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중가요사

한국대중음악사 자료-걸그룹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5. 12. 3. 11:13

저고리 시스터에서 소녀시대까지…걸 그룹 연대기

  • 조선닷컴 인포그래픽스팀
  • 대중음악계의 맹주로 떠오른 걸 그룹은 친근한 가사와 화려한 안무로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 잡고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남성들의 로망이었으며 2000년대 중반부터 한류와 K-Pop열풍으로 국내는 물론이고 아시아를 넘어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어 걸 그룹의 존재가치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 1950년대 등장해 공식적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그룹이라 할 수 있는 '김시스터즈'. 짧은 치마에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는 그들의 옛 사진을 보고 있으면 지금은 촌스러워 보여도 당시에는 얼마나 파격적인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미국까지 진출해 인기를 끌었다는 그들에게는 '지금 한류의 시초'라는 설명의 글이 붙어 있다. ▶ 기사 더 자세히 보기

    입력 : 2012.06.08 09:17

    국내 최초 걸그룹은 1939년 ‘저고리 시스터즈’

    기사입력 2015.08.18 오전 11:03
    이난영·박향림씨 등 ‘저고리 시스터즈’로 활약
    안정식·이희철·송영택씨 미국서 첫 음원녹음
    최초 창작가요는 1929년 이정숙의 ‘낙화유수’
    첫 창작 록 앨범은 신중현 작곡 ‘비속의 여인’



    이제는 한류라는 말이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가수들이 해외 무대에서 활동 중이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이, K팝의 저변 확대는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이 아니다. 한국의 아이돌 음악은 여전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향력 내에 있고, 발라드에선 아직까지 유재하를 넘어서는 문법이 등장하지 않았다. 한국 대중음악의 양 축인 발라드와 댄스 뮤직의 원류를 따라가다 보면 조용필 1집 LP의 A면 첫 곡 ‘창밖의 여자’와 B면 첫 곡 ‘단발머리’를 만나게 된다. 록을 이야기할 때에는 그 누구도 신중현이란 거목을 비껴나갈 수 없다. 이렇게 뿌리를 아는 것은 현재를 제대로 이해하는 시작인 셈이다. 한국대중음악박물관의 전시물들을 바탕으로 한국 대중음악사의 각종 ‘최초’들을 돌아본다.


    ▶한민족 최초의 음원은 119년 전 미국서 녹음=한민족 최초의 음원을 녹음한 주인공은 구한말 미국 유학생이었던 안정식, 이희철, 송영택이다.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하워드대학에 입학한 이들은 1896년 7월24일 인류학자 앨리스 플레처(Alice Fletcher)와 함께 ‘달아 달아’ ‘매화타령’ ‘아리랑’ 등 11곡을 녹음했다. 이들은 미국 하워드대학교에 입학한 첫 한민족이기도 하다. 당시엔 아직 유성기 원반도 없던 시절이라 이들의 목소리는 6개의 실린더(에디슨 원통형 음반)에 담겼다. 미국 의회도서관에 보관돼 있던 이들의 목소리는 녹음 후 100여년이 훌쩍 지난 2007년 국내에 음반으로 발매돼 빛을 봤다.

    ▶최초 창작 가요는 이정숙의 ‘낙화유수’=한국 최초의 대중가요로 꼽히는 곡은 1926년에 발표된 윤심덕(1897~1926)의 ‘사의 찬미’이다. 그러나 이곡은 루마니아의 작곡가 요시프 이바노비치(Iosif Ivanovich)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Donauwellen Walzer)’의 선율에 한국어 가사를 붙인 번안곡이다. 공식적인 결론은 아니지만 지난 1929년 음반으로 발매된 이정숙의 ‘낙화유수’를 한국인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로 보는 의견이 많다. 이 곡은 지난 1927년 단성사에서 개봉한 이구영 감독의 동명 무성영화의 주제가이기도 하다. 당시는 무성영화시대여서 이정숙은 영화 상영시간 동안 악단의 연주에 맞춰 극장의 꼭대기에서 노래를 부른 것으로 전해진다.

