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개봉한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맨발의 청춘’(김기덕 감독)은 한국 영화계에 청춘이란 단어를 불러들였다. 고무신 부대의 눈물을 짜내는 것이 목표였던 신파 멜로 영화판에 새로운 기운을 가져온 것이다. 젊고 혈기 넘치지만 뒷골목 조무래기 깡패에 불과한 신성일의 우울하고 반항적인 연기와 싱싱하고 발랄한 여대생이라는 새로운 여성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엄앵란의 연기. 이 커플의 사랑은 현실로까지 이어졌고, 영화는 큰 인기를 끌었다. 신성일이 입은 터틀넥 스웨터와 트위스트김의 청재킷·청바지가 유행했고, 엄앵란의 톡톡 쏘는 여대생 연기는 이후 한국 영화 속 여대생의 전형이 되어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감독, 1975)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비슷비슷한 날림 영화가 우후죽순 만들어지는 법. ‘맨발의 청춘’ 아류작이 쏟아졌다. 그리고 1965년 10월, 이만희 감독의 ‘흑맥’이 개봉됐다. 남자 주인공은 신성일, 상대역은 문희라는 이름의 신인이었다. 서울역 주변을 무대로 소매치기를 하며 연명하는 일당의 두목 신성일이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문희를 만나 사랑하고, 범죄에서 벗어나려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는 내용의 영화였다. 또 ‘맨발의 청춘’ 아류작인가? 엄앵란이 시집가고 없으니 신인 여배우를 하나 급히 만들었나보다 했다. 그런데 서울 뒷골목과 그곳에서 기생하는 어두운 청춘의 이야기를 ‘맨발의 청춘’보다 더 뛰어나게 담아낸 게 아닌가. 그 중심에 신인 배우 문희가 있었다. 이 여배우의 얼굴에는 지금까지 한국 영화에서는 볼 수 없던 스산한 분위기가 담겨 있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쏘냐’를 떠올렸고, 함께 연기한 배우 신성일은 옷이 흘러내려 속살이 드러나는 것도 모른 채 연기할 만큼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는 그녀에게 감탄한다. 이만희 감독은 이 배우에게 최고 여배우 문정숙의 ‘문’과 자신의 이름 끝 자인 ‘희’를 따서 ‘문희’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1960년대 중반. 1950년대를 주름잡던 스타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195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김희갑은 겹치기 출연으로 매번 지각을 하는 민폐를 끼쳐 스태프들의 원성을 사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깡패 출신 제작자 임화수에게 폭행까지 당했던 스타다. 그가 이제는 신인 코미디 스타 서영춘이 겹치기 출연으로 촬영장에 늦게 나타나는 데 분개해 호통을 치는 시대가 됐다. 영원한 청춘 김진규가 맡았던 배역은 새로운 스타 신성일과 신영균에게 돌아갔다. 과거의 신인이 중견이 되고, 새로운 신인이 나타난 것이다.
여배우의 세계도 그랬다. 오랫동안 한국 영화에서 여배우는 그 얼굴이 그 얼굴이었다. 그런데 최고의 스타 최은희가 영화감독으로 나서며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 편수를 과감히 줄여나갔고, 김지미는 최무룡과의 스캔들에 시달리느라 정신이 없어 흥행작을 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떠오르던 샛별 엄앵란은 신성일과 결혼해 아기를 출산한 뒤 영화 출연을 사실상 접어버렸다. 새로운 얼굴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였다. 이때 문희가 나타났다. 스타는 좋은 작품과 좋은 감독을 만나야 만들어지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흥행이 돼야 스타가 나온다. 문희의 매력적인 분위기는 감독들의 눈을 사로잡았고, 그가 떠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흑맥’ 개봉과 비슷한 시기인 1965년 11월, 이번엔 김수용 감독이 만든 ‘갯마을’에서 매력적인 얼굴을 지니고 연기력도 제법인 신인이 탄생했다. 영화의 도입부, 마을 여자들이 모두 나와 땀을 뻘뻘 흘리며 배를 끄는 장면에서 소녀 과부 고은아는 땀에 젖어 엉겨붙은 귀밑머리와 고개 숙인 옆모습 하나로 관객의 머리에 ‘에로틱’이 무엇인지 각인시켰다. 문희와 고은아 두 신인 여배우 모두 대학 재학 중 감독에게 발탁됐다. 이른바 여대생 출신 여배우의 탄생이었다. 이들 전의 여배우는 악극단 출신이 대부분이라 학력을 내세우며 선전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이제 말하자면 미모와 지성을 갖춘 여배우가 등장한 것이다.
그 무렵 또 한 명의 스타도 조용히 태어나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단역으로 배우 생활을 시작한 신인 여배우 한 명이 김수용 감독의 영화 ‘유정’의 신인 여배우 오디션에 참가한 것. 이 신인 공모에는 유례없이 상금 50만 원이라는 큰돈이 걸려 있었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을 영화화한 ‘유정’의 주인공으로 낙점된 이민자라는 이름의 신인 여배우는, 이후 소설 여주인공의 이름 ‘남정임’을 예명으로 얻었다. 자신의 얼굴은 오른쪽이 아름다우니 그쪽으로 찍어달라고 촬영 기사에게 당돌하게 요구할 만큼 거리낌 없던 여배우 남정임은 이렇게 탄생했다.
1966년 영화 ‘유정’이 개봉됐고, 순애보적인 사랑을 설득력 있게 연기한 남정임은 적역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영화는 당대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작 ‘성춘향’(신상옥 감독, 1961)의 관객 수 36만 명에 필적하는 35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한다. 이때부터 고은아·문희·남정임, 이 세 명의 신인 여배우는 여왕 자리를 넘보는 후보로 극장가를 점령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배우는 고은아였다. 당시 최고의 흥행 감독이던 김수용은 고은아를 “동양적이고 정적인 분위기를 지녔고, 일제강점기 최고의 여배우 문예봉과 6·25전쟁 후 최고의 여배우 최은희 두 사람의 인상을 합쳐놓은 것 같다”고 평가했다. 한국 여배우의 적통을 이은 배우로 평가한 것이다.
고은아는 이만희 감독의 영화 ‘물레방아’(1966)에서 이제껏 한국 영화에서는 볼 수 없던 도발적인 여인을 연기한다. 한여름 숲 속 풀밭에 누워 있는 한 여자. 청순하고, 정숙해 보이는 얼굴의 여자가 풀을 베다 잠깐 눈을 붙인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잠시 감았던 눈을 불만스럽게 치켜뜬다. 그리고 억누를 수 없는 성욕 때문에 몸을 배배 꼰다. 얼굴은 정숙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불만과 욕정이 가득 차 있다. 그녀 앞에 나타나는 남자 신영균은 힘도 좋고 잘생겼으며 무엇보다도 고은아를 사랑한다. 마을 지주 허장강이 평생 호강시켜주겠다고 그녀를 유혹하지만 고은아는 신영균에게 미소를 짓는다. 그녀는 웃음이 헤프다. 그것도 모르는 신영균은 평생 갚아야 할 빚을 지는 무리수를 두며 고은아를 아내로 맞이한다. 첫날밤. 고은아는 어서 잠자리에 들자며 간절한 눈빛을 신영균에게 보내지만 바보 같은 그는 곰방대만 뻑뻑 빤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참 달도 밝다”고 하는 등 못나게 군다. 답답한 고은아, 벌떡 일어나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우물가로 가서 찬물을 쫙쫙 끼얹는다. 동네에서 바람기라면 최고를 자부하는 신영균의 상전이 고은아의 벌거벗은 뒤태를 보고 침을 흘린다. 그는 신영균과 고은아가 결혼할 수 있도록 자금을 대준 인물. 언젠가 고은아를 자신의 품에 들이겠다는 속셈 때문이었다. 신영균이 남자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것까지 알았으니, 얼씨구. 이젠 뜸만 들이면 되는 것이다. 고은아는 신영균이 드르렁드르렁 코 골며 자는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다. 화가 난다. 이게 뭔가? 남자란 하나같이 이 모양 이 꼴인가? 이 영화에서 고은아는 항상 성욕에 굶주려 있으며 현명하지도 못하다. 말하자면 백치 같은 여자다. 대사가 거의 없어, 꼭 필요한 말 몇 마디만으로 모호한 심리 상태를 표현한다. 아름답지만 지능이 낮고 정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며 성욕만 따르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여자. 갓 스무 살 된 신인 여배우는 이 배역을 성심성의껏 연기했다. 고은아의 연기력이 좀 더 무르익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이런 배역을 기성의 스타급 여배우에게 주문했다면 고분고분 잘했을까? ‘물레방아’는 의욕 넘치는 신인 여배우와 여자의 어두운 마음을 표현하고자 한 감독의 야심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1966년 늦봄에는 정진우 감독의 영화 ‘초우’가 개봉했다. 영화가 시작되면 상류층의 최고급 저택이 화면 가득 등장한다. 산들바람이 정원의 나무들 사이로 불어오고, 지나치게 따갑지 않은 초여름 햇살이 눈부시다. 드넓은 마당 위, 잘 관리된 잔디밭에 아름다운 아가씨가 탐스러운 털이 난 애완견과 함께 누워 있다. 그녀의 머리맡에는 외국 영화잡지들이 있고, 가슴에는 로버트 레드퍼드의 흑백사진이 놓여 있다. 그 화면 위에서 생기발랄한, 톡톡 튀는, 싱그러운 젊음이 넘치는, 구김살 한 점 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 저택의 식모 문희다. 이 집 주인은 프랑스 대사로 프랑스에 가 있고, 안주인은 밤낮없이 자수만 놓는다. 그들에겐 병 걸린 딸이 있는데, 휠체어를 타야 하는 신세다. 대사가 아름다운 프랑스제 비옷을 선물해도 입고 나갈 수가 없다. “버리느니 차라리 식모에게”라며 건네준 덕에 아름다운 비옷은 문희 차지가 된다. 쨍하고 햇살 따가운 한여름,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문희. 드디어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다. 비옷을 입고 마당으로 달려 나가 ‘비!’ ‘비!’ 를 외치는 문희의 얼굴 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1966년 데뷔한 정진우 감독은 대사에 의존하기보다 이미지로 이야기를 전달하며 감각적인 영상을 선보였다. 통통 튀는 발랄함과 그 뒤에 감춰진 그늘을 동시에 가진 주인공은 문희에게 적역이었다. 감독은 그녀의 연기에서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떠올렸다. 문희는 비옷을 입고 나가 차량 정비공이지만 손님의 고급 외제차를 끌고 나와 자신을 대기업 직원이라 속이는 신성일을 만난다. 식모이지만 프랑스 외교관의 딸이라고 속이는 문희와 상승욕이 가득한 신성일은 비극으로 치닫는 청춘의 드라마를 완성한다.
후발 주자 남정임이라고 가만있었겠는가? 그는 데뷔 첫해에 ‘유정’‘학사와 기생’(김수용 감독, 1966), 단 두 편의 영화로 서울 관객 40만 명을 동원하며 최고의 흥행 카드가 됐다. 이 한 해에만 무려 15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기염을 토했고, 그것도 모자라 아시아영화제에서 신인 연기상을 타는 행운까지 누린다. 정진우 감독은 그녀를 주연으로 ‘초연’(1966)을 만든다. 남정임은 첫사랑 신성일이 프랑스로 유학을 가버리자 또 다른 남자 이순재와 사귄다. 신성일이 돌아와 남정임을 놓고 이순재와 한 치 양보도 없는 사랑의 결투를 벌인다. 두 남자가 병원에 입원하자 남정임은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하다 둘 다 놓치고 만다. 이 영화에서 남정임은 당돌하다. ‘초연’ 이전의 여주인공은 두 남자의 사랑을 받게 되면 괴로워했지만 남정임은 그렇지 않다. 아름답고 큰 눈을 또르르 굴리며 ‘어느 놈이 더 나을까?’ 저울질한다. ‘어쩌지? 둘 다 괜찮은데. 두 남자 모두 마음에 드는데, 일처이부(一妻二夫)는 안 되나? 하하하.’ 남정임의 개성이 한껏 드러난 영화였다.
1966년과 1967년은 한국 영화계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 쏟아져 나온 엄청난 시대였다. 이만희 감독의 걸작 ‘만추’(1966)가 개봉되자, 그동안 한국 영화를 보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라 여겼던 교양인들이 쌍수를 들고 항복했다. 흥행감독 김수용은 잇달아 문학작품을 영화화해 내놓았고, 젊은 감독 정진우는 감각적인 영상으로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최고 스타 대우를 받으며 나날이 몸값이 높아지고, 건방진 여배우들을 캐스팅해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영화들이 나왔다. 새로운 여배우의 등장과 신성일·신영균 등 남자 배우의 듬직한 지원, 그리고 감독의 왕성한 창작력. 이 모든 것이 합쳐져 한국 영화 최고의 시기가 열린 것이다.
