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말,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이화여대 학파들이 여성운동담론을 장악했을 때, 그들은 철저하게 마르크스의 도식에 따랐다. 즉 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여성은 남성중심의 계급사회에서 노예와 같은 존재였다는 논지였다. 문제는 이러한 도식을 서양과 동양을 막론하고 모두 적용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도 여성은 역사이래로 언제나 차별받는 존재인 것으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소장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이 세계 여성사에서 예외라는 지적이 일찍부터 있었으나 현대사의 여성차별사를 운동론적으로 드러내는 작업들에 묻혔다. 페미니즘 운동에 밀려 명함을 내밀수가 없었고 여성을 차별하며 이익을 얻는 기득권 계급의 편이거나 남성 가부장제의 옹호자로 몰렸다. 그런 가운데 미국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전혜성 박사가 본격적으로 문제제기 하면서 호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핵심은 16세기까지 조선의 여성들은 동등하게 차별에서 자유로웠다는 사실이다. 16세기는 임란 전이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등하게 교육을 받았으며, 남성들은 시댁과 마찬가지로 처가에 대해서 신경을 써야 했고, 재산분배에서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았다.
신사임당(1504~1551)은 한시와 그림에 뛰어난 조예를 보였다. 남성들과 똑같이 교육을 받은 것이다. 율곡이 태어난 곳은 아버지 이원수의 집이 아니라 사임당의 친가인 강릉 오죽헌이었다. 그곳에서 태어난 것만이 아니라 3~4살까지 외가에서 자랐다. 이순신은 유년시절에 아산으로 이사를 하는데, 아산은 어머니의 외가가 있는 곳이었다. 그만큼 외가가 중요했다. 나중에 어머니에게 상당한 재산이 있었던 것으로 최근 알려졌다. 그것이 처음부터 있었다면 애써 어렵게 살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외가에서 분할 받은 것이다. 이는 그만큼 당시 여성에게도 재산분할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출가외인이라는 것은 성립할수 없었다. 더구나 이순신도 방씨 집안에 장가들어 그곳에서 살게 된다. 이로써 여성이 태어난 집이 매우 중시되었고, 상대적으로 남성들은 아내의 친가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처가살이 하는 남편이 많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남성들이 아내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조선에는 인물이 나오지 않게 되는데 그가운데 하나가 여성의 교육적 차별이었다. 여성들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게 되었고, 그렇게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들은 훌륭한 어머니 역할을하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전기와 같은 탁월한 인물들이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식민지기 시기에는 더욱 여성차멸이 심해졌고 한국역사가 여성차별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왜곡 돠고 패배적인 역사인식은 식민지론울 정당화하는데 크게 일조하게 된다.
사실 고대이래로 우리 민족은 여성들을 존중했다. 추모(주몽)는 쫓기는 와중에 강에 가로막히자 이렇게 외친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고, 하백의 외손자다!” 여기에서 외손자라고 자신을 밝힌 것은 의미심장하다. 모계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만해도 여성의 지위는 조선전기보다도 더 존중되었고, 더욱 자유로웠다. 조선의 성리학적 질서가 들어서서 여성을 제약했지만,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사회경제적 변화와 유교이데올로기의 변질은 급속하게 여성의 인권을 악화시켰다. 그러다가 조선이 패망하고 식민사관이 활개를 치면서 여성들의 상황은 이루 말할 계제가 아니었다. 여성들은 교육조차 받지 못했으며, 사회적인 활동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재산분할에서 철저하게 차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 의사결정권도 박탈되었다.
식민지 이후에 공고화 된 여성에 대한 차별은 현대로 이어지면서 서구의 페미니즘과 결합되면서 한국사 전체에서 여성사를 획일적인 서구의 시각으로 재단하게 되었고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고 자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 연구결과들은 그러한 자학과 열패감이 아니라 당당한 자긍심을 주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전 세계적인 여성 차별의 역사에서 우리 민족은 예외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고대 신라의 여성들이 중심이 되는 것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또한 미실의 활약을 비이상적으로 대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고대에 선덕여왕(善德女王, ?~647년)은 이미 7세기에 여왕에 등극했다. 위대한 역사 가운데 하나이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 1533~1603)는 16세기에서야 여왕에 올랐다. 근대 민주주의 제도의 본고장이라는 영국과 무려 천년에 가까운 시간차가 존재한다.
소설 ´궁중 일기´ 시리즈의 ´선덕여왕´ 편을 쓴 셰리 홀먼은 선덕여왕은 수학과 과학, 예술에 심취했던 인물로 묘사했다. 흔히 남자들의 학문이라 여겼던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도 역시 서양의 시각이다. 대개 우리민족은 하늘을 여성이 담당했다. 김유신과 사랑에 빠졌다는 천관녀(天官女, ?~?)도 기녀가 아니라 하늘을 주관하는 부서에 근무하는 여성으로 추측되고 있다.
한국이 이렇게 일찍부터 여성을 우대하고 존중했던 곳은 모계적 전통이 남아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몇 가지 사상적인 이유가 있다. 우리민족은 ‘천인상여(天人相與)’ 사상이 있다. 인간을 하늘과 같이 보았고, 인간을 해하는 것은 하늘을 거스리는 것이었다. 또한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인간을 우대했다.
특히 사회적으로 소홀하게 당할 수 있는 이들을 보호하여 근신하는 풍토가 일찍부터 확립되었다. 하늘을 존중하는 천도(天道)사상은 통치 질서로 이어졌다. 천도의 핵심에는 약자의 보호사상이 있었다. 무엇보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사상은 우리민족이 가지고 있은 인권사상을 말해준다.
문제는 어떻게 여성 차별의 역사로 변질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임진왜란은 전국토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건강한 상식과 사상을 파괴했다. 피폐된 농토는 경제력의 붕괴를 의미했고, 경제주의에 물들게 했다. 건전한 통치 질서는 사라지고 백성들은 중앙 집중적인 가부장적 권위를 내세워 생존의 경쟁에 나서게 되었다.
또한 후기로 갈수록 민간의 자본이 축적이 되는 반면 관리들의 벼슬 쟁탈전은 심화되었다. 따라서 경제력을 우월하게 확보한 남성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경제적 이익을 제외한 다른 가치들은 부차적이 된다. 이 가운데 여성들은 차별과 고통을 받으면서 자신의 능력을 더욱 펼칠 수 없게 되고 일제시기는 이의 극렬한 심화를 가져왔다.
드라마 ‘선덕여왕’이 덕만과 미실의 활약상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그린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을 놓치는 것이 될 것이다. 예컨대, 평강공주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남편을 성공한 장군으로 만들거나 선화공주가 서동을 왕위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도 이 같은 해석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생물학적으로 맞는 것에 충실하면서 역할을 다할 뿐이다. 여성이 칼을 들고 갑옷을 입고, 말을 달린다고 해서 남녀평등은 아니다. 육체적 열세인 상황에서 생존의 방법은 지략과 혜안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사회에서는 여성들이 보이지 않게 남성과 역사를 움직였다. 정치는 위험하고 죽을 가능성이 높다.
불나비처럼 죽어간 남성의 전략보다 뒤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며 경제적 가족적 실리를 취한 여성이 더 현명하다. 이름 석자 남기려고 목숨을 내놓은 남성과 현세를 안락하게 이루려한 여성은 근본적으로 지향점이 다르다. 정치에 매몰되지만 않는다면, 그 진화론적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