    ▶최초의 직업 가수는 채규엽=채규엽(1906~1949)은 한국 최초의 직업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로 꼽힌다. 일본으로 유학해 동경의 중앙 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한 그는 한국 최초의 학사 가수이기도 하다. 채규엽은 지난 1930년 콜롬비아레코드를 통해 ‘유랑인의 노래’와 ‘봄노래를 부르자’로 데뷔했다. ‘유랑인의 노래’는 그가 직접 작사ㆍ작곡한 곡이다. 이후 그는 1932년 일본이 작곡가 고가 마사오(古賀政男)의 곡 ‘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를 우리말로 취입해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했다. 1935년 월간지 ‘삼천리’가 실시한 인기투표에서 그는 남자 가수 부문 1위를 차지한 바 있을 정도로 당대에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최초의 걸그룹은 ‘저고리 시스터즈’=국내 최초의 걸그룹은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저고리 시스터즈’로 추정된다. ‘저고리 시스터즈’의 흔적은 1939년 일본 동경군인회관에서 열린 조선악극단 일본 공연 전단지에서 최초로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도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유명한 가수 김정구와 함께 무대에 올랐던 이들의 일본 공연 사진과 잡지 기사 등에도 이들의 활동 당시 흔적이 남아 있다.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가수 이난영과 ‘오빠는 풍각쟁이야’의 박향림 등 당대 최고 여성 가수들이 ‘저고리 시스터즈’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지난 2013년 ‘저고리 시스터즈’를 소재로 만든 창작 뮤지컬 ‘저고리 시스터즈’가 제작되기도 했다.

    ▶최초의 한류 스타는 걸그룹 김시스터즈=최초의 한류 스타는 지난 1959년 미국으로 진출해 성공을 거둔 걸그룹 김시스터즈이다. 김시스터즈는 ‘저고리 시스터즈’로 활동했던 이난영과 김해송 작곡가의 두 딸(숙자ㆍ애자)과 이난영의 오빠인 이봉룡 작곡가의 딸(민자)로 구성됐다. 한국 걸그룹의 역사는 이렇게 유구하다. 다양한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노래와 함께 춤까지 선보였던 김시스터즈는 1959년 아시아 걸그룹 사상 최초로 미국에 진출해 큰 성공을 거뒀다. 김시스터즈는 지난 1967년 미국에서 50만 달러를 세금으로 납부했을 정도로 라스베이거스에서 유명한 고액 납세자였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600달러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최초의 창작 록 앨범은 에드훠 ‘비속의 여인’=에드훠(Add4)는 ‘한국 록의 살아 있는 전설’ 신중현이 서정길(리드보컬), 한영현(베이스), 권순권(드럼) 등과 함께 지난 1962년 결성한 밴드이다. 에드훠는 지난 1964년 12월 첫 앨범 ‘비속의 여인’을 내놓았다. 이 앨범에는 ‘커피 한 잔’ ‘비속의 여인’ 등 불후의 명곡이 다수 실려 있다. 이에 앞서 같은 해 7월 키보이스가 한국 최초의 그룹사운드 앨범 ‘그녀 입술은 달콤해’를 선보였다. 그러나 이 앨범은 ‘정든 배는 떠난다’ 등 일부 곡들을 제외하면, 수록곡 대부분을 외국곡을 번안해 만들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에드훠와 키보이스가 동시에 등장한 1964년은 한국 그룹사운드의 원년으로 평가된다.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인터뷰] 미미시스터즈·바버렛츠 "김시스터즈, 여성그룹의 뿌리"

    기사입력 2015.08.02 오전 8:27
    최종수정 2015.08.02 오전 8:30
    미미시스터즈·바버렛츠 '기쁘다, 민자 언니 오셨네' 포스터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최근 영화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감독 조지 밀러)는 페미니즘 해석으로 화제가 됐다. 핵전쟁으로 거의 멸망해 남성들은 물과 기름을 구하기 위한 폭력만 일삼는 22세기에 다양한 캐릭터의 여성들은 자유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공동체를 결성한다. 젊고 예쁜 여성뿐만 아니라 할머니들도 싸움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여성 듀오 '미미 시스터즈'(큰 미미·작은 미미)와 보컬그룹 '바버렛츠'(안신애·김은혜·박소희)가 최근 구상하는 일은 '홍대 판 매드맥스'로 이름 붙일 만하다. 

