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속의 하이테크놀로지

황칠갑옷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4. 3. 4. 15:44

황칠갑옷



세곳의 섬에서 <황칠>이 나는데, 6월에 나무에 구멍을 뚫어 진을 모으면 색이 금빛이 난다.

무덕 4년(621년)에 왕 부여장(무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과하마를 바쳤다. 이로부터 조공을 자주 바쳐 오니, 고조는 그를 책봉하여 대방군왕 백제왕으로 삼았다. 5년 뒤에 명광개를 바치고, 또 고구려가 조공의 길을 막는다고 호소하였다. 태종 정관(627-649)초에 사신을 보내어 두 나라 사이의 원한을 풀게 했다. 또 신라와 대대로 원수가 되어 자주 서로 침공하였다. . - 신당서 백제전

신라 선덕왕 14년, 고구려 보장왕 4년, 백제 의자왕 5년

당(唐)나라 정관 19년 이세민

645년 이때에 백제에서 금개(金鎧 - 금적색(金赤色)를 바쳤고, 또 현금(玄金 - 검은 쇠[鐵])으로 문개(文鎧 - 무늬 있는 갑옷)를 만들어 사졸들에게 입혀 따르게 하였는데, 당 태종이 이세적과 만나자 갑옷의 광채가 해에 빛났다. - 삼국사절요

고구려가 주필산 전투에서 대패했을 때 당나라가 얻은 뇌획물 중의 일부이다.

말 5만 필(匹), 소 5만 두(頭), 명광개(明光鎧) 1만 령(領)을 얻었는데, 다른 기계(器械)들도 상당하였다. - 삼국사절요

명광개(明光鎧)

명광개는 철로 만든 찰을 이어 붙여 만든 갑옷에 가슴과 등에 철판을 덧대어 만든 갑옷입니다. 명광개는 전신을 덮으며 갑주 중에서 최고의 방호력을 자랑하지만, 그만큼 철찰을 많이 사용하여 무게가 무겁고 움직임이 거치적스러운 단점이 있습니다. 명광개라는 이름은 가슴과 등의 철판이 빛이 난다고 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명광개(明光鎧)는 원래는 금박을 입힌 철갑으로 장군들의 갑옷을 말하는데 나중에는 목재나 가죽에 황칠을 해서 사용했다는 고대의 갑옷을 ...

삼국사기 백제본기 권 제5 무왕(武王) 27년(626)조 기록은 다음과 같다.

"(백제가) 당에 사신을 보내 명광개(明光鎧)를 바치면서 고구려가 길을 막고 상국(上國. 당나라)에 조공하는 길을 막는다고 호소했다. 이에 (당) 고조(이연. 李淵)는 산기상시(散騎常侍)인 주자사(朱子奢)를 백제로 보내어서는 조서를 내려 우리(백제)와 고구려가 맺힌 원한을 풀라고 달랬다."(二十七年, 遣使入唐, 獻明光鎧, 因訟高句麗梗道路, 不許來朝上國, 高祖遣散騎常侍朱子奢, 來詔諭我及高句麗平其怨)

명광개는 글자 그대로는 빛을 발하는 갑옷이라는 뜻이다. 개(鎧)라는 쇠로 만든갑옷이다. 이 글자는 선진(先秦)시대 문헌인 관자(管子)의 지수편(地數篇)에 "칼과 갑옷을 만들었다"(爲劍鎧)라는 표현에서 벌써 보인다.

나아가 이 글자를 합성어로 활용한 ▲개갑(鎧甲. 삼국지 오서 제갈락전<諸葛恪傳>) ▲개주(鎧胄. 구당서 토번전<吐蕃傳>) ▲개마(鎧馬. 진서<晉書> 왕준전<王浚傳>) 등의 말도 있고, 모두 갑옷과 관련된 말이다.

갑옷을 어떻게 하면 금빛이 나게 할 수 있을까?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는 황금을그대로 갑옷으로 주물하는 방법이 있겠지만, 금은 속성이 물러 갑옷으로 사용하기는힘들다. 신라 금관만 해도 무엇인가로 지탱을 해 주지 않으면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따라서 값옷에 광명(光明)을 주는 방법은 재료는 쇠로 하되, 그런 색깔을 내는 도료를 입히는 방식을 생각할 수 있다. 백제에서 당나라에 뇌물로 바쳤다는 광명개란 전설의 갑옷은 바로 쇠갑옷에다가 황칠(黃漆)을 입힌 것임은 이와 비슷한 내용을전하는 다른 문헌기록에서 추측이 가능하다.

북송(北宋) 시대 왕흠약(王欽若)과 양억(楊億) 등이 편찬한 백과사전류인 '책부원구'(冊府元龜)라는 문헌에는 "당 태종(이세민)이 정관(貞觀) 19년에 백제에 사신을 보내 산문갑(山文甲. 의전용 갑옷)에 입힐 금칠(金漆. 황칠)을 요청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정관 19년은 서기 645년으로 백제로는 의자왕 재위 9년째가 되는 해다.

황칠은 야생에서 자생하는 황칠나무에서채취한 수액(樹液)을 가공한 칠을 말한다. 통상 칠이라면 붉은빛을 내는 주칠(朱漆)이나 검은색을 내는 흑칠(黑漆)을 생각하기 쉽고 실제 이런 칠이 가장 흔했으나, 황칠은 그 희귀성 때문에 중국에서도 이처럼 탐을 낸 물품이었다.

구당서(舊唐書) 동이전(東夷傳) 백제 조에는 "백제에는 섬이 세 개가 있으니 그곳에서 황칠이 난다. 6월에 칼로 그어 수액을 채취하니, 색깔은 황금색이다"고 했다.

