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중가요사

악극단 자료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3. 5. 6. 16:56

드라마 양념 지나치면 ‘생뚱’
 
서울신문  2008.02.18 (월) 오전 2:36 
드라마 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문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과거 유랑극단이나 악극단 등 전통적인 연희에서 흔히 사용되던 방식으로, 극적 긴장감을 이완시키는 일종의 쇼나 이벤트라고 보면 된다. ”고 설명했다....

네이버에서 보기  관련기사 보기  이 언론사 내 검색‘방송국 전속가수’ 를 아십니까?

[한겨레] ⑤ ‘라디오연속극’ 주제가. 

히트곡이 되다
 

이쯤 해서 ‘해방 60년’을 맞아 대중음악의 굵직한 사건을 정리하겠다는 이 기획의 의도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중간은 생략하고, 60년 기간의 시작과 끝을 비교하면서 격세지감을 느껴 보자. 그러면 구호물자에 연명하던 나라에서 좌우지간 순원조국으로 바뀌고, 인구가 바글바글하던 나라에서 ‘출산율 세계 최저 수준’의 나라로 바뀐 모습이 대조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대중가요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해서 비탄과 탄식을 주조로 하던 ‘유행가’가 삶의 기쁨과 행복을 찬미하는 ‘K-pop’으로 바뀐 모습이 선명하다. 물론 지배적 형상이 그럴 뿐, 자세히 속을 들여다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겠지만 말이다. 

대중음악의 60년 사이의 변화에서 또하나의 대조적 이미지는 ‘방송’과의 관련이다. 현재의 대중음악의 지배적 형식이 ‘방송 출연’과 뗄레야 뗄 수 없다는 것은 새삼 강조하는 게 면구스러울 정도다. 다행이든, 불행이든, 언제부턴가 대중음악을 경험하는 지배적 방법은 ‘TV를 시청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60년 전쯤에는 어땠을까. 가요평론가 고(故) 황문평의 증언을 들어 보자. “서울중앙방송국이 호출부호도 새롭게 HLKA로 되면서 음악 프로그램 포맷도 현대화되어갔다. 방송국에 전속경음악단을 두고 무대나 레코드에만 의존하던 종래의 가요 보급이 전파로 실리게 되었다”. 하나 더. “각 가정에 신속한 보도와 더불어 음악과 극 등, 교양과 오락을 더해서 즐거운 방송을 보내고 있는 H.L.K.A 서울 방송”(<대한뉴스>, 제 93호, 1956.10.)이라는 공보영화의 멘트도 함께 인용해 두자. HLKA나 서울방송이 현재의 한국방송과 연관된 것이라는 점, 그리고 당시에는 방송국이 한국방송밖에 없었다는 점을 짚어 두자. 

방송국 전속경음악단은 그리 생소한 명칭은 아니다. 그런데 ‘방송국 전속가수’는 이제 아주 생소해져 버렸다. 당시는 마치 방송국 직원 모집하듯이 시험을 거쳐 가수를 모집했다고 하니 말이다. 이 제도는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송민도, 금사향, 원방현, 고대원 등이 초기의 방송국 전속가수로 이름을 올린 인물들로 기록되고 있다. 전쟁과 분단을 거친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안다성, 권혜경 등이 다시 이름을 올리고, 그 뒤로는 인기가수의 경력을 이어간 사람들이다. 그 가운데 송민도, 안다성, 권혜경의 이름으로 이들의 노래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악극단이나 댄스홀같은 ‘일반무대’에 올라가는 ‘딴따라’와 달리, 격조와 품위가 있는 ‘방송무대’에 어울리는 인물들이다(물론 나는 ‘딴따라’를 멸시하는 사람들을 멸시한다). 

한국방송밖에 없던 시절 방송가요를 상징하는 곡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1956년에 발표된 ‘청실홍실’일 것이다. 송민도와 안다성이 듀엣으로 노래하고, ‘시온성(詩溫城) 혼성합창단’이 뒤를 거든 이 곡은 그 뒤로 오랫동안 ‘결혼식 축가’로 애송된 곡이다. 이 곡의 기원을 추적하면 역시 지금은 거의 멸종된 문화형식이 발견된다. 이른바 라디오 드라마, 당시 용어로 ‘연속방송극’이다. ‘드라마를 왜 텔레비전에서 하지 않고, 라디오에서 했을까’라고 물어보는 독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젊은 축에 속할 것 같다. 이유는 생략. 한편 ‘청실홍실’을 정윤희, 한진희 주연의 텔레비전드라마로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직은 노년에 접어든 사람이 아닐 것이다. 

각설하고 드라마 주제가인 ‘청실 홍실’은 라디오 전파를 통해 히트하는 대중가요의 전범이 되었다. ‘3박자의 리듬과 7음계의 멜로디’는 ‘2박자 리듬과 5음계 멜로디’를 벗어나도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고, 드라마 주제가이든 아니든 ‘방송전파를 타는 고품격 가요는 이래야 한다’는 하나의 전범을 만들어 냈다. 당시 발표된 ‘3박자 7음계’의 곡들 가운데 지금도 애창되고 있는 두 곡을 더 나열하면 기억이 더 선명해질 것이다. ‘산장의 여인’, ‘나 하나의 사랑’ 등등. 

‘청실홍실’의 작사가 조남사는 유호, 한운사와 더불어 방송 드라마 초기의 작가로서 이름을 날린 사람이고, 작곡가 손석우는 당시 한국방송의 대중가요 방송에서 지휘봉을 잡고 있었다. KPK 악극단의 기타 연주자였던 그는 피난 시절을 전후하여 ‘청춘고백’(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 ‘꿈 속의 사랑’(중국 곡, 현인 노래) 등에서 사랑의 복잡한 심리를 묘사한 가사를 쓰면서, 가요 작가의 경력을 이미 시작한 상태였다. 패티 페이지의 ‘눈물의 월츠’의 한국어 작사도 그의 솜씨였다. 송민도를 ‘한국의 패티 페이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편 역시 송민도가 노래한 ‘나 하나의 사랑’은 ‘청실홍실’ 이전인 1955년께 발표된 곡인데 이때는 당시로서 이례적으로 작사와 작곡을 모두 맡았다. 당시의 방송은 아직 걸음마 단계였지만, 방송을 새로운 무대로 했던 손석우의 활동은 이후 방송이 대중음악에 미칠 거대한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신현준/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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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 ‘뽕짝’ 밖엔 난 몰~라

방송인이 진행하는 ‘이호섭의 노래대학’ 트로트 동호인들이 지난 16일 부산 해운대에서 공연을 갖고 있다.
방송인이 진행하는 ‘이호섭의 노래대학’ 트로트 동호인들이 지난 16일 부산 해운대에서 공연을 갖고 있다.
[서울신문]‘뽕짜작 뽕짝, 뽕짜작 뽕짝….’

최근 인기를 모으고 있는 트로트는 ‘뽕짝’이라는 별칭 그대로 어떤 모임에 가더라도 신바람을 일으키는 데 한몫을 한다. 나이 든 어른들의 노래라는 인식도 최근 ‘어머나’의 왕대박을 계기로 무색해졌다. 연령을 떠나 바람을 타고 있다.

트로트 가수들은 왜 립싱크를 하지 않을까.

트로트 동호인들이 내놓는 답은 이렇다. 보통 립싱크 가수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춤추기 위해서다. 하지만 트로트는 특성상 춤이 격렬하지 않다. 그래서 립싱크를 할 명분이 없다.

트로트만 찾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 바로 ‘트로트 사랑방’이다.

전국에서 통틀어 회원 709명을 거느린 사랑방에는 40대를 주축으로 30∼50대 연령층이 참여하고 있다.

회원 금잔화(47·여)씨는 “행복한 중년을 가꾸기 위해 가입했다.”면서 “주부 등을 대상으로 가요를 가르치는 교실이 엄청 늘어났지만,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몰리다 보니 평소 배우고 싶은 노래를 배우기는 이런 모임이 낫다.”고 말했다.

철저하게 정회원 중심으로 조직된 사랑방에는 가요를 신청하면 세이클럽(www.sayclub.com) 사이트를 통해 들려준다.

금잔화씨는 23일 백수건달의 ‘잊지 말고 와주오’라는 노래가 마음에 와닿아 듣고 싶다며 곡을 아는 회원이 있으면 띄워달라고 글을 올렸다.

‘까마귀’라는 별명을 가진 한 회원(51)은 나훈아의 ‘모르고’를 신청했다.‘아무것도 모르고 사랑했어요 당신을/사랑이 이렇게 아픈 줄도 모르고/당신을 사랑했어요/사랑은 날마다 행복한 줄 알았고/사랑은 꿀처럼 달콤한 줄 알았지/나는 몰랐네 나는 몰랐네/아픈 줄 나는 몰랐네’

트로트는 왜색(倭色)?

트로트를 둘러싸고 일어난 논란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트로트 동호인들의 대답은 노(No)이다. 각종 근거를 댄다.

우선 거꾸로 말해 우리나라에서는 트로트를 일본풍이라고 떠들기도 하지만 일본에서는 엔카(演歌)야말로 뿌리를 한국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본다며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는 김강섭(72) 관현악단 지휘자의 주장을 인용한 것이다. 미 8군에서 악단 생활을 하다 1961년부터 95년까지 KBS의 전속 악단장을 맡았던 김씨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일본을 싫어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왜색가요라며 금지곡을 남발했던 게 트로트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낳았다고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논문도 있다. 논문 뼈대는 다음과 같다.

원래 트로트란 1910년대 미국에서 생겨 댄스 음악의 대명사로까지 발전했다. 이것을 아시아에 도입한 사람 가운데 한명이 바로 엔카의 대부(代父)로 불리는 고가 마사오(古賀政男)였는데, 그가 바로 미국의 ‘폭스 트로트’를 동양적 감성을 실은 다른 방식의 작곡을 통해 ‘폭스’라는 꼬리를 떼고 트로트를 창시했다는 설명이다.

일제시대 당시 한국에서 자라난 그는 또 판소리, 민요 등을 연구했는데 이 시기가 자신의 음악세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이다.

마포의 ‘뽕짝 잔치’에 오세요

오는 28일 지하철 6호선 대흥역 쪽에 있는 마포문화체육회관에서는 우리나라 전통음악인 트로트를 살리기 위한 전국 가요제가 열린다.

이날 오후 2시 막을 올리는 제1회 대한민국 전통가요제는 한국전통가요운동본부(회장 김도현)가 주최한다.

예산만 해도 실내에서 열리는 가요제치고는 제법 많은 5000여만원이 들어간다. 지난 2월부터 4월 말까지 참가자를 접수한 결과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부터 60대 등 다양한 연령층 29명이 무대에 오르게 됐다.

전통가요운동본부는 대상, 금·은·동상, 장려상, 인기상 등 6명을 가려 한국연예협회 가수로 등록시키고 활동도 지원할 계획이다. 전통가요 홍보대사로도 임명한다. 흔히 뽕짝으로 깎아내리지만 생활 주변에서 트로트 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전통가요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는 근거는 이렇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최근 경제난 등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애환을 달래주고 기쁨도 함께한 장르라는 주장이다.

김 회장은 “식민지 시대에 유랑 악극단들이 전국을 돌며 민족의 울분을 어루만지고, 긍정적인 사고를 심어주며 활력소가 됐던 게 바로 전통가요였다.”면서 “서양문화가 급속도로 들어와 전통을 깨뜨린 데다, 최근 들어서는 국적없는 노래와 춤으로 음악세계가 혼탁해진 현실을 타개하려는 뜻”이라고 가요제 창설 배경을 설명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저작권자 (c) 서울신문사]

스타 혼맥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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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별처럼 스타는 이제 연예계라는 하늘에 광휘를 발산하고 있다. 연예계 스타는 문화 권력의 정점으로, 스타 마케팅 기제로 그리고 대중의 의식과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는 모델로 일거수 일투족이 대중의 관심권 안에 포착된다. 

특히 스타들의 사랑과 결혼은 일반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대중의 결혼관에 많은 영향을 미치며 하나의 이상적 모델 역할을 한다. 스타들의 결혼관 변화로 결혼 대상자도 크게 변했다. 

대중문화의 초창기였던 1900~1950년대에는 전통적인 유교적 인식이 엄존한데다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위상과 인식이 낮고 기생출신 연기자들이 많아 악극단이나 영화에서 만난 동료 연예인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기에는 결혼한 스타들의 경우 행복한 결혼생활보다 불행한 가정 생활로 파경이 많았다.

스타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은 여전히 부정적이었지만 대중에 대한 스타의 환호가 가시화되고 스타 우상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1960~1970년대에는 스타들의 결혼 상대는 일반인에서 재벌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해졌다. 특히 당시 부와 외국에 대한 선망을 가진 일부 연예인들은 재미동포와 재일동포를 비롯한 외국 동포를 결혼 배우자로 선택하는 경우가 두드러졌으며 재벌과의 결혼을 하는 스타도 생겨났다. 그리고 신성일과 엄앵란 커플처럼 스타와 스타의 만남은 이 시기에도 온갖 스캔들 속에서 이뤄지기도 했다. 

스타의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고 대중문화 시장이 급팽창했으며 대학의 방송연예, 영화학과의 신설 등으로 대학생이나 대학 졸업자의 연예계 진출이 두드러진 1980년대에는 연예인의 특성을 이해하고 일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연예계와 관련된 방송사 연출자, 영화감독 등과 연예인의 결혼이 부쩍 늘었으며 동료 연예인들과의 결혼이 급증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방송매체를 비롯한 대중매체가 급증하고 연예산업이 산업적 기틀을 갖추어 스타가 엄청난 이윤을 창출한데다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위상과 인식이 크게 개선된 1990년대 이후는 연예 기획사가 스타 시스템의 핵심의 역할을 하게 됐다. 이에 따라 연예 기획사와 연예인의 결혼이 흔치 않은 현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대중이 스타나 연예인에 대한 결혼을 바라보는 시각도 크게 변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스타의 결혼은 인기의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1960~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가수 남진과 나훈아는 결혼과 함께 대중의 시선에서 사라져야했고 여자 연기자들은 대부분 결혼과 함께 은막이나 브라운관에서 사라져 가정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대중들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스타나 연예인 정보를 접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부터는 대중들의 연예인에 대한 결혼의 인식이 매우 현실적이고 긍정적으로 변해 결혼은 더 이상 연예인의 인기의 무덤이 아니었다. 결혼으로 인해 인기가 더 오르고 활동도 활발해지는 스타를 쉽게 만나볼 수 있던 시기도 1980년대 이후다. 

스타들의 결혼은 수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보기 때문에 일반인과 달리 힘든 결혼생활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또한 연예인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일반인에 비해 파경을 맞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파경은 결혼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대중매체에 공개돼 대중의 지탄과 안타까움을 초래하기도 한다.

(배국남 전문기자 knbae@mydaily.co.kr)

이윤택과 연희단거리패 그리고'유랑극단' 추억 여행 

연희단거리패는 노래와 춤 운율적 대사가 어우러지는 악극 공연으

로 올해를 마무리한다.

7~24일 부산 광복동 가마골 소극장 무대에

올려지는 송년공연 '유랑극단'.

공연은 이윤택 국립극단 예술감독의 2년만의 가마골 연출작이자 

정동숙 하용부 등 연희단거리패 주연진들의 출연으로 눈길을 우선

끈다.

그리고 60년대까지 대중적 사랑을 받았으나 공연미학의 결

여와 TV에 밀려 거의 사라진 악극 장르를 우리 정서에 맞는 총체

극으로 재창조하려는 노력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97년 초연된 극은 이병원의 단막극 '사당네'를 원전으로 백조가극

단 아역배우 출신인 원희옥 선생의 악극단 시절 회고와 화술,노래

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악극이다.

공연은 민요에서 가요까지 우리

의 노래와 화술과 동작 연기를 다양하게 펼쳐내며 관객들을 애잔

한 추억의 세계로 이끈다.

배경은 산업화가 시작되고,TV시대가 막을 연 1960년대. 시골장터

를 전전하던 더벅머리와 모갑이는 폐가에서 약장수 양광대를 만나

그들의 인생역정을 사설과 노래로 풀어낸다.

더벅머리는 평양기생의 딸. 그녀의 어미는 평양기방의 예인이었으

나 식민지시대 노래와 연기를 하는 배우로,해방 후에는 악극단 가

수 겸 배우로 살아가면서 퇴락해 아편쟁이로 객사한다.

더벅머리

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인생을 꿈꾸지만 어미의 고수였던 모갑이

는 그녀에게 전통예인의 길을 강요한다.

사랑하는 여인을 따라 연예계 식객 노릇을 한 모갑이는 더벅머리

의 어미가 죽자 그 어린 딸을 데리고 방랑과 은둔의 세월을 산다.

스스로 자신의 눈을 파고 말문을 닫은 그는 조선 광대의 지조와 

예능에만 집착한다.

이 두사람 사이에 끼어든 떠돌이 약장수는 TV

의 등장으로 일터를 잃은 악극단 연주자. 약장수 광대로 전락했지

만 그는 돈만 있으면 레코드 취입을 하는 등 새로운 세계에 적응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더벅머리와 눈이 맞아 폐가에서 도주하려던

그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데.

세 사람의 심리가 정교하게 드러나는 실내극 구조의 극은 조선광

대와 양광대의 충돌,전통과 산업화의 대립을 통해 우리가 잃어가

는 것이 무엇인지를 암시하고,'수심가''정선아라리''평양가''애수

의 소야곡''남포동 부루스' 등 민요와 식민지에서 60년대까지의 

가요는 잊혀져가는 우리 가락과 정서를 일깨운다.

거리패의 간판 정동숙과 배우 강나루가 더벅머리역에,밀양백중놀

이 예능보유자이자 최연소 인간문화재인 하용부 연극촌 촌장과 배

우 김광룡이 모갑이역에,배우 곽병규와 김재우가 떠돌이 약장수역

에 각각 더블캐스팅됐다.

평일 오후 7시 30분,토 오후 4시30분,7

시30분,일 오후 3,6시. 월요일은 휴관. www.kamagol.co.kr,051-24

5-0042. 임깁실기자 mar@busanilbo.com

<국화>원로 코미디언 심철호씨

70, 80년대엔 TV브라운관을 통해 걸쭉한 입담으로 서민들에게 웃

음을, 90년대엔 사회봉사 활동으로 이웃의 아픔을 어루만졌던 희

극인 심철호씨가 지병이 악화돼 24일 오후 4시에 별세했다. 63세

.

전북 김제출신인 고인은 62년 서울악극단 단원으로 극장무대에서

활동하다 69년 동양방송의 ‘웃음의 파노라마’로 방송에 데뷔 

했다. ‘주걱턱’이란 별명에 걸맞게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특유 

의 입담으로 ‘웃으면 복이와요’‘부부만세’‘유쾌한 청백전’

등의 프로그램에서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이기동 등 인기 코 

미디언들과 함께 70, 80년대 코미디 전성시대를 장식했다.

안방극장을 누비던 고인이 ‘사랑의 전화’를 개설한 것은 81년.

서울 마포구 신공덕동에 7평짜리 사무실과 전화 2대로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상담활동을 시작했다. 고인은 90년대 들어서 연예

활동을 접고 결식노인, 소년소녀가장, 실직자 등을 위한 봉사활 

동에 전념했다. 97년 외환위기 직후엔 ‘노숙자 쉼터’를 설치하

고 98년부터는 대형버스 1대와 사회복지사, 간호사로 구성된 ‘이

동복지관’을 운영하며 달동네 등을 찾았다.

유족은 부인 김도씨와 재학(사랑의 전화 복지재단 이동복지관장)

, 정은(사진작가)씨 등 1남1녀. 빈소 삼성서울병원. 발인 26일 

오전 9시. 장지 경기도 광주 삼성개발공원묘원. 02-3410-6914.

한평수기자 pshan@

백조처럼 살고자 했던 '눈물의 여왕'

[오마이뉴스 한상언 기자]
▲ <망루의 결사대>에 출연한 전옥
 1927년 <아리랑>의 여주인공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신일선이 전남 화순의 부자 양승환과 조선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독립해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첫 작품 <잘 있거라>(1927년)를 준비하고 있던 나운규에게는 자신의 영화에서 여주인공을 도맡았던 신일선의 공백이 급작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운규는 <들쥐>(1927년)에서 단역으로 출연했던 전옥을 신일선 대신 출연시키기로 한다.

사슴 같은 눈에 콧날이 오뚝하여 이목구비가 뚜렷한 전옥은 당시 16세로, 나이는 어렸지만 토월회 무대에 섰고 <낙원을 찾는 무리들>(황운 연출·1927)에서 주연을 맡은 경험도 있었다. <잘 있거라>에 출연한 그는 돈에 팔려 부호에 시집가는 황순녀 역을 능숙하게 잘 해냈다.

전옥은 곧 신일선을 대신해 나운규 프로덕션의 대표 여배우가 되었고 연이어 <옥녀>(1928), <사랑을 찾아서>(1928)에서 주연을 맡으며 스타의 길을 걷는다.

전옥은 1911년 함흥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전덕례다. 영생중학교 2학년 때 가세가 기울자 집에서 그녀를 시집보내려 했다. 배우가 되고 싶어 극단을 기웃거렸던 그는 부모를 설득해 오빠 전두옥과 함께 서울로 내려갔다.

전옥은 복혜숙과 석금성이 스타로 있던 토월회 문을 두드려 그곳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배우의 꿈을 키웠다.

기회가 찾아왔다. 1925년 토월회 창립 2주년 기념공연 <여직공 정옥>과 <농중조>가 광무대에서 상연되던 어느 날 <여직공 정옥>에서 주인공으로 연기를 하던 석금성이 관객이 던진 사과에 배를 맞았다. 임신 중이던 석금성은 졸도했고 그녀를 대신하여 전옥이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전옥은 다음 공연인 <일요일>에서도 석금성을 대신해 역을 맡았다. 이 공연에서 흥분한 전옥이 "구주대전이 군국주의를 타파한 지가 오래되었다"는 삭제된 대사를 해버리는 바람에 공연은 중단되고 그는 경찰서에 끌려가 밤새 시달렸다.

전옥은 토월회 무대에서 착실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극단이 갑자기 해산하게 되었다. 1926년 2월 박승희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주요 단원들이 극단을 탈퇴하면서 공연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녀는 영화 일을 하고 있는 오빠를 따라 무대를 떠나 영화로 자리를 옮겼다.

전옥은 앞서 말한 대로 나운규의 작품에 연이어 주연을 맡으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나운규가 자신의 애인인 기생 유신방을 <사나이>(1928), <벙어리 삼룡>(1929), <아리랑 후편>(1930)에 주인공으로 기용하면서 전옥은 영화를 떠나 다시 무대로 옮겼다.

1928년 17세의 전옥은 오빠의 전문학교 시절 친구이자 가수, 배우로 활동하고 있던 강홍식과 결혼한다. 그녀는 남편 강홍식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에서 노래를 생방송했고 방송극에도 출연했다.

1929년에는 다시 문을 연 토월회의 무대에 섰으나 이내 토월회가 문을 닫자 지두한이 세운 조선연극사의 무대에 섰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게 만드는 독백으로 유명했으며 비극의 여인 역을 잘 해 '비극의 여왕',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30년대 전옥은 남편 강홍식과 함께 많은 음반을 발표했다. 이때 발매된 그녀의 음반은 남편 강홍식과 함께 발표한 여러 노래들과 <항구의 일야>로 대표되는, 자신이 출연한 인정비극을 레코드에 담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중 1934년 남편 강홍식이 발표한 <처녀총각>은 10만장이라는 엄청난 양이 팔렸다. 큰 돈을 번 강홍식은 한 일본여자와 바람이 나서 가정을 떠났고 해방 후 월북했다.

그녀는 라미라 가극단에서 나운규의 <아리랑>을 각색한 <아리랑>(1943)을 비롯해 많은 가극을 공연했다. 가극에 출연하면서 그녀는 다시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 일제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 영화계는 친일영화만 만들 수밖에 없었다. <복지만리>(1941), <망루의 결사대>(1943), <병정님>(1944)이 당시 그녀가 출연한 친일영화다.

▲ 나운규가 만든 <옥녀>의 스틸사진
해방 후 전옥은 전국순회공연을 하던 남해위문대를 백조가극단으로 개칭하여 악극을 공연했다. 그녀는 평생 백조처럼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극단의 이름도 백조가극단으로 정한 것이었다.

당시 백조가극단의 공연은 1부에 전옥이 나오는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가 공연됐고, 2부에는 버라이어티쇼로 고복수, 황금심 같은 유명 가수들의 무대로 구성되었다. 수많은 악극단이 명멸했던 그 당시, 전옥의 백조악극단은 모든 면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백조가극단의 공연은 전쟁 중에도 계속되었다. 이즈음 전옥은 극단의 살림을 맡던 일본 유학출신 최일과 재혼했다.

50년대 중반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전옥은 다시 영화로 눈을 돌린다. 자신이 출연한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1957), <눈나리는 밤>(1958), <목포의 눈물>(1958)을 영화로 만든다.

50년대 후반 영화가 양산되기 시작하자 전국의 극장이 영화관으로 바뀌어 갔다. 이와 더불어 전국의 악극단은 자연 소멸의 위기를 맞는다. 백조가극단은 주력을 영화로 바꾸었다. 1960년 전옥과 최일은 백조가극단을 백조영화사로 변경했다. 하지만 1962년 영화법이 개정되어 군소영화사들이 퇴출되면서 백조영화사도 문을 닫았다.

60년대 이후 전옥은 무대와 다른 모습으로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평론가 변재란은 전옥이 <고려장>(김기영 연출·1963)과 <쌀>(신상옥 연출·1964)에서는 무당역으로 신기 어린 카리스마를, <연산군>(신상옥 연출·1962)에서는 인수대비역으로 강력한 모성과 뒤틀린 권력욕을, <육체의 문>(이봉래 연출·1965)에서는 시골처녀를 팔아넘기는 포주역으로 악독한 모습을 연기해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명과 다른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한국영화사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독특하다고 평가했다.

1969년 10월 전옥은 고혈압과 뇌혈전 폐쇄증으로 58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자식들은 남과 북의 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타가 되었다. 영화배우 최민수의 모친인 배우 강효실과 북한의 대표적인 배우 강효선이 그의 딸이다. 

/한상언 기자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김갑의, <춘사 나운규 전집>, 집문당, 2001

안종화, <한국영화측면비사>, 현대미학사, 1998

유민영, <한국연극운동사>, 태학사, 2001

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1997

주진숙 외, <여성영화인사전>, 소도, 2001

최창호 외, <라운규와 수난기영화>, 한국문화사, 2001

황문평, <삶의 발자국1>, 도서출판선,2000

[방송] "밥 같이 먹으면 진솔한 얘기 나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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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오빠부대가 대단하지요." (이홍렬) "악극단 시절에는 아줌마부대가 있었지, 악극 배우들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정도지." (구봉서)

2월 22일 오후 4시 리츠 칼튼 호텔 2층 식당. 선후배 코미디언이 스테이크를 먹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두시간 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물론 사적인 만남은 아니었다. 음식ㆍ요리 전문 케이블 TV '채널 F' 의'거인들의 저녁식사' (목요일 오전 11시) 녹화를 위해, 오랜 만에 모습을드러낸 구봉서는 특집 프로그램 출연 외에 교회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면서 후배 이홍렬에게 선배로서 갖가지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거인들의 저녁식사' 는 각계의 명사나 유명인사를 초대해 식사를 하면서 삶과 생활, 그리고 음식 이야기를 나누는 국내에서 처음 시도되는 식탁토크쇼이다.

이용렬PD는 " 초대 손님이 왜 거인인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조명해 보고 싶어,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을 취하게 됐다.

또 요리 프로그램인 만큼 각계 유명인들이 어떤 음식을 선호하며 요리에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알아보기 위해 기획된 프로그램이다"면서"공식적인 자리나 인터뷰 장소에서 하지 못했던 출연자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식탁에서는 편하게 나오는 것 같다" 고 말했다.

식사메뉴는 초대 손님이 지정하거나 좋아하는 것으로 정하고 방송 중간중간에 음식에 대한 맛이나 느낌들도 들어본다. 또 식당 주방장 등 요리전문가가 나와 요리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곁들일 예정이다.

1월부터 첫 방송 이후 민주당 김중권 대표와 두 딸, 한나라당 김홍신 의원과 가수 조영남씨, 한명숙 여성부 장관과 가족, 한의사 김홍경씨와 제자2명 등이 식탁 토크쇼의 초대 손님으로 출연했다.

배국남기자 knbae@hk.co.kr

[책갈피 속의 오늘]1913년 작곡가 박시춘 출생

[동아일보]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요만은/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소리.’

1930년대 대표 유행가 ‘애수의 소야곡’ 1절이다. 격정과 회한을 내지르지 않고 ‘별’ ‘휘파람 소리’ 같은 시청각적 이미지에 빗대 절제하는 가사는 얼핏 ‘신파’로 보인다. 그러나 2년전 이 곡을 리메이크한 가수 한영애는 “명곡은 인간 내면의 절실한 표출이 비결임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일제강점기는 암울했지만 대중가요는 황금시대였다. 연극무대 막간에 불렸던 유행가가 경성방송국 라디오방송 개국(1927년)과 일본계 레코드 회사들의 앞 다툰 상륙으로 주요 문화상품이 되었다. 이애리수가 노래한 본격 조선 가요의 효시로 불리는 ‘황성옛터’는 5만 장이 팔려 나갈 정도였다. 

이 시대 노래들은 검열 때문에 정치성을 띠지 못하다 보니, 슬픔 사랑 향수 방랑 같은 감성을 자극한 가사가 많다. 역설적이게도 이게 시공을 초월한 명가사의 비결이 된 측면이 있다.

당대 스타 작곡가로 박시춘(朴是春·1913∼1996)이 있다. 1931년 무명가수 남인수에게 준 ‘애수의 소야곡’이 빅 히트를 하면서 OK 레코드사 전속 작곡가로 발탁된 그는 모두 3000여 곡의 대중가요를 작곡했다. 

신라의 달밤, 고향 만리, 럭키 서울, 비 내리는 고모령,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전선야곡, 전우여 잘 있거라 등 지금도 장·노년층의 노래방 단골 메뉴인 주옥같은 노래들이 모두 박시춘의 곡이다. 

1913년 10월 28일 경남 밀양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10대에 아동 악극단에 반했다. 아예 가출한 그는 이후 시대를 대표하는 가인(歌人)이 된다. 1982년 10월 대중가요 작곡가로는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받았던 그는 ‘나는 선생도 없고 제자도 없다’며 문하생을 마다한 자유인이었지만 연예인협회 이사장과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종신 명예회장을 역임한 대중 문화계의 권력자이기도 했다. 

최근 그가 친일 노래를 지었다고 도마 위에 올랐다. 수천 곡 중 겨우 몇 곡인데 너무 야박하다는 평가도 있었고 짚을 것은 짚자는 이야기도 있었다. 논란은 논란이고 노래는 노래다. 가을이 깊어가는 요즘, 누구라도 그의 노래를 읊조리면 마음이 촉촉하게 젖지 않으랴.

‘무엇이 사랑이고 청춘이던고/모두 다 흘러가면 덧없건만은/외로이 느끼면서 우는 이 밤은/바람도 문풍지도 애달프구나.’(애수의 소야곡 3절)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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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사람] ‘한국 팝의 고고학’ 펴낸 신현준씨



1945년 미군 진주와 함께 시작된 한국 팝의 역사를 1980년까지 정리한 ‘한국 팝의 고고학’(한길아트)이 두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대중음악의 역사야 그 이전에도 존재하는 것이겠지만 영·미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 생산된 국산 대중음악을 ‘한국 팝’으로 규정하고,1960년대와 1970년대로 나눠 살핀 게 특징이다. 

웹진 ‘웨이브’를 근거지로 대중음악 평론을 하는 신현준,이용우,최지선 등 3인의 공동저작. 2000년부터 기획에 들어가 4년여의 공을 들인 만큼,우리의 대중음악사를 다룬 책으로는 달리 비교대상을 찾을 수 없을만큼 실증적이며 방대한 책이다. 

‘웨이브’ 대표로 현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재직 중인 신현준(42)에게 기껏 50∼60년의 역사를 복원하면서 고고학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를 물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사실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발굴이라는 어려운 작업을 거쳐야 했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지요.”

사실을 꼼꼼하게 수집하고 정리하는 작업은 이를 통해 재해석과 복권의 가능성이 열린다는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저자들도 서문에서 “이런 현실을 뒤적이면서 청년문화에 대한 상투적이고 일반화한 해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다. 1970년대의 대중음악을 얘기할 때,김민기 한대수 양희은 등의 ‘저항적 포크’에만 의미를 부여하는 일반적 시각과 달리 당시 ‘퇴폐’로 취급받던 그룹사운드 음악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신씨는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관점에서 자리매겨진 당시 음악과 음악가들을 미학적 관점에서 재배열하려고 했다”며 기타리스트 강근식(58)을 예로 들었다. 강근식이 이끈 밴드 ‘동방의 빛’은 1970년대 무대가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음향의 혁신을 주도했으며,그 맥은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로 이어진다. 

“강근식은 신중현,이장희 등과 함께 활동하며 당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뮤지션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와서 보면 신중현은 너무 유명하고 이장희는 좀 알려졌다면 강근식은 아예 잊혀진 인물이 되고 말았지요. 저희는 강근식이라는 이름이 신중현이라는 이름만큼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 길이 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책에 기록했습니다.”

일제시대의 음반 가게와 조선악극단 사진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미8군 쇼의 등록카드 등 당시 대중음악계의 풍경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사진들과 주요 인물,신문과 잡지에 실린 관련 기사를 망라해 보여준다. 마치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를 읽는듯,뿌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김남중기자 njkim@kmib.co.kr

연예계와 조폭 연결고리 끊을 수 없나?



[마이데일리 = 배국남 대중문화전문기자] 서울중앙지검이 6일 스타 권상우(31)를 협박한 전 매니저 백모씨와 권상우의 일본 공연을 강요한 혐의(강요미수)로 서방파 옛 두목 김태촌씨도 함께 기소한 사건은 우리 연예 시스템의 후진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세계 10대 대중문화시장의 규모와 콘텐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외형적으로는 연예산업이 선진화됐으나 안을 들여다보면 아직도 여전히 후진적인 주먹구구식 시스템으로 연예계가 운영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체계적이고 비전문적인 그리고 불투명한 우리 연예 시스템은 조폭의 연예계 연결고리를 갖게 한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또한 연예인의 공인 의식의 결여와 사생활 관리 부족역시 연예인과 조폭의 연결고리를 끊지 못하게 하는데 한몫하고 있다. 

조폭과 연예인과의 관계, 그리고 연예시스템의 조폭의 유입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1960년대 악극단의 활동이 줄어들고 개별 가수들의 극장식 식당, 유흥업소, 지방공연 그리고 방송 출연이 잦아지면서 가수를 중심으로 개인 매니저가 도입됐다. 하지만 과학적인 스타 시스템 측면에서의 매니저가 아닌 주로 출연료 정산이나 업소 출연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위한 ‘주먹’쪽에 가까운 매니저의 성격이 짙었다. 이때부터 연예인과 조폭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형성 됐고 이후 심화됐다. 또한 정치권과 연계된 조폭들이 선거 등에 연예인들을 활용하기위해 일시적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1970~1980년대 조폭들이 유흥업소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유흥업소의 출연을 둘러싸고 조폭과 연예인의 연계 관계는 보이지는 않지만 더욱 심화돼갔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는 연예인과 조폭의 관계는 질적, 양적 변화를 초래했다. 대중문화 시장이 급팽창하면서 연예인을 통한 막대한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고 방송사가 전속제와 탤런트 공채를 포기하면서 그 기능을 수행한 연예 기획사가 난립하면서 연예인과 조폭과의 관계는 다양한 형태로 형성됐다. 일부 조폭들은 자본력과 조직을 활용해 일부 연예 기획사로 진출해 연예인을 발굴하고 연예계에 진출시키는 역할을 하는 한편 일부는 자본을 통한 참여로 연예계와 관계를 형성했다. 

이처럼 우리의 대중문화의 역사에서 신인을 발굴해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을 시킨 뒤 치밀한 전략과 홍보마케팅으로 연예계에 진출시켜 스타로 부상시키는 스타 시스템은 과학적이고 투명한 것이 아니었다. 조폭이 끼어들 수밖에 없는 비과학적이고 불투명한 거기에 규모도 영세한 연예 기획사들이 스타 시스템의 기반을 형성했다. 이 때문에 좋은 인재들의 스타 시스템의 유입이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일부에선 과학적이고 선진적인 시스템을 도입시킨 연예 기획사를 운영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대학에 매니저학과가 생기는 등 우리의 스타 시스템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증권시장을 통한 엔터테인먼트산업으로의 자본 유입, 연예인을 통한 막대한 이윤 창출 등으로 조폭들은 연예인과의 관계 형성을 하기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여기에 일부 연예인 지망생중 무조건 뜨고 보자는 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연예인이 되려는 잘못된 인식과 일부 스타들의 불건전한 사생활과 자기 관리의 부실 등도 연예인과의 연계성을 가지려는 조폭의 덫에 걸려들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조폭과 연예계, 연예인의 관계를 단절하려면 근본적으로 투명하고 과학적이면서도 체계적인 스타 시스템을 구축해야한다. 이와 함께 드라마, 영화 출연을 둘러싼 합리적 관행의 정착, 안정적이면서도 투명한 자본을 조달할 수 있는 채널 확보, 연예인들의 건강성 회복 등도 이뤄져야 연예인과 조폭의 관계를 끊을 수 있다.

[조폭의 전보스 김태촌과 전매니저 등으로부터 강요와 협박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권상우. 사진=마이데일리 사진DB]

(배국남 대중문화전문기자 knbae@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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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홍찬식]뮤지컬 韓流를 위하여

[동아일보]

국산 영화에 이어 뮤지컬이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 지난해 뮤지컬 관람객은 270만 명을 기록해 큰 호황을 누렸다. 뮤지컬의 총매출액은 음악 무용 등 나머지 공연물을 모두 합친 금액보다도 많았다.

뮤지컬의 ‘빅뱅’은 몇 년 사이 단숨에 이뤄진 것이라 더 놀랍다. 한국은 뮤지컬의 불모지대였다. 뮤지컬이 거의 공연되지 않는 데다 수준도 낮았다. 연극계의 취약한 여건 때문에 ‘한국에선 뮤지컬이 어렵다’는 회의론이 나왔다.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처음 본 뒤 한국은 언제 저런 공연을 해낼 수 있을까 낙담한 적이 있다.

뮤지컬의 급성장은 연극인들이 끊임없는 도전으로 이뤄 낸 결과다. 원초적인 가난함으로 인해 뒤로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람들이 연극인이다. 강인한 생존 능력으로 뮤지컬이라는 새 장르를 개척한 것이다. 국내 뮤지컬의 불씨를 지핀 작품은 ‘명성황후’였다. 1995년 초연(初演) 때만 해도 성공을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도박’이나 다름없던 이 작품이 한국인의 애국심을 자극하면서 뉴욕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하자 뮤지컬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높아졌다. 오랜 침체에 빠졌던 연극계가 마침내 돌파구를 찾아낸 것이다. 그 뒤를 따라 ‘오페라의 유령’ 같은 수입 뮤지컬이 들어와 본격적인 붐을 조성했다.

뮤지컬의 성공 비결을 설명하기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1930, 1940년대 국내 연극은 ‘악극’의 시대였다. 처음에는 연극의 중간 휴식시간에 관객들의 지루함을 덜어 주기 위해 노래와 춤, 재담을 섞은 ‘막간극’을 공연했는데 이것이 연극보다 더 인기를 모으자 독립시킨 것이었다. 10여 개의 악극단이 활동하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한다. 한국인이 전통적으로 노래와 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뮤지컬이 우리나라처럼 단기간에 자리 잡은 예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기본적으로 한국인 정서에 잘 맞는다는 얘기다. 인기에 힘입어 뮤지컬 지망생이 늘고 있다. 출연 배우를 뽑는 공개 오디션에 보통 500명씩 지원자들이 몰린다고 한다. 연기와 노래, 춤 실력을 함께 갖춘 배우들이 많아졌다. 한국 영화가 처음 붐을 일으켰을 때와 흡사한 상황이다.

뮤지컬은 영화와 함께 문화산업의 큰 축이다. 영국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세계적으로 80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지금까지 3조 원이 넘는 흥행 수입을 올렸다. ‘오페라의 유령’을 포함해 ‘캣츠’ ‘레미제라블’ ‘미스 사이공’ 등 이른바 4대 뮤지컬이 총 10조 원의 흥행 수입을 기록 중이다.

영화에 비해 뮤지컬은 고가(高價), 고품질의 문화상품이므로 한국의 문화적 이미지를 고급화하는 데 적격이다. 국내 여건은 갖춰졌으므로 해외에서도 경쟁력 있는 문화산업으로 키울 방안을 찾아야 한다.

해외 진출을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손으로 만든 창작 뮤지컬이 있어야 한다. ‘명성황후’를 제작한 연출가 윤호진 씨는 안중근 의사(義士)의 일대기를 뮤지컬로 만들어 4년 뒤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안 의사는 중국에서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으며 일본에도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아시아 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영국이 만든 뮤지컬이 뉴욕 브로드웨이에 곧바로 수출되듯이 ‘명성황후’든 ‘안중근’이든 좋은 작품이면 길은 언제나 열려 있다. 연극인들은 맨손으로 뮤지컬 전성시대를 열었다. 앞으로는 한국 무대를 뛰어넘고자 하는 야심 찬 연극인들이 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지금까지 연극인들이 보여 준 승부 근성이라면 못할 것도 없다. 정부도 전용극장 등 뮤지컬 육성을 위한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

뮤지컬 공연장의 뜨거운 분위기는 ‘뮤지컬 한류(韓流)’를 예감하게 한다. 세계 각국에서 롱런하며 흥행 기록을 경신하는 한국 뮤지컬을 보고 싶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전원일기' 할머니 역 정애란씨 별세


MBC TV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할머니 역으로 오랫동안 시청자의 사랑을 받았던 정애란(본명 예대임)씨가 10일 경기 용인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8세.

고인은 1943년 악극단 ‘유락좌’ 단원으로 연기 생활을 시작한 뒤 1950년대 후반부터 영화배우로 활동해 왔다. 출연작품으로는 영화 ‘애수’ ‘난중일기’ ‘을화’ ‘미워도 정 때문에’와 TV 드라마 ‘연산군’ ‘옛날에 이 길은’ ‘TV문학관-길 위의 날들’ 등이 있다. 또한 200여 편의 연극무대에도 섰다. 

MBC TV 장수 드라마 ‘전원일기’에는 1980년 10월 첫 방송부터 최불암의 어머니로 출연해 폐암 치료를 받는 기간을 제외하고 종영 때인 2002년 12월까지 장장 23년간 참여했다. 부음을 접한 최불암씨는 “막바지 촬영 때 어머니가 몸이 안 좋으셨는데 정신만은 흐트러짐이 없었다”며 “마치 친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처럼 착잡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1979년 영화 ‘을화’로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1991년엔 방송협회 방송대상 공로상, 1996년 상하이 TV 페스티벌 여우조연상 등을 수상했다. 

고인은 환갑 이후 2차례의 폐암 수술과 당뇨로 인한 합병증을 앓아 왔다. 장례는 고인의 바람대로 수목장(樹木葬ㆍ시신을 화장한 뒤 유골을 나무 밑에 묻는 방식)으로 치뤄진다.

유족으로는 연극배우인 딸 예수정씨와 사위 탤런트 한진희씨가 있다

조신 차장 shincho@hk.co.kr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산너머 남촌에는’의 박재란(1)

[서울신문]박재란씨는 가창력, 좋은 노래, 외모까지 3박자를 모두 갖춘 ‘만능가수’이자 여러 리듬에 따라 다양한 창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실력파 가수.‘항상 웃음을 띤 얼굴’로 기억되는 가수 박재란은 건강한 보이스 컬러에 경쾌한 노래들로 특히 어려웠던 시절, 삶에 지친 많은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안겨 주었다. 마치 남쪽에서 불어 오는 남풍처럼 화사하고 따뜻한 이미지로 남겨져 있는 가수 박재란.

그 역시도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수시로 잔병치레를 할 정도로 몸이 허약해 전염병이라면 누구보다도 먼저 앓았고 특히 일곱 살 나던 해에 걸린 ‘뇌염’으로 인해 가망이 없다며 장례 치를 준비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의사를 불렀을 때 다행히도 살아났다. 아울러 초등학교 시절,6·25전쟁 중이던 그의 나이 열 살 때 철도국에 근무하던 부친마저 여읜다.

그러나 대중 앞에서는 누구보다도 밝은 모습으로 나섰다.‘럭키 모닝’,‘푸른 날개’,‘해피 세레나데’ 등 초기 히트곡을 시작으로 희망의 메시지를 방방곡곡 전파하며 사회 분위기를 밝게 리드해 나갔다.

“저는 트로트풍의 노래를 거의 부르지 않았어요. 대신 대부분 노래들이 폴카나 트위스트, 부기우기, 룸바, 탱고, 삼바, 차차차 등 신나는 멜로디였죠. 때문에 무대에 서면 관객들이 매우 즐거워했어요. 물론 한꺼번에 여러 멜로디를 동시에 불러야 하는 어려움도 따랐지만 정말 보람을 느끼던 시절이었죠.”

그의 회고처럼 최초 히트곡 ‘럭키모닝’을 시작으로 ‘푸른 날개’, 민요풍의 ‘맹꽁이 타령’, 그리고 ‘님’,‘둘이서 트위스트를’,‘산 너머 남촌에는’,‘소쩍새 우는 마을’,‘아나 농부야’,‘밀짚모자 목장아가씨’,‘행복의 샘터’,‘진주조개 잡이’,‘강화도령’ 등 SP시대에서 출발해 LP시대를 수놓았던 그의 히트곡들은 얼추 손꼽아 봐도 템포가 사뭇 제각각이다.

이처럼 다양한 리듬을 자유자재로 소화했던 가수는 우리 가요계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다. 바이브레이션을 별로 사용하지 않는 깨끗한 창법으로 장르에 따라 발성을 달리하는 뛰어난 가창력은 작곡가 입장에서 보면 탐이 날 수밖에 없다.

가수 박재란은 불과 열여섯 살 때, 처음 무대에 발을 디딘다. 본명은 이영숙.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하던 부친 이수천씨와 성가대원이었던 모친 유순남씨 사이의 1남5녀 중 4녀로 서울에서 출생했다. 네 살 때 철도국에 근무하던 부친이 전근함에 따라 가족 모두 천안으로 이사했다. 천안 제일국민학교(지금의 천안초등학교), 천안여중을 거치는 동안 그는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다.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당시 인기 있던 유행가를 전파시킨 메신저 역할은 늘 그의 몫이었다. 특히 백난아씨가 부른 ‘망향초 사랑’을 즐겨 불렀다고 기억한다.

이러한 그의 음악적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고 무대 활동을 적극 권유한 인물이 당시 인천경찰악대장 박태준씨. 그의 추천을 통해 육군본부 산하 군예대(KAS) 3기생으로 발탁되면서 대구에서 첫 무대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수양아버지까지 되어 주는 박태준씨로부터 받은 예명이 박재란.