    수많은 아이돌 걸그룹이 득세하지만, 여전히 '여성' 그룹으로 살아가기 힘든 것이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신이다. 16일 오후 7시 서울 홍대 앞 곱창전골에서 펼치는 '미미시스터즈 & 바버렛츠 헌정 콘서트 - 기쁘다, 민자 언니 오셨네'는 두 팀이 여성그룹으로 잘 살아가고자 본격적으로 고민하는 신호탄이다. 

    1950년대 활약하며 '한국 최초의 걸그룹'으로 통하는 '김시스터즈'의 멤버 김민자의 방한을 기념한 헌정 공연 무대다. 김시스터즈는 1950년대 미 8군 무대와 극장 무대에서 인기를 끌었던 원조 걸그룹이다. 이들은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과 김해송이 두 딸들(김숙자·김애자)와 이난영의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의 딸(이민자)로 구성됐다. 

    1959년 아시아 걸그룹으론 처음으로 60년대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진출해 인기그룹으로 자리매김했다. 6·25 동란으로 상처받은 국민의 마음에 위안이 됨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자랑거리가 됐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을 뿐 아니라 악기도 자유자재로 다뤘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머물고 있는 김시스터즈 출신 김민자는 '제11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13~18일)에 김시스터즈를 다룬 영화 '다방의 푸른 꿈'(감독 김대현)이 개막작으로 선정되면서 방한한다. 재즈 드럼 연주자인 남편과 함께 내한, 두 사람은 함께 무대에도 오른다. 

    미미시스터즈와 바버렛츠는 요즘 활동하는 여성 그룹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과거 시스터즈의 역사적 맥락을 이어 활동하고 있는 대표적인 그룹이다. 

    인디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에서 코러스와 안무를 담당하며 가요계에 발을 들인 미미시스터즈는 과거 '○○시스터즈'로 대변되는 여성 뮤지션들의 계보를 잇고자 결성됐다. 그간 발표한 2장의 정규와 자신들이 극작을 맡고 출연까지 하며 걸그룹의 뿌리를 찾고자 한 음악극 '시스터즈를 찾아서'로 본래 의도를 충실히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음악은 1950~70년대를 풍미한 '펄시스터즈'와 '바니걸스' '숙자매' 등을 연상케 한다. 1960년대 초 유행한 서핑 사운드부터 당시의 사이키델릭한 정서, 1970년대 솔 사운드, 1990년대 그런지·펑크까지를 두루 소화한다. 

    바버렛츠는 1950~60년대 사운드와 옛 가요를 그녀들만의 화음으로 새롭게 풀어내고 있는 팀이다. '시간여행 걸그룹'이라는 별칭답게 김시스터즈, 미국의 보컬그룹 '앤드루 시스터즈' 등 당시의 사운드를 자신들이 만든 곡으로 옮겨낸다. 

    미미시스터즈, 듀오

    이난영이 멤버로 있던 '저고리 시스터'를 필두로 시작된 한국 여성그룹의 역사는 김시스터즈로 획을 긋고 'SES'·'핑클'을 거쳐 지금의 '소녀시대'·'원더걸스'·'투애니원(2NE1)' 등 K팝 한류 걸그룹으로 이어졌다. 그 가운데서 독특한 좌표를 차지하고 있는 미미시스터즈와 바버렛츠를 그들이 활동하는 기반인 홍대에서 최근 만났다. 

    개성과 끼가 넘치는 팀들이라 인터뷰 내내 즐거웠지만, 여성그룹으로 살아가는, 조금 더 깊은 이야기가 나올 때는 진심이 느껴져 노래 못지않은 울림이 전해졌다. 그것은 결국 음악에 대한 열정이었다. 이 부분이 반짝일 때 여느 아이돌 걸그룹 멤버들보다 양 팀의 다섯 멤버가 예뻐 보였다. 

    -당연히 친할 것 같은 두 팀인데, 어떻게 뭉쳐서 이번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나요?

    "선생님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2, 3주 전에 급히 계획했죠. 바버렛츠를 섭외하고 작은 미미가 바로 포스터를 만들었어요. 김민자 선생님을 정말로 뵙고 싶었는데 그 꿈이 실현된다고 하니 지금은 얼떨떨해요. 저희에게는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라 빨리빨리 준비했죠."(큰 미미)

    "큰 미미 언니가 추진력, 기획력이 참 좋아요. 깜짝 놀랐어요."