중국측에서 이렇게 백제산 황칠을 특별히 언급한 까닭은 그것이 중국에서도 구하기가 매우 힘든 특산품이었음을 암시한다.

이런 한반도산 황칠은 고려시대에 접어들어서도 중국에서 많은 관심을 기울인 듯하다.

12세기 초 고구려 숙종 무렵에 송(宋)나라에서 보낸 사신단 일원으로 고려를 방문한 적이 있는 손목(孫穆)이 지은 '계림유사'(鷄林類事)에는 당시 통용된 고려말을사전처럼 풀어놓았는데 그 중에서 "칠을 (고려사람들은) 황칠이라 부른다"(漆曰黃漆)라고 했다.

나아가 같은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간 서긍(徐兢)이 남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황칠이 나주(羅州)의 조공품이다"고 했다.

고려에서 "황칠은 섬에서 생산되는데 6월에 수액을 채취하니 그 빛깔은 금과 같으며 볕에 쬐어 건조시킨다. 본래는 백제에서 났으나 지금은 (중국의) 절강 사람들은 이를 일러 '신라칠'(新羅漆)이라 한다"고 했다.

중국의 연이은 황칠 조공 요구에 시달린 주민들이 못살겠다며, 황칠나무들을 뽑아버리고 베어 없앤 것이다.

경주 황성동 계림 북편 신라시대 제사 유적에서 그런 황칠 안료를 담은 유물까지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황칠이 백제만의 특산이 아니라 신라 또한 생산했을 가능성을 유력하게 뒷받침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영남일보 입력 2007-02-08 16:17:00



칠공예·나전기술의 융합 … 불교용품 주로 제작

고려사의 재발견 명품 열전 ⑥ 나전칠기

박종기 국민대 교수 j9922@kookmin.ac.kr | 제340호 20130915 입력 
 
고려문화의 또 다른 정수를 보여주는 명품은 나전칠기(螺鈿漆器)다. 현재 16점이 전해진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1점을 빼곤 모두 해외(일본 10점, 미국 3점, 유럽 2점)에 유출돼 있다. 나전칠기는 칠공예(漆工藝)와 나전 기술이 합쳐진, 이른바 기술의 융합에 의해 생산된 명품이다. 나전 기술은 원래 중국 당(唐)나라에서 건너왔다. 이와 달리 목재제품 등에 옻칠을 입히는 칠공예 기술은 이른 시기부터 우리나라에서 축적돼왔다. 우리나라 칠공예의 장식기법이 주로 자개를 이용해왔기 때문에 칠공예 기술과 나전기술을 분간하지 않고 사용하면서, 나전칠기가 단일한 기술로만 제작된 것이라는 오해를 받게 된 것이다.

또한 고려의 나전기술은 중국과 달랐다. 당나라의 나전은 자단(紫檀·동남아 등지에서 식생한 나무)과 같이 단단하고 무늬가 아름다운 나무에 바로 나전을 새겨 넣었다. 그래서 목지나전(木地螺鈿)이라 한다. 반면에 고려의 경우 경전·염주 등을 담는 나무상자에 굵은 삼베를 바르고 옻칠을 한다. 그 위에 잘게 썬 나전을 새겨 넣은 후 다시 옻칠을 덧입힌다. 그런 후 나전 무늬에 덮인 칠을 벗겨내고 광 내기 과정을 거쳐 제품이 생산됐다. 이렇게 나전 기술과 칠공예 기술이 결합돼 나전칠기라고 했다.

나전대모국화당초문 염주합 세부도. 국화꽃의 붉은색 꽃술과 잎은 채색한 대모, 흰빛 잎과 넝쿨은 나전을 각각 새겨 넣은 것이다. 꽃 주변 테두리는 은과 구리선을 가늘게 꼬아 넣은 것이다. 약 900년 전 만들어진 나전칠기의 아름답고 화려한 무늬는 아직도 선명하게 살아 있다. [사진 일본 당마사(當麻寺)]
대표작은 나전대모국화당초문 염주합
두 가지 기술의 융합으로 제작된 나전칠기는 제작기법상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1㎝ 이내로 자른 조개 조각으로 무늬를 엮는다. 이를 절문(截文·끊음질 무늬)이라 한다. 이 과정에서 흰빛에 일곱 가지 색이 어른거리는 조개 특유의 색깔이 드러난다. 둘째, 바다거북 등딱지인 대모(玳瑁)의 뒷면을 채색해 나전과 함께 그릇 표면에 무늬를 놓는다. 조개와 붉은빛으로 채색된 대모의 색깔이 어울려 환상적인 색감을 보여준다. 셋째, 잘게 쪼갠 자개들을 정교하게 새긴 꽃이나 넝쿨무늬 주변에 은(銀)·동(銅)으로 꼰 가느다란 금속선을 둘러 꽃줄기와 넝쿨을 명확하게 드러냄으로써 무늬 구성에 디자인적 질서를 부여한다. 고려 나전칠기의 화려하면서도 전아(典雅)한 멋은 이 세 가지 기술이 결합된 무늬의 아름다움에 있다.

하지만 나전칠기의 수요가 많아져 대모를 조달하기 힘들어지자 대모 장식은 점차 사라진다. 초기 작품(11~12세기)에 대모의 장식이 많이 나타나는데, 현재 전해지는 나전칠기의 종류는 주로 불교 의식과 관련된 제품이다. 대장경 등을 담는 나전경함(經函)이 전체 16점 가운데 9점으로 가장 많다. 나전칠기의 가장 아름다운 대표작인 나전대모국화당초문(*넝쿨무늬) 염주합(사진) 역시 불교 의식용 제품이다. 이처럼 나전칠기는 당시 성행한 불교 문화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제작됐다. 1272년(원종13) 원나라 황후가 대장경을 담기 위해 나전으로 장식된 상자를 요구하자, 고려는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을 설치한 것(『고려사』 권27 원종 13년 2월조)이 그 증거다(유홍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2』, 2012년).

