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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찌마와리> |
대중문화계에서 표절 시비가 불거지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최근의 표절 행태는 영역이 광범위하고 빈도도 높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전방위로 퍼져 있는 우리의 표절 행태는 표절 왕국이라 불린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표절 시비 1번지인 대중가요계에서는 이효리·서인영이 스타일 표절이라는 말까지 만들어가며 표절 논란 계보를 이어갔고, 리얼 버라이어티와 집단 토크쇼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방송계에서도 포맷과 아이디어를 베꼈다는 논란 속에 비슷한 프로그램을 양산하고 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이미지가 노출되어 아이디어가 더욱 중요시되는 광고와 뮤직비디오 역시 표절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방송에서의 표절 시비는 예능·교양 프로그램은 포맷과 아이템, 드라마는 플롯과 캐릭터의 유사성에서 비롯된다. 최근의 리얼버라이어티 열풍은 MBC <무한도전>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시작되었다. <무한도전>의 인기를 이어가는 KBS <1박2일>과 SBS <패밀리가 떴다>를 표절로 몰아가기는 어렵지만 포맷이 유사한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표절 시비에 휘말렸던 일본 인기 그룹 스맵의 콘서트 도입부 컨셉트를 그대로 가져온 지난해 MBC <가요대제전>의 오프닝이나, 세계적으로 성공한 BBC의 어린이 프로그램 <텔레토비>의 캐릭터와 너무도 닮아 있는 KBS의 <후토스>는 누가 보아도 원전을 그대로 옮겨왔다고 믿을 만하다.
기발한 작품 보면 어디서 베꼈나 놀리기도
광고 분야의 표절 논란은 아예 상시적이다. 일이삼사‘오유’칠팔구십을 반복하는 한국야쿠르트 오유 광고는 유니클로의 유니클락과 유사하고, 현대카드의 ‘앞면 뒷면 옆면 옆면’ 편과 ‘학원 통신 병원 약국’ 편의 사운드는 각각 프랑스 테크노 그룹 다프트 펑크의 <Technologic> <Harder Better Faster Stronger>와 닮아 있다. 티셔츠의 그림이 계속 변하는 지난해의 KB카드 광고는 프랑스 그룹 저스티스의 뮤직비디오 아이디어를 그대로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았다. 삼성전자는 자사의 ‘마이 프레시 라이프’ 슬로건을 LG전자가 ‘마이 베터 라이프’로 일부만을 바꾼 채 사용하고 있다고 표절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렇듯 요즘은 매체를 통해 뒤통수를 치는 기발하고 멋진 작품들을 접한다고 해도 아이디어에 감탄하기에 앞서 ‘어디서 베낀 것 아니야?’라고 의심을 먼저 해보아야 될 정도다. 의심이 사실로 확인되었을 때 느끼는 아쉬움은 처음 만났을 때의 놀라움에 비례한다.
예전에는 표절이 이루어지더라도 잘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외국의 저작물, 그중에서도 일본의 대중문화를 접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그대로 베끼더라도 아무도 모르거나 극소수만 알아챘기 때문이다. 실례로 1960~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부 기업가들은 일본에서 1년에 몇 개월씩 상주하며 일본의 트렌드를 베껴오는 것을 사업 구상이라고 둘러대기도 했다.