고은아·문희·남정임의 출현 전까지 우리 영화 중 여배우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최은희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성춘향’(1961)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 세 배우의 등장으로 여배우 주연 영화가 대거 등장한다. 정진우의 ‘초우’와 ‘초연’ 그리고. 이만희의 ‘만추’가 바로 그런 영화들이다. 더욱 특별한 것은 관객을 억지로 울리려는 신파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제 영화 관객은 고무신 부대에서 하이힐 부대로 바뀌었다.
제작사들은 경쟁적으로 신인 여배우 공모를 벌인다. 신인 공모에 당선되면 주연 여배우로 캐스팅할 뿐 아니라 덤으로 50만 원의 상금까지 줬다. 이제 스타는 더 이상 만질 수 없는 별이 아니었다. 누구나 응모해 행운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태어난 또 하나의 신인이 윤정희다. 영화 ‘청춘극장’(강대진 감독, 1967) 주연 여배우 공모에서 윤정희가 당선됐다는 신문 기사 옆에는, 고은아의 약혼 소식이 나란히 실렸다. 운명처럼 새로운 별이 뜨고 다른 별 하나가 지는 순간이었다. 고은아의 인기는 약혼 발표와 함께 주춤해진다.
신인 윤정희가 영화 ‘청춘극장’으로 시험대에 오른 그 순간, 정진우 감독의 영화 ‘밀월’(1967)에서 문희는 더 이상 인형 같은 연기를 하는 신인이 아닌, 진짜 배우로 인정받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무더운 여름 컴컴한 방 안에 속옷 차림으로 누워 선풍기 바람을 쐬는 한 여자가 보인다. 그녀의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뭔가 권태로운 것 같고, 욕구불만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은데 그 속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문희는 암흑가 두목 박암의 아내. 교도소에서 출소한 박암은 과장된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문희의 얼굴은 서늘하기만 하다. 데뷔작 ‘흑맥’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그 차갑고 서늘한 눈매와 표정이 부활한 것. 문희보다 서른 살 넘게 많은 박암은 섹스에서도, 대화에서도, 젊고 아름다운 문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문희는 박암의 품에 안겨 딴 생각을 하는 여자다. 어느 누구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문희의 고독과 절망은 그만큼 깊고 어둡다. 박암은 문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자신의 늙고 병든 몸을 보며 괴로워한다. 그때 박암이 친자식처럼 사랑하는 신성일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다. 영화가 시작된 뒤 신성일과 첫 대화를 나누기까지 30분 동안 문희는 대사가 없다. 그러나 그녀의 감정은 관객에게 전달된다. 이 초반의 무언극이 눈부셨다는 평가를 받으며 문희는 신인 여배우가 흔히 듣게 마련인 연기력 부족이라는 비판에서 단숨에 벗어난다. 그는 이제 날개를 달았다.
1967년 개봉한 이만희 감독의 영화 ‘기적’에는 남정임이 출연한다. 이만희의 걸작 중 하나로 격찬을 받은 이 영화에서 남정임은 열차 안에서 사과를 파는 소녀로, 쫓기는 남자 최무룡을 돕는다. 영화는 배경 음악 없이, 오로지 기차에서 나는 실제 음향만을 배경으로 촬영됐고, 대사도 극도로 억제돼 박진감을 자아낸다. 문희와 남정임은 이제 당당하게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게다가 남정임은 진정한 배우라면 자기 목소리로 녹음을 해야 한다며, 시기상조라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녹음을 고집한다. 물론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1967년 상반기 결산 결과 데뷔 2년차 문희가 출연한 영화는 13편이었다. 열 편 이상의 영화에 겹치기 출연 중이던 남정임 역시 그에 못지않은 성과를 거뒀다. 문희는 출연작마다 새롭다는 칭찬을 받았고, 남정임은 괄괄하고 당돌한 말괄량이 여성으로 자신의 개성을 만들어갔다. 그 사이 고은아는 영화제작자 곽정환과 결혼하면서 연기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동시에 재미있는 일이 터진다. 곽정환에 의해 신인 배우로 발탁된 윤정희가 그를 상대로 소송을 낸 것. 공모 상금 50만 원 중 15만 원만 주고 나머지는 10개월이 지나도록 주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게다가 자신이 다른 영화사의 작품에 출연하고 받은 개런티 중 30%를 곽정환이 챙기며 폭리를 취했다고 주장했다.
이 와중에 윤정희의 진가가 드러난 영화 ‘안개’(김수용 감독, 1967)가 개봉했다. 소설가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서 윤정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할 것도 없는 권태로운 시골 무진에 은거 중인 음악선생 역을 맡아 이질적인 환경에 놓인 현대 여성의 무기력과 절망을 표현했다. 이후 그녀는 이지적인 여성의 표상이 된다. 이만희 감독의 스릴러 영화 ‘여섯 개의 그림자’(1969)에서는 남궁원에게 학대당하고 신성일의 거짓 사랑에 속아 목숨을 위협당하는 절망적인 배역을 맡았다. 윤정희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둘 다 죽이기로 결심한다. 남궁원을 죽이러 가기 전 말없이 화장을 하고 검은 선글라스를 쓰는 장면은 놀랍다. 그때까지 아무 매력도 없던 그녀가 갑자기 놀라운 매력을 뿜어내는 것이다.
윤정희는 도회적인 이미지로 첩보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는가 하면 검객 영화에서 여검객 역을 맡기도 하고, 구시대의 비극적인 여인상을 연기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멀티 플레이어였다. 윤정희가 문희와 남정임에 이어 세 번째 여성 스타로 등극하면서 1960년대 말 사람들은 이 세 여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를 보지 않고는 한국 영화를 봤다고 말하지 못할 상황에 놓였다. 이른바 트로이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1968년, 문희 주연의 ‘미워도 다시 한 번’(정소영 감독)이 개봉된다. 이 영화는 단숨에 한국 영화의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며 사상 최고의 흥행 영화로 등극한다. 영화 내용은 오래전 이모와 고모, 어머니들이 고무신 신고 하얀 손수건을 든 채 보던 바로 그 신파영화였다. 아역 배우 김정훈의 “엄마. 왜 나는 엄마와 같이 살 수 없는 거예요?” 한 마디가 첨가됐을 뿐. 공전의 히트를 한 이 영화로 인해 한국 영화계는 다시 과거로, 손수건 적시는 신파 멜로 영화의 세계로 돌아가버린다. 너무나 단숨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사이 재능 있는 감독과 배우들이 창조적인 작업을 통해 쌓아 올렸던 새로운 시대가 한방에 무너지고 극장가는 다시 고무신 부대의 영화들로 채워지게 된다. 영화적인 실험도 사라졌다. 이와 때를 같이해 깡패 영화가 수없이 만들어지면서 재능 있는 세 명의 여배우는 깡패 영화에서 남자 배우의 들러리를 서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게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가 만들어지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남정임은 자신의 장점이 부각되는 작품에 출연하지 못한 채 수많은 영화에 겹치기 출연하면서 서서히 재능을 갉아먹는다. 게다가 본래 갖고 있던 발랄하고 거침없는 말괄량이 기질로 크고 작은 스캔들의 중심에 서게 되는데, 그중 유명한 것이 제작부장에게 구타를 당한 사건이었다. 이후 1971년, 남정임은 수억 원대 자산가라는 재일교포와 결혼해 일본으로 건너가버린다. 문희도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수없이 많은 속편에 출연하고, ‘미워도 다시 한 번’에서 아들로 나온 아역 배우 김정훈의 아내가 되는 수모를 겪으며 ‘꼬마신랑’ 시리즈에 출연하는 등 빛나는 연기력을 발휘할 기회를 잃어가다 1971년, 남정임의 뒤를 이어 결혼한 후 은퇴해 영화계에서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2년 뒤, 트로이카의 마지막 여왕 윤정희도 공부를 하겠다며 프랑스로 유학을 갔고 몇 해 뒤 결혼해 영화계에서 사라진다. 이리하여 한국 영화계에서 최초로 여배우가 영화의 중심에 서던 시대는 저물고 만다.
몇 해 뒤, 남정임이 돌아왔다. 결혼 직후부터 ‘선데이 서울’ 등의 주간지를 통해 끊임없이 제기됐던 불행한 결혼에 대한 소문의 종지부는 이혼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남정임은 그녀를 발굴해 데뷔작을 찍었던 김수용 감독의 영화 ‘웃음소리’(1978)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재기를 꿈꾼다. 당시 유행하던 호스티스 영화들과 별다를 것이 없는 작품이었다. 남정임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데, 그녀의 가슴에 묻어둔 사랑의 기억들이 너무나 진부하고 상투적인 졸작이었다. 게다가 이미 30대 초반에 접어든 남정임의 상대역이 파릇파릇한 청년 이영하였으니, 둘이 마주칠 때마다 남정임의 나이가 떠오를 수밖에 없던 건 또 다른 의미로 비극이었다. 진부한 졸작으로 재기를 노린 남정임은 몇 년 후 암에 걸리고, 1992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죽기 전까지 그녀는 자신의 기구한 생애를 시나리오로 만들어 영화화할 것을 꿈꿨다고 한다.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만화계의 산증인, '발바리의 추억' 강철수 만화가
만화에 얽힌 추억 다들 있으시죠? 용돈이라도 생기면 동네 만화가게로 달려가서 손때 묻은 만화책을 넘기면서 친구들과 키득대던그 시절이 생각나는데요.
척박하던 그 시절 만화는 우리 모두에게 꿈과 상상력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가 됐습니다.
만화 하나로 수많은 독자들을 웃고 울게 했던, 한국만화계의 산 증인이자 누구보다도 만화를 사랑하는 사람, 영원한 청춘 백수 발바리의 만화가 강철수 씨. 영원히 청춘일 것 같던 그도 이제는 만화계의 원로가 됐습니다.
47년 동안 2000편이 넘게 만화를 그렸고, 작품 생각에 단 하루도 편히 자 본 적 없이 치열하게 세상을 맞서온, “내가 가야할 길을 가는 것 뿐”이라며 겸손히 대답하는 만화계의 원로 강철수 씨를 만나봅니다.
◇ 중학교 때부터 만화작가로 활동 시작▶ ‘원로’라는 표현 들으시면 어떠세요?
너무 듣기 싫어요. 대개 원로라고 하면 그 분야에서 공헌을 했다거나 하는데, 저는 별로 한 것도 없거든요. 그래서 원로라고 하면 죄짓는 것 같구요. 그냥 좀 나이 들었다는 느낌 정도죠.
▶ 만화계에서도 가장 오래 가장 많은 작품을 그린 ‘다작 작가’다 라고 하던데요. 올해로 몇 년째 활동하고 계신 거죠?
참 오래 되었네요.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대통령이 쭉 바뀌는 동안 계속 해왔으니 한 47년쯤 되나요?
▶ 일찍 시작하셨죠?
초등학교 때 출판사에 갔더니 왠 조그만 애가 왔나 하면서 쫓겨났죠. 그러다 중학교 2학년 쯤 되니까 조금 관심을 갖더라고요. 그래도 명색이 작가인데 출판사 가면 머리 쓰다듬어주고 그랬어요. 그러고 보면 세월이 많이 지났네요. 제가 진주 중학교를 다니다가 일약 출세를 해서 서울에 올라와서 고등학교를 다녔죠. 근데 학교에서도 굉장히 시끄러웠어요. 내일이 마감이면 공부시간에 몰래 원고를 해야되는데 하다가 원고를 뺏겼어요.
교무실에 불려가서 출석부로 머리 맞고 선생님이 “이게 무슨 짓이냐? 어떻게 살아가려고 이런 짓을 하고 있냐?” 라고 했었어요. 저는 좀 내성적이어서 ‘선생님, 그것이 제 밥줄입니다.’ 소리를 못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무서워서 벌벌 떨다가 나중에는 원고를 돌려 주시더라고요.
▶ 요즘같이 빠른 세대에도 중학생 작가는 없는 것 같은데, 대단히 빨리 출세를 하셨어요?
만화가는 가수나 성우와는 달라서 많은 밑천이 있어야 그리거든요. 그림 재주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아이디어가 있어야 되는데 중학교 2-3학년짜리가 무슨 인생의 밑천이 있겠어요? 그러니까 좀 하다가 들통이 나는 거죠. 밑천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무수히 고생을 했죠. 반짝 하다가 “야, 너 저번 그린 것 하고 다른 게 뭐있어? 시작 때는 재밌더니 뒤에는 다 누구 것 베낀 거지?” 하는 소리를 듣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어른들 말이 다 맞더라고요. 어릴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읽고 인생경험을 많이 쌓아야지 작가가 되는 거더라고요.
