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저 담론의 한계와 희망
당연히 옳은 단어들이 본질을 호도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곤 한다. 최근에 루저 담론들이 형성되고 있는데, 과연 그 담론이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얼마 전 알파걸은 여성의 처지를 대변한 말로 회자되었다. 하지만 알파걸은 역설적인 운명을 타고났다. 오히려 그러한 말이 없을 때 더 나은 사회다. 남성과 여성이 평등한 사회라면 알파걸이나 여초현상이라는 말이 크게 회자되지는 않겠다. 알파걸이나 여초현상이 있는 사회일수록 여성 불평등이 강한 사회다. 더구나 알파걸은 남녀성 평등을 지향하는 개념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알파걸 같은 말이 아니라 그런 말이 형성되는 구조다. 알파걸, 베타남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들을 혹사시키는 자본주의 구조다. 알파걸은 남녀성을 경쟁시키면서 우승열패의 구조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제 루저에 대해서 살펴보자. 루저 정서의 옹호가 이른바 루저로 일컬어지는 이들을 위하는 것처럼 보인다. 루저 담론은 저항과 소통이며 문화적 다양성의 차원도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이 때문에 자신들이 루저들임을 감추지 말고 당당하게 선언하고 정체성을 규정하고, 서로 연대해야 한다고 한다. 때로는 한국 루저 담론과 문화를 공격한다. 즉 ‘공포의 외인구단’이나 ‘야망의 세월’, ‘에덴의 동쪽’ 같은 만화나 드라마는 하나같이 루저의 성공 지향이므로 진정한 루저의 정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루저 담론은 어떤 문제가 있는가. 루저 담론은 낭만주의와 결합된다. 예컨대, 장기하의 노래처럼 반지하방의 축축한 이불과 쩍쩍 달라붙은 방바닥의 기운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편안한 공간에서 살던 이들이 한 번 그 공간에 들어가 보았을 때 확실하게 인지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부잣집 도련님이 가난한 집에 와서 가난에 대해서 새삼 느끼고 낭만화하거나 작품으로 이름을 높이는 행위와 같다. 정말 가난한 사람들만 모여 살면 가난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들은 모두 균일하기 때문에 승자 패자 의식이 없다.
처음부터 승자와 패자는 이분법적인 구도이기 때문에 루저라는 단어 자체에 함몰될 필요가 없었다. 당연히 루저는 상대적이면서 절대 개념이기 때문이다. 즉 승자가 있는 한 루저라는 단어는 반드시 있게 된다. 결국 패자가 있기 때문에 승자라는 개념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승자에서 절대적으로 패자라는 개념이 나온다.
요컨대, 처음부터 루저라는 개념은 루저들의 중심성을 상실한 채 자본의 논리에서 태어났다. 88만원세대의 개념대로 적은 연봉을 받고, 단단한 직장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루저들일까. 비정규직으로 불안한 고용구조에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루저들은 아니다. 만약 수백 억 원대의 자산에 단단한 직장에 다니며 억대의 연봉을 받는 이들은 승자일까. 그러한 기준이야말로 가장 자본주의적인 비교기준이다.
이에 포획되면 루저들은 물적 토대를 갖지 못해서 시기하는 존재가 되며, 자기 위안거리를 찾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 하나가 루저 정서가 담긴 문화예술이다. 루저 정서의 문화 콘텐츠는 루저라 일컬어지는 이들을 위로하고 루저로 합리화 시켜준다. 정작 핵심은 승자-패자의 이분법적 구도인데 말이다. 이러한 근본을 지적하지 않는 문화콘텐츠들은 개인을 몽환에 빠뜨리는 마약과 다름없다.
