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한국인선수단이 입장하는 장면. |
베이징 올림픽은 많은 메달리스트를 탄생시켰다. 미디어는 즐겁고도 피곤하게 메달리스트들의 뒷얘기에 관한 대중적 갈망을 충족시켜야 한다. 자발적으로 혈안이 되면서 무엇을 찾는가. 가난과 불행 그리고 고통이다. 일단 가난한 집 자식이라면 얼마나 좋은가. 그것도 지질하게도 못살아야 한다. 학교 수업료를 내지 못하고, 한 몸 뉘일 공간조차 없는 집이어야 한다. 다만 이제 물로 배를 채우거나 라면을 주식으로 삼는 이야기는 비현실적이니 주의해야 한다. 가족이 불행하면 상품성은 올라간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안 계시거나 최근에 돌아가셨으면 금상첨화다. 혹은 현재 암으로 투병 중이거나 사경을 헤매고 있다면 환호할 일이다. 가난보다 더 좋은 게 가학성이다. 몸을 하나라도 못 쓰면 좋다. 훈련 과정에서 팔이나 갈비뼈가 나갔으면 호재(好材)다. 자칫 스스로 뼈를 깎는 고통을 겪지 않은 이들은 메달리스트로 자격이 없는 모양새다. 고통과 불행 속이라면 은메달이 아닌 동메달을 딴 이들의 가치는 올라간다. 반면 부모님도 다 계시고,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는 선수들은 수치스러워진다. 아니 스스로 몸을 가학하며, 고통과 불행을 부과하지 않는 이들은 메달 자격이 없는 모양새다. 메달을 따지 못한 게 당연하다. 그러나 고통이나 불행과 메달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자신의 몸을 학대한다고 높은 성과를 보일 이유가 없다.
국가적 가치 실현을 유도하기 위한 병역과 포상금은 앞의 현상을 부채질한다. 서구의 개인주의 문화권과 달리 우리 같은 집단주의 문화권에서는 개인의 희생으로 집단의 가치와 목표를 이루려 한다. 어느 것이 더 우월할 수는 없지만 고리타분하다는 공자가 이렇게 말했다던가. “즐기는 사람은 아는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도 이기지 못한다.” 우리 선수들은 아직 즐겁게 스포츠를 하지 않는다. 엄청난 사회적 부담의 공기 속에서 경기에 임한다. 가학적 자기 파괴는 만일의 집단 폭력에 대응하는 방어기제이자 면죄부다.
한국 선수에게 올림픽은 즐거운 축제가 아니라 자의반 타의반 자기 파괴의 전쟁이다. 집단적 가학에서 벗어날 때 메달을 따지 못했다고 울며 사죄하는 선수는 없을 것이다. 소중한 자기 몸을 부숴서 훈련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때 불행과 고통을 상품화하는 미디어 산업도 사그라질까. 무엇보다 스포츠 강국이 되려면, 선수들이 모두 즐겨야 하지 않을까.
김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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