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얀 담배 연기’ 자욱한 술집에서 최백호의 ‘입영전야’를 고래고래 부르며 입영 전날을 보내던 풍경은 1980년대로 끝이 났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입영 노래도 세대교체가 일어난 것이다. 아마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군 입대와 관련된 대중가요를 한 편 꼽으라 하면 거의 예외 없이 이 노래를 꼽을 것이다.
“1.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던 날 /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 가슴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 풀 한 포기 친구 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 /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2. 친구들아 군대 가면 편지 꼭 해다오 / 그대들과 즐거웠던 날들을 잊지 않게 / 열차시간 다가올 때 두 손 잡던 뜨거움 / 기적 소리 멀어지면 작아지는 모습들 /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3. 짧게 잘린 내 머리가 처음에는 우습다가 /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굳어진다 마음까지 / 뒷동산에 올라서면 우리 마을 보일런지 / 나팔 소리 고요하게 밤하늘에 퍼지면 / 이등병의 편지 한 장 고이 접어 보내오”(전인권<사진>의 ‘이등병의 편지’, 1990, 김현성 작사·작곡)
가수를 김광석이 아니라 전인권으로 쓴 것이 다소 이상해 보이는가? 이 노래를 가장 먼저 취입한 사람은 전인권이며, 그 시기도 90년으로 매우 이르다. 이 노래는 김민기가 한겨레신문과 손잡고 주도한 ‘겨레의 노래’라는 사업에서 공모로 뽑힌 작품이었다. 상업적이어서 획일적인 대중가요와 또 다른 이유로 획일적인 투쟁적 데모 노래 양자와 모두 거리를 둔, 그야말로 겨레 모두가 부를 수 있는 좋은 노래를 모으고 찾아 공연과 음반 취입, 책자 발간 등을 하겠다는 큰 사업이었다. 김민기는 직접 옌볜 등지로 날아가 그곳에서 몇 편의 작품을 골라왔고, 월북으로 사라졌던 작곡가 김순남의 노래도 부활시켰다.
그리고 일반인이 지은 좋은 노래들을 공모해 꽤 여러 편을 선정했다. 이 노래도 그 과정에서 뽑혔고 90년 음반 ‘겨레의 노래’에 전인권의 목소리로 수록됐다. 노래를 지은 김현성은 파주에서 포크 그룹 ‘종이연’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윤도현도 그 멤버 중 하나였다. 윤도현의 히트곡으로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가을 우체국 앞에서’도 김현성의 작품이다. 이후 그는 진보적 노래운동과 발을 맞춘 언더그라운드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했다. ‘이등병의 편지’와 ‘가을 우체국 앞에서’ 두 곡을 보면 참 착한 심성을 깊은 곳에서 차분하게 드러내는 사람임을 느낄 수 있다.
확실히 ‘입영전야’와 비교해 보면 세상이 변했음을 실감한다. 일단 ‘나라 위해’ 같은 입에 발린 표현들이 없다. 대신 매우 당연하면서도 절절한 이야기들, 부모나 친구들과 떨어지는 섭섭함과 외로움이 강조돼 있다. 군대에서 경직돼갈 자신에 대한 두려움도 표현된다. 87년 6월 시민항쟁이 없었다면 합법 음반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표현들이다.
그러나 90년 이 훌륭한 노래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같은 해 더 막강한 노래 한 편이 군대 가는 젊은이들을 휘어잡았기 때문이다.
“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보여주긴 싫었어 / 손 흔드는 사람들 속에 그댈 남겨두긴 싫어 /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댄 나를 잊을까 / 기다리지 말라고 한 건 미안했기 때문이야 / 그곳의 생활들이 낯설고 힘들어 / 그대를 그리워하기 전에 잠들지도 모르지만 / 어느 날 그대 편질 받는다면 며칠 동안 나는 잠도 못 자겠지 / 이런 생각만으로 눈물 떨구네 내 손에 꼭 쥔 그대 사진 위로”(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 1990, 박주연 작사, 윤상 작곡)
‘사랑일 뿐야’를 불러 크게 히트한 꽃미남 발라드 가수 김민우의 후속 곡으로 데뷔 곡을 능가할 정도로 엄청나게 히트를 했다. 게다가 김민우는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입대하게 되었고, 마치 현빈의 해병대 입대 때처럼 김민우 팬들이 입영 날 모여들어 눈물을 흘렸다.
이 노래는 한 번만 딱 들어봐도 히트는 떼어놓은 당상이다 싶다. 발라드 작사의 귀재로 떠오른 박주연의 가사에 대중적이면서도 값싸 보이지 않는 윤상의 작곡이 어우러졌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입영열차 안의 짧은 한순간에 입영 전날 애인과의 안타까운 이별 장면부터 이제부터 펼쳐질 긴긴 그리움과 고통까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의 중요 장면들을 드라마틱하게 압축해낸 가사는 한창 달아오른 발라드 시대에 안타까운 스무 살 청춘들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노래에서는 ‘나라’니 ‘애국심’이니 하는 것이 깨끗하게 사라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부모와 친구조차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군 입대 이야기가 오로지 애인과의 긴 이별의 사건으로만 의미화돼 있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몇 년 후 발표된 이장우의 ‘훈련소 가는 길’로 이어진다.
