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DC 2010 시드 마이어 기조연설 정리
<문명> 시리즈는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몰두했던 게임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갑니다. 저만 그런 건 아닌 모양입니다. <문명> 시리즈의 개발자 시드 마이어(Sid Meier)가 조만간 ‘가장 상을 많이 탄 게임 개발자’로 기네스북에 올라갈 거라고 하니 말이죠.
운 좋게 GDC 2010 행사장 복도에서 시드 마이어를 발견했습니다. 서양 기자 다섯 명이 그를 둘러싸고 있더군요. 체면 다 던지고, 냅다 달려가서, TIG 로고 포즈 사진을 찍었습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여기저기서 사람들은 몰려들고, ‘컴퓨터 게임의 아버지’는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떴죠.
다음 날, 올해 GDC의 하이라이트였던 시드 마이어의 기조연설 ‘게이머의 심리로 하는 게임 디자인(부제: Everything You Know is Wrong)’을 들으러 갔죠. 강연 시작 한 시간 반 전, 그 넓은 공간은 이미 인사인해였습니다. 다행히 기자석은 앞쪽에 따로 있어서, 맨 앞자리에서 강연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매력적인 제목만큼 참신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수학과 논리를 좋아하는 그가 역시 수학과 논리를 더 좋아할 법한 개발자(특히 기획자) 신도들에게 ‘심리학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보는 것은 인상적이었습니다. 강연 내용을 정리했는데, 다소 긴 편입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샌프란시스코(미국)=시몬
컴퓨터 게임의 아버지도 ☞
“게임을 디자인할 때(특히 현실 세계나 역사적인 주제를 다룰 때) 정확한 정보, 물리원칙, 엄청난 연구, 그리고 수학적 계산이 훌륭한 게임의 토대를 만든다? 틀렸습니다. 이것들과 겉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것들 모두, 게임 디자인의 핵심이 아닙니다. 그건 바로 게이머의 심리입니다.”
파이락시스 게임즈(Firaxis Games)의 개발 총책임자인 시드 마이어의 강의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게임은 흥미로운 선택의 연속이다.”, “게임을 개발할 때는 장르가 아닌 소재를 먼저 생각해라.” 등의 명언을 남긴 시드 마이어가 이번에는 ‘게이머의 심리’를 들고 나왔습니다.
당신 머릿속에 다 있다!
시드 마이어는 먼저 “게임을 즐기는 건 심리적인 체험”이라며, 게임을 하면서 생기는 대표적인 심리학적 증상으로 극단적 이기주의자(Egomania), 망상증(Paranoia), 환상(Delusion) 등을 예로 들었습니다.
시드 마이어가 손을 좀 더 올렸으면 싱크율이 좋았을 텐데 말이죠. ^^;;
시드 마이어는 게이머의 심리 중 하나로 ‘승자의 모순(The Winner Paradox)’의 예를 들었습니다.
자신이 즐기고 있는 게임이 너무 어려워서 계속 지기만 해 기분만 나빠진다면 누가 그 게임을 할까요? 반대로 너무 쉬워서 초등학생 사촌동생도 쉽게 깨는 게임 역시 김빠지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시드 마이어는 “적당한 보상과 벌칙, 난이도를 디자인해 결국에는 모든 게이머가 자신이 평균 이상의 실력자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게임을 분명 어렵게 만들어야 하지만, 결국엔 게이머가 이길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모순을 말하는 거죠.
Suspension of Disbelief는 ‘게임이 현실이라고 믿지 않음의 정지’, 즉 게임의 몰입도를 뜻합니다.
그는 게이머와 게임 기획자의 관계를 ‘사악한 동맹(Unholy Alliance)’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순수한 신뢰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관계라는 거죠. 기획자가 게이머를 평균 이상의 실력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나, 게이머는 기획자가 끊임 없이 게임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그리 신성한 것은 아니니까요.
이런 몰입을 위해 게이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몇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I'm Good!] 일단 게이머는 자신이 어느 정도 게임을 잘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 <플라이트 시뮬레이터>에서 정말 비행기를 조종하는 수준의 능력이 요구된다면, 게이머는 좌절하고, 게임은 추락할 겁니다. 어느 정도만 해도, 비행기의 이착륙이 가능해야 합니다.
[Suspension of Disbelief] 게임에 몰입하게 해야 합니다. 좋은 영화가 그렇듯, 즐기는 사이 정말 현실처럼 믿게 해야 합니다. 단순히 그래픽의 사실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드 마이어처럼 오래 전부터 일해 온 기획자들은 16색 그래픽부터 게임을 만들어 왔기 때문에, 게임 몰입도의 중요성을 더 많이 이해하고, 노하우를 쌓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게이머가 계속해서 게임에 몰입할 수 있도록 유머, 스타일, 음악, 분위기를 적절히 사용해야 한다고 지적하더군요.