무늬 주변에 금속 선(線)을 넣는 기법은 고려 공예예술을 상징하는 기법이다. 금속공예에선 금속 표면에 무늬를 깊게 파낸 다음 가느다란 금실이나 은실을 메워 넣는 금(金) 입사(入絲), 은(銀) 입사 기법으로 나타난다. 도자공예에선 도자기 표면에 문양을 새기고 그 속에 검정·빨강·하양의 흙을 메운 뒤 구워 특유의 문양을 드러내는 상감기법으로 구현됐다. 고려의 나전칠기는 이같이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칠공예 기술에다 조개를 잘게 썰어 아름다운 문양을 새겨 넣는 정교한 나전 기술의 결합을 통해 탄생한 명품이다.

“(고려에서) 그릇에 옻칠하는 기술은 정교하지 못하지만, 나전 기술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수 있다”(地少金銀 而多銅 器用漆作不甚工 而螺鈿之工 細密可貴)(『고려도경』(1123년) 권23 토산조).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 서긍은 위 기록과 같이 칠공예와 나전 기술을 분리해 평가했다. 실제로 고려는 왕실의 기물을 관장하던 관청 중상서(中尙署)에 나전장(螺鈿匠)과 칠장(漆匠)을 분리시켜 관리했다(『고려사』 권80 식화지). 서긍은 또한 고려에선 칠공예보다 나전 기술이 더 발달했다고 했다. 그의 지적은 사실 중국에 비해 화려하게 옻칠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지적한 데 불과하다. 실제로 그는 고려에서 옻칠공예가 성행한 사실을 같은 책 『고려도경』에 기록하고 있다. 즉 ‘쟁반과 소반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 옻칠을 했으며’(『고려도경』 권33 궤식(饋食)조), ‘왕과 관료들이 사용한 붉은 칠을 한 소반(丹漆俎)을 사신에게도 사용했다’(권28 단칠(丹漆)조)고 했다. 당시 식생활 전반에 쟁반·소반 등 칠공예 제품이 널리 쓰였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나전국화문경함. [사진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원 왕실도 옻칠과 匠人 보내달라 요구
목재 제품에 옻칠을 하면 방수 효과와 함께 쉽게 부패되거나 썩는 것을 예방하고 그릇의 아름다운 모양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옻칠공예는 목기(木器)에 주로 활용되었다. 이규보 역시 다음 기록과 같이 술병에 옻칠을 하여 사용했다.

“박으로 병을 만들어 술 담는 데 사용한다(自瓠就壺 貯酒是資). 목은 길고 배는 불룩하여, 막히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다(頸長腹枵 不咽不歌). 그래서 내가 보배로 여겨, 옻칠을 하여 광채 나게 했다(我故寶之 漆以光之)”(『동국이상국집』 권19 잡저 칠호(漆壺)).

우리나라에서 옻칠 기술은 청동기 시대 이후 유물에서 칠 제품이 출토될 정도로 일찍부터 발달돼왔다. 신라 때는 옻칠 공예를 전담한 부서인 칠전(漆典)이 있었다. 또 그릇에 칠을 해 장식한다는 뜻으로 식기방(飾器房)이라 했다(『삼국사기』 권39 잡지). 앞서 언급했듯이 고려 때도 중앙관청에 칠장(漆匠)을 소속시켜 칠공예 제품을 생산하게 했을 정도로 옻칠공예가 성행했다. 전국에 닥나무(楮), 잣나무(栢), 배나무(梨), 대추나무(棗) 등과 함께 옻나무(漆)를 심게 해 옻을 계획적으로 생산했다(『고려사』 권79 식화지 명종 18년(1188) 3월조). 그래선지 일찍부터 옻칠의 품질과 제작 기술이 뛰어났다.

“묵구(墨狗) 등 7명이 원나라에 금칠(金漆)을 보내라는 황제의 명령서를 갖고 왔다. 국왕(*원종)은 ‘우리나라가 비축한 금칠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때 모두 없어졌고, 생산지인 남쪽 섬은 요즘 역적(*삼별초 군대)이 왕래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틈을 타 생산해 보내겠으며, 우선 갖고 있는 열 항아리를 보냅니다. 옻칠의 액을 짜는 장인은 직접 생산지에서 징발하여 보내겠습니다’라고 보고했다”(『고려사』 권27 원종 12년(1271) 6월조).

원나라가 고려의 옻 품질이 뛰어나고 그것이 많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고 옻칠과 함께 장인을 함께 보내줄 것을 요구한 기록이다. 개경 환도 직후 옻칠이 많이 생산된 남쪽 섬 지역이 삼별초 군대에 점령되어 제대로 생산될 수 없었던 사정도 알려준다. 고려는 위 기록대로 삼별초 난이 진압된 2년 후인 1276년(충렬왕2) 원나라에 황칠(黃漆)을 공납했다.

원나라가 요구한 금칠은 황칠의 다른 이름이다. 원래 칠에는 옻칠과 황칠 두 가지가 있다. 옻칠은 옻나무에서 채취한 짙은 적갈색 진액이다. 지금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옻은 황칠나무에서 주로 채취한 황금 색깔의 진액이다. 서긍도 당시 ‘나주지역에 황칠이 많이 생산되어 왕실에 공납되었다’라고 기록했다(『고려도경』 권23 토산조). 조선 후기에 이수광은 ‘고려의 황칠은 섬에서 생산되는데, 6월에 채취하였다’(『지봉유설』 권19)라고 전한다. 황칠은 부와 권력의 상징인 노란색을 띠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또한 금 색깔과 같다고 해서 금칠이라 불렀던 것이다.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황칠나무는 남해안과 일대 섬에서 자라는 우리나라 토종의 늘 푸른 넓은잎나무다. 금빛을 띠면서 나뭇결을 살려내는 화려한 맛이 있어 왕실 등에서 선호했다(박상진,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 2004).

