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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족과 쿼터리즘 그리고 모바일 오피스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1. 2. 9. 17:55

<김헌식 칼럼>찰나족과 쿼터리즘 그리고 모바일 오피스

 2010.04.21 08:59

 




[김헌식 문화평론가]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인간의 편의를 도모하는 것이겠다. 방적기계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더 이상 고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많은 생산물을 얻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러한 면이 없지 않았다. 여기에서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일부에 불과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은 당장에 생존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 고된 노동에서 벗어난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생존을 도모하려면 고된 노동이 아니라 기계 테크놀로지에 적응해야 했다. 얼핏 볼 때 기계에 적응하는 것은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노마디즘'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에게 선호되었다. 들뢰즈의 이름값에 기댄 감이 없지 않았다. 곧 대중 확산은 상품성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광고에도 빈번하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백로효과'와 '구별짓기'의 자존감이 일으키는 대중심리에 부합하는 개념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디지털 노마디즘은 인터넷 공간의 자유와 평등성을 연상시키며 많은 부가 상품의 홍보와 연관이 깊게 되었다. 

상부토대와 하부토대의 근본테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 사이버 공간도 마찬가지임은 부정할 수 없다. 디지털공간의 노마디즘은 유리속의 정원과 같았다. 노마디즘은 결국 포털이 만들어 놓은 매트릭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것이 블로그이거나 카페, 미니홈피를 막론하고 네티즌 스스로 구축한 시스템은 아니었다. 비록 자유롭게 공간을 누빈다고 해도 그 공간을 누비는 여력은 현실적인 경제력과 시간에 버금가는 것이기도 했다. 현실적인 계층과 계급은 노마디즘의 한계를 이미 배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블로그나 카페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이들은 진정한 노마디스트들이 아니었다. 예컨대 슈퍼 블로거들은 그 상당한 영향력 때문에 선망의 대상이 되거나 수익모델로 부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슈퍼 블로거들은 소수점 이하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동의 강도를 감내해야 했다. 

그러한 노동을 감내하고도 일정한 결과가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더욱 모순이 심각해진다. 거의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듯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에서 큰 노동을 투여하고도 제대로 된 대가를 얻지 못하고 만다. 물론 어떤 계약이나 조건이 없이 자율과 자발성이라는 아름다운 명분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젊은이들이 자유와 개성을 맘껏 뽐내는 마당이 디지털공간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들 역시 누군가 만들어놓은 매트릭스에 갇히기 일쑤이다. 쿼터리즘이라는 단어를 비집고 찰나족이라는 단어가 최근에 만들어진 모양이다. 비슷한 맥락의 말이지만 더욱 조금하고 순간적인 흥미와 관심에 따라 노마디즘의 현상을 이끌어내는 특성을 담고 있다. 

그것을 이끌어 낸 것이 스마트폰이라는 지적이 부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의문점이 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스마트폰을 구입했으며 그것을 통해 자유자재로 디지털 공간을 항해고 있는지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무엇보다 디지털 공간이라는 테크놀로지 공간은 경제적 생산성을 향상시켰지만, 그에 따르는 노동을 증가시켰다. 또한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디지털 중독이라는 정신적 질병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각족 질병들을 만들어 내었다. 아이폰의 경우 수많은 어플리케이션이 있지만, 사실 차별화되는 것은 바로 모바일 오피스를 명확하고도 효과적으로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그외에도 스마트폰은 일을 더많이 시킬 수 있는 서비스들을 담고 있다. 아이폰의 콘텐츠와 서비스들은 소비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노동의 강도 면에서도 중요하겠다. 

더구나 손 안에 모든 검색과 정보가 들어 있다는 가정은 인간의 지적인 정보 기억을 퇴화시킬 것이다. 또한 자체적인 판단과 기호의 능력이 위축될 가능성도 있다. 즉 손안에 스마트폰을 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이 계속 업그레이드 되는 것은 결국 이러한 종속성을 종국의 목표로 삼는다. 

마찬가지로 아이폰과 스마트폰의 매트릭스에 달콤하게 빠질 것이다.물론 그 매트릭스의 단물을 빨아먹는 것은 공짜가 아니며 무료 콘텐츠는 곧 유료화의 수순을 밟는다. 그 전에 경쟁적인 이용만이 이익을 점유하는 것이겠다. 이렇다면, 콘텐츠 제작자의 수익회전 담보할 수 없겠다. 제작 구조속의 노동강도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들은 다름 아닌 찰나족, 노마디즘 족들이다. 

무엇보다 기계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에서 능력을 상실하거나 위축된 이들은 기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더욱 노동의 강도가 늘어나기 마련이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디지털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대신하는 정도가 편리성을 넘어 귀차니즘 수준으로 올라간다면 노동의 감소가 아니라 노동의 강도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기계가 절약해준 시간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 잃은 능력을 벌충하는 노동까지 생각하면 말이다. 

스마트 폰도 여타 테크놀로지 제품과 같은 '상품성 딜레마'가 있다. 핸드폰이나 여타 다른 수많은 디지털 콘텐츠 서비스에서 이용자가 사용할 수 있는 주요 기능은 기계 안에 몇 개 되지 않는다. 수많은 서비스와 콘텐츠는 장식 효과과 서비스와 상품의 가격을 올리는데 작용할 뿐 실질적으로 일상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결국 엄한 곳에 개발비를 투여하고도 실패하고 만다. 그것은 도태를 의미한다. 어쨌든 수많은 그 스마트폰을 통해 고용한 이들은 자신이 고용한 이들의 노동 강도를 높일 것이다. 일을 당하는 이들은 그것을 피해가려할 것이다. 그 사이에서 다시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진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