일선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위문공연이 주 임무였던 군예대에서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말 그대로 ‘일인다역’. 노래는 물론 무용, 악극 등 쇼에 관한 한 모든 걸 소화해야 했던 어린 재란은 대구에서 2년, 서울에서 2년간의 군예대 생활을 거치는 동안 무대에 빠르게 적응해 갔다.

군예대 시절, 대구에서 첫 취입해 발표한 노래는 나화랑 작곡의 ‘뜰아래 귀뚜라미’와 김학송 작곡의 ‘코스모스 사랑’.

그러나 큰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이후 악극단으로 자리를 옮겨 첫 히트곡 ‘럭키모닝’이 발표될 때까지 무명인 채로 ‘희망악극단’과 ‘무궁화악극단’ 그리고 ‘반도악극단’ 등을 옮겨가며 무대 활동을 계속한다. 그러는 사이 그의 가창력과 미모는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지면서 뭇 남성들의 ‘흠모의 대상’이 된다.(계속)

대중음악평론가 sachilo@empal.com

가요계 최고 명가수, 이난영·남인수 드라마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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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배국남 대중문화전문기자]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불리 우는 노래가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 가슴에 남는 가수가 있다. 우리는 그들을 스타라 부른다. 젊은 세대나 중장년층이나 요즘도 불리 우는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과 ‘애수의 소야곡’의 남인수의 삶과 노래, 사랑을 담은 드라마 제작이 추진돼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8일 만난 KBS 이강현 PD는 “올 하반기에 일제 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대중의 가장 사랑을 받았던 스타 가수인 이난영과 남인수의 삶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추진하고 있다. 두 사람이 활약했던 시기와 두 스타에 대한 자료와 증언 등을 모으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난영(1916~1965)은 일제 강점기에 데뷔해 신인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며 남편 김해송과 함께 악극단을 운영하며‘목포의 눈물’‘목포는 항구다’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남인수(1921~1962) 역시 최고의 남자 가수로 활동하며 숱한 화제와 스캔들을 뿌렸던 스타가수다. 

이난영과 남인수를 드라마화는 것은 드라마 의미를 넘어 대중문화적 의미를 담보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활동했던 대중문화인에 대한 자료가 미비한데다 이에 대한 연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한국 대중문화사의 총체적 흐름을 파악하는데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이난영과 남인수를 드라마로 시청자와 만난다면 이때 당시의 대중문화의 판도와 메커니즘, 스타 시스템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강현PD는 “최대한 철저한 고증을 받아 이 시대의 대중음악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의 판도 그리고 이 시기에 활동했던 가수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 나가 드라마적 재미뿐만 아니라 과거의 대중문화사를 알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배국남 대중문화전문기자 knbae@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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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세요] 새앨범 선보이는 ‘수덕사의 여승’ 가수 송춘희씨

송춘희씨
송춘희씨
[서울신문]“이르면 다음달 중 새 앨범으로 팬들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수 송춘희씨.‘인적없는 수덕사의 밤은 깊은데∼’로 시작되는 가요 ‘수덕사의 여승’으로 유명하다. 또 ‘할아버지 쌈짓돈’‘노랫가락 차차차’‘영산강처녀’ 등은 40대 이상에게는 추억의 가요로 불려진다. 아울러 현역 가수로 20년 넘게 ‘찬불가’를 부르고 있다.

소년·소녀가장 돕기등 선행에도 앞장

가수활동 외에도 평소 남모르는 선행에 앞장서왔다. 우선 백련장학회(白蓮奬學會)를 14년 동안 이끌면서 소년소녀가장과 불우학생 등 50여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왔다. 지난해에는 한 불우학생을 서울대에 진학시키는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두번째는 전국의 교도소와 군부대를 찾아다니며 교화활동과 가요보급을 수십년째 해오고 있다.

서울 중구 태평로의 프레스센터에서 송씨를 만났다.70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훨씬 건강해 보였다.“지난해 2월 위암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돼 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다.”면서 때문에 작년 한해는 활동이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건강을 회복한 올봄부터는 새로운 기분으로 활동을 재개했다고 부연했다. 특히 ‘아름다운 상주’(김점도 작사·작곡)라는 신곡을 녹음 중에 있어 6,7월쯤이면 팬들에게 선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새 앨범은 2년여 만이다.

“군부대는 일요일마다 가고 있어요. 최근에는 백마부대와 기갑부대를 다녀 왔지요. 연등 만드는 법을 배워주고 재미있게 노래부르기 등 장병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버이날에는 서울 인근의 사찰에서 불우 노인들에게 무료로 점심식사를 제공했다. 송씨는 한때 소녀 가장으로 부모와 동생 7남매의 뒷바라지를 했으며 그러다 보니 결혼도 하지 못했다.

평북 영변에서 8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그는 해방직후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경기도 수원여고 재학시절 부친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부모가 화병으로 병원에 나란히 입원해 집안사정은 더욱 어려웠다.

“지난해 2월 위암수술… 새달 신곡 발표할 것”

이때부터 소녀가장이 됐다. 대학진학도 포기한 그는 19살때인 1956년 악극단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군 위문공연도 65년부터 모두 네차례나 다녀 왔다. 이때 받은 출연료를 한푼도 쓰지 않고 지금의 서울 신촌집을 장만하는데 보탰다. 오로지 집안을 일으키는데 청춘을 다 보낸 셈.

“남동생 둘과 여동생 한명은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유치원 원장인 동생도 있고요. 막내 남동생은 탁구 국가대표 선수를 지내기도 했어요. 다들 건강하게 잘 살고 있어 뿌듯합니다. 요즘에는 부모님이 동생들에게 ‘큰누나의 고희잔치는 너희들이 꼭 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송씨는 76년 미국 이민을 갔다가 83년 다시 귀국했다. 이때 미국 시애틀에서 반년넘게 행자생활을 했지만 너무 힘들어 다시 속세로 나왔다고 토로했다.83년부터 찬불가를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단다.

‘수덕사의 여승’ 소재와 관련,“한 작가가 수덕사에 잠시 들렀다가 비구 주지 스님을 비구니로 착각해 글을 쓴 데서 비롯됐다.”고 귀띔했다. 지금도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그는 건강을 위해 매일 수영을 하며 일주일에 한번 정도 산을 오른다고 했다.

글 김문기자 km@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키워드 4 - 건전가요] 너도 나도 일어나 병영국가 가꾸세~



[한겨레] 억지로 유포된 희망, 건전가요의 전성시대…공화당 시대에는 대중가요풍, 유신시대에는 군가풍 

▣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ymlee@knua.ac.kr 

박정희는 노래를 아주 좋아하고 잘 아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박정희만큼 노래와 관련된 일화를 많이 남긴 대통령은 여태껏 없다. 그는 금지곡 지정, 대중가요인 구속을 남발했고 노래 잘못 부른 가수를 군에 징집하기도 한 반면(김민기냐고? 아니다. 조영남이다), 노래를 장려하고 스스로 노래를 지어 전국민에게 가르쳤고 심지어 절명하는 그 순간까지도 노래와 함께 있었다.

‘불건전 가요’ 싹쓸이, 트로트 타격 

건전가요란 용어도 박정희 시대에 대중적으로 유포되었다. 물론 이승만 정 시절에도 이 용어는 있었지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같은, ‘건전’이란 말이 민망할 정도로 살벌한 노래들의 시대였다. ‘건전’ 가요의 진흥은 ‘불건전’ 가요의 싹쓸이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수순이다. 박정희는 정권을 잡자마자 ‘가요정화 조치’를 내린다. 총칼로 정권을 잡은 이들이 ‘정화’라는 이름의 마녀사냥으로 자신의 도덕성을 과시하는 것은 익숙한 풍경이다. 1961년, 서울의 대중가요인들은 그저 위축되는 정도였지만, 지방의 이름 없는 악극단 가수와 코미디언들은 강제로 끌려가 노역을 했다는 증언도 있다. 설상가상 1961년 한국방송 TV개국으로 방송국을 중심으로 무언가 건강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지면서, 일제시대부터 울고 짜고 뽕짝뽕짝하는 노래들이 배척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악극은 급격히 몰락했고, 트로트 가요 전반이 크게 타격받았다. 1960년대 이봉조, 길옥윤 등 이른바 팝 계열 대중가요로의 세대교체는 가요정화 조치로 트로트 계열의 급격한 위축에 힘입은 것이다. 이렇게 박정희는 정권을 잡자마자 대중가요사의 한획을 크게 그었다.

박정희 시대가 공화당시대와 유신시대로 크게 나뉘듯, 건전가요도 두 시기 다르다. 간단히 말해서, 공화당시대는 대중가요풍 건전가요, 유신시대는 군가풍 건전가요의 시대였다.

정부의 부채질과 그에 부응한 방송계, 이에 알아서 긴 대중가요계는 1960년대를 건전가요의 전성시대로 만들었다.

수양버들이 하늘하늘… 우리 마을 살기 좋은 곳 경치 좋고 인심 좋아(1963, 한명숙 <우리 마을>) 팔도강산 좋을시고 딸을 찾아 백리길… 잘살고 못사는 게 팔자 탓이 아니더라 잘살고 못사는 게 마음먹기 달렸더라(1967, 최희준 <팔도강산>)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1969, 패티김 <서울의 찬가>) 

이러한 노래가 어떻게 생산되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정부의 구체적 지시 여부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직업인이라면, 이런 노래를 지으면 방송 출연에 유리하다는 것쯤은 머리 굴려볼 수 있지 않겠는가. 중요한 것은 이들 노래가 적잖이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방송을 통한 학습효과는 당연히 있었겠지만, 한편 이런 노래들이 유포하는 ‘희망’에 대해 당시의 대중들이 적잖이 ‘동의’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5·16혁명 1주 기념예술제에서 처음 불린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는 의뢰 만들어진 노래가 분명하지만, 지지리도 못살았던 대다수 국민들의 절절함이 깃들어 있다. 게다가 곧이은 경제개발 정책은 공화당시대를 희망찬 노래들의 시대로 만들기 충분했을 것이다. 사랑노래더라도 명랑한 노래가 많고, 군인을 노래하더라도 대중가요스럽게 재미있다.

서울의 아가씨는 멋쟁이 아가씨 서울의 아가씨는 맘 좋고 슬기로워… 남산의 꽃이 피면 라라라라 라라라(1962, 이시스터즈 <서울의 아가씨>) 뜰 아래 반짝이는 햇살같이 창가에 속삭이는 별빛같이… 비바람이 불어도 꽃은 피듯이 어려움 속에서도 꿈은 있지요(1971, 정훈희 <꽃동네 새 동네>) 신병 훈련 육개월에 작대기 두개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 신나는 김일병 (헤이 부라보 김일병)… 신나는 휴가 때면은 서울의 거리는 내 차지 나는야 졸병이지만 그녀는 멋쟁이(1967, 봉봉사중창단 <육군 김일병>)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이제야 돌아왔네… 말썽 많은 김총각 모두 말을 했지만 의젓하게 훈장 달고 돌아온 김상사(1969, 김추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어떤 노래가 건전가요고 어떤 노래가 보통가요일까? 공화당시대는 이것이 잘 구별되지 않는 때였다. 특히 1960년대 초·중반까지는 “잘살아 보세”의 약발이 먹힌 것으로 보이는데, 196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어 개발 드라이브의 부작용이 슬슬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이미자와 배호의 서글픈 목소리가 다시 인기 절정을 누리는 현상은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유신시대는 다르다. 박정희는 당 중심의 정치를 포기하고 대통령이 이끄는 병영 같은 사회를 요구했다. 이제 국민대중의 동의 절차는 필요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건전가요가 구태여 대중의 인기를 얻을 필요도 없어졌다. 대통령 보기에 훨씬 더 ‘건전한’ 노래를 온 국민에게 반복적으로 가르치면 되는 것이다.

백두산에 푸른 정기 이 땅을 수호하고/ 한라산에 높은 기상 이 겨레 지켜왔네/ 무궁화꽃 피고져도 유구한 우리 역사/ 굳세게도 살아왔네 슬기로운 우리 겨레(<나의 조국>)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새마을 노래>) 

이 두 곡은 박정희가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로, 유신시대 내내 학교와 직장에서 부르게 했으며, 매일 방송이 시작될 때 애국가 다음으로 연주되었다. 이 두 노래를 보고 있으면 박정희가 거쳐온 두개의 직업이 고스란히 보여 웃음이 난다. <나의 조국>은 전형적인 일본 군가풍으로 일본군 출신의 취향을 보여준다. 왜색을 따진다면 이 노래는 선두에 선다. <새마을 노래>는 계몽적 학교 창가풍이다. 그가 사범학교 출신이란 걸 생각하면 이 감수성 역시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모든 것을 군대식으로 

유신시대의 건전가요는 이런 것들뿐이었다. 세상은 모두 군대식이었다. 학교에서는 거수경례 때 ‘멸공’ 구호를 외쳤고, 체력장의 던지기에서는 공 대신 모조 수류탄을 던졌다. 여학생 체육에서도 사격을 권장했는데, 바로 내가 중학교 때 칼빈소총으로 사격을 배웠던 세대이다. 학생회도 없이 학도호국단 체제로 재편된 학교에서는 군가풍 <학도호국단가>를, 새마을수련원에 가면 “좋아졌네 좋아졌어 몰라보게 좋아졌네” 같은 노래를 손뼉을 두드리며 불러야 했다(못산다는 것을 인정한 <잘살아 보세>에 비하면 얼마나 억지스러운가). 흥미롭게도 1980년대 5공화국에서는 다시 대중가요풍 건전가요로 바뀐다. 유신시대처럼 강압적일 수 없었던 전두환 정권은, 프로야구와 컬러TV로 대표되는 새로운 대중문화 정책을 폈고 당연히 건전가요도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이나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 같은 대중가요풍으로 회귀하게 된다.

포크와 록을 하던 젊은이들은 나름대로 유신 체제에서 살아남으려고 성의를 보였건만, 본격적인 긴급조치 시대로 들어서기 시작한 1975년 대마초 사건으로 이들은 가차 없이 처단당했다. 이 대마초 사건은 1970년대 전·후반기를 가르는 기점을 이룬다(박정희는 정말 대중가요사에서 중요한 사람이다).

그러던 그는 1979년 10월, 왜색의 잔재가 적지 않은 <그때 그 사람>을 들으 유명을 달리했다. 그때 대학생들은 술집에서 <나의 조국>을 개사하여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10월유신 없었으면 이 나라 망했겠네 길이길이 보전하여 큰딸에게 물려주세”로 부르며 끓어오르는 젊은 피를 노래로 달래고 있었다.



굴욕외교의 희생양 <동백 아가씨>
이미자의 최고 히트곡 <동백 아가씨>는 1965년 왜색가요로 찍혀 방송이 금지되고 1968년 음반 발매가 중단됐으며, 1987년 6월항쟁 이후에야 금지곡에서 풀려난다. 과연 <동백 아가씨>는 왜색인가? 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라시도미파’의 독특한 단조 5음계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나는 이 곡이 금지곡이 된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정도로 금지된다면, 일제시대의 트로트 가요는 모조리 금지돼야 한다. 박정희가 가장 좋아했다는 <황성옛터>도, 반공드라마의 주제곡으로 쓰여 국민가요가 된 <눈물 젖은 두만강>도 당연히 금지돼야 한다. 심지어 박정희 스스로 지은 <나의 조국>이야말로 왜색 아닌가.

<동백 아가씨>는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제스처의 희생양이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1963년에 발표된 <동백 아가씨>에 금지의 철퇴가 떨어진 시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은 약간의 경제적 지원을 얻어낸 채 일본과 수교를 강행했고, 대학생들은 ‘굴욕적인 한-일 수교 반대’를 외치며 매일 데모를 했다.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자신들이 민족적이라는 것을 국민에게 과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며, <동백 아가씨>가 재수 없게 선택된 것이다.

대중가요는 대중적 파급력이 높지만, 대중가요인은 힘없는 만만한 존재이다 누르거나 때려도 저항하지 않으며, 특히 학력 등 문화자본이 상대적으로 약한 트로트 계열의 사람들은 더욱 그랬다. <동백 아가씨>는 당시 인기 절정 대중가요인데다, 선율은 물론이고 전주 부분의 기타 연주까지 일제시대의 엔카 스타일 그대로였다. 대중가요인들은 저항하지 못하고, 왜색이라는 근거 논리를 제공한 고급음악인들에게 수십년 동안 분노를 터뜨렸다. 박정희는 노래를 정치에 어떻게 이용하면 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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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처럼 살다 간 원로배우 황해"



가수 전영록의 부친인 원로배우 황해(黃海.본명 전홍구) 씨가 9일 오후 9시 12분 향년 8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 

황해씨는 지난 1920년 강원도 장전에서 출생한 뒤 당시 연예인 데뷔가 거의 그렇듯 황해도 악극단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지난 49년 한형모 감독의 <성벽을 뚫고>를 통해 스크린에 데뷔했다.

모범적인 배우 생활로 귀감

72년에는 대종상 남우주연상(1972) 대종상 남우조연상(1979) 심봤다 청룡영화제 남우조연상(1971) 등을 수상했다. 

그는 개성있는 연기력을 과시하며 영화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1981 ) 소(1975 ) 쇠사슬을 끊어라(1971 ) 독 짓는 늙은이(1969 ) 

북경열차(1969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1959 ) 청춘 쌍곡선(1956 ) 월하의 공동묘지에 출연하는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유가족으로는 평생 배우자의 길을 함께 해온 부인 백설희씨와 가수 전영록씨등 4남 1녀를 두고 있다.

노컷뉴스 방송연예팀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162)

[우리집 가정교육]⑧''붕어빵 父子'' 사물놀이 명인 김덕수씨와 래퍼 용훈씨

"국악과 힙합이 어떻게 한솥밥을 먹냐고요? 힙합에 리듬감은 절대적인 요소예요. 전 아버지 덕을 톡톡히 봤죠."(수파사이즈) 

"한국사람이라면 뱃속에서부터 우리의 신명을 갖고 태어나죠. 그게 꼭 가야금과 장구를 친다고 나오는 것은 아니에요. 힙합이든 뭐든 창조적 작업으로 세계화가 되면 더 좋은 것 아닙니까. 우리 소리를 기본으로 힙합을 못할 이유가 없죠."(김덕수) 

사물놀이의 명인 김덕수(52)씨와 그의 아들인 래퍼 용훈(22)씨를 지난 달 29일 서울 부암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다음날 일본 NHK의 ‘한·일 우정의음악회’ 출연을 위해 일본으로 떠난다는 김덕수씨와 4개의 방송 프로그램에 고정출연 중인 용훈씨를 함께 만나기란 꽤나 힘들었다. 

#1. 부전자전, 길 위의 예술가 

아빠를 따라 서너 살 때부터 사물놀이 공연장에 가던 아이는 떠들썩한 타악 소리를 자장가 삼아 스르르 잠이 들곤 했다. 꿈 속에서 리듬을 익혔던 아이는 자라서 래퍼가 됐다. 사물놀이의 대가 김덕수씨의 아들 ‘수파사이즈’ 이야기다. 케이블 음악채널 ‘MTV 코리아’가 길거리에서 즉석 인터뷰를 통해 신청곡을 받는 프로그램 ‘모스트 원티드’를 진행하는 VJ ‘수파사이즈’. 맥도날드 햄버거 이름에서 따온 별칭 ‘수파사이즈’로 인기를 모으며 타고난 ‘흥’과 ‘끼’를 발산하고 있다. 라디오 프로그램 ‘대한민국 토크쇼’(진행 김흥국 박미선)에서는 주부들이 이메일로 사연을 보내오면 즉석에서 랩으로 바꿔 불러주는 ‘게스트’로 출연중이다. 

어려서부터 ‘작은 덕수’라 불리던 수파사이즈. 그가 입학을 하면 그 학교에는 없던 사물놀이 특활반이 생겨났고, 경복고 재학시절에는 국악반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후광은 떨칠 수 없는 은혜이자 부담이 됐다. 음악이 나오면 몸이 자연스레 들썩인다는 수파사이즈가 힙합에 빠져든 건 중학생 때. 김덕수 아들이 웬 힙합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의 답은 간단하다. “아버지가 의사라고 아들도 의사를 합니까. 단지 아버지가 하는 것도 음악, 제가 하는 것도 음악일 뿐이에요.” 

뭐든지 스스로 신이 나지 않으면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김덕수씨는 음악에 있어서도, 아들의 진로에 있어서도 경계를 두지 않는다. “내후년이면 제가 데뷔한 지 50주년이 됩니다. 그동안 김덕수가 장고만 한 줄 아는데 제가 중고등학교 때 관악기 전공이었어요. 드럼도 쳤고 악극단 활동도 했으니 저도 이미 국악을 뛰어넘는 음악을 한 셈이죠.” 

김덕수씨는 아들에게 자가용 하나 없이 사는 아버지로서 미안함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김씨는 “물질적 재산보다 자신의 가치를 재생산할 수 있는 사람이 돼라”는 걸 몸으로 보여주는 게 아버지 김덕수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2. 만릿길을 가고 만명의 사람을 만나라 

경복고 1년 재학당시 김씨는 아들을 스위스의 국제학교 ‘레잔 아메리칸 스쿨’로 유학보냈다. 유럽지역에서 사물놀이 클래스를 열어줬던 지인이 교장으로 있는 학교였다. “아버지는 책을 달달 외우는 게 공부가 아니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성적을 문제삼지 않으셨습니다. 넓은 세상 속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 네가 모르는 게 많다는 걸 배우게 하셨죠. 그때 50개국이 넘는 국적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제 시야가 많이 넓어졌습니다.”(수파사이즈) 

이후 수파사이즈는 힙합의 본고장인 미국행을 택했고 현재 필라델피아 템플대 휴학 중이다. 2001년 한국으로 돌아와 힙합 음악인 주석의 1집과 4집을 비롯, 몇몇 음반에 참여했다. 김덕수씨는 아들에게 음악 선배로서도 단 한 번도 “해라” “하지마”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음주가무’가 취미라고 밝히는 수파사이즈에게도 김씨는 너그럽다. “음악회는 즐거운 파티이고, 음주가무 자체가 예술가들에게는 진실한 순간”이기 때문이란다. 

100m 달리기 선수가 매일 0.001초를 줄이려는 노력을 하는 마음가짐으로 장고를 두드린다는 김덕수씨는 아들에게도 “제대로 된 공력을 쌓고 음악을 하라”고 말한다. 

수파사이즈는 벌써 3년째 준비중인 데뷔앨범을 올 상반기 출반할 예정이다. “앨범이야 빨리 내고 싶죠. 아이돌스타처럼 남이 만든 곡에 지시대로 부를 것 같으면 저도 벌써 음반 몇 개는 냈겠죠. 하지만 이젠 너무 많이 알려져서 더 조심스러워요. 아버지 명성도 부담이지만, 무엇보다 VJ가 음반냈네 하는 식으로 비춰지고 싶진 않습니다. 힙합은 노래하는 사람이 곡을 쓰기 때문에 제 사상이 다 드러나는 거거든요.” 

글 김은진, 사진 이제원 기자 jisland@segye.com

코미디언 변천사, 웃음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코미디언(개그맨)은 어쩌면 사람을 정화하기 위해 고통의 짐을 지는 영웅 같다. 그들은 우리를 웃기기 위해 기꺼이 바보가 되고 백치가 된다. 그들은 우리를 눈물나도록 웃게 하기 위해 엉덩이를 차기보다는 채이고, 몽둥이로 때리기보다는 얻어맞고, 케이크를 던지기보다는 뒤집어 써야한다. 우리는 그들이 표출한 바보와 백치를 보면서 그리고 겁많고 허풍스러우며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목도하면서 한바탕 웃고 난 뒤 정신과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낸다. 코미디언, 그들이 사랑 받는 것은 단지 그들이 우리를 웃기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랑받기위해 그들이 우리를 웃기기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에게도 오랫동안 대중에게 사랑받기위해 대중을 웃기던 코미디언이 있었다. 그리고 현재에도 있다. 하지만 이 땅의 웃음의 광대들은 그들의 존재의미와 그들이 가져다준 웃음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가혹한 비판과 편견을 먹고 살아왔다. 저질의 대명사는 늘 코미디의 몫이었고 방송의 금과옥조인 공익성의 반대편인 선정성과 폭력성은 코미디언의 운명 같은 굴레였다. 하지만 웃음의 광대들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코드를 달리하며 우리에게 한바탕 웃음으로 마음을 정화해주곤 했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동네에 텔레비전이 있는 집으로. 그건 하나의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서다. 아니 프로그램에 나와 말 한마디, 넘어지는 행동 하나에 배꼽을 잡게 했던 사람들을 보기 위해서다. 곤궁했던 1960~1970년대의 삽화는 ‘웃으면 복이 와요’의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이기동, 권귀옥 등이 있어 웃음으로 덧칠할 수 있었다. 

근대화의 기치를 내걸고 산업화에 총력을 기울였던 1960~1970년대는 먹고사는 것이 당면 목표였던 어려운 시기.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든 일상을 마치고 돌아온 지친 몸을 위안해주며 웃음을 준 것이 바로 코미디언들이었다. 유랑극단, 악극단에서 오랫동안 노래와 연기, 그리고 만담 등으로 다져진 코미디언들에게 잘 짜여진 극본도, 그들의 약점을 보완해줄 카메라나 세트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방송 초기 브라운관으로 옮겨와 ‘웃으면 복이 와요’ ‘코미디 대행진’ 등 각종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만담, 슬랩스틱 코미디, 콩트 코미디를 통해 온몸으로 웃음을 선사했다. 웃길 것 같지 않는 외모와 대사로 일관하다 마지막 의외의 반전을 기막히게 연출하는 막둥이 구봉서, 빠른 대사와 우스꽝스러운 몸놀림의 서영춘, 늘 당하기만 하는 바보의 전매 특허인 배삼룡, 부조화 속에서 기막힌 웃음을 엮어내는 이기동과 권귀옥 콤비 등이 빚어내는 웃음은 가난으로 곤궁해진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코미디가 뭔 줄 알아? 코미디는 인생살이를 조명하면서 웃음을 이끌어내는 연기야. 단순히 웃기는 게 아니라 메시지가 있는 거지”라는 구봉서의 말처럼 이 시대의 웃음의 광대들이 전해주는 웃음에는 의미가 있고 감동도 있고 눈물도 있었다. 그래서 대중은 그들이 있었기에 생활의 시름을 위안 받을 수 있었고 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컬러 방송과 언론통폐합이라는 급변한 방송환경과 함께 문을 연 1980년대에는 경제성장과 폭압정치라는 시대상황으로 인해 권위적인 분위기가 사회와 사람들의 마음을 짓눌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이전과 다른 형태의 코미디를 낳았다. 정밀한 대본에 의해 계산된 구성과 만들어진 상황에 의해 웃음을 자아내는 방식이 지배했고 코미디언들의 대사는 언로가 차단돼 숨막힐 것 같은 상황의 탈출구이자 비상구였다. 그 중앙에 ‘일요일 밤의 대행진’ 등이 있었다. 버라이어티 토크 코미디의 장을 연 ‘일요일 밤의 대행진’ 에선 김병조, 주병진의 진행으로 더욱 돋보였는데 그들이 프로그램에서 나와 던지는 대사는 사회와 암울한 시대를 조롱하는 풍자이자 해학이었다. 김병조는 특유의 익살과 유머가 깃든 풍자적인 ‘먼저 인간이 되거라’, ‘지구를 떠나거라’ 등 초등학생부터 어른들까지 따라하는 코미디언 유행어 시대를 선도하며 대중들이 표현하지 못한 속내를 드러내는 상징이자 은유의 역할을 해냈다. 

웃음의 광대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코미디언’에서 ‘개그맨’으로 바뀌기 시작한 1980년대말부터 1990년대 초반에는 용어의 변화만큼이나 웃음의 전령사들의 세대교체가 이뤄졌고 전통적인 코미디가 사라지고 토크 코미디 등 새로운 코미디의 형태가 대세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1988년 다양한 코너로 꾸며진 ‘일요일 일요일 밤에’는 개그맨 MC가 전면에 나서면서 코미디의 흐름을 이끌었다. 이홍렬, 심형래, 이경규, 이경실, 이성미, 김미화, 최양락, 이봉원 등 대학 무대나 라디오 등에서 활약하던 개그맨들은 순발력 있는 상황 반전과 허를 찌르는 지적이고 참신한 토크 코미디로 웃음을 선사하며 스마일 메이커로 떠올랐다. 서민스럽고 친밀한 분위기의 이홍렬, 깔끔한 재치와 능수능란 말발의 이성미, 평범을 비범으로 전환시킬 줄 아는 이경규, 과장조차 어색하지 않는 이경실, 서민들의 캐릭터를 희화화의 주요 소재로 활용한 김미화, 어눌한 말투를 코미디의 무기로 활용한 최양락, 바보흉내로 배삼룡의 뒤를 이은 심형해 등은 각자의 독창성으로 다른 빛깔의 웃음을 시청자에게 전달했다. 

고도성장의 과실을 먹고 영상의 세례를 받으며 자란 10대들이 대중문화의 주요한 소비층으로 떠오른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중문화는 변화의 급물살을 탄다. 기성세대와 차별화한 감각적이면서도 즉흥적인 10대들은 윤리성과 합리성, 그리고 일관성이라는 틀에 얽매이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자는 가치관을 생활 속에 드러냈다. 이러한 10대들은 댄스가요와 트렌디 드라마에 환호했다. 또한 코미디의 소비양태도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코미디는 전통 코미디의 퇴장과 함께 시트콤, 스탠팅 개그 등 다양한 형태의 코미디가 선을 보였고 웃음의 전령사는 김국진, 남희석, 이휘재, 김용만, 서경석,신동엽, 유재석, 박수홍, 조혜련, 김효진 등 개그맨 콘테스트 등을 통해 입문한 대학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일요일 일요일 밤에’ ‘오늘은 좋은날’ ‘테마게임’ ‘칭찬합시다’ 등을 통해 때로는 공익성을 재미와 버무리고 때로는 감동과 유머를 혼합하는 지적 세련됨으로 포장한 웃음을 선사했다. 왜소한 체구, 선량한 이미지로 소시민 전형으로 떠 오른 한국판 채리 채플린이라는 김국진, 반문법적인 것으로 문법적인 언어를 능멸한 신동엽, 애드리브(즉흥대사)보다는 연기력이 돋보이는 김효진 등은 신세대 스마일 메이커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분명 코미디의 대세는 감동대신 감각에 호소해 일회성 웃음을 유발하는 즉흥적인 대사나 개인기에 의존하는 것으로 변해갔다. 이는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또 다른 얼굴인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요구한 무한경쟁, 신념과 이념보다는 감각을 쫓는 세태, 유교문화의 또 다른 변종인 폼생폼사가 현실을 지배하는 상황의 결과물일 수 있다. 복잡함보다는 단순함을, 정신보다는 육체를, 감동보다는 감각을 좋아하는 대중문화의 소구층에게 무식하게 까지 보이는 단순함과 감각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천생연분’의 강호동과 윤정수, ‘목표 달성 토요일’의 유재석, ‘개그콘서트’의 심현섭, 박준형 등은 분명 스타 개그맨으로 우뚝 섰다. 

그리고 최근들어서는 사회적 가치가 상실되는 대신 개인적 가치가 중요해지고 엽기에서부터 복고까지 대중문화 코드가 다양해지면서 대중에게 하나 컨셉으로 강인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개그맨들이 대중의 시선을 잡았다. ‘개그콘서트’의 복고버전의 류세윤, 바보버전의 안상태, 느끼버전의 리마리오 등이 10~20대의 시선을 잡는 스타 개그맨들이다. 

이들이 있었기에 오랫동안 우리는 웃을 수 있었다. 이들은 백치로, 바보로, 겁쟁이로, 허풍선이로 시시각각 문양을 변화시키며 미(美)와 같은 강력하고 심원한 웃음을 선사했다. 오늘 밤 어떤 웃음의 광대가 나와 나를 웃길 지, 대중에게 사랑받기위해 웃음을 선사할 지가 궁금해진다.

[구봉서와 배삼룡, 심형래, 김국진, 리마리오(윗쪽부터)=MBC , KBS, SBS제공]

(배국남 대중문화전문기자 knbae@mydaily.co.kr)

40여년 영화 외길…1세대 액션스타

장동휘씨 타계 이모저모

`돌아오지 않는 해병`등 선굵은 연기로 50~60년대 스크린 풍미


"너네들 다 보내고 내가 갈게." 

2일 향년 85세로 작고한 원로 영화배우 장동휘씨는 최근 故 황해씨의 부음을 듣고 병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인의 2남 2년 중 차남인 재환씨(44ㆍ음악인)는 "김진규, 허장강, 독고성, 황해씨 등 같이 활동하셨던 동료배우들이 돌아가실 때마다 조금씨 약해지셨다"며 "눈을 감으시기 전까지 무모한 줄 아시면서도 영화 제작의 꿈을 꾸셨던 영화인"이라고 회고했다.

한국영화의 액션스타 1세대로 선굵은 연기를 보여주며 50~60년대 스크린을 풍미한 장동휘씨는 2일 오후 9시쯤 청주 자택 인근의 참사랑병원에서 고관절 골절로 인한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유족들에 따르면 장동휘씨는 4년전까지도 "계단을 뛰어서 오르내릴만큼" 건강했으나 2001년 넘어지는 사고로 고관절 부상을 한 후 잇단 합병증으로 병석에 누웠다. 유족들이 기억하는 생전의 장씨는 "영화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범접하기 어려운 카리스마"로 넘쳤으며 "끝까지 TV출연을 거부해 한때 영화인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할 정도로" 마지막까지 순수한 열정을 지켰던 진정한 영화인이었다.

고인은 1936년 고교졸업 후 1939년 악극단 `콜롬비아`로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6ㆍ25에 참전, 예술단으로 국군위문활동을 벌이며 장병들 사이에서 이름을 알리기도 했던 장씨는 1957년 30대 후반의 나이로 다소 늦게 영화 `아리랑`에 출연하며 은막에 데뷔했다. 이후 1963년작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 조용한 카리스마의 소대장 역으로 큰 인기를 누리는 등 `두만강아 잘 있거라` ,`돌아오지 않는 해병`, `창공에 산다`, `오인의 사형수`, `특공대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 등에 출연하며 50~70년대 후반까지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액션스타로 각광을 받았다. 1994년 `만무방`과 1995년 `엄마와 별과 말미잘`을 마지막으로 은퇴했으며 이후에는 참전예술인협회 등에서 활동하며 원로 영화배우들과 교분을 나눴다.

차남 재환씨에 따르면 1966년 `월남맹호작전` 촬영차 베트남에 다녀온 사이 고인의 영화사인 동인필름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영화인으로서 최대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1971년 제10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대전장`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대종상 남우조연상ㆍ영예로운 배우상, 백마상 남우조연상, 아태영화제 남우주연상, 유공영화인 공로상, 춘사영화상 남우주연상 등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 기록도 갖고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인 조원희씨(77)와 호선(52), 봉옥(49), 신환(47ㆍ애니메이션 감독), 재환씨(44ㆍ음악인) 등 2남2녀가 있다. 빈소는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15호실에 마련됐다.

이형석기자(suk@heraldm.com) 

"건달이면서도 의리파 신사였다" 변장호감독등 추도물결

"영화뿐 아니라 인격적으도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 

장동휘 씨와`비내리는 명동거리``명동의 왕과박``명동삼국지``명동 잔혹사`등 액션영화 20편을 함께 제작한 변장호(65) 감독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 액션배우의 삶을 회고하며 명복을 빌었다.

변 감독은"고인은 건달이면서도 신사였다"면서"인천에서 유명한 장사였던 그는 서 있는 자리에서 발차기를 하면 사람 머리 위를지날 정도로 내공이 강했다"고 말했다. 또 그는"배우 장동휘는 영화속과 실제 삶이 똑같았다"면서"성인(聖人)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지나치지 않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지난 69년 TV가 등장해 영화계가 위기에 처했을때도 영화를 떠나지 않고 현장을 지켰으며 부도가 난 영화사의 영화에 무료로 출연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변 감독은"고인은 동료 대신 빚을 떠안고 대신 20년간 갚았을 정도로 의리파였다. 영화사가 어려움에 처하면 출연료를 받지 않기로 유명했다"고 말했다.

또 고인은 배우로서 철저한 관리를 해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변감독은"고 장동휘 씨는 배우라면 대중들에게 신비감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그만의 원칙을 갖고 있었다"면서"나이트클럽 출연 자제및 대중탕을 가지 않은 사건은당시에 크게 회자됐던 일화"라고밝혔다. 그는 이어"특히 악극단 출신으로 노래를 잘하는 고인에게 나이트 클럽 업주들은 거액을 싸들고 유혹했지만 그는 흔들림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장동휘씨에게 아태영화제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안겨준`만무방`을 제작했던 변 감독은"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도 한번도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면서"병원에 입원해 거동이 불편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 여유를 보였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영화`돌아오지 않는 해병`등무려 100여편에서 장동휘 씨와호흡을 맞췄던 원로 영화배우 이해룡(70) 씨는 고인에 대해"전후 영화계의 가장 어른이자 대부"라며"평생 배우의 길만 걸어오셨으며 제작자들의 횡포에 맞서 배우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장치를 만드는 등 한국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기신 분"이라고 말했다.

이 씨는"60년대에 이만희 감독과 장동휘, 최무룡, 이대엽, 구봉서, 독고성 등`돌아오지 않는해병`의 감독ㆍ배우를 중심으로작품이 만들어져 이들을 멤버로한 17클럽이 있었다"며"한국 영화의 스타시스템을 만든 첫 주역 이기도 하다"고 회고했다.악극단부터 그와 동고동락했던 구봉서(79) 씨는"시원스러운 성격을 가졌으면서도 후배를 아끼는 보스기질이 강한 인물"이라면서"술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후배들에게 술인심 만큼은 강할 정도로 멋진 분"이라고 평가했다.

윤경철 기자ㆍ이형석 기자(anycall@heraldm.com)

주말 터치] 안방에 웃음꽃 코미디 42년

"김 수한무 거북이와…"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지구를 떠나거라~"

한국 방송 코미디는 1964년 TBC(동양방송) TV를 통해 첫 전파를 타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본격적인 ‘코미디 시대’를 연 것은 1969년 MBC의 <웃으면 복이 와요>. <웃으면…>은 악극단에서 이름을 날리던 구봉서 서영춘 배삼룡 등을 영입, 전국을 웃음 바다로 몰아넣었다.

“김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라는 전설적 유행어를 만든 구봉서는 정극 바탕의 상황 연기로, ‘비실비실’배삼룡은 ‘개다리 춤’같은 슬랩스틱 코미디로, 서영춘은 “시골영감 처음 타는 기차 놀이라~”로 시작하는 <서울구경>을 부르며 70년대 트로이카 시대를 구축했다. 70년대 후반에는 ‘코미디의 황제’ 이주일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는 MBC <일요일 밤의 대행진>, TBC <토요일, 전원출발> 등을 무대로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등 유행어를 쏟아내며 악극단 코미디의 정수를 선보였다.

80년대 코미디계는 대변혁을 맞는다. 고영수 전유성 송영길 등이 재치 있는 말솜씨와 촌철살인의 애드리브로 슬랩스틱과 콩트 위주의 기존 코미디계를 뒤집으며 개그 시대를 연다.

82년 시작된 KBS 개그맨 공채는 김한국 이봉원 김미화 등을 배출하며 개그 전성기를 일궜다. 이들이 활약한 <쇼! 비디오 자키> <유머1번지>는 90년대 초반까지 안방극장을 장악했다. 김형곤 김병조가 “잘 돼야 될 텐데” “지구를 떠나거라~”라는 유행어를 구사하며 재벌과 정치인을 소재로 한 시사풍자 개그를 개척한 것도 이때다. ‘영구’ 심형래와 ‘맹구’ 이창훈은 바보 연기로 슬랩스틱의 명맥을 이어갔다.

90년대 초반부터는 개그맨이 MC를 겸하는 버라이어티 쇼 형식의 코미디가 날개를 단다. 김용만 김국진 주병진 이경규 등이 대표적이다. 99년 문을 연 KBS <개그콘서트>는 스탠딩 코미디 시대를 열었다. “방바야~”로 유명한 심현섭은 ‘개인기 코미디’의 물꼬를 텄다. 2003년 등장한 SBS <웃찾사>는 극단적 언어유희와 황당한 설정, 춤을 결합한 신종 코미디로 스탠딩 코미디의 영역을 넓혔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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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을 기리며]하늘로 간 ''영원한 열일곱 살''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로 유명한 원로가수 신카나리아(본명 신경녀)씨가 24일 오전 경기도 안산시 예술인아파트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고인은 함경남도 원산 루시여고 재학 중인 1928년 ‘뻐꾹새’로 데뷔한 후 콜롬비아 레코드 전속으로 활동했으며 가요계에서는 처음으로 예명을 쓴 국내 1세대 여가수다. 특유의 꾀꼬리 같은 간드러진 목소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는 1940년대 악극단 전속 가수로 활동하며 당시 고 이난영·황금심 등과 함께 많은 인기를 누렸다. 

1980년대까지 활발한 활동을 보이며 대중가요계 발전에 애써온 그는 1998년 문화포장을 비롯해 제22회 가수의 날 공로대상, 제4회 대한민국연예발전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또 한국무대예술원 중앙위원, 가수협회 부회장, 원로연예인상록회 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그는 2002년 4월 가수 현인씨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그 해 10월 가요무대 800회 특집 때 잠시 모습을 내비치기도 했다. 함경남도 원산 출생인 고인은 ‘삼천리강산 애라 좋구나’ ‘노들강변(변주곡)’ ‘베니스의 노래’ ‘애수의 부르스’ ‘동백꽃’ ‘꽃이 피면’ ‘그리운 내고향’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유족으로는 외동딸 이혜정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에 마련됐으며 26일 오전 9시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장으로 영결식이 치러친다. (02)2072-2011 

추영준 기자 

생큐 배삼룡, 굿바이 보릿자루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171> = 1974년 배삼룡의 인기는 김창숙 이미자 차인태 급이었다. 76년에는 박노식 고은아 김세레나 하춘화 만큼 돈을 벌었다. 

서영춘 이기동 구봉서와 배삼룡이 종횡무진하는 일요일 초저녁의 MBC TV ‘웃으면 복이와요’를 못 보면 다음날 친구들의 대화에 낄 수 없었다. 만화가 길창덕의 ‘꺼벙이’와 더불어 배삼룡은 어린이들을 명랑하게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배삼룡은 CF스타이기도 했다. ‘산에 가야 범을 잡고 먹어봐야 맛을 알지, 시락면’, ‘유니버설 전자밥통, 유니버설 보온도시락’을 광고했다. 이 물건들은 꽤 잘 팔렸다. 하지만 직접 벌인 ‘삼룡 사와’ 요구르트 사업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실패했다. 대성공이었다면, 시청자의 즐거운 시간은 짧아지고 말았을 것이다. 

슬랙스틱 코미디의 교과서인 배삼룡은 바보처럼 보이려 애쓴 프로페셔널이다. 대통령 노무현, 추기경 김수환 등 자타칭 바보들과 일정한 교집합을 이룬다. 이미 55년부터 악극단의 사회자로 활약했다는 사실이 방증이다. 비실거리다 넘어지는 MC는 없다. 혀 대신 몸을 택했을 뿐 배삼룡은 개그맨이기도 한 셈이다. 

체력소모가 큰 연기 스타일 때문인지 그의 취미는 정적이었다. 꽃가꾸기를 좋아했다. 일찌감치 전원주택에서 화초를 돌보며 살았다.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은 상당부분 배삼룡 덕분에 널리 알려진 곳이다.

고인은 개그맨들의 롤모델일 수 있다. 아동드라마, 요즘의 시트콤인 시추에이션 홈코미디드라마에 처음 캐스팅된 코미디언이 배삼룡이다. 

방심하는 여자들에게 인기라는 사실도 닮았다. 웃기는 남자를 싫어하는 여자는 별로 없다. 미녀와 결혼하는 개그맨이 흔한 이유다. 진작 배삼룡이 닦아놓은 길이다. 배삼룡의 여성편력은 아주 화려했다고 전해진다. 

‘영구’ 심형래 출현 전까지 ‘바보’는 ‘삼룡’과 동의어였다. 배삼룡은 당대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그렇게 군림했다. 걸출한 바보가 안 보인다. 심형래는 영화제작자가 됐다. 이창훈, 오재미도 TV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코미디는 크게 다섯 가지다. 말장난, 바보짓, 자학, 흉내내기다. 상황 반전을 통한 웃음은 국내 코미디 여건상 기대난망이다. TV 개그 프로그램의 각 코너가 대개 허겁지겁 용두사미라는 점이 이를 입증한다. 코미디가 콩트라면, 개그는 직소퍼즐 끼워맞추기다. 콩트에는 고정배역이 필수이지만, 퍼즐 한 조각은 빠져도 대세에 지장이 없다. 대강의 그림을 알아볼 수 있다. 개그맨 방송 수명이 하루살이처럼 돼버린 원인이다. 

78년 언론학자 최정호는 배삼룡을 ‘영원한 지진아’로 정의했다. “도시화 돼가는 한국의 촌뜨기, 공업화 돼가는 세상의 농사꾼, 서구화 돼가는 서울의 바지저고리, 근대화 돼가는 한국의 모든 대목에 항상 뒤처진 낙오자….” 

비난이 아니다. “배삼룡의 촌스러움, 바보스러움은 누구나 다소간은 간직하고 있는 보편적인 한국인의 분신이요, 아니 인간 일반의 분신이요, 바로 사람스러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계급·계층 고착화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유효한 분석이다. 개그맨이라면 ‘바보’를 노려봄직하다. 유행과 무관하게 무대가 보장되는 재주다. 단, 실제로는 바보가 아니라는 느낌을 언뜻이라도 내비치지 않는 내공이 요구된다.

문화부장 reap@newsis.comKBS '가요무대', 조선악극단 활동 동영상 첫 공개

영친왕궁 공연 등 희귀자료

1943년 도쿄 영친왕궁에서 영친왕, 영친왕비가 조선악극단 단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KBS 제공
‘조선악극단’의 일제강점기 당시 모습을 담은 동영상과 사진 등 희귀자료가 KBS1 ‘가요무대’를 통해 최초 공개된다.

25일 KBS에 따르면, 이번에 공개되는 동영상은 1939년 일본에서 촬영된 것이고 사진은 1943년 도쿄 영친왕궁에서 영친왕, 영친왕비가 조선악극단 단원들이 함께 찍은 것이다. 당시 영친왕궁 공연에서는 조선악극단 단원인 김정구가 ‘낙화삼천’을 부를 때 영친왕이 나라 잃은 설움에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날 ‘가요무대’는 당시의 애잔한 분위기를 되살리고,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충남 천안시 병천면 주민과 사할린에서 귀국해 정착한 동포들을 초청해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의 마음을 달랜 노래를 전한다.

3월1일 밤 10시부터 90분 동안 방송된다. 

박노식, 어린이까지 좋아했던 단골 마초영웅

[형석-성철의 에로&마초]

[머니투데이 스타뉴스 주성철 ]

"니가 가라 하와이" "내가 니 시다바리가" 등 곽경택 감독의 '친구'(2001)가 남긴 언어적 인상은 컸다. 거칠고 짧고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가 이후 '조폭영화'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실 오래전 조폭들의 언어는 대부분 전라도 사투리였다. 그 중심에는 바로 '팔도사나이'(1969)의 전라도 출신 '용팔이' 박노식이 있다. 알다시피 배우 박준규의 아버지이기도 한 박노식은 한국영화사를 통틀어 대표적인 '쾌남' 중 하나다.