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의 빅 히트로 ‘이등병의 편지’는 민중가요 수용자들에게만 기억되는 노래로 남았다. 대중적 인기로 보자면 완패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입영열차 안에서’의 인기는 지나갔고 ‘이등병의 편지’는 부활했다. 서태지와아이들이 몰고온 댄스뮤직 시대에 자칫 죽어버릴 것 같았던 포크를 소극장 공연으로 유지하며 이어간 김광석의 음반에 리메이크로 실린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노래를 기억하고 속으로 읊조리던 386세대들이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서 이 노래를 살려낸 것이 정점이었다.
휴전선 공동경비구역에서 남과 북의 젊은 군인들이 기묘한 우정을 나누는 이 기막힌 상황을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는 정서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내주었다. 송강호가 연기한 북한군 병사의 대사 “광석이는 왜 그렇게 빨리 죽었다냐?”는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명대사로 남았다. 남북의 젊은이들이 휴전선에서 이런 방식으로 만나야 하는 것에 대한 착잡함과 총부리를 겨누는 두 체제의 젊은이들이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깊은 공감을 나누고 있다는 반가움이 겹쳐지도록 한 절묘한 대사였다.
그러니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등병의 편지’가 20년이 넘도록 살아남을 줄 짐작이나 했던가.
고향이라는 말에서 도시와 다른 농어촌의 개발되지 않은 이미지를 실감으로 가지고 있는 세대는 아마 7080세대가 마지막일 것이다. 이 세대에는 코뚜레 꿴 소로 농사를 짓고, 고무신 들고 흙길을 뛰어다닌 기억, 혹은 집에 전깃불이 처음 들어온 놀라운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는 시골 출신들이 적잖이 있다. 이 아래 세대로 내려오면 전기는 물론 TV까지 다 보급되고 한겨울에 비닐하우스로 시설재배를 하며 농사짓는 시대를 경험한 세대로 바뀌게 된다. 이들 세대의 고향 이야기를 가장 다채롭고 풍부하게 형상화한 대중가요 작가는 단연 정태춘(사진)이다
고향이라는 말에서 도시와 다른 농어촌의 개발되지 않은 이미지를 실감으로 가지고 있는 세대는 아마 7080세대가 마지막일 것이다. 이 세대에는 코뚜레 꿴 소로 농사를 짓고, 고무신 들고 흙길을 뛰어다닌 기억, 혹은 집에 전깃불이 처음 들어온 놀라운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는 시골 출신들이 적잖이 있다. 이 아래 세대로 내려오면 전기는 물론 TV까지 다 보급되고 한겨울에 비닐하우스로 시설재배를 하며 농사짓는 시대를 경험한 세대로 바뀌게 된다.
이들 세대의 고향 이야기를 가장 다채롭고 풍부하게 형상화한 대중가요 작가는 단연 정태춘(사진)이다. 1970년대 청년문화의 포크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도시 청소년들이 주도했다. 그들은 도시 풍경을 세련되게 담아내는 데 주력했다. 그에 비해 78년 데뷔한 정태춘은 스무 살이 넘도록 농촌에서만 살아온 독특한 이력으로 포크 자작곡 가수 중 가장 향토적 감수성을 지녔다. 경기도 평택 농촌 마을에서 나고 자란 그는 황포돛배 휘날리는 50~60년대 포구부터 70년대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던 농촌까지를 모두 체험한 매우 드문 포크 작가다.
88년 발표된 ‘고향집 가세’는 70년대 농촌 고향집의 모습을 가장 탁월하게 그린 작품이다. 전체를 한꺼번에 감상해야 의미 있는 작품이라 다소 길지만 전문을 소개한다.