기병用 말 안장·언치도 나전으로 장식
서긍은 앞에서 본 것처럼 “고려의 나전 기술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극찬했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 나전 제품은 모두 목재제품을 이용한 것인데, 서긍이 극찬한 나전은 다른 제품이었다. 즉 그는 ‘기병이 사용하는 안장과 언치(안장 깔개)는 매우 정교하며 나전으로 장식하였다(騎兵所乘鞍韉極精巧 螺鈿爲鞍)’(『고려도경』 권15 기병마(騎兵馬)조)라고 말해 말 안장에 새겨진 나전 기술을 높이 평가했다.

1080년(문종34) 7월 고려는 송나라에 나전으로 장식한 수레(螺鈿裝車) 1대를 조공했다(『고려사』 권9, 1243년(고종32). 무신정권의 권력자 최이는 왕실 사람과 재추(*고위관료)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커다란 그릇을 나전으로 장식했다고 한다(『고려사』 권129 최이 열전). 즉 나전 기술은 목재 제품뿐 아니라 가죽 수레와 그릇 등 다양한 제품에도 적용되었던 것이다. 나전은 선물용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예종 때 문신 문공인(文公仁·?∼1137)은 거란에 사신으로 가서 나전 그릇을 선물로 많이 주었는데, 이후 거란의 사신이 고려에 오면 항상 나전 그릇을 요구하는 폐단을 낳았다고 한다(『고려사』 권125 문공인 열전). 고려에서 나전 제품이 많이 유통되고 외국에까지 널리 이름을 떨쳤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나전 기술 역시 칠공예 기술과 함께 발달된 것이다.

나전칠기는 이같이 칠공예 기술과 나전 기술이 함께 발달해야 생산될 수 있다. 어느 한쪽 기술만 발달하면 명품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제작된 제품이 송·거란·원나라 등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것은 당시 공예 기술이 높은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은 다른 분야에도 영향을 끼쳐 상감청자·고려지(高麗紙)·대장경을 명품의 반열에 올려놓게 했다. 이 점에서 고려왕조는 진정한 문화·기술의 강국이었다. 이외에도 고려선(高麗船)·금속활자·불화(佛畵) 등 수준 높은 명품 문화재를 낳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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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 201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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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은선의 우리 약초 이야기(42)황칠나무

간 해독·맑은 피 생성에 도움

닭백숙에 이용하면 금상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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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옻칠 천년, 황칠 만년.” “절대지존의 신에게 바치는 헌정품, 황금색 칠(漆).”

 황제의 옷인 곤룡포와 황룡포, 용상, 나전칠기, 중국의 자금성, 고려의 불상, <주역>에 나오는 명상판, 칭기즈칸의 갑옷 등에 빠짐없이 들어가는 것을 꼽는다면 바로 황칠이다.

 아열대 식물로 바닷가에서 잘 자라는 황칠나무는 동아시아와 남미, 말레이반도 등지에 약 70여종, 우리나라에는 전라남도 바닷가와 제주지역에 1종류가 분포돼 자라고 있다.

 황칠은 옻칠과 같이 나무에 상처를 내어 수액을 받아서 쓰는데 옻나무 수액이 검은색인 반면 황칠은 말 그대로 진한 황금빛을 띤다. 황칠은 내구성, 내열성, 방충성이 옻칠보다 훨씬 뛰어나다.

 고려가 건국되면서부터는 금칠을 더욱 많이 사용했는데, 아마도 불교가 융성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황제가 착용하던 상복인 황룡포는 강황으로 물을 들였고, 가슴·등·양어깨에는 보(補)라고 부르는 금실로 수놓은 오조룡(五爪龍)을 붙였다. 여기서 말하는 금실은 명주실에 황칠을 물들인 것이다. <고려사>에 보면 고려인들은 옻칠보다 나전칠기 기술이 훨씬 발달했으며 그 정교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적혀 있다. 

 황칠나무 수지에서 나는 향은 ‘안식향’이라 해서 사람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실크로드를 따라 움직였던 교역상들도 금칠과 안식향을 최고의 교역품으로 여겼었는데 이 또한 황칠이었다.

 황칠나무에는 자체 면역기능을 함유한 세스키테르펜·베타실린·아미노산·칼슘 등의 성분이 들어있다. 학명이 덴드로파낙스 모비페라(Dendropanax morbifera)이며 만병통치약으로 풀이된다. 간 해독에 좋고 맑은 피를 생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닭과는 상극이어서 황칠닭백숙으로 먹으면 좋다. 하지만 옻닭처럼 가려움증, 인후통, 입술 주위 포진 등의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때는 빨리 칠해목을 달여 마실 것을 권한다.

 <지리산 약초학교 대표이사>



지난해 10월 충남 공주 공산성에서 출토된 백제 의자왕 갑옷은 황칠(黃漆)로 제작한 것이었다. 국내에서 황칠 유물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중국에서 줄곧 상납을 요구할 정도로 화려한 광채를 띠는 황칠은 200여년 전 맥이 끊겼다. 원료인 황칠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운 데다 장인으로만 이어져오던 전통기법이 후계자가 없어 단절됐기 때문이다.