'팔도사나이' 이후 그의 별명이 된 용팔이는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와 더불어 검은 장갑의 호쾌한 액션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물론 그는 시대를 풍미했던 또 다른 액션 스타들인 이덕화의 아버지 이예춘, 허준호의 아버지 허장강, 그 외 장동휘, 신영균, 장혁의 다음 세대지만 마도로스 박이니 상하이 박, 혹은 용팔이라는 구체적인 캐릭터로 기억된 배우라는 점에서 좀 더 남다른 친근감이 있는 배우였다.

물론 그 친근감에는 전라도 사투리라는 끈끈한 언어적 매개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실제 전남 순천 출신인 그가 용팔이로 등장하면서 그 전라도 사투리는 한때 '친구' 이후 분위기만큼이나 당시 꼬마 팬들이 무던히도 따라하던 생활언어가 됐다.

용팔이 이전에도 박노식은 액션영화의 단골 마초영웅이었다. 6.25 전쟁 후 악극단에서 가수 및 연기 활동을 했던 그는 '격퇴'(1956)로 데뷔하게 된다. 이후 '다이얼 112를 돌려라'(1962), '이대로 죽을 수 없다'(1964), '마도로스 박'(1964), '배반자 상하이 박'(1965) 등 제목만으로도 박력이 느껴지는 일련의 액션영화들에서 그는 호기심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에 능글능글하면서도 의리로 똘똘 뭉친, 그래서 행여 배신을 하더라도 바로 마음을 고쳐먹는 영웅으로 등장했다. 종종 일제치하 불굴의 독립군으로 출연하던 시기도 이 즈음이었다.

인기에 힘입어 1960년대 이후 거의 집밖으로만 돌며 1년에 10편 넘게 영화를 찍는 일도 부지기수였으니 '초등학생이던 아들(박준규)이 어느 날 일어나보니 까까머리 중학생이 돼있더라'는 얘기도 그리 놀랄만한 에피소드가 아니다. 용팔이가 인기를 끌면서 '돌아온 팔도사나이'(1969)도 바로 만들어졌고 '남대문 출신 용팔이'(1970), '역전 출신 용팔이'(1970) 같은 아류작도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용팔이 뿐만 아니라 제목에 '명동'이나 '홍콩', '상하이'가 들어가는 어지간한 영화들도 꼭 그를 거쳐 갔다.

박노식의 인기에는 묘한 데가 있다. 물론 그는 30대 때부터 인기 스타였지만 1930년생인 그가 용팔이 캐릭터로 인기를 끌었던 것은 거의 마흔 살이 된 다음부터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악역을 도맡아했던 개성 넘치는 선배 허장강처럼 유독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한국영화사의 원조 마초라고 할 수 있는 장동휘나 신영균이 고뇌하는 영웅들이었던 데 반해 그는 수시로 '아 긍게(그러니까)' '어이쿠야' '옴마야' '어쩌코롬해야 쓸까잉' '요놈 좀 보소'를 즐거이 내뱉으며 몸 개그를 아끼지 않던 웃기고 빈틈 많은 '아저씨'였기 때문이다.

박노식이 실제 아들 박준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고 말하는 영양제 CF가 장안의 화제였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물론 데뷔 전 악극단 활동 이력에서 보듯 그가 액션 스타이면서도 풍류에 능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그런 이미지에 크게 한몫했다.

액션영화에만 '올인'했던 그는 이후 감독을 겸업하게 된다. '인간 사표를 써라'(1971), '작크를 채워라'(1972), '방범대원 용팔이'(1976),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1976) 등 역시 제목만으로도 그 분위기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물론 이 영화들은 이제 희귀한 비디오테이프가 되어 세상을 떠돌고 있을 뿐이지만 박노식 특유의 땀 냄새 진한 액션과 구수한 대사들이 뒤엉킨 독특한 매력을 풍긴다.

현재 류승완 감독이 만들고 있는 장편(물론 제목만 차용한 것이겠지만) '다찌마와리-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가 여름쯤 개봉할 예정이라니 그때쯤 다시 그의 얼굴을 떠올려볼지도 모르겠다. <주성철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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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전성시대>세대를 넘나들며 사랑받는 대중예술


<뮤지컬전성시대>세대를 넘나들며 사랑받는 대중예술

【서울=뉴시스】

바야흐로 뮤지컬의 시대다. 어디를 가든 ‘뮤지컬’ 얘기가 오간다. 공연계에서 무대에 올리는 작품의 태반이 뮤지컬이다. 한 번이라도 뮤지컬을 접하지 않은 사람은 문화와 관련한 대화에 쉽게 끼지 못할 정도다. 

뮤지컬 시장은 최근 들어 빠른 성장을 이룩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이미 지난해 뮤지컬 산업을 ‘신산업’으로 규정, 보고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렇듯 급격히 발전을 거듭해온 한국 뮤지컬의 역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는가.

우리나라에서 뮤지컬은 예로부터 그리 낮설지 않은 장르로 여겨져 왔다. 근대에 가장 사랑받았던 음악극인 창극도 뮤지컬 장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리꾼과 고수가 나와 북 장단에 맞춰 노래와 연기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판소리를 보면 뮤지컬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지 대번에 느낄 수 있다. 

비록 현대로 들어오면서 창극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졌지만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등장한 가극 혹은 악극, 1940년대에 가장 많은 인기를 구가한 동양극장의 배구자악극단 등은 가무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본격적으로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나타난 때는 1960년대다. 1961년 창단된 예그린악단(이후 국립가무단-서울시립가무단-서울시립뮤지컬단으로 개명)이 대표적이다. 

예그린 악단의 뮤지컬 첫 시도작은 ‘삼천만의 대향연’이다. 이 작품은 연극에 음악을 접목시킨 형태로 무대에 올랐다. 이후 이들의 끊임없는 도전은 1966년 ‘살짜기 옵서예’로 거듭난다. 이 작품은 현대적인 뮤지컬 양식을 그대로 수용했다. 관객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물론, 공연 이후 패티김 등 수많은 가수들이 해당 뮤지컬 넘버를 부르는 등 음반 제작으로까지 이어졌다. 

이후 예그린악단은 ‘대춘향전’(1968), ‘시집가는날’(1974), ‘상록수’(1975), ‘이런 사람’(1977) 등 국립가무단이라는 이름으로 국립극장, 서울시립가무단이라는 이름으로 세종문화회관에 편입되기까지 20여편에 달하는 뮤지컬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다.

민간 단체에서 제작한 뮤지컬은 1966년 유치진의 동랑레퍼토리극단이 단발적으로 ‘포기와 베스’를 공연한 것이 처음이다. 원로연기자로 활약 중인 신구 등이 당시 배우로 참여했다. 1973년에는 극단 가교가 ‘판타스틱스’를 ‘철부지들’이라고 개명, 국내 뮤지컬 사상 가장 많은 공연기록을 가진 작품 중 하나로 만들기도 했다. 

극단 현대극장은 1977년 대형 뮤지컬인 ‘빠담빠담빠담’을 시작으로 민간 극단임에도 지속적인 상업작품을 선보였다. ‘빠담빠담빠담’은 프랑스 샹송가수인 에디트 피아프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으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윤복희가 주인공으로 등장, 상업극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대성공을 거뒀다. 이는 현재까지 꾸준한 시도가 계속되고 있는 가수들의 뮤지컬 진출과도 이어진다.

이후 현대극장은 ‘수퍼스타 예수 그리스도’(1979·현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사운드 오브 뮤직’(1981), ‘에비타’(1981), ‘올리버’(1983), ‘웨스트사이드스토리’(1987), ‘레미제라블’(1988) 등 브로드웨이 번안극을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이 밖에도 극단 민예는 탈춤, 판소리 등을 현대 연극으로 계승하려는 시도(‘물도리동’, ‘한네의 승천’)를 계속해 왔고, 현 극단 학전의 대표인 김민기가 노동자들의 이야기에 다양한 음악과 탈춤을 접목시켜 ‘공장의 불빛’(1978)을 만드는 등 획기적인 시도는 계속됐다. 

1980년대는 뮤지컬의 본격적인 대중화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서울올림픽을 겨냥해 만들어진 88서울예술단(현 서울예술단)은 ‘한강은 흐른다’(1987), ‘백두산 신곡’(1990) 등 꾸준한 창작뮤지컬로 관객들의 발길을 극장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현대극장 역시 1980년대 중반까지 계속적으로 대형뮤지컬들을 무대에 올렸다. 극단 민중 대중 광장 등 세 극단은 1983년 ‘아가씨와 건달들’을 합동으로 공연해 뮤지컬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아가씨와 건달들’은 당시 초연 이후 1997년까지 13년 동안 한해 200만명의 관객이 극장을 찾는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본 외국 뮤지컬이 됐다. 

‘아가씨와 건달들’로 짜릿한 성공을 맛본 세 극단은 1984년 ‘캬바레’를 시작으로 ‘쉘부르의 우산’(1989), ‘캐츠’(1990 현 ‘캣츠’), ‘넌센스’(1991), ‘피핀’(1987), ‘코러스라인’(1992), ‘레미제라블’(1993) 등 숱한 해외작품들을 공연했다. 

하지만 1980년대에는 원작의 라이선스를 취득한 작품이 아닌 ‘불법 복제’가 대부분이었다. 이처럼 무분별한 복제물들로 인해 관객들의 관심이 창작뮤지컬이 아닌 해외뮤지컬로 쏠리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당시 창작뮤지컬은 턱없이 부족한 인프라 덕에 제작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1990년대 들어 본격적인 뮤지컬 붐이 일었다. 88서울예술단은 ‘뜬쇠가 되어 돌아오다’(1993), ‘아틀란티스 2045’(1995), ‘애랑과 배비장’(1996 ‘살짜기 옵서예’ 리메이크) 등 창작뮤지컬들을 공연했다. 롯데월드 예술극장도 ‘신비의 거울속으로’(1989), ‘가스펠’(1990), ‘아가씨와 건달들’(1990), ‘웨스트사이드스토리’(1991), ‘레미제라블’(1993) 등 번역 뮤지컬을 꾸준히 선보였다. 

이 시기에는 불법 복제가 아닌 정식 라이선스 수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삼성영상사업단이 수입한 ‘브로드웨이 42번가’는 외국의 스태프들이 제작하고 주연배우들만 한국 배우들을 기용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런 제작 방식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외국 작품을 벤치마킹한 창작물들도 다수 시도된다. 극단 맥토의 ‘동숭동 연가’, ‘번데기’ 등과 서울예술단의 극 ‘바리-잊혀진 자장가’, 극단 모시는사람들의 ‘블루 사이공’이 대표적이다. 

뮤지컬의 대중화에 따라 뮤지컬 전문극단도 생겨났다. 에이콤은 ‘아가씨와 건달들’, ‘스타가 될거야’, ‘겨울 나그네’ 등을 비롯, 얼마 전 100만 관객을 돌파한 창작뮤지컬 ‘명성황후’로 국내 뮤지컬의 주축이 됐다. 

이 밖에도 ‘웨스트사이드스토리’ ‘그리스’ ‘7인의 신부’ 등 번역극을 주로 제작한 신시뮤지컬컴퍼니, ‘사랑을 비를 타고’ ‘쇼 코메디’ 등 창작극 중심의 서울뮤지컬컴퍼니, 외국뮤지컬을 한국에 맞게 각색한 ‘지하철 1호선’ ‘모스키토’ 등의 김민가 이끄는 극단 학전 등은 현재까지 수많은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1990년대 말에 들어서는 PMC프로덕션의 ‘난타’를 필두로 넌버벌 퍼포먼스(비언어극)에 대한 관심이 새로이 대두된다. ‘난타’의 성공은 이후 ‘도깨비 스톰’, ‘점프’ 등으로 이어지며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초대되는 등 창작물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21세기에는 ‘뮤지컬의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뮤지컬 산업이 급팽창했다. 1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제작비와 7개월간 흥행 돌풍을 이끈 ‘오페라의 유령’을 시작으로 중장년층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은 ‘맘마미아’, 프랑스 뮤지컬 마니아를 탄생시킨 ‘노트르담 드 파리’ 등의 성공은 해외 뮤지컬의 국내 유입 속도를 가속화 했다. 

2001년 브로드웨이 초연작인 ‘아이다’(2005), ‘프로듀서스’(2006)도 비교적 빠르게 국내에서 공연됐지만 2005년 작인 ‘스펠링비(2007)’와 ‘올슉업’(2007), 2006년 작인 ‘알타보이즈’(2006)년 등은 불과 1~2년 차로 국내에 공개됐다. 

뮤지컬의 잠재적 성공가능성을 눈여겨 본 CJ 등 대기업들도 탄탄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대형 해외뮤지컬을 중심으로 뮤지컬계에 손을 뻗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뮤지컬 붐 속에서도 창작뮤지컬의 설 자리는 여전히 좁은 것이 현실이다. 대형뮤지컬에 비해 브랜드와 관객동원력이 떨어진다는 상업주의적 접근으로 인해 창작뮤지컬은 대작에 밀려 작은 규모의 공연장에서 한시적인 공연을 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관련사진 있음>

이승영기자 sylee@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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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원로가수 황금심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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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1세대 여가수로 ‘꾀꼬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원로가수 황금심이 2001년 7월 30일 서울 자택에서 파킨슨병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한국 가요 초창기인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인기를 누렸던 가요사의 큰 별이었다.

1922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난 그녀는 13세 때 ‘외로운 가로등’으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동네에서 울려퍼지는 노래 소리를 들은 레코드 판매원의 소개로 판을 낸 것. 1938년 그녀의 최고 히트곡 ‘알뜰한 당신’을 발표해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남자에 대한 여자의 애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8세 때 '타향살이'를 불렀던 당대 최고 가수 고복수와 결혼해 스타 커플로 다시 화제를 모았다. 만주·사할린섬 등으로 위문공연을 다니며 나라 잃은 동포들의 애환을 달랬고, 한국전쟁 때에는 남편과 함께 위문단을 결성해 공연을 다녔다.

그녀는 조선악극단과 백조악극단 등에서 활동했고, 히트곡 ‘삼다도 소식’ ‘뽕따러 가세’ ‘장희빈’ 등을 비롯해 4천여곡을 발표했다. 1992년 대중문화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898년 독일 정치인 비스마르크 사망 ▶1952년 국제적십자사, 세균전쟁금지협약 가결

정보관리부 성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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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8/09/22 00:00:00  김다인 
 

김지영 "'연기 잘하는 분' 이 말이 대상보다 행복해"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배우 김지영의 '장밋빛 인생'

결코 미워할 수 없는 푼수, ‘장밋빛 인생’의 미스 봉. 거침없는 입담으로 큰 웃음을 준 ‘마파도2’의 욕쟁이 할머니 ‘영광댁’, 또,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선 딸을 죽인 살인범을 눈물로 용서하는 가난한 어머니로, 늘 다양하고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연기자 김지영 씨. 

그녀는 18살에 연극배우로 데뷔해, 지금까지 200편 이상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으로 활동해 왔죠. 2005년에는 ‘장밋빛 인생’의 ‘미스봉’역으로 한국방송 연기대상에서 여우조연상 이라는 생애 처음으로 큰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김지영 씨의 치열하고 실감나는 연기 속에는 그동안 힘겹게 살아온 그녀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데요. 최근 김지영 씨는 힘들었던 인생과 신앙 이야기를 담은 ‘장밋빛 인생’이란 책을 내셨는데요.

50년 넘게 진정한 연기자의 길을 걸어온 배우 김지영 씨를 1월 24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연기가 천직’인 연기 인생 50년

▶ 연기 인생 50년이신데 요즘이 전성기이신 것 같아요?

바쁠 때는 왜 이렇게 힘드냐면서 투덜거리기도 해요. 방송에 출연하기 전에 영화에서 단역을 할 때도 저는 쉬는 날이 없었어요. 

▶ 연기를 하시게 된 계기는 뭔가요?

영화배우 김희라 씨의 아버님인 김승호 선생님이 저희 아버님 보고 형님, 형님 하면서 자주 놀러오셨었어요. 그 외에도 강계식 선생님과 여러 분들이 오셔서 같이 술 드시고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죠. 그런데 6.26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엄마 밑에서 자랐는데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새엄마가 못살게 군 건 아니었고 제가 힘들었던 거예요. 

해방 전부터 아버지가 새엄마와 함께 사셨고 어머니가 저희들을 데리고 따로 살고 계셨어요. 그러다가 피난을 가는데 엄마와 함께 저희들만 피난을 갔어요. 전 국민이 다 배고팠던 시절인데,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는 아무 것도 모르는 착하디착한 분이셨어요. 오죽하면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를 보호해야겠다는 보호본능이 생길 정도였어요. 

하지만 결국 어머니는 우리 4남매를 데리고 고생하시다가 영양실조로 돌아가셨죠. 그래서 서울에 올라와서 새엄마를 만나니까 새엄마가 미워서 못 견디겠는 거예요. 아버지도 밉고 세상이 미워서 어린 나이에 사람을 미워하며 살았어요. 어머니만 불쌍하고 고생하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그러다 보니까 사람을 미워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야반도주를 해서 김승호 선생님한테 간 거예요. 당시에는 영화가 성행하지 않을 때지만 연극계에서는 알아주는 분이셨어요. 

▶ 고향이 어디세요?

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 때 판사를 지내셨는데 재판을 할 때마다 한국인들이 다치니까 판사복을 벗으셨는데 이 때문에 일본 사람들한테 밉보여서 재산을 몰수당했어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식구들을 모두 데리고 함경북도 청진 바닷가로 가셨어요. 저는 맏이라 서울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우리 형제들이 태어났죠. 

▶ 김승호 선생님을 찾아갔더니 뭐라고 하시던가요?

깜짝 놀라시면서 막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난 안 간다고, 아저씨가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라고 했죠. 그랬더니 집에 계신 아버지하고 통화를 하셨나 봐요. 아버지는 골칫덩어리가 없어지니까 올타구나 싶으셨겠죠. 자네가 데리고 있으면서 연극이나 가르쳐보라고 하셔서 그때부터 있었던 거예요. 일단 먹여주고 재워는 주니까요. 극단 대중극회라는 곳에 있었는데 연극만 하던 시절이라 악극단이 생긴 건 그 이후였어요. 

▶ 원래 꿈은 뭐였어요?

할아버지가 늘 너는 법관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제 성격이 우둔하고 곧으니까 할아버지께서 법관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고 저도 법관이 돼야 하는 줄 알고 자랐어요. 그러던 게 6.25와 함께 무산이 된 거죠. 

◇ 하루 저녁만 보면 대본 2시간짜리를 다 외울 정도

▶ 생각지도 못한 배우를 하시게 된 건데 고생은 안 하셨어요?

가자마자 마침 그 극단에서 <지옥문>이라는 연극을 했는데 그게 끝나고 바로 새로운 극을 시작할 때라서 연습하면서 쉬고 있더라고요. 새로 들어가는 극본이 <유랑삼천리>인데 제가 초등학교 4학년짜리 역할을 맡아서 데뷔를 했어요. 18살짜리가 초등학교 4학년으로 연기하려니까 반바지에 모자 쓰고 책가방 메고, 그게 무대니까 가능했겠죠. 

제가 지금은 머리가 둔해졌지만 외우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었어요. 하루 저녁만 보면 대본 2시간짜리를 다 외울 정도였거든요. 김승호 선생님도 남의 딸을 오래 데리고 있으면 골치 아프잖아요. 그러니까 다음 날 바로 연습하자고 하시는데 해봐서 안 되면 보내려고 하루 저녁 외우게 하고는 이튿날 연습을 시킨 거예요. 그래서 했더니 모두 놀라서 말을 못해요. 뭐 저런 애가 다 있느냐고. 

저는 저대로 생활이 그러니까 눈물을 흘려가면서 열심히 했어요. 연극계에 물건 하나 났다고 각 단체에서 와서 보고, 그러면서 연극을 하기 시작했어요.

▶ 데뷔 무대를 통해서 배우의 꿈을 본격적으로 꾸게 되신 건가요?

그렇다기보다는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부모님이 계시지만 형제들도 떼어놓고 나왔으니까요. 연극무대에 서니까 밥은 배고프지 않게 먹었는데 대신 월급이 없었죠. 당시에는 월급 받는 배우들이 없었어요. 월급을 왜 안 주느냐고 하면 다음 장소에서 주겠다고 하고, 그러다 보면 1년이 넘어가죠. 그리고 점심 값을 줬는데 그걸 아껴서 화장품 사고 옷 사입고, 김희갑 선생님은 그거 모아서 집도 사셨어요. 

▶ 처음에 연극무대, 영화, 나중에 TV에까지 이어지신 거죠?

순수연극이 안 먹히니까 나중에 음악을 곁들여서 악극을 만들었어요. 뮤지컬의 원조죠. 또 2부에는 쇼가 생기고, 코미디가 나오고 만담이 나왔어요. 그러다가 영화가 나오기 시작했죠.

▶ 그동안 출연하신 작품이 굉장히 많겠어요?

영화, 드라마 다 합해서 200편은 넘을 거 같아요.

▶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어떤 게 있으세요?

임권택 감독님의 <길소뜸>에서 처음 조연을 맡았는데 칭찬을 많이 받은 작품이에요. 김지영씨 하나 건졌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어요. 그리고 역시 임권택 감독님의 <아다다>가 있어요. 드라마에서는 <바람은 불어도>, <장밋빛 인생> 등이 기억에 남아요.

◇ ‘독특한 캐릭터’는 ‘예리한 관찰력’에서 나와

▶ <장밋빛 인생>의 ‘미스 봉’ 역할로 2005년에는 한국방송연기대상 여우조연상을 받으셨어요.

제가 상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어요. 드라마 <장밋빛 인생> 하면서 정말 행복했어요. 너무 작품이 좋아서 행복한 마음으로 했으니까 우리 후배들, 상 받을 때 박수 쳐줘야지 생각하고 옷도 평범하게 입고 참석했는데 처음에는 이름 부르는 소리도 못 들었어요.상 받으러 단상에 올라갔는데 아무 생각도 안 나요. 평소에 나도 상을 타면 하나님, 감사합니다는 말은 꼭 해야지 했는데 다 까먹고 그 소리도 못했어요. 

▶ 각 캐릭터마다 독특한 개성을 불어넣으시는데 어떻게 하시는 거죠?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가 저한테는 연기 선생님이에요. 어디를 가도 사람들을 그냥 보지 않아요. 어디 큰 소리가 나면 가서 귀기울여보고 이런 상황일 때 저런 표정이 나오면서 목소리도 저렇게 나오는구나, 하면서 머릿속에 저장하는 거죠. 어떤 배역이 오면 머릿속 생각을 읽으면 하나가 딱 떠올라요. 이거다, 이걸 접목시키면 딱이네, 이런 식으로요.

▶ 사투리도 영역을 넘나드시던데요.

지금은 모두들 스케줄이 바쁘고 차도 있으니까 끝나면 없어지는데 전에는 촬영이 끝나면 차가 하나니까 같이 오거든요. 다른 사람이 찍을 동안 제가 먼저 끝나면 시장에 돌아다니는데 시골에 가면 가끔 5일장이 걸려요.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데 거기서 물건 흥정하는 것부터 사투리까지 머릿속에 차곡차곡 저장을 해요. 

가는 곳마다 눈여겨봐요. 어떤 때는 대본이 표준어로 나오거든요. 그럴 때 요런 건 강원도 사투리, 저건 전라도 사투리, 이렇게 사투리를 입히죠. 그러면 표준어를 사투리로 대사를 다시 써야 해요. 그렇게 해서 내걸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고 제대로 한 것 같아요. 

▶ ‘미스 봉’은 배역상 미스라는 것 때문에 배역 맡으실 때 더 기분이 좋으셨을 것 같아요.

미스에는 별 관심은 없는데 다른 대본과 달리 단숨에 읽었어요. 너무 재미있고 희망이 생겨서 그렇게 기쁠 수가 없더라고요. 지금 바로 촬영해도 금방 대사를 외울 수 있을 것 같고. 좋은 감독에 좋은 역할에, 심지어 한 신을 찍을 때마다 너무 아쉽고 아까운 거예요. 

▶ 분장이나 헤어는 어떻게 하셨어요?

다른 건 모두 방송국에서 해주는데 <장밋빛 인생> 만큼은 머리를 직접 했어요. 옛날 파마머리 있잖아요. 옷도 캐릭터를 정해놓고 생각하면서 매일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 지하상가까지 다니면서 재미있는 건 골라서 샀어요. 이 작품에 한해서는 액세서리, 소품을 직접 골랐어요. 

◇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틈새시장 ‘푼수’와 ‘사투리’ 

▶ 최근에 <장밋빛 인생>이라는 책도 내셨어요.

고생도 하고 힘들게 살았지만 행복하다고 장밋빛 인생은 아닌 것 같아요. 행복하게 사는 것 자체가 장밋빛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체험을 많이 했는데 문뜩 이런 생각이 들어요. 때때로 하나님이 정말 계신 걸까? 계신다면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하는 걸까? 고민하게 되잖아요. 그럴 때 이런 체험담을 이야기하면 확실히 계시다는 것과 믿음 자체가 달라지지 않을까, 그리고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내게 되었어요. 

▶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찍으실 때 행복하셨겠어요.

그 역할 자체가 작지만 좋은 역할이에요. 하나님 사랑으로 내 자식을 죽인 죄인을 용서한다는 게 보통 생각하기 힘든 일인데 이런 좋은 역할을 나오는 씬이 너무 작아서 아쉬웠죠. 소설에서는 엄마가 용서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도 있고, 이런 갈등이 있는데 영화에는 딱 두 씬이었어요. 

이 씬 안에 용서하고 안 하고를 결정하는데 한 씬은 교도소를 가느냐 안 가느냐로 수녀님과 실랑이를 벌이는 거고, 막상 이 죄수를 용서하는 씬은 교도소에서 다 해야 하는 거예요. 한 씬만 더 있었으면 갈등하는 모습과 용서하는 모습을 충분히 보여주겠는데 딱 한 씬에 다 보여주려고 하니까 너무 힘들어서 감독님한테 너무 힘들다고 했어요.

어쨌든 하기는 했는데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어요. 그런데 시사회 때 갔더니 그 장면부터 사람들이 울더라고요. 내가 조금 표현을 하기는 했구나 싶었죠.(웃음)

▶ 감칠맛 나는 재미있는 역할부터 가슴을 울리는 역할까지, 연기의 폭이 넓으신 것 같아요.

영화에서는 비극을 많이 맡았어요. 가난한 집안의 엄마, 그래서 우는 역할을 많이 했는데 이 방송에서는 내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연구해 보니 사투리와 푼수더라고요. 방송은 아직까지 제대로 된 푼수를 잘 몰라요. 푼수는 코믹이 아니에요. 진짜 제대로 순박해야 하기 때문에 연기를 하려고 하면 안 돼요. 

푼수 짓을 하다가도 쿡 찌르면 바로 눈물이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순수해야 할 수 있어요. 아무도 이걸 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내가 이걸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고 또 하나는 사투리가 약해요. 그래서 푼수와 사투리로 캐릭터를 잡았어요. 

◇ 생활고에 시작한 연기, 옷이 없어 단역만 전전 

▶ 결혼하시고 나서 남편께서 투병생활을 하셨는데 어려움이 많으셨겠어요.

왜 결혼했나 싶을 정도로 아이만 낳았지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결혼하자마자 내 밥은 내가 벌어먹고 살았거든요. 남편은 음악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술을 좋아해서 본인이 번 돈은 술로 없애고 저한테는 돈 주는 게 없었어요. 결혼을 했으니까 그냥 살아야하는가 보다 하고 살았고 배고픈 시절도 겪었죠. 오죽하면 친구가 밥 먹으려고 시집가는데 너는 시집가서 굶냐고 할 정도였어요. 그러니까 없는 살림에도 친구들이 끊이지 않아서 늘 술상 차리라고 하고 고생이 많았어요. 

옷 한 벌 못 얻어 입었는데 남편은 누가 봐도 귀공자로 볼 만큼 차리고 다녔고요. 그러다가 남편이 돈을 좀 버는가 싶더니 집에 안 들어오기 시작해요. 일찍 들어오면 10일, 보름, 한 달 이러더니 몇 개월을 안 와요. 몇 개월에 한 번씩 와서 돈 좀 주고 가면 그걸로 생활하고 아이들하고 살림하고 살았죠. 이때 벌써 아이들이 3명이었어요. 우리 시어머님도 아무리 내 아들이지만 저렇게 신선놀음으로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셨어요. 

어느 날 시장을 가는데 낯익은 사람이 길거리에 앉아있어요. 처음에는 그냥 지나갔는데 다시 와서 보니까 우리 남편이에요. 몸이 아파서 얼굴이 완전히 상해 있더라고요. 그래서 빨리 못 알아본 거죠. 당시에 월세를 제대로 내지 못해서 살림을 줄여서 이사를 왔어요. 그래서 집을 못 찾아서 길거리에 남편이 앉아있었던 거예요. 

남편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양쪽 폐가 나오지 않더라고요. 위는 펑크 나기 일보 직전이고 백혈구가 전혀 없어서 병에 걸리면 바로 죽는대요. 어떻게 치료를 하면 되느냐고 했더니 서울에서는 못한다고 마산 요양소로 가라고, 나으면 다행이고 못 나으면 할 수 없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남편이 입이 까다로워서 병원에 가기 전에 굶어서 죽을 것 같아요. 그래서 집에 모셔놓고 의학서적을 샀어요. 약국 아주머니한테 사정이 이러니까 도와달라고 해서 약을 짓고 고기 몇 그램, 사과 몇 쪽, 이렇게 해서 13년 동안 수발을 했죠. 

▶ 내치시고 싶은 마음은 없으셨어요?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지 내가 왜 힘들까, 나는 이 사람이 밉다 싫다, 이런 생각은 안 했던 거 같아요. 겨를이 없었다고 할까요? 그저 열심히 해서 이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아이가 또 하나 생긴 거예요.(웃음) 그래서 4남매를 뒀죠. 

▶ 월세를 못 내서 이사를 하실 정도였는데 13년 동안 어떻게 생활하셨어요?

연극을 하다가 5.16 나던 해에 연기를 관뒀어요. 아이들만 키우고 살겠다 했는데 남편이 그렇게 되니까 물지게도 져봤고 가내공업도 해봤는데 정 안 돼서 그 월세를 줄여서 지금 아현동 가면 도서관 자리가 있는데 옛날에는 거기가 냇가였거든요. 거기에 각목 4개를 세워놓고 새집처럼 지은 집이 있어요. 그곳을 당시에 싼 가격에 전세를 들어갔죠. 

여름에는 장판을 깔았어도 밑에서 오물냄새가 올라오고 겨울에는 천장에 루핑이라는 걸 깔았는데 춥기가 이루 말할 데 없어서 방안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살아야 했어요. 도저히 안 되겠어서 밥그릇만 빼놓고 살림을 다 팔았어요. 돈 되는 건 다 팔았는데 약값 들고 하니까 6개월도 못가더라고요.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연기생활을 다시 시작했어요. 연극하다가 관두고 영화계로 나간 거죠. 옷이 없어서 조연이 들어와도 단역만 맡아서 했어요. 아낙네 A, B, C 이런 거, 그때는 양장점에서 다 맞춰서 입어야 했거든요. 

◇ 남편의 죽음을 통해 신앙 체험

▶ 신앙과 가까워지신 건 환경 때문이었나요?

그때는 미련하게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둘째 아들이 교회 가자고 하면 나 좀 내버려 두라고, 힘들다고 그랬거든요. 알고 보니까 빨리 갔으면 내가 고생을 덜 했을 텐데.(웃음) 남편이 하늘나라로 가면서부터 체험이 시작되었어요. 남편이 평소에 교회를 안 다녔는데 죽기 전에 그더라고요. 나 교회 나갈란다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좋을 거라고, 앞에 교회가 있으니까 가자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틀 후에 돌아가신 거죠.그날 오랜 시간 촬영하고 있었는데 죽었다고 연락이 왔어요. 남편이 죽은 지 8시간 만에 도착을 했는데 정말 죽어 있는 거예요. 촬영하면서 내내 그때 처음 하나님께 기도를 했어요. 제가 그동안 하나님을 안 믿었는데 죄송하지만 소원을 들어달라고, 저 사람이 안 죽었으면 좋겠지만 데려가셔야 한다면 저를 보고 가게 해달라고요. 

왜 그런가 하면 남편이 술 먹고 들어와서 저와 아이들한테 행패를 많이 부렸는데, 그게 미워서 제가 돌아서서 욕을 많이 했어요. 남편이 죽을 거 같으니까 그런 부분이 마음에서 아프더라고요. 이걸 털어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남편한테 이 마음을 용서받고 싶다고, 보고 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던 거예요. 

펑펑 울다가 문뜩 기도하던 게 생각이 나서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데 감히, 하나님 너무 하지 않으시냐고, 내가 그렇게 기도했는데 우리 아들 말 들으면 모든 피조물은 당신이 지으셨다는데 이렇게 소원을 안 들어주십니까! 그러면서 울었어요. 

그랬더니 잠시 후에 병원이 쩌렁쩌렁 울리는데 ‘남편을 다시 한 번 불러보라’는 음성이 들려요. 그래서 다시 불렀더니 뻣뻣했던 시체가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의사, 간호사 다 도망갔어요. 나중에 의사분이 들어오셔서 이런 기적은 처음 봤다고 말하는데 제가 그때부터 체험이 시작된 거예요. 

▶ 가장 힘든 때는 언제셨어요?

제가 소띠라 미련한가 봐요. 힘들고 배고픈 시절이 많았죠. 남편 약값 대야죠, 아이들이 넷이니까 셋방을 안 주더라고요. 힘들게 얻은 셋방도 주인한테, 애들이 한 번씩 들락날락해도 4명이니까 대문이 4번 닳는다고 애들 내보낼 때 함께 내보내고 들어올 때 한 번에 들여보내라는 구박도 받았어요. 그래서 이를 악물고 집을 사고 싶었어요. 

그때는 문예물을 많이 했는데 서울에서 뛰는 건 생활비와 약값으로 쓰고 문예물을 하는 건 무조건 큰댁에 맡겼어요. 계를 들어달라고. 그 계를 타서 13년 만에 아현동에 집을 샀어요. 그래서 남편이 나음과 동시에 이사를 하면서 집에 문패를 달아줬더니 남편이 감격해서 울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정말 힘들어, 고생해, 죽겠어, 이런 걸 몰랐어요. 배가 고파서 뛰어가서 냉수를 벌컥벌컥 마셔도 그게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미련한가 봐요. 내 몫이려니 하고 살았거든요. 그러다가 양은 냄비 새 걸 하나 사면 쓰지도 않고 장롱 위에 얹어놓고 쳐다보면서 행복해 하고 그랬어요.(웃음) 절망 속의 배고픔은 겪어본 사람만이 압니다. 오히려 이 때가 힘과 용기가 다져진 시기라고 생각해요. 

◇ ‘연기 잘하는 분!’ 그 이상 좋은 게 없어

▶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어딜 나가면 예전에는 배역 이름으로 불렀는데 지금은 “김지영 씨, 연기 잘하는 분” 이 말이 대상받은 것보다 행복해요. 이름을 모르면 “저분, 연기 잘하는 분!” 이래요. 그 이상 좋은 게 없어요. 항상 그런 연기자로 남고 싶고 앞으로 어떤 역할을 맡고 싶으냐고 사람들이 물어보는데 어떤 역이든 주어지는 대로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그래서 후배들한테도 스타가 되려고 하지 말고 연기자가 되라는 말을 해 줘요. 

▶ 앞으로 소망이 있다면요?

제 처음 기도도 그랬지만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자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마지막 순간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숨이 멎기를 바래요.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박길자)

※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

이덕화의 부친, 평생 악역만 한 스타 이예춘
300여편 가운데 악역 아닌 영화는 단 두 편 / 김다인


 



[인터뷰365 김다인] 영화인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영화계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 흔히 이런 말을 쓴다. “얘가 내 16밀리야.”

35밀리(아버지)를 잘 모를 때는 그러므로 16밀리(아들)를 보면 아버지를 상상할 수 있다. 지금 세대들은 50, 60년대 한국영화의 중요한 캐릭터였던 배우 이예춘을 잘 모를 것이다. 그렇다면 중견배우 이덕화를 보면 된다. 그가 고 이예춘 선생의 16밀리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이덕화는 MBC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부친에 대해 회고하며 눈시울을 붉힌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이덕화는 “학교 다닐 때 단체 관람하러 가는 영화가 마침 아버지 출연 영화면 아버지는 가지 말라고 하셨다고 했다”며 그 이유로 “아버지가 영화에서 맡은 역이 탐관오리거나 간신배거나 여자를 때리는 난폭한 남자였기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그 말이 맞다. 배우 이예춘은 한국영화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악역 전문배우였다. 그가 평생 출연했던 영화의 편수는 무려 300편이 넘는데 그 가운데 악역을 맡지 않은 영화는 단 두 편 <나그네 설움>과 <푸른 하늘 은하수>뿐이었다.

지금의 이덕화 모습은 강하기는 하지만 많이 순화(?)된 얼굴이다. 눈을 부릅뜨면 강렬한 캐릭터가 보여 지지만 웃을 때는 장난기도 있고 그래서인지 유머러스한 역도 꽤 많이 하는 편이다. 이십대 때는 임예진 등과 더불어 청춘영화의 주역도 많이 맡았다. 그의 아버지 이예춘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다.

이예춘은 이덕화보다 훨씬 강렬한 인상을 가졌다. 싸늘하게 비웃음을 담아 입술을 찌그러뜨리며 짓는 냉소, 벗겨진 머리에 찢어진 날카로운 눈, 커다란 입을 벌려 잔인하고 호탕하게 웃는 웃음 등은 너무 강렬해서 깡패, 조직의 보스, 악덕사장, 여자를 겁탈하는 악한 등이 단골 역이었다. 그냥 얼굴만 봐도 ‘나쁜 사람’이었는데 거기에 악덕한 연기를 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이예춘은 영화와 인연을 맺기 전 악극단 생활을 했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난 해에 태어나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한 2년 후부터 15년 동안 악극단 생활을 해왔다.



영화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55년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이었다. 카메라 앞에 처음 서는 것이 낯설었던 이예춘은 운수점까지 봐가며 영화와 첫 인연을 맺었다. <피아골>에서 이예춘이 맡은 역은 빨치산 부대의 아가리 부대장. 잔인하고 냉혹하지만 그렇게 된 데는 나름 개인사가 있는 인물이었다.

영화가 성공하는 바람에 이예춘은 영화와의 첫 인연을 성공적으로 맺게 됐고 이후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까지 한국영화의 악당 역은 모조리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 한 사람, 허장강도 남부럽지 않게 악역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코믹한 역도 많이 했다. 이예춘은 애오라지, 악역만 줄곧 해온 독특한 배우라 할 수 있다.

이덕화는 연기뿐만 아니라 ‘머리카락’으로도 유명해졌다. 그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화로 활동영역을 옮긴 후 이예춘은 자꾸 훤해지는 앞머리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무대에서는 먹칠을 해서 커버했지만 화면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뛰어난 대체방법이 없을 때였기 때문에 이예춘은 먹물을 들인 고운 흙가루를 머리에 칠하고 촬영을 했다. 하지만 바람이 불면 말라버린 검은 가루가 날아 가버려 애를 먹었다.

이예춘은 일본에 왕래하는 친구에게 부탁해 자생당 제품의 모생수를 구했다. 바르면 머리가 나는 액체였다. 이예춘은 설명서에 쓰인 대로 모생수를 하루 일곱 번씩 바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냄새가 몹시 고약해 쥐똥냄새가 났다. 그 냄새나는 것을 하루 일곱 번씩 바르자니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사무실이건 다방에서건 남의 눈을 피해 발랐는데 하루는 다방에서 그의 앞에 앉은 여배우가 이게 무슨 냄새냐며 코를 싸쥐는 일이 벌어졌다. 당황한 이예춘은 식은땀을 흘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고 그 바람에 냄새는 순식간에 온 다방에 번져 난리가 났었다는 일화도 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악역의 대부였던 이예춘은 60년대 말 배우들의 영화 제작 붐을 타고 몇 편의 영화를 제작, 성공했다. 하지만 <일본 천황과 폭탄사건> 제작에 크게 실패하는 바람에 그동안 모아뒀던 돈을 날리고 쇼크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1971년이었다.



다행히 병세가 호전된 후에는 춘천에서 낚시를 즐기며 요양을 해 1973년에는 정진우 감독의 <석화촌>에도 출연했다. 이것이 마지막 작품이었다.

자신의 뒤를 이어, 자신이 평생 해보지 못한 청춘영화 주연을 맡아 연기하는 아들 이덕화의 성장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이예춘은 이덕화가 오토바이사고가 크게 나자 자신의 병도 잊은 채 아들의 병 간호며 사고 수습으로 동분서주했다. 1년쯤 지난 후 이덕화의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할 무렵 병원에 함께 입원해있던 이예춘은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져 1977년 향년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했으나 지금 어느덧 부친의 나이가 되어 중량감 있는 연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이덕화에게서 그 유언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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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 한명숙 노란 샤쓰의 사나이' 1961년 비너스레코드 VOL.1-상편

컨트리 웨스턴 스타일 '희망의 노래'

동남아·미주까지 '노란 티셔츠 열풍'

허스키 보이스로 미8군 가수시대 활짝… 3차례 재발매

한류열풍은 한국 대중문화의 우수성을 국제적으로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동남아를 넘어 서구인들도 한국의 대중음악, 영화, 드라마에까지 친밀감을 느낄 만큼 우리 대중문화 수준은 이제 국제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한류열풍의 역사가 배용준 주연의 드라마 ‘겨울연가’나 월드스타 ‘비’, 그리고 수많은 아이돌 스타들에 의해서 최근에 생성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굉장한 오해다. 한류열풍은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반세기에 걸친 대중문화예술인들의 해외도전사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한류열풍의 기원과 뿌리를 조명하기 위해서는 타임머신을 타고 1950년대로 돌아가 봐야 한다.

50년대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온 나라가 잿빛 하늘처럼 우울했고 칙칙한 모노톤이었다. 

당시 미군들의 여흥을 위해 생성된 미8군 무대는 서구의 새로운 대중문화를 경험시킨 거대 유입 통로였다. 미8군 무대와 AFKN 방송을 통해 당대 대중은 미국에서 유행하는 팝과 재즈 그리고 다양한 댄스들을 거의 동시대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사실은 그 무대를 통해 60년대 이후 한국대중음악을 주름잡는 일단의 음악인 그룹이 생성되었고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소위 미8군 출신 가수들이 바로 그들이다. 서구음악 장르로 무장해 다재다능한 능력을 펼쳐냈던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60년대에 들어서자 대거 일반무대로 진출했다. 그들로 인해 당대 국내 대중음악계에 일대 지각변동이 벌어졌던 것은 당연했다.

선봉장은 ‘노란 샤스의 사나이’를 들고 나온 ‘한명숙’이었다. 국내가요로는 최초로 동남아는 물론 미주지역까지 널리 알려져 지금껏 사랑 받는 손석우 작곡의 노래다. 한명숙은 당시로는 생경했던 컨트리&웨스턴 스타일의 새로운 창작곡으로 1960년대 미8군가수시대의 탄생을 세상에 힘차게 알렸다. 

그녀가 밝고 명랑하게 노래한 명곡 <노란 샤스의 사나이>는 단순한 노래의 개념으로 보기엔 너무도 강력한 사회적 파장을 던졌다. 그녀의 노래는 색감이 없는 칙칙한 세상에 마치 갓 태어난 아기 병아리를 연상하게 하는 희망의 멜로디로 작용했다.

우울했던 당대 젊은 남성들에게 ‘노란 티셔츠 열풍’까지 선사한 이 노래는 기특하게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국가재건의 기틀에 ‘활력 넘치는 분위기와 정서적 힘’을 보태는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1952년, 한국전쟁 통에 이북에서 월남한 한명숙은 태양악극단의 무명가수로 대중가수 생활을 시작해 1954년 미8군 <세븐 스타 쇼>의 미8군 가수가 되었다.

당시 미8군 무대에서 활동했던 선배가수는 최초의 재즈가수 박단마, 홍청자가 있었고 동료 가수들로는 곽순옥, 이춘희, 로라 성, 이금희, 현미 그리고 후배로는 최희준, 박형준, 위키리, 유주용 등이었다. 하나같이 50-60년대 한국 대중 음악사에 빠트릴 수 없는 최고의 가수들이다. 

그 중 후배이지만 그녀가 존경해 마지않는 최희준은 음악적 은인이다. 그의 소개로 작곡가 손석우를 만나 음반을 취입하는 정식가수가 될 수 있었다. 비너스레코드를 창설한 작곡가 손석우는 당시로는 뉴웨이브 음악인 서구의 스탠더드 팝계열의 노래를 세상에 전파하려는 야심을 품은 음악인이었다. 

때마침 창립 작품을 기획 중이던 그가 중견 신인가수 한명숙에게 필생의 명곡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선물했다. 1961년의 일이다. 악극단무대로 시작해 10년의 세월동안 천신만고 끝에 자신의 목소리를 10인치 데뷔음반에 담았다.

‘노란 샤스의 사나이’가 최초로 발표된 비너스레코드 1집은 ‘손석우 멜로디’ 타이틀로 한명숙, 최희군, 김성옥, 계수남, 오사라, 블루벨즈 등 가수 6명의 총 8곡이 수록된 전형적인 컴필레이션 음반이다. 더구나 타이틀곡은 한명숙의 노래가 아닌 김성옥의 ‘이것은 비밀’이었다. 

아무도 ‘노오란 샤스의 사나이(원제목)’가 시대를 뛰어넘는 명곡으로 등극할 것을 꿈도 꾸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2번째 트랙으로 수록된 한명곡의 노래는 이후 3차례에 걸쳐 재발매 시키는 마력을 발휘했다. 음반 발매 후 뜨거운 인기를 감지한 손석우는 한명숙의 노래를 타이틀로 내세운 비너스레코드 11집을 발 빠르게 발매했다.

하지만 꺼질 줄 모르고 확신되는 노래 열풍으로 노란 샤쓰를 입은 사나이의 그림까지 그려 세 번째 재발매 음반까지 제작해야 줄은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당시는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꾀꼬리’ 예쁜 목소리로 노래해야 가수로 인정받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미군 병사들은 냇 킹 콜, 패티 패이지, 도리스 데이 같은 허스키 보컬을 선호했다.

이에 한명숙을 비롯해 현미, 최희준, 이금희 등 미8군 대표가수들 상당수는 맑은 허스키 보컬을 구사했다. 시원했지만 삼베같이 거친 이들의 노래는 미8군 무肉【??인기가 대단했지만 일반 대중에겐 낯설고 괴상하게 여겨졌다. 