[Moral Clarity] 나름 재미있는 개념인 도덕적 명쾌함입니다. 전쟁을 통해 영토를 늘려나가는 게 <문명>인데, 천하통일 직전에 컴퓨터가 “살려주세요. 저에겐 먹여 살릴 처자식이 있답니다”라며 부탁한다면 게이머는 어떤 느낌이 들까요? 이를 두고 시드 마이어는 정복하고 싶지만 양심과 맞서게 되는 일이라며, 게임을 할 때는 도덕적 가책을 느끼는 것보다는 어렵더라도 나쁜 군주와 싸우는 게 더 낫다고 말했습니다.
열정적으로 강연하는 시드 마이어.
2:1로 지는 건 이해하지만, 20:10으로 지는 건 납득 못하는 게이머.
게이머는 수학적이거나 이성적인 사고보다, 심리적으로 게임을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시드 마이어는 게이머가 갖는 심리적인 면을 <문명 레볼루션>의 전투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로 설명했습니다.
“한 게이머는, 자기 전사 3명과 상대방 바바리안 1명이 싸웠을 때 전사들이 패배하자 ‘아니 어떻게 3명이 1명을 못 이기지? 응? 3 대 1이잖아! 이거 뭔가 잘못됐어!’라며 수학적인(확률적인) 계산보다는 3:1이라는 숫적 우세만 생각하더군요. 그런데 계속 플레이하다가 그 게이머의 작은 전사 1명이 상대방의 거대한 전사 3명을 모두 물리치게 됐죠. 이때 내가 ‘이것도 잘못된 것 아니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아니? 이건 내가 전략적으로 잘 해서 이긴 건데?’라는 거 있죠.”
이어서 시드 마이어는 “그 게이머가 ‘좋아, 2:1에서 지는 건 그렇다고 쳐. 그런데 20:10에서 진다는 건 이상하잖아? 내가 무려 10명이나 많은데!’라는 겁니다. 또 ‘2:1를 붙었는데 졌어. 그래, 뭐 질 수도 있지. 그런데 또 2:1을 붙었는데 또 진거야. 2:1을 2번씩이나 지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잖아!’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전투를 분석해 보았습니다. 그제야 그 게이머도 수긍하더군요”라며, 비록 논리적으로는 이상이 없더라도, 게이머가 계속해서 심리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낀다면 결국 게임을 그만둔다고 말했습니다. 때문에 이런 종류의 확률은 게이머 친화적으로 조절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누군들 아니겠습니까. 시드 마이어도 못할 때가 있겠죠.
시드 마이어는 자신이 과거에 개발하며 저질렀던 잘못들을 예로 들며 강의를 이어 나갔습니다.
- 턴제 전략 게임의 대명사 <문명>의 첫 프로토타입은 실시간이었다고 합니다. 더욱 사실적이고, 실감나는 느낌에는 실시간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실제로 플레이해 보니, 게이머가 주인공으로 느껴지던 턴제 게임과 달리, 실시간 전략은 마치 제 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 또한 시드 마이어는 다시 역전하는 짜릿함을 위해 중간중간 큰 위협을 주는 시스템을 넣었지만 실패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게이머들은 긴장감을 원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만들어 온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결코 바라지 않기 때문이죠.
- <문명>의 테크트리는 처음엔 모두 무작위로 베일에 가려져 있어 여러 가지 테크트리를 타도록 유도했습니다. 하지만 게이머들은 이런 랜덤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강력한 화약을 발견한 후부터는 가장 빠르게 화약을 개발할 수 있는 테크트리만 사용해 원래 기획 의도는 실패했습니다.
- 게임 내 작은 랜덤한 요소(Randomness)는 다양한 상황을 만들며 플레이에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게이머들이 다소 나쁜 상황으로 들어가면, ‘왠지 내가 속고 있다’고 느끼게 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이런 랜덤한 요소를 다룰 때는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고 전했습니다.
- 공룡 게임(The Dinos Game)은 RTS, 전략 게임, 카드 게임의 세 가지 버전으로 나온 특이한 타이틀이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버전 때문인지, 세 가지 게임 모두 융합되지 않아 실패했습니다. 시드 마이어는 아직도 이 게임이 왜 잘 살아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는군요. ^^;;
- <문명 네트워크> 게임은 멀티플레이가 가능한 게임으로 유저간 골드 거래가 가능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시드 마이어는 이로 인해 여러 가지 상황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어느 유저도 골드를 거래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on a shoestring’은 무언가를 ‘적은 돈을 써서’ 한다는 숙어입니다. ^^;;
트리플 A(AAA) 게임이란 많은 돈을 투입한 대작 타이틀을 말합니다. 영화계의 블록버스터 정도로 이해하면 쉽습니다. 요즘 이런 게임들이 많아졌죠. 하지만 돈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개발자와 회사는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만들까, 늘 고민하는 이슈이기도 하죠.