불나방스타소세지클럽처럼 ‘불고기 버거’를 읊조리고,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같이 <스끼다시 내 인생>을 노래한다고 루저 문화에 희망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의문이다. 그들은 정말 루저문화의 근본 모순을 지적하거나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자족할 뿐이다. 아니 반 지하방에서 싸구려 커피를 마시는 것이 루저의 정서라면,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임정연의 <스끼다시 내 인생>(2006),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2003), 오쿠다 히데오는 <스무살, 도쿄>(2008), 미우라 시온의 <마호로역 다다 심부름집> 같은 소설 작품들은 루저를 다룬 작품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젊은이들의 일상을 다루었을 뿐이다. 이준익 감독의 <즐거운 인생>을 40대 루저들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왜 그들이 루저인지 알 수 없다. 루저의 본좌로 영화 <소림축구>나, <쿵푸허슬>을 만든 주성치를 들지만, 그는 루저의 정서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그들의 꿈을 다루려 했다. <무한도전>의 멤버들은 루저들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본질적인 모습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애써 루저들을 옹호하고, 연대하려는 것일까. 혹 흔히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에서 승자(winner)-패자(loser)의 구도를 연상하기 때문 아닐까. 부르주아는 유산자이고, 프롤레타리아는 무산자이니 부르주아는 승자, 부자, 가진 자로 프롤레타리아는 못가진 자, 빈자, 패자의 구도로 연상될 수 있겠다. 프롤레타리아를 역사의 주체로 본다면 루저를 옹호할 수 있다. 즉 패자가 역사적 주체라고 말이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는 패자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와 루저는 등치 될 수 없다.
맑스는 <헤겔의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사회적 궁핍으로 기계적으로 몰락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의 급격한 해체를 통해 특히 중간계층의 해체에서 출현한 이들이라고 했다. 즉 신분으로 묶을 수 없는 사람 즉 비신분, 비계급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의 대립물이거나 부르주아에 항상 대응해야 하는 존재는 아니다. 하지만 부르주아로 프롤레타리아는 끊임없이 생성되는 면이 있다. 다양한 생산과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부르주아의 경제 활동으로 그 경계 밖으로 배제되며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르주아를 해체해야 한다. 하지만 그 해체의 궁극 목적은 부르주아의 해체를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해체에 있다.
맑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언급한 이런 내용을 루저의 개념에 적용 해보자. 프롤레타리아는 단순히 승자의 상대 개념으로 취급하는 루저와 비교할 수 없다. 차라리 루저를 무산자라고 하는 것이 낫다. 소수가 독식하는 사회에서 독식하는 소수를 위너, 그렇지 않은 이들은 루저라고 지칭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맞지 않다. 또한 궁극의 목적은 프롤레타리아의 해체이듯이 루저의 해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더구나 승자와 패자는 톰과 제리처럼 상대적인 개념이다. 돈이 많은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것을 돈이 없는 사람이 가질 수 있다. 단단한 직장을 가진 사람이나 연봉이 많은 사람들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좋은 직장과 높은 수입을 포기하고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루저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적인 지위에 가지 않는 이들은 루저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것은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으로 나눌 수 없는 문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야 하는 것과 같이 루저라는 말은 적극적으로 옹호해야 하는 말이 아니라 없어져야 하는 말이다. 루저가 없어지려면 승자가 없어져야 한다. 어느 누구를 루저로 상대방을 지칭할 수 없으며 그렇게 자임할 수도 없다. 아무도 승자 패자가 아니고 그들에겐 삶의 방식이 있을 뿐이다.
요컨대,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것은 (자본주의)시스템이다. 따라서 루저 문화 옹호가 아니라 위너와 루저의 구분을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근본 구조의 혁파에 초점이 맞추어 져야 한다. 정규직은 위너, 비정규직은 루저라고 할 때 비정규직이라는 루저 정서에 머물고 싶어 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만들어내는 제도적 물적 모순과 구조의 해소다. 승자에 대한 안티적인 루저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성은 승자에 대한 선망을 내포한다. 루저 문화를 상품화 하는 이들은 승자라는 역설적 권력자에 위치한다.
우리는 승자-루저의 매트릭스에 갇혀 있다. 알파걸이나 여초현상이라는 말이 없어야 평등한 세상이듯, 루저 문화라는 역설적인 단어가 없어져야 승자의 도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루저의 정체성 자임과 연대보다 꿈과 희망 그리고 행복이 중요하다. 5% 단단한 직장 안에 있는 이들은 과연 행복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무조건 불행한가. 좋은 직장과 높은 연봉은 쉽게 꿈과 행복을 대체시키며 인간을 소외시킨다. 결국 위너와 루저의 구도는 승자도 불행하게 만든다. 부추겨진 승자를 향한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연대의 주체는 꿈과 행복을 가로막힌 모든 이들이며, 연대의 목표는 승자 해체가 아니라 그 근본적인 구조의 해체다. 위너와 루저의 구도를 깨는데 직장이 훌륭하건 직장이 없건, 소유물이 많건 적건 모두가 연대의 동지가 되어야 한다.
*중앙대 대학원 신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