어느 시대건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이기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듯 당대 대중이 최초의 허스키 가수 ‘한명숙’의 노래에 열광하기까지엔 반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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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8/10/24 00:00:00  김다인 
 



합죽이 김희갑, 막동이 구봉서…그리운 웃음들
60년대 전성기 누린 코미디스타 5인방 / 김다인


 



[인터뷰365 김다인] 요즘 개그맨들 가운데는 연기자로 변신을 꾀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문천식, 이혁재, 안선영, 박미선 등이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40여년 전, 이들의 대선배 가운데 코미디언으로 출발해 연기자로도 성공한 롤 모델을 찾을 수 있다. 60년대 코미디영화의 주역들, 영화를 통해 사람들 배꼽을 쥐게 했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막동이 구봉서, 합죽이 김희갑, 뚱뚱이 양훈, 홀쭉이 양석천 등 5명이 그들이다. 이들 외에도 비실이 배삼룡, 살살이 서영춘, 그리고 송해 남보원 등도 영화에 출연했으나 이들 5인방에 비하면 활동량이 적었다.

코미디 스타 5인방은 악극단 출신이라는 것이 공통점으로 원래는 당시 유행했던 극장 쇼에서 슬랩스틱 코미디를 주로 하다가 인기를 얻자 영화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선의 넘치는 개성적인 코미디언, 대중들이 보기만 해도 그저 즐거울 수 있는 보드빌리언’이라는 평을 들었던 합죽이 김희갑은 구봉서와 함께 그중 가장 많이 영화에 출연했다.

김희갑은 1923년 함경남도 장진호라는 작은 부락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부유한 집안 장남으로 어려운 줄 모르고 자랐던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누이와 단 둘이 살다가 해방 이듬해 단신 월남했다.

친구 주선으로 반도가극단에 입단해 무대 생활을 하던 김희갑은 1956년 한형모 감독의 <청춘쌍곡선>으로 영화에 데뷔했다. 이어 60년대 <김희갑의 청춘고백><합죽이의 신혼열차><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염통에 털난 사나이> 등의 합죽이 스타일 코미디 영화에서부터 <박서방>이나 <서울의 지붕밑> 등 서민극에까지 두루 출연했다. 쉬지 않고 다작 출연을 한 가운데서도 <와룡선생 상경기> <팔도강산> 같은 영화는 주목을 받은 작품이었다.

김희갑의 최고 전성기는 1962년으로, 무려 20편의 영화에 출연해 다작배우 1위에 랭크됐다. 그해의 영화는 김희갑이 나온 영화와 나오지 않은 영화로 구분해도 될 정도다. 당연히 다른 배우들보다 수입 랭킹에서도 우위였다.

영화에서는 끊임없이 관객들을 웃게 한 그였지만 고향에 두고 온 누이에 대한 그리움은 가시지 않았던 듯 60년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내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내가 왜 희극을 선택했는가이다. 지난 반생이 고독했고 슬펐던 내가 왜 그 반대인 웃음을 택했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또 한 사람, 대표적인 희극 배우는 막동이 구봉서였다.

입 양쪽에 커다란 알사탕 두 개를 각각 넣은 듯 불룩한 양볼에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라는 유행어를 널리 퍼트렸고 영화 출연도 스타배우 못지않게 많이 했다. 그가 퍼뜨린 유행어는 1964년 최지희와 공연했던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구봉서도 김희갑처럼 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이었다. 평양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3세 때 양친을 따라 월남했다. 연기자의 연이 시작된 것은 ‘눈물젖은 두만강’을 부른 가수 김정구의 친형이 이끄는 악극단에 출연하고부터였다. 이후 1956년 <애정파도>로 영화에 데뷔하기 전까지 18년 동안 악극단 생활을 했다.

김희갑 보다는 불과 한 살 아래였는데도 김희갑이 영감 역부터 한 것에 비해 구봉서는 청년 역이 시작이었다. <서울의 지붕 밑>만 보더라도 김희갑은 김승호 허장강과 동년배 복덕방 영감이지만 구봉서는 전파상 총각 역을 맡고 있다.

코미디물이 히트하면서 구봉서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1961년 <구봉서의 벼락부자>에서 1970넌 <구봉서의 구혼작전>까지 10년 동안 막동이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구봉서 출연작 가운데 사람 마음을 뭉클하게 했던 것은 1969년 유현목 감독에 문희와 공연했던 <수학여행>이었다. 여기서 구봉서는 외딴 섬 아이들을 인솔해 서울로 수학여행을 가는 교사 역을 맡아 구수하고 마음 착한 연기를 했다.

구봉서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는 가족들이 절대 보지 못하게 한 것으로 유명했다. 스스로 “만약 봤을 때는 엄벌 정도가 아니라 일주일 혹은 한달 동안 지긋지긋한 정신적 고문을 가했다”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가정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던 구봉서는 영화계 ‘애처클럽’ 멤버였다. 일명 ‘공처가구락부’라 불린 이 비공인단체에는 구봉서를 비롯해 황해 곽규석 신영균 박노식 장동휘 등이 ‘등록’돼 있었다.

구봉서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후라이보이 곽규석은 1958년 공군 군악대를 제대한 후 박단마그랜드쇼에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방송과 무대를 종횡무진 누볐다. 다른 코미디언이 ‘몸개그’를 주로 하는 데 비해 그는 재치있는 언변으로 스탠딩 코미디를 주로 했다. 

영화 출연은 일종의 외도였던 셈으로 1959년 <후라이보이 박사 소동>이 데뷔작이다. 코미디언 별명을 영화 제목에 넣은 것은 곽규석의 이 영화가 효시라 볼 수 있다. 1963년 김수용 감독의 <후라이보이 무전여행>이 흥행에 성공한 이후 50편에 출연했으나 그의 진가가 발휘된 것은 쇼 프로그램 MC였다. 그는 방송 통합 때 없어진 TBC(동양방송) TV에서 텔레비전 쇼의 효시인 ‘쇼쇼쇼’ MC를 맡아 요즘 국민MC로 불리는 유재석 이상으로 인기가 있었다.

뚱뚱이 양훈과 홀쭉이 양석천은 할리우드 코미디언 듀오 로렐과 하디의 한국판이었다. 몸이 큰 양훈과 작고 왜소한 양석천은 무대에 등장하기만 해도 관객들 웃음을 자아내서 쇼무대의 스타로 인기를 모았다.

그 여세를 몰아 <죽자니 청춘 살자니 고생><남성금지구역><비단이장사 왕서방> 등의 제목만 대도 코미디인 영화에 짝꿍으로 출연했다. 양훈이 넉넉한 동네 가게 아저씨 혹은 심술궂은 정육점 주인 등의 역할을 한 데 비해 양석천은 소심한 소시민 역 전문이었다.

이들 코미디스타 5인방 가운데 몇몇 분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영화를 통해 남겨놓은 큰 웃음은 여전히 이세상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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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8/09/23 00:00:00  김다인 
 



사나이 중의 사나이, 허준호의 부친 허장강
연기는 프로, 현실에서는 인격 갖춘 신사 / 김다인


 



[인터뷰365 김다인] “마담,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

지금도 개그맨들이 곧잘 흉내내는 이 느끼한 대사의 오리지널 저작권(?)은 배우 허장강에게 있다.

걸쭉한 톤에 스타카토로 끊으면서 콧소리를 약간 섞어 내는 독특한 목소리, 그 주인공인 허장강은 개성파 배우 허준호의 부친이다.

최근에는 김지운 감독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만들면서 특히 극중 송강호 연기는 이만희 감독의 1971년작 <쇠사슬을 끊어라>에 출연한 허장강 연기에서 영감을 얻었음을 밝혀 화제가 됐다. <쇠사슬을 끊어라>에서 허장강이 오토바이를 타고 뚝섬 한가운데를 질주하는 장면이 그대로 사막을 가로질러 도망가는 송강호의 오토바이 액션으로 바뀐 것이다.

배우 허장강은 한국영화계가 자랑해도 좋을, 빛나는 보석이다.

허장강은 극단 활동을 하고 있던 도중 이강천 감독의 데뷔작 <아리랑>에서 원하던 배우가 캐스팅이 되지 않자 ‘꿩 대신 닭’으로 출연하면서 영화 데뷔를 했다.

1923년 서울 뚝섬에서 태어난 허장강(본명 허장현)은 교육자가 되거나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며 자라난 개구쟁이였다. 집안사정으로 대학을 포기해야 했던 그는 대신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향해 나아갔다.

자신이 극단을 조직, 여관집 창고를 임시 무대로 첫 작품을 올렸으나 별 성과없이 끝났고 태평양악극단에 가입해 비로소 본격적인 무대활동을 할 수 있었다. 무대극  <계월향>에서 명기 계월향은 괴롭히는 일본 대장 소서행장 역을 맡아 인정을 받았는데, ‘긴 강’이라는 뜻의 장강이라는 예명도 <계월향>의 연출가 서항석이 ‘성수동 뚝섬의 물이 마를소냐, 기나긴 강물처럼 부디 오래오래 살아 대성하라‘는 뜻을 담아 지어준 것이다.

영화 데뷔작 <아리랑>으로 호평을 받은 후 허장강은 무조건 이강천 감독의 다음 작품 <피아골>에 출연 의사를 밝혔다. 이감독은 그에게 영화에 등장하는 빨치산 가운데 가장 욕을 많이 먹은 만수역을 맡겼다. 같은 여성빨치산을 겁탈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짐승만도 못한 놈’이었다. 영화가 성공하자 허장강은 일약 대중들의 카타르시스 대상이 됐다. 대놓고 욕할 상대가 된 것이다.

사람들이 욕을 해도 허장강은 싱글벙글했다. 비로소 자신의 연기에 사람들이 반응을 보인 것이기 때문이다.

허장강의 악역 행진은 이후 거침없이 이어졌다. 여자를 협박해 돈을 갈취하는 건달, 피도 눈물도 없는 노랭이, 사기꾼, 잔인무도한 일본군 등등. 그중에서도 특히 그의 ‘나쁜 일본인’ 역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같은 시기에 악역 전담배우로 활동한 이예춘과 허장강의 다른 점이 있다면 이예춘은 오로지 악역만 한 것에 비해 허장강은 다양한 연기를 했다는 것이다. 허장강은 초기 악한의 대명사에서 코미디로 그리고 토속적이거나 서민적인 연기로 21년간 거의 1천편에 달하는 영화에 출연했다.

이예춘이 외모에서부터 도저히 접근이 불가한 섬뜩하고 강한 기운이 흘러넘치는 데 비해 허장강은 긴장된 근육을 풀고 웃음을 머금으면 곧 친근한 서민으로 돌변하는 매력이 있었다.



유난히 코가 길어 ‘코장강’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던 허장강은 영화 속 이미지와는 달리 자기관리가 철저한 ‘프로페셔널’이었다.

한국영화의 황금시절이라 일컬어지던 60년대에는 수십편의 영화가 동시에 촬영돼서 인기배우들은 5~6편에 겹치기 출연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다보니 인기 배우들이 촬영 펑크를 내는 일이 잦아 제작부장들은 배우를 모시러 다니는 것이 중요 임무가 됐다. 하지만 허장강은 그렇지 않았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앞의 영화 촬영이 늦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시간에 맞춰 촬영장에 나와있곤 했다.

일단 촬영을 시작하면 허장강은 군말없이 연기에 몰두했고 자신이 출연한 영화는 성우 녹음을 시키지 않고 반드시 자신이 녹음을 했다. 당시는 후시녹음이던 시절이어서 배우는 촬영 때 옆에서 불러주는 대사를 그대로 따라하며 연기를 한 후, 촬영된 필름을 보고 성우들이 나중에 녹음을 했다. 허장강은 성우들이 하는 후시녹음을 자기가 직접 한 것이다. 그러자니 다른 배우보다 두 배로 바빴지만 결코 스케줄 펑크를 내지 않았다. 참의미에서 프로였던 것이다. 당시 후시녹음을 반드시 자기 목소리로 했던 배우는 허장강과 김승호 두 사람뿐이었다.

그런가하면 자기가 욕심내던 배역을 맡게 되면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여사장 과 노신사> 촬영 때는 선배연기자 김승호와 의견이 맞지 않자 세 시간 동안의 격론 벌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당대의 으뜸인 연기자 김승호는 평소 “내가 무서워하는 녀석은 딱 하나, 허장강뿐”이라고 말할 정도로 연기 면에서 허장강을 맞수로 여겼다.

촬영현장의 휴식시간에도 허장강의 인기는 으뜸이었다. 괴상한 곱사춤을 춰 동료들을 웃겨 놓고는 “이봐 웃긴 값 500원 내놔”라고 해서 한동안 별명이 500원이기도 했다.

당시 그와 함께 영화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허장강을 ‘연기자 이전에 의리와 정의를 중하게 여기는 사나이 중 사나이’라고 기억했다. 그의 생활철학은 ‘마누라 다음은 친구’였다.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도 집에 홈바를 만들어 영화 동료들을 초대해 흥을 돋워주는가 하면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반드시 분장용 화장품을 사다가 동료나 선배에게 선물을 했다. 당시만 해도 국산 분장용품이 나오지 않을 때였다.

영화 속에서 거친 모습과는 달리 남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고 큰소리도 내지 않았다. 영화계에서는 허장강에 대해 초창기 배우 이금룡에 버금가는 인격을 갖춘 배우라고 표현했다.

허장강은 당대의 베스트드레서이기도 했다. 176센티미터의 훤칠한 키, 길쭉한 얼굴에 긴 코, 누에고치를 검게 물들여 붙여놓은 듯한 눈썹 등 한눈에 확 띄는 외모에 머리는 포마드를 발라 올백으로 단정하게 빗어 넘겼다. 옷에서부터 구두까지 색깔을 맞춰 입고 다녔고 특히 빨간 넥타이를 즐겨 맸다.



허장강은 늘 “내 팔자에 딴다라 해서 이만하면 됐지 또 뭘 바라겠어“라고 자신의 삶에 대해 자족하며 별다른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가 욕심을 낸 것이 있다면 딱 한 가지, 연기 욕심뿐이었다. 허장강은 ”연기는 오십부터“라며 평생을 연기할 각오로 충만해 있었다.

하지만 하늘도 그를 욕심냈다.

허장강은 나이 오십을 겨우 두 해 넘기고 저세상으로 갔다. 허장강은 1975년 10월 16일 연례행사로 벌어진 새마을돕기 연예인축구대회 OB팀으로 참가했다가 후반전  시작 십분 만에 쓰러졌다. 심장마비였다.

그날 아침 축구시합을 한다며 들떠 있는 허장강은 부인 김옥심 여사와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1967년 결혼한 부인 김옥심 여사와는 유난히 금슬이 좋았다. 집을 나서기 전 허장강은 축구 하면 발이 아플 것이라며 부인의 양말을 달래서 신고 나갔다. 알 수 없는 ‘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쓰러진 이틀 후 허장강은 아까운 삶을 마감했고 동료들의 오열 속에 떠나갔다.

슬하의 3남2녀 가운데 허기호 허준호 형제가 연기자로 활동하고 있는데 특히 허준호는 나이가 들수록 부친의 모습을 꼭 닮아가고 있다.

연전에 한 인터뷰에서 허준호는 “워낙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버지로서 좋은 분이셨고 배우로서도 준비된 분이셨다”며 “꼬마인 절 서재로 데리고 가 대본 연습을 시키셨다”고 말했다.

허준호는 작년에 TV 드라마 <주몽>에서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 역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최근 김유진 감독의 사극영화 <신기전>에 출연하는 등 연기자로서 선친의 뒤를 잇고 있다. 허준호는 또 작년에 선친의 예명을 딴 장강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해 주로 뮤지컬 제작에 힘을 쏟고 있다.

“아버지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는 허준호가 한국영화사에 굵은 획을 그은 배우 허장강의 ‘출어람’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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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우(女優) 그들을 말한다](10) 도금봉

ㆍ선망과 질시의 원시적 생명력

전쟁으로 남자들이 모두 자취를 감춘 어느 산골. 이웃 과부 점례가 인민군 탈영병을 산속 토굴에 숨겨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과부 사월은 점례를 협박하여 숨겨준 곳을 알아낸다. 밤에 토굴로 숨어든 사월을 본 사내는 쫓아내려 하지만 순사에게 알리겠다며 능청스럽게 협박하는 그녀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 자신도 여자라며 옷을 벗는 그녀에게 사내는 기가 질린 목소리로 묻는다. “그럼 당신들 둘이서 날 짐승처럼 길러보겠단 말이오?” 하얀 등을 드러낸 여자가 콧소리를 내며 말한다. “아무려면 워뗘? 아, 살고 볼 것이제~!” 마치 1990년대에 유행했던 ‘…부인’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장면이지만 출처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40여 년 전에 개봉된 <산불>(1967·사진)이다. 욕정에 사로잡힌 이 여성, 한편으로는 대담하고, 또 달리 보면 그 대담함이 어떤 코믹한 느낌까지 자아내는 이 여배우의 이름은 도금봉이다. 

도금봉이 이렇게 성적 매력으로 어필하는 역할을 자주 맡게 된 것은 어쩌면 데뷔작 때부터의 숙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957년도에 데뷔한 그녀는 기생 황진이를 영화화한 첫 작품 <황진이>의 주연으로 발탁된 대형신인이었다. 악극단에서 활동을 하면서 탄탄한 연기력을 인정받은 터에 데뷔부터 주연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그녀는 이 작품에서 관능적이고 요염한 연기로 주목 받았다. 이후 그녀에겐 이런 성격의 역할이 자주 주어졌는데, 이를테면 <연산군>(1961), <폭군연산>(1962)의 장녹수 역이나 <천하일색 양귀비>(1962)의 양귀비, <백설공주>(1964)의 태수비 같은 역이다. 그녀의 관능성에 갈수록 음모적이거나 영악한 성격이 덧대어진 것이다. 이런 성격은 <월하의 공동묘지>(1967)나 <내시>(1968)로 가면서 더욱 짙어졌다. 주인공의 어머니 역할로 나온 <어제 내린 비>(1974)에서조차 돈 많은 노인에게 팔려가는 ‘음란한’ 어머니였던 것을 보면, 그녀는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역동적 여성성에 대한 도덕적 단죄를 스크린 위에서 대신한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한편 ‘생활력 강한 여성’은 도금봉 필모그래피의 또 다른 갈래인데, 그 경제적인 역동성도 곧잘 도덕적 위험지대로 빠져들곤 한다. <새댁>(1962)이나 <또순이>(1963)에서 도금봉이 맡은 역할은 서민적인 삶 속에서 알뜰하고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젊은 주부다. 특히 그녀에게 아시아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또순이>에서 그녀는 쥐덫 팔기, 떡장수, 연탄배달 등 돈을 벌기 위해 온갖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억세게 생활력이 강한’ 여성상을 연기한다. 이는 쿠데타 이후 경제개발과 근대화를 구호로 내걸었던 박정희 정권 하에서 장려 받은 여성상이었다. 그러나 ‘또순이’ 도금봉의 이와 같은 억척스러움은 후기작으로 갈수록 왜곡되고 뒤틀렸다.

<젯트부인>(1967)에서 그녀는 일수로 돈을 벌어들이는 극성스러운 ‘치맛바람’의 주인공을 맡았다. 광고에서부터 “또순이 도금봉이 열연하는 젯트부인”이라 하여 ‘또순이’ 이미지의 계승자임을 선언한 작품이지만, 여기서 도금봉은 성실하고 인정 많은 남편을 무시하고 악랄한 사채업에 뛰어들었다가 패가망신하는 여성이 되어 부정적 이미지를 한 몸에 짊어진다. <아름다운 팔도강산>(1971)에서도 그녀는 여관을 운영하면서 손님을 더 받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시부모를 박대하는 며느리가 되고 있다. 초기에 각광 받았던 당찬 활동성과 경제적 능력은 오히려 단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그녀의 에너지에 대한 선망이 얼마나 컸던가에 대한 반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무지렁이 촌부에서부터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요부, 그리고 천하를 호령하는 왕비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소화할 수 있는 역할의 폭은 그 어떤 여배우보다 넓었고, 또 강렬했다. 그녀가 체화했던 원시적인 생명력은 뭇 남성들을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로 압도적이었고, 그래서 더욱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김한상 | 한국영상자료원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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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만, 구봉서·배삼룡·심형래 후계자?…슬랩스틱 코미디 귀재!



[마이데일리 = 배국남 대중문화전문기자] 김병만, 그는 개그계의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개그 프로그램 속에서 자취를 감춘 슬랩스틱 코미디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코믹 연기는 개그와 함께 이뤄지지만 그의 희극 연기의 본류는 슬랩스틱 코미디다. 

KBS ‘개그 콘서트’의 ‘달인’에서 슬랩스틱 코미디의 가능성을 보여주더니 이번 봄철 프로그램 개편을 맞아 신설된 KBS‘코미디쇼 희희낙락’에서 ‘김병만은 살아 있다’를 통해 슬랩스틱 코미디의 진수를 마음껏 보여주며 슬랩스틱 코미디의 화려한 부활을 알리고 있다. 

슬랩스틱 코미디는 연기와 동작이 과장되고 소란스러운 코미디를 지칭하는데 채리 채플린이 슬랩스틱 코미디의 대표적 배우로 각광을 받았다. 우리 코미디의 역사에서 슬랩스틱 코미디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악극단에서 코미디를 선보였던 코미디언들이 TV로 속속 진출하면서 코미디의 주류는 슬랩스틱 코미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코미디의 본류를 형성했다. 

구봉서, 배삼룡, 故서영춘 등 기라성같은 코미디언들이 슬랩스틱 코미디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고 이어 심형래 등 후배들이 슬랩스틱 코미디의 맥을 이었다. 하지만 입담과 개그로 웃기는 개그 프로그램들이 주류를 이루면서 슬랩스틱 코미디는 점차 관심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그 콘서트’에서 ‘달인’에서 김병만이 사람을 항상 업고 다닌다는 등 황당한 아이템을 중심으로 과장된 연기로 소화하면서 확장된 슬랩스틱 코미디가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김병만은 ‘코미디쇼 희희낙락’의 코너 ‘김병만은 살아 있다’탁구를 하면서 공을 치다가 탁구대를 올랐다가 탁구대가 무너지는 장면을 연기하거나 태권도의 장애물 뛰어넘기를 하면서 넘어지는 장면의 연기 등 그야말로 슬랩스틱 코미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관심을 끌고 있다. 

김병만의 슬랩스틱 코미디가 눈길을 끌고 인기가 높은 것은 몸을 아끼지 않고 연기에 혼신을 다하기 때문이다. 자칫 위험할 수 있는 슬랩스틱 코미디 역시 온몸을 던지며 소화해낸다. 

‘희희낙락’을 이끌고 있는 남희석은 “김병만은 코미디 연기를 하면서 전부를 건다. 그래서 그의 온몸으로 하는 연기에 많은 사람들이 웃음 짓는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김병만의 슬랩스틱 코미디는 과장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과장을 웃음으로 연결하기위해 정교하면서도 세밀한 표정연기까지 뒷받침하고 있다. 

한때 수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던 슬랩스틱 코미디가 김병만으로 인해 화려하게 부활하는 것은 코미디의 다양성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웃음의 기제 또한 확장되는 의미 있는 시도이다. 

[과장되고 소란스러운 슬랩스틱 코미디의 달인으로 우뚝 선 김병만. 사진=마이데일리 사진DB]

(배국남 대중문화전문기자 knbae@mydaily.co.kr)

은막스타 도금봉씨 지난 3일 별세

영화 '사랑방손님과어머니'
원로배우 도금봉(본명 정옥순)씨가 지난 3일 노환으로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향년 79세. 

고인은 임종을 앞두고 '세상에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뒤늦게 별세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 3일 서울의 한 복지시설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故도금봉씨는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대중 문화계를 풍미한 대배우였다. 

1930년 인천 출생으로 악극단 '창공'에서 활동했으며 1957년 조 감독의 영화 '황진이'의 주연으로 데뷔했다.

지난 1963년에는 제2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새댁'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1972년 '작은 꿈이 꽃필 때'와 1974년 '토지'로 각각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밖에 '유관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 총 50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빈소는 서울 건국대 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6일 오전 5시다.

[한마당―문일] 심수봉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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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관문화훈장을 받은 이미자의 뒤를 이을 국민여가수를 꼽아본다면 심수봉이 맨 앞자리를 차지하지 않을까. 심수봉이 올해로 데뷔 30주년을 맞았다. 1978년 대학가요제에서 피아노를 치며 청상과부 넋두리 조의 콧소리로 '그때 그 사람'을 부르는 그녀를 보고 사람들은 아마추어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늦깎이 대학생 심수봉은 이미 미 8군 무대를 비롯해 각종 밤무대에서 밴드를 하던 프로였다. 어쨌거나 이듬해 1979년은 노래의 대히트와 함께 10·26 현장에 있었던 일로 해서 심수봉에게 운명의 해가 됐다.

심수봉이 1995년 펴낸 '사랑밖엔 난 몰라'는 국내 자서전 중 솔직성에서 최고일 것이다. 상처투성이 성장기며 숙명처럼 따라다닌 남자들과의 부대낌이 트로트 곡조같이 흐르면서도 고백수기류와 격이 다른 것은 당시 어느 정도는 달관했기 때문이 아닐까. 심수봉의 팔자는 처음부터 기구했다. 배다른 형제들이 있는 집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어려서부터 악극단 트럼펫 소리에 가슴이 뛴 것은 소리꾼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란다.

심수봉은 공식 데뷔 전 권력층의 파티에 자주 참석했다. 요즘 말로 하면 접대에 동원된 셈인데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이 주최한 파티에 피아노 반주하러 갔다가 그의 눈에 든 게 계기가 됐다. 책에는 이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언론사주에게서 모욕받은 이야기도 나오니 어째 리스트로 시끄러운 요즘 분위기와 닮았다. 단 매니지먼트 회사의 지시대로 움직여야 하는 요즘 연예인과는 다르게 당시는 개인 매니저를 두더라도 역할이 크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섭외되는 파티 참석은 무명 연예인에게 생계 방편이기도 했다.

그 후 심수봉에게 닥친 신산스런 일들이야 잘 알려진 일. 운명의 터널을 빠져나온 지도 제법된 요즘, 엊그제 기자회견에 나온 그녀의 얼굴에선 독특한 광채, 흉내낼 수 없는 자신만의 아우라가 있었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남자 배우들이 너무 잘 생겨서 계속 보고 있다는 말에선 이제는 현실과 적당하게 사귈 줄 아는 넉살까지 엿보인다. 작년에는 방송에서 "예수 믿으면 팔자 고친다는 말에 교회에 가게 됐고, 하나님을 믿은 후에 많은 두려움이 사라졌어요"라고 고백했다. 심수봉이 드디어 돌아와 거울 앞에 섰다.

문일 논설위원 norway@kmib.co.kr

민족애환 담은 명곡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

[우리시대의 명반·명곡] 

1938년 1월 SP오케레코드

일제때 판금, 발표 25년 후에야 대중적 조명

유성기 음반 희귀…노래들은 여성관객 슬픔에 투신자살 소문도

명절이 되면 누구나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게 마련이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살아가는 해외동포라면 그 강도가 더욱 진할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음악이 발휘하는 위대한 미덕은 대중의 슬픔과 애환을 달래주는 위로일 것이다.

1930~40년대 대중음악은 이처럼 민족의 슬픔을 위로해준 서정가요와 시대를 풍자한 만요(코믹송)가 양대 산맥을 형성했다. 당시 김정구는 대표적인 만요 가수였다. 

대부분 가수들이 어두운 노래를 주로 불렀던 당시, 세태를 풍자하는 노래와 춤까지 곁들인 그의 무대는 파격이었다. 하지만 그가 국민가수 1호로 존경받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민족의 애환을 담은 명곡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렀기 때문이다.

국민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은 1936년 여름, 악극단 예원좌의 일원으로 두만강 유역의 도문에 공연 갔던 무명 작곡가 이시우(본명 이만두)가 창작한 곡이다. 

픽션이 가미된 오래된 옛 가요의 창작 비화가 하나 같이 감동적이듯 이 노래의 탄생비화도 나라 잃은 설움을 자극하는 대목에선 한 치의 오차도 없다. 더욱이 한 여성 관객이 노래를 듣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두만강에 투신자살했다는 소문은 충격적이다. 당시 이 노래를 최초로 부른 가수는 막간가수 ‘장성월’이다.

이 부분에선 논란이 있어왔다. 2006년 평양기생출신 가수 왕수복은 단행본을 통해 자신이 최초의 가수라고 주장했다. 그녀의 주장은 황당하다. ‘김정구의 형 김용환이 자신에게 주었다’는 1938년 7월 20일 폴리돌 레코드에서 발표되었다는 원곡 ‘두만강 푸른 물아’는 기록에도 없는 노래다. 

“김정구는 광복 후에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렀다”는 주장도 허무맹랑하다.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 sp음반은 정확하게 1938년 1월에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어찌 원곡이 리메이크 곡보다 늦게 발표될 수 있단 말인가!

비교적 정확한 음반제작 경위는 이렇다. 귀국한 작곡가 이시우는 가수 김정구를 찾아갔고 작곡가 박시춘을 통해 트롬본 연주가 김용호를 소개받았다. 김용호는 1절밖에 없던 노래를 3절까지 완성시켜 오케레코드를 통해 1938년 1월 ‘눈물 젖은 두만강’을 발표했다. 만요 '왕서방 연서'도 1월에 발표되었다. 

음반이 나온 후 2곡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렸다. 코믹한 만요 가수의 이미지가 강했던 김정구였기에 ‘왕서방 연서’만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냈던 것. 더욱이 ‘눈물 젖은 두만강’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판매금지 처분이 내려졌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가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 유성기음반은 실물구경이 힘들 정도로 희귀하다. 같은 음반 뒷면에 수록된 가수 황금자의 곡 ‘왜 못오시나’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황금자는 ‘알뜰한 당신’을 히트시킨 가수 황금심(본명 황금동)의 또 다른 예명이다. 심수봉이 제2회 대학가요제를 통해 ‘그때 그 사람’으로 가요계를 강타했을 때 신세계레코드에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발매한 묵혀둔 노래가 있다. 사실상 심수봉의 데뷔곡인 ‘여자이니까’다. 

오케레코드에서 히트여부를 확신하지 못해 노래를 사장시켰던 상황과 똑같다. 당시 오케레코드는 황금심이 인기가수로 떠오른 후 황금자란 이름으로 2곡을 발매했었다. 황금자로 발표된 귀한 노래가 ‘눈물 젖은 두만강’과 같은 음반에 수록되어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김정구가 ‘눈물 젖은 두만강’을 다시 부르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 한국전쟁 무렵이다. 남북 간 대립이 극심했던 당시 자신의 노래 상당수가 금지된 월북 작가의 작품인지라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기 때문. ‘눈물 젖은 두만강’이 대중적으로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놀랍게도 1963년 민경식감독이 동명의 영화로 제작하면서부터. 

그리고 1964년 4월부터 시작된 KBS 라디오의 인기프로그램 ‘김삿갓 북한방랑기’의 주제가로 방송을 타면서부터 국민적 사랑을 받는 확실한 기틀을 마련했다. 남북은 물론 해외동포들까지 한마음으로 사랑하는 불멸의 대중가요 명곡이 발표된 지 25년 후에야 대중적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여로·코끼리·매미·신종플루'…동춘서커스가 이겨낸 시련들



동춘서커스 박세환 단장, "부산은 서커스 성공 가능성 높아…공연장 세우고 싶다"

[부산CBS 장규석 기자] "1972년 4월 3일에 TV에 드라마 '여로'가 시작했습니다. 1925년부터 시작한 동춘서커스단이 내리막길을 걷게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지요."

현대백화점 부산본점에서 주최한 동춘서커스 공연차 지난 19일 부산을 찾은 동춘서커스 박세환(64) 단장은 드라마 '여로'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는 드라마가 시작한 날짜까지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Video Kills The Radio Star'라는 노래도 있지만, 비디오는 라디오 스타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서커스단에게도 치명타로 작용했다.

"드라마 '여로'가 선보인 1972년부터 시작해서 1975년 사이에 서커스단 18개 중에 서너개만 남고 모두 망했어요. 한참 인기를 구가하던 코미디언과 배우, 가수들은 뿔뿔이 TV 방송국으로 흩어졌고, 서커스단에 남아있던 악극단, 국극단, 쇼단이 전멸했습니다." 

허장강, 서영춘, 배삼룡, 이주일, 이봉조 등이 동춘을 거쳐갔고, 이후 남철, 남성남, 장항선 등도 동춘 출신 연예인으로 방송에서 무진 활약했다. 박 단장은 당시 주연배우이자 사회자로 끝까지 동춘서커스에 남았지만 그도 결국 1975년 서커스단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부산 남포동에서 왕자극장, 부산극장 등지에서 선전부장으로 일하기도 했지만 '동춘'을 잊을 수 없었다. 1978년 다시 동춘서커스단으로 돌아왔다. 그즈음 사고로 위기에 처한 동춘서커스단을 인수해 단장이 된 것이다. 서커스단 단장이 되면서 그의 인생도 '곡예' 그 자체가 됐다. 

◈ 여로에 이어 닥친 최대 시련은 "주연배우 코끼리 사망"

1980년 2월 16일. 그럭저럭 서커스단을 운영해나가고 있을 때 단장 취임 이후 첫 위기가 닥쳐왔다. 물구나무서기에 하모니카도 불었던 서커스단의 최고 주연배우 코키리 '제니'가 추위에 얼어 죽은 것이었다. 

"당시 동춘서커스단은 서울 창경원 다음으로 많은 동물을 갖고 있었습니다. 40종의 동물이 있었는데 그 중 코끼리 제니가 단연 최고 인기였죠. 그런데 난방장치가 고장나서 제니가 얼어죽은 거에요. 공연은 계속해야하고 주연 배우는 없어졌고 정말 눈 앞이 캄캄했죠."

박 단장은 제니를 땅에 묻었다가 도저히 잊을 수 없어 다시 파내 박제로 만들었다. 박 단장은 서커스 박물관이 들어서면 제니가 맨 입구에서 관람객들을 맞을 수 있게 박제를 세워놓을 계획이다. 

서커스의 인기는 갈수록 하락했고, 위기는 쉬지않고 찾아왔다. 2003년에는 태풍 '매미'가 불어닥쳐 전남 광양에 세워놓았던 서커스 천막과 각종 장비 수십억 원 어치가 모조리 비바람에 휩쓸려 갔다. 사기도 당했다.

"2008년에는 부천시에 서커스 상설극장과 아카데미를 설립하기로 하고 민간사업자에게 동춘서커스 주식 51%를 주기로 하고 민자유치 계약을 맺었는데, 사기를 당했습니다. 아직까지 재판은 진행 중이고 상설공연장은 여전히 공사가 중단돼 있어요."

하지만 그에게 동춘서커스 해체를 선언하게 만든 가장 큰 시련은 다름아닌 '신종플루'였다. 

"다들 외출을 안 하니 사람이 모이지를 않아요. 공연장에 사람이 없으니 6,70명 되는 서커스단원들 월급도 못 줄 형편이 된 겁니다. 그동안 돈 생기면 서커스 장비만 사 모으고 땅을 사놓지 못한게 그때 그렇게 후회가 되더라구요. 견디다 견디다 못해 그해 11월 15일 공연을 끝으로 해체하겠다고 선언을 했어요."


◈ 가장 힘들었던 신종플루…서커스단 해체 선언이 되려 재기 발판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박 단장이 당시 동춘서커스 84년 역사를 그만 접겠다고 선언하자, 동춘서커스 살리기 여론이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동춘서커스를 살리자는 카페에 수만 명의 회원이 모여 모금운동이 시작됐고, 서커스단이 이 지경이 되도록 모른체 한 문화관광부에 비난 여론이 쏟아졌다. 

"제 미니홈피에 무려 16만명이 다녀갔고, '동춘서커스 못살리면 유인촌이 아니라 무인촌'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정부에 대한 비난여론이 쏟아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서커스단이 생기고 85년만에 처음으로 공무원이 정식으로 저희 공연을 보러 왔어요." 

문화관광부 실사를 거쳐 동춘서커스단은 지난해 12월 16일 전문예술단체로 등록됐다. 기부금을 공개 모금할 수 있는 지정 기부금 단체로 등록된 것이다. 정부지원과 국민 모금, 기업 후원 등에 힘입어 동춘서커스단은 지난해 12월 다시 재기 공연을 시작했다. 

지난 19일부터 부산 동구 현대백화점 부산본점 옥상에서 시작한 공연도 현대백화점 측의 후원에 힘입은 것이다. 

하도 오랜만에 부산에서 공연을 해서 몇 년만에 공연을 하는지도 제대로 기억이 안난다는 박 단장은 그러나 부산에 대한 무한 애정을 나타냈다. 

"제가 경주 출신이고 1975년부터 3년 동안 부산 남포동에 있는 극장판에서 살아서 부산은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집니다. 제 고향 친구도 부산에 아주 많이 정착해 있거든요. 한마디로 부산은 풍류를 아는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부산은 서커스 산업 가능성 높은 도시…무관심 안타까워"

박 단장은 최근들어 여러 자치단체가 서커스 공연에 부쩍 관심을 갖고 있지만, 본인 스스로는 부산이야말로 서커스 산업이 가장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도시라고 평가했다. 

"부산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잖아요. 외국인 관광객도 많고. 서커스는 어린아이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까지 모두 즐길 수 있고 언어 장벽도 없어요. 한나절 관광명소를 돌아본 뒤에 저녁에 서커스 공연을 관광 일정에 집어 넣으면 얼마나 좋은 관광 상품이 되겠습니까. 그러다보면 주변 식당도 잘 될테고. 부산에서 한다면 정말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19일부터 사흘동안 부산 동구 현대백화점에서 연 동춘서커스 공연은 공연장이 협소해 모든 공연을 보여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자리가 꽉 들어찼다. 단 사흘 동안 3천여 명에 가까운 관객들이 찾았다. 동춘서커스단 부산 공연은 오는 26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계속 이어진다.

부산 얘기가 나오자 안타까운 말도 쏟아졌다. 

"시내에 서커스를 할 수 있는 넓은 공터가 요즘은 거의 대부분 국공유지거든요. 서커스 공연을 제대로 하려면 자치단체에서 많은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여러 자치단체에서 최근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부산은 아직 서커스에 대해 무관심한 것 같아 안타까워요. 부산시 관광 담당자도 한 번도 만나보질 못했는데, 우리 서커스단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좋겠어요."

적절한 관심과 후원만 있다면 '태양의 서커스'를 능가하는 우리만의 서커스를 선보일 수 있고 꼭 그렇게 하겠다는 박세환 단장. 60대 중반에 접어든 그는 기사회생한 동춘서커스단을 이끌며 또 다른 곡예같은 인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hahoi@cbs.co.kr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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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웃음 남기고… 국민광대 ‘비실이’ 떠나다



[동아일보] 1926∼2010 원로 코미디언 배삼룡 씨 별세

李대통령 조화… 조문 줄이어

1946년 악극단서 희극 시작… 개다리춤 바보연기로 전성기

신군부때 방송출연정지 시련… 생활고-투병 등 쓸쓸한 말년

바보 연기와 ‘개다리춤’으로 웃음과 위안을 선사했던 원로 코미디언 배삼룡 씨가 23일 오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4세.

1990년대 중반부터 흡인성 폐렴으로 투병해오다가 2007년 6월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행사장에서 쓰러져 입원 치료를 받아왔으며 최근 병세가 악화돼 지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장남 동진 씨는 “두 달 전 마지막으로 의식이 있었을 때 아버지는 ‘다시 일어나서 무대에 서고 싶다’고 말씀하셨다”며 “그 후 병세가 악화돼 계속 눈을 감고 기계에 의존해 호흡하셨고 유언은 남기지 못하셨다”고 말했다.

허약 체질을 연기한 그는 ‘비실이’로 불리며 1970년대 한국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MBC TV가 개국한 1969년부터 코미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동갑내기 구봉서 씨(막둥이)와 명콤비로 활약했다. 이주일 심형래 씨로 이어진 바보 연기의 개척자였다.

그는 1999년 12월 낸 자서전 ‘한 어릿광대의 눈물젖은 웃음’에서 ‘웃음은 남을 주고 한숨은 내가 갖는다’라는 연기 철학을 밝히기도 했으며 ‘한국의 찰리 채플린’으로 불렸다. 

1926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13세 때 큰형을 따라 일본 도쿄로 건너가 우에노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광복 후 귀국해 1946년 유랑 악극단 ‘민협’의 단원으로 코미디언 생활을 시작했다. ‘장미’ ‘무궁화’ ‘삼천리’ 악극단을 거친 뒤 1960년대 ‘극장 쇼’에서 사회를 맡으며 장안의 웃음을 자아냈다.

이후 MBC 코미디언으로 TV에 진출한 그를 두고 방송사 간 섭외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1998년 경향신문 기고에서 “1973년 12월 동아방송의 ‘명랑 스테이지’ 공개방송을 녹화하고 나왔는데, 방송사 직원 30여 명이 나를 에워싸고 ‘납치’를 기도했다. MBC 차량에 오르려는 순간 TBC 차량이 돌진하다 구경하던 사람의 발을 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사람팔자 시간문제’ ‘9대 독자 사랑법’ 등 400여 편의 드라마와 ‘요절복통 007’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등의 영화에도 출연했다.

그는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1980년대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연예인 숙정대상 1호’로 지목돼 방송 출연을 정지당했다.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등을 전전하다가 3년 뒤 귀국했으나 예전처럼 인기를 얻지 못했고 사업도 실패했다. 1997년 악극 ‘눈물의 여왕’으로 재기하는 듯했으나 2007년 쓰러졌으며 최근 1억여 원의 병원비를 못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이날 서울아산병원 빈소에는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송해 이상용 엄용수 임하룡 최양락 김미화 이홍렬 이성미 주병진 박명수 강호동 이영자 이윤석 씨,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 등이 다녀갔다. 이명박 대통령, 김형오 국회의장, 정운찬 국무총리, 김인규 KBS 사장 등이 화환을 보내 고인을 애도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빈소를 찾아 “좋은 세상에 잘 가셔서 사후 세계에서도 많은 즐거움을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송해 씨는 “외로운 분야를 있는 힘을 다해서 이끌어 오셨다. 정말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상용 씨는 “몇 년 전 경로위로잔치에 함께 참석했다. 선생님은 ‘내 나이가 80으로 위안을 받아야 하는데 나보다 어린 이들을 위로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고인은 생전에 문화체육부 장관 표창(1996년), ‘MBC 명예의 전당’ 코미디언 부문 수상(2001년), 제10회 대한민국 연예예술대상 문화훈장(2003년), ‘대한민국 희극인의 날 자랑스러운 스승님상’(2009년) 등을 받았다.

인터넷에도 애도의 글이 이어지고 있으며, MBC는 추모 다큐멘터리를 방영할 계획이다. 유족으로는 아들 동진 씨, 딸 심애 주영 경주 씨가 있다. 발인은 25일 오전 8시이며 장지는 경기 성남시 분당구 추모공원 휴. 02-3010-2295

이지연 기자 chance@donga.com 

[여적]불세출의 희극인



한국 코미디계에서 구봉서·서영춘·배삼룡 3인방을 빼놓고는 웃음의 역사를 논할 수 없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개성미가 이들을 코미디계를 이끈 불세출의 스타로 만들었다. 해방 이후 수많은 희극인들이 명멸했지만 유랑극단식 코미디, 코믹영화, TV 코미디 등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의 사랑을 받은 코미디언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극장 간판을 그리던 서영춘은 출연 펑크를 낸 한 희극배우 대역으로 나선 것이 데뷔의 계기가 됐다. 남을 실컷 웃겨놓고 본인은 엄숙해지는 표정 연기가 일품이었다. “인천 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 없이는 못 마십니다”로 시작하는 만담식 코미디는 ‘국민개그’처럼 퍼지면서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구봉서는 가수 김정구 친형이 이끄는 악극단에 출연하면서 연예계와 인연을 맺었다. 공전의 히트를 친 영화 <오부자>에서 ‘막둥이’라는 애칭이 붙으면서 스타덤에 올랐고, 정극(正劇) 코미디로 이름을 알렸다.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세브리깡 무드셀라….” 그가 유행시킨 무려 72자에 달하는 코믹 대사는 한국 희극사에 흔치 않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비실이’라는 별명과 함께 등장한 배삼룡의 연기는 웃음의 맛이 달랐다. 당시로서는 볼 수 없었던 엎치락 뒤치락하는 슬랩스틱 연기로 개성을 살렸다. 지금도 인기가 식지 않는 ‘개다리춤’을 처음 선보였고, 바보 연기는 전매특허였다. ‘배삼룡표 바보 연기’는 심형래 등 후배들에 의해 변주되면서 지금까지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1973년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을 때의 일이다. 배삼룡을 사이에 두고 TBC와 MBC 간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를 추적하고 회유하는 등 신경전이 극에 달했다. ‘코미디 전쟁’으로 불리면서 세간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코미디 프로가 연기자 중심에서 작가 중심의 콩트 나열식 코미디로 전환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삼룡씨가 투병끝에 어제 세상을 떠났다. 자기 꾀에 넘어가는 헛똑똑이를 연기했던 바보 연기의 정수는 이제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웃음은 보통사람보다 못난 사람을 연기할 때 터진다고 한다. 스스로 자세를 낮춰 타인에게 웃음을 베풀었던 한 희극인의 연기를 팬들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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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계의 거목’ 배우 장민호 별세



60여년간 정통 연극의 맥을 지켜온 한국 연극계의 거목 장민호 배우가 2일 새벽 1시45분 별세했다. 향년 85세. 

고인은 1927년 황해도 신천군 기사면에서 기독교 집안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1946년 봄 단신으로 월남했다. “고향 마을에 들어온 악극단을 보고 배우의 꿈을 키웠다”고 생전에 회고했던 고인은 남한에 도착한 이후, 신극(新劇)의 선구자인 현철이 운영하던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해 연극수업의 첫발을 내디뎠다. 생애 첫번째 공식무대는 기독교 계통의 작은 극단에서 올렸던 <모세>(1947)였다. 직후 KBS 성우로 입사해 생계의 기반을 마련한 고인은 1950년에 국립극장 전속극단 ‘신협’에 입단해 장구한 배우 생활의 막을 올렸다. 생전에 출연한 연극은 모두 200여편. 그 중에서도 괴테의 <파우스트>는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고인은 40세의 젊은 나이였던 1967년에 국립극단 단장으로 취임해 1971년까지 재임했으며, 1980년에 다시 단장직을 맡아 이후 10년간 재임하면서 국립극단장직을 15년이나 맡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퇴임 후에도 국립극단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배우로서의 노익장을 과시했다. 생애 마지막 작품은 지난해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의 개관 공연이었던 <3월의 눈>. 연극계의 오랜 벗이었던 원로배우 백성희(87)와 호흡을 맞춘 것이 배우인생의 마지막 방점이 됐다. 이후 폐기흉으로 입원해 1년 넘게 투병을 이어갔으나 결국 병상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에게 쏟아지는 연극계의 찬사는 눈부시다. 연극사학자 유민영 단국대 석좌교수(75)는 자신의 저서 <한국인물연극사>에서 “해방 이후 데뷔한 배우로는 장민호를 능가할 인물이 아직 없다”며 “근대 리얼리즘 연극의 거대한 산맥에서 언제나 봉우리에 서 있던 정석 연기의 화신”이라고 썼다. 구히서 연극평론가(73)는 “뛰고 달리고 몸부림치기보다는 걷고 서성거리고 자제하는 분위기, 일그러진 얼굴에 광기 어린 외침보다는 차갑게 돌아서서 무겁게 내뱉는 분노가 어울리는 얼굴이고 목소리”라며 “그가 서면 그곳이 곧 무대의 중심이고 작품의 원줄기”라고 평했다. 2일 아침 고인의 별세 소식을 알려온 국립극단 손진책 예술감독(65)은 “연기의 정점을 보여주면서 후학들에게 하나의 상징으로 남은 존재”라며 “국립극단의 백성희장민호극장은 고인에 대한 후학들의 오마주인 동시에 모든 배우들의 예술적 좌표로 자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고인은 호적상 생년이 1924년이지만 7년 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남으로 내려와 호적 정리를 하는 과정에 오류가 있었다”며 “실제 태어난 해는 1927년”이라고 밝힌 바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1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 영결식은 5일 오전 10시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연극인장으로 거행되며, 경기 성남 메모리얼파크에 안치될 예정이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기고]늙지않는 아름다움과 성스러움 -정웅모 신부

[서울신문]어린 시절 살던 곳은 산골이었지만 5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읍내에 나가 재미있는 세상 구경을 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시장 한 모퉁이의 가설무대에서 벌어지는 공연을 보는 것이었다. 전통 악극단의 공연이나 서커스단의 묘기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재미있었다. 중간에 흥을 돋우기 위해 등장하는 어릿광대들의 몸짓 하나하나도 어린아이들에게는 우상처럼 위대해 보였다. 