    "(미국 진출 당시) '애드 설리번 쇼'에 출연한 김시스터즈 영상을 봤었는데 더 충격인 건 그중 두 분이 살아 있다는 거였어요. 저희와 동시대를 살고 계신다는 것이 믿기지 않은 거죠. 저희 음악극 '시스터즈를 찾아서'도 그랬지만 제가 한번 '덕질'(마니아(덕후)가 팬으로서 하는 활동)에 빠지면 끝까지 가거든요. 한국 여성그룹에 빠진 뒤 윤복희 선생님께 전화 드리고, 펄시스터즈, 바니걸스 선생님들 연락처를 찾고…. 마치 '서칭 포 슈가맨'(두 장의 앨범만 남기고 사라져버린 신비의 가수를 찾는 여정을 그린 영화) 같았죠(웃음). 제일 어려웠던 건 부다페스트와 LA에 사시는 김시스터즈 멤버분들이었어요. 근데 그러다 김민자 선생님이 아직 노래를 하신다는 걸 알았고 남편분, 아들과 함께 가족 앨범을 낸 사실도 알게 됐죠."(작은 미미)

    -바버렛츠는 미미시스터즈에게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어땠나요?

    "함께 하기 쉬웠죠. 무엇인가 계획할 때 믿음이 굳게 가는 언니들이라서요. 김민자 선생님에 대해서는 원래 알고 있었죠. '제천 국제 음악 영화제' 무대에도 함께 올라요. 제천 말고 함께 설 무대가 뭐가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언니들이 먼저 연락을 주셔서 감사했죠."(안신애)

    -김민자 선생님, 즉 김시스터즈가 여러분들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세대 차이도 꽤 나는데요.

    "힘든 시기에 이난영 선생님이 고복수 선생님 고별 콘서트에서 '목포의 눈물' 부르는 영상 클립을 본 뒤 펑펑 눈물을 흘린 적이 있어요. 약 2년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워크숍 참가했을 때였는데 그분의 인생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거예요. 여성 뮤지션으로 삶에 대해 공감이 든 거죠. 대단한 삶을 사셨지만, 비운의 삶으로 마감을 한 이야기를 듣고 '여성 뮤지션으로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은 뒤 그녀의 딸들이 '애드 설리번 쇼'에 나와 노래 부르는 것이 너무 슬면서도 기쁘고 위로가 되는 거예요."(큰 미미)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과 헤어지고 나서 발표한) 정규 1집 이후 한참 바닥을 기고 있었을 때 '시스터즈를 찾아서'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때 기대고 싶었던 대상을 찾았던 것 같아요. 짧은 활동 기간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는데 곧 잊힐 수 있겠다는 두려움을 느꼈죠. 그럴 때 김시스터즈에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민자 선생님을 뵙는 것이 감사하죠."(작은 미미)

    바버렛츠, 보컬그룹

    "사실 저희 또래에 저희처럼 음악을 하는 팀에게 참조할 팀이 없어요. 소녀시대처럼 아이돌 그룹 멤버가 되든지 솔로 가수로 나서든지 해야죠. 그런데 김시스터즈를 봤는데 '딱 이거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희에게 '이렇게 해봐'라고 알려주시는 것 같았죠. 저희가 종종 정체성이 애매할 때가 있거든요. 인디밴드도 아니고 걸그룹도 아니고 연예인도 아니고. 그럴 때 김시스터즈의 영상을 보면서 힘을 많이 얻었어요."(안신애)

    -나이가 어린(20대 중반) 은혜 씨와 소희 씨에게는 김시스터즈가 비교적 낯설 것 같은데요?