황칠명인 1호 백사(白士) 구영국(53)씨는 황칠 복원을 위해 20여년째 매진하고 있는 인물이다. 1978년 고교를 졸업한 뒤 공예계에 입문해 옻칠과 나전칠기를 두루 섭렵한 그가 황칠공예에 빠져든 것은 90년 일본 규슈(九州) 공대에 시찰을 다녀온 것이 계기가 됐다. 그곳의 일본인 교수가 황칠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것을 보고 “이건 아니다” 싶어 이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끝에 제작한 그의 작품은 이탈리아 네덜란드 미국 브라질 등 국제박람회에 출품돼 각광받았고, 청와대 영부인 접견실에도 문갑 화장대 이층장 등이 전시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골프채 지갑 지팡이 만년필 등 생활용품으로까지 황칠 작업을 확대시킨 그는 2003년 대한민국 전통공예대전에서 특별상을 수상하고 3년 전 세계황칠협회로부터 명인 타이틀을 받았다.

그의 황칠 작품 초대전이 25일부터 5월 1일까지 서울 인사동 갤러리 각에서 열린다. 황칠나무의 수액에서 추출한 금빛 물감을 칠하는 기법으로 제작한 그릇, 보이차함, 은비녀, 목찻상, 합죽선, 연 등 생활용품 40여점을 선보인다. MBC 드라마 ‘궁’(2006)의 소품으로 내놓았던 도자기의 경우 가격이 2억원에 달하고, 웬만한 작품이 1000만원 이상일 정도로 비싼 편이다.

구씨는 이번 전시의 수익금을 다문화 가족과 탈북자 돕기 기금에 쓸 예정이다. 그는 “공예의 기능은 예술이기 이전에 쓰임새에 있다”며 “일반인들이 황칠에 대해 많이 알고 생활용품으로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부담 없는 가격으로 전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25일 오후 5시 전시장에서 작가와의 대화 시간이 마련된다(02-737-9963).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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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금빛 천연도료로 알려진 1,000년 전 황칠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경주의 황남동 신라제사(祭祀) 유적에서 흙 그릇에 담긴 채 발견된 유기물 덩어리를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에 맡겨 성분분석을 한 결과 황칠로 확인됐다고 8일 발표했다. 보존과학실의 연구에 따르면 이 물질은 전남 해남에서 자라고 있는 황칠나무의 황칠과 성분이 똑같고, 해남과 완도 산 황칠에만 들어있는 베타 셀리넨 성분도 검출됐다.

황칠은 한반도 서남해안에서 나는 신비의 물질로 고대로부터 중국까지 널리 알려졌고 여러 문헌에 기록이 남아 있으나 정작 국내에는 확인된 황칠 유물이 없고 황칠 공예의 전승도 끊긴 상태다.

황칠은 황칠나무 줄기에 상처를 내서 뽑아낸 수액을 정제한 것으로, 니스나 래커처럼 투명하면서도 한 번 칠 하면 수백 년 이상 은은한 금빛을 잃지 않는 천연 도료다. 그 빛깔이 몹시 아름다울 뿐 아니라 나무나 쇠에 칠하면 좀과 녹이 슬지 않고 열에도 강해 ‘옻칠 천 년, 황칠 만 년’으로 통한다. 그러나 ‘아름드리 나무에서 겨우 한 잔 넘칠 정도’(다산 정약용의 시 ‘황칠’에서) 밖에 나오지 않는 귀한 것이라, 궁중 물품에나 쓰였다. 삼국시대에는 철제 투구나 갑옷, 화살촉 등에 발랐고, 고려 시대 왕의 용포나 용상 등에도 쓰였다고 전한다. 다산의 ‘황칠’ 시는 황칠을 바치라는 왕실의 지나친 공납 요구에 시달린 나머지 백성들이 황칠나무를 베어버렸다는 대목도 있다.

황칠은 중국이 탐낸 물품이기도 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무왕 조에는 백제가 당에 고구려를 제어해달라며 황칠 갑옷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고, 중국의 북송시대 문헌인 <책부원구>은 당 태종이 백제에 사신을 보내 의전용 갑옷에 입힐 금칠을 요청했다고 적고 있다. 베이징의 자금성 내부를 치장한 금빛도 한국산 황칠로 알려져 있다.

오랜 세월 맥이 끊겼던 황칠은 90년대 초 전남 해남의 해안가에서 황칠나무가 자생하는 것이 발견되면서 최근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천연도료로서 황칠의 탁월함 뿐 아니라 항암성분 등 다양한 약리작용까지 밝혀짐에 따라 전남도는 지난해부터 황칠 산업화에 나섰다.

그러나 황칠로 제작된 유물은 아직까지 국내에서 확인되지 않고 있다. 황칠공예의 맥을 되살리는 일을 해온 황칠공예가 구영국(47)씨는 “일제 강점기에는 한국인이 황칠나무 잎만 따도 잡아간다고 했던 것으로 보아 한국의 황칠이 그때 일본으로 많이 유출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그는 “황칠의 특성으로 보아 황칠 유물이 국내 어딘가에는 남아 있을 법 한데, 박물관의 수장고 등을 뒤져 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1,000년 전 신라의 황칠 덩어리가 실제로 확인됨에 따라 황칠로 제작한 유물을 찾아내는 것이 숙제로 남았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서울신문]신비의 금빛 천연도료로 알려진 황칠(黃漆). 은은한 황금색에 내열·내수·내구성이 강한 황칠은 고대부터 공예품의 표면을 장식하는 데 쓰였다. 문헌에는 황칠을 예찬한 기록이 많다.‘삼국사기’에 보면 “백제가 금빛 광채의 갑옷을 고구려에 공물로 보냈다.”고 적혀 있으며 신라는 칠전(漆典)이라는 관청을 두고 국가가 칠 재료 공급을 조절하였다고 전해진다. 