우리나라의 광대와 비슷한 인물이 피에로(Pierrot)이다. 피에로는 원래 프랑스의 전통 연극에 등장하는 남성 연기자 가운데서 슬픈 표정을 부각시키기 위해 얼굴을 희게 분장하고 고깔모자를 쓴 배우를 지칭하는 것이다. 피에로는 연극의 앞뒤나 중간 휴식 시간에 등장하여 다양한 표정과 몸짓을 지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피에로의 역할은 다른 배우들처럼 돋보이지 않지만 그들 역시 연극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는 20세기 최고의 종교화가로 불린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주제뿐 아니라 피에로와 같은 소위 보잘것없는 사람들도 즐겨 그리곤 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에서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자애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화폭에 남겼다. 이 같은 그의 따뜻한 마음이 작품 ‘듀오(Duo)’와 ‘젊은 피에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두 작품에 등장하는 피에로는 삶의 모든 버거움과 고단함을 뛰어넘어 아름다우면서도 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10년 전에 나는 프랑스 리옹의 작은 미술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 전시된 여러 작품 가운데서 내 마음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은 것은 루오가 그린 어린 피에로였다. 천진무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작품 속의 피에로는 내 마음을 붙잡고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미술관 문턱을 나서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면서 그 피에로와 눈맞춤을 하였다. 마치 오랜만에 정답던 친구를 만나고 아쉬운 작별을 나누는 사람처럼 어린 피에로와 그렇게 헤어졌다.

그로부터 또 오랜 시간이 흘렀고 나 역시 광대처럼 몇 년간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최근에 귀국하였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색채의 연금술사 루오’전을 관람하던 중 ‘듀오’와 ‘젊은 피에로’ 앞에서는 쉽게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오래전에 리옹의 작은 미술관에서 헤어졌던 어린 피에로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만났던 작품 속의 피에로는 해가 바뀌어도 늙지 않고 여전히 어린이의 모습 그대로 있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듀오’와 ‘젊은 피에로’처럼 세상의 여러 미술관을 다니면서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있을 것이다.

윤복희 "아기 가지면 안되는 계약 탓에 생기는대로 수술" 충격고백


윤복희

‘여러분’의 주인공 윤복희가 “나는 가수였던 적이 없다”고 말해 놀라움을 자아냈다.

tvN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에 출연한 윤복희는 데뷔 61년째를 맞은 무대 인생을 소탈하게 풀어냈다.

윤복희는 “여태까지 나는 가수였던 적이 없다. 그런데 닉네임이 ‘가수’라고 하니 내년에 진짜 가수 데뷔 한 번 해봐야겠다”고 말해 촬영장을 깜짝 놀라게 했다. 뮤지컬 배우, 영화배우, 무대 엔터테이너로 살며 다양한 노래를 불렀을 뿐인데 그 노래들이 히트되며 가수로 인식되었다는 것.

그러면서 그녀는 “내년에 막연히 리사이틀만 하려고 했지, 가수 데뷔는 오늘 이렇게 인터뷰하며 떠오른 아이디어”라며, “레코딩도 해서 CD도 만들어야겠고,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다”는 말해 들뜬 마음을 보여줬다.

이날 방송에서 윤복희는 61년간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 있었던 슬픈 과거사에 대해서도 전했다. 7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마저 아편중독으로 병원에 입원하자 홀로 여관에서 지내게 된 윤복희. 그녀는 “부엌에서 자며 손님들 속옷 빨아서 받은 팁으로 아버지에게 사탕, 담배도 사다 드렸다. 그 몇 달간이 참 힘들었다”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엄마 옆에 가야겠다는 단순한 생각에 “자살하려고 칼을 댔을 정도”라고. 

스타가 된 이후에도 윤복희 개인의 삶은 쉽진 않았다. 공연 무대에 서기 위해 맺은 계약에는 “아이를 가지면 안 된다는 조항”이 있었고, 제대로 피임을 할 줄도 몰랐던 그녀는 “아이가 생기는 대로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늘 회개하고 있다”는 것. 어린 나이부터 학교도 가지 못하고 치열한 생존을 경험해야 했던 그녀의 고단한 인생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이번 인터뷰에서는 윤복희와 재즈의 전설 루이 암스트롱과의 특별한 인연도 공개했다. 5살 때 아버지 故 윤부길 씨를 따라 악극단 무대에서 데뷔한 윤복희는 오디션을 거쳐 미8군 최고의 스타가 된다. 당시 그녀의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는 루이 암스트롱 모창. 그러던 중 동양의 여자아이가 자신을 기가 막히게 모창한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루이 암스트롱은 한국 방문을 하며 직접 윤복희를 찾았다고 한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루이 암스트롱과 듀엣 활동을 하며 그를 ‘팝(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워지게 된 사연 등이 방송을 통해 전해질 예정.

최근 싸이가 빌보드 차트를 점령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지만, 미국과 유럽에서의 국내 최초 한류스타는 사실 윤복희다. 루이 암스트롱과의 인연 이후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게 된 윤복희는 영국의 유명 매니저에게 캐스팅되어 ‘코리아 키튼즈’라는 그룹으로 영국에 진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BBC '투나잇 쇼'에 나가 비틀즈의 히트곡을 불렀는데 다음날 신문의 1면을 장식하게 된 것. 그녀는 “당시 언론에서 ‘비틀즈가 부른 것보다 더 좋았다’고 하더라. 그렇게 갑자기 유명해져 버렸다”며 유럽에서 일약 스타로 떠오른 ‘코리아 키튼즈’ 시절도 회상했다. 

한경닷컴 이미나 기자 helper@hankyung.com

[스타, 그때의 오늘]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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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동아]

1965년 가수 이난영 사망

‘사공의 뱃노래/가물거리면/삼학도 파도 깊이/숨어드는데/부두의 새악시/아롱 젖은 옷자락/이별의 눈물이냐/목포의 설움.’

애잔한 멜로디에 이별의 아픔을 그린 노래 ‘목포의 눈물’. 가수 이난영이 특유의 비음과 창법으로 부른 ‘목포의 눈물’은 1935년에 불렸다. 일제 강점기, 나라 잃은 슬픔에 빠진 이들에게 노래는 커다란 위안이었다. 

1965년 오늘, 이난영이 서울 중구 회현동 자택에서 ‘이별의 눈물’과 ‘목포의 설움’을 안고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48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이었다.

전남 목포의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난 이난영은 15세 때 배우를 꿈꾸며 태양극단에 입단했다. 1년 뒤 막간공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며 가수로 데뷔한 그는 19세 때인 1935년 ‘목포의 눈물’로 수많은 대중의 눈물을 자아냈다. 문일석이 작사하고 손목인이 작곡한 ‘목포의 눈물’은 가득한 한의 애달픈 정서가 대중의 가슴을 후벼 팠고, 노래는 불후의 명곡으로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이난영은 20세 때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했다. 슬하에 7남매를 두고 남편과 함께 해방 이후 KPK악극단을 조직, 가요계를 장악하기도 했지만 김해송이 6·25 전쟁의 와중에 납북되면서 삶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때 아픔으로 이난영은 오랜 세월 고통에 시달렸다.

그 7남매 가운데 한국가요사 최초로 미국 시장에 진출한 김숙자와 애자 등 김시스터스와 김영일, 김태성 등 김브라더스가 있다. 어린 시절 가난한 삶을 함께한 오빠 이봉룡도 ‘낙화유수’, ‘선창’ 등 명곡을 남긴 작곡가이다.

한때 미국으로 건너가 김시스터스 등 자녀와 함께 했던 이난영. 그러나 자신이 그리던 고향과 조국을 잊지 못하고 돌아와 결국 생을 마감했다.

한편 그의 46주기, 그리고 남편 김해송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11일 KBS 1TV ‘가요무대’가 그의 삶과 노래를 되돌아본다.

윤여수 기자 (트위터 @tadada11) tadada@donga.com

[스타, 그때 이런 일이] ‘원조 걸그룹’ 막내 시집간 날…뭇남성 눈물



[스포츠동아]

1967년 김시스터스 민자의 결혼식

“조국에 계신 여러분, 항상 아껴주시고 사랑해주신 덕으로 매일매일 열심히 공부해 지금은 미국 A클래스에 속한 스타와 싱어들과 어깨를 겨루고 있습니다. 우리의 민요를 재즈 혹은 로큰롤 형식으로 불러 미국 흑인들에게 소개해 환영도 받습니다.(중략) 항상 마음은 조국과 여러분께 달리고 있으며 향수에 젖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1969년 김시스터스는 앨범 ‘김시스터스 푸레젠트’를 통해 고국의 팬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김시스터스는 당시 미국 라스베이거스를 본거지로 활동하며 인기를 끌었다. 1959년 미국으로 건너가 ‘찰리 브라운’이라는 노래로 1960년대 초반 빌보드 차트에도 올랐다.

1967년 오늘, 그 인기의 와중에 김시스터스의 막내 민자가 미국인 재즈음악가와 결혼했다. 이미 둘째 애자가 한 달 전 결혼한 뒤였다. 

김시스터스는 ‘연락선은 떠난다’의 작곡가 김해송과 ‘목포의 눈물’의 가수 이난영의 딸인 숙자와 애자, 그리고 이난영의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의 딸 (이)민자로 구성된 그룹. 1950년대 초반 결성해 미8군에서 활약하던 이들은 1959년 미국으로 날아가 라스베이거스 등을 무대로 큰 활약을 펼쳤다. ‘버라이어티’와 ‘라이프’지 등에도 소개됐다.

‘원조 걸그룹’으로 불리며 이제는 아득한 추억 속 가수로 비치기도 하지만 사실 김시스터스는 한국 대중가요사에 명징한 발자국을 남긴 그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악평론가인 신현준 성공회대 교수 등이 위 앨범 인사말을 소개하며 쓴 ‘한국 팝의 고고학 1960년’은 이들이 “미국 대중음악의 다양한 스타일을 섭렵해 뛰어난 노래와 연주를 들려주었다. 14세 때부터 KPK 악극단(김시스터스의 아버지인 작곡가 김해송이 이끈 광복 이후 악극단)의 무대에 선 뒤 미8군 무대에서 인기를 누리며 활동했고 1959년 1월 미국의 라스베이거스로 건너가 ‘에드 설리번 쇼’에 수차례 출연하고 정식 음반을 발매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김시스터스가 ‘여성 보컬팀의 시조’에 그치지 않고 노래뿐 아니라 악기 연주를 겸한 그룹이었으며 후배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오랜만입니다>윤인자씨는…기생서 비구니까지 ‘파란만장’ 인생

황해도 사리원읍에서 태어난 윤인자씨는 태어나자마자 부모 손에서 떼어져 떡장수 집으로 팔려간다. 본명은 윤인순. 

열두 살 때 사리원 기생학교, 권번(券番)에 들어가면서 기구한 인생의 막이 오른다. 평양바 여급, 만주국 수도 신경바 여급, 서울 국일관 기생에 이어 1942년 중국 하얼빈 ‘태양악극단’에 입단하면서 본격 연기생활을 시작, 유치진의 ‘소’에서 주연을 맡는다. 1946년 평양에서 정치선전극 ‘묘향산맥’, ‘불국사의 종소리’등을 순회공연하던 중 월남한다. 1947년 백민악극단의 연극‘홍도야 우지마라’의 기생 홍도역을 맡으며 첫 애인 테너 민영찬과의 애틋한 만남이 시작된다. 1950년 부산에서 예술극회 ‘황진이와 지족선사’의 기생 황진이역을 공연하다 한국전쟁을 맞는다.

1952년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무용극 ‘처용의 노래’를 열연해 성공한 윤씨는 1953년 서울로 올라가 영화배우가 된다. 영화 데뷔 3~4년만에 우리나라 10대 유명배우 반열에 오른다. 윤씨가 최초로 찍은 영화 ‘운명의 손’에서 바의 마담역을 맡았고, 출세작 ‘옥단춘’에서는 평양기생역으로 나온다. 여우조연상을 받은 출세작 ‘빨간마후라’에서는 조종사들을 두루 사랑해주는 푸근한 마담역을 열연한다.

윤씨의 남성 편력도 화려하다. 해방 후 테너가수 민영찬과의 첫사랑에 이어 서울 명동에서 잠시 ‘신라의 달밤’의 현인과 소꿉장난 같은 동거생활을 한다. 이어 맥아더 사령관의 오른팔로,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한 외국인 ‘캡틴 루시’와 헤어진 뒤 극단 신협에서 일하던 민구와 정식 결혼식을 올린다. 성우가 되는 민구와의 결혼도 파탄에 이르고, 30대 중반에 만난 가수 고운봉과의 만남도 오래가지 않는다. 1976년 53세에 법명 법현스님으로 속리산 수정암에 출가했다가 1978년 환속한다. 1989년 66세에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 바라아제’에 노스님역을 연기해 대종상 심사위원특별상, 배우 안성기와 공동으로 영화감독들이 뽑은 연기자상도 받았다. 마지막 출연작은 1999년 양병간 감독의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2005년 여성영화인축제 공로상을 받았다.

시중 판소리 음반 80% 이상 내가 반주"

3월부터 부산예술대 강의 국내 최고 고수 김청만 명고

 
국내 최고의 고수, 김청만(64) 명고가 3월부터 부산 강단에 선다. 부산예술대에 신설된 전통연희과의 대우교수로 장단 실기, 판소리 고법, 전공 실기 등 모두 3과목을 가르치게 된다. 그의 부산 강단은 처음으로, 지금까지 줄곧 서울과 대전의 대학 강의만 맡아 왔다.

"부산 강의는 처음입니다. 그래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습니다." 대학 강의는 올해로 17년째. 그러나 북치는 기술이 아닌, 예인으로서의 됨됨이를 먼저 가르치겠다고 그는 포부를 밝혔다. 그의 부산 행에는 신문범 전통연희과 교수의 몫이 컸다. 전국 28명의 수제자 중 한 명인 그의 청원을 김 명고가 선뜻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매년 전국 각 대학으로부터 강의 초청을 받지만 거절하기 일쑤다. 공연과 강의를 다하기가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 보유자 후보, 국립국악원 지도위원 등의 지위를 갖고 있는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의 고수. "고수는 제게 운명이고 팔잡니다. 어릴 때 부모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기회만 생기면 판소리를 듣고 북과 장구를 두드렸지요." 그가 처음 접한 악기는 설장구였다. 13세 때 동네의 또래 아이들을 모아 달성농악단을 구성한 뒤 마을 대회에 나갔는데 어른 팀을 다 제치고 1등을 차지했다. 이후 악극단의 섭외를 받아 전국을 떠돌았다.

북을 배운 것은 이로부터 훨씬 이후였다. "1963년 임춘앵여성국극단에 들어가 아쟁 연주자로 활동했는데 판소리 공연 때 가끔 북채를 쥔 것이 인연이 됐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른 1981년 국립창극단에서 김동준 선생에게서 북을 체계적으로 배웠고 곧 이어 국립국악원에 들어가 고수로서의 첫 발을 디뎠다. "판소리 다섯마당도 그때 김동준 선생님께 배웠지요. 이후 박동진, 안숙선 선생의 완창 무대에 김 선생님과 번갈아 반주를 맡으면서 고수 이력을 쌓았습니다." 그는 고수에 대해 "소년 명창은 있어도 소년 명고는 없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며 "나이가 들수록 그 말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그만큼 지난한 배움과 숙련의 과정이 필요했다는 얘기였다.

그는 창자(唱者)가 가장 찾고 싶어하는 고수다. 그와 함께하면 누구나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그런 까닭에 그는 지금도 연간 70∼80차례의 공연에 초청되고 있다. 한때는 연 최고 140회의 공연을 치렀다. 그러나 그의 존재감을 가장 강하게 부각시켜 주는 대목은 음반계다. 지금까지 발매된 음반이 무려 150여 장. 전 세계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통틀어도 그만큼 많은 음반을 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판소리 음반의 80% 이상이 내 반주일 겁니다. 지난해에도 세 장인가, 네 장인가를 녹음했죠."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음반을 물었다. "'지음회의 구음 시나위'라고 있는데 5천장 이상이 팔렸습니다." 당대 최고의 소리꾼 7명이 그와 함께한 실황음반이라고 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완창 무대에서 그는 초청 1순위다. 그러나 완창은 고역 중 고역이다. "1∼3시간을 꼬박 같은 자세로 앉아 북을 쳐야 합니다. 허리와 어깨가 성할 수가 없지요." 그는 결국 지난 2003년 허리 수술을 받았다. 지금도 허리보호대를 차고 다닌다. 그의 부산 강단이 더 주목되는 이유다. 백현충 기자 cho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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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뮤지컬 효시는 1941년 '견우직녀'

한국 뮤지컬사/박만규

 

현재 국내 연극판은 뮤지컬이 대세다. 최근 몇 년간 몰아친 뮤지컬 돌풍은 다양한 소재와 방법으로 관객몰이를 하고 있다.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강력한 티켓 파워를 과시한 작품도 나왔고 안중근을 소재로 한 창작 뮤지컬 '영웅'이 호응을 얻기도 했다. 

'미스 사이공' 같은 외국 대작도 국내에서 공연해 관객에게 즐거움을 줬다. 올해도 영화음악의 대가 엔니오 모리코네가 음악 작업에 직접 참여한 대형 뮤지컬 '미션'이 국내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부산지역 소극장도 다양한 소재의 뮤지컬을 무대에 선보이고 있다.

뮤지컬 전성시대에 맞춰 책이 한 권 나왔다. '한국 뮤지컬사'다. 저자가 지난 10여 년 동안 각 극단과 관련 기관을 돌며 발품을 팔고 자료를 모아 국내 뮤지컬 70년사를 정리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현재의 뮤지컬 붐은 일제강점기에도 우리 민족의 정서를 보전하고자 했던 문화예술인의 정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내 뮤지컬의 효시는 1941년 8월 라미라가극단이 부민관 무대에 올렸던 '견우직녀:지상편'. 당시 우리 겨레의 전설(견우직녀)을 소재로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일은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문화예술계까지 친일파가 득세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라미라가극단은 언론계에 몸담았던 설의식과 서항석이 힘을 합쳐 만들었다. 재정난에 허덕이던 '콜롬비아 악극단'을 인수해 민족음계인 계면조에서 사용하는 '라'와 '미'를 따 극단 이름을 지었다. 극단 명칭에서도 저항 의식을 분명히 하고 민족 정서를 유지하려 했던 결연한 의지가 나타난다. 

저자는 1940년대 공연된 '심청전', '하바네라'부터 최근작 '명성황후'까지 국내 뮤지컬 작품을 풍부한 사진 자료를 곁들여 자세하게 설명한다. 뮤지컬의 기본 형식과 스태프 역할도 명시해 뮤지컬 입문서나 개론서 역할도 톡톡히 한다. 

민간 뮤지컬 전문단체 '예그린악단'의 창단과 해산, 세종문화회관 개관, 남북공연단 교환에 얽힌 일화도 흥미롭다. 다만, 작품 줄거리가 다소 장황하고 체계적으로 편집되지 못한 점은 아쉽다. 박만규 지음/도서출판 한울/1천8쪽/8만원. 

김종균 기자 kjg11@

뮤직토크]-(1) 홍난파가 재즈음악가라고요~~

일본 도쿄의 시부야에는 1926년에 개업한 ‘라이언’이라는 클래식 음악감상실이 있다. 80년대 한국 다방에서 볼 수 있었던 붉은 벨벳 소파와 개업 이후 별로 손댄 곳 없어 보이는 실내 장식이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한 켠에 가만히 앉아 주변을 살피면 추억의 깊이는 역사로 다가온다. 예컨대 앞 쪽에 자리하고 남몰래 수다를 떠는 연인은 ‘윤심덕’과 ‘김우진’을 떠올리게 하고, 맨 뒷자리에서 지휘연습에 열중인 남성은 ‘홍난파’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그들의 시대에 와 있구나!

한국에 서구음악이 들어온 것은 당연히 일제강점기의 일이다. 대체로 기생들의 교육기관인 권번에서 불려진 신민요를 시작으로 보지만 본격적인 의미의 서구음악은 ‘쟈스’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쟈스’는 미국에서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재즈의 어원 가운데 하나이지만 한국에서의 의미는 다르다. ‘쟈스’는 일본에서 사용되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경우로 서구음악의 통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바흐나 베토벤의 음악도 당시에는 ‘쟈스’였고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도 ‘쟈스’였다. 음악감상실 라이언에서 밀회를 즐겼을 법한 ‘윤심덕’이 헝가리의 민족작곡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가사를 붙인 ‘사의 찬미’를 발표했을 때 그것은 지금 의미의 클래식도 대중음악도 아닌 ‘쟈스’였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홍난파가 두 번째 일본 유학에서 일시 귀국한 1928년 경성방송국에서 처음 연주한 곡도 ‘쟈스’였다. 참고로 홍난파는 좥나소운좦이라는 예명으로 ‘백마강의 추억’을 비롯해 14곡의 대중가요를 작곡하기도 했다. 

당시의 쟈스는 미국의 빅밴드가 연주하던 스윙 재즈와 유럽의 사교 음악이 대체로 연주되었다. 특히 미국의 스윙 재즈는 한국의 쟈스문화를 주도하던 악극단이나 가극단의 주요 연주 목록이 되면서 193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런 이유에서 초창기 한국 창작음악, 특히 대중음악에서는 미국풍의 재즈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1940년대가 되면서 급격히 변하게 된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은 이 땅의 음악방향도 변화시키는데 적성국인 미국의 음악이 금지되고 이탈리아나 독일 음악이 유행하게 된다. 

이때부터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구분이 등장하게 되며 아직도 그 경계에서 음악적 혼종화(hybridization)를 체득하고 있던 음악인들은 탱고나 룸바, 차차차 같은 라틴 계열의 음악을 수용하게 된다. 시기적으로 조금 뒤의 일이지만 한국에 댄스 문화가 시작되는 것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다. 이처럼 한국대중음악의 시작은 이 땅의 문화변환(transculturation)을 상징하는 일이며 중심에는 ‘쟈스’가 있었다.

권오성 대중음악평론가 museeros@gmail.com

희망을 향해 부른 ‘노란 샤쓰의 사나이’


20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동 KBS홀에서 열린 ‘한명숙 헌정음악회’에서 가수 한명숙(왼쪽 세 번째)씨가 후배 가수인 포미닛 권소현( 〃첫 번째), 임희숙(〃 두 번째), 인순이(〃 네 번째)씨 등과 함께 인사하고 있다. 조선일보 제공

지난 20일 저녁 서울 영등포구 여의동 KBS홀. 무대에 오른 가수 한명숙(75)씨는 감격에 겨운 모습이었다.

지난 1961년 ‘노란 샤쓰의 사나이’로 큰 사랑을 받았던 원로가수의 목소리는 전성기 못지않게 힘이 넘쳤다. 동료와 후배들이 마련한 ‘한명숙 헌정음악회’에는 후배가수 포커스(박학기, 강인봉, 박승화, 이동은), 임희숙, 최백호, 송창식, 박상민, 인순이 등을 비롯해 아이들(idol) 그룹인 포미닛까지 참석했다.

1935년 평남 진남포에서 태어난 한씨는 17세이던 1952년 ‘태양악극단’ 단원으로 데뷔해 한국전쟁 때에는 군예대(軍藝隊) 일원으로 위문공연 무대에 올랐다. 이후 작곡가 손석우씨를 만나 ‘노란 샤쓰의 사나이’, ‘센티멘털 기타’, ‘눈이 나리는데’ 등을 히트시키며 1970년대 말까지 활발히 활동했으나 최근에는 일찍 남편을 잃고 자녀들을 키우며 어렵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동료, 후배들의 도움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번 무대는 지난 9월 창립된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가 마련했다.

이날 헌정음악회에는 모철민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이 참석해 한씨에게 장관 명의의 감사패를 전달했다. 정부는 오는 11월22일을 ‘대중문화예술의 날’로 제정해 대중문화예술인들의 사회적 위상과 명예를 높이고 이들이 자부심을 갖고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할 방침이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대중문화예술인들은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연소득이 1000만원도 안 되는 경우가 70%에 달한다”며 “이명박 대통령께서도 대중문화 발전에 기여한 원로예술인들의 처우개선과 대중문화예술 진흥대책을 마련하도록 당부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이번 헌정음악회에도 문화부가 1000만원을 지원했으며 11월22일 대중문화예술의 날 제정을 계기로 대중문화예술상을 신설해 문화훈장, 대통령 표창, 국무총리 및 문화부장관 표창 등도 시상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동현기자 offramp@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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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 악극단처럼 친밀한 진은숙표 音色에 빠져보세요

서울시향 상임작곡가 ‘아르스 노바’시리즈 16·20일 공연

다른 장르들에서는 10년만 흘러도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데, 유독 클래식 음악만은 바흐나 베토벤, 슈베르트 같은 수백년 전 작곡가의 음악들이 변치 않고 대중의 사랑을 받는 현실이 의아할 법도 하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도 쉼없이 흘러왔고 지금도 새로운 명곡들이 어디선가 태어나고 있다. 난해하다는 이유로 쉬 귀를 기울이지 않지만 일단 접해보면 음악의 새로운 흐름과 동시대의 기운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확보할 수 있다.

이러한 공연의 대표적인 사례가 진은숙(49) 서울시립교향악단 상임작곡가가 5년 전부터 마련해온 ‘아르스 노바’ 시리즈다. 

◇헝가리 출신 메조소프라노 카탈린 카롤리는 만년의 리게티가 그녀를 위해 작곡한 원작을 부른다.
오는 16일 세종 체임버홀과 2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2010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III & IV’는 현대음악에 대중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민속음악을 활용한 곡들을 집중적으로 선보인다.

첫날 공연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작품은 한국에서 초연하는 진은숙의 ‘구갈론-거리극의 장면들’이다. 

진씨가 2009년 지멘스 프로그램 후원으로 홍콩에서 한 달간 거주하며 그곳의 인상을 음악으로 표현해낸 작품으로, 어린 시절 한국 변두리 장터의 악극단이나 약장수 공연을 연상하며 만들었다.

진은숙씨는 “홍콩 거리의 첨단 빌딩들 사이에도 한국의 1960∼70년대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 있어 놀랐다”면서 “노천시장 풍물들을 보면서 라디오도 TV도 즐길 수 없던 시절에 동네 사람들이 웃고 울었던 뜨내기 약장수들의 엔터테인먼트를 살려보았다”고 말했다. 

‘커튼의 극적인 걷힘’으로 시작해 ‘대머리 가수의 애가’ ‘틀니를 끼고 히죽거리는 점쟁이’ ‘오두막을 둘러싼 춤’으로 구성된 이 작품으로 2009년 베를린 초연무대에서 청중들의 극찬을 받았고, 지난달에는 ‘모나코 피에르 대공 작곡상’까지 수상했다.

첫날에는 이 밖에도 헝가리 시인의 짧은 시에 붙인 리게티의 연가곡 ‘피리, 북, 깽깽이 사이로’를 메조소프라노 카탈린 카롤리가 협연하며, 한국의 젊은 작곡가 김희라의 ‘결’을 비롯해 민속음악 색채를 대표적으로 활용한 스트라빈스키의 노래곡, 유럽의 영향을 받지 않고 민속음악에 거의 직접적으로 노출된 멕시코 작곡가 실베스트레 레부엘타스의 곡도 아시아 초연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현대음악의 숙련된 해석자라는 평가를 받는 파스칼 로페가 서울시향을 지휘한다.
두 번째 공연은 엔리코 차펠라가 축구경기를 음악으로 표현한 ‘인게수’로 막을 연다. 멕시코가 브라질을 이겼던 1999년 FIFA(국제축구연맹) 컨페더레이션스컵 결승전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악기마다 당시 뛰었던 선수 이름을 부여해 직접적인 감흥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든 곡이다. 2009 윤이상국제작곡콩쿠르에서 1등상을 차지했던 마누엘 마르티네스 부르고스의 ‘시빌루스’도 흥미롭다. 터키 스페인 멕시코 네팔 알래스카 등지의 휘파람 소리를 차용해 만들었다.

곡의 규모가 방대하고 많은 금관악기가 등장해서 유럽에서도 자주 연주되지 못하는 레오시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도 레퍼토리에 포함됐다. 이 곡은 베스트셀러로 각광받는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도입 부분에 언급돼 대중에게도 제법 알려진 작품이다. 

이번 ‘아르스 노바’에서는 현대음악의 숙련된 해석자라는 평가를 받는 파스칼 로페가 서울시향을 지휘한다. 헝가리 출신 메조소프라노 카탈린 카롤리는 만년의 리게티가 그녀를 위해 작곡한 원작을 부른다.

한편 아르스 노바를 기획해 5년째 끌고 온 진은숙은 지난 9월30일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현대음악 프로그램 예술감독으로 선임됐다. 

특히 아르스 노바 프로그램을 높이 평가해 선정한 것으로 알려져 한국의 현대음악 프로젝트가 유럽 무대에 역수출되는 개가를 올린 것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조용호 선임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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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복희 오빠 윤항기, 시상식서 피 토하고 쓰러진 사연은?
  2010-05-27 12:19:21


[뉴스엔 유경상 기자]

노래하는 목사이자 가수 윤복희의 오빠로 잘 알려진 가수 윤항기(68)가 과거 전성기 때 시상식에서 공연 중 피를 토하고 쓰러진 사연을 밝혔다.

윤항기는 5월 27일 방송된 KBS 2TV ‘여유만만’에서 “두 번의 폐결핵을 앓았다”고 고백했다.

이날 윤항기는 “국내 공연만으로 돈을 벌 수 없어 해외로 나갔다. 베트남 공연 당시 무리했다. 폐결핵에 걸렸다. 폐결핵은 당시만 해도 죽는 병이었다”고 처음 폐결핵을 앓은 사연을 털어놨다.



이어 윤항기는 “치료 후 1971년 ‘윤항기와 키브라더스’를 조직해 다시 무리한 일정을 이어갔다. 폐결핵이 통증은 없다. 병을 잊고 일했다. 힘들면 술 마시고 흡연도 했다”며 “70년대 중반 최고 절정기 시절, 연말 수상을 앞두고 공연 중 피 토하며 쓰러졌다”고 말했다.

윤항기는 “당시 너무 야위어서 커 보이려고 항상 흰옷을 입고 다녔다. 정신을 잃고 병원에 갔는데 폐결핵 말기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39세였다”고 덧붙였다.

윤항기는 아내 전경신 씨의 간호로 병마에서 벗어났다. 이날 방송에서는 아내 전경신 씨 역시 식도암으로 투병한 사연을 털어놔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한편 윤항기는 1979년 서울 국제가요제에서 '여러분'으로 동생 윤복희와 함께 대상을 수상한 남매가수로 유명하다. 아버지 윤부길과 어머니 고향선(본명 성경자) 또한 국내 최초로 악극단을 설립한 예술인. 일찍이 부모님을 잃은 윤항기-윤복희 남매가 고아나 다름없이 자라 훌륭한 음악인이 된 것 역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윤항기는 ‘장미빛 스카프’ ‘나그네’ ‘별이 빛나는 밤에’ 등의 히트곡을 낳은 가수이자 작곡가로 현재 예음예술종합신학교 학장으로 재임중이다. 윤항기의 아들 윤준호(36) 역시 같은 학교 실용음악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유경상 yooks@newsen.com

별세한 원로가수 백설희

원로가수 백설희(본명 김희숙)씨가 5일 오전 3시께 향년 8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고혈압 합병증으로 타계한 백씨는 가수 전영록의 어머니이자 티아라 보람의 친할머니로, 이들 가족은 3대째 연예인 가문의 명맥을 이어왔다. 남편은 지난 2005년 먼저 세상을 떠난 원로배우 황해(본명 전홍구)씨다.

백씨는 ‘봄날은 간다’ ‘목장 아가씨’ ‘물새 우는 강언덕’ ‘청포도 피는 밤’ ‘코리아 룸바’ 등 발표하는 곡마다 히트시킨 1950~60년대 최고의 인기 여가수다. 특히 ‘봄날은 간다’는 백씨 특유의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한국 트로트 특유의 한(恨)의 정서를 잘 표현해 큰 사랑을 받았다. 그는 1943년 조선악극단에서 운영하던 음악무용연구소에 들어간 이후 조선악극단원으로 활동했으며, 1953년 작곡가 고 박시춘씨를 만나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1996년에는 KBS 가요대상 특별공로상을 수상했으며, 2010년에는 제16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특별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

김남희 / 여성신문 기자 (knh08@womennews.co.kr)

아들 전영록·손녀 보람, 눈물로 마지막 길 지켜

지난 5일 별세한 원로가수 백설희(본명 김희숙)씨의 영결식이 7일 오전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서 열렸다.

고인의 마지막 길에는 아들인 가수 전영록씨를 비롯해 손녀인 그룹 티아라의 보람 등 유족과 탤런트 김보성씨 등 후배 연예인들이 함께했다. 오전 7시 30분쯤 고인의 영정은 짧은 추도예배를 마친 뒤 장지인 경기 광주시 오포읍 삼성공원으로 향했다. 

6·25 당시 전선을 돌며 위문공연을 펼친 공로를 인정받은 고인은 지난 1990년 참전 국가유공자로 지정됐으며 이날 고인의 관은 태극기가 덮인 채 운구됐다. 지난 3일 동안 고인의 빈소에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을 비롯해 금사향, 이미자, 인순이 등 선후배 가수들과 이덕화, 독고영재, 조형기, 박준규, 최수종 등 후배 연예인들이 조문해 명복을 빌었다. 

1943년 조선악극단원으로 데뷔해 ‘봄날은 간다’, ‘물새 우는 강언덕’, ‘청포도 피는 밤’ 등 히트곡으로 1950∼1960년대 최고의 여가수로 활동했던 그는 여든 세 해의 생을 마치고 남편 고 황해(본명 전홍구)씨 옆에 영면한다. 

이동현기자 offramp@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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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라 보람 할머니 원로가수 백설희 5일 향년 83세로 별세
2010. 05.05(수) 10:34
티브이데일리 포토
[티브이데일리=최준용 기자] 원로가수 백설희(본명 김희숙)가 오늘(5일) 새벽 3시 고혈압 합병증으로 향년 83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 25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7일. 


고인은 지난 2005년 향년 85세의 나이로 별세한 영화배우 고 황해(본명 전홍구)의 아내이며, 80년대를 풍미한 인기가수 전영록의 어머니로 최근까지 고혈압에 따른 합병증으로 투병 중이었다. 또한 티아라 보람(본명 전보람)의 친할머니이기도 하다.


1950, 60년대를 풍미했던 고인은 1943년 조선악극단원으로 데뷔, '봄날은 간다', '물새우는 강언덕', '청포도 피는 밤' 등의 히트곡을 발표,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티브이데일리=최준용 기자 issue@tvdaily.co.kr]

"나 죽는 날이 은퇴하는 날이지…" 2년 후면 데뷔 60년



● '전국~노래자랑~' 장수MC… 85세 '젊은 오빠' 송해

'노래자랑' 29년째 진행 전국 누벼

20여년 전 외아들 잃고 한동안 실의

최근 은행 CF 출연 또한번 '대박'

"고향 황해도 가서 방송해보는 게 꿈" 

최고(最古)에서 최고(最高)가 됐다. 그것도 대한민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시상식에서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섰으니 정말 최고다. 올해 한국나이로 86세, 미수(米壽ㆍ88세)가 코앞인 사람 얘기다.

'국민 MC' 송해(宋海ㆍ85)가 지난 23일 한국광고협회 선정 2012 대한민국광고대상 최고광고모델의 영예를 안았다. 송해는 올해 'IBK 기업은행-모두의 은행 편'에 출연해 국민적 사랑을 듬뿍 받은 '비공인' 세계 최고령 MC다.

"송해의 출연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다 제쳐두고 IBK 기업은행만 찾았다"는 말도 과하지 않았다. 실제로 송해 출연 광고를 보고 IBK 기업은행에 맡긴 예금만도 1,200억원 이상이라고 한다.

조준희 행장이 직접 고안했다는 '기업은행은 기업만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거래할 수 있는 은행이고 기업은행에 예금하면 기업을 살립니다'라는 광고문구와 송해의 '믿음 이미지'가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했다는 후문이다.

이뿐 아니다. 지난 15일 김재경 새누리당 의원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송해는 은행 광고 효과 부문에서 '피겨여왕' 김연아, 톱스타 장동건 등 당대 최고들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김연아의 모델료가 10억원, 장동건이 7억5,000만원이었던 반해 송해는 3억원이었다.

자고 나면 새 얼굴이 등장하는 연예계에서 송해처럼 오랫동안 활동하는 또 오랫동안 사랑받는 사람은 정말 드문 것 같다. "사명감이 있으니 힘이 절로 난다"는 송해는 "국민들이 주는 에너지로 지칠 겨를이 없다"며 몸을 낮춘다.

송복희에서 송해로

송해는 1927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그 역시 실향민이다. 고향 땅 한 번 밟아 보는 게 송해의 오래된 소원이다. 송해는 언젠가 "내 마지막 소원은 고향에서 '전국노래자랑' 황해도 편'을 진행해보는 것"이라고 했다.

1960년대 발매된 송해의 노래가 실린 앨범 표지.

해주예술학교 성악과를 나온 송해는 6ㆍ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951년 1ㆍ4 후퇴 때 혈혈단신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때 송해는 본명인 송복희(宋福熙)를 버리고 지금의 송해가 됐다. 배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이름을 해(海)로 바꾼 것이다.

송해는 전쟁 후 2년 뒤인 1955년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로 데뷔하며 연예계와 인연을 맺는다. 이때를 기준으로 하면 송해의 연예계 생활은 올해로 58년째, 3년만 더 있으면 연예인 생활 환갑을 맞는다.

악극단 시절부터 송해의 끼는 남달랐다. 송해는 명콤비였던 고(故) 박시명과 함께 동아방송 라디오 '스무고개'를 통해 큰 인기를 얻었다. 또 송해는 1974년부터 17년 동안 KBS 라디오 교통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를 진행했다. MBC TV '웃으면 복이 와요' 등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구봉서, 고 배삼룡 등과 함께 국민을 웃겼다.

희극인 1세대로 활약하던 송해가 '국민 MC'가 된 것은 1984년 '전국노래자랑'의 사회를 맡으면서부터. 올해로 29년째 이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고 있는 송해는 전국민의 일요일 낮을 책임진다. 송해의 "전국~노래자랑" 외침은 누구도 흉내내기 어렵다.

송해의 영역은 방송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송해는 지난해 9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자신의 첫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그리고 콘서트 실황을 담은 DVD 판매 수익금은 독거노인을 위해 기부했다. 사랑을 받은 만큼 되돌려주자는 게 송해의 지론이다.

올해 한국나이로 86세, 연예계 데뷔 58년 째. 송해는 정말 이름처럼 복(福)이 밝게 빛나는(熙) 사람이다. 각종 기자회견이나 인터뷰 때 송해는 "시청자들의 사랑 덕에 여기까지 왔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지난 5월 송해의 콘서트를 주관했던 기획사는 정식으로 영국에 있는 세계기네스협회에 '연예인 최고령 단독 콘서트'로 기네스 기록 신청을 마쳤다. 한국에도 기네스협회가 있었으나 2001년 7월 인증이 해지됐다.

한국에서는 이순재(77) 패티김(74) 등이 70대 중ㆍ후반임에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80대는 송해가 유일하다. 또 해외에서도 80대 현역 연예인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천생 복인(福人)인 송해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피맺힌 한이 서려 있다. 20여 년 전 당시 대학교 2학년이던 아들이 한남대교에서 오토바이 사고로 꽃 같은 목숨을 잃었다.

"지금도 한남대교를 못 건너. 강북에서 집(도곡동)에 갈 때도 한남대교를 넘을 것 같으면 동호대교로 돌아가지. (아들이 사고 난) 자리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데."

송해는 지금도 사고 직후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들의 "아버지, 살려줘"라는 절규를 잊지 못한다. 그게 자신의 목숨과도 같았던 아들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송해가 17년이나 진행했던 '가로수를 누비며'라는 교통방송을 그만뒀던 것도 먼저 떠난 아들 때문이었다.

다시 일어선 송해

지난 9월 송해는 자신의 '절반'과도 같았던 친구를 먼저 떠나 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전국노래자랑'에서 악단장을 맡았던 '땡아저씨' 김인협(71)씨가 지병으로 세상을 등진 것이다.

송해는 슬픔을 이기기 어려웠다. 송해는 "전국노래자랑이 자기 자신이駭?친구였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장례식장을 찾은 송해는 "진작 요양이라도 보낼 걸 그랬다"며 애꿎은 하늘만 쳐다봤다.

패티김

고 김 단장은 지난해 6월 병원에서 폐암 선고를 받고 '전국노래자랑'에서 잠정 은퇴했다. 하지만 연말결선 등 중요한 무대에는 치료도 미룬 채 참석할 만큼 '전국노래자랑'에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보였다.

고 김 단장은 1984년부터 송해와 '전국노래자랑'을 함께 하며 형제 이상의 친분을 쌓았다. 출연자가 난감한 요구를 하면 송해는 늘 고 김 단장의 등을 떠밀었다. 또 누군가 맛깔스러운 음식을 내밀 때도 송해는 고 김 단장에게 먼저 권했다. 둘은 나이를 떠나 형제이자 친구였다.

고 김 단장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사실 송해도 몸이 좋지 않았다. 송해는 지난달 22일 '전국노래자랑' 녹화에 불참했다. 송해는 "단순한 감기일 뿐"이라고 했지만 '건강 이상설'이 나돌았다. 남의 말 쉽게 하는 사람들은 "아유, 송해 나이가 몇이야?" "이젠 그만둘 때도 된 것 아냐?" 라고 소근거리기도 했다.

송해는 그러나 지난 22일 KBS2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 녹화에 참여해 건재를 과시했다. 이에 앞서 송해는 이달 초 '나팔꽃 인생 60주년 송해 빅쇼 시즌2'에 출연하는 등 다시 왕성한 활동을 재개했다.

'전국노래자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송해이지만 잠시 떠났던 적이 있었다. 송해는 1994년에 6개월 정도 방송을 그만뒀었다. 겉으로야 건강이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프로그램 진행을 놓고 연출가들과 이견이 컸기 때문이었다.

복귀한 뒤로도 송해와 연출가들의 다툼은 계속됐다. 단, 달라진 게 있다면 격한 논쟁 후 부드러운 술자리였다. "다툰 뒤에는 꼭 소주를 나눠 마시면서 화해합니다. 다 프로그램 잘되자고 한 것이니 서로 이해할 수밖에 없더더라고요."

'젊은 오빠'가 듣기 싫지 않다는 송해지만 그 흔한 휴대폰 하나 없다. 왠지 구속되는 것은 싫은 모양이다. 대신 송해는 요즘도 서울 낙원동에 있는 사무실에 지하철로 출퇴근한다. 사무실은 원로 영화배우, 감독, 작가, 코미디언, 가수 등은 물론이고 주민들도 무시로 드나드는 쉼터다.

송해는 '전국노래자랑'에서 보다 많은 즐거움을 주기 위해 촬영 전 먼저 지역에 내려간다. 주민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이야기를 나눠야 더 좋은 방송이 나온다는 게 송해의 지론이다. 순댓국과 소주만 있으면 누구와도 어울리는 송해다.

'전국노래자랑'이 최장수 프로그램이 된 비결은 뭘까. 송해는 각본에 따라, MC에 의해 움직이는 기존 프로그램과 달리 '전국노래자랑'에서는 출연자들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뒀다. 그랬더니 더 재미있는 명장면들이 많이 나왔고, 자연스럽게 프로그램은 장수 반열에 오르게 됐다.

3년 뒤인 2015년이면 연예계 데뷔 환갑을 맞는 송해. 우리는 언제까지 송해를 볼 수 있을까. "언제 은퇴할 거냐고? 내가 죽는 날이 은퇴하는 날이지." 

● 송해는 누구

출생: 1927년 4월27일

출생지: 황해도 재령

본명: 송복희

김영옥

애칭: 국민 MC, 젊은 오빠

신체조건: 162㎝ 60㎏

데뷔연도: 1955년 창공악극단

학력: 해주예술학교 성악과

주요 프로그램: 동아방송 라디오 '스무고개'

KBS 라디오 '가로수를 누비며'

MBC TV '웃으면 복이 와요'

KBS TV '전국노래자랑'

수상: 2010년 제6회 환경재단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

2010년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 특별상

2012년 대한민국광고대상 최고 광고 모델 선정

"한국전 휴전" 가장 먼저 알려

● 통신병 송해 육본 근무때


황해도 출신인 송해는 1951년 남한으로 내려왔다. 연평도에서 배를 타고 꼬박 사흘 걸려 부산까지 왔다.

이순재

송해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육군통신학교로 갔다. 워낙 사정이 급했던 때라 송해는 6년제 과정을 단 3개월 만에 끝내야 했다. 선임병들에게 매를 맞는 게 무서워 화장실에 숨어서 밤새도록 모스부호를 외웠다.

학교를 졸업한 송해는 육군본부에서 통신병 임무를 맡았다. 그렇게 송해의 군생활은 시작됐고, 어느 날 전군(全軍)에 전보 한 통을 날리라는 급박한 명령을 받았다.

'1953년 7월27일 밤을 기해 모든 전선에서 휴전한다'는 내용이었다. 송해는 반백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그 전보를 칠 때 손끝의 떨림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78세 이순재 맹활약… 74세 패티김도 '펄펄'

● 현역 원로 연예인들


국내 연예계에는 송해(85)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원로들이 적지 않다. 특히 이들은 브라운관을 통해 안방극장에서 지금도 시청자들과 자주 만나고 있어 이웃집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푸근함을 준다.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으로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던 이순재는 1935년생으로 한국나이 78세다. 이순재는 요즘도 각종 드라마는 물론이고 광고모델로도 맹활약하고 있다.