    "유튜브로 김시스터즈 선생님들이 나오는 영상 클립을 봤는데 비브라폰 연주하셨다가 콘트라베이스 연주하셨다가 함께 노래 부르시는 모습이 처음에는 가짜처럼 느껴졌어요. 서커스 같은 느낌도 들고, 흑백이라 영화 같기도 하고. 사실 저희가 기억하는 옛날 걸그룹은 SES가 전부이거든요. 이런 대단한 팀이 있었구나 놀라면서 배우고 있어요."(김은혜)

    "개인적으로 '묵상'하고 있어요. 저는 바버렛츠를 하면서 예전 음악들을 접하고 공부를 한 케이스라서요. 김시스터즈 선생님들은 마치 교과서 같은 느낌을 주세요. 마치 위인을 만난 느낌이죠."(박소희)

    -바버렛츠는 외국 음악페스티벌에도 출연하고, 가서 공연할 때마다 주목받고 해서 아직 여성 그룹으로서 위기 등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다음 스텝이 중요한 때라서요. 계속 달려나갈 때의 고민도 있는 것 같아요. 저희 색깔을 찾아서 시작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계속 고민을 해야 할 때죠."(안신애)

    "바버렛츠야 워낙 잘하고 실력이 있는 팀이니까요."(큰 미미)

    "언니들 같은 분들이 선례가 돼서 저희가 열심히 좇아가고 있는 거죠.(웃음)"(안신애)

    -김시스터즈는 어떤 그룹인가요?

    "'시스터즈를 찾아서'를 하면서 여성 가수, 여성 그룹 연구를 많이 했어요. 바니걸스는 귀엽고 펄시스터즈는 섹시하고 김추자 선생님은 그분 자체가 장르죠. 숙자매, 희자매는 디스코 장르의 신나는 걸그룹이고요. 김시스터즈는 모든 걸그룹의 연결고리에요. 섹시함, 테크닉 등 모든 것의 집합체죠. 걸그룹의 뿌리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큰 미미)

    "영상 중에 세 분이 장구를 치고 가야금을 타면서 서양식 화음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있어요.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는데 아주 멋있고 잘하세요. 음악이 바뀌면 입고 있던 한복을 벗고 그 안에 입은 서양식 옷을 걸친 채 다른 노래를 부르시는데 당시 아시아인을 보는 오리엔탈리즘도 느껴지죠.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저희 역시 외국에 나갈 때 지원받는 이유 중 하나는 오리엔탈리즘이 묻어 있기 때문이죠. 앞으로 저희가 구경거리 이상의 뭔가를 전달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안신애)

    바버렛츠, 보컬그룹

    "근데 바버렛츠는 좀 더 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들이 하는 음악은 미국 사람들이 예전에 듣던 그 시대 음악이라서 향수를 자극할 수 있죠."(큰 미미)

    -다른 여성 뮤지션들도 이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을 것 같아요.

    "선우정아 씨가 SNS상에서 저희 공연 정보를 공유하고, 조원선 언니도 구경 오시겠다고 하셨죠. 양희은 선생님도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요."(큰 미미)

    -공연은 어떻게 꾸며집니까?

    "미미시스터즈 멤버 2명, 바버렛츠 멤버 3명에 밴드 멤버 4명까지 총 9명이 무대에 오르는데 다 여자예요. 저희끼리를 '미미여고'라고 부르고 있죠. 각 팀이 단독 무대를 꾸미고 협업무대도 꾸미고 해요. 김시스터즈의 음악을 메들리로 들려주고 펄시스터즈, 김추자 노래도 선보이죠. 김민자 선생님도 현장에 오실 거예요."(큰 미미)

    "그동안 다른 팀과 같이 곡을 부르기도 했지만 이렇게까지 협업하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센 이미지의 언니들이 알고 보면 누구보다 따듯한 분들이라는 것도 느끼고 참 좋죠. 무엇보다 시스터즈 '부흥회'하는 느낌이라 신나요."(김은혜)

    -이번 공연이 어떤 의미로 남았으면 해요?