사진 글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조선시대 중국 조공으로 마구잡이 벌목

황칠은 두릅나무과 상록 활엽수인 토종 황칠나무에서 채취한 액체를 정제해 만든다.“아름드리 나무에서 겨우 한잔 넘칠 정도. 상자에 칠을 하면 검붉은 색 없어지니 잘 익은 치자물감 어찌 이와 견주리요.”

다산 정약용의 ‘황칠’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다산이 시로 지을 만큼 칭송한 황칠은 순금을 입혔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황금빛이다. 그 빼어남 탓에,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조공 요구와 조정 공납을 감당하느라 마구잡이 벌목으로 이어졌다. 이후 토종 황칠나무를 볼 수 없게 되면서 전통 칠공예로서 황칠도 사라져갔다.

최근 남서해안 및 도서 지역에 황칠나무가 자생하는 것이 발견되면서 오랜 세월 맥이 끊긴 황칠이 다시 각광받고 있다. 지난 8일 토종 황칠나무 수액의 채취 과정을 보고자 국립산림과학원 특용수과 김세현(49) 박사와 함께 제주도 서귀포시 상효동의 자생군락지를 찾았다.

제주도에 70% 자생… 15년생부터 채취

한반도의 황칠나무 중 70%가 자생한다는 제주도. 도민들 대부분이 황칠나무를 잘 몰라 땔감이나 부목용으로 벌채를 해 지금은 일반인이 접근하기 힘든 계곡에만 남아 있다. 그나마 15년 이상 자라야 채취가 가능해 대량생산이 어렵다고 한다.

김 박사는 1991년부터 5년간 전통 황칠의 복원 및 산업화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 우량개체를 골라 유전자 보존을 하는 작업과 수액 채취 방법을 개선하는 데 실적을 쌓고 있다. 김 박사는 “잎에는 다량의 사포닌 성분이 있고 꽃에는 꿀이 있으며 원적외선 방사 에너지가 방출된다.”며 황칠나무의 용도가 다양함을 강조한다.

일제 강점기땐 잎만 따도 잡아가

구영국(48·황칠공예 명인 127호)씨는 200년간 끊어진 전통 황칠공예의 맥을 이으려는 장인(匠人)이다.“옻칠은 잘 알면서도 우리의 전통 황칠을 모르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그는 경기도 분당에 있는 작업실에서 다양한 소재에 황칠을 시도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 사람이 황칠나무 잎만 따도 잡아간다고 했어요.” 당시 일본으로 한국의 황칠이 유출됐으리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일본은 이미 황칠의 비밀을 풀었지만 정작 국내에는 확인된 황칠 유물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옻칠이 천년이면 황칠은 만년이라고 했어요.”

보존성이 뛰어난 황칠의 특성상 국내 어딘가에는 유물이 남아 있으리라고 구씨는 확신한다. 박물관 수장고를 뒤져서라도 황칠 유물을 찾는 것이 그의 바람이고 숙제다. 그 숙제를 푸는 날 우리는 빛나는 전통문화 하나를 되찾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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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화제]천년 만에 부활하는 신비의 도료 '황칠'

◇황금빛 비색 탁월한 내열, 내구성… 전자파 완전 흡수, 이용 가능한 곳 무궁무진◇ 

칭기즈칸 테무진의 갑옷과 천막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는데, 이는 ‘황칠’이라는 비기(秘技)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궁전과 집기류 등 황제의것이 아니고는 사용치 못했으며 불화살로도 뚫을 수 없는 신비의 칠이라고 전한다.’(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백제의 서남쪽 바다 세 군데 섬에서 황칠이 나는데 수액을 6월에 채취하여 기물에 칠하면 황금처럼 빛이 난다’ ‘백제로부터 토공(공납)으로 황칠 5되 3홉을 거두었다.’(중국 통전)

‘황칠’(黃漆). 옻칠에만 익숙한 우리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국의 역사가들은 이를 한결같이 한반도 서남해안에서만 나는 ‘신비의 도료’라고 적고 있다. 중국 25사와 영파사지(英坡寺誌), 책부원구(冊府元龜) 등 각종 역사책들은 진시황제가 ‘불로초’라 믿으며 해동국에서 가져온 나무가 바로 ‘황칠나무’이며, 통일신라 때 해상왕 장보고의 교역상품 중 최상품이 황칠액이었다고 전한다. 심지어 중국의 사서(四書) 가운데 하나인 주역의 서문에도 ‘황칠판 위에서 이 책을 명상하라’고 쓰여 있을 정도다.

황칠나무의 국제학명조차도 덴드로-파낙스(Dendro Panax), 라틴어로 만병통치약을 지칭하는 인삼나무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구상에서 한반도 서남해안에만 존재했다던 황칠나무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이토록 유명했던 황칠을 우리는 왜 모르고 있는가. 중국의 사서(史書)들은 낯설기만 한 황칠나무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가지게 한다.

◇해남에 ‘황칠나무’ 3천 그루 자생◇

하지만 황칠나무는 이제 전남 해남군 일대와 완도지역에서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순금의 비색과 신비한 약효로 ‘사라진 나무’라 칭해졌던 황칠나무가 전남 해남군 서남해 일대에 실존한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기 때문. 그것도 한두 그루가 아닌 수만 그루가 자생하고 있으며, 이나무에 대한 양묘사업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1000년 동안 숨겨졌던 황칠나무가 그 ‘비밀’의 빗장을 풀고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내기까지에는 황칠에 ‘미친’ 한 농부의 20여 년의 추적과 집념이 있다. 전남 해남군 마산면 상등리 ‘아침재 산막’ 주인 정순태씨(49)가 그 주인공.