“1. 내 고향집 뒤뜰의 해바라기 울타리에 기대어 자고 / 담 너머 논둑길 황소마차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 음, 무너진 장독대 틈 사이로, 음, 난장이 채송화 피우려 / 음, 푸석한 슬레트 지붕 위로 햇살이 비쳐오겠지 / 에헤에헤야, 아침이 올 게야 에헤에헤야, 내 고향 집 가세
2. 내 고향 집 담 그늘의 호랭이꽃 기세등등하게 피어나고 / 따가운 햇살에 개흙마당 먼지만 폴폴 나고 / 음, 툇마루 아래 개도 잠이 들고, 음 뚝딱거리는 괘종시계만 / 음, 천천히 천천히 돌아갈 게야, 텅 빈 집도 아득하게 / 에헤에헤야, 가물어도 좋아라 에헤에헤야, 내 고향 집 가세
3. 내 고향집 장독대의 큰 항아리 거기 술에 담던 들국화 / 흙담에 매달린 햇마늘 몇 접 어느 자식을 주랴고 / 음, 실한 놈들은 다 싸 보내고, 음, 무지렝이만 겨우 남아도 / 음, 쓰러지는 울타리 대롱대롱 매달린 저 수세미나 잘 익으면 / 에헤에헤야, 어머니 계신 곳 에헤에헤야, 내 고향 집 가세
4. 마루 끝 판장문 앞의 무궁화 지는 햇살에 더욱 소담하고 / 원추리 꽃밭의 실잠자리 저녁바람에 날개 하늘거리고 / 음, 텃밭의 꼬부라진 오이 가지, 음, 밭고랑 일어서는 어머니 / 지금 퀴퀴한 헛간에 호미 던지고 어머니는 손을 씻으실 게야 / 에헤에헤야, 수제비도 좋아라 에헤에헤야, 내 고향 집 가세
5. 내 고향집 마당에 쑥불 피우고 맷방석에 이웃들이 앉아 / 도시로 떠난 사람들 얘기하며 하늘의 별들을 볼 게야 / 음, 처자들 새하얀 손톱마다, 음, 새빨간 봉숭아물을 들이고 / 음, 새마을모자로 모기 쫓으며 꼬박꼬박 졸기도 할 게야 / 에헤에헤야, 그 별빛도 그리워 에헤에헤야, 내 고향 집 가세
6. 문둥이도 아직 있을는지 어릴 적 학교길 보리밭엔 / 큰길가 언덕 위 공동묘지엔 상여집도 그냥 있을는지 / 음, 미군부대 철조망 그 안으로, 음, 융단 같은 골프장 잔디와 / 이 너머 산비탈 잡초들도 지금 가면 다시 볼 게야 / 에헤에헤야, 내 아버지는 그 땅 아래 에헤에헤야, 내 고향 집 가세”(정태춘의 ‘고향집 가세’, 1988, 정태춘 작사·작곡)
고향 집을 탁월하게 그려낸, 두 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늦여름 농촌의 풍경이 오롯이 담겨 있다. 무너진 장독대 틈에 핀 채송화, 태엽 감는 시계의 뚝딱거리는 소리만 울리는 한낮의 빈집에서 잠든 개, 흙담에 걸린 못난 마늘, 밭 가운데에서 허리를 펴고 일어서는 어머니, 퀴퀴한 헛간 냄새까지 그 묘사가 어찌나 정교하고 적확한지 전율이 일 정도다. 그저 상상으로 그려낸 ‘초가집’ ‘돌담길’ 같은 관념적 시골 마을 풍경이 아니다. 푸석한 슬레이트 지붕과 새마을모자로 모기 쫓는 아저씨들, 멀리 보이는 미군부대의 잔디밭 등 70년대 평택 농촌마을의 풍경을 고스란히 그려냈다는 것이 이 작품의 큰 미덕이다. 노래는 소 방울 소리를 연상시키는 요령 소리를 밑에 깔고 기타와 국악기로 편곡되어 있다.
‘가물어도 좋아라’ ‘어머니 계신 곳’ ‘내 아버지는 그 땅 아래에’ 같은 구절에서 확인되듯 그곳이 그리운 고향인 것은, 크게 잘나고 풍요로운 곳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추억과 함께 어머니가 아직 살고 있고 아버지가 살다가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이 상실된다면 고향은 이미 고향이 아니다.
“2. 저 맑은 별빛 아래 한밤 깊도록 뛰놀던 골목길 / 그때 동무들 이제 모두 어른 되어 그곳을 떠나고 / 빈 동리 하늘엔 찬바람결의 북두칠성 나의 머리 위로 / 그날의 향수를 쏟아부어 눈물 젖네 눈물 젖네
3. 나의 옛 집은 나도 모르는 젊은 내외의 새 주인 만나고 / 바깥 사랑채엔 늙으신 어머니, 어린 조카들, 가난한 형수님 / 아버님 제상에 둘러앉은 객지의 형제들 한밤의 정적과 / 옛 집의 사랑이 새삼스레 몰려드네 몰려드네”(정태춘의 ‘실향가’, 1988, 정태춘 작사·작곡)
자신은 물론 형제들도 모두 도시로 뿔뿔이 흩어졌고, 이제 고향은 제삿날에나 찾는 곳이 되었다. 친구들도 모두 그곳을 떠났고, 자신이 살던 집마저 빚에 넘어가 어머니는 그 집 사랑채에 세 들어 사는 신세다.
고향도 사람이 있고 추억이 깃들 공간이 남아 있을 때까지만 고향이다. 이렇게 이 세대의 고향은 점차 사라져간다. 정태춘의 고향 노래가 소중한 것은 상투적 고향 이미지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이 체험한 변화 한복판의 고향 농촌과 그 고향의 상실을 매우 성실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 따라 상경한 이농 1.5세, 그들에겐 주택가 골목이 고향
이영미의 7080 노래방 <28> 고향을 잃은 세대
| 제237호 | 20110925 입력
어느 틈엔가 대중가요에서 고향이 자취를 감췄다. 도시의 아이들에게는 시골의 고향이 없기 때문이다. 대도시 아파트에서 태어나 2년 정도에 한 번씩 이사 다니며 살아온 요즘 젊은이들에게 고향을 묻는 것은 참으로 뜬금없는 일 아닌가. 하긴 나도 청소년 시절에 ‘내 고향은 위생병원 산부인과야’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고 다녔다. 중랑교 다리 밑(서울의 위생병원은 중랑교 근처인 휘경동에 있다)에서 주워 왔다고 놀리시던 아버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 나이부터였다.