각종 드라마, 사극에 이어 시트콤에서도 진가를 발휘했던 신구(본명 신순기)는 이순재보다 한 살 적은 1936년생이다. 신구 역시 보험사의 광고모델로 발탁되며 이순재와 다시 한 번 '라이벌'임을 입증했다.

여자 배우 중에는 김영옥(75)이 노익장을 과시하는 대표적인 케이스다. 할머니 역할로 친숙한 김영옥은 50년 경력의 베테랑 배우이자 MBC 공채 성우 출신이다.

김영옥은 1976년에 개봉한 만화영화 '로봇 태권V'의 훈이 역할과 '마징가 Z'에서 철이 역할의 성우를 맡았었다. 김영옥의 트레이드마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이순재와 부부로 호흡을 맞췄던 나문희는 한국나이로 72세다. 나문희는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패티김(74ㆍ본명 김혜자)은 금년 초 은퇴를 선언했지만 최근 들어 종합편성채널 프로그램 MC를 맡는 등 전성기 못지않은 정력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또 패티김과 필생의 라이벌인 이미자(71)도 어느덧 고희(古稀)를 넘어섰지만 청아한 목소리만은 여전하다.

22년간 방송됐던 '전원일기'를 통해 '국민 아버지'와 '국민 어머니'로 자리매김한 최불암(본명 최영한)과 김혜자는 1940년과 1941년에 태어났다.

최불암은 안방극장과 내레이터로, 김혜자는 안방극장과 해외봉사활동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최경호기자 squeez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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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상엿소리꾼 오충웅 옹

▲이제 가면 언제 오나 김준수 지음 | 알마 | 216쪽 | 1만5000원

"어널 어널 어널이 넘자 어널/ 밀고 당기고 올라가네 북망산천으로 올라가네…" 

상엿소리는 죽음의 끝자락을 함께하고 다음 세상을 보살펴주는 노래다. 그 유래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의 조카를 중국 제나라 왕으로 옹립하고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전횡이 한나라의 유방에게 밀려 섬으로 도망갔다가 결국 포로가 되어 낙양으로 향하던 중 "유방을 섬길 수 없다"며 자결한다. 사람들이 그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부른 '해로가'와 '호리가'가 상엿소리의 시작이라고 한다. 상엿소리는 장례 절차가 간소화되고 납골당이 생긴 요즘 주변에서 듣기가 쉽지 않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는 사라지는 직업의 하나가 되어버린 상엿소리꾼의 삶을 기록했다. 전라도 강진의 상엿소리꾼 오충웅 옹이 주인공이다. 게이 인권운동가, 에이즈에 감염된 동성애자 등 성소수자를 한 명의 사람으로서 담담하게 기록했던 사진가 김준수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기록했다. 

1936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해방 뒤 아버지의 고향인 강진으로 돌아온 오충웅 옹은 넘치는 '끼'를 주체하지 못하고 가수가 되고 싶어 약장수, 악극단을 쫓아다닌다.

"서울로 갔으믄 출세혔을지 모를 거인디, 어쩌다 남쪽으로 간 거요. … 악극단을 따라 댕기는디 밤무대여, 밤무대란 말씨. … 난 매번 재창을 받아갖고 해부렸제, 내가 최고로 인기 좋았음께." 

가수를 꿈꾸며 관중 앞에 섰던 '쪼깐하고 이쁘게 생긴' 그는 결국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노래는 상엿소리로 이어졌다. 

남의 논에서 농사를 짓기도 하고 날품팔이를 하며 살기도 하던 그는 어느날 초상집에서 흘러나오는 상엿소리에 꽂혔다.

"가락이 참 좋드랑께. 거 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막막허니, 나도 모르게 미친놈마냥 흥얼흥얼 따라한단 말여, 그래서 그 놈을 내가 배와서 한번 해바야 쓰것다 생각허는디,…" 그는 "초상이 났다 카면 쫓아가고 또 쫓아가불고"하며 소리를 배웠고 무당에게서 배우기도 했다. 

그는 장례 간소화와 납골당 이용으로 상엿소리를 안 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녹음기가 그의 소리를 대신하는 건 참을 수 없다고 했다. "아직 나가 짱짱한디, 거 몇 푼 아낄라고, 그캐? 참말로." 천직으로 알고 해왔는데 다른 소리꾼도 아니고 기계 소리에 밀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그는 소리를 그만 해야겠다고 다짐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의 소리를 들어본 사람이 또 찾아오면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마지막 가시는 길을 부탁허는디 어찌 거절할 수 있겄는가?" "내일 다시" 초상이 난 옆 마을로 소리를 하러 가는 그는 또 다시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소리로 많은 사람들을 위로할 터이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운명의 손’ ‘빨간 마후라’ 원로배우 윤인자씨

영화 ‘운명의 손’ ‘빨간 마후라’ 등에 출연한 원로배우 윤인자(본명 윤인순)씨가 20일 오후 6시쯤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1923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3년 중국 하얼빈 태양악극단에 입단하면서 연기자의 길을 걸었다. 1947년 연극 ‘홍도야 우지마라’ 주연을 맡은 그는 1954년 ‘운명의 손’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데뷔작에서 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키스신을 선보였다. 이후 ‘태양을 등진 사람들’ ‘민검사와 여선생’ ‘수탉’ ‘변금련’ 등 40여 작품에서 주연 및 조연을 맡으며 강한 성격의 여성 캐릭터를 연기했다.

1965년 신상옥 감독의 ‘빨간 마후라’로 대종상 영화제 여우조연상을 받았고, 1989년 대종상 심사위원 특별상과 백상예술대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2005년 여성영화인모임의 여성영화인축제에서는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딸 고연실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수유동 대한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2일 오전 9시(02-992-4444).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고 이주일-엄용수-전원주, 방송 부적합 외모로 출연 금지
김명신 기자 sini@dailian.co.kr | 2012.08.17 10:5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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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송캡처

천재 코미디언 고 이주일이 18년이라는 오랜 무명을 겪어야 했던 사연이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17일 방송된 MBC <기분좋은날>에서는 고 이주일의 10주기 추모 특집이 그려졌다. 생전 절친했던 후배 최병서와 배연정, 전원주, 엄용수가 출연해 그의 활약상을 회고했다. 

전원주는 "공연에 함께 참여하게 되면서 인연을 맺었다. 내가 이주일씨 와이프하고 비슷하다는 이유로 30주년 기념 공연에 참여했고, 이후 지방 공연을 같이 다니며 우정을 쌓았다"라고 회상했다. 

배연정은 "극장쇼 마지막 주자가 배연정, 배일집이었다. 당시 유랑극단 전속 단원이었던 이주일은 사회를 보며 그 능력을 발휘했다. 그의 외모가 하도 독특해 처음 보자마자 눈을 뗄 수 없었던기억이 난다"라고 첫만남을 전했다. 

고 이주일의 성대모사로 개그맨이 된 최병서는 "1982년 개그콘테스트 심사위원이었던 이주일 선배와 성대모사 맞대결을 했고, 결국 인기상, 대상 모두 다 탔다. 그 기록은 나밖에 없다"라고 각별한 인연을 과시했다. 

1965년 샛별 악극단 사회자로 활약하며 18년 무명 생활 후 본격적으로 TV 데뷔에 나선 고 이주일은 당시 
방송에 부적합한 얼굴이라며 출연 거절을 당했다고. 이후 방송 출연 허락 후 2주만에 온 국민의웃음을 이끌어내며 최고의 스타 자리까지 오르게 됐다. 

그러나 5공화국 당시 또 다시 방송 출연 금지를 당했는데, 이유는 저질코미디와 외모라고. 하지만 8개월 만에 복귀했고, 이전과는 다르게 현세대 풍자하는 개그까지 더 해져 최고의 인기로 각종 시상식의 상을 휩쓸었다. 

최병서는 "사실 고 이주일 선배도 그랬지만 엄용수도 비호감 외모라고 출연 정지를 당했다. 라디오만 1년했다"라고 깜짝 폭로 했다. 이에 엄용수는 "그건 아니고.. 그런 과는 맞다"라고 인정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 전원주 역시 "나 또한 입 큰 여자가 너무 심하게 웃는다고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정지를 당했었다"라고 털어놔 눈길을 끌었다. 

한편, 최고의 희극인 이주일은 2001년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투병을 시작해 2002년 8월 27일 끝내 별세했다. 향년 63세였다.

걸그룹, 역사를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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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멘트]

우리 가요계는 물론이고 세계에서 한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주역, 바로 걸그룹이죠.

이런 걸그룹의 역사는 얼마나 됐을까요?

양일혁 기자가 소개합니다. 

[리포트]

소녀시대의 멤버 셋이 뭉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유닛 그룹 '태티서' 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 역시 유닛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악극단에서 활동한 여성 단원들로 구성된 '저고리 시스터'입니다.

악극단 공연 때 3-4명이 코너를 맡아 노래를 불러 당시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목포의 눈물' 이난영이 핵심 멤버였는데,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딸과 조카를 훈련시켜 삼인조 걸그룹 '김시스터즈'를 키워냈습니다.

김시스터즈는 우리나라 최초로 미국까지 건너가 음반을 내고 빌보드 차트까지 진입했습니다. 

1960년대 브라운관 시대, 텔레비젼이 보급되면서 걸그룹은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펄시스터즈는 신중현의 야심작 '커피 한 잔'으로 걸그룹 최초로 가수왕을 차지했고, 바니걸스는 지금봐도 아찔할 정도의 '하의실종'패션으로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습니다.

국민가수 인순이 씨가 젊은 시절 몸 담은 희자매는 육감적인 몸매로 군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인터뷰:최규성, 대중음악평론가]

"(60년대) 정말 다양한 음악 장르가 공존하면서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대와 즐거움을 줬던 거죠. 그 중심에 걸그룹이 있었던 거죠."

지난 70년 동안 우리 가요사를 풍미했던 걸그룹은 5백개팀이 넘습니다.

그들의 발자취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회에선 지금까지 빛을 보지 못한 희귀 영상과 자료들이 많아 흥미를 더합니다.

YTN 양일혁[hyuk@ytn.co.kr]입니다. 



[한국 여배우 열전 
































[밀물 썰물] 반야월의 노랫말 인생


KBS 가요 프로그램인 '가요무대'가 2005년 20주년을 맞아 '가요무대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최다 출연자는 주현미로 거의 두 번에 한 번꼴로 나왔다. 가장 많이 방송된 가요는? 반야월이 작사한 '울고 넘는 박달재'로 107회 방송됐다. 7년이 지났으니 이 집계가 달라졌을 수 있겠다. 그럼 그 노래를 부를 때 '천둥산, 천동산, 천등산'이라고들 하는데 어느 것이 정확할까. 일부 노래방 기기에는 천둥산으로 나오지만 천등산이다. 하늘까지 오른다는 의미라고 한다.

해방 후 반야월은 남대문 악극단을 조직, 지방 순회공연을 떠났다. 충주에서 공연을 마치고 제천으로 향했다. 트럭 한 대에는 무대 장치물을 싣고 버스 한 대에는 단원들을 태우고 고개를 넘을 때였다. 앞서 가던 트럭 타이어에 펑크가 나 멈춰섰다. 고갯마루에서 길 가던 한 농부에게 이 고개 이름이며 산 이름을 물었더니 박달재라고 했다. 산모퉁이를 돌아보니 부부인 듯한 두 사람이 성황당 돌무덤 앞에서 이별의 정을 나누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이 장면과 느낌들을 메모했다가 만든 노랫말이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이다.

그가 가장 애착을 갖는 작품은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고 한다.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1950년 피난길에서 엄마 등에 업힌 채 영양실조로 숨진 어린 딸의 비극을 토대로 쓴 작품이었다. 5천여 곡에 이른다는 그의 노랫말에는 해방 전후부터 우리 부모들이 살아온 시대의 애환이 잘 담겨 있다. 트로트가 "흘러간 가요가 아니라 흘러온 가요"라는 그의 말이 새삼스럽게 떠올려진다.

'노래비를 가장 많이 보유한 작사가'이지만 예명은 보름달이 아니라 반야월(半夜月)이다. 곧 일그러질 보름달보다 앞으로 점점 커질 반달이 희망적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지었단다. 그가 엊그제 별세했다. 유감스러운 것은 죽음을 통해 비로소 존재감을 알았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가 무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강종규 수석논설위원 kang@busan.com

영원한 막둥이 코미디언 구봉서, 어떻게 지내십니까?



[미션라이프] “웃는 게 습관이 돼서 문제가 될 때도 있어요. 상가집에 가서도 웃으면서 인사해 가끔 가다 말도 듣고 그래요. 집사람도 잘 웃어요. 목사님 설교를 들을 때도 내가 보면 별 것도 아닌데 혼자 낄낄대며 웃어요.”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잃지 않고 있는 구봉서(85·예능교회) 장로는 영락없이 막둥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최근 서울 잠원동 자택에서 만난 구 장로는 허리통증과 관절염으로 몸놀림이 자유롭지 않았지만 그의 수족 같은 부인이 곁에 있어 마냥 행복해 보였다.

구 장로는 1960년대 TV방송국 개국과 함께 안방극장에 진출, 비실이 고(故) 배삼룡, 후라이보이 고 곽규석씨와 콤비를 이루며 70년대 한국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구수한 입담과 풍자로 서민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던 구봉서. 현재 그는 방송 활동을 접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을 살고 있다.

-몇 년 전까지는 기독교 관련 방송에서 간증을 들을 수 있었는데 요즘은 뵐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지내세요.

“할 일 없이 앉아있는 사람은 시간이 더디 간다고 하는데 난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거 같아요. 요일에 맞춰 병원에도 가야하고. 주일엔 교회 가면 하루가 그냥 지나가요. 예배보고 만나서 얘기 좀 하고 점심 먹고. 애들까지 다 모이니까. 집에 들어오면 하루가 다 가요. 평일에는 가끔 친구들과 점심 먹으러 가든가. 점심 먹자고 전화 오면 우리 집에서 다 모여요. 우리 집 앞에서 차를 타고 나가서 밥 먹고 이 얘기, 저 얘기 하다 집에 들어오면 3시가 돼. 자로 잰 거 같이 정확해요. 씻고 TV보다 지루하면 책을 많이 봐요. 옛날 보던 책도 다시 보고. 주로 일본책을 봐요. 일본에서 아는 사람이 보내줘요.”

어린 시절 꿈이 서울 청계천 헌책방 주인이었다는 그는 지금도 일본문예잡지와 소설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는다. 전성기 때는 소재를 찾기 위해 늘 책을 읽어 공부하는 연예인으로도 알려졌다.

“일본강점기 때 공부를 했기 때문에 한국어 책보다 일본어 책이 눈에 익어요. 그래서 일본책을 즐겨 봐요.”

-어릴 때는 성악을 잘 하셨다고 하는데요.

“다섯 살 때부터 방송국에 나갔어요. 노래로. 남산에 일본 어린이방송국이 있었어요. 사춘기 때 피아노를 치려다가 손이 짧아서 아코디언을 했어요. 한때는 음악이 좋아 음악학교에 입학했어요. 막상 해보니 큰 흥미를 갖지 못해 그만두고 현제명 선생한테 성악을 사사했죠. 그때만 해도 목소리가 맑고 고와 본격적으로 테너 음악수업을 받았어요. 일제 때라 학교가 없어져서 오래 못했어요. 대동상고 졸업 후 잠깐 공무원도 했었어요. 아코디언 들고 다니다 악극단 사람 눈에 띄어 인생이 바뀌었어요. 태평양가극단인데 일 좀 해달라고 하는데 아버지한테 야단맞는다고 안 된다고 했지. 그랬더니 아버지를 찾아와 설득해 3일만 연주하기로 했어요. 그랬는데 점점 연장하던 어느 날 희극 배우 하나가 안와서 대타로 무대에 올랐어요.”

-대타로 오른 무대에서는 연주가 아니라 희극 연기를 하셨어요.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도 안 났어요, 손님들이 웃으니까 대본에도 없는 애드리브를 막 했지. 박수가 쏟아졌어요. 윗사람한테 건방지게 애드리브 했다고 야단맞았지만 선배들은 잘했다고 칭찬했어요. 그래서 희극배우가 된 거지요.”

-56년 ‘애정파도’란 영화를 시작으로 400여편의 영화를 찍으셨다고 하던데요.

“그 중에 ‘오부자’가 날 스타덤에 올려놓았어요. 우리나라에 이렇다할 쟁쟁한 사람들만 나왔어요. 출연배우 중 나만 살아있어요. 막내 아들이라고 막둥이라고 했지. 트레이드마크가 됐어요. 그 영화 찍을 때도 애드리브로 찍었어요. 대본에 빈칸이 있었어요. 주인공을 200편 넘게 했어요. 포스터에 내 이름을 내려고 주인공이 아닌 것도 있었고.”

-당시 영화 제작 상황은 어땠나요.

“열악하지. 지금은 영화 한 번 찍으면 필름을 20만자 30만자 쓰는데 그때는 1만자로 끝내라고 했어요. ‘남자식모’란 영화는 녹음까지 해서 일주일에 끝냈어. 영화제작비를 많이 들이지 못하고 사람 위주로 찍었지.”

-영화 촬영 중 큰 사고를 당하셨지요.

“‘광야의 결사대’를 찍다 절벽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어요. 몇 달 동안 병원에 있는데 병원비도 우리가 냈어요. 보상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앉아서 끝까지 찍었어요. 입원실에 와서 방송 녹음도 다해가고. 이후 계속 그 다리만 교통사고가 두 번 났어요. 이 사고 이후 2007년 허리디스크 수술, 2008년 간 질환 발병, 2009년 뇌수술 등 계속 건강이 안좋았어요. 잘 걷지 못해 미끄러지지 말라고 목욕탕에 깔아놓은 카펫에 걸려 넘어져 생사를 오락가락한 적도 있어요.”

하나님을 원망했을 법도 한데 어떠셨냐고 물었다. “고쳐달라고만 기도했어요. 하나님이 진짜 계시다면 이것 좀 고쳐주십시오.” 결국 이 사고로 인해 고질적인 관절염도 앓고 있다.

-출연한 영화 중 특별히 더 애착이 가는 영화가 있습니까.

“그런 게 뭐 있나. 나는 전부 창피해서.”

이때 아내가 다과를 내오면서 말을 거든다. “1969년 정극 영화인 ‘수학여행’이 제일 좋아요. 국제영화제에서 상도 타고. 유현목 감독이 만드셨어요.”

-작품 선택 기준이 있으셨나요.

“봐서 재미있을 거 같은 거. 재미없는 거 와도 옆에서 부추기면 그냥 했어요. 근데 하고 나면 후회해요. 잘 된 거든 안 된 거든 그 영화를 극장에서 한번도 못 봤어. 2시간 이상 보고 있을 시간도 없고 보고 있는데 나 있는지 모르고 욕할까봐. ‘저거 왜 저래’ 옆에서 누가 그럴까봐 구경을 못했어요.”

-68년부터 무려 15년 이상을 ‘웃으면 복이 와요’에 출연하셨어요.

“MBC 방송국이 개국하면서 코미디 프로가 생겼는데 코미디를 통해 스토리가 있는 연기를 했어요. 당시에는 바보연기가 인기였는데 먼저 돌아가신 가수 김정구씨가 나보고 ‘원래 코미디하는 사람은 제 얼굴 가지고 웃겨야지. 뭐 얼굴에다 그리고 그러면 네 재주로 웃기는 거냐? 그려놓은 걸로 웃기는 거지’ 그래서 그때부터 아무것도 안 바르고 했어요. 나는 그냥 내 얼굴로 웃기겠다는 지론이 있었지. 그래서 그랬는지 영화도 웃기지 않는 영화 주연을 두 편 했어요. 심심하게 해도 잘 웃어줬으니까 뭐.”

-박정희 정권 때 시대풍자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코미디 없애자고 그랬어. 문화공보부 장관이 없애자고. 그래서 대통령한테 직접 찾아갔어요. 그런 법이 세상에 어딨냐고. ‘누가 저질스럽게 해서 없앤다는데. 택시가 사람치면 다 없앨거요’하니까 ‘누가 그래요 없애자고.’ ‘문공부장관이 그러던데요’라고 했더니 ‘알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살았어요. 전에 베트남 위문공연 가서 박 대통령하고 알게 돼 친했어요.”

-85년 결국 ‘웃으면 복이 와요’가 폐지됐어요. 당시 심정은 어떠셨나요.

“사회의 건전한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폐지됐어요. 이제 한 시대가 지났구나란 생각을 했어요. 한창일 때는 휩쓸었었는데. 낙엽이 굴러가는 듯한 기분이 들대요. 진짜. 어쩔 수 없지. 사람이 사는 게 다 그렇지.”

-라디오에서는 이름을 걸고 진행도 하셨어요.

“6·25 전쟁 중에 KBS에서 양석천씨와 ‘홀쭉이와 길쭉이’를 진행한 것을 시작으로 정말 많은 라디오 프로를 진행했어요. ‘노래 실은 희망열차’ ‘안녕하세요 막둥이 구봉서입니다’ ‘노래하는 유람선’ 등 70~80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 같아요. 내가 방송을 선호한 것은 영화나 텔레비전보다 한결 여유가 있고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에요.”

-방송에서 시대 풍자를 하셨는데 시대적 분위기가 녹록치 않았을 텐데요.

“‘안녕하세요 구봉서입니다’란 타이틀로 동아방송 동양방송 KBS 다 했어요. 조심스럽게 시대 풍자를 했어요. 끄트머리에 ‘이거 되겠습니까 안됩니다’를 붙였어요. 그게 공전의 히트를 했어요. 정치 얘기는 방송에서 못했어요. 국가정책 가운데 조금 납득이 안가는 걸 풍자했지. 우리가 ‘12부 장관’이란 쇼를 했는데 장관들 어전회의. 정부시책에 반하는 발언을 하면 내가 있다가 ‘그렇지 그러나 그런거 하면 안되지’하면 그냥 넘어갔어요. 할말은 하면서 넘어갔어요.”

-콤비로 오랫동안 인기를 누렸는데 같이 일하면서 호흡이 제일 잘 맞았던 분은.

“사람들은 배삼룡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곽규석이랑 제일 잘 맞았지. 네 살 어린가. 재밌게 해서 좋았어요. 세상 먼저 떠난 게 정말 아쉬워요. 그 이상 아쉬운 게 없어요. 걔 생각을 자주 해요. 우리 정월 초하룻날 뭐하자 이러면 틀림없어. 그 날 그 시간에. 약속을 잘 지켜요. 다른 사람은 약속을 잘 안지키니까 더 좋았지. ‘형님 먼저 아우 먼저’란 라면 CF가 히트 치면서 라면 이미지, 판매고 전부 올려놨잖아요. 그래서 다시 할 뻔했어요. 미국에만 안 갔으면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그 후를 다시 찍으려고 했거든. 한 번 더 하자고 들어왔었어요.”

-인기의 정점에서 독실한 ‘예수쟁이’로 변했다고 하는데 어떤 사건이 있었나요.

“하용조 목사님이 계속 전도하시고 부인이 열심히 교회 일을 하니까 안나갈 수가 없었어요.”

사실 구 장로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어렸을 때 교회를 다녔다. 그러나 주님을 구주로 모시는 데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불혹의 나이인 40을 넘어서야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전에는 누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성경에 나오는 도마처럼 하나님을 보여달라며 의심했다. 목사님의 설교는 자장가였고 여성도들의 기도는 남자보다 배가 더 길어 싫었다. 이제 끝나려나 싶으면 다시 “원하옵건대…”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부인이 거들었다.

“결혼할 때는 시어머님이 불교를 믿으셨어요. 4남2녀의 맏이라 맏며느리로 일 많이 했어요. 동생들 다 시집 장가 보내고.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제게 시어머님은 결혼 전에는 종교는 자유라고 하셨어요. 결혼하니까 시어머님이 한 집에서 두 종교 가질 수 없다고 못나가게 하셨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초하룻날 보름은 시어머님 따라 절에 가야 됐어요. 절에 가서 부처님 보면서 ‘주님 아시죠’하고 절했어요. 그런데 10년 만에 돌아오셨어요. 나도 예수 믿겠다고. 그리고 구씨네 집 대대로 불교인데 동생들 전부 장로, 권사 됐어요. 말 한마디도 안했는데.”

-전도는 어떻게 하셨어요.

“아이를 낳으면 밖에 나갈 자유를 주셨어요. 그래서 조용히 영락교회를 다녔지요. 새벽에는 안방에서 ‘관세음보살’ 하시고 건넌방에서 나는 ‘주여’ 기도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이 이겼죠. 승리했어요. 시어머님도 예수 믿으시고 봉사 많이 하시고 돌아가셨어요.”

-안방에서 연예인 교회가 시작됐다는 건 뭔가요.

“하용조 목사님이 마포교회 중고등부 전도사님이었을 때 ‘웃으면 복이 와요’ 연출 김경태 장로가 그 교회 장로였어요. 부인이 마포교회 전도사인데 하루는 오셔서 성경공부 안하겠냐고 했어요. 그때는 시어머님도 교회에 나가시고 믿을 때라 주일에만 교회를 다녀서 하겠다고 말하고 몇 사람이 모였어요. 제가 직접 지은 집이었는데 때마침 오일 파동으로 기름값이 너무 비싸 성경공부를 하는 안방만 난방을 했어요. 남편은 그때 다리를 다쳐 방 한쪽에 누워 잔다고 하더니 설교 말씀까지 다 듣기를 여러 번 했어요. 다리가 쉽게 낫지 않자 안수기도를 받았는데 도중에 잠이 들었어요. 꿈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깨어나더니 사흘 뒤 통증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기적이지요. 그러더니 곽규석씨 부부, 서수남 윤복희 정훈희 김자옥 고은아씨 등과 성경공부를 했어요. 74년 하나님을 영접했어요. 아마도 하나님이 쓰시려고 그랬겠지요.”

입소문이 나면서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사람이 40명을 넘고 안방에 다 앉을 수 없어 사무실을 얻었다. 76년 3월 7일 ‘연예인교회’의 창립예배를 드리고 지금은 이름을 바꾼 서울 평창동 예능교회를 섬기고 있다.

-영접 후 품었던 비전은 무엇입니까.

“봉사예요. 간증집회하면서 단에서 돌아가시겠다고 서원했어요. 간증 집회 다니며 받은 사례금을 모아서 아프리카 우간다에 학교를 지었어요. 고은아 권사가 우간다에 갔더니 ‘구봉서 학교’가 있어서 놀랐대요. 아이들이 ‘제가 학교 선생님이 됐어요’라는 등 테이프도 보내주고. 아프리카에 못 가본 게 아쉬워요. 신망애보육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30년이 넘어요. 유니세프, 월드비전도 돕고 있어요.”

-영화, 라디오, TV, 쇼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자녀 교육은 전혀 신경 못쓰셨겠습니다.

“한달에 닷새밖에 집에서 안 잤어. 노상 밖에 있었지. 애들 교육은 저 사람이 다 했어요.”

부인은 아이들에게 기독교 교육을 철저히 시켰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잘못 될까봐 어릴 때부터 유치원도 교회 유치원에 보내서 잘못 될 수가 없었지. 예수전도단에 다 가서 훈련받고. 로스 목사 계실 때. 명동 YWCA 집회에도 많이 나가고 강원도 예수원에도 갔어요.”

-요즘 개그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신다면.

“자기들만 아는 소리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되지요. 예를 들어 무슨 사건이 났다 할 때는 중간에 딱 잘라서 하니까 이해가 안돼. 말장난 위주의 천편일률적인 내용이고 다 비슷비슷해.”

-젊은이나 후배들한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매사에 최선을 다해라. 후배들에게는 웃기지 않는 대본으로 웃기려고 애쓰지 말라고 해요. 그냥 넘어가고 그 다음 코너에서 웃겨라. 지금은 제 말이 안통할 거예요. 왜냐하면 옛날에는 길어서 여기서 안 웃기면 다음에 웃기면 됐는데 지금은 단발성이라 노상 웃겨야지. 나이든 사람을 배려하는 코미디도 만들어줬으면 해.”

-후대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 바라시나요.

“코미디 프로나 TV 볼 때는 옛날에 여기 아무개가 있을 때에는 참 좋았는데, 그 때 내가 많이 웃었는데 이런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

혜은이 “아버지 사기당해 가수 돼 가장 노릇”

가수 혜은이가 가수의 길을 걷게 된 사연을 공개했다. 

혜은이는 9일 오전 방송된 KBS 2TV ‘여유만만’에 출연, 연예계 대부라 할 수 있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수가 됐다고 전했다. 

혜은이는 “악극단 단장이었던 아버지가 1983년에 돌아가셨는데 그전부터 편찮으셨다. 가수가 된 동기도 아버지가 후배에게 사기를 당해 내가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사기 당한 충격에 화병으로 누우셔서 고혈압에 치매를 앓으셨다”고 사연을 공개했다. 

혜은이는 “부산에서 3일 동안 공연을 하던 중 마지막 날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무렵에는 어려운 일이 많아 참 불효를 많이 했다”며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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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요, 한국 최초의 퓨전음악

[앵커멘트]

일제강점기, 외래 음악이 들어오던 당시 민요와 외국 악기가 만난 탄생한 장르가 있습니다.

바로 신민요 인데요, 올해로 탄생 8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양일혁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조선악극단이 부르는 '새날이 밝아오네'라는 신민요입니다. 

전국 각지는 물론이고, 만주와 일본에 순회공연을 다닐 정도로 반응이 좋았습니다.

신민요는 전통 민요에 외래 음악의 색깔을 덧입힌 노래입니다.

일본을 거쳐 물밀듯 들어오던 서양 문물, 하지만 아직 받아들이기엔 낯설었던 1920, 30년대 등장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장르의 음악이 섞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퓨전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상 대대로 전해내려온 전통 민요로 알고 있는 '도라지타령'이나 '노들강변', '태평가'가 실은 이 시절에 태어난 신민요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생겨난 음악인 만큼,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이 베여 있기도 합니다. 

[인터뷰:한윤정, 신민요연구회장]

"우리나라 문화는 기생화 되었고, 음악을 전공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서양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갔기 때문에 우리나라 민요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을 수 있고 그래서 양악화 하다보니 퓨전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올해 신민요 탄생 80주년을 맞아 신민요를 한데 감상할 수 있는 자리가 펼쳐집니다.

최초로 신민요란 이름이 붙여진 홍난파 작곡의 '방아찧는 색시의 노래'를 비롯해 평양의 이름난 기생 왕수복이 노래한 '포곡성', 80년대 운동권에서 불렸던 '남누리 북누리' 등 10여 곡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음악 어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신민요를 국악기로 재편하는 등 또 다른 변신도 시도됩니다.

YTN 양일혁[hyuk@ytn.co.kr]입니다.

[김문이 만난사람] 어버이날 맞아 사모곡 부르는 국민가수 심수봉

[서울신문]

어머니는 ‘얼’을 남기고 아버지는 ‘길’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삶에 있어서 ‘정신적 줏대’와 살아가는 ‘올바른 길’을 의미하겠다. 군에 입대한 병사들이 어쩌다 언론에 잠깐 인터뷰를 할 때면 대부분 첫마디가 “어머니가 가장 보고 싶습니다~.”이다. 우렁차게 외치지만 눈가에는 어느새 살짝 눈물이 고인다. 반사적으로 울먹이는 그 목소리, 아마 어머니가 ‘자신의 얼’인 까닭이 아닐까. 또 그럴 것이, 누구나 그런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비록 그들과는 아무런 가족적 연관이 없더라도 덩달아 눈시울이 붉어지니 말이다. 이런 감정은 나이를 먹었든 안 먹었든 남녀노소 다 마찬가지일 터. 이 대목에서 문득 생각나는 노랫말이 있다. ‘~정안수 떠 놓고 이 아들의 공 비는/어머님의 흰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아아아 쓸어안고 싶었소~’ 음미할수록 ‘찡’하게 다가온다.

국민가수 심수봉(56)씨는 어머니의 ‘얼과 한’을 동시에 품고 있다. 심씨는 데뷔 28년 때 실향민인 팔순의 어머니에게 소중한 선물을 했다. ‘조국이여’라는 노래를 만들어 직접 불러 드렸던 것. 노랫말은 이러했다. ‘눈 덮인 대지에도 뿌리 있으면 푸른 잎 다시 피는데/무슨 사연으로 갈라섰나 마지막일 줄 몰랐나/부모형제 기다린 세월을 눈물로 만들고 무정한 기차야/내 님은 어디 두고 너만 혼자 이제야 오나/조국이여 서러운 조국이여 이별 땜에 병 난 내 조국이여~’

그러자 어머니는 3박4일을 꼬박 울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심씨의 외할머니)가 생각나서였음은 물론이다. 그 누구도 비명에 간 외할머니로 인한 어머니의 상처를 끄집어내지 않았고, 오래도록 켜켜이 쌓여 있던 한을 풀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딸이 ‘조국이여’라는 노래로 어머니의 한을 풀어헤치고 쓸어안았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서럽도록 울었고 이를 본 딸도 옷깃을 부여잡고 펑펑 울었다.

이처럼 심씨는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얼과 한’이 교차된다. 어버이날을 맞는 요즘에는 더욱 그렇다. 어버이날 디너쇼를 앞두고 지난달 27일 서울 역삼동 자택에서 심씨를 만났다. 인근 미용실에 막 다녀오는 중이었다. 단정한 머리에다 재킷차림이었다. 먼저 8일 저녁 삼성동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리는 디너쇼 준비에 대해 물었다.

“편안한 공연으로 찾아주시는 여러 부모님의 마음과 기분을 풀어드리고 또 품격을 높게 채워 드리고 싶습니다. 제 음악을 잊지 않고 아껴주시는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고자 이번에는 ‘피아노 연주’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습니다.”

그의 대표곡 ‘그때 그사람’을 시작으로 ‘백만송이 장미’ ‘당신은 누구시길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사랑밖엔 난 몰라’ 등 주옥 같은 히트곡들을 특별하게 선사하겠다고 다짐한다. 예를 들어 곡마다 묻어 있는 감성 스토리와 사랑, 숨겨진 인생사 등도 중간중간에 소개하겠다며 심씨는 웃는다. 최근 10년 연속 디너쇼 매진 기록을 세우고 있어 이번에도 그 기록이 이어질지 관심거리다.

어머니 장형복(85) 여사에 대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는 “이번 공연에도 어머니를 초대했다.”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20대 처녀 때 3남매와 함께 평양에서 진남포항을 떠나 월남했지요. 그러니까 1·4후퇴 당시였지요. 어머니는 월남 후 26세 때 충남 서산에서 환갑이 다 되셨던 아버지를 만났고 곧 저를 낳았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등으로 호적에 올리지도 못한 상태였지요.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어머니는 저를 임신했을 때 여러 가지로 힘들어서 유산을 시키려고 했나 봐요. 제가 3살 때 어머니는 아버지와 헤어졌고 곧바로 아버지는 돌아가셨지요. 외삼촌은 저를 고아원에 맡기려고까지 했습니다.”

심씨의 어머니는 원래 가무에 능해 아버지의 제자로 들어갔다가 인연이 됐다. 심씨의 아버지 심재덕씨는 가야금 명인이자 판소리 명창으로 당대 유명했던 심정순 선생의 아들로 서산에서 민속학 명문가로 소문나 있었으며 이화여대와 숙명여대에서 가야금을 강의하곤 했다. 큰아버지 심상건씨 또한 가야금 명인으로 이름을 날려 심씨 가문은 ‘민속학의 바흐’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뿌리깊은 음악가 집안이었다. 심씨의 고모 심화영씨는 승무 무형문화재 보유자였다.

심씨는 아버지에 대해 “기억이 없다.”면서 “(내) 인생을 돌아보면 시작부터 슬펐고 건강하지 않은 영혼과 거부당한 삶을 가지고 살았다.”고 말했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생활력이 강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어린 딸의 음악적 재능을 알고 피아노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열을 쏟기도 했다. 그때가 심씨의 나이 4살. 딸에게 음악적으로 뭔가 해주지 않으면 나중에 원망을 들을까봐 그랬다고 한다. 심씨의 어머니는 열심히 살아가면서도 비명에 간 어머니 때문에 늘 가슴 아파했다.

“외할머니는 공산당이 싫다는 이유만으로 총살당했다고 어머니한테 들었습니다. 그 한을 가슴에 안은 채 어머니는 월남했고 참혹한 생각을 잊지 못해 항상 분노하면서 살았지요. 어느 날 갑자기 부모 자식 간에 생이별을 했으니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았지요. 경의선 열차가 남북으로 연결되던 날이었습니다. 창밖을 보다가 문득 외할머니 생각으로 눈물짓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지요. 그래서 곡을 만든 것이 ‘조국이여’입니다. 실향 50년이 돼서야 비로소 맺혀진 한을 토해내게 해드린 셈이지요. 어머니 앞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얼마나 우시는지…. 다 울고 나서는 ‘이제 속이 시원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심씨에게는 어머니가 낳은 남동생 둘이 있으며 사이좋게 지낸다고 귀띔했다. 자연스럽게 심씨의 자녀들 얘기가 나왔다. 그러자 “(어머니로서) 시행착오도 많이 했다. 아이들은 사춘기를 겪으면서 잘 커줬다. 아이들에게만큼은 삶의 실패를 안 겪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들 둘은 모두 군 복무를 마쳤으며 첫째는 컴퓨터회사에 다니고 둘째는 대학 재학 중이다. 막내딸은 뮤지컬과 연기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어릴 적 살았던 고향에 대한 추억으로 화제를 돌렸다. 심씨는 본명이 심민경으로 1955년 7월 서산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게 음악뿐이었던 것 같아요. 동네에 악극단 풍물패가 지나가면 자다가도 뛰쳐 나갈 정도로 소리를 무척 좋아했지요.”

어린 나이였지만 트럼펫 소리로 듣던 ‘타향살이’의 감동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또한 이미자의 ‘정동대감’을 구성지게 불러 어릴 때부터 동네 아주머니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런 딸을 본 어머니는 수소문 끝에 서산읍에 단 한 대뿐이라는 피아노가 있다는 집으로 데려가곤 했다. 이렇게 해서 2년 동안 피아노를 배웠다. 초등학교 때는 음악뿐만 아니라 미술과 국어에도 재능을 발휘했다. 문학반에서 특별활동까지 할 정도였다.

중학교 입학 당시 원인을 알 수 없는 ‘뇌신경 인프레’라는 병 때문에 인천 무의도에서 요양을 했다. 이후 인천 인화여고에 입학했고 음악 공부에 심취해 드럼 등을 배웠다.


그는 “열정적으로 호감이 가지 않는 과목은 잘 듣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피아노, 기타, 드럼 등 여러 악기를 폭넓게 다루는 음악적 재능을 바탕으로 생산된 그의 노래는 대부분 자신이 직접 작사·작곡을 했다. 트로트 음악계에서는 전문 작사가, 작곡가가 만들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심씨는 자작을 고집한다. 하여 ‘트로트 아티스트’라는 얘기를 듣는다. 아울러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미워요’ ‘비나리’ ‘백만송이 장미’ 등 히트곡 대부분의 노랫말에 자신의 삶을 담았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또 다른 한’을 얘기했다. “광주에 다녀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광주에는 상처의 소리가 있다. 그것을 사랑으로 보듬고 풀어줄 노래가 필요하다.”고 말해 ‘광주의 한’을 노래로 만들 생각임을 내비쳤다(그의 남편도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상처가 있다). 이는 음악적 소명이자 숙제라고 덧붙였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심수봉은…

1955년 충남 서산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심민경. 1973년 인천 인화여고를 졸업한 뒤 명지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1978년 제2회 MBC 대학가요제에 자작곡 ‘그때 그사람’으로 입상하면서 데뷔했다. 1979년 ‘그때 그사람’으로 첫 독집앨범을 냈으며 그해 KBS 올해의 신인상, MBC 10대 가수상 등을 받았다.

제5공화국 출범 직후인 1981년 방송 출연이 금지됐고 1984년 방송 출연이 해제되자 곧바로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한다. 이후 ‘사랑밖에 난 몰라’(1986), ‘미워요’(1988), ‘우리는 타인’(1991) 등의 음반을 발표했다.

1993년부터 2년 동안 MBC 라디오 프로그램 ‘심수봉의 트로트가요 앨범’ 진행을 맡기도 했다. 1994년 ‘비나리’ 음반을 발표하고 난 뒤 1979년 10·26 사건 당시의 상황 등을 담은 자서전 ‘사랑밖에 난 몰라’를 발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백만송이 장미’(1997), ‘아, 나그네’(1999), ‘사랑했던 사람아’(2001), ‘개여울’(2005), ‘이별 없는 사랑’(2005) 등을 잇따라 발표했다. 2009년에는 ‘엠넷(Mnet) 아시안 음악 어워즈’ 명예의전당에 올랐다.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③] 풋풋한 매력으로 한국 영화의 청춘 이끈 여왕들

[신동아]

1964년개봉한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맨발의 청춘’(김기덕 감독)은 한국 영화계에 청춘이란 단어를 불러들였다. 고무신 부대의 눈물을 짜내는 것이 목표였던 신파 멜로 영화판에 새로운 기운을 가져온 것이다. 젊고 혈기 넘치지만 뒷골목 조무래기 깡패에 불과한 신성일의 우울하고 반항적인 연기와 싱싱하고 발랄한 여대생이라는 새로운 여성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엄앵란의 연기. 이 커플의 사랑은 현실로까지 이어졌고, 영화는 큰 인기를 끌었다. 신성일이 입은 터틀넥 스웨터와 트위스트김의 청재킷·청바지가 유행했고, 엄앵란의 톡톡 쏘는 여대생 연기는 이후 한국 영화 속 여대생의 전형이 되어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감독, 1975)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비슷비슷한 날림 영화가 우후죽순 만들어지는 법. ‘맨발의 청춘’ 아류작이 쏟아졌다. 그리고 1965년 10월, 이만희 감독의 ‘흑맥’이 개봉됐다. 남자 주인공은 신성일, 상대역은 문희라는 이름의 신인이었다. 서울역 주변을 무대로 소매치기를 하며 연명하는 일당의 두목 신성일이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문희를 만나 사랑하고, 범죄에서 벗어나려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는 내용의 영화였다. 또 ‘맨발의 청춘’ 아류작인가? 엄앵란이 시집가고 없으니 신인 여배우를 하나 급히 만들었나보다 했다. 그런데 서울 뒷골목과 그곳에서 기생하는 어두운 청춘의 이야기를 ‘맨발의 청춘’보다 더 뛰어나게 담아낸 게 아닌가. 그 중심에 신인 배우 문희가 있었다. 이 여배우의 얼굴에는 지금까지 한국 영화에서는 볼 수 없던 스산한 분위기가 담겨 있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쏘냐’를 떠올렸고, 함께 연기한 배우 신성일은 옷이 흘러내려 속살이 드러나는 것도 모른 채 연기할 만큼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는 그녀에게 감탄한다. 이만희 감독은 이 배우에게 최고 여배우 문정숙의 ‘문’과 자신의 이름 끝 자인 ‘희’를 따서 ‘문희’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1세대 트로이카

1960년대 중반. 1950년대를 주름잡던 스타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195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김희갑은 겹치기 출연으로 매번 지각을 하는 민폐를 끼쳐 스태프들의 원성을 사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깡패 출신 제작자 임화수에게 폭행까지 당했던 스타다. 그가 이제는 신인 코미디 스타 서영춘이 겹치기 출연으로 촬영장에 늦게 나타나는 데 분개해 호통을 치는 시대가 됐다. 영원한 청춘 김진규가 맡았던 배역은 새로운 스타 신성일과 신영균에게 돌아갔다. 과거의 신인이 중견이 되고, 새로운 신인이 나타난 것이다.

여배우의 세계도 그랬다. 오랫동안 한국 영화에서 여배우는 그 얼굴이 그 얼굴이었다. 그런데 최고의 스타 최은희가 영화감독으로 나서며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 편수를 과감히 줄여나갔고, 김지미는 최무룡과의 스캔들에 시달리느라 정신이 없어 흥행작을 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떠오르던 샛별 엄앵란은 신성일과 결혼해 아기를 출산한 뒤 영화 출연을 사실상 접어버렸다. 새로운 얼굴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였다. 이때 문희가 나타났다. 스타는 좋은 작품과 좋은 감독을 만나야 만들어지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흥행이 돼야 스타가 나온다. 문희의 매력적인 분위기는 감독들의 눈을 사로잡았고, 그가 떠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흑맥’ 개봉과 비슷한 시기인 1965년 11월, 이번엔 김수용 감독이 만든 ‘갯마을’에서 매력적인 얼굴을 지니고 연기력도 제법인 신인이 탄생했다. 영화의 도입부, 마을 여자들이 모두 나와 땀을 뻘뻘 흘리며 배를 끄는 장면에서 소녀 과부 고은아는 땀에 젖어 엉겨붙은 귀밑머리와 고개 숙인 옆모습 하나로 관객의 머리에 ‘에로틱’이 무엇인지 각인시켰다. 문희와 고은아 두 신인 여배우 모두 대학 재학 중 감독에게 발탁됐다. 이른바 여대생 출신 여배우의 탄생이었다. 이들 전의 여배우는 악극단 출신이 대부분이라 학력을 내세우며 선전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이제 말하자면 미모와 지성을 갖춘 여배우가 등장한 것이다.

그 무렵 또 한 명의 스타도 조용히 태어나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단역으로 배우 생활을 시작한 신인 여배우 한 명이 김수용 감독의 영화 ‘유정’의 신인 여배우 오디션에 참가한 것. 이 신인 공모에는 유례없이 상금 50만 원이라는 큰돈이 걸려 있었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을 영화화한 ‘유정’의 주인공으로 낙점된 이민자라는 이름의 신인 여배우는, 이후 소설 여주인공의 이름 ‘남정임’을 예명으로 얻었다. 자신의 얼굴은 오른쪽이 아름다우니 그쪽으로 찍어달라고 촬영 기사에게 당돌하게 요구할 만큼 거리낌 없던 여배우 남정임은 이렇게 탄생했다.

1966년 영화 ‘유정’이 개봉됐고, 순애보적인 사랑을 설득력 있게 연기한 남정임은 적역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영화는 당대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작 ‘성춘향’(신상옥 감독, 1961)의 관객 수 36만 명에 필적하는 35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한다. 이때부터 고은아·문희·남정임, 이 세 명의 신인 여배우는 여왕 자리를 넘보는 후보로 극장가를 점령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배우는 고은아였다. 당시 최고의 흥행 감독이던 김수용은 고은아를 “동양적이고 정적인 분위기를 지녔고, 일제강점기 최고의 여배우 문예봉과 6·25전쟁 후 최고의 여배우 최은희 두 사람의 인상을 합쳐놓은 것 같다”고 평가했다. 한국 여배우의 적통을 이은 배우로 평가한 것이다.

