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저씨'를 통해 강렬한 남성미를 보여준 원빈.ⓒ CJ엔터테인먼트
영화 ‘아저씨’의 원빈은 아저씨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포털 뉴스에 나오는 아저씨란 이상한 짓(?)이나 하고 음흉하거나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였는데 영화는 그렇게 생각되었던 아저씨를 매우 멋진 이웃집 수호천사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자칫 수호천사 아저씨는 개저씨가 될 뻔했다. 아저씨와 개저씨 그것은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인지 몰랐다. 원빈이 맡았던 한태식은 곤란한 상황에 처한 소미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만약 소미가 엄마 때문에 마약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다면 개저씨였다. 다행하게 한태식은 정보사 특작부대요원 출신이었다. 그런 전력이 없었다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개저씨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일반 아저씨들이 특작 부대요원일 리가 없다.
개저씨의 연원을 꼰대에서 찾는 경우가 있다. 꼰대는 과거에 일부만 쓰는 은어에 가까웠는데 이제는 너무 일반화되어서 식상한 감이 있다. 식상하기 때문에 젊은층들은 그들만의 용어인 개저씨들을 만들어냈다. 꼰대는 본래 훈수질을 하는 연장자를 말한다. 대개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거나 자기 방식대로 지시 명령하는 이들을 말한다.
이미 앞서 겪어 봤기 때문에 잘 안다는 식으로 말하기 때문에 거부감을 갖게 된다. 꼰대의 훈수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후배나 젊은 층들에 해당된다. 꼰대의 경우에는 주로 특정 분야에서 한정되었다. 가족일수도 있고 학교나 직장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개저씨의 경우 매우 범위가 광범위해졌다. 지하철 안에서 혹은 거리에서 만난 사람이 개저씨일 수도 있고, 동네주민이 개저씨일 수도 있다.
반드시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일방향으로 주입하는 사람만 개저씨는 아닌 것이다. 꼰대는 대개 꼰대짓이라는 말로 쓰이는데, 개저씨는 특정 캐릭터를 말한다. 개~라는 말이 흔히 비호감의 대상에 붙는 욕설에 가깝다는 점을 생각하면 꼰대보다는 확실하게 자신들의 감정적 의사표현을 확실하게 하는 말이다.
꼰대에 이어 개저씨의 탄생은 왜 이러날까. 일단 개저씨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상대방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요하듯이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장유유서의 원칙을 지키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나쁘게 말하면 권위를 부리고 군림하려는 태도로 보일 수 있다. 한편으로는 개저씨들은 중년 남성들이 많다. 이제 인생의 경험을 어느 정도 하고 입지를 갖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자신의 소소한 성공이 인생 가치관으로 자리잡은 경우가 많다. 생각해보면 그들은 이제 중간관리자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어른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시시때때로 바뀌고 새로운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이 때문에 어느 누군가의 경험이나 지식만으로는 커버할 수 없는 지점들이 너무 많이 생겼다. 리더의 역할이나 개저씨나 꼰대 그 사이에 있기도 알맞다. 그렇다고 그들에게만 원인이아 배경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또한 예전처럼 선배나 연장자의 경험이나 지식을 참고 인내하며 듣고 있을만한 분위기 형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현대 사회는 자아 충만의 시대이다. 자신에게 도움이 안되거나 듣기 싫은 말은 외면한다. 이전 사회처럼 선배나 조직의 지위자는 인생의 동반자는 아니다. 자리 양보를 강요하는 어른도 결국은 비판의 대상이 될 뿐이다.
자신에게 원하지 않는 것을 지시 명령 하는 것은 ‘불의’(不義)에 해당한다. 생존 환경도 복합적이다. 누가 이끌어주고 그것을 따라간다고 해서 앞날이 보장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정말 필요한 능력은 개저씨인지 꼰대인지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아무리 엉망인 사람에게도 배울 점은 있으며 길거리 아무나 스승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꼰대의 어원을 일부에서는 뻔데기에서 추측하기도 한다. 뻔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는 말을 연상하면 된다. 주름을 잡는 것은 꼰 것을 의미한다. 대는 ‘멀대’라는 말에서처럼 ‘대’는 대나무처럼 미끈하기는 하지만 속이 비어 있는 실속 없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꼰대는 겉으로는 뭔가 있는 것처럼 잔뜩 말하거나 치장을 하지만 결국 실속 없는 사람을 말한다. 그냥 꼬인 대나무일 뿐이다.
미끈하게 보기라도 좋으면 나은 데 잔뜩 구겨진 결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주입하는 사람이고 속은 텅 비어 있는 셈이다. 결국 진상이 되고 만다. 지식과 정보, 네트워크의 개방성은 이러한 평가를 듣기에 알맞춤이 되었다. 개저씨에는 모든 관계가 그냥 동네 아저씨화 되는 형식적인 관계성을 함의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에게 맞지 않으면 그냥 타인인 것이다. 그것을 담보할 만한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사회도 아니라는 관계의 변화가 기저에 있는 셈이다.
꼰대나 개저씨들은 다른 사람에게 너무 간여하는 오지랖 넓은 사람일 수 있다. 자기만 챙기며 생존해가려는 캐릭터와는 거리가 있다. 어떻게 보면 꼰대나 개저씨들은 자기 자리를 잃은 시대적인 미아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라 믿는 순수한 '문화지체자'들인지 모른다. 세상은 영악하게 자신의 이익만을 우선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로 되어가는 모양새에서 상대방의 일상과 미래까지 간섭하는 성의란 가상하기도 하다. 그들에게 다행하기도 입지와 부유함이 있으면 개저씨라 욕을 먹어도 둔감해질만 하겠다.
글/김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