▶ 지금까지 그린 만화가 몇 편 정도 되나요?
편 수로 하면 몇 천 편 되지만, 그것이 그렇게 많지도 않은 것이 옛날 만화가 50페이지짜리도 있고 그랬습니다. 제목은 몇 천 권 쓴 것은 확실합니다. 제가 어느 날 노트북으로 계산을 해봤더니 백만 컷트쯤 제 손을 거쳐 갔더라고요.
▶ ‘발바리의 추억’ 말고도 주요작품은 어떤 것이 있나요?
워낙 제목들이 많아서요. ‘사랑의 낙서’, ‘팔불출’, 또 옛날 사극, 세계 명작들, 문학작품들, 하다못해 빈대가 주인공인 만화도 있었어요. 제가 안 해본 건 공주님 나오는 것만 못해보고 나머지는 다 해본 것 같아요.
▶ 그 당시 진주에서도 문화생활이 굉장히 척박하고 만화가게도 없었을 것 같은데요.
옛날에는 만화가게가 가마니를 깔아놓고 보고 싶은 사람은 거기 앉아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주인이 와서 책가지고 도망가지 않나 감시하고 했죠. 일어나면 바지에 가마니 지푸라기가 묻고 그랬죠. 그런데 서울에 왔더니 제가 처음 살던 곳이 마포 아현동이었는데. 만화가게에 들어갔더니 긴 나무의자에 앉아서 만화를 보는 거예요. 의자에 앉아서 만화를 보다니 하는 정도였거든요.
그런데 만화가 잘 되는 시절이 한 번도 없었어요. 늘 종이값이 오르고, 인쇄비가 오르고, TV 때문에 만화가게에 손님이 없어서 안되고, 만화가게에서 떡볶이 같은 음식도 같이 팔면서 만화가게가 비위생의 온상이다, 또 아이들이 많이 모이니까 싸우기도 하고, 옛날에는 만화를 봄으로써 애들이 나빠진다 해서 나중에는 칠대 악(惡)에 들어가기도 했어요. 만화 화형식도 하고요. 40년 그림 그리는 동안 40번 넘게 잡혀다니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 만화의 주인공들을 통해 그 시대의 아픔과 추억을 그려▶ 처음 시작은 어떻게 하게 되신 건가요?
옛날에 악극단, 서커스단이 마을에 오고 했는데요. 그 때 배삼룡 씨 등이 나와서 막간극을 하고 했거든요. 배우들이 총을 쏘면 화약 냄새가 나고 사람이 팍 쓰러지는 것을 보고, 막간 배우들이 노래도 하고 내가 저런 것을 하면 재밌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만화가게에 갔더니 만화가 있는 거예요. 만화는 무대보다는 설정이 쉽지 않습니까? 연필로도 가능하고요. 내가 하면 이 작가들 보다 나을 것 같더라고요. 그 때 김정래, 박광현 등이 유명했죠.
그런데 그것이 만용이죠. 서울에 왔더니 선배 되는 분이 “이런 독자들까지 기어 올라와서 위협을 하니 우리가 먹고 살 수 있겠느냐?” 라고 했었어요. 어쨌든 그 것이 시작이 된 거예요. 될 것 같다 라는 생각을 한 대신 아주 죽을 고생을 했죠.
▶ 그러다가 잘 되신 것은 언제부터예요?
고등학교 2-3학년쯤 되니까 출판사에서 돈도 천원 주던 것을 천오백원, 삼천원 주더라고요. 그리고 고2가 되니까 술집을 데려가더라고요. 그 때는 머리를 박박 깎아서 극장가서 잡히면 정학 맞고, 당구장은 모자쓰고 다니고 그랬거든요. 근데 고2때 요정을 갔었어요. 출판사 사장이 데려갔어요. 모자 쓰고요. 제가 태어나서 첨 가봤는데 방에 병풍이 있고, 멋있는 데 앉혀놓고 술도 먹을 줄 몰랐는데 그 날 청주를 먹었던 것 같아요. 출판사 사장이 잘 부탁한다고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여흥을 즐길 줄 아는 나이에 가야지 재밌죠, 고2짜리가 가서 뭘 알았겠어요? 그 출판사 사장님이 아직도 살아계신데, 그 분은 자기 사람 만들려고 그러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좀 책이 팔리면 출판사 여기저기서 데려 가거든요. 그래서 예를 들어 편당 삼천원, 전속 몇 년 으로 돈 주면서 계약을 하고 포섭을 하는 거죠.
▶ 그 당시 삼천원 정도면 어느 정도 금액이었나요?
자세히 기억은 안나는데 대학등록금이 만원 정도 였어요. 그리고 그 당시 엘비스 프레슬리 나오는 영화를 보러 택시를 타고 대한극장을 가는데 기본요금이 30원이 된다고 했으니 삼천원이면 큰 돈이었죠.
▶ 발바리가 나온 것은 언제죠?
발바리는 80년대에 나왔고, 발바리 선배가 있습니다. 1974년도에 ‘사랑의 낙서’를 할 때인데 그 때 참 어려웠죠. 발바리는 88년에 나왔습니다. 한 주인공이 시대에 따라서 계속 성격이 바뀌었고, 또 얘기가 여자와 사랑을 하는 이야기보다 이를테면 시위가 많던 시절에 왜 시위를 했던가, 왜 장발 때문에 잡혀가서 매를 맞아야 하나 하는 어떤 시대적인 청춘일기인거예요. 그 때는 여자랑 남자랑 첨 만나서 손잡으면 부도덕한 것으로 보던 시대였거든요. 근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시대가 되었거든요.
그런 것들을 저 같은 사람이 정사(正史)는 아니고 야사(野史)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런 편편들을 기록하는데, 그냥 기록하면 재미없으니까 약간 유머를 곁들이고, 로맨스와 슬픔과 사랑얘기를 곁들이게 되는 거죠. 또 사랑 얘기는 꼭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거든요. 삼각관계, 사각관계가 나타나기도 하고, 포장마차에서 위로하다가 엮이게 되고 하는 시대적인 상황들, 정치적인 것도 약간 묻어나고 하게 된 거죠.
또 저희 발바리 중에 시선을 끌었던 부분은 아버지가 투기꾼이에요. 그 부모가 투기를 해서 엄청나게 돈을 버는 거예요. 그래서 아들한테 돈을 막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부모는 돈은 들여놓고 자식은 나가버리는 거예요. 자식은 돈이 많으니까 나가서 술먹고 여자 만나고 하는 일종의 시대적인 현상인 셈이죠. 그러니까 좀 좋지 않은 집안에서 유학 보내놨더니 결국은 타락해서 공부도 안하고 마약하고 하는 식으로 제 주인공들이 시대적인 양태를 남자와 여자로 나타내서 보여주는 거죠. 근데 그걸 그냥 보여주면 안 보니까 재밌게 그리다 보니까 그런 작품이 나온 거죠.
▶ 혹시 이 작품은 내가 졸작이었다 싶은 것들도 있으세요?
저는 대개 밤이나 새벽에 그리거든요. 그리고 대개 스토리텔러가 있는데, 저는 거의 99.9% 는 제가 쓰고 그렸거든요. 그러니까 남들보다 힘이 많이 들죠. 근데 다 끝나면 보기도 싫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린 만화가 집에 별로 없습니다. 보고 싶지도 않고 한 번 지나고 나면 다 버리고 싶어요. 그나마 독자들이 봐줘서 자식도 키우고 밥도 안 굶고 살아왔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이런 것을 창피하게 어떻게 냈을까 싶고 한 것이 오히려 오랫동안 안 굶고 산 것 같아요. 다 해놓고 보면 어떻게 이렇게 했을까 방송하는 분들도 비슷한 심정일 거예요.
제 자식들도 제 만화 못 보게 감춰놓고요. 그럴 정도로 너무 부끄럽고, 밤새서 작업하다보니 틀린 글자도 나오고 그렇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늘 불만인거예요. 너무 불만이 쌓이다보니까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가고, 여러 가지 사례를 연구하고 저 혼자서 꾸밀 수 없으니까 많이 돌아다니게 되고, 그러니까 밑천이 많이 든다는 얘기예요.
▶ 그런데 그런 대중성 있는 작품을 하다보면 너무 통속적이다 라는 비난도 있으시죠?
소위 고상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단순수치로 따져볼 때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영어를 하는 사람이 많으면 영어로 이야기 해야지 우간다 말로 하면 많은 사람들이 못 알아듣거든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말해서 대중성에 영합하는 거고요. 대중성에 영합을 하면서 고상한 것을 넣으려고 하는 것이 이상향이죠. 하찮은 것 같지만 잘 들어보면 괜찮은 얘기도 많고 좋은 메시지도 있더라 하는 것이 말하자면 목적이죠.
▶ 그런 분위기 때문에 70-80년에 사회악이다 해서 검열기준도 있고 했는데, 이것이 어떤 정치적인 색채 때문에 그랬습니까? 왜 사회악으로까지 공격의 대상이 되었죠?
일부 입김이 센 사회단체들이 있었죠. 그들의 말도 들어보면 또 그럴 듯 합니다. 애들이 공부는 안하고 만화를 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대개 저도 그랬지만 그냥 만화를 봅니다. TV가 좋고 나쁘고 어떤 의식에 좋고 안 좋고를 떠나서 무조건 집에 오면 TV를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시대에는 생각이 열리지 않은 분들이 많아서 염속주의식의 단순 발상이 참 많았죠. 지금은 참 많이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그런 것들을 다양성으로 인정하는 사회거든요. 근데 옛날에는 남보다 앞서가면 꼭 불려 다니고 매맞고 그랬어요.
60-70년대에는 성인 만화가 없었어요. 다 어린이를 위한 만화인 거예요. 그래서 초등학생인 주인공의 아버지 어머니가 나란히 누워있는 장면이 나오면 다 음란하다고 다 걸려 갔어요. 그래서 원고를 뺏기고 빨간 줄을 긋고 해서 제가 싸우다가 막 찍히고 반사회주의자니 온갖 욕을 다 먹었죠.
또 ‘복수’ 이런 것도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몬테크리스토 백작 책을 가져가서 “이것이 학교에서 보라는 세계 명작인데, 복수 이야기입니다.” 했더니, “당신 복수하고 그 복수는 질이 다른데, 어디 건방지게 세계명작과 비교를 하느냐?”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질이 낮든 방법이 치졸하든 복수는 복수입니다.”라고 했던 적도 있죠.
또 뱀도 표지에 못그리게 했어요. 징그러운 파충류가 표지에 등장해서 애들 정서에 심대한 지장을 주니까요. 다 그려 놓은 것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서로 타협을 해서 “통과를 시키는 데 대신 뱀의 목에 리본을 달아라” 라고 하던 그런 시절이었죠. 우리는 만화라는 것의 역사가 일천하기 때문에 이해가 덜 되는 분들이 많아서 참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 요즘은 오히려 창의력 때문에 만화를 많이 보라고 하지 않습니까?
진작 그랬으면 좀 더 많은 선수들이 나타났을 텐데요. 거의 만화로서는 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을 만들어놓고 만화 한 편 잘 만들면 천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그 열매만 강조를 하는 거예요. 다시말해 좋은 토양에 씨를 뿌려서 그 맺어진 열매를 좋은 쪽으로 활용하도록 그런 시작부터 끝까지 도와주고 정책을 만들어야 하는데 열매만 따지는 거예요. 지금 만화가 다 망하고 난 뒤에 일본만화가 들어와서 다 쑥밭이 되고 또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거든요. 일년에 수천 명의 만화학과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갈 곳이 없어요. 그래도 가수나 성우는 시험쳐서 뽑는 기회가 있지 않습니까? 만화계는 그런 것이 거의 없거든요.
▶ 그래도 이현세 씨 등 아주 대단한 스타급 작가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몇 명 있는 것을 가지고 괜찮다고 해서는 안되죠. 만화영화 하는 것도 그 척박한 환경속에서 뛰어난 천재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일부 극소수죠. 대개 게임산업으로 다 가고 말이죠. 본래 작은 냇물이 바다에서 다시 만나듯이 작은 출판물, 작은 다락방에서 출발되거든요. 그런데 다락방 다 없애버리고, 펜촉도 다 사양 산업이 되어버렸어요. 요즘은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만화 그리면 불량 청소년이 되는 거예요. 그런 모든 악재가 모여 문화 하나를 죽인 셈이죠.
▶ 그러면 만화를 그리시는 분들한테도 어떤 부분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요?