한국 영화의 황금기

고은아는 이만희 감독의 영화 ‘물레방아’(1966)에서 이제껏 한국 영화에서는 볼 수 없던 도발적인 여인을 연기한다. 한여름 숲 속 풀밭에 누워 있는 한 여자. 청순하고, 정숙해 보이는 얼굴의 여자가 풀을 베다 잠깐 눈을 붙인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잠시 감았던 눈을 불만스럽게 치켜뜬다. 그리고 억누를 수 없는 성욕 때문에 몸을 배배 꼰다. 얼굴은 정숙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불만과 욕정이 가득 차 있다. 그녀 앞에 나타나는 남자 신영균은 힘도 좋고 잘생겼으며 무엇보다도 고은아를 사랑한다. 마을 지주 허장강이 평생 호강시켜주겠다고 그녀를 유혹하지만 고은아는 신영균에게 미소를 짓는다. 그녀는 웃음이 헤프다. 그것도 모르는 신영균은 평생 갚아야 할 빚을 지는 무리수를 두며 고은아를 아내로 맞이한다. 첫날밤. 고은아는 어서 잠자리에 들자며 간절한 눈빛을 신영균에게 보내지만 바보 같은 그는 곰방대만 뻑뻑 빤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참 달도 밝다”고 하는 등 못나게 군다. 답답한 고은아, 벌떡 일어나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우물가로 가서 찬물을 쫙쫙 끼얹는다. 동네에서 바람기라면 최고를 자부하는 신영균의 상전이 고은아의 벌거벗은 뒤태를 보고 침을 흘린다. 그는 신영균과 고은아가 결혼할 수 있도록 자금을 대준 인물. 언젠가 고은아를 자신의 품에 들이겠다는 속셈 때문이었다. 신영균이 남자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것까지 알았으니, 얼씨구. 이젠 뜸만 들이면 되는 것이다. 고은아는 신영균이 드르렁드르렁 코 골며 자는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다. 화가 난다. 이게 뭔가? 남자란 하나같이 이 모양 이 꼴인가? 이 영화에서 고은아는 항상 성욕에 굶주려 있으며 현명하지도 못하다. 말하자면 백치 같은 여자다. 대사가 거의 없어, 꼭 필요한 말 몇 마디만으로 모호한 심리 상태를 표현한다. 아름답지만 지능이 낮고 정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며 성욕만 따르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여자. 갓 스무 살 된 신인 여배우는 이 배역을 성심성의껏 연기했다. 고은아의 연기력이 좀 더 무르익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이런 배역을 기성의 스타급 여배우에게 주문했다면 고분고분 잘했을까? ‘물레방아’는 의욕 넘치는 신인 여배우와 여자의 어두운 마음을 표현하고자 한 감독의 야심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1966년 늦봄에는 정진우 감독의 영화 ‘초우’가 개봉했다. 영화가 시작되면 상류층의 최고급 저택이 화면 가득 등장한다. 산들바람이 정원의 나무들 사이로 불어오고, 지나치게 따갑지 않은 초여름 햇살이 눈부시다. 드넓은 마당 위, 잘 관리된 잔디밭에 아름다운 아가씨가 탐스러운 털이 난 애완견과 함께 누워 있다. 그녀의 머리맡에는 외국 영화잡지들이 있고, 가슴에는 로버트 레드퍼드의 흑백사진이 놓여 있다. 그 화면 위에서 생기발랄한, 톡톡 튀는, 싱그러운 젊음이 넘치는, 구김살 한 점 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 저택의 식모 문희다. 이 집 주인은 프랑스 대사로 프랑스에 가 있고, 안주인은 밤낮없이 자수만 놓는다. 그들에겐 병 걸린 딸이 있는데, 휠체어를 타야 하는 신세다. 대사가 아름다운 프랑스제 비옷을 선물해도 입고 나갈 수가 없다. “버리느니 차라리 식모에게”라며 건네준 덕에 아름다운 비옷은 문희 차지가 된다. 쨍하고 햇살 따가운 한여름,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문희. 드디어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다. 비옷을 입고 마당으로 달려 나가 ‘비!’ ‘비!’ 를 외치는 문희의 얼굴 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1966년 데뷔한 정진우 감독은 대사에 의존하기보다 이미지로 이야기를 전달하며 감각적인 영상을 선보였다. 통통 튀는 발랄함과 그 뒤에 감춰진 그늘을 동시에 가진 주인공은 문희에게 적역이었다. 감독은 그녀의 연기에서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떠올렸다. 문희는 비옷을 입고 나가 차량 정비공이지만 손님의 고급 외제차를 끌고 나와 자신을 대기업 직원이라 속이는 신성일을 만난다. 식모이지만 프랑스 외교관의 딸이라고 속이는 문희와 상승욕이 가득한 신성일은 비극으로 치닫는 청춘의 드라마를 완성한다.

하이힐 부대의 등장

후발 주자 남정임이라고 가만있었겠는가? 그는 데뷔 첫해에 ‘유정’‘학사와 기생’(김수용 감독, 1966), 단 두 편의 영화로 서울 관객 40만 명을 동원하며 최고의 흥행 카드가 됐다. 이 한 해에만 무려 15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기염을 토했고, 그것도 모자라 아시아영화제에서 신인 연기상을 타는 행운까지 누린다. 정진우 감독은 그녀를 주연으로 ‘초연’(1966)을 만든다. 남정임은 첫사랑 신성일이 프랑스로 유학을 가버리자 또 다른 남자 이순재와 사귄다. 신성일이 돌아와 남정임을 놓고 이순재와 한 치 양보도 없는 사랑의 결투를 벌인다. 두 남자가 병원에 입원하자 남정임은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하다 둘 다 놓치고 만다. 이 영화에서 남정임은 당돌하다. ‘초연’ 이전의 여주인공은 두 남자의 사랑을 받게 되면 괴로워했지만 남정임은 그렇지 않다. 아름답고 큰 눈을 또르르 굴리며 ‘어느 놈이 더 나을까?’ 저울질한다. ‘어쩌지? 둘 다 괜찮은데. 두 남자 모두 마음에 드는데, 일처이부(一妻二夫)는 안 되나? 하하하.’ 남정임의 개성이 한껏 드러난 영화였다.

1966년과 1967년은 한국 영화계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 쏟아져 나온 엄청난 시대였다. 이만희 감독의 걸작 ‘만추’(1966)가 개봉되자, 그동안 한국 영화를 보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라 여겼던 교양인들이 쌍수를 들고 항복했다. 흥행감독 김수용은 잇달아 문학작품을 영화화해 내놓았고, 젊은 감독 정진우는 감각적인 영상으로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최고 스타 대우를 받으며 나날이 몸값이 높아지고, 건방진 여배우들을 캐스팅해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영화들이 나왔다. 새로운 여배우의 등장과 신성일·신영균 등 남자 배우의 듬직한 지원, 그리고 감독의 왕성한 창작력. 이 모든 것이 합쳐져 한국 영화 최고의 시기가 열린 것이다.

고은아·문희·남정임의 출현 전까지 우리 영화 중 여배우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최은희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성춘향’(1961)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 세 배우의 등장으로 여배우 주연 영화가 대거 등장한다. 정진우의 ‘초우’와 ‘초연’ 그리고. 이만희의 ‘만추’가 바로 그런 영화들이다. 더욱 특별한 것은 관객을 억지로 울리려는 신파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제 영화 관객은 고무신 부대에서 하이힐 부대로 바뀌었다.

제작사들은 경쟁적으로 신인 여배우 공모를 벌인다. 신인 공모에 당선되면 주연 여배우로 캐스팅할 뿐 아니라 덤으로 50만 원의 상금까지 줬다. 이제 스타는 더 이상 만질 수 없는 별이 아니었다. 누구나 응모해 행운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태어난 또 하나의 신인이 윤정희다. 영화 ‘청춘극장’(강대진 감독, 1967) 주연 여배우 공모에서 윤정희가 당선됐다는 신문 기사 옆에는, 고은아의 약혼 소식이 나란히 실렸다. 운명처럼 새로운 별이 뜨고 다른 별 하나가 지는 순간이었다. 고은아의 인기는 약혼 발표와 함께 주춤해진다.

서늘한 문희, 괄괄한 남정임

신인 윤정희가 영화 ‘청춘극장’으로 시험대에 오른 그 순간, 정진우 감독의 영화 ‘밀월’(1967)에서 문희는 더 이상 인형 같은 연기를 하는 신인이 아닌, 진짜 배우로 인정받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무더운 여름 컴컴한 방 안에 속옷 차림으로 누워 선풍기 바람을 쐬는 한 여자가 보인다. 그녀의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뭔가 권태로운 것 같고, 욕구불만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은데 그 속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문희는 암흑가 두목 박암의 아내. 교도소에서 출소한 박암은 과장된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문희의 얼굴은 서늘하기만 하다. 데뷔작 ‘흑맥’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그 차갑고 서늘한 눈매와 표정이 부활한 것. 문희보다 서른 살 넘게 많은 박암은 섹스에서도, 대화에서도, 젊고 아름다운 문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문희는 박암의 품에 안겨 딴 생각을 하는 여자다. 어느 누구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문희의 고독과 절망은 그만큼 깊고 어둡다. 박암은 문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자신의 늙고 병든 몸을 보며 괴로워한다. 그때 박암이 친자식처럼 사랑하는 신성일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다. 영화가 시작된 뒤 신성일과 첫 대화를 나누기까지 30분 동안 문희는 대사가 없다. 그러나 그녀의 감정은 관객에게 전달된다. 이 초반의 무언극이 눈부셨다는 평가를 받으며 문희는 신인 여배우가 흔히 듣게 마련인 연기력 부족이라는 비판에서 단숨에 벗어난다. 그는 이제 날개를 달았다.

1967년 개봉한 이만희 감독의 영화 ‘기적’에는 남정임이 출연한다. 이만희의 걸작 중 하나로 격찬을 받은 이 영화에서 남정임은 열차 안에서 사과를 파는 소녀로, 쫓기는 남자 최무룡을 돕는다. 영화는 배경 음악 없이, 오로지 기차에서 나는 실제 음향만을 배경으로 촬영됐고, 대사도 극도로 억제돼 박진감을 자아낸다. 문희와 남정임은 이제 당당하게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게다가 남정임은 진정한 배우라면 자기 목소리로 녹음을 해야 한다며, 시기상조라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녹음을 고집한다. 물론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1967년 상반기 결산 결과 데뷔 2년차 문희가 출연한 영화는 13편이었다. 열 편 이상의 영화에 겹치기 출연 중이던 남정임 역시 그에 못지않은 성과를 거뒀다. 문희는 출연작마다 새롭다는 칭찬을 받았고, 남정임은 괄괄하고 당돌한 말괄량이 여성으로 자신의 개성을 만들어갔다. 그 사이 고은아는 영화제작자 곽정환과 결혼하면서 연기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동시에 재미있는 일이 터진다. 곽정환에 의해 신인 배우로 발탁된 윤정희가 그를 상대로 소송을 낸 것. 공모 상금 50만 원 중 15만 원만 주고 나머지는 10개월이 지나도록 주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게다가 자신이 다른 영화사의 작품에 출연하고 받은 개런티 중 30%를 곽정환이 챙기며 폭리를 취했다고 주장했다.

신파여, 다시 한 번!

이 와중에 윤정희의 진가가 드러난 영화 ‘안개’(김수용 감독, 1967)가 개봉했다. 소설가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서 윤정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할 것도 없는 권태로운 시골 무진에 은거 중인 음악선생 역을 맡아 이질적인 환경에 놓인 현대 여성의 무기력과 절망을 표현했다. 이후 그녀는 이지적인 여성의 표상이 된다. 이만희 감독의 스릴러 영화 ‘여섯 개의 그림자’(1969)에서는 남궁원에게 학대당하고 신성일의 거짓 사랑에 속아 목숨을 위협당하는 절망적인 배역을 맡았다. 윤정희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둘 다 죽이기로 결심한다. 남궁원을 죽이러 가기 전 말없이 화장을 하고 검은 선글라스를 쓰는 장면은 놀랍다. 그때까지 아무 매력도 없던 그녀가 갑자기 놀라운 매력을 뿜어내는 것이다.

윤정희는 도회적인 이미지로 첩보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는가 하면 검객 영화에서 여검객 역을 맡기도 하고, 구시대의 비극적인 여인상을 연기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멀티 플레이어였다. 윤정희가 문희와 남정임에 이어 세 번째 여성 스타로 등극하면서 1960년대 말 사람들은 이 세 여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를 보지 않고는 한국 영화를 봤다고 말하지 못할 상황에 놓였다. 이른바 트로이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1968년, 문희 주연의 ‘미워도 다시 한 번’(정소영 감독)이 개봉된다. 이 영화는 단숨에 한국 영화의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며 사상 최고의 흥행 영화로 등극한다. 영화 내용은 오래전 이모와 고모, 어머니들이 고무신 신고 하얀 손수건을 든 채 보던 바로 그 신파영화였다. 아역 배우 김정훈의 “엄마. 왜 나는 엄마와 같이 살 수 없는 거예요?” 한 마디가 첨가됐을 뿐. 공전의 히트를 한 이 영화로 인해 한국 영화계는 다시 과거로, 손수건 적시는 신파 멜로 영화의 세계로 돌아가버린다. 너무나 단숨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사이 재능 있는 감독과 배우들이 창조적인 작업을 통해 쌓아 올렸던 새로운 시대가 한방에 무너지고 극장가는 다시 고무신 부대의 영화들로 채워지게 된다. 영화적인 실험도 사라졌다. 이와 때를 같이해 깡패 영화가 수없이 만들어지면서 재능 있는 세 명의 여배우는 깡패 영화에서 남자 배우의 들러리를 서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게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가 만들어지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남정임은 자신의 장점이 부각되는 작품에 출연하지 못한 채 수많은 영화에 겹치기 출연하면서 서서히 재능을 갉아먹는다. 게다가 본래 갖고 있던 발랄하고 거침없는 말괄량이 기질로 크고 작은 스캔들의 중심에 서게 되는데, 그중 유명한 것이 제작부장에게 구타를 당한 사건이었다. 이후 1971년, 남정임은 수억 원대 자산가라는 재일교포와 결혼해 일본으로 건너가버린다. 문희도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수없이 많은 속편에 출연하고, ‘미워도 다시 한 번’에서 아들로 나온 아역 배우 김정훈의 아내가 되는 수모를 겪으며 ‘꼬마신랑’ 시리즈에 출연하는 등 빛나는 연기력을 발휘할 기회를 잃어가다 1971년, 남정임의 뒤를 이어 결혼한 후 은퇴해 영화계에서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2년 뒤, 트로이카의 마지막 여왕 윤정희도 공부를 하겠다며 프랑스로 유학을 갔고 몇 해 뒤 결혼해 영화계에서 사라진다. 이리하여 한국 영화계에서 최초로 여배우가 영화의 중심에 서던 시대는 저물고 만다.

몇 해 뒤, 남정임이 돌아왔다. 결혼 직후부터 ‘선데이 서울’ 등의 주간지를 통해 끊임없이 제기됐던 불행한 결혼에 대한 소문의 종지부는 이혼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남정임은 그녀를 발굴해 데뷔작을 찍었던 김수용 감독의 영화 ‘웃음소리’(1978)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재기를 꿈꾼다. 당시 유행하던 호스티스 영화들과 별다를 것이 없는 작품이었다. 남정임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데, 그녀의 가슴에 묻어둔 사랑의 기억들이 너무나 진부하고 상투적인 졸작이었다. 게다가 이미 30대 초반에 접어든 남정임의 상대역이 파릇파릇한 청년 이영하였으니, 둘이 마주칠 때마다 남정임의 나이가 떠오를 수밖에 없던 건 또 다른 의미로 비극이었다. 진부한 졸작으로 재기를 노린 남정임은 몇 년 후 암에 걸리고, 1992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죽기 전까지 그녀는 자신의 기구한 생애를 시나리오로 만들어 영화화할 것을 꿈꿨다고 한다.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발바리의 추억'은 시대의 아픔·추억 담은 청춘일기"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만화계의 산증인, '발바리의 추억' 강철수 만화가

만화에 얽힌 추억 다들 있으시죠? 용돈이라도 생기면 동네 만화가게로 달려가서 손때 묻은 만화책을 넘기면서 친구들과 키득대던그 시절이 생각나는데요.

척박하던 그 시절 만화는 우리 모두에게 꿈과 상상력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가 됐습니다.

만화 하나로 수많은 독자들을 웃고 울게 했던, 한국만화계의 산 증인이자 누구보다도 만화를 사랑하는 사람, 영원한 청춘 백수 발바리의 만화가 강철수 씨. 영원히 청춘일 것 같던 그도 이제는 만화계의 원로가 됐습니다.

47년 동안 2000편이 넘게 만화를 그렸고, 작품 생각에 단 하루도 편히 자 본 적 없이 치열하게 세상을 맞서온, “내가 가야할 길을 가는 것 뿐”이라며 겸손히 대답하는 만화계의 원로 강철수 씨를 만나봅니다.

◇ 중학교 때부터 만화작가로 활동 시작

▶ ‘원로’라는 표현 들으시면 어떠세요?

너무 듣기 싫어요. 대개 원로라고 하면 그 분야에서 공헌을 했다거나 하는데, 저는 별로 한 것도 없거든요. 그래서 원로라고 하면 죄짓는 것 같구요. 그냥 좀 나이 들었다는 느낌 정도죠.

▶ 만화계에서도 가장 오래 가장 많은 작품을 그린 ‘다작 작가’다 라고 하던데요. 올해로 몇 년째 활동하고 계신 거죠?

참 오래 되었네요.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대통령이 쭉 바뀌는 동안 계속 해왔으니 한 47년쯤 되나요?

▶ 일찍 시작하셨죠?

초등학교 때 출판사에 갔더니 왠 조그만 애가 왔나 하면서 쫓겨났죠. 그러다 중학교 2학년 쯤 되니까 조금 관심을 갖더라고요. 그래도 명색이 작가인데 출판사 가면 머리 쓰다듬어주고 그랬어요. 그러고 보면 세월이 많이 지났네요. 제가 진주 중학교를 다니다가 일약 출세를 해서 서울에 올라와서 고등학교를 다녔죠. 근데 학교에서도 굉장히 시끄러웠어요. 내일이 마감이면 공부시간에 몰래 원고를 해야되는데 하다가 원고를 뺏겼어요. 

교무실에 불려가서 출석부로 머리 맞고 선생님이 “이게 무슨 짓이냐? 어떻게 살아가려고 이런 짓을 하고 있냐?” 라고 했었어요. 저는 좀 내성적이어서 ‘선생님, 그것이 제 밥줄입니다.’ 소리를 못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무서워서 벌벌 떨다가 나중에는 원고를 돌려 주시더라고요.

▶ 요즘같이 빠른 세대에도 중학생 작가는 없는 것 같은데, 대단히 빨리 출세를 하셨어요?

만화가는 가수나 성우와는 달라서 많은 밑천이 있어야 그리거든요. 그림 재주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아이디어가 있어야 되는데 중학교 2-3학년짜리가 무슨 인생의 밑천이 있겠어요? 그러니까 좀 하다가 들통이 나는 거죠. 밑천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무수히 고생을 했죠. 반짝 하다가 “야, 너 저번 그린 것 하고 다른 게 뭐있어? 시작 때는 재밌더니 뒤에는 다 누구 것 베낀 거지?” 하는 소리를 듣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어른들 말이 다 맞더라고요. 어릴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읽고 인생경험을 많이 쌓아야지 작가가 되는 거더라고요.

▶ 지금까지 그린 만화가 몇 편 정도 되나요?

편 수로 하면 몇 천 편 되지만, 그것이 그렇게 많지도 않은 것이 옛날 만화가 50페이지짜리도 있고 그랬습니다. 제목은 몇 천 권 쓴 것은 확실합니다. 제가 어느 날 노트북으로 계산을 해봤더니 백만 컷트쯤 제 손을 거쳐 갔더라고요. 

▶ ‘발바리의 추억’ 말고도 주요작품은 어떤 것이 있나요? 

워낙 제목들이 많아서요. ‘사랑의 낙서’, ‘팔불출’, 또 옛날 사극, 세계 명작들, 문학작품들, 하다못해 빈대가 주인공인 만화도 있었어요. 제가 안 해본 건 공주님 나오는 것만 못해보고 나머지는 다 해본 것 같아요.

▶ 그 당시 진주에서도 문화생활이 굉장히 척박하고 만화가게도 없었을 것 같은데요.

옛날에는 만화가게가 가마니를 깔아놓고 보고 싶은 사람은 거기 앉아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주인이 와서 책가지고 도망가지 않나 감시하고 했죠. 일어나면 바지에 가마니 지푸라기가 묻고 그랬죠. 그런데 서울에 왔더니 제가 처음 살던 곳이 마포 아현동이었는데. 만화가게에 들어갔더니 긴 나무의자에 앉아서 만화를 보는 거예요. 의자에 앉아서 만화를 보다니 하는 정도였거든요. 

그런데 만화가 잘 되는 시절이 한 번도 없었어요. 늘 종이값이 오르고, 인쇄비가 오르고, TV 때문에 만화가게에 손님이 없어서 안되고, 만화가게에서 떡볶이 같은 음식도 같이 팔면서 만화가게가 비위생의 온상이다, 또 아이들이 많이 모이니까 싸우기도 하고, 옛날에는 만화를 봄으로써 애들이 나빠진다 해서 나중에는 칠대 악(惡)에 들어가기도 했어요. 만화 화형식도 하고요. 40년 그림 그리는 동안 40번 넘게 잡혀다니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 만화의 주인공들을 통해 그 시대의 아픔과 추억을 그려

▶ 처음 시작은 어떻게 하게 되신 건가요?

옛날에 악극단, 서커스단이 마을에 오고 했는데요. 그 때 배삼룡 씨 등이 나와서 막간극을 하고 했거든요. 배우들이 총을 쏘면 화약 냄새가 나고 사람이 팍 쓰러지는 것을 보고, 막간 배우들이 노래도 하고 내가 저런 것을 하면 재밌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만화가게에 갔더니 만화가 있는 거예요. 만화는 무대보다는 설정이 쉽지 않습니까? 연필로도 가능하고요. 내가 하면 이 작가들 보다 나을 것 같더라고요. 그 때 김정래, 박광현 등이 유명했죠. 

그런데 그것이 만용이죠. 서울에 왔더니 선배 되는 분이 “이런 독자들까지 기어 올라와서 위협을 하니 우리가 먹고 살 수 있겠느냐?” 라고 했었어요. 어쨌든 그 것이 시작이 된 거예요. 될 것 같다 라는 생각을 한 대신 아주 죽을 고생을 했죠. 

▶ 그러다가 잘 되신 것은 언제부터예요?

고등학교 2-3학년쯤 되니까 출판사에서 돈도 천원 주던 것을 천오백원, 삼천원 주더라고요. 그리고 고2가 되니까 술집을 데려가더라고요. 그 때는 머리를 박박 깎아서 극장가서 잡히면 정학 맞고, 당구장은 모자쓰고 다니고 그랬거든요. 근데 고2때 요정을 갔었어요. 출판사 사장이 데려갔어요. 모자 쓰고요. 제가 태어나서 첨 가봤는데 방에 병풍이 있고, 멋있는 데 앉혀놓고 술도 먹을 줄 몰랐는데 그 날 청주를 먹었던 것 같아요. 출판사 사장이 잘 부탁한다고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여흥을 즐길 줄 아는 나이에 가야지 재밌죠, 고2짜리가 가서 뭘 알았겠어요? 그 출판사 사장님이 아직도 살아계신데, 그 분은 자기 사람 만들려고 그러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좀 책이 팔리면 출판사 여기저기서 데려 가거든요. 그래서 예를 들어 편당 삼천원, 전속 몇 년 으로 돈 주면서 계약을 하고 포섭을 하는 거죠. 

▶ 그 당시 삼천원 정도면 어느 정도 금액이었나요?

자세히 기억은 안나는데 대학등록금이 만원 정도 였어요. 그리고 그 당시 엘비스 프레슬리 나오는 영화를 보러 택시를 타고 대한극장을 가는데 기본요금이 30원이 된다고 했으니 삼천원이면 큰 돈이었죠.

▶ 발바리가 나온 것은 언제죠?

발바리는 80년대에 나왔고, 발바리 선배가 있습니다. 1974년도에 ‘사랑의 낙서’를 할 때인데 그 때 참 어려웠죠. 발바리는 88년에 나왔습니다. 한 주인공이 시대에 따라서 계속 성격이 바뀌었고, 또 얘기가 여자와 사랑을 하는 이야기보다 이를테면 시위가 많던 시절에 왜 시위를 했던가, 왜 장발 때문에 잡혀가서 매를 맞아야 하나 하는 어떤 시대적인 청춘일기인거예요. 그 때는 여자랑 남자랑 첨 만나서 손잡으면 부도덕한 것으로 보던 시대였거든요. 근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시대가 되었거든요. 

그런 것들을 저 같은 사람이 정사(正史)는 아니고 야사(野史)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런 편편들을 기록하는데, 그냥 기록하면 재미없으니까 약간 유머를 곁들이고, 로맨스와 슬픔과 사랑얘기를 곁들이게 되는 거죠. 또 사랑 얘기는 꼭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거든요. 삼각관계, 사각관계가 나타나기도 하고, 포장마차에서 위로하다가 엮이게 되고 하는 시대적인 상황들, 정치적인 것도 약간 묻어나고 하게 된 거죠.

또 저희 발바리 중에 시선을 끌었던 부분은 아버지가 투기꾼이에요. 그 부모가 투기를 해서 엄청나게 돈을 버는 거예요. 그래서 아들한테 돈을 막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부모는 돈은 들여놓고 자식은 나가버리는 거예요. 자식은 돈이 많으니까 나가서 술먹고 여자 만나고 하는 일종의 시대적인 현상인 셈이죠. 그러니까 좀 좋지 않은 집안에서 유학 보내놨더니 결국은 타락해서 공부도 안하고 마약하고 하는 식으로 제 주인공들이 시대적인 양태를 남자와 여자로 나타내서 보여주는 거죠. 근데 그걸 그냥 보여주면 안 보니까 재밌게 그리다 보니까 그런 작품이 나온 거죠.

▶ 혹시 이 작품은 내가 졸작이었다 싶은 것들도 있으세요?

저는 대개 밤이나 새벽에 그리거든요. 그리고 대개 스토리텔러가 있는데, 저는 거의 99.9% 는 제가 쓰고 그렸거든요. 그러니까 남들보다 힘이 많이 들죠. 근데 다 끝나면 보기도 싫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린 만화가 집에 별로 없습니다. 보고 싶지도 않고 한 번 지나고 나면 다 버리고 싶어요. 그나마 독자들이 봐줘서 자식도 키우고 밥도 안 굶고 살아왔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이런 것을 창피하게 어떻게 냈을까 싶고 한 것이 오히려 오랫동안 안 굶고 산 것 같아요. 다 해놓고 보면 어떻게 이렇게 했을까 방송하는 분들도 비슷한 심정일 거예요. 

제 자식들도 제 만화 못 보게 감춰놓고요. 그럴 정도로 너무 부끄럽고, 밤새서 작업하다보니 틀린 글자도 나오고 그렇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늘 불만인거예요. 너무 불만이 쌓이다보니까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가고, 여러 가지 사례를 연구하고 저 혼자서 꾸밀 수 없으니까 많이 돌아다니게 되고, 그러니까 밑천이 많이 든다는 얘기예요.

▶ 그런데 그런 대중성 있는 작품을 하다보면 너무 통속적이다 라는 비난도 있으시죠?

소위 고상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단순수치로 따져볼 때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영어를 하는 사람이 많으면 영어로 이야기 해야지 우간다 말로 하면 많은 사람들이 못 알아듣거든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말해서 대중성에 영합하는 거고요. 대중성에 영합을 하면서 고상한 것을 넣으려고 하는 것이 이상향이죠. 하찮은 것 같지만 잘 들어보면 괜찮은 얘기도 많고 좋은 메시지도 있더라 하는 것이 말하자면 목적이죠. 

▶ 그런 분위기 때문에 70-80년에 사회악이다 해서 검열기준도 있고 했는데, 이것이 어떤 정치적인 색채 때문에 그랬습니까? 왜 사회악으로까지 공격의 대상이 되었죠?

일부 입김이 센 사회단체들이 있었죠. 그들의 말도 들어보면 또 그럴 듯 합니다. 애들이 공부는 안하고 만화를 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대개 저도 그랬지만 그냥 만화를 봅니다. TV가 좋고 나쁘고 어떤 의식에 좋고 안 좋고를 떠나서 무조건 집에 오면 TV를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시대에는 생각이 열리지 않은 분들이 많아서 염속주의식의 단순 발상이 참 많았죠. 지금은 참 많이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그런 것들을 다양성으로 인정하는 사회거든요. 근데 옛날에는 남보다 앞서가면 꼭 불려 다니고 매맞고 그랬어요. 

60-70년대에는 성인 만화가 없었어요. 다 어린이를 위한 만화인 거예요. 그래서 초등학생인 주인공의 아버지 어머니가 나란히 누워있는 장면이 나오면 다 음란하다고 다 걸려 갔어요. 그래서 원고를 뺏기고 빨간 줄을 긋고 해서 제가 싸우다가 막 찍히고 반사회주의자니 온갖 욕을 다 먹었죠. 

또 ‘복수’ 이런 것도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몬테크리스토 백작 책을 가져가서 “이것이 학교에서 보라는 세계 명작인데, 복수 이야기입니다.” 했더니, “당신 복수하고 그 복수는 질이 다른데, 어디 건방지게 세계명작과 비교를 하느냐?”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질이 낮든 방법이 치졸하든 복수는 복수입니다.”라고 했던 적도 있죠. 

또 뱀도 표지에 못그리게 했어요. 징그러운 파충류가 표지에 등장해서 애들 정서에 심대한 지장을 주니까요. 다 그려 놓은 것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서로 타협을 해서 “통과를 시키는 데 대신 뱀의 목에 리본을 달아라” 라고 하던 그런 시절이었죠. 우리는 만화라는 것의 역사가 일천하기 때문에 이해가 덜 되는 분들이 많아서 참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 요즘은 오히려 창의력 때문에 만화를 많이 보라고 하지 않습니까?

진작 그랬으면 좀 더 많은 선수들이 나타났을 텐데요. 거의 만화로서는 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을 만들어놓고 만화 한 편 잘 만들면 천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그 열매만 강조를 하는 거예요. 다시말해 좋은 토양에 씨를 뿌려서 그 맺어진 열매를 좋은 쪽으로 활용하도록 그런 시작부터 끝까지 도와주고 정책을 만들어야 하는데 열매만 따지는 거예요. 지금 만화가 다 망하고 난 뒤에 일본만화가 들어와서 다 쑥밭이 되고 또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거든요. 일년에 수천 명의 만화학과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갈 곳이 없어요. 그래도 가수나 성우는 시험쳐서 뽑는 기회가 있지 않습니까? 만화계는 그런 것이 거의 없거든요. 

▶ 그래도 이현세 씨 등 아주 대단한 스타급 작가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몇 명 있는 것을 가지고 괜찮다고 해서는 안되죠. 만화영화 하는 것도 그 척박한 환경속에서 뛰어난 천재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일부 극소수죠. 대개 게임산업으로 다 가고 말이죠. 본래 작은 냇물이 바다에서 다시 만나듯이 작은 출판물, 작은 다락방에서 출발되거든요. 그런데 다락방 다 없애버리고, 펜촉도 다 사양 산업이 되어버렸어요. 요즘은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만화 그리면 불량 청소년이 되는 거예요. 그런 모든 악재가 모여 문화 하나를 죽인 셈이죠.

▶ 그러면 만화를 그리시는 분들한테도 어떤 부분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요?

없지 않죠. 제가 그린 만화도 들어가겠지만 작가가 만화를 그려서 정말 재미있는 것도 있었지만 졸작도 있거든요. 근데 졸작이라는 것은요, 음식처럼 유해한 독이 들었다거나 불량품을 만들었다거나 하는 것만 아니면 다 시장에서 해결이 되는 거예요. 단, 옛날에는 용공사상이니 패륜아가 된다느니 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건 약간 졸작을 엄숙주의 교수들과 사회단체들이 그런 쪽으로 몰아서 이런 만화는 없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괜히 종이만 낭비한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만화라는 것에 너무 책임의식을 강조하는데, 사실 만화라는 것은 너무 교과서 같이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나서 TV를 보거나 만화를 보면서 깔깔거리며 웃는 것으로 그 피곤한 것을 풀어야지, 하루종일 학교에서 시험치다 오는 애를 또 교과서 같은 만화로 철학을 따지고 하는 건 고문이고, 만화라는 존재가 필요 없죠.

▶ 들으시는 분들이 ‘강철수 씨가 스타 만화가신데, 불만이 엄청 많으시네.’ 하는 지적도 있으실 것 같은데요. 그만큼 아쉬운 부분이 많으신 건가요?

제가 만화가를 오래 했으니까요. 저는 주로 신문이나 잡지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신문이나 잡지가 잘 안되면 자기 밥그릇이 줄어드니까 그런다 싶겠지만, 제가 속한 부분 말고 단행본 얘기를 해드릴께요. 단행본은 만화가게나 대여점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요. 거기는 만화를 한 권 사면 죽을 때까지 그 책을 대여할 수 있습니다. 한국 만화계가 안 되는 이유가 그렇게 대여점이 만화 한 권으로 오랫동안 대여를 하니 작가들이 발을 붙이고 생활을 할 수 가 없는 거예요. 


작가들이 수입이 삼십 만원, 오십 만원도 안되고 그러다보니 게임업체로 떠나고 하게 되니 무슨 아이디어가 나오겠어요. 노래방에서는 노래 하나를 해도 그 중에 얼마는 가수한테, 그 중에 얼마는 작곡가한테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만화는 그 한 권이 시중에 돌아다니면 그 책이 불타 없어질 때까지 대여점 주인이 계속 장사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화는 살 수가 없는 사회예요.

◇ 가족들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

▶ 고등학교 2학년 때 벌써 스타 만화가가 되셨는데, 여성과 데이트 할 시간은 있으셨어요?

일하느라고 별로 만날 새가 없었죠. 그리고 그 당시는 월급으로는 집 한 채 사기 어려워서 다 셋방살이하고, 홍수나면 책 다 떠내려가고, 집에 비가 새서 양동이로 받쳐놓고 살던 시절이라 겨우 80년대 들어서 집 한 칸 만들고 하던 시절이었죠. 그리고 데이트 할 시간보다 술을 많이 먹고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 만나던 것이 밑천이라면 밑천이죠. 그것이 말하자면 저의 보물창고인 거예요. 특히 누가 싸우던지 치정에 얽혀 갈등을 겪는다든지 하면 저는 거기에 빠져 사는 거예요. 

카운슬러 일을 하시는 분들이 그런 남의 힘든 얘기를 듣다보면 불행해진다고 하는데, 저는 다행히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스운 얘기를 만들면서 덜 불안해졌죠. 하여튼 어떤 남녀가 있었는데 만나서 잘 살았다 하면 그건 얘기가 안되는 거예요. 반드시 갈등이 있어야 되는 거고, 헤어질 뻔 하다가 다시 만나고 해야 재미있거든요. 

▶ 그럼 결혼은 어떤 분하고 하신 거예요?

그런 것은 좀 비밀로 하고 싶네요.(웃음) 왜냐면 야구선수들도 보면 시즌이 시작되면 집에를 못 들어가서 부인들이 고생을 하는 것 같아요. 근데 저도 비슷한 것 같아서 소재 없으면 나가고 맨날 밤새고 술 먹고 들어오니 어떤 여자가 좋다고 하겠어요. 그러니까 참 미안하고 면목이 없죠. 대개 여자의 행복이라는 것을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같이 앉아서 얘기도 하고, 가끔 외식도 하고 영화도 보고 해야 하는데, 만화하는 사람들은 거의 자기 세계밖에 없어요. 그리고 신경이 많이 곤두 서있다 보니까 아내나 자식들이 슬슬 피한다고요. 제가 그럴 때마다 가책을 많이 느끼면서 살았는데요. 

만약에 제가 하늘로부터 받은 재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반대급부로 준 것이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달게 받고는 살았지만 부인한테는 참 미안하고 부끄럽고 그렇습니다. 저는 사과하는 사람을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해요. 다 망해놓고 나중에 미안하다고 해서 다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는 미안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점수를 딴다거나 만회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다만 계속 마음에 걸려서요. 

저는 자식교육이 같이 많이 뒹굴고 돌아다니는 거라고 생각해요. 무슨 논술 기술을 가르치고 영어 단어를 가르치는 것보다도 같이 다니고 산에 다니고, 공부 못해도 된다고 해요. 공부 못해도 된다고 하면 오히려 더 공부 잘해요. 그런데 저는 자식들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는 거예요. 이제는 애들이 커서 사회인이 되다보니 걔네들도 바빠서요. 서로 만날 기회가 없는 거예요. 내가 뿌린대로 그대로 거두는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식들이라도 크면 저와 같이 지내주고 할 줄 알았거든요.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관심은 많았는데 같이 놀아주지 못한 미안함은 있죠. 

▶ ‘호랑이 선생님’ 이라는 드라마도 대중들에게 참 친근했죠?

그 PD분도 만화가가 쓰면 좀 재밌지 않을까 싶어서 장난같이 시작했을 거예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시청률이 좋았죠. 4백 몇 회를 썼었어요. 참 많이 썼죠. 한 시절 몇 년간 거기에 청춘을 바쳤죠. 그러다 보니까 또 방송하고 인연이 닿아서 베스트 극장, 테마 게임 등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지 만화나 드라마나 노래나 소설이나 다 똑같다고 생각해요. 

▶ 전설처럼 남겨지는 주인공 인물이 있다는 것이 강 선생님한테는 아주 대단한 재산이시죠? 

그런데 우리 주인공은 그렇지 않은데 ‘발바리’가 자꾸 강간범으로 나오니까 좀 불편하더라고요. 아마 제일 첨에 쓴 기자분이 상징성이 있으니까 재미로 붙였을 거예요. 그런데 자꾸 나오니까 좀 그렇더라고요. 

▶ 당구 400을 치시고, 아마 바둑 6단이나 되신다면서요? 

의사들이 머리를 많이 쓰다보면 반대쪽 뇌를 많이 써야 균형이 잡힌다고 하더라고요. 머리를 식히다 보니 술 마시거나 당구를 치거나 하다보니 솜씨가 늘은 거예요. 그리고 제가 보면 이런 쓸데없는 일, 잡기에 소질이 있나봐요. 

◇ 세계 60여개국 여행하며 많은 것 배워 

▶ 그런 것에 비하면 여행 취미는 정말 건전한 것 같은데요. 

술 먹다보면 자꾸 담배도 피게 되고 공기 탁한 곳에 있게 되서 취미를 바꾼 거예요. 당구 치다보면 돈도 많이 쓰고 게임이라는 것이 다 하다보면 다투기도 하고요. 그래서 여행을 다니게 됐죠.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특혜받은 것이라면 여행을 많이 다닌 것이 아닌가 싶어요. 남은 재산은 그것밖에 없더라고요. 

▶ 특히 일본을 많이 가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일본은 우선 가까우니까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는 점과, 치안이 잘 되어 있고, 문화가 비슷하고, 음식이 우리나라와 비슷해서 고생할 것이 없거든요. 그런데 우리 세대들은 일본에 대한 감정들이 참 안 좋습니다. 항일이니 반일이니 해서요. 그래서 제가 고3때부터 일본어를 많이 공부했는데 공부한 근본적인 이유가 일본사람들이 들으면 싫어하겠지만 싸우려고 배웠어요. 싸우려면 일본어를 잘해야 되니까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다 보니 싸울 일도 없어지고 그 때 일본어를 배운 덕에 일본을 많이 가죠. 

▶ 60여개국을 여행하셨다던데, 참 많이 하셨어요?

참 많이 다녔죠. 그래도 안 간 곳이 더 많더라고요. 저는 많이 간 줄 알았더니 지도를 펴 보니까 안 간 곳이 많더라고요. 60개국 좀 넘게 갔을텐데 사실은 그건 여행도 아니에요. 예전에 저희들은 비자도 안나오고 여권도 안 나오던 시절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시절에 외교관이나 상사원 갔다온 분들이 유럽 다녀온 얘기를 하면 “형, 어땠어? 로마 갔었어?” 하고 물어보잖아요. 그런데 선배 하나가 “로마? 아마 갔었을껄...”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유럽은 막 일정에 쫓겨서 세 나라, 일곱 나라도 가고 하거든요. 

본래 여행은 제가 감히 말씀드리지만 딱 한군데만 가는 거예요. 여의도 하면 여의도 가서 일주일 있는 거예요. 그래야 거기 사는 할머니와 얘기도 나눠보고, 여의도가 어디에 붙었는지 다녀와서 소개도 해주고 그러죠. 그런데 여기 와서 사진찍고 다시 또 금방 다른 곳으로 가고 하면 의미가 없어요. 여행 가서는 거기는 어떻게 사는지 보고 내가 얼마나 작은 인간인가를 살피고 하는 거죠. 그리고 요즘은 한류라고 해서 한국 사람들을 예전보다 알아보고 술을 마시다보면 술을 들고 와서 이것 먹으라고 주고 하는 것을 보고 감동도 많이 받고 했죠. 

▶ 그렇게 다니셨던 곳 중에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디고, 어떤 이유가 있으신가요?

저는 너무 춥거나 너무 덥지만 않으면 가는 곳마다 다 좋던데요.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먹고 사느라고 바둥바둥 살아가더라고요. 인도에 갈 때도 거지가 많고 가난하다고 들었는데 뉴델리 갔더니 시내에 골프장 18홀을 가진 사람도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빈부격차는 어디를 가나 다 있고, 어느 나라나 먹고 사느라고 바둥바둥 살더라고요. 저는 어느 나라도 다 좋고, 어느 나라 음식도 다 먹을만 하더라고요. 

▶ 그런 것들이 다 만화의 소재로 응용되는 거죠?

어느 동네를 가고 어느 국가를 가든 다 애정을 갖고 보면 좋고 맛있고 다 친하게 잘 대해줍니다. 그런데 삐딱한 눈으로 보면 반드시 저쪽에서도 좋지 않게 나옵니다.

▶ 60여개국을 가셨는데, 그러면 사모님과 같이 가신 나라는 몇 나라쯤 됩니까?

뭐, 한 서너 나라 정도요.(웃음)

▶ 만화가 분들을 세대별로 나눈다면 강선생님은 몇 세대쯤 되시는 건가요?

제가 중학교 때 시작할 때 선배님들은 40-50대였거든요. 그러면 한 20-30년 이상 차이 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만화가의 세대는 거의 5년에서 10년이 한 세대 인 것 같아요. 10년도 아닌 것 같아요. 왜냐하면 유행이 5년이면 확 지나가 버리고 요즘은 사회전반이 30대 중반만 지나가도 원로가 되는 것 같더라고요. 40만 넘어가도 일이 없어 노는 작가들을 보고 좀 충격적이기도 했죠. 그런데 거기에 맞물려 있는 고리가 만화사업이 잘 안되고 경기가 없으니까 더 그런 것 같아요. 

◇ 고우영 선배와 함께 단속을 피해 도망다니던 시절도 있어

▶ 고우영 선생님은 선배님 되시죠? 

그럼요. 하늘같은 선배였죠. 나이도 한 10년 정도 차이가 났죠. 제가 고 선생님 돌아가셨을 때 추모사를 썼거든요. 그런데 추모사를 함부로 쓸 것이 아니더라고요. 제가 밤새도록 썼어요. 참 힘들게 썼는데, 그래도 고 선생님은 제 추모사에 만족하셨을 거예요.

▶ 원래 고우영 선생님은 고전을 그리라고 하셨는데, 그건 싫으셨다고요?

독자들도 다양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하니까 저는 좀 다른 길을 가고 싶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어떤 세상에 있는 이야기를 그리기는 싫어요. 아무도 손 안 댄 얘기를 하고 싶죠. 

▶ 고우영 선생님의 재치나 재능은 정말 뛰어나셨죠. 

1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분이죠. 필설로 옮길 수 없을 정도죠.

▶ 고 선생님에 얽힌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가요? 

둘이 예전에 체포령 떨어져서 잡혀다니고 했는데 도망을 다니다가 그분은 미리 자수를 해서 새마을 연수원에 가서 교육을 받고 나왔어요. 저는 그것도 싫어서 친척집으로 도망가서 숨어있었죠. 간첩처럼 숨어서 밥을 몰래 조달해서 먹고 했는데, 나중에 그 분과 만난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돈도 좀 있으니까 해외로 도망가자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나요. 

▶ 그 때 왜 그렇게 잡아갔나요? 무슨 죄목이었습니까?

길에서 만화나 주간지를 팔던 시대가 있지 않았습니까? ‘고우영 삼국지’, ‘사랑의 낙서’ 등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잘 팔리니까 이상하고 야하고 저질 작품들도 많이 나오고 했죠. 그래서 그 단속이 시작된 거예요. 근데 그런 사람들은 다 도망가고 저희 오리지날들만 다 잡힌거예요. 그리고 저희같은 사람은 신원이 확실하고 주거가 확실해서 증거 인멸의 우려도 없잖습니까? 그래도 본보기로 저희 둘이 잡혀간 거예요. 

불량 만화가 둘을 잡아서 혼쭐을 냈다는 소위 전시효과로서의 상징성도 있지 않습니까? 요새 같으면 고우영 선생님 만화를 보고 잡아갈 사람이 어딨겠어요? 그 좋은 만화를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위안을 삼고 살아갔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숨고 도망 다닐 일도 아니었는데 그 때는 분위기가 굉장히 좋지 않을 때였어요. 

▶ 경찰서 유치장이나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셨나요?

그럼요. 경찰서 유치장에 수갑차고 잡혀갔었죠. 잡범들하고 같이 잡혀있었죠. 그 상황에서도 형사들이 와서 싸인해달라고 자기 그려 달라고 하더라고요. 소매치기나 폭력배들하고 한 방에 같이 있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래도 저를 알아보고 와서 인사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다행히 구속은 안되고 혼쭐만 내서 보낸거죠. 믿지 않으시겠지만 어떤 때는 형사가 저를 책상 다리에다가 수갑을 채워놓은 적도 있었어요. 

▶ 청운의 꿈을 안고 만화계에 입문하는 학생들에게 한 마디 해주신다면요?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해야된다고 말해주어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지금 아주 조건이 나쁘다는 것을 잘 알고 해야 할 부분도 있죠. 갑자기 스타 만화가가 되는 것들을 보면서 나도 될꺼야 하는 생각은 접고, 앞으로 한 5년에서 10년 정도는 고생을 해야 할 거예요. 지금 일본만화가 들어와서 일본만화도 안 팔릴 지경이 되었거든요. 제가 알기로는 1억권에서 10억권쯤 돌아다니고 있으니 우선 물리적으로 안되지 않겠어요? 그래도 유행은 자꾸 바뀌고 계속 보다보면 또 안보게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물리적으로 보면 5년-10년 정도는 지나야 좀 좋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또 대통령이 나서고 해서 문화적인 면으로도 시선을 주시고 하면 급격히 좋아질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고생을 한다는 각오를 해야 할 겁니다. 

▶ 그래도 요즘 ‘토지’도 만화로, 어렵게 느껴지는 신화도 만화로, 와인 만화까지 나올 정도로 순기능의 추억의 만화를 팬들은 앞으로도 많이 기대할 겁니다.

지금 후배들이 전시하는 곳에 가끔 가보면 비록 고생을 하고 있고 전망은 흐리지만 그 솜씨들이 아주 뛰어납니다. 그래서 이 고비를 넘기면 좋은 시절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 마지막으로 작품활동 계획 있으시면 말씀해주시죠. 