7080세대인 지금의 중년들은 시골의 옛 고향을 기억하고 노래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인 동시에 고향 없는 자들의 첫 세대이기도 하다. 이들이 태어나고 성장하던 1960~70년대에 산업화와 도시화는 급격히 이루어졌다. 급기야 90년대에 들어서서는 국민의 절반이 수도권에 거주하고 국민 대부분이 아파트 같은 공용주택에서 사는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90년대 이후의 대중가요에서 고향을 그리는 노래로 인기를 얻은 것은 월북시인 정지용 해금 붐을 타고 나온 ‘향수’와 팍팍한 낯선 도시에서의 외로움을 노래한 조용필의 ‘꿈’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나마 모두 90년대 초반의 노래였고 젊은 취향에서는 다소 벗어난 노래였다.
80년대 초의 ‘제2의 고향’은 고향이 사라지는 시대의 한 순간이 묘하게 포착된 노래다.
“사방을 몇 바퀴 아무리 돌아봐도 / 보이는 건 싸늘한 콘크리트 빌딩 숲 / 정둘 곳 찾아봐도 하나도 없지만 / 그래도 나에겐 제2의 고향 / 거리를 하루 종일 아무리 걸어 봐도 / 보이는 건 한없는 밀리는 자동차 / 가슴은 답답하고 머리는 띵하지만 / 그래도 나에겐 제2의 고향 / 밤이면 빌딩 위에 걸린 초생달 / 쓸쓸한 내 마음을 달래주누나 / 우우우 우우우 / 너의 모습처럼”(윤수일<사진>의 ‘제2의 고향’, 1981, 윤수일 작사·작곡)
서울이라 짐작되는 이곳은 ‘고향’이 아니라 ‘제2의 고향’이다. 콘크리트 벽과 자동차만 있는 곳인데도, 이 서울이 좋단다. 이로부터 10년 전쯤에는 ‘멋쟁이 높은 빌딩 으스대지만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면 나는 좋아’(남진의 ‘님과 함께’), ‘머나먼 남쪽 하늘 아래 그리운 고향 사랑하는 부모 형제 이 몸을 기다려’(나훈아의 ‘머나먼 고향’)라고 노래하여 ‘대박 인기’를 얻었다. 한쪽 다리를 떨며 신나게 노래를 했던 70년대 초 남진과 마이크 대를 옆으로 잡고 노래하던 80년대 초의 윤수일을 한꺼번에 머릿속에 떠올리며, 이 노래의 가사가 보여준 엄청난 차이를 비교하면 정말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70년대 초의 고향 노래들에 공감했던 사람들이 스스로 가난을 못 이겨 이농한 청년들이었다면, 80년대 ‘제2의 고향’에 환호했던 대중들은 60~70년대 이농 대열에 끼어있던 부모형제와 함께 어릴 적에 서울에 올라와 80년대에야 비로소 청년기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이농 1.5세쯤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고향은 그다지 그리운 곳이 아니다. 어릴 적 아련한 추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도시에서 학교 다니면서 적응을 끝냈다. 서울살이의 고생? 그건 막일하는 부모와 공장 다니던 큰형과 누나들이 한 것이고, 어린 것들은 허름한 산동네에서도 싸구려 핫도그 손에 쥐고 만화방 드나들면서 신나게 뛰어놀면서 자랐다.
그러니 재미없는 시골로 돌아가고 싶겠는가? 천만에! 이농한 어른들은 마음으로는 고향이 그리워도 먹고살 대책이 없으니 돌아갈 수 없었지만, 이농 1.5세 아이들은 돌아갈 마음이 아예 없었다. 서울이 고향이나 다름이 없는데, 어디로 ‘돌아간단’ 말인가.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밭을 지나 /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너의 아파트’가 있는 곳이 바로 서울이다.(나는 이 윤수일의 ‘아파트’에서 잠실 5단지 아파트가 선명히 떠오른다.) 초가지붕 위의 박꽃을 노래하지 않고 아파트를 노래하는 세상이 되었는데, 무슨 시골 고향이 그립겠는가.
