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논평

'○○세대'로 훑은 시대의 초상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5. 4. 19. 00:18

'○○세대'로 훑은 시대의 초상

시사INLive | 고재열 기자 | 입력2015.03.27. 08:59

기사 내용

'1등 신문' <조선일보>는 달랐다. 다른 신문들이 IMF 세대, 삼포 세대, 잉여 세대 등 이름만 다르고 의미는 비슷한 단어로 회전문식 세대론을 펼칠 때 '달관 세대'라는 신상을 들고 나왔다. '덜 벌어도 덜 일하니까 행복하다'는 달관 세대는 일본 '사토리 세대(득도 세대)'를 베낀 것이었지만 반향은 컸다. 여세를 몰아 <조선일보>는 '달관 세대 안에 스티브 잡스가 있다'며 치켜세우기까지 했다. '아프니까 희망'이라는 것이다. 기사 반향의 방향은 부정적이었다. 비난이 쇄도했다. <조선일보>의 주장을 '현실에 순응하고 달관해야 한다'는 당위론의 설파로 받아들인 청년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세대론의 역사는 길다.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고대의 점토판 글귀에서도 나타나듯 앞선 세대가 이후 세대를 훈계하는 행위는 역사를 이어왔다. 대체로 다음 세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편향성이 드러나곤 했다.

세대는 다양한 방식으로 규정된다. 해방 전후 세대와 한국전쟁 전후 세대는 역사적 사건이 기준점이다. 1·2차 베이비붐 세대는 세대의 규모에 의해 분류되었고, 긴급조치 세대와 386세대는 정치 성향에 의해 구분지어졌다. X세대와 N세대는 소비 성향에 따라, IMF 세대, 88만원 세대, 잉여 세대, 삼포 세대 등은 경제 상황에 따라 범주화되었다.

↑ ⓒ한국전쟁 사진집 : 세대론의 역사는 길다. 한국전쟁 전후 세대.

ⓒ한국전쟁 사진집 세대론의 역사는 길다. 한국전쟁 전후 세대. 세대를 규정하는 방식은 그 세대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불가항력적인 역사의 파고를 넘어야 했던 해방 전후 세대와 한국전쟁 전후 세대는 보수성을 얘기할 때 주로 호출된다.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내려는 자신감보다 역사에 순응하고 적응하기 위한 생존욕이 앞선 것으로 평가받아서다.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인 산업화 세대가 바로 이 세대다.

이와 반대되는 세대가 긴급조치 세대와 386세대다. 역사에 맞서고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가려 했던 이 세대는 서구의 68혁명 세대와 비슷하다. 68혁명이라는, 기성 정치에 저항하는 큰 움직임이 인 후 기득권 세력에 맞서고 정치·사회·문화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 세대가 서구에 광범위하게 퍼지기 시작했고 심지어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386세대와의 차이라면, 68혁명 세대가 문화에 있어 보편주의적 양상을 띤 데 비해 386세대는 민족주의적 양상을 보인 점이라고나 할까.

386세대는 스스로 자기 세대를 규정한 대표 사례로도 꼽힌다. 이 세대에 속하는 한창민씨가 '30대, 8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60년대생인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이 용어를 만든 후 그 세대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스스로 만들고 퍼뜨린 말이기 때문에 세대 정체성도 강하고 유효기간도 길다. 이들이 40대가 되자 486세대라는 말로 바뀌었다.

세대가 규정되는 방식은 그 시대의 과제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준다. 대체로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 뒤에 민주화 등 정치적인 욕구가 나타나고, 그것이 어느 정도 충족된 후 문화적 소비 욕구가 뒤따른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베이비붐 세대다. 386세대 직전 세대인 1차 베이비붐 세대(1950년대 중·후반 출생)는 경제적 생존이 우선인 산업화 세대인 데 비해, 386세대 이후 태어난 2차 베이비붐 세대(1970년대 초반 출생)는 X세대라 불리며 문화적 소비를 주도했다.