없지 않죠. 제가 그린 만화도 들어가겠지만 작가가 만화를 그려서 정말 재미있는 것도 있었지만 졸작도 있거든요. 근데 졸작이라는 것은요, 음식처럼 유해한 독이 들었다거나 불량품을 만들었다거나 하는 것만 아니면 다 시장에서 해결이 되는 거예요. 단, 옛날에는 용공사상이니 패륜아가 된다느니 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건 약간 졸작을 엄숙주의 교수들과 사회단체들이 그런 쪽으로 몰아서 이런 만화는 없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괜히 종이만 낭비한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만화라는 것에 너무 책임의식을 강조하는데, 사실 만화라는 것은 너무 교과서 같이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나서 TV를 보거나 만화를 보면서 깔깔거리며 웃는 것으로 그 피곤한 것을 풀어야지, 하루종일 학교에서 시험치다 오는 애를 또 교과서 같은 만화로 철학을 따지고 하는 건 고문이고, 만화라는 존재가 필요 없죠.
▶ 들으시는 분들이 ‘강철수 씨가 스타 만화가신데, 불만이 엄청 많으시네.’ 하는 지적도 있으실 것 같은데요. 그만큼 아쉬운 부분이 많으신 건가요?
제가 만화가를 오래 했으니까요. 저는 주로 신문이나 잡지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신문이나 잡지가 잘 안되면 자기 밥그릇이 줄어드니까 그런다 싶겠지만, 제가 속한 부분 말고 단행본 얘기를 해드릴께요. 단행본은 만화가게나 대여점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요. 거기는 만화를 한 권 사면 죽을 때까지 그 책을 대여할 수 있습니다. 한국 만화계가 안 되는 이유가 그렇게 대여점이 만화 한 권으로 오랫동안 대여를 하니 작가들이 발을 붙이고 생활을 할 수 가 없는 거예요.
작가들이 수입이 삼십 만원, 오십 만원도 안되고 그러다보니 게임업체로 떠나고 하게 되니 무슨 아이디어가 나오겠어요. 노래방에서는 노래 하나를 해도 그 중에 얼마는 가수한테, 그 중에 얼마는 작곡가한테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만화는 그 한 권이 시중에 돌아다니면 그 책이 불타 없어질 때까지 대여점 주인이 계속 장사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화는 살 수가 없는 사회예요.
◇ 가족들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 고등학교 2학년 때 벌써 스타 만화가가 되셨는데, 여성과 데이트 할 시간은 있으셨어요?
일하느라고 별로 만날 새가 없었죠. 그리고 그 당시는 월급으로는 집 한 채 사기 어려워서 다 셋방살이하고, 홍수나면 책 다 떠내려가고, 집에 비가 새서 양동이로 받쳐놓고 살던 시절이라 겨우 80년대 들어서 집 한 칸 만들고 하던 시절이었죠. 그리고 데이트 할 시간보다 술을 많이 먹고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 만나던 것이 밑천이라면 밑천이죠. 그것이 말하자면 저의 보물창고인 거예요. 특히 누가 싸우던지 치정에 얽혀 갈등을 겪는다든지 하면 저는 거기에 빠져 사는 거예요.
카운슬러 일을 하시는 분들이 그런 남의 힘든 얘기를 듣다보면 불행해진다고 하는데, 저는 다행히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스운 얘기를 만들면서 덜 불안해졌죠. 하여튼 어떤 남녀가 있었는데 만나서 잘 살았다 하면 그건 얘기가 안되는 거예요. 반드시 갈등이 있어야 되는 거고, 헤어질 뻔 하다가 다시 만나고 해야 재미있거든요.
▶ 그럼 결혼은 어떤 분하고 하신 거예요?
그런 것은 좀 비밀로 하고 싶네요.(웃음) 왜냐면 야구선수들도 보면 시즌이 시작되면 집에를 못 들어가서 부인들이 고생을 하는 것 같아요. 근데 저도 비슷한 것 같아서 소재 없으면 나가고 맨날 밤새고 술 먹고 들어오니 어떤 여자가 좋다고 하겠어요. 그러니까 참 미안하고 면목이 없죠. 대개 여자의 행복이라는 것을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같이 앉아서 얘기도 하고, 가끔 외식도 하고 영화도 보고 해야 하는데, 만화하는 사람들은 거의 자기 세계밖에 없어요. 그리고 신경이 많이 곤두 서있다 보니까 아내나 자식들이 슬슬 피한다고요. 제가 그럴 때마다 가책을 많이 느끼면서 살았는데요.
만약에 제가 하늘로부터 받은 재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반대급부로 준 것이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달게 받고는 살았지만 부인한테는 참 미안하고 부끄럽고 그렇습니다. 저는 사과하는 사람을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해요. 다 망해놓고 나중에 미안하다고 해서 다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는 미안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점수를 딴다거나 만회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다만 계속 마음에 걸려서요.
저는 자식교육이 같이 많이 뒹굴고 돌아다니는 거라고 생각해요. 무슨 논술 기술을 가르치고 영어 단어를 가르치는 것보다도 같이 다니고 산에 다니고, 공부 못해도 된다고 해요. 공부 못해도 된다고 하면 오히려 더 공부 잘해요. 그런데 저는 자식들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는 거예요. 이제는 애들이 커서 사회인이 되다보니 걔네들도 바빠서요. 서로 만날 기회가 없는 거예요. 내가 뿌린대로 그대로 거두는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식들이라도 크면 저와 같이 지내주고 할 줄 알았거든요.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관심은 많았는데 같이 놀아주지 못한 미안함은 있죠.
▶ ‘호랑이 선생님’ 이라는 드라마도 대중들에게 참 친근했죠?
그 PD분도 만화가가 쓰면 좀 재밌지 않을까 싶어서 장난같이 시작했을 거예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시청률이 좋았죠. 4백 몇 회를 썼었어요. 참 많이 썼죠. 한 시절 몇 년간 거기에 청춘을 바쳤죠. 그러다 보니까 또 방송하고 인연이 닿아서 베스트 극장, 테마 게임 등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지 만화나 드라마나 노래나 소설이나 다 똑같다고 생각해요.
▶ 전설처럼 남겨지는 주인공 인물이 있다는 것이 강 선생님한테는 아주 대단한 재산이시죠?
그런데 우리 주인공은 그렇지 않은데 ‘발바리’가 자꾸 강간범으로 나오니까 좀 불편하더라고요. 아마 제일 첨에 쓴 기자분이 상징성이 있으니까 재미로 붙였을 거예요. 그런데 자꾸 나오니까 좀 그렇더라고요.
▶ 당구 400을 치시고, 아마 바둑 6단이나 되신다면서요?
의사들이 머리를 많이 쓰다보면 반대쪽 뇌를 많이 써야 균형이 잡힌다고 하더라고요. 머리를 식히다 보니 술 마시거나 당구를 치거나 하다보니 솜씨가 늘은 거예요. 그리고 제가 보면 이런 쓸데없는 일, 잡기에 소질이 있나봐요.
◇ 세계 60여개국 여행하며 많은 것 배워 ▶ 그런 것에 비하면 여행 취미는 정말 건전한 것 같은데요.
술 먹다보면 자꾸 담배도 피게 되고 공기 탁한 곳에 있게 되서 취미를 바꾼 거예요. 당구 치다보면 돈도 많이 쓰고 게임이라는 것이 다 하다보면 다투기도 하고요. 그래서 여행을 다니게 됐죠.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특혜받은 것이라면 여행을 많이 다닌 것이 아닌가 싶어요. 남은 재산은 그것밖에 없더라고요.
▶ 특히 일본을 많이 가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일본은 우선 가까우니까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는 점과, 치안이 잘 되어 있고, 문화가 비슷하고, 음식이 우리나라와 비슷해서 고생할 것이 없거든요. 그런데 우리 세대들은 일본에 대한 감정들이 참 안 좋습니다. 항일이니 반일이니 해서요. 그래서 제가 고3때부터 일본어를 많이 공부했는데 공부한 근본적인 이유가 일본사람들이 들으면 싫어하겠지만 싸우려고 배웠어요. 싸우려면 일본어를 잘해야 되니까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다 보니 싸울 일도 없어지고 그 때 일본어를 배운 덕에 일본을 많이 가죠.
▶ 60여개국을 여행하셨다던데, 참 많이 하셨어요?
참 많이 다녔죠. 그래도 안 간 곳이 더 많더라고요. 저는 많이 간 줄 알았더니 지도를 펴 보니까 안 간 곳이 많더라고요. 60개국 좀 넘게 갔을텐데 사실은 그건 여행도 아니에요. 예전에 저희들은 비자도 안나오고 여권도 안 나오던 시절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시절에 외교관이나 상사원 갔다온 분들이 유럽 다녀온 얘기를 하면 “형, 어땠어? 로마 갔었어?” 하고 물어보잖아요. 그런데 선배 하나가 “로마? 아마 갔었을껄...”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유럽은 막 일정에 쫓겨서 세 나라, 일곱 나라도 가고 하거든요.
본래 여행은 제가 감히 말씀드리지만 딱 한군데만 가는 거예요. 여의도 하면 여의도 가서 일주일 있는 거예요. 그래야 거기 사는 할머니와 얘기도 나눠보고, 여의도가 어디에 붙었는지 다녀와서 소개도 해주고 그러죠. 그런데 여기 와서 사진찍고 다시 또 금방 다른 곳으로 가고 하면 의미가 없어요. 여행 가서는 거기는 어떻게 사는지 보고 내가 얼마나 작은 인간인가를 살피고 하는 거죠. 그리고 요즘은 한류라고 해서 한국 사람들을 예전보다 알아보고 술을 마시다보면 술을 들고 와서 이것 먹으라고 주고 하는 것을 보고 감동도 많이 받고 했죠.
▶ 그렇게 다니셨던 곳 중에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디고, 어떤 이유가 있으신가요?
저는 너무 춥거나 너무 덥지만 않으면 가는 곳마다 다 좋던데요.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먹고 사느라고 바둥바둥 살아가더라고요. 인도에 갈 때도 거지가 많고 가난하다고 들었는데 뉴델리 갔더니 시내에 골프장 18홀을 가진 사람도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빈부격차는 어디를 가나 다 있고, 어느 나라나 먹고 사느라고 바둥바둥 살더라고요. 저는 어느 나라도 다 좋고, 어느 나라 음식도 다 먹을만 하더라고요.
▶ 그런 것들이 다 만화의 소재로 응용되는 거죠?
어느 동네를 가고 어느 국가를 가든 다 애정을 갖고 보면 좋고 맛있고 다 친하게 잘 대해줍니다. 그런데 삐딱한 눈으로 보면 반드시 저쪽에서도 좋지 않게 나옵니다.
▶ 60여개국을 가셨는데, 그러면 사모님과 같이 가신 나라는 몇 나라쯤 됩니까?
뭐, 한 서너 나라 정도요.(웃음)
▶ 만화가 분들을 세대별로 나눈다면 강선생님은 몇 세대쯤 되시는 건가요?
제가 중학교 때 시작할 때 선배님들은 40-50대였거든요. 그러면 한 20-30년 이상 차이 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만화가의 세대는 거의 5년에서 10년이 한 세대 인 것 같아요. 10년도 아닌 것 같아요. 왜냐하면 유행이 5년이면 확 지나가 버리고 요즘은 사회전반이 30대 중반만 지나가도 원로가 되는 것 같더라고요. 40만 넘어가도 일이 없어 노는 작가들을 보고 좀 충격적이기도 했죠. 그런데 거기에 맞물려 있는 고리가 만화사업이 잘 안되고 경기가 없으니까 더 그런 것 같아요.
◇ 고우영 선배와 함께 단속을 피해 도망다니던 시절도 있어▶ 고우영 선생님은 선배님 되시죠?
그럼요. 하늘같은 선배였죠. 나이도 한 10년 정도 차이가 났죠. 제가 고 선생님 돌아가셨을 때 추모사를 썼거든요. 그런데 추모사를 함부로 쓸 것이 아니더라고요. 제가 밤새도록 썼어요. 참 힘들게 썼는데, 그래도 고 선생님은 제 추모사에 만족하셨을 거예요.
▶ 원래 고우영 선생님은 고전을 그리라고 하셨는데, 그건 싫으셨다고요?
독자들도 다양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하니까 저는 좀 다른 길을 가고 싶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어떤 세상에 있는 이야기를 그리기는 싫어요. 아무도 손 안 댄 얘기를 하고 싶죠.
▶ 고우영 선생님의 재치나 재능은 정말 뛰어나셨죠.
1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분이죠. 필설로 옮길 수 없을 정도죠.
▶ 고 선생님에 얽힌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가요?
둘이 예전에 체포령 떨어져서 잡혀다니고 했는데 도망을 다니다가 그분은 미리 자수를 해서 새마을 연수원에 가서 교육을 받고 나왔어요. 저는 그것도 싫어서 친척집으로 도망가서 숨어있었죠. 간첩처럼 숨어서 밥을 몰래 조달해서 먹고 했는데, 나중에 그 분과 만난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돈도 좀 있으니까 해외로 도망가자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나요.