뭘 해야지 해서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번쩍하면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글을 쓰든지 만화를 그리든지 하거든요.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할 것이고 또 건강이 허락해야 가능한 것이니까 건강한 생각을 늘 갖고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나쁜 나이든 사람이 되지 않게 해야겠죠.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 

※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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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수 '친일행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
▲ 남인수.
ⓒ 자료사진
 진주MBC가 진주시로부터 예산 5000만원을 지원받아 오는 9일 저녁 진주성 특설무대에서 '남인수 가요제'를 강행하기로 해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민족문제연구소가 남인수(본명 강문수, 1918.10.18∼1962.6.26)의 친일행적을 공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05년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를 발표하면서 남인수를 포함시켰다. 진주지역 시민단체로 구성된 '친일잔재청산을위한진주시민운동'은 친일파의 가요제를, 그것도 시민 혈세를 들여 열 수 없다며 반대해 왔다.

하지만 진주시와 진주MBC는 남인수가 '친일인명사전'에 최종적으로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며, 가요제 개최를 계속해 오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담길 남인수의 주요 친일행적 자료를 7일 '친일잔재청산을위한진주시민운동'에 보냈다. 이 단체는 9일 가요제 때 이들 자료를 담은 유인물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눠 줄 예정이다.

진주 출신인 남인수는 진주제2공립보통학교를 졸업(1932)한 대중음악가(가수)였다. 그의 주요경력을 보면 1934년 '시에론'레코드사에 입사해 1936년 <눈물의 해협>으로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오케(okeh)' 레코드사 직영 조선악극단 소속 가수로 활동하면서 남만주와 중국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가 부른 '친일 군국가요'는 많다. ▲<강남(江南)의 나팔수>(1942년 1월 오케 레코드, 작사 조명암, 작곡 김해송)와 ▲<남쪽의 달밤>(1942년 8월 오케레코드, 작사 조명암, 작?편곡 박시춘), ▲<낭자일기(娘子日記)>(1942년 9월 오케레코드, 작사 조명암, 작?편곡 박시춘), ▲<병원선(病院船)(1942년 4월 오케레코드, 작사  조명암, 작?편곡 박시춘), ▲<이천오백만 감격(二千五百萬 感激)>(1943년 11월 오케레코드, 조선징병제 실시 기념음반, 작사 조명암, 작?편곡 김해송), ▲<혈서지원(血書志願)>(1943년 11월 오케레코드, 작사 조명암, 작?편곡 박시춘).

<강남의 나팔수>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활약을 찬양한 노래로, 가사의 내용으로 볼 때 일본군 돌격을 알리던 나팔수가 전사하자 이를 찬양한 것으로 보인다. <남쪽의 달밤>과 <낭자일기> <이천오백만 감격> 등은 징병제 실시를 축하 기념하는 노래다.

<혈서지원>은 1943년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고 조선인들이 혈서를 써서 지원한다는 내용으로 되고 있다.

또 그는 내선일체를 주장한 영화 주제곡 <그대와 나>(1941년(?), 작사 조명암, 작곡 김해송)를 장세정과 불렀는데, 이 노래는 '조선군 보도국'에서 제작한 것이다. <그대와 나>는 허영이 감독한 대표적인 친일영화다.

해방 이후 남인수는 정훈국 문예중대 소속 군위문활동 참여(1950)와 대한레코드가수협회 회장(1958), 한국가수협회 회장(1961), 한국연예협회 부이사장(1961.12) 등을 지냈다.

▲ 진양호 공원에 있는 남인수 동상.
ⓒ 윤성효
"가수는 노래로 친일에 기여한 행위"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은 "일부에서는 '가수가 노래 몇 곡 부른 것이 뭐가 죄냐?'고 하는데, 당시 일제의 통치 방식을 직역봉공(職役奉公)을 기본으로 하는 방식이었다. 직역봉공이란 자신의 직업을 충실히 하며서 친일을 하라는 방식으로 즉 화가는 그림으로 작가는 글로 가수는 노래로 친일에 기여한 행위"라고 설명했다..

방 사무국장은 "총독부는 남인수에게 노래로써 친일하기를 요구한 것이지 수백만 군인 중에 한명으로 참전하도록 요구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변호 논리라면 이광수도 김기창도 그 어느 예술인도 친일의 죄를 물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인기 가수 남인수가 친일노래를 불렀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며, 연구소에서 확정된 명단이 나오지 않아서 관계없다는 논리도 문제다. 이미 행위 자체가 명백하고 반복적이므로 진주시민의 역사 인식을 감안한다면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밀양의 '박시춘가요제'나 성주의 '백년설가요제'도 친일인명사전 명단 확정 전이었지만 관계자들이 민족문제연구소의 문제 제기를 수용한 사례도 많다”고 말했다.

 
▲ ‘친일잔재청산을위한진주시민운동’은 오는 9일 진주성 특설무대에서 열리는 남인수 가요제 때 남인수의 친일행적을 담은 유인물을 나눠 줄 예정이다. 사진은 지난 해 가요제 때 시위를 벌이고 있는 시민단체 회원들의 모습.
ⓒ 진주신문
남인수가 부른 ‘친일 군국가요’의 가사

[강남의 나팔수] 동무야 잘 싸웠다 강남의 나팔수/총 끝에 번갯불을 번쩍거리며/여산(廬山)은 칠십 리를 쳐들어 간 밤/여산은 칠십 리를 쳐들어 간 밤/입술에 피 흘리고 너는 갔구나.

[남쪽의 달밤]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동백꽃 피는 내 고향 떠나왔으니/사나이 내 목숨을 낸들 어이 알쏘냐/뻐꾹새 울지 마라 뻐꾹새 울지 마라 남쪽의 달밤//흘러를 간다 흘러를 간다/남쪽의 항구 쌍돛대 화륜선 위에/고향을 찾아가는 내 마음이 흐른다/어머니 불러 보는 어머니 불러 보는 진중(陣中)의 달밤//내일은 간다 내일은 간다/나라에 바친 한 가지 꽃을 안고서/험한 산 천리 황야 붉은 피를 묻히며/낙화로 가리로다 낙화로 가리로다 사나이 목숨.

[낭자일기] 낭자는 꽃이었소 아름다웠소/한 마음 붉게 피는 동백이었소/천만 산 넘고 넘어 싸움터로 가는/이 산천 젊은이의 아내이었소//낭자는 일꾼이오 씩씩하였소/먼 곳에 가신 님께 지지 않았소/두 몸은 남북으로 한별(恨別)이언만/충성을 맹세함은 한 가지였소//낭자는 꽃이었소 붉은 정성에/한 조각 떨어지는 낙화이었소/맘대로 못 다하는 생사일망정/떳떳이 죽는 것이 소원이었소.

[병원선] 정 들자 떠나가는 차이나 항구/병원선 뱃머리에 손을 흔들 때/붉은 불 푸른 불이 눈에 흐른다//군복을 벗어 놓고 흰옷을 입고/상처를 만지면서 흘러갈 적에/한 목숨 버린 동무 보고 싶구나//고향을 떠나온 지 몇 해 몇 천 리/죽어서 돌아가잔 맹세는 젖어/병원선 그늘 아래 달빛을 본다.

[이천오백만 감격] 역사 깊은 반도 산천 충성이 맺혀/영광의 날이 왔다 광명이 왔다/나라님 부르심을 함께 받들어/힘차게 나아가자 이천오백만/아 감격의 피 끓는 이천오백만/아 감격의 피 끓는 이천오백만//동쪽 하늘 우러러서 성수(聖壽)를 빌고/한 목숨 한 마음을 님께 바치고/미영(米英)의 묵은 원수 격멸의 마당/정의로 나아가자 이천오백만/아 감격의 피 끓는 이천오백만/아 감격의 피 끓는 이천오백만.

[혈서지원]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일장기(日章旗) 그려 놓고 성수만세(聖壽萬歲) 부르고/한 글자 쓰는 사연 두 글자 쓰는 사연/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해군의 지원병을 뽑는다는 이 소식/손꼽아 기다리던 이 소식은 꿈인가/감격에 못 이기어 손끝을 깨물어서/나라님의 병정 되기 지원합니다//나라님 허락하신 그 은혜를 잊으리/반도에 태어남을 자랑하여 울면서/바다로 가는 마음 물결에 뛰는 마음/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반도의 핏줄거리 빛나거라 한 핏줄/한 나라 지붕 아래 은혜 깊이 자란 몸/이 때를 놓칠쏜가 목숨을 아낄쏜가/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대동아(大東亞) 공영권(共榮圈)을 건설하는 새 아침/구름을 헤치고서 솟아 오는 저 햇발/기쁘고 반가워라 두 손을 합장하고/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그대와 나] 꽃피는 고개 너머 하늘에는 새날이 밝는다/영원한 길을 닦는 지평선에서/노래를 부르잔다 키미토보쿠/노래를 부르잔다 키미토보쿠//그대는 반도 남아 이내 몸은 야마토사쿠라/건설의 햇발 솟는 지평선에서/노래를 부릅시다 아이노우타/노래를 부릅시다 아이노우타//여기는 아세아다 우리들의 희망은 빛난다/따뜻이 손을 잡고 깃발 아래서/충성을 맹서 짓는 키미토보쿠/충성을 맹서 짓는 키미토보쿠.

[춤과 그들]최선 “춤에 혼이 담기지 않으면 풍선이야”


호남살풀이춤
호남살풀이춤

너무 예쁜 게 흠이었다. ‘호남살풀이춤’ 인간문화재 최선(72·본명 최정철)은 오빠부대의 원조다. 곱게 생긴 외모에 나비처럼 가볍게 살랑살랑 팔을 나부끼며 무대를 누비는 최선의 춤 현장에는 늘 여성팬들이 줄을 이었다. 지역공연을 따라다니는 것으로도 모자라 최선의 집까지 발길을 잇는 여성들도 있었다. 스토커였다.

# 한국전쟁이 빼앗은 행복

최정철은 1935년 전북 전주에서 아버지 최한필과 어머니 김옥주의 4남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셋째 아들인데 현재 누나 2명과 아우 1명이 살아있다.

아버지는 전북 임실에서 여관업을 했다. 잘 살았다. 그런데 6·25가 최정철의 집안을 통째로 뒤흔들어놓았다. 여관은 망하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두 아들은 인민군에 학살 당했다.

“큰 형은 대한청년연맹 부장이었고 작은 형은 경찰이었어요. 제가 학교 다닐 무렵 집안이 몰락했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과 달리 저는 어려운 생활을 했죠. 저요, 고생 징글징글하게 했어요.”

춤은 10살에 시작했다. 1945년 해방 후 전주에서 최승희의 제자 김미화가 그의 발을 떼게 해주었다.

45년 김제군 금구초등학교 3학년 때 학예회를 했는데 여학생 2명, 남학생 2명이 뽑혔다. 최정철은 그중 한 명. 학예회담당인 교생은 한국춤을 가르치는 게 아니고 유희성 동작을 지도했다.

‘방아방아, 콩콩 찧는 물방아야…’ 같은 동요에 맞춰 춤추는데 ‘정철이 제일 잘한다’고 칭찬 받았다. 어린이는 칭찬 받는 게 좋아 율동이 있는 곳만 찾아다녔다.

“시골에 극장이 어딨어요? 악극단이 오면 농협창고에 가설무대를 짓고 공연했죠. 신파극도 공연하고 서커스단도 왔는데, 집에선 어린애가 가면 안된다고 막았어요. 결국 몰래 집을 나와 공연장 담을 넘다 발목을 삐기도 했고… 5학년 2학기 때 전주 완선초등학교로 전학 가 김미화 무용연구소에서 13살까지 춤을 배웠습니다.”

# ‘착할 선’의 최선, 호남살풀이춤을 만들다

남중 2학년 때 6·25가 터졌다. 김미화는 부산으로 피란가고 전주에 남은 무용연구생들은 2층 비어있는 학원에 모여 연습을 계속했다. 그중 가장 어린 최정철은 당시 전주국악원에서 춤을 가르치던 기녀 출신 선생 추원에게 배웠다. 특히 그때 배운 수건춤은 ‘호남살풀이춤’의 바탕이 됐다.

“전주국악원 대청마루에 돗자리 깔고 발 내리고 수건춤을 추는데 추원 선생이 돗자리를 벗어나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춤음악이 없어 추원이 장구치고 구음하며 가르쳤죠. 그 춤을 ‘동초 수건춤’이라 했어요. ‘동초’는 동기(쪽찌지 않은 어린 기생)와 초립동의 합성어인데, 조그만 수건이나 부채를 들고 추었어요. 수건은 입으로 물거나 손으로 뿌리며 추기도 했죠.”

6·25 직후 공연무대에 섰다. 케이피케이, 케이에이치 등 군인악극단과 무궁화 등 악극단 소속으로 전국 무대에서 춤을 추었다. 지방공연은 사연도 많다. 비가 많이 오면 공연이 취소됐다. 여관에선 30여명의 악극단원들이 다음 공연지역으로 갈 때까지 죽치는데, 공연을 못했으니 숙박비가 있을 리 만무. 여관 주인은 수금을 위해 악극단의 다음 공연 장소까지 따라가곤 했다.

“우리는 악착같이 뒤쫓는 여관 주인을 ‘호열자(열병)가 따라온다’고 했어요. 당시 출연료를 받지 못한 배우들은 다른 악극단으로 떠나곤 했는데, 그 배우 역할을 할 사람이 없어 우릴 따라온 여관 주인들이 대신 무대에 섰답니다. 정말 웃기는 일이죠. 당시 황해·조미령·이빈화 등이 잘 나가던 배우죠. 저도 출연료는커녕 매일 굶다 결국 집으로 도망갔죠. 어머니께선 무척 반가워하시더군요.”

‘여자 같은 남자’로 불리던 최선. 예명은 단체 공연 다닐 때 연극인 황철이 지어주었다. ‘착할 선(善)을 써라. 최선이라 지으면 그 이름이 널리 퍼지고 유명해질 이름’이라고 했다. 19세부터 ‘최선’이었다.

# 19세 예쁜 남자는 오빠부대 원조

추원이 떠난 6·25 전쟁 직후 전주에서 은방초(본명 은종협·현재 미국 거주)를 만나면서 최선의 춤사랑은 점점 깊어만 갔다.

“남중 졸업 후 고교 진학을 못하고 춤만 추고 있었죠. 그때 거리에서 6살 위 은방초형을 만났어요.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춤춘다기에 매일 붙어다녔습니다. 그전에는 남자선배들과 어울리며 2층 연습실에서 축음기를 틀고 춤추곤 했는데, 그들이 흩어져 허전할 때 방초형이 나타난 겁니다.”

전주에 은방초의 형수집이 있었는데, 그 집을 빌려 연구소로 썼다. 전주 최초의 무용학원인 셈. 당시 영화 ‘자유부인’의 영향으로 가정부인들이 10명씩 춤 배우러 몰려 다니는 게 유행이었다. 은방초와 최정철은 자유부인이 되고픈 아줌마들을 가르치느라 바빴지만, 시간만 나면 전주 시내를 손잡고 누볐다. 예쁘게 생긴 남자 두 명이 시내에 뜨면 사람들은 ‘여자냐 남자냐’ 궁금해하며 두 사람의 뒤를 따르곤 했다. 내기를 하는 이도 있었다. 돈버는 일보다 춤추는 게 좋아 열심히 가르쳤다.

춤추며 전주시내를 누비던 18세 최선
춤추며 전주시내를 누비던 18세 최선
3년 후 은방초가 서울 남산 소재 서라벌 예대(1기생)에 진학하느라 전주를 떠났다. 최선은 어린 데다 돈도 없어 서울에 따라가지 못했다.

“방초형을 만나러 가끔 서울에 갔죠. 은방초 스승인 정인방 선생도 만났고요. 당시 정선생님은 필동 고아원을 비롯, 공간을 전전하며 무용연구소를 열었는데 저는 서울 갈 때마다 배웠어요. 또 정선생을 전주 시내 여관에 모셔와 1주일에서 1개월씩 독선생으로 배우기도 했죠.”

돈이 없어 정인방에게 교습비를 건네지 못했지만 춤을 배웠다. 모두 어려운 시절. 굶주려가며 춤추었다. ‘학춤’ ‘무당춤(대감놀이)’ ‘심불노’ ‘살풀이춤’ ‘행상’(엿장수가 어린이들과 어울리는 춤) 등을 배우고 공연도 했다.

20살. 첫 춤발표회를 전주 국립극장에서 가졌다. ‘호남살풀이춤’ ‘승무’ ‘논개’ ‘꽃의 정’ 등 각종 춤을 추었다. 그때부터 최선에게 오빠부대가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인기 짱. 30대까지 거의 매년 개인춤 공연을 가졌다.

# 혼이 없는 춤은 떠다니는 풍선

“명동 국립극장에서 ‘논개’ 공연 때 왜장인 제가 논개역의 이애주와 꼭 껴안고 진주 남강으로 떨어지는 장면이 생각납니다. 정말 멋지게 떨어졌죠. 우리는 찰떡호흡이어서 잘 맞았어요. 하하하….”

최선은 ‘최일류’만 고집했다. 명동 국립극장 시절 조명은 당대 최고인 차기봉·이우영이 맡고, 음악은 지영희·지광희·성금련·한상묵·신쾌동 등 명인들이 연주를 담당했다. 무용가들 중 강선영·한영숙·정인방·송범·김진걸·이매방·이인범(발레)·조영자 등 당대의 스타들을 초빙해 교습과 공연을 펼쳤다. 김백봉·임성남·김천흥만 제외하고 거의 모든 무용가들을 초빙했다. 지역에선 당대의 스타들을 초청하는 예가 없는데, 최선은 전주에서 황무지를 개척했다.

“전주를 찾아주신 선생님들께 출연료나 강의료를 많이 못 드리고 기차표만 사드렸어요. 서울로 되돌아가시는 그분들 뒷모습을 보며 기차역에서 울곤 했습니다. 배웅하고 연구소로 돌아가면 남는 게 딱 두 가지죠. 장구와 빚! 빚쟁이에게 시달려 장구통 붙잡고 울고, 집세 내라 조르는 집주인 닦달에 못 견뎌도 춤 때문에 살았습니다.”

물자가 귀해 무용 의상 마련도 힘든 시기였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구호물자보따리를 뒤져 스팡클옷을 저렴하게 구입한 후 밤새 스팡클을 떼어내 의상에 붙였다. 족두리 등 소품도 직접 만들었다. 그 습관은 지금도 이어진다.

30대 후반 서울 홍릉에서 무용연구소를 1년여 운영했다. 은방초는 필동에서 무용연구소를 하고 있었다. 그때 최선은 은방초·한상묵(예명 한유성)과 삼총사로 지냈다. 사람들은 ‘세 자매’라 불렀다. 한유성은 장구와 가야금 연주의 최고수였다. 세 자매는 홍릉과 필동연구소에서 반되들이 소주를 들여놓고 춤을 논했다.

그러나 다시 전주로 내려갔다. 제자들이 졸랐다. 고3 수험생 이길주는 스승의 손을 잡고 경희대 무용과에 입학시험을 보러 갔다. 길을 가다 최선에게 픽업돼 무용에 입문한 채상묵도 최선을 사사하다 서라벌예대 진학을 위해 서울로 갔다.

그는 제자들에게 항상 ‘혼의 춤을 추라’고 강조한다. 혼이 담겨 있지 않은 춤은 고무풍선이라고 한다. “고무풍선처럼 둥둥 떠다니는 춤은 필요없습니다. 또 정신통일과 예의범절을 중요시하죠. 우리 학원에 처음 오는 학생들은 누구나 청소부터 해야 합니다. 깔끔하게 정리 정돈된 공간 속에서 혼이 담긴 춤을 추어야 바른 춤을 출 수 있는 겁니다.”

결혼은 36세에 했다. 수많은 여자 팬들이 결혼하자고 따라다녔지만 일절 거들떠보지 않았다. 춤에 미쳐있는데 무슨 여자가 필요했겠는가.

“색싯감 사진을 보니 참하고 예쁘고, 장녀라 살림도 잘 한다고 했어요. 저는 춤추는 사람과는 절대 결혼하지 않을 생각이었거든요. 가정적인 사람을 원했는데 바로 집사람이 제가 원하는 상대였어요. 처가에선 노총각이라고 반대했죠.”

부인 김숙자씨(64)는 ‘춤을 가르치는 노총각이니 분명 총각은 아닐 것이다. 아이도 있을 것’이라 추측했는데 최선을 만나본 후 생각을 바꾸었다.

최선은 2남1녀를 낳았다. 큰 아들 최석훈(35)은 대전시립교향악단 바이올린 주자 겸 배재대에 출강하고 며느리 조혜련도 피아니스트 겸 배재대 강사이다. 둘째 아들 최지훈(33)은 극단 작은신화 배우. 딸 최지원은 4살 때 무용을 배웠고 호남살풀이 이수자로 활동 중이다.

최선은 79년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에 아내의 손을 잡고 참가했던 일을 가장 잊지 못한다. 자신이 안무한 ‘가갯골의 전설’로 최우수상 없는 우수상을 받았다. 당시 3000만원의 제작비를 들여 준비했는데, 최우수상을 받지 못하자 속상해 울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때 대학 입학금이 30만원선이었고, 3000만원은 집 몇 채 값이었다. “첫 무용발표회 때도 떨지 않았는데, 대한민국무용제에선 너무 긴장했어요. 집사람 손을 꼭 잡고 ‘열심히 추자’ 다짐했었죠.”

이젠 모두 옛 일이다. 요즘은 힘에 부쳐 ‘큰 일’을 자제한다. 하루종일 호남살풀이춤 전수관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매주 셋째주 토요일에는 새벽 6시40분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 제자 고선아씨의 학원에서 호남살풀이춤을 가르친다. 공연도 자주 한다. 지난 6월30일 석촌 서울 놀이마당공연에 이어 9월9일 부산에서 열리는 ‘8도 살풀이축제’, 9월13일 전주 공연이 기다리고 있다. 영남지역과 달리 춤기운이 쇠해진 호남의 한국춤을 지키고 있다.

“다시 그 시절로 가라면 가야지요. 스승께 장구채로 맞아가며 춤을 배웠지만, 선배들과 몰려다니며 춤추던 기억…, 너무 재미있었어요. 굶어죽어도 무대에서 춤추다 쓰러지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정신은 변함없어요.”

무대에서 죽는 게 바람이다. 무대에서 춤춘 후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끊어지는 숨. 그것만이 ‘예쁜 남자’의 소원이다. 

▲ 최선 약력

1935년 최한필과 김옥주의 셋째 아들로 전주에서 출생

1996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5호 호남살풀이춤 지정

1980년 대만·일본 무용협회 초청 합동 친선공연

1985년 미국 순회공연

1986년 프랑스 세계민속무용공연에 한국 대표로 참가

1988년스위스·독일·이탈리아·프랑스 순회공연(문공부 후원)

1991년 러시아 사할린 한국동포 위문공연(문화부 후원)

1992년 동남아 순회공연(태국 국립예술대 총장 초청공연)

1998년 인간문화재 최선 춤 열린무용 대공연

1995년 최선 춤 50주년 대공연

2000년 최선 춤 대공연

2001년 캐나다 포크로라마 민속제전 초청공연

2004년 최선 춤 60년 대공연-한민족의 혼

2006년 최선 춤-목련꽃 피고 지고

〈수상〉

전라북도 문화상(1969), 한국교육무용총연합회 작품지도상(1971), 중앙대 무용공로상·조선대 안무상(1977), 전라북도 지사 감사장(1980), 전주시민 문화상(1982), 개천예술제 특상부문 대상(1984), 원광대 총장상(1990) 등 

〈유인화 선임기자 rhew@kyunghyang.com〉

[한국영화 후면비사] 구라 못 치면 맷집으로 버텨야 했던 시절

- ‘깡패’와 ‘공갈마’가 유행어였던 1950년대 말 충무로 -


1958년 저잣거리를 휩쓴 유행어 중 하나는 ‘깡패’였다. 옛 신문을 들춰보면, 대략 1957년 초부터 ‘깡패’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아녀자 폭행은 물론이고 화물열차 탈취까지 일삼던 불량 ‘어깨’을 정부가 대대적으로 단속하면서, 덩달아 ‘깡패’라는 말도 시중에 널리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몇 가지 어원이 있긴 하나 깡패는 대개 ‘갱(gang)+패(牌)’라는 이상야릇한 합성에서 유래됐다는 목소리가 가장 높다. 백주대낮에도 무리지어 거리를 쓸고 다니며 못된 ‘깡’을 부리던 이들의 극성 때문에 “왜 인상 긁어! 배때기에 철판 깔았니?”라는 뜯어볼수록 험악한 문장까지 입에 오르내렸다. 이 무렵 ‘깡패’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두를 다투던 유행어는 ‘공갈마’. 구라치고 완력 써야 입에 풀칠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사람이 꼬이고 돈이 몰리는 극장이라도 개관할라치면, ‘나와바리’ 확보를 위한 깡패들의 힘겨루기가 오프닝 세리머니처럼 열렸다. 1958년 서울시 종로구 관수동에 위치한 세기극장 개관식 때는 정부가 ‘폭력과의 전쟁’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몽둥이, 돌, 쇠갈고리로 무장한 종로파와 명동파의 행동대원들이 ‘정오(극장 개관식이 공교롭게 12시였다)의 결투’를 펼쳐 지탄을 받았다. 이날 세기극장쪽에서는 종로파와 명동파, 어느 한쪽에도 밉보이지 않기 위해 개관식 기념행사 초대장을 고루 보냈는데, 그게 화근. 몸이 불끈 달아 있던 20대 초반의 액티비스트(?)들은 ‘맞장 뜨자’는 극장의 초대장을 상대파의 결투 신청으로 기꺼이 받아들였고, 결국 이날 사태로 극장 개관은 연기됐다.

영화계라고 이 같은 노릇에 혀를 찰 순 없었다. 1959년 11월29일, <동아일보>는 ‘권력 폭력 앞에 떠는 영화계’라는 머릿기사를 썼는데, 이른바 ‘합죽이 구타사건’이었다. ‘합죽이’라는 별명의 희극배우 김희갑은 당시 임화수에게 전치 4주의 폭행을 당했고, 사건 당시 입을 다물었던 그는 병원 침상에 누워서야 반공예술인단 주최 행사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구타당했다고 진상을 털어놨다. 임화수. 극장 매점원 출신으로 시작해 주먹 하나로 반공예술인단 단장 완장을 차고, 유력 영화제작자 타이틀까지 거머쥔 그는 당시 영화계를 호령하던 무소불위의 제왕이었다. 김희갑은 “최무룡, 김진규 등 (임화수한테) 안 맞은 사람이 거의 없다”며 “권력과 폭력의 무방비지대에 있는 자신들을 국민이 보호해달라”고 호소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눈앞의 주먹은 더욱 크게 보이게 마련. 김희갑의 증언으로 여론이 악화하자 임화수를 마지못해 불구속 입건했던 경찰은 조사를 진행하는 내내 “미약한 폭행이 있긴 했으나 양자가 합의한 것으로 안다”며 가해자를 두둔하기 바빴다. 한편 김승호, 최무룡 등 현역 배우 7명은 “임화수에 대한 관대한 조처를 부탁한다”며 법원, 검찰을 드나들었다. 결국 임화수에게 내려진 벌은 벌금 3만환이 전부였다. 괜히 호랑이를 건드려 성나게 만든 것 아니냐는 걱정어린 힐난이 영화계에 일찌감치 돌았고, 결국 이는 맘에도 없는 과도한 충성을 낳았다.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한 임화수는 구타사건 발생 한달 뒤에 영화인들의 추대에 따라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직에 오른다.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계, ‘펜대 굴리던’ 기자라고 안전할 리 없었다. 이 무렵, 모 영화 월간지 K기자가 ‘베스트10’의 투표를 조작했다는 이유로 감독에게 청부받은(?) 깡패 20여명에게 두들겨 맞는 일도 있었다. “지금이야 상상 못할 일이지만 그때는 비일비재했어. 영화사 가면 야, 이 개XX야. 욕하고 노골적으로 패기도 하고.” 1950년대 말 영화잡지, 일간지 문화부에서 기자로 일했던 강대선 감독은 <나는 고발한다>(1959) 제작 당시 악극단 출신 배우들을 기용하고 싶지만 한국영화배우협회 소속 배우들의 눈총 때문에 곤란해하던 감독, 제작자의 하소연을 듣고 기사를 썼다가 배우 이XX, 윤XX 등에게 끌려가 반공예술인단 사무실에서 집단폭행을 당했다고 말한다. “한두번이 아니야. 맞은 게. 나만 해도 세번이나 그랬다고. 나중에 사과를 받긴 하지만 그럼 뭐하냐고.”

구라 못 치면 맷집으로 버텨야 했던 시절, 충무로 3가 반공예술인단 사무실은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만큼은 아니더라도 부적절하고 일방적인 활극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그 사무실을 아지트 삼아 활개치던 임화수, 그 임화수를 꼬붕 삼은 자유당 정권, 그리고 그 아래서 끽소리 못하고 죽어 지내야 했던 영화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 다음에.

참고자료 <신문기사로 본 한국영화 1958∼1961>(한국영상자료원 엮음, 비매)<한국영화를 말한다-한국영화의 르네상스2>(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만인보 21>(고은, 창비)

(글) 이영진 anti@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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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의 산증인, 무대 위 반세기! 윤항기·복희 남매

윤복희의 첫 무대는 여섯 살 때였다. 반세기의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여전히 무대에 남아 있다. 윤복희는 올해로 55년 무대 인생을 맞았다. 오는 4월 17일, 그녀가 작곡가인 오빠와 함께 콘서트를 연다. 윤복희를 사랑하는 ‘여러분’을 위해 노래를 부른다. 어린 시절의 불행, 무대 위 영광 그리고 사랑의 상처… 드라마 같던 그녀의 삶을 담담히 털어놓는다.였지요”

“노래 ‘여러분’의 탄생 비화는…” 

윤복희(61)의 노래에는 에너지가 흐른다. 그것은 듣는 이의 마음을 흔든다. 그녀의 쥐어짜내는 듯한 노래 몸짓은 간혹 개그맨의 패러디를 통해 과장되긴 한다. 그만큼 윤복희는 강한 인상으로 우리 가슴속에 각인됐다는 말이다. 그녀는 한국전쟁 당시 미8군을 통해 팝을 접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여섯 살이었다. 어른 가수를 따라 하는 인형 같은 아이를 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없었다. 윤복희가 뼛속까지 예인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녀는 악극 단장인 아버지와 스타 무용수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성음악전문 성악과 1회 졸업생으로, 원맨쇼의 일인자로 ‘부길부길쇼’ 등을 통해 1940년대 말부터 KPK 등 악극단 무대를 주름 잡았다. 어머니는 고향선이란 예명으로 유명한 고전 무용가였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재원으로 전설적인 춤꾼 최승희의 제자였다. 윤복희가 무대에 서는 것은 일상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미8군 무대를 거쳐 미국 라스베이거스 무대까지 진출하기에 이른다. “당시(1950년대) 한국 가요계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들어온 엔카뿐이었어요. 그러다 한국전쟁을 통해 미군이 듣는 팝 음악을 듣기 시작했죠. 그 영향을 받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윤항기의 말이다. 그도 록 그룹 키보이스의 멤버로, 싱어송라이터로 활약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 ‘장밋빛 스카프’ ‘너무합니다’ ‘가는 세월’ 등 모두 그의 작품이다. 그리고 윤복희의 영원한 레퍼토리, ‘여러분’도 그의 손에서 나온 곡이다. 여동생을 위해 만든 곡이다. 그는 곡의 탄생 비화를 살짝 귀띔해준다. “사실 동생은 이 곡의 뒷이야기를 밝히는 걸 굉장히 싫어해요.” 두 남매는 부모님을 일찍 떠나보냈다. 외로운 성장 과정 탓이었을까? 윤복희는 스무 살 나이에 결혼을 했고 실패했다. 이후 1977년, 가수 남진과 뜨거운 열애 끝에 결혼했지만 곧 이혼하고 말았다. 윤복희는 당시 파경의 상처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복희는 그분(남진) 이름이 언급되는 것조차 싫어해요. 동생을 위해 기도하며 아픔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여러분’이란 곡을 만들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아픔을 통해 성장하는 거 아니겠어요?” 두 남매는 상처를 계기로 더욱 종교에 의지하며 신앙 생활에 열중했다. 대중음악을 만들던 윤항기는 CCM(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을 주로 만들었다. 신앙심은 음악 작업에 그치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 공부를 하기에 이른다. 윤복희도 노래를 그만두고 종교 복음에 도움이 되는 뮤지컬을 시작했다. “성경을 공부하던 1970년대 하나님이 뮤지컬을 하라고 하셨어요. 그때부터 뮤지컬에만 전념했죠. 지금은 하나님이 왜 그러셨는지 알 것 같아요.”

“사실은 여덟 살 때부터 무대가 싫었어요” 1990년에 미국 미드웨스트 신학대에서 안수를 받은 윤항기는 국내 1호 ‘음악 목사’다. 현재 예음음악신학교 총장이자 예음교회 목사로 재직 중이다. 윤복희는 1976년 공연을 마지막으로 노래를 접고 77년부터 뮤지컬을 시작했다. “내 노래는 돈 주고 들을 만큼 잘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오빠가 노래를 더 잘해요(웃음).”

노래를 그만둔 이유를 겸손함으로 대신한다. 사실 그녀에게 노래는 삶의 무게였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윤복희. 좋아하던 노래는 이미 일이 됐고 책임이 뒤따랐다. “이제야 밝히지만 저는 이미 여덟 살이 되면서 노래 부르는 것이 싫었어요.” 기도를 통해 안정을 찾다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뮤지컬로의 전향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있다. “뮤지컬을 하라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죠. 30년간 60여 편을 했고, 크리스천으로서 무대에 선다는 것은 언제나 기쁨이었어요. 1년에 한 편씩 선교뮤지컬을 따로 하고 있는데 ‘지저스 클라이스트 슈퍼스타’나 지난해 미국에서 한 ‘프라미스’도 같은 의미의 뮤지컬이에요.” 그녀는 요즘 신이 난다. 뮤지컬 배우가 된 이래 공연들이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1977년 ‘빠담빠담빠담’을 공연할 당시 어려웠던 기억을 떠올린다. 현재의 ‘뮤지컬 붐’에 대한 감상을 말한다. “한마디로 아멘이죠! 31년 전 ‘빠담’했을 때 저는 10원 한 장 안 받았어요. 그저 기름을 넣어준다는 조건으로 공연을 시작했는데 그 기름값마저 아직까지 못 받았네요(웃음). 뮤지컬 ‘캣츠’를 할 때도 집이 ‘은행에 들어갔다 나왔다’ 했죠. 10년 사이에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손뼉을 짝! 치며 웃는 그녀. 윤복희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늘 한자리에서 공연을 해왔다. 현재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뮤지컬 작업하고 있다. “한눈에 뮤지컬계가 변하고 있는 걸 느껴요. 요즘 대우도 많이 달라졌어요. 이래도 되는 건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말이죠. 무엇보다 후배들이 즐겁게 공연하는 것에 감사하고 있어요.” 그녀는 명실상부 ‘뮤지컬계의 대모’다. 그녀의 60번째 생일이던 지난해는 후배 1백여 명이 모여 깜짝 환갑 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60세가 넘은 나이에도 무대 위 카리스마와 실험 정신은 후배들에게 늘 자극제가 되고 있다. 지치지 않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녀는 국내 최초로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다. 미니스커트는 평생 그녀를 따라다니는 키워드. 그녀는 미국 귀국길에서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김포공항 트랩을 내려왔다. 그 모습은 사회적 논란을 일으킬 정도로 충격이었다. 젊은 여성들 사이에 선풍을 일으켰다. 그녀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오빠의 기분은 당시 어땠을까? “먼저 부러웠죠. 유명세를 누리고 싶은 가수로서 질투심도 있었습니다. ‘너만 미니스커트 입고 유명해지냐?’ 하면서 저는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죠(웃음). 한국 최초의 장발 가수였어요.” 개성 강한 동생으로 인해 많은 자극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하는 윤항기. 윤복희는 동생 이전에 인생의 라이벌이자 좋은 스승이고 대선배란다. 
화장하지 않은 그녀의 맑은 눈동자 속에는 외관을 초월한 순수한 예술인의 이미지가 엿보인다.
“동생은 보이는 바와 같아요. 자신에게조차 타협을 하지 않는 강한 성격이죠. 대통령이 와도 못 말릴 겁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말릴 수 있어요. 어릴 때는 싸우기도 많이 싸웠어요. 오빠 말을 전혀 안 듣던 동생이라(웃음).” 옆에 있던 윤복희는 크게 손사래를 치며 부정한다. “아니에요. 전 개성도 없고 카리스마도 없어요. 아마 여러분보다 더 평범한 사람일 거예요. 그저 집에서 찌개 끓이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지내요. 요즘도 버스를 타고 다녀요. 무슨 카리스마는~.” 윤복희는 취재진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갑자기 스타가 된 것 같다’며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죠. 정을 모른 채 부모님을 일찍 떠나보낸 것” 아버지는 어린 윤복희를 무대에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무대에 세워줄 때까지 계속 울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량이 큰 그녀가 소리 높여 울어대니 허락 않을 수 없었다. “제가 무대에 안 세워주면 자살하겠다고 했어요. 사람들이 날 바라보는 시선이 좋았던 것 같아요. 지금도 작지만 그때는 더 작았을 테죠. 조그만 아이가 어른 흉내를 내며 노래 부르는데 쳐다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즐겼던 거예요.” 그러나 그녀는 어린 시절이 불행했다고 회고한다. 부모님 생전에 짧은 시간마저도 함께했던 때가 드물었다. 부부 모두 유랑극단처럼 전국을 돌며 공연했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후에는 남기고 간 재산도 없었다. 윤항기 역시 노래를 부르는 것이 꿈이었다. ‘그 피가 어디 가겠냐’는 그의 말이다. 그러나 윤복희는 오빠의 음악을 한사코 반대했다. “제가 소녀가장으로 고생할지언정 오빠만큼은 연예계로 들어오지 않았으면 했어요. 부모님의 뜻이기도 했구요. 미8군에 다닐 때도 오빠가 공연장에 놀러 온다고 하면 못 오게 했어요.”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어린 윤복희는 동두천에 있는 미군부대에 공연을 갔다가 아침 첫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1시간 정도 자고 곧 교복으로 갈아입고 도시락 챙겨서 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오후에는 또 다른 공연을 위해 조퇴를 했다. 학교에서는 수업시간 부족으로 퇴학당할 위기를 느껴야 했고 몸은 늘 고단했다.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슬픈 기억이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부모의 정을 몰라 다행이라고 말한다. “전 부모의 정을 몰라요. 오히려 다행이죠. 오로지 노래 부르고 일을 해야 했어요. 그렇지만 오빠는 부모님의 죽음에 매우 외로워했죠. 제가 그런 오빠를 혼자 두고 미국에 가버리다니. 전 항상 오빠에게 미안했어요.” 대신 가난과 불행은 남매간의 우애를 더욱 돈독하게 했다. 두 사람이 함께 서는 이번 무대는 의미가 깊다. 윤복희는 부모님께 받지 못한 사랑을 팬 여러분께 받았다며 소감을 밝힌다. “돈과 명예를 위해서였다면 오빠에게 함께하자고 권하지 않았을 거예요. 음악회의 제목은 ‘여러분’입니다. 즉, 저를 봐주셨던 많은 분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려 해요.” 윤항기 역시 동생과 함께 하는 무대가 마음 설렌다. “30년 만에 함께 무대에 서게 됐군요. 단둘이 음악회를 여는 것은 생애 처음입니다. 물론 부활절 기념 음악회지만 신앙인뿐만 아니라 모두 즐기는 무대로 만들겠습니다.” 윤복희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항상 파격을 꿈꿨던 그녀에게 ‘생애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은 언제였는지 돌발질문을 했다. 그녀는 생각할 틈도 없이 ‘지금’이라고 말했다. “팬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 거의 처음이라 떨립니다. 그리고 제가 또 언제 이런 좋은 자리를 기약할 수 있을까요? 공연을 생각하면 마음이 설레고 바빠집니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팬들에게 감사의 말을 되풀이한다. “굉장히… 굉장히… 감사해서 말로 표현이 안 되네요. 제가 말을 잘 못하긴 해요(웃음). 무척 행복합니다.” 부드러운 미소로 동생을 바라보던 윤항기 역시 인생에 가장 큰 목표를 제시했던 ‘특별한 여동생’과 함께 오르는 무대에 대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마 복희가 없었으면 저는 윤항기라는 가수도 못 됐을 거고 목사도 안 됐을 겁니다.” 서로 의지하며 한 방향으로 손잡고 걸어가는 남매는 더없이 편안해 보인다. 윤항기·윤복희 남매는 혼란한 한국 사회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역경에 좌절하지 않고 한결같이 사랑하고 노래하고 기도해왔다. 한국 대중문화의 산증인인 두 사람이 반세기를 정리하는 무대에 서게 된다. ‘기립박수를 칠 준비는 되어 있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성원

[커버스토리]임권택 영화 ‘롱 테이크’명장면3



임권택 영화의 호흡은 유장(悠長)하다. 뒷짐을 지고 바라보는 듯 넉넉한 마음이 화면에 배어나고, 한국의 산하와 카메라는 하나가 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임감독의 영화에 빈번하게 사용되는 기법 중 하나가 ‘롱 테이크(long take)’다. 쇼트와 쇼트를 짧게 이어붙이는 대신, 카메라를 멈추지 않고 긴 시간 동안 이어가는 촬영 방식이다. 적절한 곳에서 적절한 시간 동안 지속된 롱 테이크는 속도전에 물든 현대 사회에 대한 노장의 묵직한 반론이다.

◇서편제의 진도아리랑

임권택의 100편의 영화 중에서도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장면이기도 하다. 

직전 장면에서 술에 취해 숙소인 여관방에 들어온 유봉은 동호에게 북치는 방법을 엄하게 가르친다. 옆방에 머물던 약장수 부부는 한밤의 소란에 짜증을 내고, 소리꾼 가족과 약장수는 이 길로 헤어진다.

이제 유명한 진도아리랑 장면이 시작된다. 소리꾼 가족이 한국 시골 특유의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걸으며 노래한다. ‘사람이 살면 몇 백년 사나/개똥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라고 건네면 ‘소리따라 흐르는 떠돌이 인생/첩첩이 쌓인 한을 풀어나 보세’라고 받는다. 


노래의 가사에 소리꾼 가족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유봉과 소원하던 동호도 어느새 등에 지고 있던 북을 앞으로 고쳐매고 장단을 맞춘다. 흥은 고조되고, 셋은 가볍게 춤을 춘다. 인물들이 화면 오른쪽으로 빠져나간 뒤에도 소리는 10여초간 지속된다. 화면에는 가벼운 모래 바람이 일어 인적을 청소한다.

진도아리랑 장면의 시골길은 소리꾼 가족의 잃어버린 이상향이다. 이제 악극단에 밀린 가족에겐 질곡의 삶만이 남아있다. 북이 소리가 가는 길을 미리 닦아주듯이, 카메라도 가족의 마지막 즐거운 한때를 위해 멍석을 깔아준다. 카메라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듯 5분 10초가량을 가만히 서있지만, 역동적인 에너지가 화면 바깥으로 넘쳐나온다. 

소리의 흥겨움, 동작의 즐거움, 감정의 흥겨움이 어울렸기 때문이다.

◇춘향뎐의 옥중 재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춘향전의 내용을 알고 있다. 이야기 내용이 뻔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느냐가 관건이다. 임권택은 암행어사로 임명됐으나 신분을 숨기고 있는 몽룡과 옥에 갇힌 춘향이 만나는 장면을 3분여의 롱 테이크로 촬영했다. 뇌물을 받은 간수가 앞장서면, 월매, 향단, 몽룡 일행이 뒤를 따른다. 안쪽 간수가 문을 열면서 좁은 감옥 공간의 롱 테이크가 시작된다. 카메라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어 월매가 싸온 음식을 살피는 간수를 보여줬다가 월매의 뒤를 따라 감옥 쪽으로 이동한다. 월매는 애타게 딸의 이름을 부르지만, 어두컴컴한 옥 속의 춘향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월매가 곧 목숨을 잃을 딸과의 짧은 해후를 마치고 뒤로 빠지면 그 자리에 몽룡이 다가선다. 월매가 향단에게 “불을 밝히라”고 말하자 등불이 화면 왼편에 들어온다. 이제 춘향의 초췌한 얼굴이 제대로 나타난다. 등불은 몽룡의 마음처럼 움직인다. 오랜만에 재회하는 연인의 얼굴을 밝히기 위해 다가섰다가, 남녀가 만나는 공간을 내주기 위해 뒤로 빠진다. “선산 맡에 묻어달라”는 춘향의 유언 뒤, 일행은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감옥을 나온다.

몽룡은 죽음을 눈앞에 둔 연인 앞에서 진실을 말할 수 없다. 다음날이면 변학도의 생일 잔치와 암행어사 출두가 벌어진다. 옥중 재회는 폭풍 전야다. 인물들이 내면의 감정을 숨기는 만큼, 내일의 격동은 더욱 거세다. 제자 김대승 감독은 “여러 인물의 감정이 한 커트에서 드러나는 임감독의 기법을 ‘번지 점프를 하다’와 ‘가을로’의 만남과 헤어짐 장면에서 적용했다”고 말했다.


◇태백산맥의 김범우와 서점주인의 대화

조정래의 대하소설을 원작으로 한 ‘태백산맥’. 기대만큼의 흥행, 비평적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이 영화에도 눈여겨볼 만한 롱 테이크 장면이 있다. 벌교를 장악한 우익 토벌대장은 빨갱이를 잡는다는 이유로 온갖 전횡을 일삼는다. 참다못한 민족주의자 김범일 등 지역 지식인들은 토벌대장을 기생집에 불러 “너무 심하게 밀어붙이면 민심이 돌아선다”며 달래지만, 오히려 토벌대장의 화만 돋우고 만다.

김범일과 중학교 교장이 씁쓸한 마음으로 밤거리를 거닐면서 롱 테이크가 시작된다. 교장은 “토벌대장이 하는 빨갱이라는 말은 정말 증오와 살기를 품고 있더군요. 그 말 한 마디에 사람 목숨이 오고가는 위태로움을 느꼈어요”라고 말한다. 교장과 헤어진 김범일이 집으로 돌아가려 하자, 서점의 여직원이 원하시던 책을 구했다며 불러세운다. 직원이 책을 포장하는 사이 서점 주인은 토벌대장과의 대화 결과를 묻는다. 김범일이 어색한 웃음으로 대화를 마무리하면서 1분 50여초의 롱 테이크가 끝난다. 이 장면은 임권택의 롱 테이크 중에서도 대사에 의존해 다소 설명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교장의 대사는 ‘빨갱이’라는 어휘에 담긴 증오의 무게를 말해준다. 잊을 만하면 터져나오는 정치권의 색깔 논쟁은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이 ‘태백산맥’ 속 벌교의 상황과 그리 멀지 않음을 증명한다. 좌우의 틈바구니에 낀 중도 지식인 김범일은 이어지는 장면에서 빨갱이로 몰려 멸공단 청년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기도 한다. 스산한 벌교의 거리를 홀로 걷는 무기력한 지식인의 모습은 오늘의 시대상을 꽤 정확히 함축하고 있다. 

〈백승찬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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