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영화는 불평등 문제를 핵심 테마로 삼아 왔다. 그것이 개인이냐 집단이냐의 차이로 존재할 뿐이었다. 국가와 개인의 억압과 갈등은 지난 화두이기 때문에 고민의 지점도 이동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영화 “기생충”은 기존의 불평들 관점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본래적인 경향과 사회구조의 관점에서 봉준호 관점의 진화이다.
홉즈는 인간이 이기적이기 때문에 불평등이 생긴다고 했다. 성악설이다. 맑스는 성선설의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인간은 선하지만 그들을 악하게 만드는 것은 분배구조 특히 생산관계의 소유에 있다고 했다, 그 구조만 바꾸면 평등한 세상에서 인간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했다. 기능주의자들은 분배는 차등 그러니까 불평등해야 한다고 보았다. 능력과 지위에 맞게 주어져야 사회질서가 유지된다고 보았다. 갈등론에서는 자원배분을 둘러싸고 왜곡되는 분배가 일어나기 때문에 불평등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제대로 분배를 해주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기능주의자들의 눈에는 그렇게 기계적으로 본배하는 것은 질서의 왜곡을 낳을 뿐만 아니라 누구도 열심히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즉 인센티브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영화 “기생충”은 부의 분배와 양극화 문제를 가족을 통해 잘 다뤄 좋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흔히 양극화라고 하면 부자에 관해 부정적인 시선을 투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봉준호 감독의 또다른 전작 영화 ‘설국열차’에서는 꼬리칸이 화제가 되었다. 첫 번째 칸부터 마지막 하층민이 타는 꼬리칸에 타기 위해 밖에 있는 이들은 필사의 노력을 했을 것이며 마지막 칸에 칸 그들은 첫 번째 칸으로 나아가기 위해 분투를 한다. 분투의 방식은 폭력이었지만 말이다. 물론 열차는 주인공의 손에 전복이 되었고 마치 혁명을 암시하는 듯한 결말을 맺어버렸다. 그러나 그러한 혁명적 전복은 허탈감을 준다. 우리는 설원의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여기에서 살아내야 한다.
영화 “기생충”은 그러한 고민과 과제의 연장선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이 영화에서 부자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빈민의 삶을 찬양하지 않는다. 영화 설국 열차에서도 이러한 점은 있었다. 그들이 모두 하나의 시스템 안에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 전체 시스템이 있는 한 가난한 자와 부자인 자는 대립하고 지배복종의 긴장 속에서 정해진 혁명의 이벤트가 반복된다는 것.
영화 “기생충”에서 부자는 오히려 구김살이 없고 모나지 않았다. 이는 빈민의 아내의 입을 통해서 확인된다. “오히려 부자들이 여유가 있어 성격이 좋다, 돈은 다리미다. 성격의 주름을 펴주는 다리미.” 우연히 친구의 배려로 부잣집 과외 선생으로 들어간 빈민가의 장남은 여동생, 아빠, 엄마를 불러들인다. 그 과정은 사기와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자신의 밥그릇에만 한정되었어야 한다. 그 적절한 선을 넘어가는 순간 누군가의 밥그릇을 뺐을 수 있다. 그 누군가는 또다른 빈민일 수 있다. 빈민의 지나친 욕심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혼자 빈민이 열심히 산다고 합리화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 가족은 부잣집에서 자신들의 집으로 넘어오는 돈에 열광을 한다, 부잣집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의 영위가 가능하다. 부잣집 덕분에 영위하는 그들만이 아니었고 그들은 결국 서로 싸워 이겨야 하는 관계가 된다. 이 과정에서 부자들이 착취와 지배한 것은 없다. 다만 그들의 냄새에 대해 못마땅했을 뿐이다. 그것은 분노를 일으키는 기제가 된다. 부자는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이 없어야 하거나 그들을 분노하지 않게 처신을 잘해야 한다. 하지만 부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관심이 없다. 자신들은 충분히 잘 살고 있고 그들의 세계는 영원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부자의 이면에서 자신의 생존의 빨대를 대어야 하는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면 그들은 곧 위험해질 수밖에 없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닌 게 그 이면이나 언더그라운드의 삶과 세상은 잘 보이지도 그것이 보이려고 해도 알아채지 못하는 부자들의 삶은 얼마나 살얼음판 같은가.
영화에서 부각되지 않은 게 있는데 부자도 더 큰 문제가 되고 싶으며 누군가에게 기생충이 되고 있는 지 모른다. 또한 누군가의 밥그릇을 빼앗고 피눈물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홉즈의 말대로 인간은 이기적이고 욕망 덩어리일 수 있다. 그 양상은 각자의 처지와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분배구조가 왜곡되어 부의 쏠림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 분배의 문제는 부자와 빈자 사이에만 일어나지 않으며 빈자와 빈자 사이에 부자의 부를 둘러싸고 분배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좀 더 잘 사고 싶거니와 자신은 개체 나아가 개체의 무리인 가족을 지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글 김헌식(박사 평론가 카이스트 미래세대 위원) codess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