▶ 그 때 왜 그렇게 잡아갔나요? 무슨 죄목이었습니까?
길에서 만화나 주간지를 팔던 시대가 있지 않았습니까? ‘고우영 삼국지’, ‘사랑의 낙서’ 등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잘 팔리니까 이상하고 야하고 저질 작품들도 많이 나오고 했죠. 그래서 그 단속이 시작된 거예요. 근데 그런 사람들은 다 도망가고 저희 오리지날들만 다 잡힌거예요. 그리고 저희같은 사람은 신원이 확실하고 주거가 확실해서 증거 인멸의 우려도 없잖습니까? 그래도 본보기로 저희 둘이 잡혀간 거예요.
불량 만화가 둘을 잡아서 혼쭐을 냈다는 소위 전시효과로서의 상징성도 있지 않습니까? 요새 같으면 고우영 선생님 만화를 보고 잡아갈 사람이 어딨겠어요? 그 좋은 만화를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위안을 삼고 살아갔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숨고 도망 다닐 일도 아니었는데 그 때는 분위기가 굉장히 좋지 않을 때였어요.
▶ 경찰서 유치장이나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셨나요?
그럼요. 경찰서 유치장에 수갑차고 잡혀갔었죠. 잡범들하고 같이 잡혀있었죠. 그 상황에서도 형사들이 와서 싸인해달라고 자기 그려 달라고 하더라고요. 소매치기나 폭력배들하고 한 방에 같이 있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래도 저를 알아보고 와서 인사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다행히 구속은 안되고 혼쭐만 내서 보낸거죠. 믿지 않으시겠지만 어떤 때는 형사가 저를 책상 다리에다가 수갑을 채워놓은 적도 있었어요.
▶ 청운의 꿈을 안고 만화계에 입문하는 학생들에게 한 마디 해주신다면요?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해야된다고 말해주어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지금 아주 조건이 나쁘다는 것을 잘 알고 해야 할 부분도 있죠. 갑자기 스타 만화가가 되는 것들을 보면서 나도 될꺼야 하는 생각은 접고, 앞으로 한 5년에서 10년 정도는 고생을 해야 할 거예요. 지금 일본만화가 들어와서 일본만화도 안 팔릴 지경이 되었거든요. 제가 알기로는 1억권에서 10억권쯤 돌아다니고 있으니 우선 물리적으로 안되지 않겠어요? 그래도 유행은 자꾸 바뀌고 계속 보다보면 또 안보게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물리적으로 보면 5년-10년 정도는 지나야 좀 좋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또 대통령이 나서고 해서 문화적인 면으로도 시선을 주시고 하면 급격히 좋아질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고생을 한다는 각오를 해야 할 겁니다.
▶ 그래도 요즘 ‘토지’도 만화로, 어렵게 느껴지는 신화도 만화로, 와인 만화까지 나올 정도로 순기능의 추억의 만화를 팬들은 앞으로도 많이 기대할 겁니다.
지금 후배들이 전시하는 곳에 가끔 가보면 비록 고생을 하고 있고 전망은 흐리지만 그 솜씨들이 아주 뛰어납니다. 그래서 이 고비를 넘기면 좋은 시절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 마지막으로 작품활동 계획 있으시면 말씀해주시죠.
뭘 해야지 해서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번쩍하면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글을 쓰든지 만화를 그리든지 하거든요.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할 것이고 또 건강이 허락해야 가능한 것이니까 건강한 생각을 늘 갖고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나쁜 나이든 사람이 되지 않게 해야겠죠.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
※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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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수 '친일행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
진주MBC가 진주시로부터 예산 5000만원을 지원받아 오는 9일 저녁 진주성 특설무대에서 '남인수 가요제'를 강행하기로 해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민족문제연구소가 남인수(본명 강문수, 1918.10.18∼1962.6.26)의 친일행적을 공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05년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를 발표하면서 남인수를 포함시켰다. 진주지역 시민단체로 구성된 '친일잔재청산을위한진주시민운동'은 친일파의 가요제를, 그것도 시민 혈세를 들여 열 수 없다며 반대해 왔다.
하지만 진주시와 진주MBC는 남인수가 '친일인명사전'에 최종적으로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며, 가요제 개최를 계속해 오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담길 남인수의 주요 친일행적 자료를 7일 '친일잔재청산을위한진주시민운동'에 보냈다. 이 단체는 9일 가요제 때 이들 자료를 담은 유인물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눠 줄 예정이다.
진주 출신인 남인수는 진주제2공립보통학교를 졸업(1932)한 대중음악가(가수)였다. 그의 주요경력을 보면 1934년 '시에론'레코드사에 입사해 1936년 <눈물의 해협>으로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오케(okeh)' 레코드사 직영 조선악극단 소속 가수로 활동하면서 남만주와 중국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가 부른 '친일 군국가요'는 많다. ▲<강남(江南)의 나팔수>(1942년 1월 오케 레코드, 작사 조명암, 작곡 김해송)와 ▲<남쪽의 달밤>(1942년 8월 오케레코드, 작사 조명암, 작?편곡 박시춘), ▲<낭자일기(娘子日記)>(1942년 9월 오케레코드, 작사 조명암, 작?편곡 박시춘), ▲<병원선(病院船)(1942년 4월 오케레코드, 작사 조명암, 작?편곡 박시춘), ▲<이천오백만 감격(二千五百萬 感激)>(1943년 11월 오케레코드, 조선징병제 실시 기념음반, 작사 조명암, 작?편곡 김해송), ▲<혈서지원(血書志願)>(1943년 11월 오케레코드, 작사 조명암, 작?편곡 박시춘).
<강남의 나팔수>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활약을 찬양한 노래로, 가사의 내용으로 볼 때 일본군 돌격을 알리던 나팔수가 전사하자 이를 찬양한 것으로 보인다. <남쪽의 달밤>과 <낭자일기> <이천오백만 감격> 등은 징병제 실시를 축하 기념하는 노래다.
<혈서지원>은 1943년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고 조선인들이 혈서를 써서 지원한다는 내용으로 되고 있다.
또 그는 내선일체를 주장한 영화 주제곡 <그대와 나>(1941년(?), 작사 조명암, 작곡 김해송)를 장세정과 불렀는데, 이 노래는 '조선군 보도국'에서 제작한 것이다. <그대와 나>는 허영이 감독한 대표적인 친일영화다.
해방 이후 남인수는 정훈국 문예중대 소속 군위문활동 참여(1950)와 대한레코드가수협회 회장(1958), 한국가수협회 회장(1961), 한국연예협회 부이사장(1961.12)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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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양호 공원에 있는 남인수 동상. | ⓒ 윤성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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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는 노래로 친일에 기여한 행위"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은 "일부에서는 '가수가 노래 몇 곡 부른 것이 뭐가 죄냐?'고 하는데, 당시 일제의 통치 방식을 직역봉공(職役奉公)을 기본으로 하는 방식이었다. 직역봉공이란 자신의 직업을 충실히 하며서 친일을 하라는 방식으로 즉 화가는 그림으로 작가는 글로 가수는 노래로 친일에 기여한 행위"라고 설명했다..
방 사무국장은 "총독부는 남인수에게 노래로써 친일하기를 요구한 것이지 수백만 군인 중에 한명으로 참전하도록 요구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변호 논리라면 이광수도 김기창도 그 어느 예술인도 친일의 죄를 물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인기 가수 남인수가 친일노래를 불렀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며, 연구소에서 확정된 명단이 나오지 않아서 관계없다는 논리도 문제다. 이미 행위 자체가 명백하고 반복적이므로 진주시민의 역사 인식을 감안한다면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밀양의 '박시춘가요제'나 성주의 '백년설가요제'도 친일인명사전 명단 확정 전이었지만 관계자들이 민족문제연구소의 문제 제기를 수용한 사례도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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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잔재청산을위한진주시민운동’은 오는 9일 진주성 특설무대에서 열리는 남인수 가요제 때 남인수의 친일행적을 담은 유인물을 나눠 줄 예정이다. 사진은 지난 해 가요제 때 시위를 벌이고 있는 시민단체 회원들의 모습. | ⓒ 진주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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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수가 부른 ‘친일 군국가요’의 가사[강남의 나팔수] 동무야 잘 싸웠다 강남의 나팔수/총 끝에 번갯불을 번쩍거리며/여산(廬山)은 칠십 리를 쳐들어 간 밤/여산은 칠십 리를 쳐들어 간 밤/입술에 피 흘리고 너는 갔구나.
[남쪽의 달밤]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동백꽃 피는 내 고향 떠나왔으니/사나이 내 목숨을 낸들 어이 알쏘냐/뻐꾹새 울지 마라 뻐꾹새 울지 마라 남쪽의 달밤//흘러를 간다 흘러를 간다/남쪽의 항구 쌍돛대 화륜선 위에/고향을 찾아가는 내 마음이 흐른다/어머니 불러 보는 어머니 불러 보는 진중(陣中)의 달밤//내일은 간다 내일은 간다/나라에 바친 한 가지 꽃을 안고서/험한 산 천리 황야 붉은 피를 묻히며/낙화로 가리로다 낙화로 가리로다 사나이 목숨.
[낭자일기] 낭자는 꽃이었소 아름다웠소/한 마음 붉게 피는 동백이었소/천만 산 넘고 넘어 싸움터로 가는/이 산천 젊은이의 아내이었소//낭자는 일꾼이오 씩씩하였소/먼 곳에 가신 님께 지지 않았소/두 몸은 남북으로 한별(恨別)이언만/충성을 맹세함은 한 가지였소//낭자는 꽃이었소 붉은 정성에/한 조각 떨어지는 낙화이었소/맘대로 못 다하는 생사일망정/떳떳이 죽는 것이 소원이었소.
[병원선] 정 들자 떠나가는 차이나 항구/병원선 뱃머리에 손을 흔들 때/붉은 불 푸른 불이 눈에 흐른다//군복을 벗어 놓고 흰옷을 입고/상처를 만지면서 흘러갈 적에/한 목숨 버린 동무 보고 싶구나//고향을 떠나온 지 몇 해 몇 천 리/죽어서 돌아가잔 맹세는 젖어/병원선 그늘 아래 달빛을 본다.
[이천오백만 감격] 역사 깊은 반도 산천 충성이 맺혀/영광의 날이 왔다 광명이 왔다/나라님 부르심을 함께 받들어/힘차게 나아가자 이천오백만/아 감격의 피 끓는 이천오백만/아 감격의 피 끓는 이천오백만//동쪽 하늘 우러러서 성수(聖壽)를 빌고/한 목숨 한 마음을 님께 바치고/미영(米英)의 묵은 원수 격멸의 마당/정의로 나아가자 이천오백만/아 감격의 피 끓는 이천오백만/아 감격의 피 끓는 이천오백만.
[혈서지원]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일장기(日章旗) 그려 놓고 성수만세(聖壽萬歲) 부르고/한 글자 쓰는 사연 두 글자 쓰는 사연/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해군의 지원병을 뽑는다는 이 소식/손꼽아 기다리던 이 소식은 꿈인가/감격에 못 이기어 손끝을 깨물어서/나라님의 병정 되기 지원합니다//나라님 허락하신 그 은혜를 잊으리/반도에 태어남을 자랑하여 울면서/바다로 가는 마음 물결에 뛰는 마음/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반도의 핏줄거리 빛나거라 한 핏줄/한 나라 지붕 아래 은혜 깊이 자란 몸/이 때를 놓칠쏜가 목숨을 아낄쏜가/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대동아(大東亞) 공영권(共榮圈)을 건설하는 새 아침/구름을 헤치고서 솟아 오는 저 햇발/기쁘고 반가워라 두 손을 합장하고/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그대와 나] 꽃피는 고개 너머 하늘에는 새날이 밝는다/영원한 길을 닦는 지평선에서/노래를 부르잔다 키미토보쿠/노래를 부르잔다 키미토보쿠//그대는 반도 남아 이내 몸은 야마토사쿠라/건설의 햇발 솟는 지평선에서/노래를 부릅시다 아이노우타/노래를 부릅시다 아이노우타//여기는 아세아다 우리들의 희망은 빛난다/따뜻이 손을 잡고 깃발 아래서/충성을 맹서 짓는 키미토보쿠/충성을 맹서 짓는 키미토보쿠.
[춤과 그들]최선 “춤에 혼이 담기지 않으면 풍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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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살풀이춤 |
너무 예쁜 게 흠이었다. ‘호남살풀이춤’ 인간문화재 최선(72·본명 최정철)은 오빠부대의 원조다. 곱게 생긴 외모에 나비처럼 가볍게 살랑살랑 팔을 나부끼며 무대를 누비는 최선의 춤 현장에는 늘 여성팬들이 줄을 이었다. 지역공연을 따라다니는 것으로도 모자라 최선의 집까지 발길을 잇는 여성들도 있었다. 스토커였다.