↑ 1·2차 베이비붐 세대.

1·2차 베이비붐 세대.

↑ ⓒ연합뉴스 :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386세대.

ⓒ연합뉴스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386세대. 1차 베이비붐 세대와 2차 베이비붐 세대에 가장 먼저 주목한 쪽은 기업의 마케팅 담당자들과 광고업계였다. 대체로 1차 베이비붐 세대에 대해서는 소비의 양에 주목했고, 2차 베이비붐 세대에 대해서는 소비의 질에 주목했다. 이들을 겨냥한 마케팅과 광고가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특히 2차 베이비붐 세대를 겨냥한 광고가 정교했다. 일본 광고회사에서 만든 X세대 개념을 수입한 한국 기업들은 이 세대를 X세대·신세대·신인류 혹은 오렌지족이라 부르며 소비성을 부추겼다.

↑ 문화적 소비를 주도한 X세대.

문화적 소비를 주도한 X세대. X세대 이후 다양한 알파벳 세대론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N세대(네트워크 세대)'다. 아직 소셜 미디어가 등장하기도 전에 생긴 이 개념은 네트워크와 공유를 중시하는 세대로, '카피레프트' 개념이 이때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미국에서 수입한 'Y세대(밀레니엄 세대)'도 등장했다. 나이키나 리바이스와 같은 고전적 브랜드가 아니라 스스로 가치를 부여한 브랜드에 충성하는 이 세대를 겨냥해 관련 업계도 빠르게 대응했다.

어려운 경제 상황이 압도한 시대의 이름 짓기

그러나 소비 성향을 중심으로 세대를 구분하는 흐름은 2000년대 이후 힘을 잃는다. 대신 어려운 경제 상황을 상징하는 세대명이 두루 등장한다. 나라의 곳간이 거덜나 IMF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던 시대에 청년기를 보낸 IMF 세대로 시작해 평균 월급이 88만원밖에 되지 않는 비정규직을 상징하는 88만원 세대,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다는 의미의 삼포 세대,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사회제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주변부만 맴돈다는 뜻의 잉여 세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이 세대를 긍정적으로 읽으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밀레니엄 세대, 월드컵 세대, 촛불 세대, 광장 세대 등으로 호명하던 기억이 그렇다. 하지만 이런 말은 대부분 잊힌 채 우울한 말만 살아남았다. 어려운 경제 상황이 이 세대를 압도하는 절대 과제라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 경제 상황을 반영한 88만원 세대.

이처럼 세대론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일정 부분 의도가 개입되기도 한다. 문화평론가 김헌식씨는 '진보와 보수의 적대적 공생 관계에서 탄생하고 진화하는 개념이 세대론이다. 진보는 젊은 세대를 동정하고 변호하면서 세대론을 확장하고, 보수는 젊은 세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공고히 하는 쪽으로 세대론을 만들거나 증폭시킨다'라고 지적했다. <조선일보>의 달관 세대론이 환영받지 못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라는 얘기다.

세대론 자체가 지닌 함정도 있다. <88만원 세대>의 공저자인 칼럼니스트 박권일씨는 '세대론에 집중하다 보니 세대 내부의 양극화, 20대와 50대에서 쌍봉형으로 나타나는 불안정 노동과 같은 주요 문제들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됐다. 불안정 노동의 전면화라는 계급적 문제에 세대론의 '당의(糖衣)'를 입힌 꼴이다'라고 나중에 정정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세대론은 그 세대에 속한 사람들로부터는 오히려 부정되는 경우가 많다. 평균적인 X세대의 모습을 묘사하면 그 세대에 속한 사람들은 '나와 다른데?'라고 반문하는 식이다. 어찌 보면 X세대라는 이름을 만들어낸 이들은 당시의 젊은이들이 X세대처럼 보이기 위해 소비해주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고통받는 20대를 달관 세대로 부른 이들의 계산도 그리 다르지 않을 수 있고.

고재열 기자 /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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