하지만 서울내기들에게도 향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향(鄕)’도 없는데 ‘향수(鄕愁)’라니 참 웃기는 말 같지만, 과거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오늘은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 /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 어릴 적 함께 뛰놀던 골목길에서 만나자 하네 / 내일이면 아주 멀리 간다고 /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 길 /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에 / 다정한 옛 친구 나를 반겨 달려오는데 / (하략)”(동물원의 ‘혜화동’, 1989, 김창기 작사·작곡)
이들의 고향은 서울 종로구 혜화동, 중산층 단독주택이 밀집해 있던 곳이다. 이들은 이제 거기 살지 않는다. 아마 강남 반포나 대치동쯤에 살지 않았을까 싶다. 강북의 단독주택에서 살던 중산층들은 70년대 중·후반을 계기로 너도나도 강남의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혜화동에서 함께 놀던 초등학교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끔 안부나 묻는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멀리 떠나간’단다. 군대 가거나 유학을 떠나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들은 다시 자신들의 옛 고향 혜화동의 골목길에서 만나기로 했다.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오면서 이들은 향수에 잠겼을 것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에게는 서울 강북 주택가가 바로 고향이다. 나 역시 그렇다. 가회동 한옥들 앞에 물끄러미 서 있거나, 보문동의 골목길 등을 걸어가 보면 고향에 온 것 같은 아늑함을 느낀다. 이미 그 집을 떠난 지 3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꿈에 등장하는 집은 늘 어릴 적 살던 그 한옥이다. 2000년대 들어 서울 북촌 한옥 붐이 일기 시작하고, 강북 투어 프로그램이 생기고, 서울을 탐구하는 전시와 강연들이 기획되는 것은, 바로 강북에서 자란 서울내기들이 중년에 이르러 자신의 고향을 찾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쾌한 빨간 마후라, 육군 김일병 전쟁 악몽 벗어난 60년대 ‘군인 가요’
이영미의 7080 노래방 <29> 비장한 국군에서 명랑한 국군으로
이영미 ymlee0216@hanmail.net | 제238호 | 20111002 입력
어제가 국군의 날이었다. 어느 틈엔가 우리 사회에서 군인은 매우 예민하고도 희한한 존재가 됐다. 배우 현빈의 해병대 지원 소식이 모든 뉴스를 뒤덮고, 고위 공직자와 그 아들의 병역 문제가 늘 청문회 자리에서 문제가 되며, 정치인 문재인이 특전사 시절 찍은 사진이 화제가 되는 사회. 군복무 이야기만 나오면 남자들이 모두 평상심을 잃어버리고 희한하게 흥분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군인이 되는 일이 의무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자부심과 피해의식이 모두 적지 않은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남자아이의 꿈이 ‘군인’이고 골목마다 병정놀이 하는 아이들 소리로 시끄럽던 때가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군인도 아니면서 군대식 거수경례를 배우고, 교복 차림이라면 어른 앞에서 거수경례를 하는 것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채 50년도 안 된 일들이다.
아니, 지금부터 50년도 안 된 일이라고 계산을 하는 것은 다소 불합리하다. 전쟁이 끝난 지 불과 30년도 안 된 때이니, 군인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게 느껴진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대중가요 속 군인의 모습은 일제 말 친일가요에서 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해 해방 이후에는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노래로 이어진다. 현실 속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배경이니, 노래 속 군인의 모습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전우야 잘 자라’)에서처럼 비장했다.
“가랑잎이 휘날리던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꿈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아아 아아아아아 그 목소리 그리워.”(신세영의 ‘전선야곡’, 1952,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이런 진지하고 비장한 군인의 모습은 ‘삼팔선의 봄’ 등 1950년대 후반까지 어느 정도 유지됐으나 채 10년을 유지하지 못했다. 60년대에 들어서면 이렇게 경쾌한 분위기로 군인의 이미지가 바뀐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구름 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 아가씨야 내 마음 믿지 말아라 번개처럼 지나갈 청춘이란다.”(봉봉사중창단의 ‘빨간 마후라’, 1964, 한운사 작사, 황문평 작곡)
문화방송 라디오의 62년 드라마를 64년 신상옥 감독이 리메이크한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제가로 드라마, 영화, 주제가 모두 히트했다. 영화 내용은 6·25전쟁을 시대 배경으로 마지막에 주인공이 마치 가미카제처럼(작가 한운사가 그렇게 말했다) 비행기와 함께 몸을 던져 다리를 폭파하는 비장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공군 제트기 조종사들의 이야기이니 흙과 함께 뒹구는 육군 이야기와 달리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가 있고, 정부 지원 아래 많은 공중촬영 장면을 담은 컬러영화여서 더욱 세련됨을 뽐내는 작품이었다. 노래 역시 비장한 슬픔이 아닌, 경쾌하고 발랄한 분위기를 선택해 크게 히트했다.
하지만 이것은 전조에 불과했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넘어가자 이제 군인에게 점점 전쟁 이미지는 탈각되었다. 어차피 대중가요의 팬은 젊은이들인데, 군인 노래가 계속 비장하기만 한 것을 60년대 젊은이들이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군대에서 부르는 공식적 군가로는 다소 경직되게 군기 팍팍 들어간 노래가 교육되었겠지만, 일반 대중들의 호응으로 유지되는 대중가요까지 그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신병 훈련 육 개월에 작대기 두 개/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 신나는 김일병(헤이 부라보 김일병)/ 기상나팔에는 투덜대지만 (헤이 부라보 김일병)/ 식사시간에는 용감한 병사/ 신나는 휴가 때면은 서울의 거리는 내 차지/ 나는야 졸병이지만 그녀는 멋쟁이/ 백발백중 사수에다 인기도 좋아(헤이 부라보 핸섬 보이)/ 육군 김일병님 용감한 병사.”(봉봉사중창단의 ‘육군 김일병’, 1966, 정민섭 작사·작곡)
이 노래 속 군인에는 전쟁의 고통이나 아픔은 흔적조차 없다. 기상나팔, 식사시간, 사격훈련, 휴가 등이 그들 삶의 풍경이다. 명랑하고 발랄하기 이를 데 없다. 언제 죽을지 모르던 전쟁 때의 군인과 비교하면 거의 ‘당나라 군대’를 떠올리게 할 정도다.
