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논평

광장과 어울리는 ‘쌩’리얼버라이어티 시대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1. 2. 13. 19:26

광장과 어울리는 ‘쌩’리얼버라이어티 시대

[한겨레21] 납량 트렌드 변천사 

▣ 김헌식 문화평론가 

여름철 납량 특집의 뿌리는 옛적 할머니의 입이었다. 여름밤 모깃불 옆에서 들려주는 할머니의 귀신 이야기는 오금이 저려 뒷간조차 못가게 했다. 하지만 이런 구전 공포물은 곧 60~70년대 신문과 잡지의 납량 특집면에 밀리기 시작했다. 다양한 내러티브와 캐릭터를 가진 공포 이야기가 되풀이되는 할머니의 입을 대신했다. 그것들은 실화임을 강조하면서 귀 아닌 눈을 사로잡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보는 이들의 상상력에 의존하는 것들이었다. 기껏 삽화나 연출 사진이 공포를 한껏 자극하는 정도였다.

이후 문자와 사진에 머물던 공포물은 <월하의 공동묘지>(1967) 같은 한국형 원혼 영화를 통해 ‘영상기호’란 말로 갈아탄다. 한동안 하얀 소복 귀신들의 향연이 한 세대를 풍미했다. 그러나 공포영화는 많은 사람이 즐겨보기에는 공간적 접근성의 한계가 있었다. 이어 텔레비전 보급으로 안방극장에도 소복 귀신들이 소름께나 돋게 했다. 대표적 명작이 여러 번 리메이크 된 <전설의 고향>(1977)이다. 이 드라마로 한풀이라는 한국적 공포 스토리가 사회·문화적으로 각인된다. 다종다양했던 귀신 생김새는 허연 소복 입은 여성으로 고착된다. 

하지만 매번 되풀이되는 캐릭터는 대중의 흥미를 끌기에 식상해졌다. 80년대 이후 세계화 담론과 더불어 홍콩판 ‘할매 귀신’은 물론 ‘강시’가 상륙하고, 할리우드표 괴물과 살인마, 좀비 등이 납량물을 채우기 시작한다. 한국적 공포물이 없고, 귀신도 수입하느냐는 애국적인 목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공포물에 국적을 묻지 않았다. 공포 자체가 중요했지, 공포 캐릭터에는 집중하지도 않았다. 

90년대 말 이후 납량물은 제작진의 머리로만 만든 드라마·영화 속 허공의 공포에서 일상으로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일반인의 괴기체험담을 재연하거나 스타 공포 체험을 담은 TV 납량물이 쏟아졌다. 영화는 일상 속 ‘슬래시 시네마’로 대체됐다. 인간의 몸을 얼마나 잔혹하고 다채롭게 파괴하는지가 공포영화의 요건이 되었다. 그러나 대중성은 떨어졌다. TV에서는 슬래시 장면들이 걸러지면서 대중 납량물로는 결핍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영화에서 아무리 잔혹하고 기기묘묘한 살인마와 플롯이 나와도 사람들은 ‘쫄지’ 않는다. 올해는 공포영화도 맥을 못 춘다. 대신 관객은 무대로 향한다. 최근 ‘공포연극’이 각광 받고 있다. 이제 미디어 매개물이 아니라 공포 상황으로 관객이 뛰어든다. 할머니가 들려주시듯 생생함 느껴지는 것을 원한다. 많은 공포 체험 동호회도 이를 증명한다. ‘쌩’ 리얼버라이어티 납량물이 오락 프로그램 단골이다. ‘광장의 육체접촉 시대’에는 공포도 몸과 피부로 직접 느껴야 성립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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