# 한국전쟁이 빼앗은 행복
최정철은 1935년 전북 전주에서 아버지 최한필과 어머니 김옥주의 4남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셋째 아들인데 현재 누나 2명과 아우 1명이 살아있다.
아버지는 전북 임실에서 여관업을 했다. 잘 살았다. 그런데 6·25가 최정철의 집안을 통째로 뒤흔들어놓았다. 여관은 망하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두 아들은 인민군에 학살 당했다.
“큰 형은 대한청년연맹 부장이었고 작은 형은 경찰이었어요. 제가 학교 다닐 무렵 집안이 몰락했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과 달리 저는 어려운 생활을 했죠. 저요, 고생 징글징글하게 했어요.”
춤은 10살에 시작했다. 1945년 해방 후 전주에서 최승희의 제자 김미화가 그의 발을 떼게 해주었다.
45년 김제군 금구초등학교 3학년 때 학예회를 했는데 여학생 2명, 남학생 2명이 뽑혔다. 최정철은 그중 한 명. 학예회담당인 교생은 한국춤을 가르치는 게 아니고 유희성 동작을 지도했다.
‘방아방아, 콩콩 찧는 물방아야…’ 같은 동요에 맞춰 춤추는데 ‘정철이 제일 잘한다’고 칭찬 받았다. 어린이는 칭찬 받는 게 좋아 율동이 있는 곳만 찾아다녔다.
“시골에 극장이 어딨어요? 악극단이 오면 농협창고에 가설무대를 짓고 공연했죠. 신파극도 공연하고 서커스단도 왔는데, 집에선 어린애가 가면 안된다고 막았어요. 결국 몰래 집을 나와 공연장 담을 넘다 발목을 삐기도 했고… 5학년 2학기 때 전주 완선초등학교로 전학 가 김미화 무용연구소에서 13살까지 춤을 배웠습니다.”
# ‘착할 선’의 최선, 호남살풀이춤을 만들다
남중 2학년 때 6·25가 터졌다. 김미화는 부산으로 피란가고 전주에 남은 무용연구생들은 2층 비어있는 학원에 모여 연습을 계속했다. 그중 가장 어린 최정철은 당시 전주국악원에서 춤을 가르치던 기녀 출신 선생 추원에게 배웠다. 특히 그때 배운 수건춤은 ‘호남살풀이춤’의 바탕이 됐다.
“전주국악원 대청마루에 돗자리 깔고 발 내리고 수건춤을 추는데 추원 선생이 돗자리를 벗어나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춤음악이 없어 추원이 장구치고 구음하며 가르쳤죠. 그 춤을 ‘동초 수건춤’이라 했어요. ‘동초’는 동기(쪽찌지 않은 어린 기생)와 초립동의 합성어인데, 조그만 수건이나 부채를 들고 추었어요. 수건은 입으로 물거나 손으로 뿌리며 추기도 했죠.”
6·25 직후 공연무대에 섰다. 케이피케이, 케이에이치 등 군인악극단과 무궁화 등 악극단 소속으로 전국 무대에서 춤을 추었다. 지방공연은 사연도 많다. 비가 많이 오면 공연이 취소됐다. 여관에선 30여명의 악극단원들이 다음 공연지역으로 갈 때까지 죽치는데, 공연을 못했으니 숙박비가 있을 리 만무. 여관 주인은 수금을 위해 악극단의 다음 공연 장소까지 따라가곤 했다.
“우리는 악착같이 뒤쫓는 여관 주인을 ‘호열자(열병)가 따라온다’고 했어요. 당시 출연료를 받지 못한 배우들은 다른 악극단으로 떠나곤 했는데, 그 배우 역할을 할 사람이 없어 우릴 따라온 여관 주인들이 대신 무대에 섰답니다. 정말 웃기는 일이죠. 당시 황해·조미령·이빈화 등이 잘 나가던 배우죠. 저도 출연료는커녕 매일 굶다 결국 집으로 도망갔죠. 어머니께선 무척 반가워하시더군요.”
‘여자 같은 남자’로 불리던 최선. 예명은 단체 공연 다닐 때 연극인 황철이 지어주었다. ‘착할 선(善)을 써라. 최선이라 지으면 그 이름이 널리 퍼지고 유명해질 이름’이라고 했다. 19세부터 ‘최선’이었다.
# 19세 예쁜 남자는 오빠부대 원조
추원이 떠난 6·25 전쟁 직후 전주에서 은방초(본명 은종협·현재 미국 거주)를 만나면서 최선의 춤사랑은 점점 깊어만 갔다.
“남중 졸업 후 고교 진학을 못하고 춤만 추고 있었죠. 그때 거리에서 6살 위 은방초형을 만났어요.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춤춘다기에 매일 붙어다녔습니다. 그전에는 남자선배들과 어울리며 2층 연습실에서 축음기를 틀고 춤추곤 했는데, 그들이 흩어져 허전할 때 방초형이 나타난 겁니다.”
전주에 은방초의 형수집이 있었는데, 그 집을 빌려 연구소로 썼다. 전주 최초의 무용학원인 셈. 당시 영화 ‘자유부인’의 영향으로 가정부인들이 10명씩 춤 배우러 몰려 다니는 게 유행이었다. 은방초와 최정철은 자유부인이 되고픈 아줌마들을 가르치느라 바빴지만, 시간만 나면 전주 시내를 손잡고 누볐다. 예쁘게 생긴 남자 두 명이 시내에 뜨면 사람들은 ‘여자냐 남자냐’ 궁금해하며 두 사람의 뒤를 따르곤 했다. 내기를 하는 이도 있었다. 돈버는 일보다 춤추는 게 좋아 열심히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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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며 전주시내를 누비던 18세 최선 |
3년 후 은방초가 서울 남산 소재 서라벌 예대(1기생)에 진학하느라 전주를 떠났다. 최선은 어린 데다 돈도 없어 서울에 따라가지 못했다.
“방초형을 만나러 가끔 서울에 갔죠. 은방초 스승인 정인방 선생도 만났고요. 당시 정선생님은 필동 고아원을 비롯, 공간을 전전하며 무용연구소를 열었는데 저는 서울 갈 때마다 배웠어요. 또 정선생을 전주 시내 여관에 모셔와 1주일에서 1개월씩 독선생으로 배우기도 했죠.”
돈이 없어 정인방에게 교습비를 건네지 못했지만 춤을 배웠다. 모두 어려운 시절. 굶주려가며 춤추었다. ‘학춤’ ‘무당춤(대감놀이)’ ‘심불노’ ‘살풀이춤’ ‘행상’(엿장수가 어린이들과 어울리는 춤) 등을 배우고 공연도 했다.
20살. 첫 춤발표회를 전주 국립극장에서 가졌다. ‘호남살풀이춤’ ‘승무’ ‘논개’ ‘꽃의 정’ 등 각종 춤을 추었다. 그때부터 최선에게 오빠부대가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인기 짱. 30대까지 거의 매년 개인춤 공연을 가졌다.
# 혼이 없는 춤은 떠다니는 풍선
“명동 국립극장에서 ‘논개’ 공연 때 왜장인 제가 논개역의 이애주와 꼭 껴안고 진주 남강으로 떨어지는 장면이 생각납니다. 정말 멋지게 떨어졌죠. 우리는 찰떡호흡이어서 잘 맞았어요. 하하하….”
최선은 ‘최일류’만 고집했다. 명동 국립극장 시절 조명은 당대 최고인 차기봉·이우영이 맡고, 음악은 지영희·지광희·성금련·한상묵·신쾌동 등 명인들이 연주를 담당했다. 무용가들 중 강선영·한영숙·정인방·송범·김진걸·이매방·이인범(발레)·조영자 등 당대의 스타들을 초빙해 교습과 공연을 펼쳤다. 김백봉·임성남·김천흥만 제외하고 거의 모든 무용가들을 초빙했다. 지역에선 당대의 스타들을 초청하는 예가 없는데, 최선은 전주에서 황무지를 개척했다.
“전주를 찾아주신 선생님들께 출연료나 강의료를 많이 못 드리고 기차표만 사드렸어요. 서울로 되돌아가시는 그분들 뒷모습을 보며 기차역에서 울곤 했습니다. 배웅하고 연구소로 돌아가면 남는 게 딱 두 가지죠. 장구와 빚! 빚쟁이에게 시달려 장구통 붙잡고 울고, 집세 내라 조르는 집주인 닦달에 못 견뎌도 춤 때문에 살았습니다.”
물자가 귀해 무용 의상 마련도 힘든 시기였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구호물자보따리를 뒤져 스팡클옷을 저렴하게 구입한 후 밤새 스팡클을 떼어내 의상에 붙였다. 족두리 등 소품도 직접 만들었다. 그 습관은 지금도 이어진다.
30대 후반 서울 홍릉에서 무용연구소를 1년여 운영했다. 은방초는 필동에서 무용연구소를 하고 있었다. 그때 최선은 은방초·한상묵(예명 한유성)과 삼총사로 지냈다. 사람들은 ‘세 자매’라 불렀다. 한유성은 장구와 가야금 연주의 최고수였다. 세 자매는 홍릉과 필동연구소에서 반되들이 소주를 들여놓고 춤을 논했다.
그러나 다시 전주로 내려갔다. 제자들이 졸랐다. 고3 수험생 이길주는 스승의 손을 잡고 경희대 무용과에 입학시험을 보러 갔다. 길을 가다 최선에게 픽업돼 무용에 입문한 채상묵도 최선을 사사하다 서라벌예대 진학을 위해 서울로 갔다.
그는 제자들에게 항상 ‘혼의 춤을 추라’고 강조한다. 혼이 담겨 있지 않은 춤은 고무풍선이라고 한다. “고무풍선처럼 둥둥 떠다니는 춤은 필요없습니다. 또 정신통일과 예의범절을 중요시하죠. 우리 학원에 처음 오는 학생들은 누구나 청소부터 해야 합니다. 깔끔하게 정리 정돈된 공간 속에서 혼이 담긴 춤을 추어야 바른 춤을 출 수 있는 겁니다.”
결혼은 36세에 했다. 수많은 여자 팬들이 결혼하자고 따라다녔지만 일절 거들떠보지 않았다. 춤에 미쳐있는데 무슨 여자가 필요했겠는가.
“색싯감 사진을 보니 참하고 예쁘고, 장녀라 살림도 잘 한다고 했어요. 저는 춤추는 사람과는 절대 결혼하지 않을 생각이었거든요. 가정적인 사람을 원했는데 바로 집사람이 제가 원하는 상대였어요. 처가에선 노총각이라고 반대했죠.”
부인 김숙자씨(64)는 ‘춤을 가르치는 노총각이니 분명 총각은 아닐 것이다. 아이도 있을 것’이라 추측했는데 최선을 만나본 후 생각을 바꾸었다.
최선은 2남1녀를 낳았다. 큰 아들 최석훈(35)은 대전시립교향악단 바이올린 주자 겸 배재대에 출강하고 며느리 조혜련도 피아니스트 겸 배재대 강사이다. 둘째 아들 최지훈(33)은 극단 작은신화 배우. 딸 최지원은 4살 때 무용을 배웠고 호남살풀이 이수자로 활동 중이다.
최선은 79년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에 아내의 손을 잡고 참가했던 일을 가장 잊지 못한다. 자신이 안무한 ‘가갯골의 전설’로 최우수상 없는 우수상을 받았다. 당시 3000만원의 제작비를 들여 준비했는데, 최우수상을 받지 못하자 속상해 울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때 대학 입학금이 30만원선이었고, 3000만원은 집 몇 채 값이었다. “첫 무용발표회 때도 떨지 않았는데, 대한민국무용제에선 너무 긴장했어요. 집사람 손을 꼭 잡고 ‘열심히 추자’ 다짐했었죠.”
이젠 모두 옛 일이다. 요즘은 힘에 부쳐 ‘큰 일’을 자제한다. 하루종일 호남살풀이춤 전수관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매주 셋째주 토요일에는 새벽 6시40분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 제자 고선아씨의 학원에서 호남살풀이춤을 가르친다. 공연도 자주 한다. 지난 6월30일 석촌 서울 놀이마당공연에 이어 9월9일 부산에서 열리는 ‘8도 살풀이축제’, 9월13일 전주 공연이 기다리고 있다. 영남지역과 달리 춤기운이 쇠해진 호남의 한국춤을 지키고 있다.
“다시 그 시절로 가라면 가야지요. 스승께 장구채로 맞아가며 춤을 배웠지만, 선배들과 몰려다니며 춤추던 기억…, 너무 재미있었어요. 굶어죽어도 무대에서 춤추다 쓰러지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정신은 변함없어요.”
