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 홍길동 |
사극에 대한 시청자들의 고정관념을 깬 것은 이 드라마의 내용보다 형식이다. 퍼머머리에 선글라스를 착용한 길동과 사이키 조명이 돌아가는 나이트클럽 분위기가 풍기는 기생집에서 테크노댄스를 추는 무희들, 회원제로 운영되는 격구장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채 공이 그린 위 홀컵으로 빨려 들어갈 때마다 “호타(好打)”를 연발하는 캐디 등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의상과 소품, 그리고 설정은 사극과 현대극 사이를 ‘퓨전’이라는 이름 아래 자유롭게 오간다. ‘최초의 코믹사극’을 표방한 드라마답게 만화 같은 상상력이 무한대로 펼쳐진다. 퓨전(Fusion)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것이 합쳐져 새로운 것이 된 것을 뜻하는 용어다. 문화평론가 김헌씨는 “다양한 문화 기호들이 혼합돼 있는 ‘쾌도 홍길동’은 만화 ‘날아라 슈퍼보드’의 콘셉트와 상당히 유사하며 특히 만화적 기호가 많이 등장한다”며 “이런 사극을 명랑만화사극으로 규정하는 게 적합할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정통사극 작품도 상상력으로 덧칠
퓨전사극은 '다모'를 시작으로 사극의 주류가 되었다. 사진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주몽' '다모' '태왕사신기' '황진이' '해신' '대장금'. |
국내 퓨전사극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드라마는 2003년 방송된 MBC TV의 ‘다모’다. 무협지를 연상케 하는 현란한 와이어액션을 비롯해 유려한 영상과 흡입력 강한 줄거리가 당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스스로 ‘다모폐인’이라고 부르며 열광하는 이들도 많았다. 좋아하는 드라마 제목 뒤에 ‘~폐인’이라고 붙이며 마니아를 자처하는 것도 이때부터 유행했다.
처음으로 ‘퓨전사극’을 표방한 이 드라마의 성공은 이후 사극의 판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여러 사극이 퓨전사극의 옷을 입었다. 궁중 최고의 요리사에 이어 조선 최고의 의녀가 된 ‘장금’의 이야기를 그린 MBC TV ‘대장금’(2003년), 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의 일대기를 다룬 KBS TV ‘해신’(2004년)이 그랬다. 이후 ‘황진이’(2006년), ‘한성별곡-정(正)’(2007년), ‘주몽’(2007년), ‘태왕사신기’(2007년) 등 대다수 사극이 퓨전사극의 모양을 취했다.
특히 역사적 자료가 별로 없는 옛 고조선이나 고구려를 배경으로 한 ‘주몽’과 ‘태왕사신기’는 대부분 이야기가 판타지로 이루어졌다. ‘태왕사신기’의 경우 청룡·백호·주작·현무, 사신(四神)의 신물이 광개토대왕이 태어나면 깨어난다는 설정 등 만화적 설정이 즐비하다. 퓨전사극 열풍은 계속돼 SBS TV는 퓨전사극을 표방한 ‘일지매’(최란 극본, 이용석 연출)를 올 초 방송한다. 이 드라마에서 이준기는 조선시대 의적 일지매로 출연한다.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 등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면서 느리게 진행되는 과거 정통사극에 비해, 속도감 있고 형식과 내용이 변화무쌍한 퓨전사극이 주는 매력은 상당하다. 그 때문에 사극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시각도 적잖다. 손상익 코믹플러스 대표는 “‘쾌도 홍길동’ 등 퓨전사극은 판타지의 다양화라는 측면에서 대중문화가 가질 수 있는 외연의 폭을 넓혔다고 본다”며 “판타지의 세계는 한계가 없는 것이고, 대중문화를 창작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항상 색다른 시도로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고 정착시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퓨전사극 붐은 의미 있다”고 말했다. 문화평론가 김헌식씨는 “역사적 사실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소재를 다루면서 여러 가지를 섞을 때 퓨전사극은 진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대 및 국적 불명 의상 등 오해 소지”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무엇보다 역사 왜곡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불거진다. 매체비평우리스스로 노영란 사무국장은 “다양한 장르를 선보인다는 점에서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우리가 역사로 인식해야 하는 상황까지 지나치게 퓨전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쾌도 홍길동’만 해도 원전이 소설이기는 하지만 원전의 경우 대략 어느 임금의 집권기를 배경으로 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는데 반해 드라마에서는 캐릭터나 시대 및 국적 불명의 의상 등이 난무하면서 오해를 살 수 있다”고 꼬집었다.
노 사무국장은 또 “정통사극을 표방한 사극조차 터치가 가벼워지면서 퓨전사극 형태를 보이는 경우가 적잖다”며 “차라리 가상 인물과 이야기를 다뤄 시청자가 시대에 대한 인식 없이 볼 수 있는 드라마라면 괜찮지만 역사적 상황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이야기라면 제작진도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사극들의 퓨전화는 시청률 만능주의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서울여대 유흥식 언론영상학부 교수는 “요즘 TV사극의 가장 큰 문제는 드라마를 통해 교양이나 역사 학습 욕구를 자극하기보다 말초적인 재미를 부여해 시청률을 담보하려는 것”이라며 “만약 사극의 장르를 더 풍부하게 제공하는 면에서 한 종류로 퓨전사극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라면 몰라도 현재 퓨전사극이 인기를 끈다 싶으니까 그쪽으로만 쏠리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MBC ‘이산’의 경우 한때 KBS ‘대왕 세종’에 밀려 시청률이 떨어지자 긴급처방 차원에서 같은 방송사의 인기 오락프로그램인 ‘무한도전’ 출연진을 카메오로 출연시켜 눈총을 받기도 했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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