는 것은 흉학 무도한 사이코 킬러다. 잔인하고 대담한 살인자지만,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그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자신이 아니라 동전이다. 자신조차 독자적인 결정을 하지 못하고 동전의 앞뒤에 맡긴다. 맞추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죽인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 행동하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따라 자신을 내맡기고 뱉은 말을 지키려 행동한다. 어떤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연성에 자신을 맡기도 그것에 충실한 그 킬러가 살아남고 보안관은 그를 잡지 못한다. 아무런 이유가 없으니 범인을 잡을 수도 없고 그것에 대한 무력감은 물론 변한 세상에 대한 회환이 든다. 생각나는 것은 올드맨들이고 그들을 둘러싼 추억이다.
다만, 주인공이나 그를 쫓는 킬러가 한 가지 확증시키는 것은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돈이라는 사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선의를 내세우지만 셔츠 값을 두고 옥신각신하는 소년 둘이 암시하는 점이다. 살인범은 부상 입은 몸으로 절뚝거리며 서서히 빠져나간다. 누구는 죽어야 하고 누구는 살아야 하는 경계가 사라진다.
잔인무도한 새로운 살인 도구는 테크놀로지를 상징한다. 살인도구의 발달은 기술의 발전과 상응한다. 무작위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쉬거는 사회의식의 변화를 상징한다. 이는 정신의 타락이다. 여기에 자신감에 차 있던 사회의 주역이었으며, 역전의 주인공이었던 인물들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기도 한다.
이는 곧 도태와 배제를 의미한다. 사회 전체의 도덕과 윤리만이 아니라 사람의 타락이다. 항상 새로운 사회는 타락의 극단을 달린다. 현재가 언제나 타락할수록 올드 맨들은 변화를 거슬러 과거를 정당화 한다. 하지만 살인자 쉬거의 처지에서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다. 그래서 살인자를 살려두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삶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언제나 현재는 과거보다 타락한다. 그럼에도 항상 미래의 사람들은 타락을 말하고 언제나 타락할 거리는 남아있다. 동전을 던져 운명을 결정하는 쉬거를 조종하는 것은 동전이다. 그러나 동전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동전에는 역설적인 의미가 있다. 언제는 절대적인 운명이 있었나, 언제나 타락이 있었니 타락은 없으며, 변화는 급격한 것 같지만 사람 사는 세상 이치는 같다.
절대론적 운명론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신의 나라 중세에서는 충격파를 주는 영화겠다. 하지만 그러한 신념을 가진 이들이 지금 얼마나 남아있을까. 하지만 절대론적 운명보다는 상대론적 운명론을 믿는 많은 사람들은 영화의 주인공 벨처럼 무기력하지 않다.
그럼에도 열심히 삶을 일구어 간다. 쉬거처럼 마치 자신이 운명의 관장자인 것처럼 남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는다. 또한 과거의 도그마에만 안주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과거의 현재는 아름다웠다고 반추하는 올드맨들을 현재형으로 낳으며 나름 끊임없이 시간은 흘러가고 공간은 탈바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