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극’ 하면 대개 왕위 찬탈전을 그린 궁중극이나 영웅의 일대기를 그린 서사극, 혹은 ‘제5공화국’ 유의 정치드라마를 떠올리게 된다. 아울러 특유의 진지한 분위기와 전통적 연출 방식들도 함께 연상된다. 그러나 최근의 시대극은 이런 연상들과 거리가 멀다. 시대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독특한 소재, 감각적 영상 등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지난달 31일 막 내린 KBS2 ‘한성별곡-정(正)’은 ‘미스터리 추리사극’이라는 생소한 장르를 표방했다. 조선 후기 정조시대를 배경으로 누군가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둘러싼 미스터리를 좇는 드라마다. 연속적으로 같은 방식의 살인이 일어나고, 음모를 밝히려는 이들과 음모를 꾸미는 자들의 쫓고 쫓김이 손에 땀을 쥐게 했다. 기존 사극에서 볼 수 없었던 촘촘한 호흡의 전개, 현대 추리물 이상의 탄탄한 스토리, 감각적 영상의 3박자를 갖췄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통 16부작으로 제작되는 다른 미니시리즈와 달리 ‘한성별곡-정’은 8부작으로 기획됐다. 때문에 속도감 있는 편집이 눈에 띈다. 그렇다고 내러티브가 성긴 것도 아니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세밀한 스토리 구조를 갖고 있다. 소품들도 진부하지 않다. 당시 신문물이었던 ‘망원경’, 시집 안 간 처녀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었다는 값비싼 ‘가채’, 군사들의 훈련을 참관하는 장면에서 임금이 쓰고 있던 보호경 등은 감각적인 미장센을 만드는 데 한몫했다. 곽정한 프로듀서는 “물질 문명이 새롭게 등장하는 시대가 인간의 욕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총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주인공 캐릭터만큼이나 주변 환경을 중요하게 다뤄야 했다”며 “기존 사극처럼 대사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미장센, 영상에 주목했다”고 밝혔다.
‘한성별곡-정’이 갖는 또 하나의 미덕은 ‘백성’의 입장에서 현재의 사회상과 가깝게 소통하며 공감을 자아냈다는 점이다. 기존 사극들이 궁궐 안 양반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 것과 대조적이다. 상인과 민초들이 저자로 모여 들어 포졸들과 대치하는 ‘격쟁’ 장면은 오늘날 시위대와 전경 간의 몸싸움을 떠올리게 했다. “백성들이 못 먹고 못 사는 게 왜 우리 사대부 탓인가?”라는 한 사대부의 물음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현대 정치인들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지난 1일 막 내린 KBS2 ‘경성 스캔들’(위)은 형식면에서 좀더 시대극의 전형을 탈피했다. 시대적 배경은 일제강점기의 경성이지만 분위기는 경쾌한 로맨틱 코미디에 가까웠다. 주인공 선우완은 소문난 ‘모던 보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동경(도쿄)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조국의 독립은 그와 먼 얘기다. 그저 ‘모던 걸’들과의 연애만이 관심사다.
그러나 시대가 단지 연애의 배경으로만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불운했던 역사는 개인의 연애사와 가깝게 조응한다. 혁명에 관심 없는 선우완이 나여경의 사랑을 얻으려면 독립운동에 뛰어들어야 한다. 나여경은 자신의 의사와 달리 독립운동을 위해 선우완이 아닌 이수현을 사랑해야 한다.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모니터 부장은 “처음에는 시대만 차용하고 연애 내용만 다뤄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당시 젊은이들이 가질 법한 세세한 고민들을 시대 속에 잘 녹여내 시대극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MBC드라마넷에서는 12일부터 조선시대 법의학과 과학수사 방식을 고증한 추리 형식의 드라마 ‘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이 방송된다. 지난해 초 시청률 저조로 방송 5회 만에 조기 종영됐던 것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별순검’ 역시 철저한 고증을 통한 다큐멘터리 형식을 선보여 ‘한국판 CSI’라는 평을 받은 바 있다.
문화평론가 김헌식씨는 “이른바 ‘퓨전 사극’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드라마는 갑자기 나온 것 같지만 과거부터 조금씩 새로운 시도들이 있어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며 “‘한성별곡’의 경우는 ‘대장금’ ‘허준’ ‘다모’ 등이 갖고 있는 요소들을 조금씩 갖고 있고, ‘경성스캔들’은 ‘패션70’s’ ‘서울1945’, 멀게는 ‘여명의 눈동자’ 등의 계보를 잇는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다양한 시도들이 계속되는 것은 또 다른 새로운 형태의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평했다.
〈이로사기자 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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