무대에서 죽는 게 바람이다. 무대에서 춤춘 후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끊어지는 숨. 그것만이 ‘예쁜 남자’의 소원이다.
▲ 최선 약력
1935년 최한필과 김옥주의 셋째 아들로 전주에서 출생
1996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5호 호남살풀이춤 지정
1980년 대만·일본 무용협회 초청 합동 친선공연
1985년 미국 순회공연
1986년 프랑스 세계민속무용공연에 한국 대표로 참가
1988년스위스·독일·이탈리아·프랑스 순회공연(문공부 후원)
1991년 러시아 사할린 한국동포 위문공연(문화부 후원)
1992년 동남아 순회공연(태국 국립예술대 총장 초청공연)
1998년 인간문화재 최선 춤 열린무용 대공연
1995년 최선 춤 50주년 대공연
2000년 최선 춤 대공연
2001년 캐나다 포크로라마 민속제전 초청공연
2004년 최선 춤 60년 대공연-한민족의 혼
2006년 최선 춤-목련꽃 피고 지고
〈수상〉
전라북도 문화상(1969), 한국교육무용총연합회 작품지도상(1971), 중앙대 무용공로상·조선대 안무상(1977), 전라북도 지사 감사장(1980), 전주시민 문화상(1982), 개천예술제 특상부문 대상(1984), 원광대 총장상(1990) 등
〈유인화 선임기자 rhew@kyunghyang.com〉
[한국영화 후면비사] 구라 못 치면 맷집으로 버텨야 했던 시절
- ‘깡패’와 ‘공갈마’가 유행어였던 1950년대 말 충무로 -1958년 저잣거리를 휩쓴 유행어 중 하나는 ‘깡패’였다. 옛 신문을 들춰보면, 대략 1957년 초부터 ‘깡패’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아녀자 폭행은 물론이고 화물열차 탈취까지 일삼던 불량 ‘어깨’을 정부가 대대적으로 단속하면서, 덩달아 ‘깡패’라는 말도 시중에 널리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몇 가지 어원이 있긴 하나 깡패는 대개 ‘갱(gang)+패(牌)’라는 이상야릇한 합성에서 유래됐다는 목소리가 가장 높다. 백주대낮에도 무리지어 거리를 쓸고 다니며 못된 ‘깡’을 부리던 이들의 극성 때문에 “왜 인상 긁어! 배때기에 철판 깔았니?”라는 뜯어볼수록 험악한 문장까지 입에 오르내렸다. 이 무렵 ‘깡패’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두를 다투던 유행어는 ‘공갈마’. 구라치고 완력 써야 입에 풀칠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사람이 꼬이고 돈이 몰리는 극장이라도 개관할라치면, ‘나와바리’ 확보를 위한 깡패들의 힘겨루기가 오프닝 세리머니처럼 열렸다. 1958년 서울시 종로구 관수동에 위치한 세기극장 개관식 때는 정부가 ‘폭력과의 전쟁’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몽둥이, 돌, 쇠갈고리로 무장한 종로파와 명동파의 행동대원들이 ‘정오(극장 개관식이 공교롭게 12시였다)의 결투’를 펼쳐 지탄을 받았다. 이날 세기극장쪽에서는 종로파와 명동파, 어느 한쪽에도 밉보이지 않기 위해 개관식 기념행사 초대장을 고루 보냈는데, 그게 화근. 몸이 불끈 달아 있던 20대 초반의 액티비스트(?)들은 ‘맞장 뜨자’는 극장의 초대장을 상대파의 결투 신청으로 기꺼이 받아들였고, 결국 이날 사태로 극장 개관은 연기됐다.
영화계라고 이 같은 노릇에 혀를 찰 순 없었다. 1959년 11월29일, <동아일보>는 ‘권력 폭력 앞에 떠는 영화계’라는 머릿기사를 썼는데, 이른바 ‘합죽이 구타사건’이었다. ‘합죽이’라는 별명의 희극배우 김희갑은 당시 임화수에게 전치 4주의 폭행을 당했고, 사건 당시 입을 다물었던 그는 병원 침상에 누워서야 반공예술인단 주최 행사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구타당했다고 진상을 털어놨다. 임화수. 극장 매점원 출신으로 시작해 주먹 하나로 반공예술인단 단장 완장을 차고, 유력 영화제작자 타이틀까지 거머쥔 그는 당시 영화계를 호령하던 무소불위의 제왕이었다. 김희갑은 “최무룡, 김진규 등 (임화수한테) 안 맞은 사람이 거의 없다”며 “권력과 폭력의 무방비지대에 있는 자신들을 국민이 보호해달라”고 호소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눈앞의 주먹은 더욱 크게 보이게 마련. 김희갑의 증언으로 여론이 악화하자 임화수를 마지못해 불구속 입건했던 경찰은 조사를 진행하는 내내 “미약한 폭행이 있긴 했으나 양자가 합의한 것으로 안다”며 가해자를 두둔하기 바빴다. 한편 김승호, 최무룡 등 현역 배우 7명은 “임화수에 대한 관대한 조처를 부탁한다”며 법원, 검찰을 드나들었다. 결국 임화수에게 내려진 벌은 벌금 3만환이 전부였다. 괜히 호랑이를 건드려 성나게 만든 것 아니냐는 걱정어린 힐난이 영화계에 일찌감치 돌았고, 결국 이는 맘에도 없는 과도한 충성을 낳았다.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한 임화수는 구타사건 발생 한달 뒤에 영화인들의 추대에 따라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직에 오른다.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계, ‘펜대 굴리던’ 기자라고 안전할 리 없었다. 이 무렵, 모 영화 월간지 K기자가 ‘베스트10’의 투표를 조작했다는 이유로 감독에게 청부받은(?) 깡패 20여명에게 두들겨 맞는 일도 있었다. “지금이야 상상 못할 일이지만 그때는 비일비재했어. 영화사 가면 야, 이 개XX야. 욕하고 노골적으로 패기도 하고.” 1950년대 말 영화잡지, 일간지 문화부에서 기자로 일했던 강대선 감독은 <나는 고발한다>(1959) 제작 당시 악극단 출신 배우들을 기용하고 싶지만 한국영화배우협회 소속 배우들의 눈총 때문에 곤란해하던 감독, 제작자의 하소연을 듣고 기사를 썼다가 배우 이XX, 윤XX 등에게 끌려가 반공예술인단 사무실에서 집단폭행을 당했다고 말한다. “한두번이 아니야. 맞은 게. 나만 해도 세번이나 그랬다고. 나중에 사과를 받긴 하지만 그럼 뭐하냐고.”
구라 못 치면 맷집으로 버텨야 했던 시절, 충무로 3가 반공예술인단 사무실은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만큼은 아니더라도 부적절하고 일방적인 활극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그 사무실을 아지트 삼아 활개치던 임화수, 그 임화수를 꼬붕 삼은 자유당 정권, 그리고 그 아래서 끽소리 못하고 죽어 지내야 했던 영화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 다음에.
참고자료 <신문기사로 본 한국영화 1958∼1961>(한국영상자료원 엮음, 비매)<한국영화를 말한다-한국영화의 르네상스2>(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만인보 21>(고은, 창비)
(글) 이영진 anti@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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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의 산증인, 무대 위 반세기! 윤항기·복희 남매
윤복희의 첫 무대는 여섯 살 때였다. 반세기의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여전히 무대에 남아 있다. 윤복희는 올해로 55년 무대 인생을 맞았다. 오는 4월 17일, 그녀가 작곡가인 오빠와 함께 콘서트를 연다. 윤복희를 사랑하는 ‘여러분’을 위해 노래를 부른다. 어린 시절의 불행, 무대 위 영광 그리고 사랑의 상처… 드라마 같던 그녀의 삶을 담담히 털어놓는다.였지요”
“노래 ‘여러분’의 탄생 비화는…”
윤복희(61)의 노래에는 에너지가 흐른다. 그것은 듣는 이의 마음을 흔든다. 그녀의 쥐어짜내는 듯한 노래 몸짓은 간혹 개그맨의 패러디를 통해 과장되긴 한다. 그만큼 윤복희는 강한 인상으로 우리 가슴속에 각인됐다는 말이다. 그녀는 한국전쟁 당시 미8군을 통해 팝을 접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여섯 살이었다. 어른 가수를 따라 하는 인형 같은 아이를 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없었다. 윤복희가 뼛속까지 예인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녀는 악극 단장인 아버지와 스타 무용수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성음악전문 성악과 1회 졸업생으로, 원맨쇼의 일인자로 ‘부길부길쇼’ 등을 통해 1940년대 말부터 KPK 등 악극단 무대를 주름 잡았다. 어머니는 고향선이란 예명으로 유명한 고전 무용가였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재원으로 전설적인 춤꾼 최승희의 제자였다. 윤복희가 무대에 서는 것은 일상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미8군 무대를 거쳐 미국 라스베이거스 무대까지 진출하기에 이른다. “당시(1950년대) 한국 가요계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들어온 엔카뿐이었어요. 그러다 한국전쟁을 통해 미군이 듣는 팝 음악을 듣기 시작했죠. 그 영향을 받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윤항기의 말이다. 그도 록 그룹 키보이스의 멤버로, 싱어송라이터로 활약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 ‘장밋빛 스카프’ ‘너무합니다’ ‘가는 세월’ 등 모두 그의 작품이다. 그리고 윤복희의 영원한 레퍼토리, ‘여러분’도 그의 손에서 나온 곡이다. 여동생을 위해 만든 곡이다. 그는 곡의 탄생 비화를 살짝 귀띔해준다. “사실 동생은 이 곡의 뒷이야기를 밝히는 걸 굉장히 싫어해요.” 두 남매는 부모님을 일찍 떠나보냈다. 외로운 성장 과정 탓이었을까? 윤복희는 스무 살 나이에 결혼을 했고 실패했다. 이후 1977년, 가수 남진과 뜨거운 열애 끝에 결혼했지만 곧 이혼하고 말았다. 윤복희는 당시 파경의 상처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복희는 그분(남진) 이름이 언급되는 것조차 싫어해요. 동생을 위해 기도하며 아픔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여러분’이란 곡을 만들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아픔을 통해 성장하는 거 아니겠어요?” 두 남매는 상처를 계기로 더욱 종교에 의지하며 신앙 생활에 열중했다. 대중음악을 만들던 윤항기는 CCM(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을 주로 만들었다. 신앙심은 음악 작업에 그치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 공부를 하기에 이른다. 윤복희도 노래를 그만두고 종교 복음에 도움이 되는 뮤지컬을 시작했다. “성경을 공부하던 1970년대 하나님이 뮤지컬을 하라고 하셨어요. 그때부터 뮤지컬에만 전념했죠. 지금은 하나님이 왜 그러셨는지 알 것 같아요.”
“사실은 여덟 살 때부터 무대가 싫었어요” 1990년에 미국 미드웨스트 신학대에서 안수를 받은 윤항기는 국내 1호 ‘음악 목사’다. 현재 예음음악신학교 총장이자 예음교회 목사로 재직 중이다. 윤복희는 1976년 공연을 마지막으로 노래를 접고 77년부터 뮤지컬을 시작했다. “내 노래는 돈 주고 들을 만큼 잘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오빠가 노래를 더 잘해요(웃음).”