    "한국 여성 뮤지션들이 더 뭉쳐서 자기 색깔을 분명히 내고, 용기를 얻는 자리였으면 해요"(안신애)

    "홍대 앞뿐 아니라 대중음악계 전체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좋아하는 투애니원(2NE1)을 비롯해서요. 음악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다 섞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효리 씨가 이상순 씨랑 연결되고 (인디 가수인) 김태춘 씨와 협업할지 누가 알았겠어요. 걸그룹(핑클) 멤버였는데 이제 뮤지션의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잖아요. 이번의 작은 움직임이 나중에 메이저 신과 인디 신의 끈을 맺어주는 고리가 됐으면 해요. 한국에서 여성뮤지션으로 살아간다는 공통분모가 있으니 기대를 해봅니다."(큰 미미)

    한편 이번 공연에서는 한국 걸그룹과 여성 뮤지션들의 음악의 흐름을 볼 수 있는 디제잉도 마련된다. 하세가와 요헤이, 정원용이 DJ로 나선다. 2만원. 

    realpaper7@newsis.com




    한국대중음악사 '산책' 아닌 '여정'

    기사입력 2015.10.04 오전 10:55
    최종수정 2015.10.04 오전 11:09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K팝' 이전에도 한국 대중음악은 꿈틀댔다. 과거가 쌓여서 현재가 된 것인데 최근 대중음악 통사(通史)가 등한시되는 경향을 띠는 것은 안타깝다. 

    김형찬 대중음악평론가가 펴낸 '한국대중음악사 산책'은 일제강점기 해방부터 1970년대 대중음악사까지 지형도를 집약적으로 그려낸다. 

    특히 1960~1970년대 대중음악 전체를 조망하는 지도가 눈에 띈다. 새로운 청년문화 세대의 등장과 그들이 즐긴 노래, 음악문화를 다루는데 통기타음악과 신중현사단이 커다란 축으로 설정된다. 조영남과 한대수는 전혀 다른 가수이며, 한대수와 김민기 역시 구분해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조영남은 TV 출연을 선점함으로써 통기타음악의 시대를 열어젖혔지만 창법 면에서 완연한 통기타음악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트윈폴리오와 한대수에서 통기타음악은 비로소 그 전형을 갖추게 된다고 설명한다. 

    김 평론가는 "비브라토 없이 깨끗하게 쭉 뻗는 목소리와 감정이 절제된 음색의 트윈폴리오가 통기타음악의 시작이라고 보며, 한대수가 창작과 자세 면에서 더욱 진일보한 통기타음악을 보여줬다"고 말한다. 그후 김민기에 이르러 창작 통기타음악의 꽃이 피어났다고 부연한다. 

    신중현은 록 음악과 솔 사이키의 대부다. 미8군 무대에서 활약한 기타리스트 신중현은 '미인'으로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넘어서는 최대의 히트를 기록했다. 동시에 새로운 사운드 트렌드의 최전선에 있었다. 펄시스터즈와 김추자의 곡들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히트 제조기'로서 한 시대도 풍미했다. 

    1970년대는 또 화려한 춤판과 환각적인 음악문화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김 평론가는 짚는다. 춤 역시 당시 음악문화의 주요 요소라는 것이다. 

    '미스 다이너마이트'로 통하던 이금희가 무대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노래를 부르는 '충격'에서 시작된 당시 춤의 여정은 김추자의 리드미컬한 춤사위, 그리고 여성 3인조 댄싱팀 '와일드캐츠'의 다양한 고고춤으로 이른다고 봤다. 그것이 나이트클럽과 고고장에서 대중화의 계기를 맞고, 1980~1990년대를 거쳐 오늘날의 한류 댄스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들이 주류로 부상하면서 청년세대의 음악문화는 절정에 달한다. 하지만 누구나 알듯 권력의 철퇴를 맞게 된다. 1970년대는 단속 릴레이의 시대였다. 

    1971년 7월26일 유흥업소 단속을 시작으로, 장발 단속(1971년 10월1일), 퇴폐 다방 단속(1972년 2월12일), 타락업소 일제 소탕령(1972년 2월18일), 고고음악과 고고춤 금지령(1972년 10월12일) 등이 내려졌다. 

    그리고 1975년 대마초 파동으로 근대화와 도시화라는 과제 아래 수십 년을 숨 가쁘게 달려온 한국대중음악은 크게 위축된다고 김 평론가는 짚는다. 

    500쪽이 훌쩍 넘는 이 책에는 무엇보다 당시 광고, 음반 재킷 등 사진 등의 자료가 방대하다. 당시의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화보집 등의 자료를 여러 해 동안 헤집으며 그러모은 것이다. '대중음악 역사서'로서 산책이 아닌 여정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 568쪽, 5만8000원, 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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