그러나 60년대 노래 속의 군인은 여전히 멋지고 씩씩하다. 대중가요 속에서 ‘찌질하거나’ 우울한 군인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대통령과 고위 공직을 모두 군인 출신이 장악했던 시절, 누가 감히 군인을 그렇게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한국 록의 아버지’인 신중현의 노래에까지 군인은 멋진 존재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이제서 돌아왔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너무나 기다렸네/ 굳게 닫힌 그 입술 무거운 그 철모 웃으며 돌아왔네/ 어린 동생 반기며 그 품에 안겼네 모두 다 안겼네/ 말썽 많은 김총각 모두 말을 했지만/ 의젓하게 훈장 달고 돌아온 김상사/ 동네사람 모여서 얼굴을 보려고 모두 다 기웃기웃/ 우리 아들 왔다고 춤추는 어머니 온 동네 잔치하네/ 폼을 내는 김상사 돌아온 김상사 내 맘에 들었어요/ 믿음직한 김상사 돌아온 김상사 내 맘에 들었어요.”(김추자<사진>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1969, 신중현 작사·작곡)
말썽 많던 남자들도 군대를 갔다 오면 멋지고 의젓해진단다. 게다가 월남에서 영어도 배우고 미제 물건도 갖고 왔으니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미국의 로커들이 월남전 반대운동을 하고 있을 때 한국 록의 아버지는 월남전을 찬양하는 노래를 짓고 대중들의 호응으로 인기를 얻은 것을 생각하면, 미국과 한국의 록의 지닌 역사와 현실은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새삼 절실하게 느낀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와 『광화문 연가』 등 을 썼다.
부모 따라 상경한 이농 1.5세, 그들에겐 주택가 골목이 고향
이영미의 7080 노래방 <28> 고향을 잃은 세대
| 제237호 | 20110925 입력
어느 틈엔가 대중가요에서 고향이 자취를 감췄다. 도시의 아이들에게는 시골의 고향이 없기 때문이다. 대도시 아파트에서 태어나 2년 정도에 한 번씩 이사 다니며 살아온 요즘 젊은이들에게 고향을 묻는 것은 참으로 뜬금없는 일 아닌가. 하긴 나도 청소년 시절에 ‘내 고향은 위생병원 산부인과야’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고 다녔다. 중랑교 다리 밑(서울의 위생병원은 중랑교 근처인 휘경동에 있다)에서 주워 왔다고 놀리시던 아버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 나이부터였다.
7080세대인 지금의 중년들은 시골의 옛 고향을 기억하고 노래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인 동시에 고향 없는 자들의 첫 세대이기도 하다. 이들이 태어나고 성장하던 1960~70년대에 산업화와 도시화는 급격히 이루어졌다. 급기야 90년대에 들어서서는 국민의 절반이 수도권에 거주하고 국민 대부분이 아파트 같은 공용주택에서 사는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90년대 이후의 대중가요에서 고향을 그리는 노래로 인기를 얻은 것은 월북시인 정지용 해금 붐을 타고 나온 ‘향수’와 팍팍한 낯선 도시에서의 외로움을 노래한 조용필의 ‘꿈’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나마 모두 90년대 초반의 노래였고 젊은 취향에서는 다소 벗어난 노래였다.
80년대 초의 ‘제2의 고향’은 고향이 사라지는 시대의 한 순간이 묘하게 포착된 노래다.
“사방을 몇 바퀴 아무리 돌아봐도 / 보이는 건 싸늘한 콘크리트 빌딩 숲 / 정둘 곳 찾아봐도 하나도 없지만 / 그래도 나에겐 제2의 고향 / 거리를 하루 종일 아무리 걸어 봐도 / 보이는 건 한없는 밀리는 자동차 / 가슴은 답답하고 머리는 띵하지만 / 그래도 나에겐 제2의 고향 / 밤이면 빌딩 위에 걸린 초생달 / 쓸쓸한 내 마음을 달래주누나 / 우우우 우우우 / 너의 모습처럼”(윤수일<사진>의 ‘제2의 고향’, 1981, 윤수일 작사·작곡)
서울이라 짐작되는 이곳은 ‘고향’이 아니라 ‘제2의 고향’이다. 콘크리트 벽과 자동차만 있는 곳인데도, 이 서울이 좋단다. 이로부터 10년 전쯤에는 ‘멋쟁이 높은 빌딩 으스대지만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면 나는 좋아’(남진의 ‘님과 함께’), ‘머나먼 남쪽 하늘 아래 그리운 고향 사랑하는 부모 형제 이 몸을 기다려’(나훈아의 ‘머나먼 고향’)라고 노래하여 ‘대박 인기’를 얻었다. 한쪽 다리를 떨며 신나게 노래를 했던 70년대 초 남진과 마이크 대를 옆으로 잡고 노래하던 80년대 초의 윤수일을 한꺼번에 머릿속에 떠올리며, 이 노래의 가사가 보여준 엄청난 차이를 비교하면 정말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70년대 초의 고향 노래들에 공감했던 사람들이 스스로 가난을 못 이겨 이농한 청년들이었다면, 80년대 ‘제2의 고향’에 환호했던 대중들은 60~70년대 이농 대열에 끼어있던 부모형제와 함께 어릴 적에 서울에 올라와 80년대에야 비로소 청년기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이농 1.5세쯤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고향은 그다지 그리운 곳이 아니다. 어릴 적 아련한 추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도시에서 학교 다니면서 적응을 끝냈다. 서울살이의 고생? 그건 막일하는 부모와 공장 다니던 큰형과 누나들이 한 것이고, 어린 것들은 허름한 산동네에서도 싸구려 핫도그 손에 쥐고 만화방 드나들면서 신나게 뛰어놀면서 자랐다.
