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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안방 삼는 길거리 응원객에게 시험은 장벽이 되지 않는다. 수능 시험을 4개월여 앞둔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 김모(18)군은 대학생 형과 함께 서울광장으로 응원을 나서기로 했다. 일산에 사는 권모(48)씨도 고3 수험생 뒷바라지의 본분을 잊은채 수험생 딸을 이끌고 거리로 나선다. 이들은 “과감히 응원해 동참해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게 더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응원에 대한 기대에 한창이다.
최모(59)씨는 고깃집이나 한정식집이 고작이었던 고등학교 동창생 모임을 거리 응원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최씨는 “특히 집에서 손주를 봐주는 여자 동창들이 ‘토요일 저녁이니 손주에게서 벗어나 홀가분하게 주말을 보내고 싶다’며 큰 기대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비 소식은 한국을 상징하는 붉은 색의 비옷을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게 했다.
서울 연희동에 사는 조모(68)씨 가족은 3대 10명의 식구가 광화문에 총출동한다. 길을 잃고 헤어지면 어디서 만나자는 ‘007귀가작전 동선’까지 마련했다. 광화문 광장 인근 호텔은 이미 닷새전에 매진됐고 스코어 맞추기 베팅금은 올랐다. 회사원 류모(36)씨는 “예선리그에선 1만원이었는데, 16강이라 2만원으로 올렸다”면서 “8강전 4강전으로 곱절로 올려 ‘대박’의 꿈을 키워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전국 50개 교도소에서도 밤새 응원의 함성이 울려퍼지게 된다. 교도소나 구치소는 규정상 자정까지만 TV시청을 하도록 하고 있지만, 26일에는 밤 11시에 열리는 16강전을 생방송으로 볼 수 있도록 TV시청 시간을 예외적으로 연장키로 했다.
응원에 나선 시민들을 지원하는 것은 ‘시민의 발’ 역시 마찬가지다. 서울 지하철은 대규모 응원전이 열리는 시청, 광화문 등 주요 역을 기준으로 새벽 2시까지 2시간 연장 운행한다. 버스는 서울광장을 비롯한 주요 응원장소를 경유하는 총 111개 노선 2966대의 운행시간을 행사장 통과기준 새벽 3시까지 연장 운행한다.
대한민국 전체가 ‘월드컵 열병’으로 들썩이는 데에는 함께하는 놀이 문화의 영향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황상민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한국인은 혼자 놀지 못하고 같이 즐기는 민족적 습성이 있다”며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편안함을 찾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화평론가 강태규씨도 “한국은 다른 나라보다 전통적으로 ‘흥의 문화’에 잘 스며드는 민족”이라며 “광장문화도 사람과 사람 간의 마음의 일치와 동질성이 발전해 축제가 되고, 흥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전했다. 스포츠가 성과와 목적에 얽매였던 과거의 태도에서 벗어나 국민들에게 즐길 거리를 주는 것으로 진화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문화평론가 김헌식씨는 “기성세대는 이겨야 한다는 관점에서 접근했다면 젊은 세대는 모여서 맛있는 것도 보고 경기라는 추억을 만드는 축제로 본다”고 밝혔다. “파편화된 젊은 세대들이 ‘재미’라는 개인적 요소를 고집하면서도 공동체 문화와 소통하는 접점이 월드컵 응원”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답답한 사회 현실이 아무런 해결책을 주지 않다보니 시원하게 한 방 터뜨리는 월드컵에서 해방구를 찾는다는 분석도 나왔다. 현택수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우울한 소식만 전하는 사회 현안보다 이벤트 자체를 즐기기 위한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진단했다. 길거리 응원에 적극 동참한다는 박모(31)씨도 “취업이 안돼 받는 스트레스를 풀어버리고 싶은 것일 뿐”이라고 전했다.
현실을 잊기 위해서건 그저 흥이 나서건, 오는 26일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길거리 집결소에서 ‘토요일 밤의 열기’를 뿜어낸다. 태극전사들이 후회없는 한 판 승부를 벌일 때, 대한민국 민초들은 미련없는 한 나절의 놀이판으로 화답할 예정이다.
도현정ㆍ이태형 기자/kate01@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