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중가요사

소양강 처녀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3. 3. 19. 19:17

36년만에 고향 돌아온 ‘소양강 처녀’ 윤기순씨

경향신문 | 입력 2006.08.10 21:02

국민 애창곡 '소양강 처녀'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윤기순씨(55)가 고향 춘천에 정착했다. 노랫말처럼 '열여덟 딸기 같던' 나이에 고향을 떠나 '슬피울던 두견새처럼' 밤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36년간의 한많은 타향살이를 끝내고 숱한 고생끝에 지난 6월 고향 근처인 사북면 지암리 집다리골에 '풍전가든'이란 음식점을 차렸다. 평상 20개를 놓고 닭백숙도 팔고 민박도 하는 민박집 주인이 된 그는 처음엔 인터뷰를 고사했다.

-18세때 가수 꿈 안고 서울 상경…가요작가 동지회 사무실 취직-

'소양강 처녀 노랫말의 주인공 36년만의 귀향'(경향신문 7월14일자 11면) 보도 이후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갑자기 쏟아진 세간의 관심도 부담스러웠다며 몸을 사렸다. 그러나 거듭된 요청에 마침내 가슴속 깊이 눌러놨던 눈물젖은 인생 이야기를 한 올 한 올 꺼냈다.

"6·25때 오른쪽 다리를 잃은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불구의 몸으로도 일손을 놓지 않았어요. 머리가 커가면서 어떻게든 아버지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죠. 처음부터 가수가 될 작정은 아니었거든요. 그저 돈 많이 벌어서 동생들 학비나 댈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경춘선 열차를 타고 고향을 떠난 것이 1969년 열여덟살 때였다. 7남매(2남5녀)의 맏딸로서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중압감이 컸다. 서울에 도착한 직후 찾아간 곳이 교환원을 양성하는 통신학원. 하지만 전화 교환원 월급으로 가족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기 위해 한달 만에 통신학원을 그만뒀다.

"가수가 되면 좋아하는 노래도 할 수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무작정 찾아간 곳이 김종한 작곡사무실. 김씨는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 반야월 선생이 소속돼 있는 서울 가요작가 동지회 사무실을 소개해줬다. 거기서 전화도 받고, 심부름도 하고, 노래도 배웠다.

'소양강 처녀'란 노래는 우연히 만들어졌다. 소양강에서 민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가던 아버지가 자신의 딸을 돌봐주는 '음악가님'에게 매운탕이라도 대접하겠다며 고향으로 초청했다. 반야월 선생을 비롯, 원로가수 몇명이 소양강을 찾았고 아버지와 함께 솥단지와 장작을 배에 싣고 상중도에 들어갔다.

"물고기를 잡아 어죽을 끓여 먹으며 섬에서 한나절을 보낸뒤 천렵을 마치고 돌아올 무렵이었어요. 옅은 물안개가 끼고 소나기가 쏟아졌거든요. 아마 이때 펼쳐진 인상적인 풍경을 보고 시상이 떠올라 '소양강 처녀' 노랫말을 쓰신 것 같아요."

이듬해 가수 김태희씨가 반야월 선생이 만든 '소양강 처녀'를 불러 히트를 쳤고 이후 한서경씨가 리메이크하면서 국민 애창곡으로 자리잡았다. 정작 노랫말의 모델이 됐던 윤씨는 20여년간 '소양강 처녀'의 탄생 유래조차 알지 못했다. 90년대 중반 반야월 선생이 TV의 '전국 노래자랑' 프로그램에 나와 소양강 천렵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뒤늦게 노랫말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란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윤씨도 정식으로 음반을 냈던 가수였다. 70년 신곡을 냈지만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아버지가 어렵사리 장만했던 동네슈퍼는 물난리로 모두 떠내려가 가족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졌다. 그때 윤씨에게 '돈이 보이는 곳'은 딱 하나, 밤무대였다.

야간업소에서 받았던 급료는 3만~4만원. 일반 직장의 여사원 월급이 7,000~1만원대였으니 적은 돈은 아니었다. 라면 하나로 하루를 때우는 경우도 많았고 월셋방에서 1시간 거리인 무교동 야간업소에도 항상 걸어서 다녔다. 처음엔 서울에서 시작했지만 침식이 제공되는 대전, 대구, 광주 등 각 지역 업소를 6개월 단위로 옮겨다녔다. 무명가수는 단순히 노래만 잘 부른다고 살아남을 수 없었다.

무용단과 함께 장구도 쳐야 했고, 민요도 많이 불렀다. 춤, 노래를 모두 갖춘 '패키지'를 잘 해야 살아남는다. 군민잔치, 면민의 날 행사장도 꼬박꼬박 찾아다녔다. 그게 다 부수입이었으니까.

그런데 자신을 너무 혹사한 것이 화근이었다. 성대를 혹사하다 보니 목이 상했다. 28살과 33살때 성대결절 수술을 받았다.

-소양강 찾은 반야월 선생 만나…30년간 밤무대 가수로 떠돌아-

그래도 악착같이 노래부르고 돈을 모아 85년엔 아버지에게 젖소 10마리를 사드렸다. 아버지는 젖소를 20마리까지 늘리며 한때 부농의 꿈을 키워 갔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였다. 우유파동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아버지의 꿈도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땐 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동생들이 부쳐온 편지를 다시 꺼내 읽으며 이를 악물었어요. 떠돌이 가수 생활도 쉽게 접을 수 없었죠."

그는 5년전 사랑하던 아버지(당시 75세)가 암으로 타계하자 한동안 허탈감에 빠졌다.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교포들이 자주 다니던 야간업소에서 장구춤을 추며 민요를 불렀다.

하지만 윤씨는 홀로 된 어머니(72)가 걱정됐다. 지난 3월 귀국한 뒤 서울의 짐을 챙겨 한달 후 고향 춘천으로 내려왔다. 6월엔 모아둔 돈을 모두 털어 사북면 지암리 계곡변에 음식점을 하나 차리고 7월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비록 장사 수완은 없지만 힘겨웠던 지난날을 잘 견뎌온 만큼 윤씨는 앞으로도 잘 해낼 것이라고 다짐했다.

-저축한 돈으로 음식점 차려…어머니와 찜질방 갈수있어 행복-

"그 흔한 바캉스 한번 제대로 못갔지만 이젠 가끔 어머니를 모시고 찜질방이라도 찾을 수 있으니 차라리 행복하죠. 그나저나 지금하고 있는 식당이라도 잘 돼서 지역 명소가 되는 게 마지막 꿈이라면 꿈이죠."

인터뷰가 끝날 무렵 예약한 손님 일행이 찾아오자 윤씨는 손님을 맞으러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윤씨는 "험한 세월도 추억이 됐고 쓰디 쓴 기억도 약이 됐다"면서 "그래도 후회없이 살았다"고 말했다.

〈춘천|최승현기자 cshdmz@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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