노래를 그만둔 이유를 겸손함으로 대신한다. 사실 그녀에게 노래는 삶의 무게였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윤복희. 좋아하던 노래는 이미 일이 됐고 책임이 뒤따랐다. “이제야 밝히지만 저는 이미 여덟 살이 되면서 노래 부르는 것이 싫었어요.” 기도를 통해 안정을 찾다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뮤지컬로의 전향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있다. “뮤지컬을 하라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죠. 30년간 60여 편을 했고, 크리스천으로서 무대에 선다는 것은 언제나 기쁨이었어요. 1년에 한 편씩 선교뮤지컬을 따로 하고 있는데 ‘지저스 클라이스트 슈퍼스타’나 지난해 미국에서 한 ‘프라미스’도 같은 의미의 뮤지컬이에요.” 그녀는 요즘 신이 난다. 뮤지컬 배우가 된 이래 공연들이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1977년 ‘빠담빠담빠담’을 공연할 당시 어려웠던 기억을 떠올린다. 현재의 ‘뮤지컬 붐’에 대한 감상을 말한다. “한마디로 아멘이죠! 31년 전 ‘빠담’했을 때 저는 10원 한 장 안 받았어요. 그저 기름을 넣어준다는 조건으로 공연을 시작했는데 그 기름값마저 아직까지 못 받았네요(웃음). 뮤지컬 ‘캣츠’를 할 때도 집이 ‘은행에 들어갔다 나왔다’ 했죠. 10년 사이에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손뼉을 짝! 치며 웃는 그녀. 윤복희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늘 한자리에서 공연을 해왔다. 현재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뮤지컬 작업하고 있다. “한눈에 뮤지컬계가 변하고 있는 걸 느껴요. 요즘 대우도 많이 달라졌어요. 이래도 되는 건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말이죠. 무엇보다 후배들이 즐겁게 공연하는 것에 감사하고 있어요.” 그녀는 명실상부 ‘뮤지컬계의 대모’다. 그녀의 60번째 생일이던 지난해는 후배 1백여 명이 모여 깜짝 환갑 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60세가 넘은 나이에도 무대 위 카리스마와 실험 정신은 후배들에게 늘 자극제가 되고 있다. 지치지 않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녀는 국내 최초로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다. 미니스커트는 평생 그녀를 따라다니는 키워드. 그녀는 미국 귀국길에서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김포공항 트랩을 내려왔다. 그 모습은 사회적 논란을 일으킬 정도로 충격이었다. 젊은 여성들 사이에 선풍을 일으켰다. 그녀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오빠의 기분은 당시 어땠을까? “먼저 부러웠죠. 유명세를 누리고 싶은 가수로서 질투심도 있었습니다. ‘너만 미니스커트 입고 유명해지냐?’ 하면서 저는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죠(웃음). 한국 최초의 장발 가수였어요.” 개성 강한 동생으로 인해 많은 자극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하는 윤항기. 윤복희는 동생 이전에 인생의 라이벌이자 좋은 스승이고 대선배란다.
| 화장하지 않은 그녀의 맑은 눈동자 속에는 외관을 초월한 순수한 예술인의 이미지가 엿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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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보이는 바와 같아요. 자신에게조차 타협을 하지 않는 강한 성격이죠. 대통령이 와도 못 말릴 겁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말릴 수 있어요. 어릴 때는 싸우기도 많이 싸웠어요. 오빠 말을 전혀 안 듣던 동생이라(웃음).” 옆에 있던 윤복희는 크게 손사래를 치며 부정한다. “아니에요. 전 개성도 없고 카리스마도 없어요. 아마 여러분보다 더 평범한 사람일 거예요. 그저 집에서 찌개 끓이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지내요. 요즘도 버스를 타고 다녀요. 무슨 카리스마는~.” 윤복희는 취재진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갑자기 스타가 된 것 같다’며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죠. 정을 모른 채 부모님을 일찍 떠나보낸 것” 아버지는 어린 윤복희를 무대에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무대에 세워줄 때까지 계속 울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량이 큰 그녀가 소리 높여 울어대니 허락 않을 수 없었다. “제가 무대에 안 세워주면 자살하겠다고 했어요. 사람들이 날 바라보는 시선이 좋았던 것 같아요. 지금도 작지만 그때는 더 작았을 테죠. 조그만 아이가 어른 흉내를 내며 노래 부르는데 쳐다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즐겼던 거예요.” 그러나 그녀는 어린 시절이 불행했다고 회고한다. 부모님 생전에 짧은 시간마저도 함께했던 때가 드물었다. 부부 모두 유랑극단처럼 전국을 돌며 공연했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후에는 남기고 간 재산도 없었다. 윤항기 역시 노래를 부르는 것이 꿈이었다. ‘그 피가 어디 가겠냐’는 그의 말이다. 그러나 윤복희는 오빠의 음악을 한사코 반대했다. “제가 소녀가장으로 고생할지언정 오빠만큼은 연예계로 들어오지 않았으면 했어요. 부모님의 뜻이기도 했구요. 미8군에 다닐 때도 오빠가 공연장에 놀러 온다고 하면 못 오게 했어요.”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어린 윤복희는 동두천에 있는 미군부대에 공연을 갔다가 아침 첫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1시간 정도 자고 곧 교복으로 갈아입고 도시락 챙겨서 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오후에는 또 다른 공연을 위해 조퇴를 했다. 학교에서는 수업시간 부족으로 퇴학당할 위기를 느껴야 했고 몸은 늘 고단했다.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슬픈 기억이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부모의 정을 몰라 다행이라고 말한다. “전 부모의 정을 몰라요. 오히려 다행이죠. 오로지 노래 부르고 일을 해야 했어요. 그렇지만 오빠는 부모님의 죽음에 매우 외로워했죠. 제가 그런 오빠를 혼자 두고 미국에 가버리다니. 전 항상 오빠에게 미안했어요.” 대신 가난과 불행은 남매간의 우애를 더욱 돈독하게 했다. 두 사람이 함께 서는 이번 무대는 의미가 깊다. 윤복희는 부모님께 받지 못한 사랑을 팬 여러분께 받았다며 소감을 밝힌다. “돈과 명예를 위해서였다면 오빠에게 함께하자고 권하지 않았을 거예요. 음악회의 제목은 ‘여러분’입니다. 즉, 저를 봐주셨던 많은 분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려 해요.” 윤항기 역시 동생과 함께 하는 무대가 마음 설렌다. “30년 만에 함께 무대에 서게 됐군요. 단둘이 음악회를 여는 것은 생애 처음입니다. 물론 부활절 기념 음악회지만 신앙인뿐만 아니라 모두 즐기는 무대로 만들겠습니다.” 윤복희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항상 파격을 꿈꿨던 그녀에게 ‘생애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은 언제였는지 돌발질문을 했다. 그녀는 생각할 틈도 없이 ‘지금’이라고 말했다. “팬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 거의 처음이라 떨립니다. 그리고 제가 또 언제 이런 좋은 자리를 기약할 수 있을까요? 공연을 생각하면 마음이 설레고 바빠집니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팬들에게 감사의 말을 되풀이한다. “굉장히… 굉장히… 감사해서 말로 표현이 안 되네요. 제가 말을 잘 못하긴 해요(웃음). 무척 행복합니다.” 부드러운 미소로 동생을 바라보던 윤항기 역시 인생에 가장 큰 목표를 제시했던 ‘특별한 여동생’과 함께 오르는 무대에 대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마 복희가 없었으면 저는 윤항기라는 가수도 못 됐을 거고 목사도 안 됐을 겁니다.” 서로 의지하며 한 방향으로 손잡고 걸어가는 남매는 더없이 편안해 보인다. 윤항기·윤복희 남매는 혼란한 한국 사회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역경에 좌절하지 않고 한결같이 사랑하고 노래하고 기도해왔다. 한국 대중문화의 산증인인 두 사람이 반세기를 정리하는 무대에 서게 된다. ‘기립박수를 칠 준비는 되어 있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성원
[커버스토리]임권택 영화 ‘롱 테이크’명장면3
임권택 영화의 호흡은 유장(悠長)하다. 뒷짐을 지고 바라보는 듯 넉넉한 마음이 화면에 배어나고, 한국의 산하와 카메라는 하나가 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임감독의 영화에 빈번하게 사용되는 기법 중 하나가 ‘롱 테이크(long take)’다. 쇼트와 쇼트를 짧게 이어붙이는 대신, 카메라를 멈추지 않고 긴 시간 동안 이어가는 촬영 방식이다. 적절한 곳에서 적절한 시간 동안 지속된 롱 테이크는 속도전에 물든 현대 사회에 대한 노장의 묵직한 반론이다.
◇서편제의 진도아리랑임권택의 100편의 영화 중에서도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장면이기도 하다.
직전 장면에서 술에 취해 숙소인 여관방에 들어온 유봉은 동호에게 북치는 방법을 엄하게 가르친다. 옆방에 머물던 약장수 부부는 한밤의 소란에 짜증을 내고, 소리꾼 가족과 약장수는 이 길로 헤어진다.
이제 유명한 진도아리랑 장면이 시작된다. 소리꾼 가족이 한국 시골 특유의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걸으며 노래한다. ‘사람이 살면 몇 백년 사나/개똥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라고 건네면 ‘소리따라 흐르는 떠돌이 인생/첩첩이 쌓인 한을 풀어나 보세’라고 받는다.
노래의 가사에 소리꾼 가족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유봉과 소원하던 동호도 어느새 등에 지고 있던 북을 앞으로 고쳐매고 장단을 맞춘다. 흥은 고조되고, 셋은 가볍게 춤을 춘다. 인물들이 화면 오른쪽으로 빠져나간 뒤에도 소리는 10여초간 지속된다. 화면에는 가벼운 모래 바람이 일어 인적을 청소한다.
진도아리랑 장면의 시골길은 소리꾼 가족의 잃어버린 이상향이다. 이제 악극단에 밀린 가족에겐 질곡의 삶만이 남아있다. 북이 소리가 가는 길을 미리 닦아주듯이, 카메라도 가족의 마지막 즐거운 한때를 위해 멍석을 깔아준다. 카메라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듯 5분 10초가량을 가만히 서있지만, 역동적인 에너지가 화면 바깥으로 넘쳐나온다.
소리의 흥겨움, 동작의 즐거움, 감정의 흥겨움이 어울렸기 때문이다.
◇춘향뎐의 옥중 재회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춘향전의 내용을 알고 있다. 이야기 내용이 뻔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느냐가 관건이다. 임권택은 암행어사로 임명됐으나 신분을 숨기고 있는 몽룡과 옥에 갇힌 춘향이 만나는 장면을 3분여의 롱 테이크로 촬영했다. 뇌물을 받은 간수가 앞장서면, 월매, 향단, 몽룡 일행이 뒤를 따른다. 안쪽 간수가 문을 열면서 좁은 감옥 공간의 롱 테이크가 시작된다. 카메라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어 월매가 싸온 음식을 살피는 간수를 보여줬다가 월매의 뒤를 따라 감옥 쪽으로 이동한다. 월매는 애타게 딸의 이름을 부르지만, 어두컴컴한 옥 속의 춘향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월매가 곧 목숨을 잃을 딸과의 짧은 해후를 마치고 뒤로 빠지면 그 자리에 몽룡이 다가선다. 월매가 향단에게 “불을 밝히라”고 말하자 등불이 화면 왼편에 들어온다. 이제 춘향의 초췌한 얼굴이 제대로 나타난다. 등불은 몽룡의 마음처럼 움직인다. 오랜만에 재회하는 연인의 얼굴을 밝히기 위해 다가섰다가, 남녀가 만나는 공간을 내주기 위해 뒤로 빠진다. “선산 맡에 묻어달라”는 춘향의 유언 뒤, 일행은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감옥을 나온다.
몽룡은 죽음을 눈앞에 둔 연인 앞에서 진실을 말할 수 없다. 다음날이면 변학도의 생일 잔치와 암행어사 출두가 벌어진다. 옥중 재회는 폭풍 전야다. 인물들이 내면의 감정을 숨기는 만큼, 내일의 격동은 더욱 거세다. 제자 김대승 감독은 “여러 인물의 감정이 한 커트에서 드러나는 임감독의 기법을 ‘번지 점프를 하다’와 ‘가을로’의 만남과 헤어짐 장면에서 적용했다”고 말했다.
◇태백산맥의 김범우와 서점주인의 대화조정래의 대하소설을 원작으로 한 ‘태백산맥’. 기대만큼의 흥행, 비평적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이 영화에도 눈여겨볼 만한 롱 테이크 장면이 있다. 벌교를 장악한 우익 토벌대장은 빨갱이를 잡는다는 이유로 온갖 전횡을 일삼는다. 참다못한 민족주의자 김범일 등 지역 지식인들은 토벌대장을 기생집에 불러 “너무 심하게 밀어붙이면 민심이 돌아선다”며 달래지만, 오히려 토벌대장의 화만 돋우고 만다.
김범일과 중학교 교장이 씁쓸한 마음으로 밤거리를 거닐면서 롱 테이크가 시작된다. 교장은 “토벌대장이 하는 빨갱이라는 말은 정말 증오와 살기를 품고 있더군요. 그 말 한 마디에 사람 목숨이 오고가는 위태로움을 느꼈어요”라고 말한다. 교장과 헤어진 김범일이 집으로 돌아가려 하자, 서점의 여직원이 원하시던 책을 구했다며 불러세운다. 직원이 책을 포장하는 사이 서점 주인은 토벌대장과의 대화 결과를 묻는다. 김범일이 어색한 웃음으로 대화를 마무리하면서 1분 50여초의 롱 테이크가 끝난다. 이 장면은 임권택의 롱 테이크 중에서도 대사에 의존해 다소 설명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교장의 대사는 ‘빨갱이’라는 어휘에 담긴 증오의 무게를 말해준다. 잊을 만하면 터져나오는 정치권의 색깔 논쟁은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이 ‘태백산맥’ 속 벌교의 상황과 그리 멀지 않음을 증명한다. 좌우의 틈바구니에 낀 중도 지식인 김범일은 이어지는 장면에서 빨갱이로 몰려 멸공단 청년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기도 한다. 스산한 벌교의 거리를 홀로 걷는 무기력한 지식인의 모습은 오늘의 시대상을 꽤 정확히 함축하고 있다.
〈백승찬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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