그러니 재미없는 시골로 돌아가고 싶겠는가? 천만에! 이농한 어른들은 마음으로는 고향이 그리워도 먹고살 대책이 없으니 돌아갈 수 없었지만, 이농 1.5세 아이들은 돌아갈 마음이 아예 없었다. 서울이 고향이나 다름이 없는데, 어디로 ‘돌아간단’ 말인가.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밭을 지나 /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너의 아파트’가 있는 곳이 바로 서울이다.(나는 이 윤수일의 ‘아파트’에서 잠실 5단지 아파트가 선명히 떠오른다.) 초가지붕 위의 박꽃을 노래하지 않고 아파트를 노래하는 세상이 되었는데, 무슨 시골 고향이 그립겠는가.
하지만 서울내기들에게도 향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향(鄕)’도 없는데 ‘향수(鄕愁)’라니 참 웃기는 말 같지만, 과거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오늘은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 /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 어릴 적 함께 뛰놀던 골목길에서 만나자 하네 / 내일이면 아주 멀리 간다고 /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 길 /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에 / 다정한 옛 친구 나를 반겨 달려오는데 / (하략)”(동물원의 ‘혜화동’, 1989, 김창기 작사·작곡)
이들의 고향은 서울 종로구 혜화동, 중산층 단독주택이 밀집해 있던 곳이다. 이들은 이제 거기 살지 않는다. 아마 강남 반포나 대치동쯤에 살지 않았을까 싶다. 강북의 단독주택에서 살던 중산층들은 70년대 중·후반을 계기로 너도나도 강남의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혜화동에서 함께 놀던 초등학교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끔 안부나 묻는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멀리 떠나간’단다. 군대 가거나 유학을 떠나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들은 다시 자신들의 옛 고향 혜화동의 골목길에서 만나기로 했다.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오면서 이들은 향수에 잠겼을 것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에게는 서울 강북 주택가가 바로 고향이다. 나 역시 그렇다. 가회동 한옥들 앞에 물끄러미 서 있거나, 보문동의 골목길 등을 걸어가 보면 고향에 온 것 같은 아늑함을 느낀다. 이미 그 집을 떠난 지 3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꿈에 등장하는 집은 늘 어릴 적 살던 그 한옥이다. 2000년대 들어 서울 북촌 한옥 붐이 일기 시작하고, 강북 투어 프로그램이 생기고, 서울을 탐구하는 전시와 강연들이 기획되는 것은, 바로 강북에서 자란 서울내기들이 중년에 이르러 자신의 고향을 찾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슬아슬 검열 통과한 ‘입영전야’...군인은 못 부른 ‘늙은 군인의 노래’
이영미의 7080 노래방 <30> 군인 가요의 변신
이영미 ymlee0216@hanmail.net | 제239호 | 20111009 입력
1970년대는 전쟁이 끝난 지 불과 20년 전후의 시기였지만 세상은 정말 많이 변했다. 40대 이상의 기성세대는 전쟁기의 고통이 엊그제 같았겠지만, 청소년들은 전쟁의 경험이 없는 전후세대들로 채워졌고 이들은 성장하면서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체득했다. 이제 군인은, 존경스럽지도 않고 자신과 동일시되지 않는 대상이 되어 버렸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철딱서니 없는 것들’이었던 셈이다.