공학도로 방위산업체에 근무하던 그는 지난 80년 한학자인 아버지의 유고를 정리하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시선(詩選)에서 ‘황칠’ 이라는 시를우연히 발견한다.

“그대 아니 보았는가. 궁복(장보고의 호)산 가득한 황금빛 수액을. 그빛이 맑고 고와 반짝반짝 빛이 나네. 껍질 벗겨 즙을 받길 옻칠 받듯 하는데 아름드리 나무에서 겨우 한 잔 넘칠 정도. 상자에 칠을 하면 검붉은색 없어지니 잘 익은 치자물감 어찌 이와 견주리요. 이 나무의 명성이 천하에 자자해서 박물지에 줄줄이 그 이름 올라 있네….”

이후 그는 중국 문헌은 물론 우리의 사서를 뒤지기 시작했다. ‘천금목(千金木)이라 하여 그 진은 안식향(安息香)으로 쓴다’ (임원십육지), ‘황칠의 주산지는 전라도 완도’(해동역사)….

문헌을 바탕으로 10년간 틈틈이 서남해안 섬들과 해남 지역을 헤매던 그는 결국 완도 상황봉과 보길도, 진도 첨찰산, 해남군 두륜산 등 전남 도서지역과 해안 일대 19개 지역에서 황칠나무가 자생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지난 90년 서울 생활을 정리했다. 가족과 함께 해남 땅으로 내려와 귀농 생활에 들어간 것.

순금으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의 황금빛 비색과 상상을 초월하는 내열성과 내구성, 벌레를 쫓아내고 정신을 맑게 하는 안식향(安息香), 중풍`-`오십견`-`항암제로도 사용되는 약용 성분 등 각종 문헌들에서 밝혀진 황칠의 역사적 효능들은 그를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다산의 황칠시에서 ‘아름드리에 겨우 한 잔’이라고 표현했듯, 문헌상의 채취 방법으로는 도저히 경제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각 지역에 흩어진 자생림이 모두 50년생 안팎의 황칠나무인 것을 알고는 크게 낙담했다. 그 수액을 채취한 결과 극소량인 점을 알게 된 것. 동시에 바로 이 점이 황칠나무의 존재를 우리 역사에서 증발시킨 장본인이었다는 사실도 찾아냈다.

‘…공납으로 해마다 공장에게 옮기는데 관리들 농간을 막을 길이 없다. 지방민이 이 나무를 악목(惡木)이라 여기고서 밤마다 도끼 들고 몰래 와서 찍었다….’

다산의 황칠시의 한 부분은 황칠의 희귀함에서 오는 민폐가 얼마나 심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중국 자금성의 용상과 어좌를 비롯한 각종 집기류와 천장, 벽면을 모두 도장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황칠액이 필요했겠는가. 병자호란을 거친 후 청나라는 조선의 임금에게까지 황칠 사용을 금지한 뒤, 세계 유일의 황칠 생산지인 전남 해안에 대한 감시와 수탈을 강화한다.

‘수탈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황칠나무에 구멍을 뚫고 호초를 넣어 나무를 말라죽게 하거나 밤에 몰래 도끼로 아예 베어내 버렸다’ (목민심서 ‘산림’편) ‘갑인년 어느날 소금비 내린 뒤로 모조리 말랐다.’ (다산 탐진촌요 제2수) 다산은 황칠나무의 ‘멸종’을 중국 황실의 횡포와 1801년에 내린 소금비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다산에서 시작해서, 그에게 절망하고, 다산에서 다시 희망을 얻었습니다.” 정씨는 다산의 시 모음집인 탐진촌요(耽津村謠) 제8수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지난해 황칠 공납이 없어진 뒤 베어낸 밑둥치에서 새싹이 나고 가지가 뻗었다.’ 1803년에 쓰인 이 시가 해남 유배 당시 쓰인 점에 착안한 그는 해남 지역 산지를 샅샅이 훑었다. 그 당시에 다시 싹이 났다면 대단위 군락지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 때문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랄까. 지난 95년 그는 해남 모 지역에서 200년 이상 된 3000여 그루의 황칠나무 군락을 발견한다.

◇인공조림 성공… 상품개발 박차◇

이에 고무된 그는 아침재 산막 인근 2000여 평 비닐하우스 11동에 2만5000그루의 황칠나무 묘목을 심어 5년 만에 완전한 성공을 거뒀다. 자라나는 시기를 앞당김으로써 칠액 채취 시기도 10년생 이상에서 5년생으로 앞당겼다. 시험삼아 황칠액을 칠한 전통 태극선 부채를 700만원에, 가구를 6000만원에 내놓았더니 사겠다는 문의전화가 쇄도했지만 팔지 않았다. 조림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마구 팔다보면 황칠이 고갈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황칠나무에 대한 소식이 알려지자 전남도는 자생 실태의 전면 조사에 나서는 한편, 연구진들을 동원해 대대적인 황칠 연구를 벌였다.

산림청의 이명수 사무관은 “전남도의 최종 보고서에 의하면 200도를 견뎌내는 내열성과 내구성, 내습성, 빛깔의 우수성을 확인했다”며, “이로써 황칠이 래커나 니스, 옻칠 등 기존 도료와는 상대가 안 되는 초특급도료임을 증명한 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번 조사를 통해 안식향의 성분이 밝혀졌다고 전했다. 황칠 속에 든 ‘베타큐버빈’이라는 방향성 정유성분이 머리를 맑게 하고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는 효과를 낸다는 것.