하지만 인터넷으로 정보의 무한 검색이 가능한 지금까지 표절이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현상은 납득하기 어렵다. 네티즌의 눈을 벗어나기가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문화평론가 이정흠씨는 “인터넷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에도 소수의 선진 수용자들 덕에 표절 시비가 심심치 않게 불거져 나왔음을 생각해보면, 모두가 선진 수용자들이 되어버린 지금 상황에서 표절을 한다는 것은 용감해도 너무 용감하다”라고 말했다. 인터넷의 공론장으로서 기능은 표절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공론화를 통해 다수에게 그 내용을 확인시키는 역할까지 수행한다. 네티즌들이 직접 확인하고 호응을 보내기 때문에 표절한 쪽은 콘텐츠를 접게 되고 창작자의 아이디어는 보호된다. 인터넷의 자정 능력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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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러디와 오마주의 변용은 원전의 가치를 높이면서 스스로 뛰어난 창작물로 인정받기도 한다. 마네의 <풀밭에서의 점심>. |
‘재미있으면 그만’이 표절 문화 부추겨
그렇다면 표절 시비가 계속 이어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우선은 세헤라자데의 딜레마에서 찾을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 천일 동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야 하는 세헤라자데처럼 대중문화의 크리에이터들은 한정된 소재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기존의 창작물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오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특히 전작제나 시즌제 없이 프로그램이 종료될 때까지 1주일에 한 편씩 계속해서 만들어가야 하는 방송 제작진은 아이디어 고갈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오리지널리티가 뭐가 중요하냐는 생각도 표절 문화를 부추긴다. 표절 시비가 있을 때면 열성팬들은 이같은 논리로 자신들의 스타와 그들이 만들어낸 콘텐츠를 비호한다. 그러다 보니 한국 대중문화는 창조자라기보다는 선진 문화를 누가 먼저 흉내 내느냐와 같은 따라쟁이 노릇에 그치고 있다. 문화평론가 김헌식씨는 “후발 주자가 혜택을 누리는 것이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의 특징이다. 한국의 대중문화 기획자는 창발적인 존재가 아니라 재빠른 수입 편집상이어야 대중적으로 성공하게 된다. 그것이 하나의 모델을 형성해온 것이 한국 대중문화사다”라고 말했다.
인용을 명시적으로 밝히는 데 소홀한 우리 문화도 표절 만연 현상에 한몫한다. 우리 교육은 어디까지가 인용이고 어디서부터 변용된 자신의 생각인지 명확히 모를 정도로 인용에 대한 교육에 소홀하다. 인용하면 남의 것을 가져왔을 뿐 창의성이 발현되지 않았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러다 보니 대중문화에서도 인용한 원전을 밝히기를 꺼려 한다. 외국 프로그램의 포맷을 정식으로 사오거나, 외국 음악을 샘플링하면서 저작료를 냈음에도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숨기려 한다. 이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만이 창작이고, ‘유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진정한 창작이 아니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기인한다.
디씨인사이드에서 벌어지는 네티즌들의 패러디 작업이나, 주성치, 우디 앨런, ZAZ 사단 등의 창작자를 통해 영화에서 한 장르로 자리를 잡은 패러디 영화는 유에서 유를 창조해낸 대표적인 사례다. 영화에서는 패러디와 오마주 같은 변용이 오래전부터 창작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왔다. 최근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 리>는 패러디와 오마주를 통해 감독의 상상력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감독은 진지하면서도 어설픈 1960~1970년대의 한국 액션영화의 특징을 현대적인 시점으로 재창조하고, 블록버스터를 만들기 전의 주성치 영화의 감성을 가져와 독특하고 기발한 코미디 영화를 만들어냈다.
오마주와 패러디는 때로는 표절을 은폐하기 위한 변명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오마주와 패러디에도 원칙이 있다. 패러디는 관객과 감독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유희인 만큼 둘 사이에 공동으로 인지하고 있는 코드가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패러디의 대상이 명확하고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관객이 알아야 패러디의 진정한 즐거움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전창림의 책 <미술관에 간 화학자>에는 마네의 <풀밭에서의 점심>을 둘러싼 에피소드가 소개되어있다. 당시 이 작품은 라파엘로의 <파리스의 심판>, 조르조네의 <전원음악회>의 구도와 설정이 비슷하다고 비판받았다. 하지만 야외에서 정장을 입은 두 남자 앞에서 나체로 있는 여염집 두 여인, 거리낌 없이 정면을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에 대한 묘사로 파격을 주었다. 이 작품은 후에 모네, 세잔, 피카소 등에 의해 변용되며 인상주의 화풍을 만들어가는 데 일조했다. 원작이 표절이 아니라 모방과 변용되었을 때 얻어지는 문화의 풍부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대중문화도 이제 남들이 모를 것 같은 콘텐츠를 베끼는 관습에서 벗어나 누구나 다 아는 것을 멋지게 변용해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가는 문화를 키워나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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