‘적은 돈으로 트리플 A 게임 만들기’의 핵심은 게이머의 상상력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이거나 존재하지 않지만, 게이머들이 그런 것이 일어나고 있다고 상상하게 만들라는 거죠. 존재하지 않으니,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시드 마이어는 <문명 레볼루션>을 예로 들며, “게임 진행 중 게이머는 멀리 떨어진 지역의 왕족으로부터 춤추는 곰을 선물 받았다는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개발자가 왕족이나 춤추는 곰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춤추는 곰은 존재하지도 않고, 게이머가 왕족을 만날 일도 없기 때문이죠. 그 선물은 메시지 몇 마디로 나온 것밖에 없지만, 게이머의 자존심과 게임의 흥미도를 높여줬습니다”라며 상상력을 이용한 개발을 추천했습니다.
또 다른 좋은 방법은 게이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는 <시드 마이어의 해적>의 악당 캐릭터를 예로 들며, “시간과 돈을 들여 복잡한 배경 이야기를 만들 필요 없이 단순히 꼬부라진 검은 콧수염을 달아 주는 것만으로 쉽게 악당의 이미지를 줄 수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컴퓨터는 컴퓨터일 뿐.
인공지능(AI)은 게임 플레이에서 주로 게이머의 적군으로 등장합니다. 대개 사람과 비슷한 수준의 정교한 AI를 지향하죠.
시드 마이어는 “혹자는 컴퓨터가 다른 게이머, 즉 마치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완전 틀린 생각이라고는 안 하겠지만, 만약 컴퓨터가 창의적인 플레이를 해서 게이머를 갖고 논다면 아마 우린 스스로 바보같다고 느끼게 될 것”이라며 부정적인 의견을 표했습니다.
그는 이어서 “제가 인공지능 컴퓨터에게 바라는 면은 (게이머에게) 실속있게 경쟁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면서 바보 같아야 하고, 게이머는 창의적이고 기발한 플레이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와 플레이할 때마다 게이머 자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게이머를 지켜라!
시드 마이어는 스스로 게임의 재미를 감소시키는 행동을 하는 게이머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이 부분에는 기획자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며, 이런 행동 중 대표적인 예 두 가지를 언급했습니다.
“<문명 레볼루션>에서 매 전투마다 저장, 불러오기, 저장, 불러오기 하는 것은 게임을 재미있게 즐기는 게 아닙니다. 이런 행동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세이브 파일을 다시 불러와도 똑같은 결론이 나도록 했습니다. 너무 쉽게 저장과 불러오기를 할 수 있게 하면 그만큼 게이머로서 경험이 줄어들게 됩니다. <시드 마이어의 해적>의 경우는 항구에서만 세이브가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최근 많은 게임들이 다양한 옵션과 세팅, 선택들로 게이머가 자신의 입맛대로 게임 환경을 꾸미거나 최적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보이며 “게임을 만드는 건 우리 게임 디자이너이지 게이머가 아닙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치트에 대해서는 “치트가 있는 건 좋지만 쉽게 사용할 수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본 게임을 먼저 즐긴 뒤 이스터 에그와 같은 요소로 사용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라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반면, 모드(Mod)에 대해서는 “모딩(modding)은 아주 좋습니다. 모딩은 게임 디자인을 연습하고 커뮤니티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내 귀에 게이머~.
강연의 후반부, 시드 마이어는 게이머의 의견을 제대로 듣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개발자로서의 심리적인 능력을 발전시키려면 게이머들의 의견을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의견을 듣고 ‘그건 기술적으로 안돼, 이미 해 봤어’와 같은 생각을 가지면 안되고, 그 의견이 왜 나왔고, 무엇이 잘못됐고, 왜 게이머가 그것에 만족하지 못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게임이 가져야 할 네 가지 필수 심리학적 요인들.
시드 마이어는 끝으로 심리적인 면을 알아야 하는 이유를 “위대한 여행을 만들기 위해서”라며 네 가지 포인트를 지적하며 강연을 마무리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게임들이 존재하지만 결국 모든 게임들은 위대한 여행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게임 기획자들은 어떻게 심리를 이용해야 이 여행을 더 위대하게 만들수 있을 지를 배워야 합니다. 게임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 중 하나는 계속해서 흥미로운 결정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고, 여행은 이 모든 흥미로운 결정을 하는 과정입니다.”
그는 또한 “여행을 하며 전보다 더 강해지고, 똑똑해지고, 나아지는 배움과 전진이 동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케이드 게임을 즐긴 게이머라면 다들 한번씩 말해 봤을 ‘한 판만 더’를 세 번째 꼭지로 뽑았습니다. ‘한 판만 더’라고 하면 무언가 더 재미있을 거 같고, 더 강력해질 것 같은 기대가 들게 해야 한다는 것이죠.
마지막은 ‘다시 하게 만드는 것’. 게임의 엔딩을 봐도 다시 다른 방법과 방식으로 새롭게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다.
정말 많은 관중이, 시드 마이어의 매우 사소한 농담에도 열광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