정씨는 이런 연구 성과를 토대로 지난해 6월 ‘파낙스 골드’라는 농업벤처를 설립하고, 황칠을 이용한 상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황칠 염료, 도료, 향료, 신약, 전자파 흡수제 등 갖가지 종류의 상품이 출시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그의 이런 도전과 함께 농협은 이를 전남 지역의 주력상품으로 지정했으며, 서울대 생명공학부 등 국내 굴지의 연구소까지 경제적 효용가치에 대해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민승규 박사는 “조사 결과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조할 아이템임이 충분한 것으로 판명됐다”며 “이제는 어떻게 경영을 할 것인지의 문제만 남았다”고 단언했다.

“미래에는 레이더에도 잡히지 않는 전투기의 도장재료로 이용될 것입니다.” 정씨는 지난해 12월 벤처농업포럼이 주최하는 심포지엄에서 충격적인 발언으로 청중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가 근거로 내놓은 목포해양대학교의 실험 자료는 그의 말을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기 어렵도록 만들었다. 전자파 흡수율에 대한 연구 결과 대부분의 도장제가 전자파를 반사시키거나 통과시킨 반면, 황칠은 전자파를 완전히 흡수해 버린 것.

“스텔스 폭격기의 도장사가 일본인인 걸 아십니까? 일본이 일제시대를거쳐 1970년대까지 황칠을 훔쳐간 사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황칠의 비밀을 풀었지만, 일본의 황칠나무에서는 수액이 나오지 않으니 어쩌겠습니까.” 

정씨는 ‘황제의 나무’ 황칠나무로 ‘산림부국’(山林富國)을 이룰 꿈을 꾸고 있다.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 

<주간동아 제276호>

[제주]제주 황칠나무 의약-산업자원으로 키운다

수액에서 금빛천연도료인 황칠 추출… 항균-항산화 효과 새롭게 확인

당뇨-고혈압 민간요법으로도 쓰여

[동아일보]

1일 오후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하천인 신례천 주변. 종가시나무 동백나무 사이로 회색빛 줄기의 늘푸른나무가 하늘 높이 솟아 있다. 키는 20m나 되지만 줄기는 어른 팔뚝 굵기 정도밖에 안된다. 신비의 금빛 천연도료로 알려진 황칠(黃漆)이 나오는 ‘황칠나무’다. 국내에서 황칠나무 자생지는 제주도를 비롯해 전남 보길도 등 남해안 일부 지역에 불과하다. 그중에서도 제주지역은 국내 자생 황칠나무의 70%가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황칠은 고대 공예품의 표면을 장식하거나 왕의 갑옷, 집기 등에 쓰였다. 오래 유지되는 황금빛 때문에 ‘옻칠 1000년, 황칠 1만 년’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조선시대 조정 공납과 중국의 조공 요구가 많아 마구잡이 벌목으로 대부분 사라졌다. 전통 황칠공예도 자취를 감췄다가 최근 명맥을 잇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황칠은 나무에 상처를 낸 뒤 흘러내리는 액체를 정제해 만든다. 10년생 이상된 나무 한 그루에서 불과 3mL가량만 나올 정도로 귀하다.

○ ‘옻칠 1000년, 황칠 1만 년’

황칠나무를 산업화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황칠나무를 주제로 20여 편의 논문이 나올 정도로 연구도 진척됐다. 황칠성분 가운데 방부제 역할에 주목하다 항균 항산화에 효험이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확인됐다. 간세포를 재생하는 능력을 비롯해 당뇨 고혈압에도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민간요법으로 이용되고 있다.

제주대 생명과학기술센터는 민간기업인 제주파나텍㈜(대표 김재언)과 손잡고 황칠나무를 이용한 시제품을 출시했다. 황칠나무 추출물에 동결건조 기법을 접목시켜 액상, 환(丸), 분말 상품을 만들었다. 별다른 첨가물을 넣지 않고 황칠나무 추출물이 99% 이상 들어간다. 이들 제품을 만들기 위해 황칠나무를 옹기에 넣어 숙성시킨 뒤 발효액을 얻어내는 기술을 개발해 특허를 획득했다. 김 대표는 “민간에서 황칠나무를 이용할 때 불순물이 섞일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며 “현재는 건강기능식품으로 개발했지만 추가 연구를 거치면 의약품 원료로 쓰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 새로운 산업자원으로 주목

제주 황칠나무 자생지는 한라산 남쪽 지역에 집중돼 있다.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황칠나무는 연중 최저기온 영하 2도 이상, 평균 14∼16도에서 잘 자란다. 바람에 쉽게 뽑히기 때문에 군락을 이루지 않고 후박나무 구실잣밤나무 등 상록활엽수 사이에 띄엄띄엄 자생하며 바람을 피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제주도는 황칠나무를 대표적인 향토자원으로 키우기 위해 농림축산식품부에 향토산업육성사업으로 지정해주도록 신청했다. 심사를 거쳐 지정되면 30억 원의 사업비가 투자된다. 산학 공동사업으로 추진해 인공조림, 제조, 관광 등을 융합한 지역 대표상품으로 육성한다. 식물연구가 김철수 씨(전 제주도 한라산연구소장)는 “제주는 황칠나무 대량생산에 최적의 기후조건 등을 갖추고 있다”며 “효과가 입증되면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삼나무, 사양길에 접어든 귤나무 등을 대체할 수 있는 산업화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일본 중국 등에서 자라는 황칠나무는 황금빛 황칠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토양 해풍 기후 등의 영향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잎은 하나의 나무에 오리발 형태를 비롯해 타원형 원형 등으로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다. 전문가들은 황칠나무에 대한 세부연구나 조사가 이뤄지면 더욱 다양하게 개발 가능한 ‘미개척 식물자원’으로 보고 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