당연히 군인을 다룬 대중가요는 더 이상 인기를 누릴 수 없었다. 60년대까지의 군인 소재 노래가, 아무리 정부의 부추김에 의해 만든 노래라 할지라도 꽤 여러 편이 히트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다면,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1. 나 하나 몸 간수도 못하던 내가 총 메고 싸움터에 나섰습니다 / 부모님 말씀도 안 듣던 내가 조국의 부름에 따랐습니다 / 훈련소서 더벅머리 잘라버릴 땐 서러움의 눈물을 흘렸지마는 예예예 / 지금은 산뜻한 군복을 입고 호미 대신 총을 멘 멋장이라오
2. 물지게도 제대로 못 지던 내가 거칠은 훈련도 받아넘기고 / 뛰었다 하면 구보 길 이십여 리에 감기 한 번 안 걸린 사나이 됐다오 / 달이 밝은 야영 때는 편지를 쓰죠 어머님 그동안 안녕하신지 예예예 / 당신 곁 떠나올 때 울던 바보가 지금은 나라의 기둥이지요
3. 고향을 떠나서 멀리와 보니 무엇보다 그리운 건 이쁜입니다 / 떠나올 때 날 붙들고 울던 이쁜이 행여나 긴 세월 기다려 줄까 / 나 없이는 못 산다고 하던 이쁜이 지금도 내 생각만 하고 있겠지 예예예 / 조국에 충성하고 돌아가는 날 누구보다 이쁜이가 반겨주겠지”(조영남<사진>의 ‘이일병과 이쁜이’, 1971, 조영남 작사, 김학송 작곡)
청년문화 시대의 첫 스타가 된 조영남은 정부의 다양한 요구를 수용한 노래를 많이 불렀는데 이 곡도 그런 작품이다. 조영남 특유의 작사 감각이 없진 않지만 지난 회에 소개한 ‘육군 김일병’이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와 그리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건전가요였다. 아무리 인기 있던 조영남이지만, 이미 달라진 새 세대들에게는 ‘군대 갔다 와야 철이 들지’ 식의 어른들 훈계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78년 허성희의 ‘전우가 남긴 한 마디’ 같은 노래는 오로지 50대 이상만 감동하는 시대착오적인 노래로 들렸다. 전쟁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총알이 빗발치던 전쟁터’ 타령이란 말인가.
새로운 세대의 젊은이들이 군대에 지니는 솔직한 심정은 3년 동안 가족과 친구와 헤어져 험한 고생길 떠나는 착잡함이었을 것이다. 하길종 감독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의 마지막 장면이 병태가 머리 깎고 군대 가는 장면인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군 입대란, 기성세대에 반기를 들었던 청년들이 그 풋풋하고 자유로웠던 청년기를 끝내고 타락한 기성세대의 세계로 접어들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런 청년들의 착잡함을 대변해줄 노래는, 검열당국의 눈치를 보느라 참 나오기 힘들었다.
“1. 아쉬운 밤 흐뭇한 밤 뽀얀 담배연기 / 둥근 너의 얼굴 보이고 넘치는 술잔엔 너의 웃음이 / 정든 우리 헤어져도 다시 만날 그날까지 / (후렴)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
2. 지난날들 돌아보면 숱한 우리 얘기 / 넓은 너의 가슴 열리고 마주 쥔 두 손엔 사나이 정이 / 내 나라 위해 떠나는 몸 뜨거운 피는 가슴에 / (후렴)”(최백호의 ‘입영 전야’, 1978, 최백호 작사·작곡)
아마 지금 40대부터 50대 중반까지 군필 남자라면 입영 열흘 전부터 이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며 술을 마셔댄 경험을 모두 갖고 있을 것이다. 나 같은 여자들도 그런 술자리 끼어 정말 지겹도록 이 노래를 불러댔다.
지금 살펴보면 70년대의 검열 수준을 통과한 참으로 아슬아슬한 노래다. 건전가요들이 지닌 계몽성이 상당히 제거되어 있지만, 그래도 ‘흐뭇한 밤’, ‘내 나라 위해 떠나는 몸’, ‘뜨거운 피’ 등의 가사를 남겨두어 기성세대와 검열당국을 만족시켰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앞부분에 ‘아쉬운 밤’, ‘뽀얀 담배연기’, ‘넘치는 술잔’을 배치하고, 후렴에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로 끝맺음으로써 군대의 경직성과 크게 어긋나는 술자리의 자유분방하면서도 착잡한 분위기가 노래 전체를 압도하게 만든다.
그런데 같은 해에 또 한 편의 주목할 만한 군인 소재 노래가 나왔다.
“1.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 년 /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 나 죽어 이 흙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 (후렴)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
2.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 / 너희들은 자랑스런 군인의 아들이다 / 좋은 옷 입고프냐 맛난 것 먹고프냐 / 아서라 말아라 군인 아들 너로다 / (후렴)
3. 내 평생 소원이 무엇이더냐 / 우리 손주 손목 잡고 금강산 구경일세 / 꽃 피어 만발하고 활짝 개인 그날을 / 기다리고 기다리다 이 내 청춘 다 갔네 / (후렴)”(양희은의 ‘늙은 군인의 노래’, 1978, 김민기 작사·작곡)
군 입대 후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영창 거쳐 전방으로 쫓겨난 김민기가 군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머리에 서리가 앉기 시작한 이 늙은 하사관은 전쟁 때 군대에 들어왔다가 그냥 직업군인으로 눌러앉았을 듯하다. 자랑스럽지만 가난한 하급 군인의 삶을 묵묵하게 한평생 살아왔을 이 주인공의 회한이 작품 전체의 느낌이다. 씩씩함과 애국심을 충분히 남겨두면서도 전반적으로 쓸쓸함과 회한의 감정을 드러낸 이 노래는, 국방부의 금지곡이 되어 정작 군인들은 부르지 못하는 노래가 되었다.
이 노래를 보니 확실히 군대가 젊은이를 철들게는 하는 듯하지만, 그게 꼭 어른들이 바라는 방향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세상은 재미있는 것일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